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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 잠든 요나(요나 1:4-12)

by 【고동엽】 2024. 3.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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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 잠든 요나(요나 1:4-12)

 

여호와께서 대풍을 바다 위에 내리시매 바다 가운데 폭풍이 대작하여 배가 거의 깨어지게 된지라 사공이 두려워하여 각각 자기의 신을 부르고 또 배를 가볍게 하려고 그 가운데 물건을 바다에 던지니라 그러나 요나는 배 밑층에 내려가서 누워 깊이 잠이 든지라 선장이 나아가서 그에게 이르되 자는 자여 어찜이뇨 일어나서 네 하나님께 구하라 혹시 하나님이 우리를 생각하사 망하지 않게 하시리라 하니라 그들이 서로 이르되 자 우리가 제비를 뽑아 이 재앙이 누구로 인하여 우리에게 임하였나 알자 하고 곧 제비를 뽑아 이 재앙이 누구로 당한지라 무리가 그에게 이르되 청컨대 이 재앙이 무슨 연고로 우리에게 임하였나 고하라 네 생업이 무엇이며 어디서 왔으며 고국이 어디며 어느 민족에 속하였느냐 그가 대답하되 나는 히브리 사람이요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로라 하고 자기가 여호와의 낯을 피함인 줄을 그들에게 고하였으므로 무리가 알고 심히 두려워하여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행하였는냐 하니라 바다가 점점 흉용한지라 무리가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너를 어떻게 하여야 바다가 우리를 위하여 잔잔하겠느냐 그가 대답하되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 그리하면 바다가 너희를 위하여 잔잔하리라 너희가 이 큰 폭풍을 만난 것이 나의 연고인 줄을 내가 아노라 하니라

 

 

인간의 인간 됨은 질문하는 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 사람의 질문하는 내용은 그의 사람됨을 말하여 준다고 봅니다. 무엇이냐고 묻기도 하고 왜 이렇게 되었느냐고 묻기도 합니다. 이렇게 원인을 밝히려는 물음은 인간의 특성 중의 하나이며 인간의 특권이라고 생각합니다.

사과가 땅에 떨어지는 것을 본 사람은 수없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이 사과가 왜 땅에 떨어지는가를 묻기 시작한 사람은 오직 한 사람 뿐이었습니다. 무엇 때문인가 하는 것을 우리는 물어야 할 것입니다. 바른 해답을 얻을 때까지 계속 물어야 하겠습니다. 원인 없이 결과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원인을 부정하려고 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만일 원인을 부정하려고 한다면 치료 방법도 찾을 수 없습니다. 같은 문제를 당하여도 똑같은 실수와 고난을 반복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런고로 뼈아프고 괴로워도 우리는 당면한 문제의 원인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때로 사회 불안정의 원인을 경제의 탓으로 돌려봅니다. 가난이 원수가 아니겠느냐라고 하면서, 있어야 할 물질이 부족해서 그런 것이라고 합니다. 사회 문제의 원인이 가난 때문이라고 생각해서 생산을 서두르고 경제 문제에 깊이 착안한 때가 있었습니다. 빵 문제요 물질의 문제이며 경제의 문제라고 했었습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면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분배의 문제입니다.

없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가진 사람이 너무 많이 가졌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결코 부족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넉넉히 주셨습니다. 공정한 분배가 없으므로 세상이 이처럼 궁핍하고 헐벗음이 있게 되었습니다. 이 분배 문제는 근본적으로 정치 문제에 속합니다. 또 정치 문제는 정치가의 양심 문제라고 보겠습니다.

구조의 문제에 앞서서 정치가의 양심의 문제가 있습니다. 이 정치가의 양심 문제는 교육 문제에 속하며 교육 문제는 도덕 문제와 연관됩니다. 도덕의 근본 문제는 종교의 문제입니다. 그리고 종교 문제는 신학적 문제입니다. 그런고로 모든 문제의 깊은 곳에는 신학적 문제가 있다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아주 옛날에 있었던 하나의 사건이 나와 있습니다.

단순히 역사적인 사건으로 보기 쉬우나 우리는 이 사건 깊은 곳에서 생생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다시스로 가는 배 한 척이 있었는데 갑자기 큰 풍랑을 만나서 파선 직전에 이르렀습니다. 사공들은 무사하기 위해 있는 기술을 다했으며, 배를 가볍게 하기 위해서 가지고 있던 재산과 배에 실었던 화물을 바다 속에 버렸습니다. 물질을 포기하고 기술을 다 동원해 보았으나 소용이 없었습니다.

이제 이들이 내린 결론은 이렇습니다. 본문 7절에 보면 "이 재앙이 누구로 인하였는냐?" 재앙으로 보았습니다. 즉 상징적으로 보았다는 말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서 지금 이 사건을 통하여 분명 무엇인가 지적하고 있으며 말씀하시고 있다고 이해한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 인간들의 이런 하찮은 노력과 수고는 다 무효라는 것입니다. 직선적으로 말하면 죄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 배가 풍랑을 만난 것은 죄 때문입니다. 예나 오늘이나 도덕 문제는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경제 문제, 사회 문제, 교육 문제, 정치 문제 등 외관상 노력할 만큼 다 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해결이 되지 않았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도덕적 문제입니다. 이 부정과 이 죄가 그대로 있는 동안 이 "나라"라고 하는 배는 무사할 수가 없습니다. 배가 흔들립니다. 어떤 방법으로도 붙들 수 없습니다. 구제 불능이라는 말입니다. 나타나지 아니하는 죄 때문에, 감추어진 사건 때문에 이 배는 파선 직전에 이르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은혜로 출애굽하여 광야 40년의 어려운 시련을 치르고 요단강을 건너서 가나안 복지로 들어갔습니다. 그들은 난공불락이라고 하는 아성 여리고 성을 손 하나 대지 아니하고 함락시키게 되자 자신만만했습니다. 이 승전의 기세를 잡고 이대로 계속 쳐들어가면 가나안 7족속을 며칠 사이에 다 멸하고 가나안 복지의 주인이 되리라고 자신했습니다.

그러나 조그만 아이 성이라고 하찮은 것으로 여기고 쳐들어 갔는데 참패하고 돌아왔습니다. 이제 돌아와 하나님의 법궤 앞에서 울게 될 때에 하나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수아야 어찌하여 여기에 엎드렸느냐 너의 진 중에 죄가 있느니라 스스로 성결케 하고 내일을 기다리라"(7:13). 이 귀중한 말씀을 기억하십시다. "스스로 성결케 하고 내일을 기다리라."

앗수르 나라의 수도인 니느웨 성은 요나가 별로 좋아하지 않는 성입니다. 이 도시는 당대에는 세계에서 제일 크고 화려한 힘의 본산이었습니다. 이 도성이 죄로 말미암아 소돔과 고모라처럼 멸망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 때에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기셔서 40일간의 여유를 주어 최후 통첩을 하시고자 요나를 부르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니느웨로 가서 40일 후에 너희들의 죄 때문에 이 도성이 망한다고 외치라고 명하셨는데 요나에게는 갈 마음이 없었습니다. 군사를 몰고 쳐들어갈 마음도 있는데 스스로 망한다니 다행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요나의 생각은 이러했을 것입니다. "내가 니느웨로 가서 40일 후에 망한다고 외치고 다니다가 혹시 몇 사람이라도 눈물을 흘리고 회개하면 하나님께서 마음을 돌리어 용서하시지 않으실까?" 이러한 생각이 요나의 마음에 있었던 것으로 짐작합니다. 망한다면 잘된 일인데 왜 내가 가서 용서받게 할 것이냐라는 마음이었습니다. 그래서 요나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리고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탔습니다.

요나라는 이름의 뜻은 비둘기인데 지금 요나의 마음은 비둘기가 아닙니다. 본문 5절에 보면 배 밑층에 내려가서 누워 깊이 잠들었다고 했습니다. 한편 원인을 모르고 다른 사람들은 이 풍랑을 이기기 위해 노를 저으려고 애를 썼고, 배를 가볍게 하기 위해 가졌던 짐을 바다에 버리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장본인이 되는 요나는 배 밑에 들어가서 잠들어 버렸습니다. 피곤하거나 졸려서 잠든 것이 아니었습니다. 일부러 눈을 감은 것이었습니다. 맑은 정신으로는 자기 때문에 여러 사람이 죽게 된 것을 볼 수가 없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배 밑에 들어가 깊이 잠들어 버렸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깨우셨습니다. 요나가 눈을 뜨지 않고는 견딜 수 없도록 배를 흔들었습니다. 드디어 요나가 눈을 떴습니다. 그리고 12절에 보면 매우 감격스런 장면이 있습니다. "너희가 이 큰 풍랑을 만난 것이 나의 연고인 줄을 내가 아노라."

나 때문이라고 인정했습니다. 여기에 우리가 생활하면서 겪는 문제의 해결점이 있습니다. 우리가 보는 대로 함께 하던 일이 잘못되었을 때 나 때문이라고 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실패는 사생아라는 말이 있듯이 일이 잘 되지 않았을 때는 저마다 자기는 원인이 아니라고 합니다. 일이 잘 되었다면 자기의 공이라고 하겠지요. 그러나 잘 되지 않은 일에 대해서는 책임지려 하지 않습니다.

본문에 보면 요나의 진실한 면이 나타납니다. "나 때문이니 나를 바다에 던지라. 그리하면 이 배가 무사하리라" 요나의 이 마음이 부럽습니다. "나를 바다에 던지라." 오늘날 이런 사람이 아쉽습니다.

죄에는 심도가 있습니다. 먼저는 죄를 짓는 죄가 있고 더 깊은 죄는 회개 없이 죄를 계속하는 죄가 있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로 지은 죄를 변명하는 죄가 있습니다.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라고 변명하기도 하고, 환경이나 운명이나 세대를 탓하기도 합니다. 다른 사람들도 다 그렇다고 자위하면서 자신의 죄를 정당화하려 합니다. 그리고 더 무서운 죄는 내 죄를 회개하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전가하는 죄가 있으며,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죄를 짓게 하는 죄가 있습니다. 괜한 사람으로 죄를 짓게 하여 죄인을 만들게 되는 것입니다. 요나는 이런 고차원의 죄를 지으면서 그대로 배속에 숨어 있었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주인이란 어떤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까? 주인이란 책임을 지는 사람입니다. 그가 앉아 있는 의자가 주인을 뜻하는 것이 아니고, 그의 위치가 주인이라고 말해 주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든지 책임지는 자가 주인입니다. 잘못됐을 때 책임질 줄 모르는 사람은 주인이 아닙니다. 주인 될 자격이 없습니다. 잘됐든 못됐든 책임지는 자가 주인이고, 내 탓이라고 나설 수 있는 그 사람이 바로 자유인입니다. 책임진 사람만이 자유할 수 있는 것입니다. 자기의 책임을 남에게 돌리고 있는 동안은 그의 마음이나 심령이나 생활까지도 영원히 자유할 수 없습니다.

책임지는 사람만이 주인입니다. 더 이상 변명하거나 책임 전가 하지 말고 겸손하게 무릎을 끓어야 하겠습니다. 나라도 사회도 가정도 다 나 때문임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깜짝 놀랄 만한 사건들이 연속해서 발생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러 가지 생각하지 않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대로 죄 때문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내 죄를 깨닫게 하기 위하여, 나로 하여금 회개케 하고 나로 하여금 진실케 하기 위하여 이 사건이 내 앞에 있음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누가복음 13:4 이하에 보면 실로암에서 큰 망대가 무너져 열여덟 사람이 압사한 사건이 있습니다. 이 사건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해석하셨습니다. "저 사람들이 예루살렘에서 사는 사람들보다 죄가 더 많은 줄 아느냐. 너희도 회개하지 아니하면 그처럼 되느니라." 시간시간 부닥치는 사건들이 우리에게 무엇인가 말씀해 주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 풍랑에도 하나님의 음성이 있으며, 양보하시지 않는 하나님의 뜻이 있었다는 것을 기억하십니다.

여기에 생각해보아야 할 또 하나의 문제가 있습니다. 요나가 탄 배가 큰 배였습니다. 그 안에는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탔을 것입니다. 모름지기 요나보다 더 큰 도덕적 죄인이 있었으리라고 생각해볼 수 있겠습니다. 살인 강도도 있고, 도적질한 사람도 있고, 갖가지 우상 숭배하는 사람들도 그 속에 탔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관심사는 요나 한 사람이었습니다. 이 배에 살인 강도가 백 명이 탔더라도 하나님께서는 묻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 물으시는 바는 하나님의 뜻을 어기고 도망가는 요나 한 사람이었습니다.

여러분, 소돔과 고모라가 죄 때문에 망했다고 생각하십니까? 실제적으로 보면 의인 열 명이 없어서 망했던 것입니다. 요나가 탄 배에는 갖가지 죄인이 있었습니다만, 하나님께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사람 요나뿐이었습니다. 요나를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이 풍랑이 있었던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습니다만 하나님께서는 니느웨 사람들을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요나를 보내어 니느웨를 구원하시려고 하시는데 요나가 말을 듣지 않습니다. 구원의 역사를 이루려 하시는데 요나가 기피했다는 말입니다. 그런고로 풍랑은 있어야 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이 민족과 이 겨레 앞에, 우리 교회에 그리고 여러분과 내 앞에 이루고자 하시는 뜻이 무엇이겠습니까? 그 귀한 뜻을 이루려 하시매 오늘 우리가 부딪치는 일들이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에스라 9:5,6을 봅니다. "저녁 제사를 드릴 때에 내가 근심 중에 일어나서 속옷과 겉옷을 찢은 대로 무릎을 끓고 나의 하나님 여호와를 향하여 손을 들고 말하기를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끄러워 낯이 뜨뜻하여 감히 나의 하나님을 향하여 얼굴을 들지 못하오니 이는 우리 죄악이 많아 정수리에 넘치고 우리 허물이 커서 하늘에 미침이니이다." 에스라가 자기 백성들이 죄에 빠져 있다는 말을 들을 때에 자기는 죄인이 아닙니다마는 그 백성의 죄를 함께 자복하면서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하는 장면입니다.

출애굽기 32:32에 보면 모세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여 이 백성의 죄를 사하지 아니하시려거든 나의 이름을 당신의 생명책에서 지워 주시옵소서." 이것이 백성을 사랑하는 모세의 기도입니다.

 

여러분이 이 민족과 함께 자복하고 함께 회개하는, 그리고 겸손하게 무릎을 끓는 역사가 있어야 되겠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다려야 할 것입니다. 더 이상 원망도 말고, 누구를 탓하지도 말고, 규탄하거나 비판하지도 맙시다. 잃었던 나를 찾아야 되겠습니다. 깊이 잠든 나 요나를 깨워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책임질 줄 아는 주인이 되십시다. 그리하여 자유하는 은총을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기도 : 세상이 흉용하고 죄악의 물결이 높아만 갑니다. 아픔은 있으나 생각은 없고, 고통은 겪으면서도 그 원인을 생각하기 싫어하는 저희들을 주여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깊이 잠든 요나를 깨울 수 있는 시간이 되게 해 주시고, "나를 바다에 던지라 그리하면 이 배가 무사하리라"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와 진실을 주시옵소서. 아버지여, 이제 우리는 전부가 나의 까닭임을 알고, 나 때문인 줄 알아서 겸손하게 무릎을 끓는 중에 다시 겸손하고 하나님 앞에 자유인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우리가 탄 이 배가 다시 고요함을 찾게 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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