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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한복음 8:31-40)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저희가 대답하되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케 되리라 하느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종은 영원히 집에 거하지 못하되 아들은 영원히 거하나니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 나도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아노라 그러나 내 말이 너희 속에 있을 곳이 없으므로 나를 죽이려 하는도다 나는 내 아버지에게서 본 것을 말하고 너희는 너희 아비에게서 들은 것을 행하느니라 대답하여 가로되 우리 아버지는 아브라함이라 하니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며 아브라함의 행사를 할 것이어늘 지금 하나님께 들은 진리를 너희에게 말한 사람인 나를 죽이려 하는도다 아브라함은 이렇게 하지 아니하였느니라
집에서 키우는 개들은 주인의 휘파람 소리를 좋아합니다. 주인의 휘파람 소리가 나면 꼬리를 치며 반가워하고 달려갑니다. 그러나 쇠사슬에 매인 개는 그 자리에서 맴돌 뿐 주인에게 달려가지 못합니다. 또한 잠들고 있는 개는 자기가 쇠사슬에 매여 있다는 것을 의식하지도 못하고, 사슬에 매인 것에 아무 불편도 느끼지 못합니다.
인간이 인간 됨은 그가 누리는 자유에 있습니다. 그가 누리는 자유의 한계, 자유의 영역, 자유의 성격, 의미에 따라서 그 사람의 사람됨의 가치가 결정됩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행복이란 것도 자유에 기준 합니다. 아무리 돈을 많이 가졌다 하더라도 오히려 그것으로 인하여 부자유하고, 아무리 명예가 있어도 그것 때문에 속박을 느낀다고 하면 그는 결코 행복할 수가 없습니다. 그가 누리는 자유만큼 그는 행복한 것이 사실입니다.
경제적인 자유, 정치적인 자유, 사회적인 자유, 문화적인 자유를 우리는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종교적인 자유, 양심의 자유, 도덕적인 자유, 나아가서 신앙적인 자유를 가장 귀한 자유라고 생각합니다. 자유인은 그가 아는 바 자유의 뜻에 매여있는 것입니다. 가령 동물적인 욕망에 매여있고 그것을 충족하는 것을 자유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항상 그 속박에 매여 헤어날 길이 없습니다. 우리가 흔히 쓰는 자유라는 말도 그러하고 사랑이란 말도 그러합니다.
자! 사랑한다고 합시다. 그러나 나의 어떤 욕망에 의해서 사랑하는 것이라면 그 사랑은 나를 속박하게 되고 결코 자유로울 수 없는 것입니다. 이미 있었던 과거사를 생각하며 여기에 묶여 사는 사람을 우리는 수위 전과자라고 합니다. 지난날 잘못한 일에 꽉 묶여서 어딜 가나 자유할 수가 없고 어두운 그림자처럼 나를 따라다니며 괴롭히는 것입니다. 이것 때문에 오늘과 내일을 다 바쳐야 하는 사람, 얼마나 비참한 생활입니까? 또 어떤 사람은 미래의 허망한 꿈을 꾸면서 구름을 잡는 듯 허황된 생각만을 하는데 이것도 자기 마음대로 되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불쌍한 사람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여기서 다시 물어보아야 합니다. 자유는 무엇입니까? 나는 무엇을 자유라고 생각하고 있습니까? 영원히 후회하지 않고 뉘우치지 않을 자유의 개념은 무엇입니까? 분명히 자유는 소중합니다. 그러나 자유가 무엇인지를 아직 모르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예수께서는 "참으로 자유하리라" 하셨습니다. 이때 무식한 유대인들이 대답하기를 "우리가…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어찌 우리가 자유케 되리라 하느냐"(요 8:33). 이 당시에는 신분이 둘 있었는데 하나는 노예요, 또 하나는 자유인이었습니다. 그래서 신분이 분명한 유대인들은 우리가 자유인인데 무엇을 또 자유케 한다고 하느냐? 고 되물었습니다. 답답할 정도로 대화가 통하질 못했습니다. 자기들이 노예 되고 종이 되어도 자기가 종이 되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 것, 마치 잠든 개가 쇠사슬에 묶여 있으면서 아무 불편이 없는 것과 같습니다. 자유할 수 있는 의식마저 속박된 상태로서 자유를 생각할 수 있는 자유까지 빼앗긴 노예의 상태입니다. 자기들이 가진 것만을 자유라고 생각하고 자유의 개념이 분명치 않았기에 다시 어떠한 자유도 생각할 수도 없고 자유할 자격이 없는 것입니다.
지금부터 우리는 과거 38년전 일정 하에 있을 때를 생각해보면서 자유의 개념을 정리해 보았으면 합니다.
지금부터 40년 전 일정 말기에 일본인들은 우리나라 문화를 말살하려고 했습니다. 민족의 혼을 완전히 없애려고 했습니다. 그 방법 중의 하나로 종교 탄압을 시작했는데 그 중에 교회를 탄압하고 교회를 완전히 말살시키려고 했었습니다. 그리하여 교회를 핍박하기 위한 구실로서 신사 참배를 생각해 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여기에 절하지 않을 것을 알고 동네마다 일본 신사를 만들어 놓고 그 앞에 절을 하라고 강요를 했습니다. 신앙이 독실한 장로님이나 목사님은 이것을 절대 거부하고 반대하며 우상 앞에 절할 수 없음을 보여주었습니다.
그ㄹ더니 끌고가서 고문을 하고 매질을 하여 마침내 순교하게 하였습니다. 그뿐 아니라 가족들의 재산까지도 몰수하는 등 행패가 대단했습니다.
이 당시 많은 분들이 순교하셔서 한국 기독교사는 피로 물들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에 있습니다. 비록 끌려가서 감옥에서 죽기까지 했지만 그들은 자유인입니다. 감옥에서도 자유 했고 죽음에서도 자유 했습니다. 아무도 빼앗을 수 없는 참 자유를 누렸습니다. 그러나 다른 경우를 생각해보겠습니다. 가족을 생각하고 자기 목숨을 생각하고 이 세 속의 어떤 욕망과 유익을 생각하면서 신사 참배를 한 성직자들이 신사 참배는 종교의식이 아니고 국민의례다 하면서 적당히 넘어가며 신앙을 굽히고 말았습니다. 부끄러운 일이었습니다. 이 때 신사 참배한 성직자들은 지금까지도 마음 아파하고 있습니다. 제가 잘 아는 목사님 한 분도 그 때 꼭 순교해야 했는데 어떤 이유에서인지 순교하지 못하고 신사 앞에 절을 해버렸습니다. 그리고 나서 기운이 빠져 얼마동안 목회를 하다가 해방이 되었습니다. 감옥에서 고생하던 성도들, 신앙의 절개를 지킨 산 순교자들이 옥문을 열고 나와서 간증을 하고 부흥회를 인도하고 다니니 변절한 목사들은 몸둘 바를 몰랐습니다. 부끄럽기 한이 없었습니다. 마침내 제가 아는 목사님은 교회 사표를 내고 자기를 알지 못하는 먼 타향에 가서 다시 목회를 하며 눈물로 회개를 했습니다. 그러나 힘이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6․25사변전에 남한으로 내려와서 다시 목회를 하려고 했지만 그는 역시 힘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결심하기를 문둥병 환자와 남은 여생을 사면서 참회하며, 그 속에 들어가 평생 전도하기로 마음먹고 또 그렇게 했습니다.
그러나 이 어두운 그림자를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보십시오, 한 번 배신하고, 한 번 배교한 것이 평생 그에게 어두운 그림자로 따라다녀 그것의 노예가 되어 평생 자유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자유가 무엇입니까? 자유가 무엇인지 새롭게 배워야 합니다. 헤롯 왕은 세례 요한이 자기 죄를 책망한다고 끌어다가 죽였습니다. 그러나 죽은 세례 요한은 자유롭게 생을 끝냈지만, 그를 죽인 헤롯은 평생 괴로움으로 남은 생을 살다가 병들어 죽었습니다. 네로 황제는 사도 바울을 목 베어 죽였습니다. 바울은 감옥에서 찬송을 불렀고, 감옥 속에서 쓴 편지 중에는 '정말로 기뻐하라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나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느니라 내가 사는 것이 그리스도요 죽는 것도 유익하니라.' 그는 진정 자유인이요, 자유를 만끽하며 생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네로 황제는 가책과 고민에 미치광이가 되어 미친 사람으로 죽었습니다. 자! 누가 자유인입니까? 의를 위한 고난, 그 고난 속에 자유가 깃들여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불의와 타협하며 부자가 되고, 못할 짓 다하고 출세해 본들 그가 자유할 수 있단 말입니까? 그 괴로움과 가책을 억누르지 못하여 밤마다 독주를 마시면 밤을 지새우는 노예들을 우리는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기를 "죄를 짓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하셨습니다. 결정적인 자유란 여기에 있습니다. 죄로부터의 자유, 율법으로부터의 자유, 자기 고집, 자기 나약성으로부터의 자유, 그릇된 지식으로부터 자유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잘못된 지식은 무식만도 못할 경우가 있습니다. 어쩌다가 못된 사상 하나가 머리 속에 꽉 자리잡고 있으면 평생토록 벗어나지 못하게 됩니다. 그래서 세상을 어둡게 보고 악하게만 보면서 평생을 살아야 하는 생이 있게 됩니다. 좋지 못한 사상에 붙들린 노예, 쇠사슬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얼마나 불쌍한 노예입니까? 생각의 자유를 잃어버렸고 의심의 노예, 우상 숭배의 노예, 나쁜 습관에 붙들린 노예가 되지 않도록 깊이 생각해야겠습니다.
본문은 우리에게 귀중한 진리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자유는 빼앗는 것이 아니요, 약육강식, 생존경쟁으로 자유 문제를 풀이할 수는 없습니다. 제 친구가 쓴 "자유를 위한 투쟁의 역사"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는 인간의 역사를 자유를 위한 투쟁으로 관찰했습니다. 그리고 인간은 자유를 위하여 평생 투쟁하며 살아왔고 인류 역사는 자유를 위한 싸움의 역사라고 기록했습니다. 저는 이 책을 읽고 마지막 결론을 이렇게 내렸습니다. "자유를 위한 투쟁에 자유 없다." 단지 싸웠을 뿐이지 아무도 자유를 얻지는 못했습니다. 참 자유란 빼앗는 것도 아니요, 쟁취하는 것도 아닙니다. 참 자유는 주어지는 것입니다. 진리가 자유케 할 때에만 자유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 있는 대로 "아들이 자유케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 즉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자유케 할 때에 비로소 자유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미워하고 자유할 수는 없습니다. 고린도후서 3:17에 보면 "주의 영이 계신 곳에서 자유함이 있느니라." 조금 의역해 보면 그리스도의 마음이 있는 곳에는 자유함이 있고, 그리스도의 사랑이 넘치는 곳에는 자유함이 있다는 것입니다. 당연히 사랑해야 할 자를 미워하면서 절대로 자유할 수 없고, 용서해야 할 사람을 용서하지 않고 원망하며 원수 되어서 어떻게 자유할 수 있단 말입니까? 주어야 할 물건을 빼앗아서 내가 가지고는 자유할 수가 없습니다. "진리가 자유케 하리라" 이 뜻을 잘 알아야 합니다. 결코 내 스스로는 자유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남의 자유를 빼앗아서 내가 자유하려고 하면 결국은 남의 자유를 빼앗는 결과밖에 안됩니다. 그것으로 내가 자유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남을 죽이고 자유할 수 없고, 남을 속박하고 자유할 수 없고 남을 밀고 내가 자유할 수 없는 것입니다.
또한 내가 내 자신을 자유케 하고자 바리새적인 교만에 빠지는 또 하나의 속박을 자처하는 경우를 봅니다. 오직 그리스도께서만 자유케 하십니다. 오직 진리만이 우리를 자유케 하십니다. 오늘 본문을 자세히 보면 자유의 길을 보여주십니다. '진리가 자유케 하리라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내 제자가 되리라.' 그리스도의 제자가 됨으로 비로소 자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을 믿고 그를 영접하고 그를 따르고 그의 제자가 되는 순간 자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진리의 종이 됨으로 자유할 수 있습니다. 자유를 버릴 줄 아는 자만이 자유인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고귀한 자유를 위하여 헛된 것을 버릴 줄 알고, 영원한 가치의 것을 위하여 순간적인 것을 버릴 줄 알고, 보이지 않는 소중한 진리를 위하여 보이는 것을 초개같이 버릴 줄 아는 이런 사람만이 자유할 수 있습니다. 진리의 종이 될 때 진리가 나를 자유케 합니다.
좀더 나아가서 "진리를 알라 그리하면 진리가 자유케 하리라." 진리를 따른다. 진리를 소요한다 하는 것은 진리를 안다는 것입니다. 안다는 것은 계속적인 행위입니다. 어제 알고 끝나는 것이 아니고 오늘도 계속해서 또 알아야 합니다. 돈이 나를 자유케 할 줄 알았는데 오늘 알고 보니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권세가 나를 자유케 할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오늘 알고 보니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내가 경험해 보니 절대로 아니었습니다. 의와 선만이 사람을 자유케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진리를 배워야 합니다. 자유의 뜻을 배워야 합니다. 자유의 의미를 새롭게 계속적으로 배워야 합니다. "진리를 알 때 비로소 자유케 되리라." 중대한 선언입니다. 그리스도만이 우리를 자유케 하고, 진리만이 우리를 자유케 한다는 것을 깨달을 때까지, 그리스도의 자유에 도달할 때까지 우리는 자유의 의미를 배워야 합니다. 그래야 그 아는 만큼의 자유를 향유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참 자유는 사랑에 있습니다. 참 자유는 영생입니다. 참 자유는 생명보다 귀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자유의 의미를 깨닫는 것이 어렵습니다. 자유가 무엇인지 몰라서 주어진 자유를 스스로 내어버릴 때가 얼마든지 있습니다. 38년 전 8․15해방을 한 지 며칠 후에 제가 다니던 초등학교에 가 보았습니다. 많지는 않았지만 실험실에 있던 실험 도구들을 젊은 아이들이 와서 모두 부수어 버렸습니다. 창문을 다 깨고 자유다! 라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학교 유리창이나 깨는 것이 자유입니까? 자유가 무엇인지 몰랐기에 우리는 자유를 제대로 누리지도 못했고 지키지도 못했습니다. 이제 그 값을 알기 시작했습니다. 그 고귀함을 이제서야 조금씩 조금씩 깨달아갑니다. 이것을 아는 것은 영원한 것이고 일생의 과제입니다.
어느 미국교회를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미국에서는 교인들이 담배 피는 경우가 많습니다만 이 교회는 목사 사모님이 담배 골초였습니다.
목사님은 전혀 피우질 않아 제가 여쭤 보았습니다. "왜 사모님은 많이 피우는데 목사님은 피우지 않습니까?" 목사님의 대답은 "창조주가 주신 고귀한 자유를 하찮은 담배에게 빼앗길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담배 피우는 사람들, 사실 알고 보면 불쌍합니다. 담배 피우는 것이 자유 같지만 사실은 안 피울 수 없어서 피우는 것입니다. 사슬에 매여 있는 강아지와 같습니다. 자기 마음 자기도 마음대로 못해서 그 불편한 담배를 계속 피워야만 합니다. 도대체 자유가 무엇입니까? 죄와 사망으로부터의 자유, 불의와 타락성으로부터의 자유, 참 자유의 뜻을 알고 결코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맙시다. "진리를 알라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기도 : 은혜로우신 아버지, 자유를 모르는 자들에게 자유를 주시고 오늘도 새롭게 자유의 의미를 깨닫도록 인도하시니 감사합니다. 진리의 영, 자유의 영인 성령께서 임하사 이 자유의 도리를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직 그리스도 안에 자유가 있고 오직 진리와 사랑의 종이 될 때만이 진리가 주는 자유를 누릴 수 있음을 확실히 깨닫게 하여주시고 이 진리 안에 살며 이 자유 안에 살고 이 자유를 지켜 나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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