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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중 이탈자(사도행전 13:13-16)

by 【고동엽】 2024. 3.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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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중 이탈자(사도행전 13:13-16)

바울과 및 동행하는 사람들이 바보에서 배타고 밤빌리아에 있는 버가에 이르니 요한은 저희에게서 떠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고 저희는 버가로부터 지나 비시디아 안디옥에 이르러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앉으니라 율법과 선지자들의 글을 읽은 후에 회당장들이 사람을 보내어 물어 가로되 형제들아 만일 백성을 권할 말이 있거든 말하라 하니 바울이 일어나 손짓하며 말하되 이스라엘사람들과 및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아 들으라


분문에는 마가 요한이라고 하는 한 사람의 이름이 나타납니다. 오늘은 이 사람에 대하여 생각하고자 합니다. 특별히 그가 바울 일행으로 따라나선 전도여행 도중에 일행을 떠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고 합니다. '요한은 저희에게서 떠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고(13절)'--이렇게 도중 이탈자 된 마가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보고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마가 요한이라고 하는 사람은 이름이 둘입니다. 오늘의 본문이나 지난 시간에 본 말씀에는 '요한'이라고 되어 있는데, 요한이나 마가나 결국은 한 사람을 지칭하는 것입니다. 요한이라는 이름은 히브리말에서 그대로 발음을 따 옮긴 것입니다. 요한 곧 요하네스라고 하면 영어의 'gracious'곧 은혜롭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요새도 보면 '은혜'라는 이름이 많은데, 좋은 이름이지요. 그런데 마가 곧 라틴어로 마르코스라고 하는 이름은 요한이라고 하는 말과 정반대로 강한 뜻을 가집니다. 영어로 말하면 'large hammer' 곧 큰 망치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히브리적으로는 요한이요 로마사람들 사이에서 그 문화권에 살 때에는 마가 곧 마르코스라고 하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오늘의 본문에는 요한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나 이것은 분명하게 마가 요한을 가리킵니다.
이 마가에 대해서는 성경에서 잊을 수 없는 중요한 역사적 사실을 배경으로 가지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 초대교회의 중심이 바로 이 마가의 다락방이었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그 다락방은 있습니다. 지금은 복잡하게 아랍사람들의 생활권에 쌓여 있습니다마는 그 건물 자체로 보면 이천 년 전의 건물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아주 화려한 건물입니다. 다락방이라고 하지만 이층이라는 뜻이지 결코 우리가 생각하는 원두막 같은 것은 아닙니다. 지금 봐도 훌륭한 석조건물입니다. 규모가 작을 뿐이지 대단히 훌륭하게 잘 지은 건물인지라 지금도 보존되어 있습니다. 그 정도라면 120명이 충분히 앉을 수 있었겠다. 싶을 정도로 꽤 넓은, 돌로 된 이층집입니다. 그런데 마가의 다락방, 이것은 마가의 어머니의 소유입니다. 그는 예수님 생전에 예수님을 사랑했고 예수님과 그 일행의 소용(所用)을 담당할 만큼 정성을 다했던 여 제자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 집에서 성만찬 예식을 행하셨습니다. 그 뒤 120문도가 기도해서 오순절에 성령이 임한 현장이요 그 집입니다.
또한 초대교회, 그러니까 예수님을 중심해서 이루어진, 혹은 베드로를 중심해서 이루어진 첫 번째 교회, 그 예배 처소가 마가의 다락방이었습니다. 이렇게 저렇게 그 장소적 의미도 참 중요하지만 그 집은 그 때부터 소중하게 지켜졌으며 전설에는 사도들이 늘 그 집에 모여 기도하기를 좋아했다 합니다. 중요한 일은 그 집에 모여서 의논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랬을만합니다. 그 장소를 얼마나 소중히 여겼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친히 떡을 떼어주시던 곳이자 성령이 임했던 바로 그 현장이니 소중히 여긴 것은 당연하다 하겠습니다. 그 건물 주인인 마가의 어머니도 초대교회에 있어서는 대단히 중요한 인물의 하나였다는 것을 미루어 알 수 있습니다. 이제 여기서 우리가 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마가는 그때로는 아직 좀 어렸습니다. 그같이 큰 사건이 있었을 때에 마가는 좀 어린 축이었습니다. 결국 어머니의 믿음과 초대교회의 그 분위기 속에서 자라난 믿음의 아들이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마가의 믿음은 분위기에서 나온 믿음입니다. 체험적이고, 독립적이고, 스스로 결단을 하고…… 그런 믿음이 아닙니다. 어머니의 믿음을 따라 어릴 때부터 손목잡고 같이 앉아 있고, 함께 따라다니면서 이런 모임 저런 모임에 동참했을 뿐입니다. 이런 분위기에서 얻은 믿음이어선지 그의 믿음은 아무래도 좀 나약했던 게 아닌가 합니다.
여기에 전해지는 하나의 비사(秘事)가 있습니다. 마가복음 14장 51, 52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겟세마네 동산과 마가의 다락방은 그 거리가 과히 멀지 않습니다. 걸어가도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습니다. 한 15분이나 20분쯤 걸어가면 될 가까운 거리입니다. 마가의 다락방은 좀 높은 데에 있고 겟세마네 동산은 좀 낮은 데에 있습니다.
어쨌든 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 것을 마가는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체포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청년 마가는 깜짝 놀랐어요. '예수님께서 체포되시다니……' 그리고는 자기가 어떻게 해결할 것도 아니요 예수님과 함께 고난을 당할 것도 아니지만 좌우간 어떻게 되나 보자 하고 부리나케 겟세마네 동산으로 달려갔던 것 같습니다. 성경에 보면, 벗은 몸에 베 홑이불을 두르고 갔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덮고 자던 홑이불째 그대로 몸에 두르고 따라갔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체포되시는 그 컴컴한 데서 누가 이 마가를 붙들었던가 봅니다. 성경은 이 장면을 부끄럽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베 홑이불을 버리고 벗은 몸으로 도망하니라(막 14:52)'--그 사람이 딱 누구라고 하지는 않았지만, 전래적으로 그것은 마가가 자기 자신을 두고 쓴 것 같다 합니다. 그래서 이름을 쓰지 않고 한 청년이 이렇게 부끄러운 짓을 했다 하고 익명으로 기록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렇게 인정하고 있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 예수님께서 어떻게 되셨는가 보러 갔다가 도망간 그 청년이 이제 세월이 흘러 장성했습니다. 그는 바나바의 생질입니다.
바나바가 초대교회에서 중요한 인물로 일할 때에 그도 따라다니면서 참여하게 됩니다. 특별히 골로새서 4장 10절에는 '바나바의 생질 마가' 라고 분명히 나타나 있습니다. 그리고 바나바가 안디옥으로 전도하러 간다 하니까 따라갔습니다. 거기서 사도 바울과 바나바를 따로 세워서 선교사로 파송한다 하니까 이 사람까지 수행했습니다. 수행자가 됩니다.
조수가 된 것입니다. 그 때에 마가는 이렇게 말했겠지요. '필요하면 저를 부르세요. 제가 젊었으니까 도울 일이 있다면 힘껏 돕겠습니다.' 그래서 수종자가 되고 수행원이 되어서 바나바와 바울을 따랐다 하는 것입니다. 여기까지는 좋았습니다. 그런데 이제부터 문제가 있습니다. 구브로라고 하는 섬을 가서 살라미에서 복음을 전할 때에, 거기서 굉장한 사건들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고 마가는 감격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따르지요, 특별히 바보에 갔을 때에는 그곳의 총독이 따르지요, 이적이 나타나지요,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사도 바울의 말씀을 듣고 회개하지요…… 그는 크게 감격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를 계속 따르리라 마음먹었습니다.
그러나 이상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전도 일행은 구브로에서 다시 버가로 갔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그곳의 지형을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살라미와 바보는 섬이요, 섬에 있는 두 도시입니다. 버가라고 하는 곳은 밤빌리아라고 하는 지방의 육지입니다. 일행은 배를 타고 다시 육지로 들어온 것입니다. 육지에 도착을 해서 버가에서 복음을 전하게 됩니다. 그리고 다시 여기를 떠나서 북쪽 비시디아 안디옥으로 올라가려 합니다. 이 때에 마가는 나 안가겠다 하고 여기서 도중하차를 합니다.
예루살렘으로 가버립니다. 여러분, 상황이 어떠했겠습니까? 마가가 이렇게 도중에 빠지려고 할 때에 나머지 일행이 순순이 '그래, 가거라' 했을 리가 없습니다. 더구나 바울같은 분이 그랬을 리가 없지요. 출발을 했으면 끝까지 따라야지, 어떤 여행인데 도중하차를 하느냐 했겠지요. 어쨌든 마가는 돌아갑니다. 그러나 전도여행은 계속됩니다. 마가가 갔다고 해서, 수종자가 하나 없다고 해서 전도여행이 중단될 수는 없습니다. 전도 여행은 여전히 소아시아 일원을 두루 돌면서 계속됩니다.
그 과정에 많은 핍박도 있었고, 매맞는 일도 있었고, 옥에 갇히는 일도 있었고, 이적도 있었습니다. 이런저런 사건들을 다 겪고 나서 전도 일행은 그 모든 성과를 가지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보고를 합니다.
이제 그 때의 상황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보고하는 그 장소에 마가도 있었을 것입니다. 마가가 무슨 생각을 했겠습니까? 나도 끝까지 따라다녔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얼마나 신났을까, 이 시간에 나도 함께 앉아서 자랑도 하고… 참 영광스러웠을 텐데 나는 아깝게도 그만 도중하차를 해버렸구나, 하고 후회했을 것입니다. 아주 섭섭했을 것입니다. 스스로에 대하여 매우 분했을 것입니다. 얼마나 안타까웠겠습니까? 좋은 구경도 할 수 있었고, 스스로도 큰 믿음을 얻을 수 있었고, 큰 역사에 동참한 영광과 기쁨을 누릴 수 있었을 것인데 말입니다.
그런데 얼마 있다가 전도일행은 다시 2차 전도여행을 떠나려고 합니다. 그럴 때에 마가가 나섭니다. '다시 가겠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아주 단호하게 거절합니다. '안돼!' 바나바는 마가를 데려가자고 합니다. 바나바는 성격상으로 좀 유한 분입니다. '데려갑시다.' '안됩니다.' 바울은 아주 단호합니다. 결국은 못 데리고 갑니다. 여기서 선교여행 하는 일행이 두 패로 갈라집니다. 바울은 실라와 함께 하고, 바나바는 마가와 함께 하게 됩니다. 이것이 선교사상 첫 번째의 분열입니다.
그 분열이 이렇게 이루어집니다. 마가 때문입니다.
잠깐 말씀을 멈추고 생각해봅시다. 마가는 그 때에 왜 도중에 돌아갔을까요? 이것은 큰 수수께끼입니다. 이에 대하여 많은 사람들이 생각을 합니다. 있는 지혜를 다하여 성경에 있는 내용들을 다 참고하면서 '마가가 왜 돌아갔을까'하고 생각을 해봅니다. 많은 사람들과 많은 학자들, 혹은 옛날의 교부들이 말하는 것 가운데서 제일 많이 이야기하는 것이 있습니다. 마가의 입장에서 볼 때에는 자기 삼촌 바나바가 바울보다 당연 위라고 생각했어요. 그렇지 않겠습니까? 바나바는 예루살렘교회에서 중요한 인물입니다. 사울이라는 사람은 예수 믿는 사람을 핍박하다가 지금 회개해서 전도자가 되었다고 하지만, 마가의 입장에서 볼 때에는 그는 바나바와 상대가 안됩니다. 관록으로 봐도 그렇고, 경륜으로 봐도 그렇습니다.
뿐만 아니라 사울이라는 사람이 별로 사람들에게 인정을 못 받아서 고향으로 내려가 있는 것을 바나바가 다소까지 가서 데려온 것이 아닙니까? 그리고 많은 사람들에게 '이 사람은 믿을만한 사람이라'하고 추천하고 천거해서 지금 데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전도여행을 할 때에는 당연히 바나바가 지도자입니다. 오히려 바울은 second, 그 다음 사람입니다. 그런데 막상 전도여행을 시작하고 보니 그게 아닙니다. 설교하는 이는 바울이거든요. 권세 있게 설교하는 것이 바울입니다. 모든 사람의 인기가 그쪽으로 모이고 모든 것이 바울을 통해서 역사 합니다.
능력을 나타내는 것도 바울이요, 이적을 나타내는 것도 바울이요, 귀신을 쫓아내는 것도 바울입니다. 마가는 처음에 자기 삼촌이 아주 훌륭한 .지도자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점점 높아지고 바나바는 점점 형편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나바는 덕이 있는 사람입니다. 스스로는 뒤로 물러나서 마치 세례 요한처럼 '그는 흥하고 나는 쇠하여야겠다'하는 식으로 바울을 자꾸 내세웁니다. 바울을 높입니다. 바울을 통해서 역사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보고, 바울을 계속 내세우고 자기는 뒤로 물러섭니다. 옆에서 보고 있는 마가는 이것이 불쾌한 것입니다.
아주 기분 나빴던 것입니다. 이것을 참지 못한 것입니다.
성경에 없는 이야기를 한번 상상해봅시다. 마가가 그랬겠지요. '삼촌, 삼촌이 지도자인데 왜 뒤로 물러섭니까? 삼촌이 당당한 지도자시고, 저분은 삼촌이 데리고 다니는 사람이 아닙니까? 그런데 어째서 삼촌은 뒤로 물러서는 것입니까?' 아마도 바나바는 이렇게 대답했을 것입니다. '아니다. 하나님께서 저분을 통하여 역사 하신다. 여기에 아래위가 어디 있고, 지도자가 어디 있고, 수행원이 어디 따로 있겠느냐? 그렇게 생각하지 말아라.' 젊은 마가는 이것을 이해할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못마땅하게 여기고 도중에 되돌아갔다, 예루살렘으로 갔다-그럴듯하지요?
여러분도 잘 아시는 대로, 세례 요한은 예수를 증거 했습니다. 이제 사람들이 예수님께로 모입니다. 이 때에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아주 불쾌하게 생각했습니다. 세례 요한에게 와서 투정을 합니다. 사람의 질투라는 것이 이렇듯 무서운 것입니다. '우리한테 왔던 사람들이 지금 당신에게 세례 받은 그 사람에게 다 갑디다'하고 따집니다. 그러니까 세례 요한이 '무슨 소리냐, 나는 그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다. 그는 흥하고 나는 쇠하여야겠다' 합니다. 참 위대한 선언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자신은 뒤로 물러서는 그 모습참으로 장한 모습입니다.
루터의 설교 중에 재미있는 예화가 있습니다. 두 마리의 산양이 있었습니다. 냇물에 걸쳐 있는 외나무다리에서 서로 마주 오다가 가운데에서 딱 만났습니다. 그런데 이 산양이라는 놈은 본디 뒤로 물러설 줄을 모릅니다. 앞으로만 갈 줄 알지, 딱 만난 자리에서 서로 양보를 안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둘 다 무사히 가겠습니까? 루터의 대답은 간단합니다. 어느 하나가 허리를 굽히면, 저쪽 맞은 편에서 오던 산양이 그것을 딛고 껑충 건너뛸 것이 아니겠느냐, 그 다음에는 굽힌 저도 갈 수 있다, 적어도 한 번은 허리를 굽혀라, 그래야 문제 해결을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둘이 팽팽하게 맞서 있는 한에는 아무 일도 할 수 없습니다. 다 망하고 마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먼저 허리를 굽혀야 됩니다. 그럴 때에만 해결될 수 있습니다. '나를 타고 넘어갈 수 있도록 완전히 허리를 굽혀라'이것이 루터의 설교입니다.
정말로 사도 바울이 위대한 역사를 이루기 위해서는, 위대한 주의 종으로 역사하기 위해서는 바나바가 희생해야 했습니다. 바나바가 뒤로 물러서야 했습니다. 마가는 이것이 못마땅했던 것입니다. 인간적인 생각으로는 이해가 안될 법한 대목입니다. 그래서 마가는 삼촌에게 권면해 보았고, 그리고 불편하다못해 돌아갔다--이렇게들 이야기합니다.
또 하나는, 버가에서 떠나 이제 가려고 하는 행선지가 마가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 비시디아 안디옥이라고 하는 곳은 해발 1,100미터나 되는 높은 곳에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버가라고 하는 곳은 바닷가에 있거든요. 여기서부터 1,100미터를 올라가야 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거기까지 가는 길이 아주 험난합니다. 소아시아에서 가장 험준한 다우로 산 계곡을 지나가야 합니다. 더우기 이 다우로 산 계곡이라고 하는 곳은 강도와 선적이 많기로 소문난 곳입니다. 비시디아 안디옥으로 가려면 이 곳을 지나가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가기 힘든 곳을 사도 바울은 '굳이' 가고자 하는 것입니다. 마가는 이것이 못마땅합니다. 전도할 곳이 다른 데도 많은데 하필이면 그런 곳을 가려고 하는가--결국 유약한 마가는 여기서 물러서게 됩니다. 자 이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난관이 있습니다. 하필이면 그리 가야 되느냐, 다른 데로 가도 되는데, 여기도 도시가 많고 사람이 많은데, 하필이면 비시디아 안디옥 그 험한 길을 가려고 하느냐--이것이 마가에게는 못마땅했습니다. 그런 모험을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돌아갔다고 하는 것입니다.
조금 더 깊이 생각할 때에는 이런 추측도 가능합니다. 이 사람은 예루살렘 출신인데다 직접적으로 이방인에게 전도할 사명을 받은 일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 바울이 이 마을 저 마을, 전혀 모르는 낯선 곳으로 떠돌아다니면서 어려움을 무릅쓰고 선교하는 것이 마가 이 사람에게는 영 못마땅한 것입니다. 선교--정말 그렇습니다. 더구나 낯선 곳에의 선교는 아무나 하는 일이 아니거든요.
지금 브라질 오지에 가서 선교하는 분이 있습니다. 혹 실례될까 하여 이름은 대지 않겠습니다 마는 그 선교사가 언젠가 잠깐 한국에 돌아 왔을 때, 자기가 그곳에서 찍은 사진을 몇 장 보여주었습니다. 저는 그것을 보고 정말 깜짝 놀랐습니다. 말은 들었지만 정말 그럴까 싶었는데 정말로 원주민들이 전부 벌거벗었어요. 실오라기 하나 안 걸치고 깨끗이 벗은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제가 선교사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어떻게 살고 있소?' 선교사는 '저도 반은 벗고 살지요. 그래야 그 사람들하고 같이 지낼 수 있습니다'하고 대답합니다. 그저 팬티 한 장 걸치고 어울려 산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가하면 그 선교사 부부는 아기도 낳지 않습니다. 그 속에서 아기를 어떻게 키우겠느냐 해서 낳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 채로 그들에게 복음을 전합니다. 제가 또 물었습니다. '내가 가장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그 원주민들만의 특별한 언어가 있을 텐데, 당신은 그 말을 어떻게 공부해서 갔습니까?' 그랬더니 아무 것도 배운 게 없답니다. 딱 한마디, '나는 좋은 사람입니다'라는 말을 배웠을 뿐이랍니다. 왜냐하면 숲 속에 들어가서 원주민과 마주치면 당장에 창을 들고 죽이겠다고 하거든요. 그럴 때에 '나는 좋은 사람입니다'라는 말만 한마디하면 된다는군요. 그래가지고 거기서부터 말을 배워서 선교를 한다는 것입니다. 미리 말 배워가 지고 선교해야 한다는 것은 쓸데없는 소리라고 합니다. 말을 알아서 뭐합니까? 어차피 그들은 방언은 별도로 있으니까요. 여러분, 글도 없고 아무 것도 없는데 이런 일을 굳이 해야 되는 것입니까? 타고나야 되는 것입니다. 특별한 사명을 받은 자라야 하는 것입니다. 아무나 하겠다고 섣불리 대들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예루살렘 출신의 이 부잣집 아들, 외국사람에게 선교한다는 것은 특별한 사명을 받아야 하는데 이 사람은 하나님께로부터 특별한 사명을 받지 못했습니다. 사명을 받은 사람을 수행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수행하는 이 사람과 사명을 받은 사람과는 거리가 멀어요. 그래서 그는 결국 이 일은 감당치 못하고 뒤로 물러서게 됐다고 생각합니다. 특별히 교부 크리소스토무스는 이를 재미있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부잣집 아들이라 '엄마' 생각이 나서 돌아갔다고요. 나이가 많으나 적으나 어머니가 보고 싶어지면 그럴 수도 있습니다. 더우기 마가는 애지중지 길러진 외아들이거든요. 그런고로 그 고생 중에서 어머니 생각이 나 견딜 수 없었을 법도 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절실한 이야기가 하나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 전설 역시 마가가 도중하차하게 된 이유의 하나입니다. 당시 그 지방에는 아주 극심하고 아주 특별한 말라리아 병이 성행했다고 합니다. 지금도 그곳에는 이 병이 많이 발생한다고 하는데, 이천 년 전의 말라리아는 참으로 무서운 병이었습니다. 모기에 물려서 전염되는 병입니다. 이 병을 한번 앓으면 나약한 사람은 죽고, 살아남는다 해도 두 주일 이상은 고생을 많이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나약한 마가가 그만 말라리아 병에 걸렸다는 것입니다. 귀한 아들, 예루살렘에서 아주 소중한 마가의 다락방 주인의 아들일진대, 이 아들이 선교하러 왔다가 여기서 죽어버리면 큰일이거든요. 그래서 사도 바울이 그를 붙들고 두 주일 동안을 간호하며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애를 많이 썼어요. 이제 열이 떨어지고 나았어요. 이 때문에 전도 일행은 선교도 못하고 두 주일 동안이나 버가에서 지체했습니다. 몸이 다 나은 다음에 '자, 떠나자'했더니 마가가 '안 갈래요'하는 것이었습니다. 사도 바울 같은 강직한 분이 이를 참겠습니까? 그 동안 너를 위해서 쏟은 정성이 얼마인데 이제 와서 도중하차하겠다는 것이냐, 하고 나무랐지만 기어이 마가는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어쨌든 마가는 나약한 사람입니다. 또한 독립적 신앙이 없었습니다. 개별적인 사명감이 없었어요. 분위기에 끌려가고 있을 뿐입니다.
그저 어머니가 예수 믿으니까 나도 믿고, 어머니가 교회 가니까 나도 가고, 자기 집에서 많은 사람들이 모여 찬송 부르니까 나도 부르고, 했던 것이지요. 개별적인 확실한 체험을 가지지 못했습니다. 개별적인 부름을 받지 못한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의존적 신앙의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이래서 그는 버가에서 실패하고 도중하차하여 예루살렘으로 돌아옵니다. 이것이 본문의 내용입니다.
그런데 부득불 여기서 그 다음의 얘기를 아니할 수가 없습니다. 이후에 마가는 얼마나 굳게 결심을 했는지 모릅니다. 마치 베드로가 예수를 세 번 모른다고 한 것을 인하여 회개하고 확실한 믿음의 사람이 된 것처럼, 그는 이런 실수가 있었기 때문에 이제 굳게 결심을 한 것 같습니다. 전설에 따르면 알렉산드리아와 애굽에 가서 전도하고 교회를 세웠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특별히 골로새서 4장 10절에 보면 사도 바울이 로마감옥에 있으면서 마가를 천거하고 있습니다. '그가 이르거든 영접하라' 합니다. 사도 바울이 마가를 다시 기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듯 좋은 관계에 있었던 것입니다. 특별히 디모데후서 4장 11절은 아주 유명한 말씀이지요.
사도 바울이 임종에 이르러 디모데한테 부탁합니다.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이고 오라 저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임종 가까운 이 시간인데 굳이 그렇게 꼭 만나야 할 일이 있었겠나 싶은데 바울은 이렇듯 간곡한 것입니다. 그 옛날 일을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 때에, 2차 전도 여행을 나설 때, 마가가 회개했다고 하면서 다시 따라나서려고 할 때에 그는 단호하게 막아버렸거든요. 그것을 생각한 것 같습니다. 그 때에 마가는 얼마나 마음이 아팠을까, 그래서 요샛말로 하면 '그 때는 미안했다. 마음이 몹시 아팠었지?'이렇게 한마디 꼭 하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바울로서는 잘못한 것이 없지만 마음 약한 마가가 그 때에 마음 상했을 것을 생각하면서 세상 떠나기 전에 응어리를 풀고자 하는 것입니다.
다시 역사적인 기록을 보면 마가는 베드로의 수종자가 됩니다. 직선적으로는 베드로의 통역이 됩니다. 베드로가 해외나들이 할 때에는 마가가 수행합니다. 그래서 베드로전서 5장 13절에 보면 베드로는 마가를 가리켜 '내 아들 마가'라고 말씀합니다. 사도 바울이 디모데를 두고 '내 아들 디모데야'하고 부르는 것처럼 베드로는 마가를 두고 '내 아들 마가'라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가는 베드로와 함께 다니면서 베드로가 전도하는 중에 예수님의 생애에 대한 이야기를 반복해서 듣게 됩니다. 듣고 통역하고, 듣고 통역합니다. 마침내 그는 마가복음의 저자가 되는 것입니다. 흔히들 마가복음을 가리켜 베드로복음이라고도 합니다. 마가가 베드로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그대로 기록했기 때문입니다. 앞으로 마가복음을 그런 시작으로 읽어보세요. 베드로 이야기가 제일 많아요. 제자가 열둘인데도 베드로 하나밖에 없는 것 같을 정도입니다. 베드로가 남 이야기했겠습니까? '내가 어디 갔을 때' '내가 갈릴리 갔을 때' '내가 어떻게 했을 때'…… 이런 식으로 말했을 것이고 마가가 그대로 들었다가 그대로 쓴 것이 마가복음인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다시 생각해야 합니다. 마가는 좀더 적극적이고 좀더 강인하고 좀더 충성된 사람이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충성이 빈약했고, 그리고 약한 데가 있었어요. 그래서 그 같은 실패를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프랑스의 역사가 미쉬레는 이런 기록을 남기고 있습니다. 그는 불과 30대에 심한 두통과 위장병을 얻어서 아무 일도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의사는 그에게 책을 많이 보면 눈이 나빠지고 소화도 안되며 심장도 더 나빠질 것이니 책을 보지 말라고 충고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 가만히 있으면서 책을 안보고 지냈더니 이건 죽는 게 낫지 답답해서 견딜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책을 안보는 대신에 책을 쓰기로 했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역사가가 되었으며, 책을 열심히 쓰다보니 심장병도 낫고 위장병도 나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어려운 일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문제는 결국 적극적으로 해결할 것이요, 긍정적으로 해결할 것이며, 더 충성된 마음을 가지고 밀고 나가야 합니다. 뒤로 물러서는 것처럼 비겁한 일이 없어요. 얼마나 섭섭한 일입니까? 마가가 뒤늦게 회개하고 충성을 다했다고는 합니다만 일찍이 전도여행에서 아무 설명도 없이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는 것은 참으로 유감스러운 일이었습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선한 일, 하나님의 사역, 그 귀한 일에 절대로 뒤로 물러서서는 안됩니다. 더구나 다른 사람 다 가는데 내가 뒤로 물러서면 얼마나 유감스럽습니까? 남들 다 영광 돌리고 남들 다 기뻐하는 시간에 나만 떨어지는 것입니다. 얼마나 섭섭한 일입니까? 그와 똑같은 이야기는 아니지만 가끔 설교하면서 보면 유독히 좋아하는 사람도 있는 반면에, 다른 사람 다 찬송 부를 때에 혼자 안 부르기로 결심한 듯한 사람도 있어요. 이것도 유감스러운 일이지요. 웃을 일이 있으면 남이 웃을 때에 같이 웃어야 마땅한 일입니다. 그런데 안 웃으려고 결심한 사람인양 혼자서 목석(木石)입네 하는 사람이 있어요.
모름지기 하나님의 사업에 낙오자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모든 사람이 은혜 충만해서 하는 역사에 나만이 달랑 떨어져 낙오자가 되고 비판자가 되고, 불평이나 변명이나 하기에 바쁘다면 이것처럼 유감스러운 일이 없는 것입니다. 마가가 무슨 연유로 도중하차했건 그것을 이해해줄 사람은 없는 것입니다. 변명이 있을 수 없어요. 도중 이탈자는 이탈자입니다. 딴 설명이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이탈해서 지낸 시간들을 무엇으로 보상하겠습니까? 모름지기 우리는 하나님의 큰 은혜에, 큰 사역 앞에, 그같이 유감스러운, 이탈자적 심령이 되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쉬지 말고 끝까지 충성을 다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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