본문 바로가기
〓주제별 설교〓/곽선희 목사 설교

문안과 당부(롬16:1~20)

by 【고동엽】 2024. 3. 19.
로마서 강해로 돌아가기 목차로 돌아가기

 

문안과 당부(롬16:1~20)

 

어느덧 로마서 강해 60회째입니다. 1년 반에 걸쳐서 로마서를 강해해 왔는데 이제 다음 한 시간만 더 강해하면 로마서를 마치게 됩니다. 지난 시간에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로마서 16장은 로마서의 부록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여기에는 많은 사람의 이름이 나오고, 저들에게 문안하는 이야기와 또 몇 가지 당부하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대단히 상황적이어서 그 당시의 형편을 잘 반영해주는 내용입니다.

그러나 자세히 읽어보세요. 오늘의 본문에는 무엇인가 우리 마음에 가만히 들려오는 음성이 있습니다. 여기에 보면 24명이나 되는 많은 사람의 이름이 나오는데, 이 사람들에 대해서 사도 바울은 하나 하나 무엇인가를 기억나는 대로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24명 외에 생각나지 않은 사람도 많을 것입니다. 이름으로 거론되지 않은 분들이 더 많을 것입니다. 이제 이런 뜻에서 생각해보십시다. 사도 바울의 마음속에 기억되는 사람, 또 달리 생각하면 주님의 마음속에 기억되는 사람, 그런 사람은 과연 어떤 사람이겠습니까? 본문에 보면 그 기억되는 이름 가운데서도 이름만 써놓고 아무 설명이 없는 사람도 있습니다.

'아무개에게 문안하라'-그것으로 끝났어요. 또 어떤 사람은 '그는 주안에서 수고를 많이 한 사람이다'-이렇게 설명을 붙었어요. 그런가하면 지난 시간에 말씀 드린대로 '어떻게 수고하고 어떻게 수고하고, 또 나를 위해서라면 자기 목이라도 내어놓았으리라'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 사람은 신실한 하나님의 일꾼이다. 그런고로 너희는 힘써 저를 도우라. 저가 하고자 하는 일은 마음대로 하도록 협력을 하라-이렇게 사도 바울이 마음놓고 추천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렇듯 바울의 마음속에 이렇게 기억되는 사람도 있고, 저렇게 기억되는 사람도 있어요. 저들은 다 좋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디모데후서 4장에서 바울이 임종이 가까웠을 때에 쓴 편지를 보면 그를 한평생 괴롭힌 사람의 이름도 있습니다. '아무개가 한평생 나를 괴롭혔느니라'-이런 말까지 나옵니다. 그래요. 지우기 어려울 만큼 계속 따라다니면서 괴롭힌, 잊어버리기 어려운 추억도 바울에게 있었던 것 같습니다. 여러분은 얼마나 많은 사람을 기억하고 있습니까? 어떻게 기억하고 있습니까? 얼마를 잃어버렸고, 얼마를 바로 해석했고, 얼마를 용서했습니까? 아직도 마음 가운데 어두운 그림자로 남은 사람이 있습니까? 생각해볼 문제입니다. 또한 내가 기억하는 많은 사람들, 그 고마운 분들에 대해서 얼마나 깊이 감사하고 있습니까? 그리고 자신으로 돌아가서 한번 생각해봅시다. 지금 나는 남에게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고 있는가,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랑들의 마음 속에 어떤 사람으로 추억거리가 되고 있나?-그것을 우리가 깊이 생각해야 하겠습니다.

다시 오늘의 성경으로 돌아가보십시오. "주 안에서 수고한 드루배나와 드루보사에게 문안하라(12)"-이 사람들은 쌍둥이인 것 같다고 학자들은 말을 합니다. '주 안에서 수고를 많이 한 사람들이다' -바울은 이렇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 얼마나 좋습니까? 더 긴 말이 필요 없어요. 주 안에서 수고 많이 한 이 두 사람을 기억하라, 그리고 문안하라고 바울은 말씀합니다. 그 다음에 바울은 또 한 사람의 이야기를 하는데 "사랑하는 버시에게 문안하라(12)"-이 사람은 여성인 것 같습니다. 사랑하는 버시-그리고 다른 말이 없어요. 모름지기 우리는 수고를 많이 한 사람으로, 또 사랑하는 자로 기억될 수 있는 그런 생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또한 그리스도께는 물론이거니와 특별히 우리를 위해 수고하고 있는 주의 종들에게 어떤 사람으로 기억될까, 하는 생각을 해야겠습니다. 직선적으로 말하면 교역자들에게, 또 우리 주변에 있는 장로님들이나 권사님들이나 교회를 위해서 수고하는 분들에게 나는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고 있는지 깊이 생각을 해야 합니다. 우리는 아주 고마운 분으로, 은혜에 충만한 분으로, 기도 많이 하는 분으로, 진실한 분으로, 수고 많이 하는 분으로 그렇게 기억되어지는 성도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 다음에 오늘의 본문에는 또하나의 중요한 인물이 있습니다. 그는 바로 루포의 어머니입니다. 이 어머니의 이름은 없습니다. 그저 루포의 어머니라고만 되어 있어요. 이름을 쓰지 않았어요. 왜 안 썼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아무개의 어머니, 바울은 이렇게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분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나름대로 생각을 합니다. 루포는 누구며 이 어머니라는 사람은 누굴까?-어쨌든 바울은 루포의 어머니의 대해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 어머니는 곧 내 어머니니라(13)"-그렇게 소중한 분이에요. 그런 분이 지금 로마에 있는데 그에게 문안하라고 바울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에 관해서는 갑론을박, 여러 가지 학설이 있습니다마는 그 많은 이야기를 이 시간에 다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전통적으로 이렇게들 생각합니다. 이에 대한 해석만 해드리겠습니다. 바울은 "주 안에서 택하심을 입은(13)"-이렇게 서두를 꺼냅니다. 주 안에서 택하심을 입은 루포와 그 어머니라고, 그 가정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택하심을 입었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 모두가 다 택하심을 입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런 넓은 의미의 선택교리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지금 여기서 말씀하는 '택했다'라고 하는 말은 특별한 의미를 가졌고, 좀 협소한 의미를 가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하는 것, 이것은 택함을 받은 것입니다. 많은 성도 가운데서도 직분을 가지고 봉사하는 것-장로로 봉사하는 것, 목사로 봉사하는 것, 권사로 봉사하는 것, 이런 것들이 다 특별히 택함을 받은 것입니다. 또 이런 직분만이 아닙니다. 보이지 않는 선택이 있습니다. 그것은 특별한 기회를 가지는 것입니다. 아무리 내가 일을 하고 싶어도 기회가 없으면 안되지 않습니까? 아무리 드리고 싶어도 이것을 받을 사람이 있고 바칠 때가 있어야지, 아무 때나 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것이 택함 받은 것이에요. 또 내게 지혜가 있어야 하고, 지식도 있어야 해요. 모든 일이 선택적인 것입니다.

선택의 반대는 인간의 의지입니다. 인간의 자유의지, 인간의 선택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선택이냐, 사람의 선택이냐?-이렇게 신학적으로 논란을 벌입니다. 어느 쪽 선택이냐 하는 것이지요. 심지어는 자유라는 말로 선택을 말하기도 합니다. freedom-하나님의 자유냐 사람의 자유냐, 어느 쪽이냐 하고요. 그런데 본문에서의 선택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선택이라고 해요. 그것은 곧 우리 인간 의지가 아닌 세계를 말하는 것이에요.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니예요.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것이에요. 내가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에요. 나는 아무 것도 몰랐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기회를 주셨고, 인도해주셨고, 마음도 주셨고, 믿음도 주셔서 이같은 일을 하게 하셨습니다. 바로 선택이에요. 이것은 아주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것이에요.

그러면 그 선택이 무엇이었느냐?-이것을 우리가 이제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오늘의 본문에 루포라는 이름이 나옵니다. 또 마가복음 1521절 보면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비안 구레네사람 시몬"-여기에도 루포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 루포가 그 루포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그래도 전통적으로 2천 년 동안 이 루포가 바로 구레네 시몬의 아들 루포라고 생각해왔습니다. , 그렇게 해서 이 사람들을 연결해놓으면 이제 네 사람이 소중해집니다. 구레네 시몬, 그 아내, 그리고 두 아들 알렉산더와 루포-그러니까 두 부부와 두 아들, 한 가정이 전적으로 선택된 것이에요. 전적으로 선택되었어요. 이렇게 되기까지는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에요. 누구도 이 일을 자기가 하려고 했던 게 아니에요. 자기 의지가 없었어요. 하나님께서 강권적으로 역사하신 것뿐이에요. 인간적으로 말하면 우연한 기회라고 하겠지요. 사람에게는 우연이 있어요. 그러나 하나님께는 우연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경륜이 있습니다. 그래, 이제 와서 생각하니 선택인 것입니다.

구레네 시몬-구레네라고 하는 곳은 아프리카 북방을 말합니다.

어쨌든 구레네 사람 시몬은 하나님 앞에 예배하기 위해서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갔다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로 올라가시는 것을 봅니다. 한 발짝 두 발짝 올라가시다가 쓰러지기도 하십니다. 그 때마다 군병들이 매질을 하는 것을 보고 그는 참을 수가 없었어요. 아마도 그는 이런 소문을 들었을 것입니다. '이 분은 메시야다. 이런 이적을 행하시고, 이런 귀한 말씀을 하신 분이다'-그렇게 예수님을 마음속으로 우러르고 추앙해왔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된 일인지 그 분이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것이에요. 가다가 쓰러질 때마다 군병들이 매질을 하는 것을 보고 너무도 마음이 안되었던지, 그는 그 앞에서 동정을 하게 됩니다. 성경에는 그럼 말이 없습니다. 그러나 없어도 충분히 알만합니다. 왜 이 사람이 십자가를 지게 되었나, 하고 그 옆에서 동정했겠지요. '여보시오, 때리지 마시오. 그렇게 안때려도 되지 않소? 저렇게 약하여 쓰러졌는데, 이제 곧 일어나서 매고 갈 텐데 왜 자꾸 매질을 하는 거요?'-이렇게 몇 마디 했을 거예요. 그러니까 절대 권한을 가진 로마군병이 '정 잔소리를 하려거든 네가 져라' 했을 거예요.

시몬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것을 보고 몇 마디 동정의 말을 했다가 결국은 그 바람에 억지로 십자가를 지게 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시몬이 이것을 거절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네가 져라 할 때에 '그걸 왜 내가 집니까? 그 끔찍한 십자가를 왜 내가 진다는 말이오?'-그렇게 말해버리면 그만이에요. 그렇다고 해서 맞아죽을 것도 아니예요. , 도망가면 되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는 그렇지 않았어요. '그래요. 내가 지겠소. 대신 죽지는 않지만 골고다 언덕까지는 건강한 내가 지리다'하고 십자가를 졌어요. 어쨌든 억지로 진 것이에요. 이것은 원해서 진 것은 아니예요. 그저 단순한 동정으로 진 거예요. 위대한 신앙이 있었던 것도 아니에요. 메시야적 신앙을 가지고 진 것이 아니예요. 그저 졌어요. 지고 가면서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오늘 일진이 사납군' 했는지도 몰라요. '어쩌다가 사형장에 끌려가는 이 사람의 십자가를 내가 대신 지게 되었나? 운명도 기구하다. 이번 유월절에는 일이 참 이상하게 되었군'하고 십자가를 진 것 같아요. 그러나 그는 이것을 거절하지 않았어요. 끝까지 십자가를 메고 갑니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그 다음에 시몬은 예수를 믿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사람이 된 다음에 그는 하루에도 몇 번씩 자기 어깨를 만져보았다고 합니다. '내가 이 어깨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다니, 어떻게 내가 그런 복을 타고 났나?'-이것, 감사한 일 아닙니까? 그는 이렇게 한평생 감사하고 전도하며 살다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얘기입니까?

여러분, 억지 십자가도 괜찮아요. 자원해서 지는 십자가가 좋지마는, 못질 바에는 억지로라도 괜찮아요. 가끔 그런 경우가 있다면서요? 새벽기도에 자원해서 잘 나올 수도 있지만, 어떤 때에는 누가 '같이 차를 타고 가자'해서 몇 사람이 함께 나온다고 합니다. 일이 이렇게 되면 자꾸 전화질을 해대니까 억지로 나올 수 밖에요. 안나올 수가 없답니다. 안나오면 두고두고 왜 안나왔느냐고, 어디 아프냐고 꼬치꼬치 물으니까 골치 아프대요. 그러니까 '에라, 모르겠다'하고 나옵니다. 분명히 교회 문 앞에 올 때까지는 억지예요. 그런데 막상 와서 예배를 드리고 갈 때에는 '새벽기도에 오기를 잘했다' 싶은가 봅니다. 또 그것만이 아니예요. 억지 헌금도 많아요. 여러분, 얼마나 순수한 헌금을 했습니까? 그 동기가 순수치 못할 때도 많아요. 여러 가지 그리 아름답지 못한 동기에 의해서 봉사할 때도 있어요. 주의 일을 할 때에 얼마나 선한 마음으로 해 보았습니까? 남의 일은 쉽게 비판합니다. 그러나 자신을 돌아보세요. 내가 얼마나 순수했나 하고요. 여러분, 몇 가지나 순수한 일을 했습니까? 해보면 이러저러한 불순한 동기가 많아요. 뭐 체면문제도 많고, 또 억지도 있어요. 그러나 참 좋은 것은, 후회가 없다는 것입니다. 다 지난 다음에 생각하면 잘했다 싶어요.

저는 이 말이 참 재미있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억지 춘향'-춘향이 열녀 되고 싶어 됐나요? 때리니까 맞아야 하고, 감옥에 처넣으니까 들어가야지, 자기가 어떻게 하겠어요? 자기가 선택한 일이 무엇이 있어요? 정말 억지 춘향이지요. 죄송하지만 여러분의 가정 생활에도 억지가 많아요. 가끔 제가 물어보는데, 이혼할 마음 가져본 사람은 손들어 보라니까 다 손을 듭디다. 그러니까 아이도 생각하고, 가문도 생각하고, 체면도 생각하고, 지금까지 살아온 것이 아깝고…… 그러다 보니 열녀 됐지, 되고 싶어서 됐나요? 그게 아니예요. 어쩌다보니 무사했어요. 그저 감사할 뿐이지요. 자기가 무엇을 비판하겠어요? 누구를 비판하겠다는 이야기예요? 그럴 자격 없어요. 다 억지가 많았어요.

어찌 생각하면 하나님께서 꽉 잡아서 인도하시니까 별수 없이 여기까지 온 것이지요. 그것을 우리가 잊어서는 안됩니다. 시몬만 그런 것이 아니예요. 우리 가운데서도 보면 예수를 안 믿을 사람인데 죽을병 걸려서 믿는 사람도 있고, 도저히 겸손할 수 없는 사람인데, 기고만장한 사람인데 사업에 한번 크게 실패하면서 겸손해진 사람이 있어요. 그래서 복음을 받아들였고, 그래서 예수 믿었어요. 다 그런 것 아니예요? 자기 스스로 하나님 앞에 나온 사람이 몇이나 됩니까?

그래서 저는 신학대학에서 앞으로 목사 될 사람들을 가르칠 때에 가끔 그런 설교를 합니다. 목사라는 직업이 좋아 보여서 목사 된 사람은 성공하지 못 한다고요. 그저 이 길이 아니면 나는 죽는다, 하나님께서 나로 하여금 억지로 이 길을 가게 하신다, 하나님께서 강한 능력으로 강하게 붙드시는 것을 의식하고 할 수 없이 이 길을 간다, 갈 수밖에 없다, 내게는 선택권이 없다-이렇게 생각하고, 공부하고, 목회 하는 사람이 성공한다는 말입니다. 기분나는 대로 집어치우면 어떻게 되겠어요? 그렇지 않아요?

여기서 우리가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억지 십자가-정말 원치 않은 것이에요. 그러나 지고나니 그 다음에는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어요. 내가 어떻게 그 십자가를 졌노, 하고요. 그 십자가를 진 것이 왜 베드로가 아니고 왜 요한이 아닙니까? 그 사람들은 얼마나 후회가 되겠어요? 엉뚱한 구레네 시몬이 지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그는 두고두고 하나님께 감사했더라 그 말입니다. 억지로 선한 일을 한 것도 그실 선한 일을 한 것이에요. 선한 일은 선한 일이에요. 그것이 자발적으로, 자원적으로 한 것 만큼 높은 가치의 것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그런대로 가치가 있는 것이에요. 억지로 십자가를 졌어요. 그러나 이것은 영광의 십자가였어요. 뒤늦게 그는 한평생을 감사했어요. 이 모든 것을 합쳐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주 안에서 택하심을 입은"-이것은 택함 받은 것이에요. 하나님의 특별하신 선택이에요. 그 아버지가 억지로 십자가를 진 것, 그래서 예수 믿고 그 아내를 인도한 것, 그리고 두 아들이 예수를 믿은 것이 그것입니다. 좀더 나아가서는 두 아들이 선교사고 되었어요. 알렉산더와 루퍼가 full time ministry로 한평생 복음을 전하는 그런 사람들이 되었어요. 이 네 사람이 훌륭한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고, 하나님의 일꾼들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선택이 아닙니까? 그래서 "주 안에서 선택함을 입은 루포"라고 사도 바울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 이제 우리가 한번 생각해야 합니다. 그 다음의 본문을 보니 "그 어머니는 곧 내 어머니니라"-바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어디서 이렇게 신세를 졌기에 어떤 관계에서 어머니라고 부르게 되었는지, 이 문제에 대해서는 알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한번 이런 맥락으로 연결해볼 수는 있습니다. 바울은 디모데와 디도를 가리켜서 당당하게 아들이라 부릅니다. 피 한방을 섞이지 않았어요. 그러나 바울은 디모데와 디도를 '내 사랑하는 아들 디모데' '내 사랑하는 아들 디도'-이렇게 부릅니다. 왜 그렇습니까? 복음으로써 저들이 나왔거든요. 내가 있어서 네가 있는 것이에요. 내 믿음이 있어서 네 믿음이 있는 것이에요.

내가 너를 낳았고, 내가 너를 키웠다, 너는 내 아들이다, 그리고 내 뒤를 따라 선교 사업을 하고 있다-이래서 바울은 저들을 믿음의 아들로 부르고 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바울은 어느 때인가 분명히 이 어머니의 신세를 졌어요. 어쩌면 이 어머니가 아니었더라면 낙심하고 말았을 것이에요. 쓰러지고 말았을는지도 몰라요. 바로 그런 순간에 이 어머니가 그를 도왔어요. 한평생 그를 위해서 기도를 했어요. 그의 믿음을 도왔고, 그의 용기를 도왔고, 그가 사명을 감당할 수 있도록 많은 후원을 해주었던 것 같아요. 영적으로, 신앙적으로, 기도로-그래서 사도 바울은 거침없이 '나의 어머니'라고 부릅니다.

여러분은 누구를 향해서 어머니라고 부를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 이 믿음을 가졌는데 '이만한 믿음을 가지고, 이만한 신앙생활을 하고, 이만한 인격을 가짐에 있어서 나를 나되게 하는 것은 이 어머니 때문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그 어머니가 누구입니까? 이것은 뿌리를 아는 것이에요. 저 혼자 잘난 척하지 마세요. 다 신세를 졌어요. 누군가의 도움이 있었어요. 그래서 오늘 내가 있는 것이에요. 바울은 그런 루포의 어머니를 자기의 어머니가로 부릅니다. 그만큼 사도 바울은 인간적인 사람입니다. 그만큼 겸손한 사람이에요. 자기 정체를 아는 사람이에요. 물론 그는 그리스도의 종이요,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마는, 다시 인간적으로 돌아가서 많은 사람을 입고 많은 위로를 받은 그 분이 누구인지를 알고 있어요. 그래서 거침없이 그는 '내 어머니'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깊이 생각해보세요. 가끔 저는 그런 질문을 받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는 데에 있어서 목사님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분이 누구입니까?" "목회하는 데에 있어서, 혹은 신학을 연구하는 데에 있어서 목사님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분이 누구입니까?" 그럴 때에 저는 나름대로 이 분 때문이고, 저 분 때문이라고 대답을 합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까 "누구 때문입니까?"라고 물으면 어떤 분은 "없어요"라고 대답합니다.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이다, 그거예요.

못된 사람이지요. 교만한 사람이에요. 그럴 수가 없는 것이에요. 무릇 누구나 신세를 지고, 은혜를 입고,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아니예요? humanitarian, 얼마나 인간적이고 아름다워요? 그렇다고 바울이 작아지는 것은 아니예요. 더 높아지는 것이지요.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이 하나 있어요. 이렇게만 생각할 것이 아니예요. 이것은 사도 바울이 믿음의 어머니를 말씀함입니다. 믿음의 어머니, 그 어머니는 곧 내 어머니라는 것이에요. , 우리가 예수 믿은지 십 년도 되고 이십 년도 됐어요. 나를 통해서 예수를 믿은 사람이 누구입니까? 나를 믿음의 어머니라고, 나를 믿음의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이 내 주변에 몇이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그리스도 앞에 가서 '나는 그 분 덕분에 예수를 믿었습니다. 그 분 덕분에 나의 오늘이 있습니다. 참으로 감사합니다. 한평생 그 분은 저에게 은인이었습니다'-그렇게 일컬음을 받는 바로 그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에요. 내 주변에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너무 슬픈 이야기입니다마는 그 반대로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예수를 안 믿어요. 잘 믿던 사람이 안나와요. 왜 안나오느냐고 물어보면 누구누구 때문에, 그 엉터리 교인 때문에 나는 안 믿기로 했다는 이런 이야기를 우리는 얼마든지 들어요. 이 얼마나 유감스러운 이야기입니까? 한번 생각해보세요. 우리는 좀더 생산적인 신앙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좀더 성숙한 신앙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적어도 내 주변에서 나로 인해서 믿고, 나로 인해서 위로 받고, 그래서 나를 향해서 믿음의 아버지라고 부르고, 나를 향해서 믿음의 어머니라고 담대하게 부를 수 있는, 그런 내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오늘의 본문에 당부의 말씀이 있습니다.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교훈을 거스려 분쟁을 일으키고 거치게 하는 자들을 살피고 저희에게서 떠나라(17)." 살피고 떠나라-바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것은 이단을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 교회 가운데, 우리 교인들 가운데 어딘가 모르게 근본적으로 뿌리가 다른, 동기가 다른, 목적이 다른 이질적 존재가 있다는 말이에요. "이같은 자들은 우리 주 그리스도를 섬기지 아니하고 다만 자기의 배만 섬기나니 공교하고 아첨하는 말로 순진한 자들의 마음을 미혹하느니라(18)"-재미있는 것은 '교만한 말로'한다는 것입니다. 말은 미끄럽게 하는데 내용이 달라요. 교리적으로 잘못됐고 거스르고 있어요. 결과적으로는 분쟁을 일으켜요. 목적이 달라요. 교회 안에서 순수한 신앙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이 교회 안에 있어요.

그런가 하면 자기 배만 위해요. 모든 목적이 자기자신에게 있어요. 자기 명예, 자기 이익, 자기 사업…… 이것만 생각을 해요. 교회도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의 영광도 생각하지 않고, 성도의 마음도 생각하지 않아요. "자기의 배만 섬기나니"-자기 배가 하나님이에요.

자기 배만 섬기는 철저한 이기주의의 교인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잘 살펴보고, 그 다음에는 그들을 떠나라, 사귀지 말라, 잊어버리라, 그들과 인연을 맺지 말라, 하고 사도 바울은 말씀합니다. 그것은 목회자적인 당연한 말입니다. 가만히 보면 친구를 잘못 사귀었다가 손해보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신앙생활 잘 해나가다가 어쩌다가 좋지 않은 잘못된 orientation을 가진 그런 신앙의 사람을 만났어요. 그래, 결국은 자기 신앙까지 크게 손해보는 분들을 우리가 많이 봅니다. 여러분, 그래서 교회에서 사람을 사귈 때에도 좋은 분들, 좋은 믿음의 친구들을 사귀어야 합니다. 교리적으로 다르고, 뿌리가 다르고, 목적이 다르고, 이기적이고,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이런 사람들을 그대로 묵인하며 따라가다가는 손해를 많이 볼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들을 자세히 살펴보고 그들에게서 떠나라 말씀합니다. 그렇게 해서 스스로 성결을 지켜나가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이 당부하는, 부탁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 순종함이 모든 사람에게 들리는지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를 인하여 기뻐하노니 너희가 선한 데 지혜롭고 악한 데 미련하기를 원하노라(19)"-선한 일에는 더 많은 정보를 얻어야겠어요. 많이 듣고, 보고 배워야겠어요. 그러나 악한 일에는 무식한 게 좋아요. 악한 일은 모르는 게 좋아요. 바울은 바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상하게도 악한 사람들이 더 지혜가 많은 것 같아요. 그러나 거기에 미혹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고 사도 바울은 계속해서 그의 편지 속에서 당부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그는 "우리 주 예수의 은혜가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20)"-이렇게 축복을 하면서 오늘이 본문을 마쳤습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