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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가지 집(마태복음 7 : 21 - 29)

by 【고동엽】 2024. 3.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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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가지 집(마태복음 7 : 21 - 29)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연고요 나의 이 말을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 무리들이 그 가르치심에 놀래니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저희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이제 읽은 본문 말씀은 산상 보훈의 끝맺음으로 주신 결론적인 말씀이기에 더욱 중요하며 그 속에 새롭게 다짐되는 말씀이 있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이에 오늘 본문 말씀을 깊이 상고해 보면 참으로 엄청나게 중요한 신학적인 의미가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간혹 어떤 분들은 예수님에 대하여 질문하기를 단순히 훌륭한 한 인간이었느냐? 아니면 정말 하나님이었느냐고 묻습니다. 이러한 질문은 기독교 2천 년의 역사와 더불어 계속되어 온 문제입니다. 그러나 2천 여년이 지난 오늘에도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을 뿐만 아니라 예수가 하나님임을 믿는 사람을 향하여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 믿는 것이 무엇이냐고 묻게 되면, 그 대답은 예수를 구주로,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 것이라고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예수 믿는 사람이 갖는 의미는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데 있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이제 전도란 예수를 주로 고백하게 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는다"라는 것은 예수를 단순히 훌륭한 선생으로 추앙하여 믿는 것이 아니요, 예수님의 하나님 되심, 곧 그 신성(神性)을 믿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신앙 고백의 핵심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분들은 성경을 아무리 읽어보아도 예수님께서 "내가 하나님이다"라고 말씀하신 곳은 없지 않느냐며 어리석은 질문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렇지 않아요. 성경 말씀을 깊이 상고하며 읽어 가노라면 전부가 다 그런 뜻의 말씀임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마지막의 그 반응에도 보면 "권세 있는 자와 같다"는 말씀이 있는데 이 권세는 곧 하나님의 아들의 권세요 하나님 자신의 권세로, 권세 있게 말씀하셨다는 말씀입니다.

이제 오늘 본문 말씀에서도 보면 예수님의 그 신성이 잘 나타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매우 긴 말씀을 하신 후, 그 결론 부분에 이르러서는 "이 모든 말은 하나님의 권세로 말한 것이며, 그리고 이 말을 듣는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영접하는 것"이라는 의미로 결론을 맺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 말씀의 의도를 예수님의 마음으로 돌아가서 생각해 본다면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하신 말씀을 단순히 랍비들의 교훈이나 어떤 철학자의 논리와 지식처럼 이해되고 받아들여지는 것을 원치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훌륭한 교훈이나 지식의 수준에서 배우고, 참고되어지는 그런 정도의 반응을 주님께서는 원치 않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그 주시는 말씀에 대하여 우리가 어떤 반응을 보이기를 원하시느냐 할 때에, 오늘 본문 말씀은 거기에 대한 전적인 수락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그저 주시는 바의 말씀 그대로를 완전히 받아들여야 할 뿐, 그 앞에서는 예스(yes), (no)의 선택이나 가감이 있을 수가 없어요. 오로지 ", 옳은 말씀입니다"하고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길뿐입니다.

그리고 또한 그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하여 따라오기를 바라십니다. 그러니까 지금 들은 것, 우선 가만히 생각해 보고 나중에 대답하지요 하는 식의 이야기가 아니란 말입니다. 그런 것은 예수님의 말씀 앞에서는 용납되지를 않습니다. 지금, 여기에서 그대로 따라올 수 있는, 그러한 전적인 순종을 요구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전적으로 생명을 위탁해 주시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그리하여 지금까지 친히 들려 주신 그 말씀에 내 운명을 걸라는 것입니다. 이제는 이 말씀대로 순종하며 사는 것이요, 그렇지 못하면 죽는 것으로 알아 오직 이 말씀에다 자기의 마음과 자기의 인격, 그리고 자기 운명의 전폭을 위탁하기를 바라신다는 것이 예수님의 입장이라는 말입니다. 이와 같이 전적으로 위탁하고 순종하면 그 다음의 문제는 그 말씀의 능력이 그 성도의 마음과 인격을 주장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이제는 내가 말씀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나를 다스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내 기분, 내 의지, 내 지식, 내 생명을 그 말씀이 장악하여 다스릴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말씀 중에는 종말론적인 운명을 선포하는 굉장한 말씀이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즉 이 땅에서의 잘되고 못 되고의 문제만이 아니라 최후의 날, 하나님 앞에 서서의 하늘 나라에 들어가고 못 들어가고의 결정을 바로 여기에서 내리시겠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 말씀을 듣고 순종하면 구원에 이를 것이고 그와는 반대로 듣지 않고 순종치 않으면 멸망에 이른다는 말씀입니다. 이에 본문 22절 말씀에 보면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하는 기록이 있는데 이렇게 "주여 주여"를 부르짖을 그 날은 언제를 가리키는 것이겠습니까? 그것은 곧 이 세상의 마지막을 말함이며 또한 "나더러"라고 하신 ""가 예수님이시라면, 우리는 여기에서 예수님께서 분명히 하나님의 아들 되심과 하나님 되심, 그리고 심판주 되심에 대하여 추호의 의심도 있을 수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이 말씀을 부정하는 경우에는 다르겠지만 이 말씀을 받아들인다는 입장에서는 달리 해석할 여지가 없게 됩니다. 그리하여 이 세상 끝날에 주님께서 천국문에 서셔서 친히 주장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럴 때면 나를 향해 "주여 주여"하며 애원하겠지만 그러나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그리고 "내게서 떠나가라"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은 곧 내가 심판주로서 결정하겠다는 말씀이 아니겠습니까?

이는 실로 예수 그리스도의 자기 계시의 극치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직전 재판을 받으시는 장면을 보면 거기에 이 사람이 누구냐?"하는 것이 수수께끼로 등장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가야바는 묻기를 "네가 그리스도냐?"고 하는가 하면 빌라도는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고 합니다. 이 두 질문을 두고 가만히 생각해 보면 아주 묘한 데가 있습니다. 그것은 왜냐 하면 가야바는 계속 종교적으로 묻는 것에 비해 빌라도는 계속 정치적으로 묻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예수님의 죄목을 찾기 위해 이런 저런 말로 힐난하며 거짓 증인을 세우는 등 할 짓을 다해 보아도 시원한 뭐가 없을 때 이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16:64)고 하시게 됩니다. 이 말씀이 나오자 저들은 옳다구나 하고서는 "참람하다"는 것으로 끝을 내고 맙니다마는 인자가 구름을 타고 오리라! 는 그 이상의 장엄한 말씀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이 말씀은 그 권위나 본질상에 있어서 오늘 본문 말씀과 꼭 같은 말씀입니다. 이제 세상 끝날에는 많은 사람들이 나더러 주여 주여 하리라! 예수님께서는 이런 분명한 결론의 말씀을 통하여 비로소 자기의 주 되심과 하나님 되심을 계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확실한 자기 계시가 되신 그가 주 되시기 때문에 그의 말씀은 곧 생명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말씀의 의미를 간결하게 말하자면, 예수님께서는 마지막에 말씀하신 "듣고 행하는 자""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인 이 두 부류의 사람을 각각 나누어서 말씀하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누구나 이 듣는다고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사도 바울이 로마서 1017절에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으니라"고 역설하는 것도 구원이 말씀을 들음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말하고자 함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말씀을 듣는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모릅니다. 저는 어떤 기회에 농아학교 교장 선생님의 이야기를 듣고는 깜짝 놀란 적이 있습니다. 그 교장 선생님의 말씀에 의하면 말을 하는 농아들 중의 90%는 그 혀나 입, 신경 구조로 보아서는 말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귀머거리가 되어 듣지 못하기 때문에 벙어리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무리 좋은 혀나 완벽한 성대를 가졌다 하더라도 듣지 못하면 그것으로 벙어리가 되고 만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내게 주어진 많은 재질과 잠재적인 가능성이 엄청나게 있다 손치더라도 복음을 듣지 못한다면 그 모두는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어쨌든 폐일언하고 구원의 역사는 말씀을 들어야만 이루어진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면 이제 다음으로 생각할 것은 그 듣는 것만 가지고 되는 것이냐 하는 문제입니다. 따라서 이후에 필요로 하는 것은 들은 바에 대한 바른 응답입니다. 그 때문에 저는 바른 응답처럼 귀한 것이 없다는 생각을 합니다. 간혹 우리가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중에서도 한편에서 무슨 말을 했을 때 ", 그 말씀이 참 옳은 말씀입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을 했습니다"하고 이렇게 나오면 좋은데 개중에 "글쎄요"한다거나 아니면 "좀 생각해 보고 참고로 하지요"하는 정도로 반응을 보이게 되면 그 때엔 아주 기분이 상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왕이면 상대방의 뜻을 좋게 받아들이고 그대로 동의하는 것이 매우 좋은 일인 것입니다. 그런데 더러는 그렇게 말하는 것이 마치 자기의 인격을 떨어뜨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생각하는 그런 콤플렉스(complex<이상심리>)의 인간이 있어요. 그래서 언제나 꼭 절반쯤은 걸어 놓으려고 하는데 그것은 정말 결코 좋은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에 대한 응답을 우리가 어떻게 하느냐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바로 이를 위해 우리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고 원하시는 바의 응답은 다름 아닌 행동임을 밝히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시는 말씀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는 것입니다. 참된 응답이란 감정적인 반응이 아닌 행동 자체요.

그 행동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해질 때 구원을 얻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사실 우리가 일상 생활에 있어서도 일단 바른 지식이라고 받아들이게 될 때에는 그 순간에 행동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 옳다고 하는 결단과 더불어 거기에 뛰어들게 되는 것이란 말입니다. 아무리 믿음이 있는 것 같고 고상한 지식과 열정적인 정의감이 있다손치더라도 행동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한 예를 들면 어느 꼬마가 혼자 집에서 잠을 자는 동안 그 집에 불이 나게 되었는데 이 꼬마가 잠을 깨게 되어 불길이 치솟는 것을 보고는 계단을 따라 위로 위로 올라가 맨 꼭대기인 3층 옥상에까지 올라가게 된 것입니다. 이제 이 꼬마는 연기가 자욱한 그 곳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울고 있습니다. 그 때에 어린이를 본 사람들이 급히 담요를 준비하여 네 귀퉁이를 잡고 펼쳐 주면서 뛰어 내리라고 소리를 지르며 손짓을 했습니다. 그런데도 이 꼬마는 계속 울기만 할 뿐 뛰어 내리지를 않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조금 있다가 뒤늦게 달려온 어머니가 아무개야 하고 이름을 부르면서 엄마 여기 있으니 뛰어내리라고 하자 이 꼬마는 그 말을 듣자마자 "엄마"하면서 뛰어 내리더라는 것입니다. 이 어머니의 음성이 들리는 순간! 이제는 된 거에요, 이것이 참된 지식이요, 믿어지는 것이기에 그 순간 행동이 따르는 것이란 말입니다.

따라서 행동이 따르지 않는 지식은 불완전한 지식이요, 참된 진리가 아니며 그 응답 역시 바른 응답이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에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참 지식에는 전 인격, 전 운명, 곧 생명을 거는 그러한 응답이 따르기 마련이라는 것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묘한 것은 응답이 바로 된 것 같으면서도 되지 않은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라는 말씀을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듣는 것 자체를 즐기고 있다는 것인데 그것 가지고서는 구원받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오늘 본문 말씀 중에 보면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가서 너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직업적인 그런 선지자는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저들은 예수를 배워서 그것으로 예수를 가르쳐요. 물론 그것 가지고서는 구원에 이르지 못합니다. 조금 미안한 이야기입니다만 우리 나라에는 두 종류의 무당이 있다고 합니다. 그 중 하나는 우리가 소위 말하는 내림 무당이라고 하는 강신(降神)무당이요, 다른 하나는 그저 배워서 하는 습득 무당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 무당 중 90%가 배워서 하는 습득 무당이고 불과 나머지 10%만이 신이 내려서 한다는 강신 무당이라고 합니다. 이제 왜 이런 말씀을 드리느냐 하면 사실 우리의 입장에서도 그러고 보면 교인이나 목사, 교사, 선지사나 할 것 없이 두 가지 중 어느 하나에 속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하나는 습득 목사요, 하나는 강신 목사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습득 목사는 그저 신학교에 가서 배운 것으로, 그리고 이책 저책에서 본 것을 엮어 가며 전하는 것입니다. 물론 그것을 듣고도 구원을 받을 수가 있고 완전치는 못하지만 어느 정도 성공을 할 수도 있어요. 이는 능력은 없어도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은 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경우를 두고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을 하며 가르쳤다는 것인데 예수님께는 이것이 전혀 통하지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는 등, 많은 놀라운 권능도 행하였지만 그것도 통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직업적인 선지자들과 구원과는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만일 저들이 말하기를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가르치고 병을 고쳤는데 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느냐고 계속 우긴다면 이제 하나님께서는 무엇이라고 말씀하실 것 같습니까? 아마도 저의 생각에는 이렇게 말씀하실 것 같습니다. "그래, 내 이름으로 병을 고쳤으면 내가 고친 것이지 네가 고친 것이냐? 그리고 너는 내 이름 가지고 다니면서 많은 영광을 받으며 잘 살지 않았느냐?"고 말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너하고 나하고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노라! 지금까지 주의 이름으로 가르치며, 귀신을 쫓아내고 많은 권능을 행해 왔지만, 그러나 그것 가지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은 아니더란 말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참으로 깊이 생각하여야 합니다. 그러면 과연 말씀을 듣고 행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겠습니까? 여기에는 매우 깊은 뜻이 있습니다. 이제 고린도전서 927절 말씀에 보면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다"는 바울 사도의 고백이 있습니다. 내가 남에게 복음을 전파한 다음에 나는 오히려 버림이 될까 두렵다!는 것입니다. 또한 사도행전 312절에서 사도 베드로는 앉은뱅이를 걷게 한 자신들을 사람들이 놀란 모습으로 바라볼 때에 "이스라엘 사람들아 왜 기이히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고 하고 있습니다. 예수의 이름이 고친 것이지 우리가, 내가 고친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나는 오직 예수의 이름을 불렀을 뿐이예요. 그러므로 우리를 쳐다볼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적을 행하든, 무엇을 행하든 우리의 마음은 예수의 이름에 있어야 하는 것이지 기적을 행했다고 그 사람을 바라볼 것이 아니요, 더더구나 그를 따라갈 것도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우리는 주님만을 바라보고 그 분만을 따르는데 의미가 있고 거기에 구원이 있음을 알아야 하고 비록 내가 불치의 병을 고쳤다 하더라도 그 역사로 인해 내가 구원받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나아가 자기 구원의 문제는 철두철미하게 내가 말씀을 듣고, 내가 행하는 것에만 있다는 이 명확한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말씀에 이어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짓는 지혜로운 자와 같고, 듣고도 행치 않는 자는 모래 위에 짓는 어리석은 자와 같음을 비유로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 말씀에서 "지혜로운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짓는다"고 할 때에 "반석"이라는 말씀에 대해서는 해석학적으로 약간의 문제가 있다고도 말합니다. 그래서 이 반석이라는 말씀이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자와 같은 지혜를 말씀하시는 것인지 아니면 예수님 자신을 가리키시는 것인지에 대하여 이견(異見)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여러 곳을 살펴보면 이 반석이라는 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로 해석하는 것이 옳다는 결론을 내리게 됩니다. 이를 위해 특별히 디모데 후서 219절 말씀을 보면 "하나님의 견고한터"라는 표현으로 예수님을 상징하고 있고 또한 고린도 전서 311절에서도 기록하기를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반석 위에 집을 짓는다고 하시는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그대로 믿어, 그분께 생명을 위탁하고 운명을 맡기며 그 말씀대로 순종한다는 뜻인 것입니다.

그러나 모래 위에다 집을 짓는다는 것은 기초가 없는 것이며 가변적이요, 이는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누구나 자기의 의와 자기에게 속한 그 모든 것은 모래가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이제 "집을 짓는다"는 것은 무엇을 가리키는 말씀이겠습니까? 그것은 순종입니다. 이는 곧 믿음의 근거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무엇인가를 믿고 삽니다. 그런데 세상에서 참으로 불쌍한 것은 못 믿을 것은 믿는 사람! 믿어서는 안될 것을 믿으면서 그 위에 인격을 세우면 사는 사람입니다. 생각해 보면 그것처럼 허무하고 잘못된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특별히 고층 건물일수록 기초가 깊고 튼튼해야 한다는 사실은 더 이상 설명할 필요가 없는 상식의 문제입니다. 그러면서도 이 기초는 보이지를 않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분명하게 알아야 할 것은 그 기초가 집을 보호한다는 원리입니다. 집의 외형이 아무리 훌륭하고 아름답다 하더라도 그 기초가 든든하지 못하면 어느 순간에 그냥 무너지고 마는 것입니다. 이미 오래 전의 이야기이지만 우리의 귀에 아직도 생생하게 남아 있는 와우 아파트 사건도 그 기초에 문제가 있었던 것이 아닙니까? 이와 같이 기초가 매우 중요하고 그 기초가 그 집을 보호한다는 말씀입니다. 나아가 이 말씀은 우리가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그 결과는 말씀이 나를 보호한다는 말입니다. 이제 내가 말씀에 나의 생명을 위탁하면 이후에는 그 말씀이 나의 생명을 지켜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이를 위해 예수님께서는 비유로 말씀하시면서도 매우 극적으로 실감 있는 표현을 하고 계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에 말씀하시기를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매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 즉 말하자면 비바람에 홍수가 나는 그때에 가면 결과가 드러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비가 내리고 홍수가 나기 전에는 모래 위에 지은 집도 그런대로 그럴 듯하게 보이며 비슷한 자태로 놓여 있을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러고 보면 세상살이에 있어서도 예수 믿는 사람이나 믿지 않는 사람이나 특별히 이마에 이름을 써붙이기라도 하듯이 크게 차이가 있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장례식이나 엄청난 재난을 당한, 그러한 결정적인 시간에 가서는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의 모습이 전혀 다르게 나타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니까 평안할 때에는 기초가 없는 집도 그럴듯하게 서 있을 수가 있고 쉽게 지을 수도 있지만, 그런 반면에 비가 심하게 내리는 날에는 쉽게 무너지게 마련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반석의 위력은 그와는 정반대입니다. 그리하여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는 결정적인 순간에도 오히려 늠름한 모습으로 반석 위에 세운 집을 그대로 우뚝 세워 보존케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우리가 생각할 것은 지혜로운 자는 그 기초 선택을 바르게 한다는 것입니다. 결코 보이지 않는 기초! 그러나 이 기초를 바르게 하여 내 믿음의 근거를 분명히 하여야 할 것이란 말입니다. 진정 우리의 기초는 무엇에 근거하고 있는 것이겠습니까? 전적으로 그리스도의 말씀에 터한 것입니까? 아니면 나 자신과 인간 철학의 이념에 근거를 두고 있는 것입니까? 분명히 기억할 것은 인간 철학의 헛된 이념에 근거한 인생 설정은 어쩌다 한번 비바람이 몰아치고 창수가 나면 그것으로 여지없이 다 무너지고 만다는 사실입니다. 아무리 웅장하고 화려했던 것도 그 앞에서는 더 이상 아무 것도 아니란 말입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이것이 좋은 것이다"하고서 일단 기초를 선택하였으면 조금 불편하고 괴로와도 반드시 반석인 그 위에다가 세워야 하는 것입니다. 만약 그것이 높은 곳에 있다면 거기까지 올라가서 세워야 하고, 깊은 곳에 있다면 반석이 나올 때까지 땅을 깊이 파고서라도 그 위에다 세워야 할 것이란 말입니다. 이것이 곧 집을 짓는 일에 있어서의 가장 기본적인 원리인 것입니다.

이제 기초를 선택하였으면 그 위에 나의 인격을 세워야 합니다. 든든한 말씀의 반석 위에 나의 지식도 세우고, 철학도 세우며, 나의 가정, 나의 사업도 세워야만 합니다. 그리하여 나의 전 인격이 말씀에 위탁되어질 때 거기에는 무너짐이 없는 견고함이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반석 위에 지은 견고함은 주님이 재림하시기까지, 주의 나라에 들어갈 때까지 결코 흔들리거나 무너짐이 없는 그대로 하늘 나라에 이르게 할 것입니다. 그러나 모래 위에 지은 집은 결정적인 어느 시간에 다 무너지고 마는 것이란 말입니다. 그 때문에 주님께서는 마태 복음 5장에서 7장까지의 긴 말씀을 하신 후에 이 말씀은 곧 생명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이 말씀에 너의 운명을 걸라는 뜻으로 이 반석 위에 지은 집을 설명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제 우리는 이 말씀의 반석 위에 나의 생 전폭을 맡김으로 주님 앞에 서는 그날까지 결코 무너짐이 없는 견고한 믿음의 생활을 할 수 있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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