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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곽선희 목사 설교

독수리가 모이는 곳(마태복음 24장 15절~28절)

by 【고동엽】 2022. 10.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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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수리가 모이는 곳(마태복음 241528)

 

그러므로 너희가 선지자 다니엘의 말한바,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읽는 자가 깨달을진저 절) 그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지어다, 지붕 위에 있는 자는 집안에 있는 물건을 가질러 내려가니 말며, 밭에 있는 자는 겉옷을 가질러 뒤로 돌이키지 말지어다. 그 날에는 아이 밴 자들과 젖먹이는 자들에게 화가 있으리로다. 너희의 도망하는 일이 겨울에나 안식일에 되지 않도록 기도하라. 이는 그때에 큰 환난이 있겠음이라. 창세로부터 지금까지 이런 환난이 없었고 후에도 없으리라. 그 날들을 감하지 아니할 것이 면 모든 육체가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나, 그러나 택하신 자들을 위하여 그 날들을 감하시리라. 그때에 사람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혹 저기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어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게 하리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노라. 그러면 사람들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그리스도가 광야에 있다 하여도 나가지 말고 보라 골방에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 번개가 동편에서 나서 서편까지 번쩍임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주검이 있는 곳에는 독수리들이 모일지니라.

 

오늘의 본문말씀에서 "주검이 있는 곳에는 독수리들이 모일지니라(28)" 하신 말씀은 대단히 어둡게 보이고 두렵게 느껴지는 잠언말씀입니다.

마태복음 24장과 25장은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감람산 위에 앉으시어 예루살렘을 내려다보시면서 하신 말씀으로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갈릴리와 같이 외진 곳의 사람들이라 아마도 그들의 눈에는 예루살렘이 굉장하게 비쳤던 것 같습니다. 그 화려한 성전과 견고한 성곽에 매혹 당하고 그 규모에 놀랐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께 성전을 보여드립니다. "이 성전을 보십시오. 굉장하지 않습니까?"하며 자랑을 합니다. 아마도 이렇게 한 데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만하면 메시야의 나라가 될만합니까? 메시야 왕국의 수도가 될만합니까?" 이런 뜻으로 묻게 된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저들은 예수님께서 메시야이신 줄을 확실히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언제인지는 알 수 없으나 분명히 예수님께서 유대의 왕이 되시어 온 세계를 다스릴 것이라고 확실히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을 좇으면서부터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는 그 시각까지 줄기차게 해온 질문이 있습니다. "그날이 언제입니까? 정말 나라이 임하시는 때가 언제입니까? 지금입니까? 아침입니까? 저녁입니까? 내일입니까?……" 예수님의 제자된 자로서 품을 수 있는 당연한 궁금증입니다. 이러한 궁금증을 품은 채 예수님을 따르다가 유월절을 맞아 예루살렘에 입성해보니 굉장하거든요. 성전도 화려하고 사람도 많았습니다. 갈릴리 촌사람들의 눈에는 보이는 것마다 충격적이고 감동적이었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24장과 25장에 걸쳐 나타나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예루살렘이야말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기에 마땅한 장소라고 하시는 예수님의 대답을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예수님의 대답은 그리 화려한 것도, 긍정적인 것도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앞으로 재난이 있고 핍박이 있고 환난이 있고 전쟁이 있고, 그리고 당신은 십자가를 지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제자들과는 전혀 다른 생각을 하시는 것입니다. 동상이몽(同床異夢)입니다. 제자들은 지금 청운의 꿈을 품고 있습니다. 유대가 회복되고 예루살렘이 메시야의 수도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묻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환난과 십자가를 생각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의 멸망을 생각하고 계십니다. 앞으로 40년 후에 있을 예루살렘의 멸망, 아주 철저한 멸망을 생각하십니다. 그 무서운 사건이 눈앞에 있는 것을 내다보시면서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 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라고 말씀하시고 눈물을 흘리십니다. 예수님께서는 회개하지 않음으로 멸망할 예루살렘을 바라보시고 계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예루살렘의 멸망이라고 하는 사건을 하나의 상징적 사건으로 해서, 하나의 프리즘으로 해서, 역사의 끝에 있을 종말론적 심판의 시대를 생각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저멀리 세상끝을 바라보시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렇듯 마태복음 24장과 25장은 예수님의 종말론(終末論)을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장차 크고 어두운 환난의 때가 있겠다고, 핍박과 재난의 무서운 심판의 때가 있겠다고 말씀하실 때 제자들은 이에 대하여 진지하게 질문을 합니다. 그 질문의 내용을 얼추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첫째, '어느 때(when)에 이런 일이 있겠습니까, 어디(where)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겠습니까, 어떤(how) 모양으로 이런 일이 일어나겠습니까?'하고 묻습니다. 요새도 심판이 어느 때에 있을지 궁금해하고 그릇되게 생각하여 사회 전반에 문제가 되고 있지 않습니까? 결정적 종말론이란 늘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두 번째는 '세상 끝 날의 징조가 무엇입니까?'하는 질문입니다. 세상 끝 날이 온다면 바로 그 끝의 전에는 어떤 징조가 있겠느냐고 묻는 것입니다. 다소 기회주의적인 질문이랄 수 있습니다. 그저 적당히 살다가 그 징조가 보이면 그 때부터 열심히 믿겠다는 것입니다. 학생들이 선생님에게 자꾸 시험 보는 날짜를 물어보는 것과 같습니다. 그것을 알아서 뭐합니까? 평상시에 열심히만 공부하면 되지요. 그런데 그렇게 하지를 않습니다. 평상시에는 빈둥거리고 놀다가 시험 볼 때에 가서나 벼락치기로 공부하려 드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어느 때에 오시든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항상 깨끗하게, 항상 겸손하게 준비하면 되는 것을. 그런데 사람들은 그 끝 날에 가까이 가서나 준비를 하겠다고 합니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이런 소리까지 합니다. ", 예수를 어떻게 젊어서부터 믿습니까? 그래도 한 칠십은 산 다음에나 믿어야지. 세상 좀 즐기다가 죽기 전에나 믿어야지." 이런 사람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당신, 언제 죽을지 압니까?" 그것은 아무도 모릅니다. 우리는 죽을 때쯤 되어서는 무엇 하나 내 마음대로 못합니다. 내 생각도, 내 의지도, 죽기 전에 하는 말까지도 내 마음대로 할 수가 없습니다. 평소에 하던 대로하게 될 뿐입니다. 평생 악한 일만 하던 사람이 죽을 때라고 선한 말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까? 늘 속에 있던 것이 임종시에 나타나는 것이지, 그때 가서 돌연변이로 선한 말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모름지기 항상 준비하고 있을 것입니다.

세 번째는 '이 세상 끝과 주님과는 어떤 관계가 있습니까'라는 질문입니다. 아주 중요한 질문입니다. 세상 끝은 세상 끝의 나름대로 이루어지는 것입니까? 세상은 저희끼리 싸우다가 멸망하고 마는 것입니까? 멸망의 원인을 스스로 가지고 있어서 그대로 망하고 마는 것입니까? 전쟁으로 서로 물어뜯고 죽이다가 그대로 망하고 마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보니 분명히 무엇인가 또 다른 것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묻는 것입니다. 세상 끝 날과 주님과의 관계, 좀더 구체적으로는 끝 날과 주님의 재림이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이냐고.

이 세 가지 질문은 예나 오늘이나, 나아가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계속될 것입니다. 어떤 때에는 좀 아는 것도 같고, 어떤 때에는 석연치 않기도 하기에 이 질문이 계속 우리 마음에 뒤따르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무엇이라고 대답하십니까?

첫째, 역사의 목표가 있다고 대답하십니다. 이 세상 자체에 멸망할 수밖에 없는 요소가 있어서 그 때문에 멸망하는 것이 아니다, 이 세상이 제멋대로 싸우고 물어뜯고 죽이고 하는 것 같아도 '제멋대로'가 아니다, 이 역사가 겉보기에는 뒤죽박죽 복잡한 것 같아도 그 속에는 엄연히 역사의 주인이 계시고 역사의 목표가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변한다는 것도 그렇습니다. 조그마한 변화 한가지라도 되는대로 변하는 것이 아닙니다. 유행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유행 가운데서도 옷 벗는 유행은 다소 보기가 안 좋습니다. 이번 여름에도 보니 옷이 점점 짧아지고 얇아지는데, 저러다 아예 벗어버리는 것은 아닌지 걱정되더군요.

다행히 날씨가 서늘해져가니 이제는 안 입을래야 안 입을 수가 없겠지요.

이렇듯 옷 한가지만 보더라도 벗었다 입었다, 길었다 짧았다 합니다. 남자들의 넥타이도 넓었다 좁았다 하고 변합니다. 요즘은 복고 스타일이 유행이라나. 보십시오. 아무렇게나 변하는 것 같으나, 그실 어느 방향으론가 가고 있는 것입니다. 방향이 있습니다. 마구잡이로 변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디론가 향하여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 목표가 중요합니다.

세상의 역사가 되는대로 흘러가는 것 같으나, 그실 목표와 방향이 있습니다.

요즈음 우리는 이 세계의 되어지는 일을 가만히 지켜보면서 더욱 하나님께서 살아 계심과 역사를 주관하시는 그 능력에 감탄을 합니다. 우리들이 너무 조급하게 생각해서 이렇습니다만, 천 년이 하루 같다는데 칠십 년이 하루 같은 것은 보통이지요. 보십시오. 칠십 년을 기다리고 보니 상상도 못했던 엄청난 사건이 생기지 않았습니까? 구동독의 드레스덴에 갔을 때에 그곳의 주교가 제게 동독이 서독과 통합된 사건, 이로 말미암아 파급된 자유화의 물결, 공산주의가 무너지는 장면들을 지켜본 소감을 "이렇게 빨리 통일이 이루어질 좋은 미처 몰랐습니다"라는 한마디로 전하더군요. 함께 기도를 드리면서도 "이렇게 빨리 통일이 이루어질 줄은 몰랐습니다"라는 한마디를 하고는 한참을 울먹입니다. 너무 감격해서 말도 잇지 못하고 울더군요. 저도 따라서 울고 말았습니다. 사실 우리는 신문이나 텔레비전을 통해서야 보면서도 감격했는데 레닌의 동상을 끌어내리는 그 자리에 있던 그들은 얼마나 감격해서 울었겠습니까? 아마 며칠 밤낮을 잠도 안자고 울었을 것입니다. 우리야 잠깐 나오는 뉴스 한 토막을 보았으니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그 뒤에는 기막힌 이야기들이 많았을 것입니다. 상상을 해보십시오. 이것이 모두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모름지기 역사에는 방향이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되는대로 흘러가는 세상이 아닌 것입니다. 역사는 혼돈(chaos)이 아닙니다.

아주 막막한 어두움이 아닌 것입니다. 분명히 그 핸들을 잡으신 손이 계십니다. 가는 방향이 있습니다. 경륜이 있고, 과정이 있습니다. 잊지 말 것입니다.

둘째, 마지막은 그리스도의 섭리로 끝난다고 대답하십니다. 우리는 요즘 세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큼직큼직한 사건들을 보면서 가끔 자유주의와 전체주의 혹은 사회주의와 자본주의를 놓고 어느 쪽이 이겼느냐고 이야기들을 나눕니다. 이에 대하여 언젠가 부타페스트에서 만났던 주교는 제게 이렇게 말하더군요. "이것은 공산주의와 기독교의 대결에서 기독교의 승리를 의미하는 것입니다"라고, 그렇습니다. 기독교를 그렇게도 핍박하더니, 그렇게도 못살게 굴더니 결국은 자기들이 먼저 손을 들고 말았습니다. 지금은 그 공산주의 국가에서도 성경을 가르치는 것이 일입니다. 나라에서 경영하는 공민학교에서도 성경을 가르칩니다. 과거에는 감히 엄두도 못 냈었는데 지금은 문이 활짝 열렸습니다. 오히려 성경책이 부족하고 가르칠 선생이 모자라 야단입니다. 모스크바에서 만났던 한 수도사는 제게 이런 말까지 하더군요. "우리는 하루에 세 시간밖에 못 잡니다." 막상 문이 열리고 보니 할 일은 너무 많은데 수도사들은 턱도 없이 모자란다는 것입니다. 마지막 승리는 그리스도의 섭리임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Final triumph는 예수 그리스도께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두려워할 것 없습니다. 모두 다 잘될 것입니다. 모두 다 주님의 뜻 하신대로 될 것입니다.

주님의 재림이라고 해서 거저 유토피아의 세계가 오는 것이 아니라, 그날까지는 많은 재난과 환난이 있겠다고 하십니다. 심판과 구원은 동시적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 재림의 날이 가까워오고 있는 그 때에 어두움도 함께 하겠다는 것입니다. 한쪽으로는 복음이 전파되고 신앙은 보다 더 순수해지고 확장되어 나가겠지만, 겉으로 볼 때에는 많은 환난과 핍박과 어려움이 있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회주의가 무너졌다고 해서 이것이 자유주의의 승리를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또한 공산주의가 물러간다고 해서 그것이 복음화를 의미하는 것도 아닙니다. 특별히 우리가 생각해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자유주의 세계는 과연 행복합니까? 우리는 사회주의 세계에 비하여 자유주의 세계에 그리스도인이 많은 줄로 생각합니다만 반드시 그렇지는 않습니다. 어느 쪽에 확실한 믿음의 사람이 더 많은지, 하나님의 사람이 더 많은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나 사회주의체제 하에서 가난과 핍박으로 어렵게 살아갈 때에도 기독교인의 수는 동유럽 전체의 80퍼센트에 달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자유화가 된 뒤에 예기치 못한 문제가 생겼습니다.

구동독 드레스덴에서 만난 주교의 말에 따르면 자유화되기 전에는 종교에 대한 핍박으로 교회도 마음대로 지을 수가 없어서 기존의 교회만으로 예배와 찬송을 드렸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교인의 수는 점점 늘어 하루에 너댓 번씩 예배를 드렸다고 합니다. 그러한 신도들 가운데는 특별히 젊은 층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또한 교회에 나오지 않는 사람들까지도 교회에 대해서 무엇인가를 기대하고, 선망과 사랑과 존경의 눈으로 교회를 바라보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막상 자유화가 이루어 지고보니 그렇게 신도들로 가득하던 교회가 텅텅 비더랍니다.

자유주의 하에서는 예배당은 많은데 교인은 적고, 사회주의의 핍박 하에서는 예배당은 적은데 교인은 많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구 소련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자유화되기 이전의 모스크바의 교회에는 코펜하겐의 교회보다도 신도들이 더 많았다고 합니다. 그러니 우리는 자유화가 곧 복음화를 의미한다고 착각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자유화가 반드시 아름다운 세계를 이룬다고 생각해서도 안될 것입니다. 그렇지가 않은 것입니다. 신앙의 눈으로 볼 때에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서도 주님께서 재림하시는 그날까지, 주님이 재림이 가까워올수록 세상은 더욱 어두워진다고 말씀하지 않습니까? 사도 바울도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13:12)"라고 말씀합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께서 가까이 오실수록 세상은 점점 어두워집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속에서도 밝은 빛처럼 점점 가까워오고 계시는 주님을 내다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종말의 양상입니다.

오늘의 본문말씀을 통하여 예수님께서는 종말의 징조를 보여주고 계십니다. 정치적으로 전쟁이 있겠다, 민족이 민족을 대항하겠다, 도덕적으로는 사랑이 식어지고 타락하게 되겠다, 부모가 자식을 죽이는 데 내주겠다, 서로들 배반하는, 신뢰 없는 사회가 오겠다 -이것이 말세의 징조입니다. 그런가하면 종교적으로는 거짓 선지자가 많이 나타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또한 스스로 예수라고, 재림 주라고 떠드는 사람이 많이 나타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지금도 우리는 이런 현상을 주위에서 접하고 있지 않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선 것을 보거든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지어다"하는 말씀까지 인용하시어 우리에게 말세의 징조에 대하여 경고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거듭 말씀하십니다.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혹은 저기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23)"라고. 요즘도 보십시오. 이적을 행한다고 나서는 거짓 메시야들이 있습니다. 여러분, 이적보고 따라갈 생각은 마십시오. 죽은 사람을 살렸다고 하더라도 따라가지 말 것입니다. 그 이적과 메시야됨과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이적을 보고 '그는 참메시야다'라는 착각을 하지 말 것입니다. 마귀에게도 그런 능력은 있으니까요. 마귀에게도 그만한 능력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잊지 마십시오. 이적을 신기하게 생각하고, 거기 매혹되어 끌리는 신앙은 언제나 잘못되기 쉽습니다. 신앙은 이적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재림은 어떻게 이루어질까요? 먼저, 예수님 스스로 말씀하시기를 "번개가 동편에서 나서 서편까지 번쩍임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27)"라고 하셨습니다. '번개와 같이 온다' -우주적입니다. 모든 사람이 알도록 오시겠다는 것입니다. 언젠가 저는 스스로 재림주라 하는 사람을 만나본 적이 있습니다. 저에게 어쩌고저쩌고 하며 허튼 소리를 하기에 ",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모든 사람이 다 알게 번개와 같이 일시적으로 오신다고 했는데, 어떻게 나도 모르게 이렇듯 조용하게 왔소?"라고 한마디 해주었습니다.

참 별사람도 다 있습디다. 이런 자들이 사방에 많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우주적으로 오시겠다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주적으로, 다시 말하면 일시에 천치개벽처럼 꽝하고 오실 것입니다. 결코 서서히 점차적으로, 혹은 비밀리에 오시는 것이 아닙니다. 초림(初臨) 때는 베들레헴에 비밀리에 오셨습니다.

그러나 재림(再臨) 때는 우주적으로 오십니다. 명심할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일시에 오신다고 했습니다. 번개와도 같이 일시에 이루어진다는 예수님의 재림을 두고 가끔 이런 질문을 받습니다. "번개가 번쩍 한다 하지만, 지구가 둥근데 어떻게 일시에 오시노? 지구는 둥그니까 이쪽에 오실 때에는 저쪽에는 안 오실 것 아니냐?" 한국에 오시면 같은 때에 미국에서는 뵙지 못하는 것이 아니냐 하는 의문입니다. 한쪽에만 비칠 것이 아니냐 하는 의문입니다. 여러분, 왜 그렇게 지구를 크게 봅니까? 지구보다 큰 우주적 사건인데, 지구를 하나의 품에 안듯이 그렇게 역사가 이루어지는데, 지구가 녹아 없어지는 시간인데 그게 문제가 되는 것입니까? 그러니 얄팍하게 지구가 둥글다는 것 하나 알아 가지고 그런 소리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구를 한 점으로 안고 있는 '우주적 사건'입니다.

그런가하면 그렇게 큰 사건이면서도 동시에 아주 개인적인 사건입니다. 두 사람이 맷돌질을 하는데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남겨두겠다 하십니다. 그 많은 사람들이 있지마는 예외 없이 구원받을 사람은 구원받고, 멸망당할 사람은 멸망당할 것입니다. 그러니까 조금도 문제삼을 것이 없습니다. 사건이 아무리 크더라도 아주 세밀하게 개인적으로 종말이 옵니다. 한사람 한사람에게 적용되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의 사람은 어디에 있든지, 어느 땅 속에 어느 골방에 있든지 구원받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 주님의 긍휼을 얻지 못한 사람은 구원받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렇게 말씀하시면서 예수님께서는 이제 주검이 있는 곳에 독수리들이 모일 것이라고 결론을 내리십니다. 다시 한번 보십니다. "주검이 있는 곳에는 독수리들이 모일지니라" 몇 주간 전에 제가 중국에 갔을 때입니다. 제가 잘 아는 그곳의 교인을 하나 만났는데, 그 교인은 이른바 '문혁(文革)' 때에 숙청을 당해서 티베트 산골에 들어가 11년 동안을 갖은고생 다 하고 오신 분입니다.

그분이 "이 얼굴 좀 보세요"하기에 자세히 보니 끔찍합디다. 얼굴 껍질이 다 벗겨져가지고 볼품이 말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면서 티베트에서 고생하던 이야기를 하는데, "말로 이야기하면 목사님께서 믿지 않으실 겁니다"하고 사진을 보여줍디다. 수첩으로 만들어놓은 사진첩을 전부 뒤지면서 이야기하기에 한참동안 구경을 했지만 정말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있더군요. 사람이 죽어간다 하면 무당이 와서 한눈으로 보고는 "이젠 끝났소. 곧 죽겠소"하고 진단을 내리는데, 일단 그렇게 선언이 되면 그 즉시로 아직은 살아 있는 사람의 허리를 딱 꺽어가지고 막대기로 마당에 내다 달아맵니다. 아직도 살아 있는 사람을, 아직도 숨이 붙어 있는 생사람을 그렇게 처치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놓으면 이제 독수리들이 몰려와서 뜯어먹는 것입니다. 그것이 장례식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는 것은 가난한 사람들에 대해서이고, 부자는 조금 더 고급으로 합니다. 아직은 살아 있는 사람의 허리를 딱 꺽어 가지고 둘러메어 산으로 올라갑니다. 산 위에 널따란 바위가 있는데, 그 바위 사진 찍은 것을 보니 표면이 아주 빤질빤질합니다. 기름이 엉겨붙어서요. 그런 바위 위에 사람을 난도질해서 올려놓습니다. 아직은 숨이 붙어 있는 사람을 죽인 것이고 보니, 아직은 썩지 않은 육신을 갈기갈기 토막낸 것이고 보니 독수리 떼가 그야말로 새까맣게 모여들어 그것을 다 뜯어먹는 것입니다. 남김없이 청소해버립니다. 그러면 이제 "극락세계에 갔다"하고는 그 때부터 일주일동안 잔치를 벌입니다. 이것이 장례식입니다. 마니교의 습속입니다. 그러고 보니 종교라는 것이 참 무서운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종교에 빠져 있으면서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저들의 문화입니다. 그렇게 수천 년을 살아온 것입니다. 당연히 그래야 되는 줄로 알고 살아온 것입니다. 그 사진을 보면서 생각했습니다. '참 독수리 많이 키우고 있구나' -우리로야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지만 엄연한 사실입니다. 믿거나 말거나 그것은 분명한 사실인 것입니다. 보십시오. 저런 세상도 있는 것입니다. 한번 생각이 잘못되고, 종교가 잘못되고 보니 그 꼴로까지 되어버렸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이제 성경이 말하는 바, 이스라엘사람들이 가진 독수리의 개념을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독수리는 시체를 먹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독수리는 본디 썩은 것은 먹지 않는다고 합니다. 식성이 꽤나 고급이어서 썩기 전에 먹는다고 합니다. 죽은 것을 먹되 썩은 것은 안 먹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썩은 것은 누가 먹느냐? 까마귀가 먹어요. 그래서 성경에도 이것이 독수리냐 까마귀냐 하고 번역을 달리하는 사람들까지 있습니다. 아무튼 독수리는 시체를 먹는다고 이스라엘사람들은 생각합니다.

둘째로, 독수리는 빠릅니다. 병아리 같은 것을 채갈 때에 보면 잽싸기가 보통이 아닙니다. 멀리서 빙빙 돌다가도 땅에 기어다니는 쥐 한 마리를 보고 휙 날아와서는 번개같이 채 가지고 올라갑니다. 얼마나 날쌔고 빠른지 모릅니다. 그 높은 데서도 다 봅니다. 아주 환하게 보고 다닙니다. 성경에도 독수리가 빠르다는 표현이 많습니다. '독수리같이 빠르게'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멸망이 독수리같이 빠르게 임하니라 -독수리를 빠르다고 보기 때문에 이런 말을 합니다.

세째, 독수리는 모입니다. 모여듭니다. 특히 시체를 치우지 못했을 때에 모입니다. 장례도 치르지 못했을 때에 모입니다. 노출되어 있으니까 모여드는 것입니다. 당시에 가지고 있던 문화적 개념을 염두에 두고 독수리가 모이는 곳'의 뜻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한 개념에서 "주검이 있는 곳에는 독수리가 모일지니라"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심판을 뜻하는 말씀입니다. 최종심판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왜 재난이 있고, 전쟁이 있고, 지진이 있고, 어려움이 있느냐? 죽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주검이 있어서 독수리가 모이는 것입니다. 창세기 6장의 홍수사건도 사람들이 육체가 되었기 때문에 있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홍수는 산 사람을 죽인 사건이 아닙니다. 영혼이 죽었기에 하나님의 시각으로 볼 때에는 '주검'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이 다 죽고 없는 것입니다. 고깃덩어리만 꿈틀거리고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쓸어버리신 것입니다. 청소하신 것입니다. 그것이 홍수심판입니다.

오늘도 영적으로 볼 때, 하나님의 시각으로 한번 내려다볼 때에 과연 어떻겠습니까? 육체들이야 육체들대로 옷을 입었으니 망정이요 아마 벗겨놓고 본다면 참 가관이겠지만 그래도 숨쉬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모양 저런 모양, 병든 사람 건강한 사람, 젊은 사람 늙어빠진 사람으로 가지각색이겠지만 일단 육체는 그렇다 하더라도 지금 하나님께서 보시는 것은 그러한 육체들이 아닙니다. 그 속을 보십니다. 그 영혼을 보십니다. 몸은 건강하지 못한데 영혼은 건강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영혼이 병들어서 비틀비틀 비실비실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속이 영 죽은 사람이 있는 것입니다. 깊이 잠들었습니다. 죽은 지 오래됐습니다.

남은 것은 육체적 욕망뿐입니다. 동물적 욕망, 나아가 마귀적인 욕망, 악마적인 것만 남았습니다. 이런 사람은 건드리기만 하면 터집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툭 건드리기만 하면 속에 있는 썩은 것이 와르르 쏟아져 나오는 것입니다. 욕설이 나오고 악다귀가 끓어 넘칩니다.

주검이 있는 곳에 당연히 독수리가 모입니다. 영혼이 죽었으니, 생명이 없으니 독수리가 모일 수 밖에요. 뜯어먹으려고 말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분명히 아십시다. 독수리란 살아 있는 자를 건드리지는 않습니다. 살아 있는 생명은 문제가 없습니다. 살아서 약동하는 생명을 건드리는 독수리는 없습니다. 죽었다 하면 모여듭니다. 썩기 전에 뜯어먹고 마는 것입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영혼이 살아 있을 때, 그래서 숨을 쉬고, 그래서 말씀을 배우고, 그래서 기도하고, 그래서 열심히 봉사하고 뛰는데 언감 어디라고 독수리가 모여듭니까? 무슨 시험에 든단 말입니까? 여러분이 시원치 않다면 썩었기 때문입니다. 왜정말년, 신사참배 문제로 복잡했을 때에 어떤 신실한 장로님이 있어서 너도나도 신사참배한다고 하는데도 안 한다고 딱 버티었습니다. 죽어도 안한다고 버티었습니다. 순경이 와서 "신사참배 하십시다, 노인장. , 노인께서 뭣땀세 사서 고생하려고 하십니까? 그저 고개만 한번 꾸뻑하면 되는 것이니 심사참배 하십시다요." "시끄럽다, 이놈아!" 장로님은 언하에 물리칩니다. 순경이 또 왔습니다. 자꾸 와서 조릅니다. 마침내 장로님은 엉엉 울고 맙니다. 장로님이 우니까 그 순경이 ", 장로님, 울긴 왜 웁니까?" "왜 울다니, 이놈아, 내가 얼마나 썩었으면 이렇게 파리가 달라붙을까 해서 우는 거다, ?" 내가 튼튼하고 생명력이 약동하는 사람이었다면 감히 누가 와서 심사참배 어쩌고 하겠는가, 누가 건드리겠는가, 누가 감히 유혹을 하겠는가! 그런데 내가 시원치 않으니까 별것들이 다 모여드는구나, 별것이 다 와서 시험을 거는구나 -그래서 운다는 말씀이었습니다.

독수리가 모이는 것입니다. 독수리가. 잊지 말 것입니다. 살아 있는 생명을 건드리는 독수리는 없습니다. 감히 가까이하지 못합니다. 죽은 생명에 독수리가 모입니다. 그렇거늘 어느 때에 재림을 한다느니, 누가 어떻게 된다느니, 징조가 어떻다느니 합니다. 그런 것 알아서 뭘 합니까? 생명 있게 살아라, 주검이 있는 곳에는 독수리가 모이느니라 -이 말씀이 있지 않습니까?

또 하나, 독수리가 모인다는 것은 긍휼이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장례 할 사람도 없고 매장할 사람도 없습니다. 사람이 죽었는데, 이것을 장례치를 만한 긍휼도 얻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구약성경에 보면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그리고 많은 예언서에 누누이 나옵니다. '너희가 앞으로 환난을 당할 때에 시체가 쌓이리라, 시체가 쌓일 때에 그것을 매장할 자가 없으리라'합니다. 다 죽었습니다. 다 죽었는데 누가 시체를 치웁니까? 시체가 그냥 노출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독수리가 뜯어먹는 것입니다. 의인이 한 사람도 없고 산 사람도 하나 없다는 말씀입니다. 소돔과 고모라에 의인 열 명만 있었어도 그 성은 멸망치 않았습니다. 의인 열 명이 없었기 때문에 망한 것입니다. 몇 사람이라도 살아있는 사람이 있어야 하는데, 몇 사람이라도 하나님의 사람으로 건강하게 살아 있어야 하는데 다 죽어버렸으니 장례치를 만한 사람이 없습니다. 시체만 있으니 독수리가 모일 수밖에 없습니다. 얼마나 비참하고 얼마나 구체적인 이야기입니까?

세상 끝에 주님께서 오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무 것도 두려워하지 말라 하십니다. 택한 자들을 위하여 그날을 감하시리라 하십니다.

없게 한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이 충분히 이길 수 있을 만큼, 믿는 사람들이 구원받을 수 있을 만큼, 그만큼의 고난과 환난만 있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걱정할 것 하나도 없습니다. 역사의 주인은 그리스도시요, 모든 환난은 주의 백성을 구원하시는 과정이며, 주의 백성으로 온전케 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역사를 밝히 나타내시는 과정이요 사건들이라는 것을 명심할 것입니다. 다시 한번 깊이 생각해보십시다.

"주검이 있는 곳에는 독수리들이 모일지니라."  

독수리가 모이는 곳(마태복음 241528)

 

그러므로 너희가 선지자 다니엘의 말한바,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읽는 자가 깨달을진저 절) 그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지어다, 지붕 위에 있는 자는 집안에 있는 물건을 가질러 내려가니 말며, 밭에 있는 자는 겉옷을 가질러 뒤로 돌이키지 말지어다. 그 날에는 아이 밴 자들과 젖먹이는 자들에게 화가 있으리로다. 너희의 도망하는 일이 겨울에나 안식일에 되지 않도록 기도하라. 이는 그때에 큰 환난이 있겠음이라. 창세로부터 지금까지 이런 환난이 없었고 후에도 없으리라. 그 날들을 감하지 아니할 것이 면 모든 육체가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나, 그러나 택하신 자들을 위하여 그 날들을 감하시리라. 그때에 사람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혹 저기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어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게 하리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노라. 그러면 사람들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그리스도가 광야에 있다 하여도 나가지 말고 보라 골방에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 번개가 동편에서 나서 서편까지 번쩍임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주검이 있는 곳에는 독수리들이 모일지니라.

 

오늘의 본문말씀에서 "주검이 있는 곳에는 독수리들이 모일지니라(28)" 하신 말씀은 대단히 어둡게 보이고 두렵게 느껴지는 잠언말씀입니다.

마태복음 24장과 25장은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감람산 위에 앉으시어 예루살렘을 내려다보시면서 하신 말씀으로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갈릴리와 같이 외진 곳의 사람들이라 아마도 그들의 눈에는 예루살렘이 굉장하게 비쳤던 것 같습니다. 그 화려한 성전과 견고한 성곽에 매혹 당하고 그 규모에 놀랐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께 성전을 보여드립니다. "이 성전을 보십시오. 굉장하지 않습니까?"하며 자랑을 합니다. 아마도 이렇게 한 데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만하면 메시야의 나라가 될만합니까? 메시야 왕국의 수도가 될만합니까?" 이런 뜻으로 묻게 된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저들은 예수님께서 메시야이신 줄을 확실히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언제인지는 알 수 없으나 분명히 예수님께서 유대의 왕이 되시어 온 세계를 다스릴 것이라고 확실히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을 좇으면서부터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는 그 시각까지 줄기차게 해온 질문이 있습니다. "그날이 언제입니까? 정말 나라이 임하시는 때가 언제입니까? 지금입니까? 아침입니까? 저녁입니까? 내일입니까?……" 예수님의 제자된 자로서 품을 수 있는 당연한 궁금증입니다. 이러한 궁금증을 품은 채 예수님을 따르다가 유월절을 맞아 예루살렘에 입성해보니 굉장하거든요. 성전도 화려하고 사람도 많았습니다. 갈릴리 촌사람들의 눈에는 보이는 것마다 충격적이고 감동적이었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24장과 25장에 걸쳐 나타나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예루살렘이야말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기에 마땅한 장소라고 하시는 예수님의 대답을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예수님의 대답은 그리 화려한 것도, 긍정적인 것도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앞으로 재난이 있고 핍박이 있고 환난이 있고 전쟁이 있고, 그리고 당신은 십자가를 지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제자들과는 전혀 다른 생각을 하시는 것입니다. 동상이몽(同床異夢)입니다. 제자들은 지금 청운의 꿈을 품고 있습니다. 유대가 회복되고 예루살렘이 메시야의 수도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묻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환난과 십자가를 생각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의 멸망을 생각하고 계십니다. 앞으로 40년 후에 있을 예루살렘의 멸망, 아주 철저한 멸망을 생각하십니다. 그 무서운 사건이 눈앞에 있는 것을 내다보시면서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 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라고 말씀하시고 눈물을 흘리십니다. 예수님께서는 회개하지 않음으로 멸망할 예루살렘을 바라보시고 계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예루살렘의 멸망이라고 하는 사건을 하나의 상징적 사건으로 해서, 하나의 프리즘으로 해서, 역사의 끝에 있을 종말론적 심판의 시대를 생각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저멀리 세상끝을 바라보시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렇듯 마태복음 24장과 25장은 예수님의 종말론(終末論)을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장차 크고 어두운 환난의 때가 있겠다고, 핍박과 재난의 무서운 심판의 때가 있겠다고 말씀하실 때 제자들은 이에 대하여 진지하게 질문을 합니다. 그 질문의 내용을 얼추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첫째, '어느 때(when)에 이런 일이 있겠습니까, 어디(where)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겠습니까, 어떤(how) 모양으로 이런 일이 일어나겠습니까?'하고 묻습니다. 요새도 심판이 어느 때에 있을지 궁금해하고 그릇되게 생각하여 사회 전반에 문제가 되고 있지 않습니까? 결정적 종말론이란 늘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두 번째는 '세상 끝 날의 징조가 무엇입니까?'하는 질문입니다. 세상 끝 날이 온다면 바로 그 끝의 전에는 어떤 징조가 있겠느냐고 묻는 것입니다. 다소 기회주의적인 질문이랄 수 있습니다. 그저 적당히 살다가 그 징조가 보이면 그 때부터 열심히 믿겠다는 것입니다. 학생들이 선생님에게 자꾸 시험 보는 날짜를 물어보는 것과 같습니다. 그것을 알아서 뭐합니까? 평상시에 열심히만 공부하면 되지요. 그런데 그렇게 하지를 않습니다. 평상시에는 빈둥거리고 놀다가 시험 볼 때에 가서나 벼락치기로 공부하려 드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어느 때에 오시든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항상 깨끗하게, 항상 겸손하게 준비하면 되는 것을. 그런데 사람들은 그 끝 날에 가까이 가서나 준비를 하겠다고 합니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이런 소리까지 합니다. ", 예수를 어떻게 젊어서부터 믿습니까? 그래도 한 칠십은 산 다음에나 믿어야지. 세상 좀 즐기다가 죽기 전에나 믿어야지." 이런 사람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당신, 언제 죽을지 압니까?" 그것은 아무도 모릅니다. 우리는 죽을 때쯤 되어서는 무엇 하나 내 마음대로 못합니다. 내 생각도, 내 의지도, 죽기 전에 하는 말까지도 내 마음대로 할 수가 없습니다. 평소에 하던 대로하게 될 뿐입니다. 평생 악한 일만 하던 사람이 죽을 때라고 선한 말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까? 늘 속에 있던 것이 임종시에 나타나는 것이지, 그때 가서 돌연변이로 선한 말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모름지기 항상 준비하고 있을 것입니다.

세 번째는 '이 세상 끝과 주님과는 어떤 관계가 있습니까'라는 질문입니다. 아주 중요한 질문입니다. 세상 끝은 세상 끝의 나름대로 이루어지는 것입니까? 세상은 저희끼리 싸우다가 멸망하고 마는 것입니까? 멸망의 원인을 스스로 가지고 있어서 그대로 망하고 마는 것입니까? 전쟁으로 서로 물어뜯고 죽이다가 그대로 망하고 마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보니 분명히 무엇인가 또 다른 것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묻는 것입니다. 세상 끝 날과 주님과의 관계, 좀더 구체적으로는 끝 날과 주님의 재림이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이냐고.

이 세 가지 질문은 예나 오늘이나, 나아가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계속될 것입니다. 어떤 때에는 좀 아는 것도 같고, 어떤 때에는 석연치 않기도 하기에 이 질문이 계속 우리 마음에 뒤따르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무엇이라고 대답하십니까?

첫째, 역사의 목표가 있다고 대답하십니다. 이 세상 자체에 멸망할 수밖에 없는 요소가 있어서 그 때문에 멸망하는 것이 아니다, 이 세상이 제멋대로 싸우고 물어뜯고 죽이고 하는 것 같아도 '제멋대로'가 아니다, 이 역사가 겉보기에는 뒤죽박죽 복잡한 것 같아도 그 속에는 엄연히 역사의 주인이 계시고 역사의 목표가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변한다는 것도 그렇습니다. 조그마한 변화 한가지라도 되는대로 변하는 것이 아닙니다. 유행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유행 가운데서도 옷 벗는 유행은 다소 보기가 안 좋습니다. 이번 여름에도 보니 옷이 점점 짧아지고 얇아지는데, 저러다 아예 벗어버리는 것은 아닌지 걱정되더군요.

다행히 날씨가 서늘해져가니 이제는 안 입을래야 안 입을 수가 없겠지요.

이렇듯 옷 한가지만 보더라도 벗었다 입었다, 길었다 짧았다 합니다. 남자들의 넥타이도 넓었다 좁았다 하고 변합니다. 요즘은 복고 스타일이 유행이라나. 보십시오. 아무렇게나 변하는 것 같으나, 그실 어느 방향으론가 가고 있는 것입니다. 방향이 있습니다. 마구잡이로 변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디론가 향하여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 목표가 중요합니다.

세상의 역사가 되는대로 흘러가는 것 같으나, 그실 목표와 방향이 있습니다.

요즈음 우리는 이 세계의 되어지는 일을 가만히 지켜보면서 더욱 하나님께서 살아 계심과 역사를 주관하시는 그 능력에 감탄을 합니다. 우리들이 너무 조급하게 생각해서 이렇습니다만, 천 년이 하루 같다는데 칠십 년이 하루 같은 것은 보통이지요. 보십시오. 칠십 년을 기다리고 보니 상상도 못했던 엄청난 사건이 생기지 않았습니까? 구동독의 드레스덴에 갔을 때에 그곳의 주교가 제게 동독이 서독과 통합된 사건, 이로 말미암아 파급된 자유화의 물결, 공산주의가 무너지는 장면들을 지켜본 소감을 "이렇게 빨리 통일이 이루어질 좋은 미처 몰랐습니다"라는 한마디로 전하더군요. 함께 기도를 드리면서도 "이렇게 빨리 통일이 이루어질 줄은 몰랐습니다"라는 한마디를 하고는 한참을 울먹입니다. 너무 감격해서 말도 잇지 못하고 울더군요. 저도 따라서 울고 말았습니다. 사실 우리는 신문이나 텔레비전을 통해서야 보면서도 감격했는데 레닌의 동상을 끌어내리는 그 자리에 있던 그들은 얼마나 감격해서 울었겠습니까? 아마 며칠 밤낮을 잠도 안자고 울었을 것입니다. 우리야 잠깐 나오는 뉴스 한 토막을 보았으니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그 뒤에는 기막힌 이야기들이 많았을 것입니다. 상상을 해보십시오. 이것이 모두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모름지기 역사에는 방향이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되는대로 흘러가는 세상이 아닌 것입니다. 역사는 혼돈(chaos)이 아닙니다.

아주 막막한 어두움이 아닌 것입니다. 분명히 그 핸들을 잡으신 손이 계십니다. 가는 방향이 있습니다. 경륜이 있고, 과정이 있습니다. 잊지 말 것입니다.

둘째, 마지막은 그리스도의 섭리로 끝난다고 대답하십니다. 우리는 요즘 세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큼직큼직한 사건들을 보면서 가끔 자유주의와 전체주의 혹은 사회주의와 자본주의를 놓고 어느 쪽이 이겼느냐고 이야기들을 나눕니다. 이에 대하여 언젠가 부타페스트에서 만났던 주교는 제게 이렇게 말하더군요. "이것은 공산주의와 기독교의 대결에서 기독교의 승리를 의미하는 것입니다"라고, 그렇습니다. 기독교를 그렇게도 핍박하더니, 그렇게도 못살게 굴더니 결국은 자기들이 먼저 손을 들고 말았습니다. 지금은 그 공산주의 국가에서도 성경을 가르치는 것이 일입니다. 나라에서 경영하는 공민학교에서도 성경을 가르칩니다. 과거에는 감히 엄두도 못 냈었는데 지금은 문이 활짝 열렸습니다. 오히려 성경책이 부족하고 가르칠 선생이 모자라 야단입니다. 모스크바에서 만났던 한 수도사는 제게 이런 말까지 하더군요. "우리는 하루에 세 시간밖에 못 잡니다." 막상 문이 열리고 보니 할 일은 너무 많은데 수도사들은 턱도 없이 모자란다는 것입니다. 마지막 승리는 그리스도의 섭리임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Final triumph는 예수 그리스도께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두려워할 것 없습니다. 모두 다 잘될 것입니다. 모두 다 주님의 뜻 하신대로 될 것입니다.

주님의 재림이라고 해서 거저 유토피아의 세계가 오는 것이 아니라, 그날까지는 많은 재난과 환난이 있겠다고 하십니다. 심판과 구원은 동시적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 재림의 날이 가까워오고 있는 그 때에 어두움도 함께 하겠다는 것입니다. 한쪽으로는 복음이 전파되고 신앙은 보다 더 순수해지고 확장되어 나가겠지만, 겉으로 볼 때에는 많은 환난과 핍박과 어려움이 있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회주의가 무너졌다고 해서 이것이 자유주의의 승리를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또한 공산주의가 물러간다고 해서 그것이 복음화를 의미하는 것도 아닙니다. 특별히 우리가 생각해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자유주의 세계는 과연 행복합니까? 우리는 사회주의 세계에 비하여 자유주의 세계에 그리스도인이 많은 줄로 생각합니다만 반드시 그렇지는 않습니다. 어느 쪽에 확실한 믿음의 사람이 더 많은지, 하나님의 사람이 더 많은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나 사회주의체제 하에서 가난과 핍박으로 어렵게 살아갈 때에도 기독교인의 수는 동유럽 전체의 80퍼센트에 달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자유화가 된 뒤에 예기치 못한 문제가 생겼습니다.

구동독 드레스덴에서 만난 주교의 말에 따르면 자유화되기 전에는 종교에 대한 핍박으로 교회도 마음대로 지을 수가 없어서 기존의 교회만으로 예배와 찬송을 드렸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교인의 수는 점점 늘어 하루에 너댓 번씩 예배를 드렸다고 합니다. 그러한 신도들 가운데는 특별히 젊은 층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또한 교회에 나오지 않는 사람들까지도 교회에 대해서 무엇인가를 기대하고, 선망과 사랑과 존경의 눈으로 교회를 바라보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막상 자유화가 이루어 지고보니 그렇게 신도들로 가득하던 교회가 텅텅 비더랍니다.

자유주의 하에서는 예배당은 많은데 교인은 적고, 사회주의의 핍박 하에서는 예배당은 적은데 교인은 많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구 소련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자유화되기 이전의 모스크바의 교회에는 코펜하겐의 교회보다도 신도들이 더 많았다고 합니다. 그러니 우리는 자유화가 곧 복음화를 의미한다고 착각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자유화가 반드시 아름다운 세계를 이룬다고 생각해서도 안될 것입니다. 그렇지가 않은 것입니다. 신앙의 눈으로 볼 때에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서도 주님께서 재림하시는 그날까지, 주님이 재림이 가까워올수록 세상은 더욱 어두워진다고 말씀하지 않습니까? 사도 바울도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13:12)"라고 말씀합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께서 가까이 오실수록 세상은 점점 어두워집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속에서도 밝은 빛처럼 점점 가까워오고 계시는 주님을 내다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종말의 양상입니다.

오늘의 본문말씀을 통하여 예수님께서는 종말의 징조를 보여주고 계십니다. 정치적으로 전쟁이 있겠다, 민족이 민족을 대항하겠다, 도덕적으로는 사랑이 식어지고 타락하게 되겠다, 부모가 자식을 죽이는 데 내주겠다, 서로들 배반하는, 신뢰 없는 사회가 오겠다 -이것이 말세의 징조입니다. 그런가하면 종교적으로는 거짓 선지자가 많이 나타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또한 스스로 예수라고, 재림 주라고 떠드는 사람이 많이 나타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지금도 우리는 이런 현상을 주위에서 접하고 있지 않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선 것을 보거든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지어다"하는 말씀까지 인용하시어 우리에게 말세의 징조에 대하여 경고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거듭 말씀하십니다.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혹은 저기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23)"라고. 요즘도 보십시오. 이적을 행한다고 나서는 거짓 메시야들이 있습니다. 여러분, 이적보고 따라갈 생각은 마십시오. 죽은 사람을 살렸다고 하더라도 따라가지 말 것입니다. 그 이적과 메시야됨과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이적을 보고 '그는 참메시야다'라는 착각을 하지 말 것입니다. 마귀에게도 그런 능력은 있으니까요. 마귀에게도 그만한 능력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잊지 마십시오. 이적을 신기하게 생각하고, 거기 매혹되어 끌리는 신앙은 언제나 잘못되기 쉽습니다. 신앙은 이적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재림은 어떻게 이루어질까요? 먼저, 예수님 스스로 말씀하시기를 "번개가 동편에서 나서 서편까지 번쩍임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27)"라고 하셨습니다. '번개와 같이 온다' -우주적입니다. 모든 사람이 알도록 오시겠다는 것입니다. 언젠가 저는 스스로 재림주라 하는 사람을 만나본 적이 있습니다. 저에게 어쩌고저쩌고 하며 허튼 소리를 하기에 ",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모든 사람이 다 알게 번개와 같이 일시적으로 오신다고 했는데, 어떻게 나도 모르게 이렇듯 조용하게 왔소?"라고 한마디 해주었습니다.

참 별사람도 다 있습디다. 이런 자들이 사방에 많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우주적으로 오시겠다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주적으로, 다시 말하면 일시에 천치개벽처럼 꽝하고 오실 것입니다. 결코 서서히 점차적으로, 혹은 비밀리에 오시는 것이 아닙니다. 초림(初臨) 때는 베들레헴에 비밀리에 오셨습니다.

그러나 재림(再臨) 때는 우주적으로 오십니다. 명심할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일시에 오신다고 했습니다. 번개와도 같이 일시에 이루어진다는 예수님의 재림을 두고 가끔 이런 질문을 받습니다. "번개가 번쩍 한다 하지만, 지구가 둥근데 어떻게 일시에 오시노? 지구는 둥그니까 이쪽에 오실 때에는 저쪽에는 안 오실 것 아니냐?" 한국에 오시면 같은 때에 미국에서는 뵙지 못하는 것이 아니냐 하는 의문입니다. 한쪽에만 비칠 것이 아니냐 하는 의문입니다. 여러분, 왜 그렇게 지구를 크게 봅니까? 지구보다 큰 우주적 사건인데, 지구를 하나의 품에 안듯이 그렇게 역사가 이루어지는데, 지구가 녹아 없어지는 시간인데 그게 문제가 되는 것입니까? 그러니 얄팍하게 지구가 둥글다는 것 하나 알아 가지고 그런 소리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구를 한 점으로 안고 있는 '우주적 사건'입니다.

그런가하면 그렇게 큰 사건이면서도 동시에 아주 개인적인 사건입니다. 두 사람이 맷돌질을 하는데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남겨두겠다 하십니다. 그 많은 사람들이 있지마는 예외 없이 구원받을 사람은 구원받고, 멸망당할 사람은 멸망당할 것입니다. 그러니까 조금도 문제삼을 것이 없습니다. 사건이 아무리 크더라도 아주 세밀하게 개인적으로 종말이 옵니다. 한사람 한사람에게 적용되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의 사람은 어디에 있든지, 어느 땅 속에 어느 골방에 있든지 구원받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 주님의 긍휼을 얻지 못한 사람은 구원받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렇게 말씀하시면서 예수님께서는 이제 주검이 있는 곳에 독수리들이 모일 것이라고 결론을 내리십니다. 다시 한번 보십니다. "주검이 있는 곳에는 독수리들이 모일지니라" 몇 주간 전에 제가 중국에 갔을 때입니다. 제가 잘 아는 그곳의 교인을 하나 만났는데, 그 교인은 이른바 '문혁(文革)' 때에 숙청을 당해서 티베트 산골에 들어가 11년 동안을 갖은고생 다 하고 오신 분입니다.

그분이 "이 얼굴 좀 보세요"하기에 자세히 보니 끔찍합디다. 얼굴 껍질이 다 벗겨져가지고 볼품이 말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면서 티베트에서 고생하던 이야기를 하는데, "말로 이야기하면 목사님께서 믿지 않으실 겁니다"하고 사진을 보여줍디다. 수첩으로 만들어놓은 사진첩을 전부 뒤지면서 이야기하기에 한참동안 구경을 했지만 정말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있더군요. 사람이 죽어간다 하면 무당이 와서 한눈으로 보고는 "이젠 끝났소. 곧 죽겠소"하고 진단을 내리는데, 일단 그렇게 선언이 되면 그 즉시로 아직은 살아 있는 사람의 허리를 딱 꺽어가지고 막대기로 마당에 내다 달아맵니다. 아직도 살아 있는 사람을, 아직도 숨이 붙어 있는 생사람을 그렇게 처치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놓으면 이제 독수리들이 몰려와서 뜯어먹는 것입니다. 그것이 장례식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는 것은 가난한 사람들에 대해서이고, 부자는 조금 더 고급으로 합니다. 아직은 살아 있는 사람의 허리를 딱 꺽어 가지고 둘러메어 산으로 올라갑니다. 산 위에 널따란 바위가 있는데, 그 바위 사진 찍은 것을 보니 표면이 아주 빤질빤질합니다. 기름이 엉겨붙어서요. 그런 바위 위에 사람을 난도질해서 올려놓습니다. 아직은 숨이 붙어 있는 사람을 죽인 것이고 보니, 아직은 썩지 않은 육신을 갈기갈기 토막낸 것이고 보니 독수리 떼가 그야말로 새까맣게 모여들어 그것을 다 뜯어먹는 것입니다. 남김없이 청소해버립니다. 그러면 이제 "극락세계에 갔다"하고는 그 때부터 일주일동안 잔치를 벌입니다. 이것이 장례식입니다. 마니교의 습속입니다. 그러고 보니 종교라는 것이 참 무서운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종교에 빠져 있으면서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저들의 문화입니다. 그렇게 수천 년을 살아온 것입니다. 당연히 그래야 되는 줄로 알고 살아온 것입니다. 그 사진을 보면서 생각했습니다. '참 독수리 많이 키우고 있구나' -우리로야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지만 엄연한 사실입니다. 믿거나 말거나 그것은 분명한 사실인 것입니다. 보십시오. 저런 세상도 있는 것입니다. 한번 생각이 잘못되고, 종교가 잘못되고 보니 그 꼴로까지 되어버렸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이제 성경이 말하는 바, 이스라엘사람들이 가진 독수리의 개념을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독수리는 시체를 먹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독수리는 본디 썩은 것은 먹지 않는다고 합니다. 식성이 꽤나 고급이어서 썩기 전에 먹는다고 합니다. 죽은 것을 먹되 썩은 것은 안 먹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썩은 것은 누가 먹느냐? 까마귀가 먹어요. 그래서 성경에도 이것이 독수리냐 까마귀냐 하고 번역을 달리하는 사람들까지 있습니다. 아무튼 독수리는 시체를 먹는다고 이스라엘사람들은 생각합니다.

둘째로, 독수리는 빠릅니다. 병아리 같은 것을 채갈 때에 보면 잽싸기가 보통이 아닙니다. 멀리서 빙빙 돌다가도 땅에 기어다니는 쥐 한 마리를 보고 휙 날아와서는 번개같이 채 가지고 올라갑니다. 얼마나 날쌔고 빠른지 모릅니다. 그 높은 데서도 다 봅니다. 아주 환하게 보고 다닙니다. 성경에도 독수리가 빠르다는 표현이 많습니다. '독수리같이 빠르게'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멸망이 독수리같이 빠르게 임하니라 -독수리를 빠르다고 보기 때문에 이런 말을 합니다.

세째, 독수리는 모입니다. 모여듭니다. 특히 시체를 치우지 못했을 때에 모입니다. 장례도 치르지 못했을 때에 모입니다. 노출되어 있으니까 모여드는 것입니다. 당시에 가지고 있던 문화적 개념을 염두에 두고 독수리가 모이는 곳'의 뜻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한 개념에서 "주검이 있는 곳에는 독수리가 모일지니라"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심판을 뜻하는 말씀입니다. 최종심판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왜 재난이 있고, 전쟁이 있고, 지진이 있고, 어려움이 있느냐? 죽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주검이 있어서 독수리가 모이는 것입니다. 창세기 6장의 홍수사건도 사람들이 육체가 되었기 때문에 있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홍수는 산 사람을 죽인 사건이 아닙니다. 영혼이 죽었기에 하나님의 시각으로 볼 때에는 '주검'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이 다 죽고 없는 것입니다. 고깃덩어리만 꿈틀거리고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쓸어버리신 것입니다. 청소하신 것입니다. 그것이 홍수심판입니다.

오늘도 영적으로 볼 때, 하나님의 시각으로 한번 내려다볼 때에 과연 어떻겠습니까? 육체들이야 육체들대로 옷을 입었으니 망정이요 아마 벗겨놓고 본다면 참 가관이겠지만 그래도 숨쉬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모양 저런 모양, 병든 사람 건강한 사람, 젊은 사람 늙어빠진 사람으로 가지각색이겠지만 일단 육체는 그렇다 하더라도 지금 하나님께서 보시는 것은 그러한 육체들이 아닙니다. 그 속을 보십니다. 그 영혼을 보십니다. 몸은 건강하지 못한데 영혼은 건강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영혼이 병들어서 비틀비틀 비실비실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속이 영 죽은 사람이 있는 것입니다. 깊이 잠들었습니다. 죽은 지 오래됐습니다.

남은 것은 육체적 욕망뿐입니다. 동물적 욕망, 나아가 마귀적인 욕망, 악마적인 것만 남았습니다. 이런 사람은 건드리기만 하면 터집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툭 건드리기만 하면 속에 있는 썩은 것이 와르르 쏟아져 나오는 것입니다. 욕설이 나오고 악다귀가 끓어 넘칩니다.

주검이 있는 곳에 당연히 독수리가 모입니다. 영혼이 죽었으니, 생명이 없으니 독수리가 모일 수 밖에요. 뜯어먹으려고 말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분명히 아십시다. 독수리란 살아 있는 자를 건드리지는 않습니다. 살아 있는 생명은 문제가 없습니다. 살아서 약동하는 생명을 건드리는 독수리는 없습니다. 죽었다 하면 모여듭니다. 썩기 전에 뜯어먹고 마는 것입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영혼이 살아 있을 때, 그래서 숨을 쉬고, 그래서 말씀을 배우고, 그래서 기도하고, 그래서 열심히 봉사하고 뛰는데 언감 어디라고 독수리가 모여듭니까? 무슨 시험에 든단 말입니까? 여러분이 시원치 않다면 썩었기 때문입니다. 왜정말년, 신사참배 문제로 복잡했을 때에 어떤 신실한 장로님이 있어서 너도나도 신사참배한다고 하는데도 안 한다고 딱 버티었습니다. 죽어도 안한다고 버티었습니다. 순경이 와서 "신사참배 하십시다, 노인장. , 노인께서 뭣땀세 사서 고생하려고 하십니까? 그저 고개만 한번 꾸뻑하면 되는 것이니 심사참배 하십시다요." "시끄럽다, 이놈아!" 장로님은 언하에 물리칩니다. 순경이 또 왔습니다. 자꾸 와서 조릅니다. 마침내 장로님은 엉엉 울고 맙니다. 장로님이 우니까 그 순경이 ", 장로님, 울긴 왜 웁니까?" "왜 울다니, 이놈아, 내가 얼마나 썩었으면 이렇게 파리가 달라붙을까 해서 우는 거다, ?" 내가 튼튼하고 생명력이 약동하는 사람이었다면 감히 누가 와서 심사참배 어쩌고 하겠는가, 누가 건드리겠는가, 누가 감히 유혹을 하겠는가! 그런데 내가 시원치 않으니까 별것들이 다 모여드는구나, 별것이 다 와서 시험을 거는구나 -그래서 운다는 말씀이었습니다.

독수리가 모이는 것입니다. 독수리가. 잊지 말 것입니다. 살아 있는 생명을 건드리는 독수리는 없습니다. 감히 가까이하지 못합니다. 죽은 생명에 독수리가 모입니다. 그렇거늘 어느 때에 재림을 한다느니, 누가 어떻게 된다느니, 징조가 어떻다느니 합니다. 그런 것 알아서 뭘 합니까? 생명 있게 살아라, 주검이 있는 곳에는 독수리가 모이느니라 -이 말씀이 있지 않습니까?

또 하나, 독수리가 모인다는 것은 긍휼이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장례 할 사람도 없고 매장할 사람도 없습니다. 사람이 죽었는데, 이것을 장례치를 만한 긍휼도 얻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구약성경에 보면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그리고 많은 예언서에 누누이 나옵니다. '너희가 앞으로 환난을 당할 때에 시체가 쌓이리라, 시체가 쌓일 때에 그것을 매장할 자가 없으리라'합니다. 다 죽었습니다. 다 죽었는데 누가 시체를 치웁니까? 시체가 그냥 노출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독수리가 뜯어먹는 것입니다. 의인이 한 사람도 없고 산 사람도 하나 없다는 말씀입니다. 소돔과 고모라에 의인 열 명만 있었어도 그 성은 멸망치 않았습니다. 의인 열 명이 없었기 때문에 망한 것입니다. 몇 사람이라도 살아있는 사람이 있어야 하는데, 몇 사람이라도 하나님의 사람으로 건강하게 살아 있어야 하는데 다 죽어버렸으니 장례치를 만한 사람이 없습니다. 시체만 있으니 독수리가 모일 수밖에 없습니다. 얼마나 비참하고 얼마나 구체적인 이야기입니까?

세상 끝에 주님께서 오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무 것도 두려워하지 말라 하십니다. 택한 자들을 위하여 그날을 감하시리라 하십니다.

없게 한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이 충분히 이길 수 있을 만큼, 믿는 사람들이 구원받을 수 있을 만큼, 그만큼의 고난과 환난만 있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걱정할 것 하나도 없습니다. 역사의 주인은 그리스도시요, 모든 환난은 주의 백성을 구원하시는 과정이며, 주의 백성으로 온전케 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역사를 밝히 나타내시는 과정이요 사건들이라는 것을 명심할 것입니다. 다시 한번 깊이 생각해보십시다.

"주검이 있는 곳에는 독수리들이 모일지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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