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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곽선희 목사 설교

돌아서게 하는 자(야고보서 5:19, 20)

by 【고동엽】 2024. 3.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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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서게 하는 자(야고보서 5:19, 20)

 

내 형제들아, 너희 중에 미혹하여 진리를 떠난 자를 누가 돌아서게 하면, 너희가 알 것은 죄인을 미혹한 길에서 돌아서게 하는 자가 그 영혼을 사망에서 구원하며 허다한 죄를 덮을 것이니라.

 

오늘의 본문말씀은 두 절밖에 안되지만 이것은 곧 야고보서의 결론이라 할 수 있습니다. 편지든 글이든 논문이든 언제나 끝이 중요합니다.

책을 읽을 때에도 먼저 결미를 본 뒤에 앞을 읽는 경우가 있습니다. 사람은 일생을 통하여 수많은 말을 하고 삽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말은 역시 죽기 전 맨 마지막에 하는 유언입니다. 모든 경험, 지식, 지혜를 실제와 종말이라고 하는 띠로 묶어서 나오는 말이 유언인 것입니다. 마지막 말이란 이렇듯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은 저마다 나 자신을 위해서 힘쓸 일이 많이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지금까지 해온 모든 말씀은 우리 개개인 한사람 한사람의 바른 신앙생활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야고보서는 공동체적인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편지는 당초부터 목회를 위하여 씌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야고보서의 결미인 오늘의 본문말씀 역시 한 개인이 아닌 우리 믿는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서는 어떻게 살아가야 되는가를 간결하게 제시해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잘살고 못살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사망으로부터의 구원, 영혼의 구원, 공동체적인 의식과 구원에 대한 교회의 책임, 우리 믿는 사람들의 책임에 대하여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본문말씀은 "내 형제들아(19)"하고 시작합니다. 야고보는 예루살렘 교회의 제 1대 감독이요 대 선배입니다. 그는 모든 사람을 목회서신의 대상으로 삼고 있습니다. 그는 지금 흩어져 있는 모든 유대사람들에게 편지를 쓰고 있는 것입니다. "내 형제들아"-이것은 우리가 지녀야 할 책임과 우리의 좌표를 잡아주는 것입니다. 야고보는 자신과 유대사람들과의 관계를 수직적이 아닌 관계, 즉 형제로 파악하고 있습니다. 바로 여기서부터 우리는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는 모두가 다같이 그리스도를 주()로 모시고, 하나님을 아버지로 섬기는 형제입니다. 영적으로 혹은 진리 안에서 생각해볼 때에 우리는 모두가 똑같은 형제입니다. 목사든 장로든 집사든, 여기에 함께 나와 있는 어느 누구 할 것 없이 모두 한 형제자매입니다. 모두가 수평관계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야고보는 "내 형제들아"라고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은 잇대어 말씀합니다. "내 형제들아, 너희 중에(19)"-'내 형제 중에', 이단사상에 끌려간 사람을 지칭하고자 한 것이 아닙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을 상대로 너희가 어떤 의무와 책임을 느껴야 한다는 것도 아닙니다. 이 말씀의 골자는 교회적입니다. "너희 중에""우리 믿는 사람들 가운데"라는 말씀입니다. 우리 믿는 사람이 모두 구원을 받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그렇지를 못합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열두 제자만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많지도 않은 예수님의 열두 제자 가운데 가룟 유다는 구원을 받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룟 유다에게 마음을 많이 쓰셨습니다. "너희 중에 나를 팔 자가 있다"라든지 "저는 나지 않았으면 좋을 뻔했다"라든지 "어쩌다가 이렇게 이런 자리, 이런 위치에 있게 되었느냐"라고 가룟 유다가 듣기에 심히 섭섭한 말씀도 많이 하셨습니다. 그런가하면 초대교회의 일곱 집사 가운데도 배신자가 하나 있었습니다. 이렇듯 많은 사람들 모두가 온전한 믿음을 지니면 좋겠는데 그렇지를 못합니다. 초대교회로부터 그렇습니다. 은혜가 충만한 예루살렘교회에도 배신자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있었습니다. 이런 일이 없었으면 좋았겠지만 안타깝게도 있었습니다. 유감스런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 형제 모두가 구원을 받는 것이 최상입니다. 그 이상 더 바랄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모두가 구원받지는 못합니다. 지금도 우리 가운데 방황하는 심령, 미아와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참으로 안타깝고 유감스런 일입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국민학교 선생님이 학생 40명을 앞에 놓고 가르친다면 이 40명 모두가 우등생이 될 수 있습니까? 시험을 봤을 때에 모두가 만점을 받을 수 있습니까? 그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모두가 만점을 받았다면 오히려 그것이 잘못된 것입니다. 아무리 잘 가르치고 수고한다고 해도 몇 명의 우등생과 몇 명의 낙제생을 제외한 모두는 중간에 있게 됩니다.

저는 30년 동안 신학대학에서 꾸준히 강의를 해오고 있습니다. 가르친 내용을 잘 이해했는지 정기적인 시험을 통해서 평가해봅니다. 시험지를 채점하다 보면 '내가 이렇게 못 가르쳤나'라는 자책감이 들 정도로 형편없이 답안이 있는가 하면 저의 생각대로 제가 가르친 것을 확실히 이해하고 써낸 답안도 있어 고마운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내가 이런 말도 했었나' 싶게 제 마음속에 있는 것까지 모두 이해하고 쓴 학생에게는 A플로스의 후한 점수를 줍니다. 이와는 달리 쓰기는 많이 썼는데 도통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 수 없게 제멋대로 써놓은 답안도 있습니다. 그리고는 그 학생도 미안한지 끝에다 "미안합니다"라고 써놓기도 합니다. 학생들도 천차만별입니다. 이런 답안지를 보면 '도대체 강의할 때에 무엇을 하기에 이렇게 쉬운 문제 하나도 제대로 못 쓰나'하는 괘씸한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런 것을 보면 무척 답답합니다. 죄송한 말씀입니다마는 우리 교인들도 모두 우등생은 아닙니다. 여러분 가운데는 A플러스의 우등생이 있는가하면 D,F의 낙제생도 있습니다. 또한 구제불능인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낙제 직전에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무사히 졸업을 할지 못할지 아슬아슬한 위치에 처한 사람도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볼 때면 가슴이 무척 아픕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도 바로 방황하는 형제에 대한 것입니다.

"너희 중에 미혹하여 진리를 떠난 자를 누가 돌아서게 하면(19)"- "너희 형제 가운데 방황하는 사람이 있다, 지금 갈림길에 선 형제가 있다, 이런 형제들을 잘 인도하면 그 영혼을 구원할 수 있다, 이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이냐"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형제 중에 있는 미아, 형제 중에 방황하는 사람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원문에 가깝게 고쳐보면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진리를 떠나 그릇된 길로 방황하고 있을 때"-진리를 떠나서 그릇된 길로 가면 방황하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방황하고 있는 사람이지만 우리의 형제자매입니다.

본문은 이어서 말씀합니다. "너희가 알 것은 죄인을 미혹한 길에서 돌아서게 하는 자(20)"-여기서 '미혹('迷惑)'이라는 말은 헬라어로 '플라네데이'인데, 명사나 형용사로 사용할 때는 '플라네세'가 됩니다.

'플라네세'는 영어로는 '원더(wander)'라고 표현됩니다. 이것은 방황하는, 길을 잃고 헤매는 것을 뜻합니다. 초점이 분명한 길을 가지 못하고 허우적거리고 있습니다. 확실하게 믿지를 못하고 몽롱하게 있습니다. 이렇듯 아직도 바른 진리를 찾지 못하고 헤매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 교인들 가운데도 아직 진리의 길에 똑바로 들어서지 못하고 방황하고 헤매는 분들이 있습니다. 명색의 세례교인이라서 교회에 나오기는 하지만 아직도 바른 신앙에 서지 못한 분들이 있습니다.

여러분과 함께 깊이 생각해야 할 문제가 있습니다. 야고보에게 신앙은 어떤 의미냐 하는 것입니다. 신앙은 자식이 아닙니다. 따라서 본문에서 말씀하는 '방황'은 지식적 방황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사물을 놓고 이것이 옳은지 저것이 옳은지 지식적으로 따져봅니다. 책을 보면서도, 심지어는 성경을 보면서도 지식적인 회의를 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을 가리켜 미혹에 빠졌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적어도 야고보는 지식적인 회의나 방황하는 자세를 불 신앙이라고 말씀하지는 않습니다.

철학적 지식을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추상적인 어떤 논리를 말하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야고보가 생각하는 신앙의 정의는 실제적 행동입니다. 그러므로 '방황'이란 머리 속에서 한번씩 회의를 느껴본다든가, 추상적 진리를 생각하면서 방황한다고 하는 의미가 아닙니다. '방황'이란 그 '생활'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생활 자체가 빗나가고, 생활의 초점이 빗나가고, 목적의식이 빗나가는 것을 말합니다. 따라서 본문에서 말씀하는 '미혹'은 추상적인 것이 아닌 실제적 상황을 말하는 것입니다. 실제적 현상을 말합니다.

본문에 "진리를 떠난 자"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여러분, 진리란 무엇입니까? 생각해볼 것입니다. 진리란 야고보에게는 곧 그리스도요,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리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진리를 사랑하고, 진리에 순종하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저희가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얻지 못함이니라(살후 2:10)" "누가 너희를 막아 진리를 순종치 않게 하더냐(5:7)." 예수님께서도 빌라도 앞에서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소리를 듣느니라(18:37)."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진리에 속한 자만이 진리의 소리를 듣습니다. 또한 진리에 속한 자는 그 진리를 끝까지 증거해야 합니다. 이것이 진리입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8:32)."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진리가 우리를 자유케 하고 진리의 영()인 성령이 우리를 진리로 인도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성령이 인도하는 길, 이것이 모두 진리입니다.

그런데 "진리를 떠난 자"라니, 왜 이 진리에서 떠나게 되었을까요? 야고보서 전체의 맥락에서 그것을 조명해가면서 설명하겠습니다. 첫 번째 이유는 욕심을 끌렸기 때문입니다. 예수는 믿었지만 욕심을 완전히 끊어버리지는 못했습니다. 그것이 문제입니다. 처음에는 잘 믿어나가다가도 중간에 잘못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바로 욕심 때문입니다. 오랜 시간 자주 드리는 기도가 모조리 '주십사' 하는 것뿐입니다.

제가 이스라엘에 갔을 때에 그들의 회당에 들어가 함께 예배드린 적이 있습니다. 그때 저는 그들의 기도하는 내용을 듣고 깨달은 바가 많았습니다. 3분 정도 기도하는 가운데 단 한마디도 'asking-요구함'이 없었습니다. '주십사'하는 말이 없었습니다. 이래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저래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말뿐이었습니다. 깨달음을 주셔서 감사하고, 이것저것 모두 감사하다는 감사와 찬송으로 기도가 이어졌습니다. 기도의 마지막에 이런 문구가 나왔습니다. "우리가 왜 이런 고난을 당해야 하는지 이성의 판단으로는 납득이 가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성의 판단을 누르고 하나님께 감사하고 영광을 돌립니다." 지금 당장은 납득이 가지 않지만 그래도 이것을 누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말하는 순간, 저는 가슴이 뜨끔해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우리는 기도를 많이 합니다. 그러나 그 기도는 정욕에 매여 있습니다.

전부 욕심에 매여 있습니다. 자기중심적인 정욕에 매여 헤어나지를 못합니다. "이것 주세요, 저것 주세요, 복을 주세요, 무엇 무엇을 주세요"라고 기도합니다. 처음에는 "알게 해주세요, 깨닫게 해주세요, 감사하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하다가 마지막에는 "전부 주세요"라고 기도합니다.

이것이 우리 기도의 문제점입니다. 사도 야고보는 이를 두고 미혹되었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무던히 애를 썼지마는 아직도 욕심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에, 자기를 십자가에 못박아버리지 못했기 때문에 어느 사이엔가 그만 미아가 되어버렸습니다. 신앙이 희미해지고 말았습니다. 이미 지은 죄에 대한 가책 때문에 온전히 은혜 속에 살수 없습니다. 아직도 매인 것이 많기 때문에 율법주의자가 되어 벌벌 떱니다. 이 율법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자유하지 못하며, 자유의식이 없으면 그 신앙생활에는 향상이 없습니다. 과거에 붙잡혀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모두 사했다고 하는 확실한 사죄의식이 있고, 율법이 아닌 오직 은혜 안에 있는 자기존재를 발견하기 전에는 그 신앙이 절대로 성장하지 못합니다. 잘 믿어보려고 하면 할수록 고민이 많아질 뿐입니다. 죄를 안 지으려고 벌벌 떨다가는 아무 일도 할 수가 없습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세상에 죄 아닌 것이 없습니다. 전부가 죄입니다. 쌀값 비싼데 살아남는 것도 죄요, 공기가 탁한데 숨을 쉬는 것도 죄입니다. 이렇듯 잘 믿어보려고는 하지만 아직 율법의 문제를 바로 해결하지 못하고, 신앙생활을 바로 하지 못하기 때문에 중간에 흔들리고 넘어지는 사람을 많이 봅니다.

진리를 떠나게 되는 두 번째 이유는 신앙을 추상화하기 때문입니다.

신앙을 지식으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많이 배우고 많이 알면 신앙생활도 잘할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지식은 지식이고, 신앙은 신앙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진리에 대한 많은 지식, 교리에 대한 많은 지식, 성경에 대한 많은 지식을 얻으려고 무진 노력을 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지식을 아무리 많이 쌓는다고 해도 그것만으로 믿음이 자라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신앙이 자랍니까? 순종해야 합니다. 깨달았으면 행해야 합니다. 이를테면 십일조만 보아도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에 대하여 회의를 가질 것이 아니요 더 많이 달라고 하지도 말 것이요, 오직 바칠 것입니다. 일단 바쳐보면 십일조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십일조에 대하여 책에서도 별로 배운 것이 없고, 설교를 통해서도 듣긴 들었지만 별다른 깨달음이 없었다가 십일조를 실제로 바쳐보고 비로소 하나님께서 왜 십일조를 바치라고 했는지 알게 되었다고 간증하는 분의 이야기를 들을 수가 있었습니다. 아주 중요한 간증입니다. 십일조를 바치고 나니 물질에 대한 욕심으로부터 자유할 수 있게 되고, 세상에 아까운 것이 없게 되고, 돈에 매이지 않게 되더랍니다. 그리고 전에는 뭔가 하나님께 대한 의무를 다하지 못한 것 같아서 늘 부끄러운 마음을 지니고 있었다고 합니다. 앞으로 돈을 벌면 어떻게 어떻게 하겠다고 하나님께 약속만 잔뜩 해놓았는데 만약 이대로 사업이 망한다면 그 약속을 하나도 지키지 못해서 하나님 앞에 얼굴을 들 수 없을 것만 같은 생각이 들더랍니다. 그런데 이제 십일조를 꼬박꼬박 바치고보니 마음이 그렇게 편할 수가 없더랍니다. 이제는 사업이 망한다 해도, 내가 세상을 끝낸다고 하더라도, 지금까지 바친 것은 바친 것이므로 그것은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다소나마 하나님과의 사이에 결산이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나를 자유롭고 편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대단한 깨달음입니다.

진리는 순종해야 합니다. 사랑하라고 하면 사랑하는 것입니다.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면 원수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참으라고 하면 참는 것입니다. 왜냐고 묻지 마십시오. 그냥 믿고 따를 것입니다. 적어도 야고보적인 신앙으로 볼 때에 진리는 추상적인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추상적 지식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것을 추상화해버리고 지식으로 바꾸어버릴 때에 그 신앙은 흔들리고 맙니다. 신앙적 교만만 남고 진실한 믿음은 없어집니다.

세 번째 이유는 내 힘으로 믿어보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믿음도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입니다. 그런데 내가 잘하고, 내가 정결하게 생각하고, 내 노력으로 잘 믿으려고 합니다. 그래서 결국은 넘어지고 일어나지 못합니다. 이렇듯 자기 의에 집착하는 사람의 신앙생활에는 반드시 넘어져서 다시는 일어서지 못하는 결과가 따르게 마련입니다.

그 다음의 이유는 자기 명예나 남의 칭찬, 자기 존재에 대해서 신경을 너무 많이 쓰기 때문입니다. 교회생활에서도 평민의식이 없기 때문에 자기를 스스로 귀족화시키면서 무기력한 상황에 빠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형제 관계에서 시험에 들고, 교인들 사이에서 시험에 들어 넘어지게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행함이 없기 때문에 넘어지는 것입니다. 지식으로만 선 신앙은 무기력합니다. 행함이 있을 때에 비로소 믿음이 능력으로 작동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듯 여러 가지 이유로 해서 신앙이 약해지고 진리에서 떠나게 되어 끝내 방황하는 미아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 주위에는 진리에서 떠나 방황하고 있는 형제들이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말씀은 우리에게 이 형제들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라는 깨달음을 주고 있습니다.

에스겔 320절은 말씀합니다. "네가 그를 깨우치지 않음이라. 그가 그 죄 중에서 죽으려니와 그 피 값은 내가 네 손에서 찾으리라"-파수꾼이 잠든다면 거기에 있는 많은 군사는 어떻게 되겠느냐 하고 파수꾼의 책임이 크나큼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먼저 깨달은 자는 아직 깨닫지 못한 자를 일깨워줄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위험한 상황에 처했을 때에 깨어 있는 자는 잠자는 자를 깨울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방황하는 사람을 그냥 내버려두지 말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듯 그를 인도할 의무와 책임을 지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너희가 그 연약한 자를 강하게 아니하며…… 잃어버린 자를 찾지 아니하고(34 : 4)" -연약한 자를 강하게 하고, 병든 자를 고치고, 잃어버린 자를 찾는 것은 먼저 믿고 깨달은 자의 책임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다시 한번 생각해봅시다. 우리는 먼저 깨달은 사람으로서의 책임감을 느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실족케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으나 실족케 하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도다(18:7)." 나 때문에 남을 실망시키고, 신앙을 저버리게 했습니다. 저 사람이 넘어진 것은 나 때문입니다. 내가 말 한마디 잘못한 것 때문에 저 사람이 넘어진 것입니다. 이 책임이 얼마나 큰 것입니까? 물론 넘어진 자에게도 책임은 있습니다만 넘어지게 만든 자의 책임이 중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맷돌을 그 목에 달리 우고 깊은 바다에 빠뜨리우는 것이 나으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얼마나 무서운 말씀입니까? 방황하는 형제를 인도할 책임을 느끼지 않는 사람은 차라리 죽임이 낫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사람이 넘어졌을 때에, 다른 사람이 방황할 때에는 그에 대한 책임을 느끼고 그를 바른 곳으로 인도하고자 하는 의무를 강렬하게 느껴야만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저들을 어떤 방법으로 인도해야 하는지에 대한 문제와 만나게 됩니다. 먼저, 본을 보여야 합니다. 그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제가 늘 드리는 말씀입니다마는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은 그저 늘 감사하고 웃고 찬송만 해도 50퍼센트는 구제하게 되는 것입니다. 안에서건 밖에서건 제발 얼굴 찌푸리고 다니지 마십시오. 늘 싱글벙글 웃고만 다녀도 전도가 되는 것입니다. 굳이 "예수 믿으세요"라고 말을 하지 않아도 됩니다. 오히려 늘상 찌푸린 얼굴로 다니면서 사람들에게 "예수 믿으세요"라고 전도한다면 역효과만 납니다. 내 신앙이 먼저 행복해야 합니다.

행복을 교회에서는 은혜라고 합니다만, 어쨌든 우리는 예수님으로 인하여 행복해야 합니다. "나는 예수님 때문에 행복합니다"라는 신앙의 본을 먼저 보인 연후에야 방황하는 형제를 인도할 수 있습니다.

둘째, 우리는 부지런히 진리를 가르쳐야 합니다. 때가 되었든 안되었든 너무 급한 반응을 우리는 원합니다. 성경은 "부지런히 가르치라"라고 분명히 말씀합니다. 꾸준하게 가르쳐나가다보면 기회가 와서 저들의 마음을 돌이킬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부지런히 지혜를 일깨우고 진리를 가르치고 깨우칠 것입니다. 잘 모르고 있으니까 가르치고 깨우쳐 주어야 합니다.

세째, 잘 참아야 합니다. 여러분, 너무 속단하지는 맙시다. 소망 없다고도 말하지 맙시다. 우리는 꾹 참을 것입니다. 교육이란 언제나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조금도 낙심하지 말고 항상 기다려주어야 합니다. 언제나 문을 활짝 열어놓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보여주면서 저들을 구제할 것입니다.

네째, 사랑으로 대할 것입니다. 사랑하기 위해서는 먼저 용서해야 합니다. 용서의 길을 열어놓아야만 합니다. 저들을 용서하고 저들을 위하여 기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이렇게 될 때에 회개할 힘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정죄해버리면 부끄러워 나올 수가 없게 됩니다. 이런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조금 잘못된 길로 가는 것 같아서 불러다가 깨우쳐주고 싶고 책망도 하고 싶지마는 만일 그렇게 하면 영영 부끄러워 교회에 못나오게 될까 하는 염려 때문에 기다리게 됩니다. 알지마는 모른척합니다. 왜입니까? 회개할 기회를 주고 자율적으로 자원적으로 나오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중요합니다. 회개에도 힘이 있어야 하고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문이 열려야만 회개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방황을 조심해야 합니다. 어쩌다가 잠시 방황할 수는 있겠지만 너무 멀리가면 돌아오기가 힘듭니다. 회개에는 왕복거리가 필요합니다. 너무 멀리가면 돌아오기가 부끄러워집니다. 나가더라도 조금만 나가야 돌아올 여지가 있는 것입니다. 너무 멀리 나가면 돌아올 용기마저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멀리 나가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 않도록 서먹서먹하지 않고 어색하지 않게 항상 문을 열어주어야 합니다. 이렇듯 회개의 기회를 주고, 회개의 용기를 주어야만 비로소 방황하던 사람이 구원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방황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바른 길을 찾게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본문은 말씀합니다. "죄인을 미혹한 길에서 돌아서게 하는 자가 그 영혼을 사망에서 구원하며(20)"-얼마나 중요한 말씀입니까? 미혹의 길에서 돌이키게 함은 지식을 주는 것이 아니요, 잘살게 해준다 함도 아닙니다. 천하보다도 귀중한 영혼을 구원한다는 말씀입니다. 생명을 구원한다는 말씀입니다. 지옥에 갈 사람을, 영원히 버려질 사람을 하늘나라에 갈 수 있도록 구원하는 것을 말씀함입니다. 생명을 구원하는 일, 얼마나 중요합니까?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대신하기 위하여,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무엇을 못참겠습니까? 우리는 좀더 참고, 좀더 희생하여 방황하는 형제들을 구원할 것입니다. 본문은 이렇게 될 때에 비로소 허다한 죄를 덮을 수 있게 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허다한 죄를 덮을 것이니라(20)"-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미혹한 길에서 돌아선 그 사람의 허물을 덮게 된다는 뜻이고, 또 하나는 이렇게 남을 구원한 사람은 그것으로 인하여 자기 허물도 덮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5:7)"-내가 남을 사랑하면 나도 사랑 받게 될 것이요, 내가 남을 용서하면 나도 용서받을 것이라고 말씀함입니다. 곁길로 가는 것을, 잘못된 길로 가는 것을 참고 인내하고 희생하면서 바른 길로 잘 인도해준다면 이로 인해서 나의 많은 허물도 덮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베드로전서 48절에서도 말씀합니다.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그렇습니다. 사랑은 모든 허물을 덮습니다. 사랑은 비판함이 없이 허물을 덮습니다. 이렇듯 아무 조건 없이 내가 남의 허물을 덮고 구원하게 될 때에 비로소 나의 허물도 덮이게 될 것입니다. 내가 남에게 긍휼을 베풂으로 나 또한 긍휼을 입게 될 것입니다.

이렇듯, 형제를 미혹한 길에서 돌아서게 함으로 얻는 결과는 엄청난 것입니다. 한 생명을 구원하고 동시에 모든 허물을 덮을 수 있는 은혜가 이에 따릅니다. 오늘의 본문말씀은 우리에게 이러한 가르침을 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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