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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곽선희 목사 설교

네 보던 일을 셈하라(누가복음 16:1-8)

by 【고동엽】 2024. 3.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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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보던 일을 셈하라(누가복음 16:1-8)

 

 

또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떤 부자에게 청지기가 있는데 그가 주인의 소유를 허비한다는 말이 그 주인에게 들린지라 주인이 저를 불러 가로되 내가 네게 대하여 들은 이 말이 어찜이뇨 네 보던 일을 셈하라 청지기 사무를 계속하지 못하리라 하니 청지기가 속으로 이르되 주인이 내 직분을 빼앗으니 내가 무엇을 할꼬 땅을 파자니 힘이 없고 빌어먹자니 부끄럽구나 내가 할 일을 알았도다 이렇게 하면 직분을 빼앗긴 후에 저희가 나를 자기 집으로 영접하리라 하고 주인에게 빚진 자를 낱낱이 불러다가 먼저 온 자에게 이르되 네가 내 주인에게 얼마나 졌느뇨 말하되 기름 백 말이니이다 가로되 여기 네 증서를 가지고 빨리 오십이라 쓰라 하고 또 다른 이에게 이르되 너는 얼마나 졌느뇨 가로되 밀 백 석 이니이다 이르되 여기 네 증서를 가지고 팔십이라 쓰라 하였는지라 주인이 이 옳지 않은 청지기가 일을 지혜있게 하였으므로 칭찬하였으니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로움이니라

 

그리스의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음미되지 않는 인생은 살 보람이 없다." 평가되고 반성되지 않는 인생은 살 가치조차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정채봉 선생의 저서 가운데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60년대에, 서울로 올라온 한 시골청년이 서울사람들의 사는 모습을 보고 고향에 있는 친구에게 편지를 띄웁니다. '서울사람들의 삶의 목표는 오직 일자리를 구하는 데에 있는 것 같다. 모두가 일자리를 찾느라 애쓰고 있다.' 70년대에 들어서 이 청년은 다시 고향친구에게 편지를 합니다. '서울사람들의 삶의 목표는 돈에 있는 것 같다. 돈을 벌기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이것이 그의 눈에 비친 서울사람들의 모습이었습니다. 80년대에 들어서자 이 청년은 친구에게 다시 편지를 합니다. '지금 서울사람들의 삶의 목표는 권력에 있는 것 같다. 권력을 잡기 위하여 갖은 노력을 다한다. 권력이면 모든 일이 다 될 것처럼 생각한 나머지 그 권력을 잡기 위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힘쓴다.'

90년대에 들어서서 다시 편지를 합니다. '서울사람들의 사는 모습은 곧 스피드다. 얼마나 바쁘게 사는지 단 1분의 시간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걸고 달린다.' 시골에 있는 친구가 서울에 있는 친구에게 답장을 보냅니다. 그 편지에는 이런 질문이 있습니다. '그렇게 위험을 무릅쓰고 벌어들인 그 1분이라고 하는 시간을 어디에 쓰고 있는지 알려주기 바라네.' 서울에 있는 친구는 다음과 같이 회답했다고 합니다. '1분을 다방에서 차 마시며 노닥거리고 텔레비전 보고 고스톱 치고 입 벌리고 조는 데에 쓴다네.' 여러분은 돈을 벌기 위하여, 권력을 얻기 위하여, 지위를 얻기 위하여 그렇게 바삐 뛰어다녀서 얻어놓은 그 1분을 어디에 쓰고 있습니까? 그 최종목표는 무엇이었습니까? 그래서 한 일은 무엇이었습니까? 우리의 현실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히브리사람들의 지혜를 모아놓은 탈무드는 인간을 평가하는 기준에 세 가지가 있다고 말합니다. 히브리말로 '키소, 코소, 카소'라고 하는 그 기준의 첫 번째인 '키소'는 돈을 넣는 주머니를 말합니다. 도대체 돈을 어디에 어떻게 쓰고 있느냐가 그 사람을 평가할 수 있는 기준이 됩니다. 도대체 우리는 1년 동안 돈을 어디에다 어떤 기준으로 썼습니까? 우리의 가계부는 무엇을 말해주고 있습니까? 돈을 어떻게 쓰느냐---이것이 바로 그 사람을 평가할 수 있는 바로미터입니다.

두 번째 '코소'는 술잔으로, 이것은 향락을 의미합니다. 무엇을 즐기고 있느냐, 무엇에 빠져 있느냐, 무엇이 내 마음을 빼앗아 버렸느냐가 그 사람을 평가하는 기준이 됩니다. 여러분이 가장 소중하게 즐겼던 일은 무엇이었습니까? 이것이 그 사람의 인생을 평가하는 기준이 됩니다.

세 번째 '카소'는 사람의 노여움을 가리킵니다. 인내력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하면 자기를 얼마나 억제할 수 있었느냐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인내력은 얼마나 성장하였습니까? 대체로 우리가 가지는 고통 가운데 가장 참을 수 없는 고통이 후회라고 합니다. 그 때 그 말을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그 때 그 길로 가지 말았어야 했는데…… 후회가 참으로 많습니다. 이 모든 일들은 대체로 인내력 부족에서 비롯합니다. 여러분의 인내력은 점점 더 넉넉해지고 있습니까, 아니면 불안과 초조에 점점 더 민감해지고 있습니까? 사람의 덕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 그 인내력으로 평가되는 것입니다. 느긋하게 참고 기다릴 줄 아는 것이 바로 인격의 성장인 것입니다.

올 한 해도 벌써 다 지나갔습니다. 오늘 주신 말씀을 통하여 지난 1년을 되짚어 반성해볼 수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오늘의 본문말씀을 보십시오. 한 청지기가 있습니다. 청지기란 아주 묘한 직책입니다. 주인에게는 종이요, 다른 종에게는 주인입니다. 주인으로 위임받은 권한을 가지고 주인행세 하는 것이 바로 청지기입니다. 주인을 대할 때에는 충성을 다해야 할 타율적 복종적 위치에 있습니다. 주인의 뜻을 온전히 받들어 시행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주어진 권한 안에서 그 휘하의 많은 사람들을 다스리고, 많은 재산을 나름대로 관리하는 등의 상당한 자율권도 있습니다. 이렇듯 청지기는 자율과 타율, 그 긴장관계를 오갈 수 있는 중요한 존재입니다. 이러한 한계 안에서의 자유를 향유하고 있습니다.

나아가 주어진 바 한계 안에서 신문을 받습니다. 할 수 없었던 일을 들어 문책하는 것이 아닙니다. 할 수 있는 일을 안했기에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모르는 일을 가지고 묻지 않습니다. 알고 있는 일을 묻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가능성, 우리가 충분히 할 수 있었던 일에 대하여 우리는 문책을 받을 것입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돈, 우리가 가지고 있는 건강, 우리가 가지고 있는 지식, 나아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시간, 정력, 지위, 권한, 할 수 있었던 일…… 이 주어진 자유의 한계 안에서 우리는 이 시간, 하나님 앞에 나아가 문책을 받을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네 보던 일을 셈하라(2)." 주인이 청지기에게 그동안 하던 일을 셈하라고 명합니다.

이 결정적 종말론적 시간에 그는 대답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윤리적 선입견으로 읽어서는 안됩니다. 종말론적 차원에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다시한번 깊이 생각해보세요. 이 사람, 청지기 노릇을 하다가 어느 순간 자율의 한계를 넘어 주인의 뜻을 어기고 돈을 멋대로 관리한 것 같습니다. 주인의 재산을 낭비해버렸습니다. 이 소식을 듣고 주인이 책망을 합니다. 내가 네게 대하여 들은 이 말이 어찌된 것이냐고 묻습니다. 네 보던 일을 셈하라, 청지기 사무를 계속하지 못하리라 명합니다. 이렇게 주인의 명령이 떨어질 때에 이 사람은 생각합니다. '주인이 내 직분을 빼앗으니 무엇을 할꼬. 땅을 파자니 힘이 없고, 빌어먹자니 부끄럽구나.' 그는 궁리 끝에 주인에게 빚진 자들을 낱낱이 불러들입니다. 먼저 온 사람에게 묻습니다. "네가 내 주인에게 얼마나 졌느뇨?" "기름 백 말이니이다"라고 대답하는 그에게 "네 증서를 가지고 빨리 앉아 오십이라 쓰라" 명합니다. 또 다른 사람에게 묻습니다. "너는 얼마나 졌느뇨?" "밀 백 석이니이다." "네 증서를 가지고 팔십이라 쓰라." 이렇듯 청지기는 주인의 돈을 가지고 인심을 씁니다. 요새로 치면 이는 공문서위조에 횡령죄에 해당합니다. 그러나 어쨌든 그 청지기는 지금 인심을 쓰고 있습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이 청지기는 나쁜 사람입니다.

그동안 숱하게 주인을 속여왔습니다. 진실하지도 못하고 부지런하지도 못하고 성실하지도 못합니다. 그러나 오늘의 본문 맨 마지막 구절을 보십시오. "주인이 이 옳지 않은 청지기가 일을 지혜 있게 하였으므로 칭찬하였으니(8)"---주인이 그 청지기를 칭찬하고 있습니다. 이 청지기는 진실하지도 부지런하지도 못한 나쁜 사람입니다. 그러나 지혜가 있었습니다. 주인은 다른 나쁜 점은 다 제쳐두고 바로 이 지혜 하나만을 보고 크게 칭찬한 것입니다. 성경에는 없습니다마는 주인이 그 청지기를 칭찬한 것을 미루어 그를 내쫓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 다시 기회를 주었을 것 같습니다.

지난날의 실패를 경험삼아서 앞으로 더 잘하라고 기회를 주셨겠거니 연상이 됩니다.

저는 이 본문말씀을 읽을 때면 꼭 생각나는 사람이 있습니다.

달란트비유에 나오는 착하고 진실된 종입니다. 마태복음 25장에 보면 주인이 종들을 불러 각각 5달란트, 2달란트, 1달란트를 맡기고 타국에 갔다가 돌아옵니다. 5달란트를 가졌던 종은 다시 5달란트를 남겨서 주인에게 드렸습니다. 그러자 주인은 그 종의 충성됨을 크게 칭찬하며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하라고 하지 않습니까? 물론 오늘의 본문에 나오는 청지기가 받은 칭찬은 달란트 비유에 나오는 착하고 진실된 종이 받은 칭찬과는 전혀 다릅니다. 어찌보면 이 청지기는 지극히 현대적이요 못된 사람입니다. 그러나 꼭 한가지 좋은 점이 있었습니다. 결정적인 시간에 지혜가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주인의 칭찬을 받았던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말씀을 좀더 깊은 뜻으로, 좀더 현실적으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그 청지기의 어떤 점이 지혜로웠는지 한번 생각해보아야 하겠습니다. 먼저, 그는 마지막날에 대해서 알고 있었습니다.

지금까지는 자기가 가키고 있는 권한에 대해서 내 물질처럼 내 시간처럼 내 능력처럼 행세했지만, 주인이 말씀하시는 시각에 이것이 내 시간이 아니구나, 이것이 내 것이 아니구나 하는 것을 인정했습니다.

여러분, 지금까지 내 마음대로 살아온 것 같습니다. 돈이 내 것입니까? 건강이 내 것입니까? 지혜가 내 것입니까? 어느 하나 내 것이 없습니다. 여러분, 지금은 총명할지라도 얼마 안가서 가물가물 기억력이 다 없어질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처럼 위하는 건강도 이제는 점점 멀어져갑니다. 생각해보십시오. 내 것이 어디에 있습니까? 원래부터 내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내 것처럼 착각을 했던 것입니다. 이제야 깨달은 것입니다. 내 것이 아니라는 것을. 그 청지기는 이것이 주인의 것이라는 것을 깨닫고 인정했습니다. 이것이 지혜였다는 말씀입니다.

실러(Schiller)는 시간에 대하여 이렇게 말한 바 있습니다.

'시간의 걸음을 세는 방법은 세 가지다. 미래는 주저하면서 다가오고, 과거는 영원히 정지해 있고, 현재는 화살처럼 날아간다.' 그렇습니다. 현재라고 하는 시간은 쏜 화살처럼 빨리 지나갑니다.

결국은 내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모든 것이 내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을 얼마나 확실하게 인정하고 살아갑니까? 모든 것이 내 것이 아님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을 깨닫는 것이 지혜입니다.

또한 주인이 잘못을 묻고 보던 일을 셈하라 명했을 때에 청지기는 구차하게 변명 따위를 늘어놓지 않았습니다. 그 소문이 잘못된 것입니다, 내가 잘못한 것은 누구 때문입니다…… 이런저런 구차한 변명을 하지도 않고, 나아가 구차하게 기회를 다시 달라고 애걸하지도 않았습니다. 지난날은 잘못했으니 다시 기회를 주시면 성실하게 일하겠나이다 하며 손이 발이 되도록 빌었다는 이야기는 성경 어디에도 없습니다. 다만 주인이 네가 잘못했으니 청지기 직분을 중지하라고 명하자 ', 알았습니다'하고 그대로 따를 뿐입니다. 이것이 회개입니다. 사실을 사실대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아무 변명도 없습니다. 주인이 잘못했다고 하는 데 대해서 '사실이 그렇습니다'하며 따릅니다. 심판을 그대로 수용하고 인정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지혜입니다.

나아가 그 청지기는 남아 있는 기회를, 시간을, 권한을 최선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지혜가 있습니다. 없는 것을 서러워하지 않고, 없어지는 것에 미련을 품지 않고, 현재 남은 시간, 주인이 셈하라고 주신 시간을 잘 이용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 청지기는 지혜로운 자인 것입니다.

어느날 상담소에 한 중년부인이 찾아왔습니다. 상담원이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라고 묻습니다. 그 부인, 이야기는 하지 않고 그저 울기만 합니다. 슬프게 슬프게 울기만 합니다. "말씀을 하셔야 제가 조언을 해드리지요"하는 상담원의 말에 그 부인은 간신히 울음을 그치고 말합니다. "청춘을 잃어버렸습니다." 여러분, 아무리 훌륭한 상담 선생님이라 할지라도 청춘을 되돌려줄 수는 없지 않습니까? 상담 선생님이 이렇게 조언합니다. "잃어버린 청춘을 생각하지 말고, 아직도 손에 쥐고 있는 중년을 생각하십시오. 당신은 아직도 할일이 많습니다. 아직도 멀쩡해요. 꼭 청춘이라야 무슨 일을 할 수 있는 것처럼 착각하지 마십시오." 지금 해야 할 일이 얼마나 많으냐, 현재를 소중히 여겨야 한다고 말해주었다고 합니다.

여러분, 지난 한 해를 돌이켜 반성해보십시오. 오늘까지 살아온 생이 올발랐는지 그릇됐는지를 생각하고, 냉정하게 비판도 해보십시오. 잃어버린 청춘, 잃어버린 기회에 대해서는 연연해하지 마십시오. 내가 숨쉬고 있다는 것은 기회가 아직 내게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엄연히 내게는 맑은 정신이 있고, 건강이 있습니다. 해야 할 일이 엄청나게 많습니다. 그것을 찾아야 합니다. 이것이 지혜입니다.

뿐만아니라 청지기는 마지막 기회에 자비를 생각했습니다.

앞으로 살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하면, '이제는 먹고 마시자'고 생각하기가 쉽습니다만 그렇지가 않습니다. 남은 시간을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어느 일본 작가가 쓴 소설에 보면 위암으로 6개월 진단을 받은 주인공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6개월 후에 당신은 죽을 것이오"하는 의사의 말을 듣고 이 사람이 술을 마시고 방탕하기 시작합니다. 생전 안가던 술집에 가서 안하던 짓을 하면서 방탕한 생활을 합니다. 그러나 결국 그는 한 어린이의 말을 통해서 '내게는 아직 할 일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정신을 차리고 남은 6개월을 가장 뜻있게 보낸다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이제 남은 마지막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하겠습니까? 오늘이 마지막날이라면 여러분은 무엇을 생각할 것입니까?

트루엇박사가 텍사스에서 석유사업을 하는 어느 부유한 가정에 초청을 받았습니다. 식사 후에 이 주인이 박사에게 자기자랑을 늘어놓았습니다. "저는 25년 전에 빈손으로 이 마을에 들어왔습니다. 무진 고생과 노력으로 지금은 이렇게 부자가 되었습니다. 저 동쪽에 있는 석유공장도 제 것이고, 서쪽에 있는 유전도 제 것입니다. 남쪽에 있는 건물도 제 것이고, 북쪽에 있는 고층건물도 제 것입니다"하고 주위를 삥 둘러보며 지나치다 싶게 자랑을 하더랍니다. 그러자 트루엇박사가 손가락을 하늘로 향해 쳐들면서 "동쪽도 서쪽도 당신 것인데 하늘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하늘에 쌓아놓은 것은 무엇입니까?"하고 묻습니다. 모름지기 마지막 시간은 가장 선한 일, 가장 의로운 일, 가장 긍휼을 베푸는 일에 쓰이어야 할 것입니다.

특별히 본문의 청지기는 주인의 본뜻을 읽을 줄 아는, 주인의 마음씨를 읽을 줄 아는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아무리 보아도 주인은 착한 사람입니다. 그 주인은 청지기가 자신의 재산을 가지고 횡령하는 것은 잘못이지만 착한 마음씨를 가지고 좋은 일을 하려고 하는, 그 긍휼을 베푸는 마음을 기특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그래서 왜 내 재산을 가지고 못된 짓을 하느냐고 책망하지 않고, 오히려 옳지 않은 청지기가 지혜롭게 했음으로 칭찬합니다. 이렇듯 주인은 자비를 아는 분이요, 긍휼이 많은 분입니다. 그리고 청지기는 그 주인의 뜻을 알고 있었습니다. 사실 이 청지기가 처음부터 긍휼을 베풀고 선한 일을 했던 것은 아닙니다. 마지막 순간에 정신을 차리고 주인의 본뜻으로 돌아가서 긍휼을 베푸는 일, 선한 일을 했던 것입니다. 게다가 그 방법도 그리 올바른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주인은 이를 두고 지혜롭게 처신했다고 칭찬하고 있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이란 어떤 사람입니까? 내가 처한 현실을 아는 사람입니다. 내가 무엇을 얻었고 무엇을 잃었는지, 지금 이 시간에 내가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을 할 수 없는지, 해야 할 일이 무엇이고 하지 않아야 할 일이 무엇인지, 나아가 적자인지 흑자인지를 구분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내가 위임받은 한계에 대해서 스스로 지혜롭게 판단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제 남은 시간에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지난 일을, 지난 시간을 후회하지는 말 것입니다. 비록 지난 시간에는 진실하지도 성실하지도 부지런하지도 못했을망정 마지막에는 지혜로운 자가 되어야 합니다. 마지막 기회에는 반드시 지혜로운 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선을 생각하고, 긍휼을 생각하고, 미래를 선행으로 준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겨울은 내가 여름에 무엇을 해야 했는지 묻는 시간이 되듯이 이제 우리는 다음 시간에 오늘에 대해서 물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아직 형 집행을 치르기 전의 마지막 기회가 시한부로 주어져 있습니다. 바로 이 시간에 지혜와 긍휼을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서 마지막 순간에 하나님께로서 지혜로운 자라고 칭찬 받을 수 있는 귀한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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