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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대하라! (요 16:25-33)

by 【고동엽】 2024. 3.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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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대하라! (요 16:25-33)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남기신 말씀의 연속입니다. 제자들은 무엇인가 알 수 없
는 두려움으로 갈피를 잡지 못하자, 주님은 그들의 입장을 이해하시고 위로하시며 사랑의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저들이 곧 배반할 것까지도 아시면서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사실 베
드로만 예수를 모른다고 배반한 것이 아니라 나머지 제자들도 다 도망갔습니다. 그 중 사도
요한이 십자가를 지는 현장에 있었다고 하지만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를 지지는 못했습니다.
3년 동안 동고동락하던 제자들이 이렇게 도망갈 것을 예수께서는 예언을 하시고 경고까지
하십니다. 이런 경우에 우리들로서는 이성을 잃을 수도 있고, 섭섭한 마음에 제자들을 책망
하고 원망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외로움과 배신 속에서도 저들을 끝까지 사랑하
셨습니다. 아니 사랑하셨을 뿐만 아니라 용서까지 하고 계셨습니다. 배신할 것을 예고하시면
서 사랑하고 용서하셨습니다.
한 가지 더 중요한 것은, 제자들을 믿었다는 것입니다. 잠깐 실수를 하겠지만 결국에는 예
수님을 위해 순교할 것까지 내다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배신과 처절한 고통 속에서도 실망하지 않으시고 저들을 믿었던 것입니다. 베드
로에게 말씀하신 것을 보면, "네가 나를 모른다고 하리라"고 미리 알고 계셨지만, 또한 그가
회개하고 예수님을 위해 죽을 것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실망하지 않았습니다. 배반할
것을 말씀하시면서 책망 대신에 용서하고 사랑하시며, 그리고 믿었다는 것은 놀라운 이야기
입니다. 예수님의 이 사랑 때문에 후에 제자들이 모두 순교를 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뿐만 아니라, 오늘 본문에서는 제자들의 성숙함에 대해서도 상당한 수준으로 인정하셨습니
다.
이 본문에서는 제자들을 인정하심에 대해 비유로 말씀하시지 않고 직선적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가 아버지께로 나와서 세상에 왔고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노라." 전
에는 몰랐지만 이제는 알 것이고 그 때는 내가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너희들이 알 것이다.
즉 제자들의 지식 수준이 상당한 경지에 와 있음을 인정해 주고 계십니다. 다시 말하면, 이
제는 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들을 때가 되었음을 인정하고 믿으시는 것입니다. 심리적
으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가 있습니다. 사람은 자신이 괴로울 때 주위에 있는 다른 사
람까지 괴롭히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식구 중 한 사람이 저기압이면 온 집안 식구의
분위기를 흐려 놓기도 합니다. 이런 사람은 자기 생각을 기준으로 해서 남을 보는 사람입니
다. 가령, 새가 지저귀는 것을 보고, 새가 운다고 말하기도 하고 새가 노래한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사실은 새가 노래하는지 우는지 새의 언어를 정확히 모릅니다. 단지 새소리를 듣는
사람들의 기분에 따라서 새가 우는 것 같기도 하고 노래를 부르는 것 같기도 한 것입니다.
즉 자기 감정, 기분이 주체가 되어 상대방을 보는 것입니다. 이런 입장에서 본다면, 지금 예
수님의 상황은 어떠합니까? 눈 앞에는 십자가가 있고 제자들은 곧 도망갈 것입니다. 무척이
나 힘들고 불안한 시간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다가, 네가 크냐 내가 크냐로 철없는 자리
다툼이나 하는 제자들이었으므로, 한 번쯤은 불호령을 내리며 화를 내실 수 있는 분위기입
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보통 사람들인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그런 감정은 그림자조차 없습
니다. 오히려 그들을 위하여 장래를 걱정하시며 그 가운데서도 믿었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
해도 놀라운 이야기입니다. 이 시간에 제자들을 책망하셨다고 해서 잘못되었다고 말할 사람
은 전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기의 형편에 기준을 두어 제자들을 보신 것이
아니라, 제자들을 기준으로 그들이 앞으로 살아나갈 것을 생각하시어 걱정하며 위로하셨습
니다. 진정한 위로란 내 기분과 형편을 잠깐 제쳐놓고 상대방 중심으로 그를 기쁘게 하여
그 기쁨 속에서 내가 위로를 받는 것입니다. 누가 나를 위로해 주어서 위로받기는 어렵습니
다. 어이없게도 내가 먼저 남을 위로하다 보면, 나도 위로를 받습니다. 사랑도 마찬가지입니
다. 내가 사랑받아서 사랑을 느끼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내가 사랑하면 사랑의 참 즐거움
을 맛볼 수 있습니다.
이 본문에서는 제자들을 위로하시며 두려워하지 않아야 할 세 가지 이유를 말씀하고 있습
니다. 첫째 이유는, 기도의 문이 열렸기 때문입니다. "그 날에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할 것
이요, 내가 너희를 위하여 아버지께 구하겠다 하는 말이 아니니."(요 16:26) 그들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게 되었고,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기도
를 들으시게 되었단 말입니다. 이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불러 기도하고 하나님은 저들을 자
녀로 삼으셔서 기도를 들으시는, 소위 기도의 줄이 이어졌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모든 문제
의 해결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신 목적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구체적으로
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자녀로 만들어서 하나님과 우리와의 사이가 진노의 관계가 아닌
사랑의 관계로, 원수의 관계가 아닌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로 관계를 맺어주신 것입니다. 예
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에 막달라 마리아에게도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십자가에 돌아가심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가 곧 우리의 아버
지가 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여기서 기도의 문이 열렸다는 것입니
다. 기도의 문이 열렸다는 것은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는 말입니다. 믿는 사람으로서 가장 어
려운 고통은 기도가 막히는 것입니다. 때로는 누구를 미워하고 미움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 미움 때문에 기도가 막힌다는 사실입니다. 친구 사이가 나빠지면 아무리
내가 주장할 수 있는 이유가 있다 해도 기도가 막히는 데는 도리가 없습니다. 예수님 이름
으로 하나님께 구할 수 있음은 기도의 문이 열려져 있는 것이므로 두려워할 이유가 없습니
다. 로마서 8장에 보면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롬 8 : 15-16)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됨을
확증해 주는 성령의 역사가 있으므로, 우리는 아버지라 부르면서 기도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가 기도로써 연결되어 있다는 것은, 무엇이든 주님의 이름으로 구하
면 주실 것이므로, 두려워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둘째 이유는, 하나님께서 친히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이는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나
를 하나님께로서 온줄 믿은고로 아버지께서 친히 너희를 사랑하심이니라."(요 16 : 27) 친히
사랑하신다는 것은 직접 사랑하신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친히 사랑하시는 이유는 무엇입
니까? 첫째는 우리가 예수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
하심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랑 받을 자격이 있어서 사랑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
님께서 사랑하시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셨기 때문에, 즉 그리스도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필자가 잘 아는 어느 장로님의 아들이 친구들과 공기총을 가지고 놀다가, 친구가 오발을 해
서 아들이 죽었습니다. 실수라 하더라도 내 아들을 죽인 그를 사랑하기란 무척 어려운 일입
니다. 그러나, 장로님은 아들을 죽인 아들의 친구를 양자로 삼았습니다. 몰론 장로님 아들이
친구를 위해서 죽은 것은 아니지만 대단히 어렵고도 중요한 결단을 내리신 것입니다. 가령,
내가 극진히 사랑하는 아들이 자기 친구를 너무 사랑해서 그를 위해 죽었다고 합시다. 그러
면, 나는 내 아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즉 죽은 내 아들을 위해 아들의 친구를 사랑할 수밖
에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 믿고 구원 얻는 길이 바로 이렇게 열려진 것입니다.
우리의 의가 하나님께 상달되어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그리스도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게 된 것입니
다. 참으로 귀한 복음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그리스도가 우리를 사랑하시므로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나를 하나님께로서 온줄
믿은고로 아버지께서 친히 너희를 사랑하심이니라", 논리 정연한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를 사랑하시는 또 하나의 이유는 예수님이 하나님께로부터 온줄을
우리가 믿기 때문이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계시자요 하나님의 아들임을 믿는 우
리의 믿음 때문에 사랑하신다는 말입니다. 누구나 사랑을 받을 수 있으려면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전적으로 믿을 때만이 사랑을 받는 것이지, 의심하는 자는 사랑을 받을 수가 없습니
다. 하나님께서 아들을 보내시어 리를 사랑하신 것을 믿는 그 믿음이 있고서야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세째로, 두려워하지 않아야 할 이유는 그리스도께서 환난을 이기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다가오는 환난을 어떻게 이기셨습니까? 본문에서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
이라"고, 지금 예수님 안에 평안이 있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를 앞에 놓고
평안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먼저 소극적으로 생각하면 예수님의 고독입니다. "보라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요 16:32 상반
절) 제자들이 곧 도망갈 것을 내다보신 예수님은 고독하셨습니다. 두려움을 해결할 수 있는
길은, 인간적으로 표현하면 고독이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보면 직선적인 신앙입니다.
세상에 여러 가지 걱정이 많지만 하나님과 나 사이에 직선적인 관계가 되면 걱정거리는
다 사라지고 맙니다. 바꾸어 말하면 세상적으로 고독해야 하나님과의 관계는 평안해진다는
말입니다. 가령, 내가 지금 죽어간다고 합시다. 내가 죽으면 아이들은 누가 돌아보고, 살림
은, 사업은 기타 등등으로 걱정거리가 태산입니다. 그러나, 정말 큰 걱정은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입니다. 결정적인 순간이 오면 세상적인 시시한 걱정은 사라지고 나의 영혼이 문제란
말입니다. 지금 예수님의 고독은 대단히 의미 있는 고독으로 하나님과의 직선적인 관계에서
평안을 얻고 계시는 것입니다.
다음, 예수님은 "내가 아버지께로 간다"(요 16:28)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죽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스스로 아버지께 감으로 두려움 없이 평안할 수 있으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10:18에
서도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고 마음으로 원해
서 하시는 일임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스스로 십자가를 지시는
것이지 마지못하여 억지로 끌려가듯 지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생명에 대한 의미를 바로 가져야 합니다. 죽지 않으려고 바둥거리는 것이
아니라, 내가 가는 것이고 스스로 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시면 "네, 갑니다" 하며
내가 가야 한다는 말입니다.
다음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을 아셨으므로 평안하셨습니다. 사실은 가룟 유다가 예수를
팔았고 베드로가 배신했으며 빌라도와 로마 군인들이 못박았습니다. 생각하면 절망할 수밖
에 없는 여러 가지 사건들이 있었지만 예수님은 그것들을 생각지 않으셨습니다. 두려움을
해결할 수 있는 길은 아버지께서 함께 하신다는 생각입니다.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요16 : 32 하반절) 하나님은 의로운 일을 행할
때 함께 하시고, 의로운 희생을 지불할 때 함께 하시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때 함께 하시
고 믿음으로 살 때에 함께 하십니다. 그러므로, 두려움이 없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제자들
을 믿었기 때문에 두려움이 없었습니다. 지금은 잠깐 배반하겠지만, 예수님의 수고가 헛됨이
없이, 먼 훗날 열 한 제자가 모두 교회를 세우고 온 세계에 복음을 전파할 기틀을 세울 것
을 믿으셨습니다. 이러한 믿음 때문에 두려움 없이 평안한 마음으로 제자들을 위로하시며 "
내가 세상을 이겼노라"고 결정적인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내가 세상을 이겼노라" 과거사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미 말씀드렸지만, 히브리어의 문
법으로 결정적인 이야기를 말할 때에는 과거사로 말하고 반복적인 이야기는 현재로 말합니
다. 시제에 상관없이 미래나 현재에 있어서 단회적인 사건이나 확실한 일에는 과거사로 표
현하는 것입니다. "세상을 이겼노라" 하는 것은 사건 자체를 말하는 것으로 "사건적 시간관"
입니다.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고난을 합해서 이겼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과거에는 이겼
는데 앞으로의 고난은 두고 봐야 알겠다는 말이 아니라 이 모든 고난을 합쳐서 이겼다고 확
실하게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의 승리입니다. 이 승리는 사랑으로 이긴 것이요, 믿음으로 이긴 것이
요, 하나님께 전적으로 위탁하므로 이긴 것입니다.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
옵소서." 여기서 승리의 신비를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이겼노라" 하신 말씀과 나와는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이 관계성을 아
는 것이 대단히 중요한 일입니다. 본문 32절 하반절을 조금 바꾸어서 말하면, "내가 세상을
이겼으니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담대하라"고 옮길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겼는데 왜
우리가 두려워하지 않아야 합니까? 첫째는 예수께서 먼저 길을 열어 놓으셨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세상을 이길 수 있습니다. 눈길을 갈 때에 앞에 먼저 간 사람의 발자국이
있으면 나도 갈 수 있습니다. 달나라에 나는 아직 가지 못했지만 어윈 대령이 갔다왔으므로,
나도 갈 수 있습니다. 얼마나 중요한 이야기입니까? 예수께서 이기셨으므로 우리도 이길 수
있음을 의미합니다. 둘째는 가능성을 보여주셨습니다. 이제는 불가능하다고 말할 수 없습니
다. 예수께서 승리하셨으므로 승리의 문은 열린 것입니다. 세째는 예수께서 대표로 이기셨습
니다. 우리 나라 운동선수가 외국에 나가 시합을 하게 되면, 우리는 밤을 새워가며 응원을
하고, 이기면 내가 이긴 것처럼 좋아합니다. 선수가 이겼는데 왜 내가 좋아합니까? 문제는
그들이 한국을 대표해서 이겼으므로 그들이 이긴 것이 곧 내가 이긴 것이 됩니다. 필자가
처음 미국에 갔을 때 한국 사람은 모두 태권도를 잘하는 것으로 생각해서 태권도를 가르쳐
달라고 부탁을 해 아주 곤란한 적이 있었습니다. 외국에 나가면 우리 한 사람이 모두 한국
의 대표입니다. 이처럼, 예수께서 이기신 것은 대표로 이긴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승리는
곧 나의 승리로서, 동시에 함께 이긴 것입니다. 혼자 이기시는 것이 아니라 나와 함께 이겨
주십니다.
히브리서 12장에 보면,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
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고… 예수를 바라보자"(히12:1-2)는 말씀이 있습니다. 스데반이 순
교할 때 혼자 순교한 것이 아닙니다. 스데반이 돌에 맞으며 하늘을 바라보았을 때 하나님
우편에 계시는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예수께서 바라보고 계시니 힘이 나서 죽은 것이지 결
코 혼자 죽은 것이 아닙니다. 스데반의 순교를 예수께서 함께 거들어 주신 것입니다. 좀더
나아가서는 대신 이겨주십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을 그가 대신 하십니다. 어떤 사람이 어린
아이의 손목을 잡고 해변가를 거닐었습니다. 크고 작은 네 개의 발자국이 뚜렷하게 보이다
가 갑자기 작은 발자국이 사라졌습니다. 어찌된 일일까요? 가다가 어린아이를 업고 갔기 때
문입니다. 우리가 약할 때에는 주께서 붙들고 가시지만, 아주 쓰러지면 업고 가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겼노라"고 우리에게 용기를 주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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