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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곽선희 목사 설교

깨끗한 그릇(디모데후서 2:19-26)

by 【고동엽】 2022. 10.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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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끗한 그릇(디모데후서 219-26)

 

그러나 하나님의 견고한 터는 섰으니 인침이 있어 일렀으되 주께서 자기 백성을 아신다 하며 또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마다 불의에서 떠날지어다 하였느니라 큰 집에는 금과 은의 그릇이 있을 뿐 아니요 나무와 질그릇도 있어 귀히 쓰는 것도 있고 전혀 쓰는 것도 있나니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예비함이 되리라 또한 네가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과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좇으라 어리석고 무식한 변론을 버리라 이에서 다툼이 나는 줄 앎이라 마땅히 주의 종은 다투지 아니하고 모든 사람을 대하여 온유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참으며 거역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징계할지니 혹 하나님이 저희에게 회개함을 주사 진리를 알게 하실까 하며 저희로 깨어 마귀의 올무에서 벗어나 하나님께 사로잡힌 바 되어 그 뜻을 좇게 하실까 함이라

 

희소 가치라는 말이 있습니다.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많으면 가치가 없고 흔하지 않는 것이라야 가치가 있다는 말입니다. 예를 들어 사람들이 귀하게 여기는 다이아몬드가 흔한 돌멩이처럼 아무렇게나 길에 굴러다닌다고 합시다. 아무도 그 다이아몬드를 귀중하게 생각하거나 가치가 있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요즈음은 희소 가치가 사람에게도 적용되는 것 같습니다. 점점 사람의 수가 많아져 지구가 만원이 되어지자 상대적으로 사람의 가치는 점점 하락되어 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사람을 가리켜 천하를 주고도 바꿀 수 없는 생명을 가진 존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사람이란 많아졌다고 하여 가치가 떨어지는 그런 존재가 아니라 절대 가치에 사는 존재요, 결코 상대 가치에 의해 평가받는 존재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신앙이란 무엇입니까? 이것은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에 있어서 절대 가치의 발견을 의미합니다. 누가 무어라 하여도 그리스도 안에서 평가하는 새 가치, 곧 절대 가치를 찾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요즈음의 보편적인 평가 경향은 소유와 기능에 의해 그 사람의 가치를 판단하는 것 같아서 슬픈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얼마나 많은 것을 소유했으며 어떤 기능을 가졌는가 하는 면이나 그와 관련되는 것으로 평가 기준은 하락된 것 같습니다.

사람의 가치는 그 사람 속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에 의해 평가되어야 합니다. 그 중심에 하나님의 형상이 얼마나 짙고 깨끗하게 보존되어 있으며, 얼마나 오늘도 밝게 빛나고 있느냐 하는 것이 평가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얼마나 아름답고 건강한가, 혹은 그의 기술이 뛰어났는가 하는 것은 세상이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입니다. 그런 것은 절대로 우리 기독교인을 판단할 기준이 될 수가 없습니다. 성경이 판단하는 것은 그 사람 속에 하나님을 닮은 하나님의 형상이 얼마나 있으며, 또한 살아있느냐 하는 것이 평가 기준이 된다는 말입니다.

사람의 행복은 그가 가진 소유나 기능에 의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의 삶 속에서 보람을 얼마나 얻느냐 하는 것에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이란 밥을 먹고 사는 것이 아니라 보람을 먹고 사는 존재라고까지 비약해서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 보람이 없는 삶이란 육체의 길이요, 동물의 길인 것입니다.

인간을 인간 되게 하는 보람은 어디에서 올까요? 이 해답은 다음 세 가지 차원에서 온다고 생각합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부름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개별적으로 절대적으로 그를 필요로 한다고 느끼는 그런 신앙에서 자기 보람을 찾을 수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가 바로 그 보람을 우리에게 계시해 주는 것입니다. "나는 이만한 댓가를 주고 너를 샀노라"고 하는 예수님의 십자가는 바로 나 자신의 절대적 가치를 의미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평가하든지 간에 예수님이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이상 그것이 바로 나의 기본 가치요 밑천이며 또한 나의 보람인 것입니다. 거기에다가 이제 예수님이 나를 필요로 하신다면 그 무엇이 문제가 되겠습니까? 나의 병이 문제입니까? 아니면 나의 가난이 문제입니까? 적어도 믿음을 가진 우리들로서는 예수님께서 인정하여 주시고 또한 개별적으로 필요로 하여 불러주신다면 바로 그것이 우리의 행복이며 보람이 아니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그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온 생을 오로지 복음의 사도로 살게 된 것입니다.

둘째로는 각기 자신에 의한 평가입니다. 자기 스스로가 얼마나 필요로 하고 있는가 가만히 한 번 생각해 보기로 합시다. 우리의 이상과 현실을 생각해보고, 나에게 진정 나 자신이 필요하다는 부름을 들을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항상 양심으로부터 혹은 이성의 비판으로부터 또는 내 자신의 깊은 반성 속에서 스스로 나는 나 자신을 어떻게 평가해 주고 있습니까? 자신이 스스로가 필요한 존재로 평가해 주는지 아닌지 조용히 생각해 봅시다. 나의 진실이 나를 필요로 한다는 부름이 또한 나의 보람이 된다는 것을 잊지 맙시다.

셋째는 이웃들이 나를 필요로 하는 점입니다. 내 주위에 있는 친구나 이웃 사람들이나 동료나 가족, 더 나아가서는 이 사회와 민족이 나를 필요로 한다는 것은 정말 크나큰 행복입니다. 그런데 어떤 때는 꼭 필요한 존재가 아닌 듯한 느낌이 들 때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과연 가족이나 자녀들에게 혹은 주위 친구들이나 이 사회에 진정 필요한 존재입니까? 아니면 무위도식(無爲徒食)하고 불로소득(不勞所得)으로 지내는 그런 사람들입니까? 내 이웃으로부터 필요한 사람으로 부름은 나의 삶의 보람을 안겨주는 것입니다.

이상에서 살펴본 우리에게 보람을 주는 세 가지 부름을 하나로 통합해 볼 때 그것을 오늘 성경 본문에서는 "그릇"이라는 상징적인 말로 나타내 주고 있습니다. 우리 인간들의 삶 속에서 그릇은 매우 중요하고 요긴한 물건입니다. 어떤 내용물이든지 담는 그릇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 그릇의 가치는 겉모양에 있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담는 그릇인가라는 내용물에 의해 판별되는 것입니다. 그 위에 또 한 가지 생각해야 할 문제는 주인이 인정하는 가치 구성입니다. 성경 본문에는 "주인이 쓰시기에 합당하다"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 가정에서 여러 가지 형태의 그릇들이 있게 마련입니다. 넙적한 접시들로부터 길쭉한 병이나 항아리에 이르기까지 무수한 그릇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만든 재료에 따라 금 그릇, 은 그릇 혹은 나무 그릇이나 질 그릇 그리고 사기 그릇과 플라스틱 그릇 등 많은 종류의 그릇이 있습니다. 이 중에서 나무 그릇은 사라진 지 오래지만 아직도 미국 사회에서는 이 그릇을 사용하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그릇은 언제나 샐러드(Salad)를 만들 때 사용합니다. 샐러드를 만들 때에는 절대로 쇠를 대지 못하게 합니다. 왜냐하면 쇠붙이가 닿으면 비타민이 파괴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꼭 나무그릇에다 재료를 넣고 반드시 나무 수저로 젓는 것을 보았습니다.

아무튼 여러 형태와 여러 재료들로 만들어진 그릇들이 있습니다.

이 많은 그릇들은 각기 필요한 용도에 따라 여러 형태와 재료로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만든 모양이나 색깔이 아주 투박스러운 뚝배기라는 질그릇이 있습니다. 우리 한국 사람들이 좋아하는 된장찌개는 바로 이 뚝배기에 담아 먹어야 제 맛을 볼 수 있습니다.

미국에 있을 때 어느 집에서 설렁탕을 먹었는데 그 그릇이 뚝배기 였습니다. 설렁탕은 밑창을 긁으면 덜그럭 덜그럭 소리가 나는 한국 뚝배기가 아니면 제 맛이 나지 않기 때문에 한국에서 직접 보내어 온 뚝배기라는 것이었습니다. 모양도 별로 없고 깨끗하지도 않은 것 같은 이런 질그릇이라도 각기 쓰일 곳이 있는 것입니다.

사람을 한 번 생각해 봅시다. 사람에게도 여러 가지 종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고위층의 사람도 있고 노동자도 있으며, 남자와 여자도 있고 젊은이와 노인도 있습니다. 그리고 세상에는 대통령도 필요하지만 수위나 근로자도 필요합니다.

대광학교 교사로 근무하다가 덴마크에서 4년 동안 공부하고 돌아온 한 친구가 있었습니다. 그 곳에서 공부할 때 그 곳의 어린이들과 어울리게 되었답니다. 그는 아이들에게 "너희는 커서 무엇이 될래?" 하였더니, 그 중에서 한 어린아이가 전기공이 되겠다고 하더랍니다. 이상하게 여겨 그 이유를 물었더니 그 아이의 대답은 "학교 수업 도중에 자꾸 불이 켜졌다 꺼졌다 해서 그것을 그렇게 안되도록 해보겠다"는 것이더랍니다. 그리고 어떤 아이는 운전수가 되겠다고 하더랍니다.

우리 나라 어린이들은 어떻습니까? 장래 희망을 물으면 대부분 대통령이나 장군이 되겠다고 대답합니다. 어린아이들이 저마다 윗자리만 바라보고 있습니다. 도대체 이런 꿈을 키워 준 사람이 누굽니까? 그것은 바로 부모님들의 허영심입니다. 대체 누가 그렇게 가르쳤습니까? 그것은 바로 이 사회가 가르친 것입니다. 필요한 자를 생각하지 못하고, 귀한 것, 높은 것만을 생각합니다. 이것이 얼마나 부조리하고 오늘까지 이 사회를 불행하게 하며 자신들도 불행해지게 하는 것인지 모릅니다.

가만히 우리 주위를 둘러보십시오. 우리 사회에서 대학 총장을 하다가 교수로 내려앉은 사람 보았습니까? 저는 이런 사람을 본적이 있습니다. 은행장을 하던 분이 바로 그 은행의 수위를 하고 있었습니다. 이해가 되지 않아서 여쭈어 보았더니 박사 학위를 따고 가장 두뇌의 회전이 잘 될 때는 은행장을 했지만, 나이가 많아짐에 따라 머리가 둔해지고 피곤하여 도저히 은행장이라는 지위에 앉아 있기가 힘들더랍니다. 그래서 자리를 좀 낮추어 달라고 하니 어떤 과장 자리를 내주는데 그것도 골치가 아프고 힘이 들어 수위를 시켜달라고 하여 지금 수위직을 맡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못할 것이 없지 않습니까? 못할 이유가 전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못합니까? 무엇이 잘못된 것입니까?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형상이 그 중심에 있느냐가 평가 기준이지 절대로 지위의 높고 낮음으로 평가될 수는 없습니다. 주님이 그 사람을 쓰시기에 합당한 그릇인가가 중요한 과제입니다. 가끔 늙은 부모님들이 모여 자식 자랑을 할 때가 있습니다. 현실적으로 높은 지위나 많은 돈을 번 아들을 둔 부모는 크게 자랑하지만, 그렇지 못한 부모들은 아무 소리도 못하는 것을 봅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은 정말 좋지 못합니다. 높으면 높은 대로 겸손해야 하며, 낮으면 낮은 대로 비굴해지지 말아야 합니다. 정말로 가난하고 낮은 사람은 비굴한 사람입니다. 돈보다도 더욱 사람을 가난하게 만드는 것은 '비굴'이라는 것입니다.

여러 가지 많은 그릇들을 어떻게 어느 곳에 사용할는지가 다 주인의 용도에 따른 것입니다. 그의 필요는 다원적이며 다양합니다. 이 사회는 여러 유형의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가치는 지위나 신분의 높고 낮음이나 재산의 많고 적음에 따라 결정하는 상대적인 것이 아니라, 주인과의 관계에서 오는 절대적인 관계인 것입니다. 주인이 쓰기에 합당하고 필요하게 쓰이면 그뿐입니다. 절대적인 가치 이것이 바로 신앙입니다. 교환 가치나 상품 가치가 아닌 필요 가치입니다.

흔히 비유되는 것으로 우리의 몸을 생각해봅시다. 우리의 각 지체, 발 등이 서로 비난하고 서로 필요 없는 존재라고 욕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가령 손이 발에게 "너는 더러우니까 존재할 가치가 없다"고 해서 과연 발이 필요 없는 것입니까? 우리의 몸은 이 모든 것이 필요하며 이것들이 서로 조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그것들이 그대로가 주인과의 관계에서 절대적 가치를 지니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우리에게는 지식이나 돈이나 나이 또는 건강이 문제가 아닙니다.

다만 주인의 필요에 따르는 것뿐입니다. 죽음도 하나님이 필요하시면 그것으로 만족합니다.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왜 순교를 당해야 합니까? 그것 역시 하나님의 역사에 필요한 일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여기까지 우리는 하나님의 필요, 하나님과 나와의 구체적 현실 속에서 절대적 가치를 인정하고 바로 붙들고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여러분, 이제는 지난날을 돌아보며 그 모든 굴곡 있는 어려운 현실이 신앙적인 차원에서 하나님의 선교에 필요한 것이었다라고 생각할 수는 없겠습니까? 그뿐만 아니라 이제 그릇으로서의 제일 중요한 것은 주인에게 필요한 그릇입니다. 그러면 어떤 그릇이 주인에게 필요한 그릇으로 사용될 수 있습니까? 금 그릇이나 은그릇이라 해도 더러워진 그릇이라면 필요 없으며 절대로 사용할 수가 없습니다. 깨끗하지 못한 그릇은 오히려 그 내용물을 못 쓰게 만들뿐입니다. 비록 질그릇이나 나무 그릇이라도 깨끗하면 귀히 쓰일 수 있습니다.

얼마 전에 어린이들이 번데기를 먹고 죽은 사건이 신문에 보도된 적이 있습니다. 그 이유는 번데기를 담았던 자루에 농약이 묻어 있었기 때문이었음이 밝혀졌습니다. 독이 묻어 있는 그릇, 이것은 주인이 쓰시기에 합당하지 않습니다. 깨끗한 그릇이어야만 주인이 인정하는 그릇입니다.

심리학에서는 사람의 마음을 더럽히는 것으로 다섯 가지 요인이 있다고 합니다. 첫째는 복수하고자 하는 복수심이며, 둘째는 야망, 셋째는 질투이며, 넷째는 욕심, 곧 소유욕, 그리고 다섯째는 자존심이라고 합니다. 이런 것들이 사람의 마음에 있을 때 그 마음이 더러워진다고 합니다.

어떤 사회학자는 현대인의 문제를 묘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소위 타자(他者)에 의한 세계관(Other oriented world view)입니다. 자신에 의한 세계관이 아니요, 그렇다고 하나님에 의한 세계관도 아닌 다른 사람들의 눈으로 보는 세계관을 의미합니다. 가령 옷을 입는 것에도 자신의 체형이나 기호는 생각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눈에 어떻게 보일까를 생각하여 선택하는 행위 같은 것입니다. 내 형편에 의해 옳고 그름을 판단하지 않고 다른 사람은 어떤가를 먼저 생각합니다. 그래서 가끔 이런 말을 하는 것을 듣습니다. "남편을 잘못 만나서가 아니라 친구가 너무 잘 사는 것이 문제다." 다시 말하면 남편을 친구의 부를 기준으로 평가하는 것이 요즈음 현대인의 문제인 것입니다. 이런 세계관과 질투는 그 사람의 마음을 더럽히고 맙니다. 이렇게 더러워진 그릇은 쓰여질 수가 없으며 가치 없는 것입니다.

본문 22절에 청년의 정욕, 불과 같이 타오르는 정욕, 그 야망과 욕심, 때로는 환상, 이러한 지나친 것들이 그 사람을 더럽힌다고 하였습니다. 오늘날 청년들이 깊이 새겨 둘 말씀입니다. 기술도 지식도 모두 중요하지만, 그 이전에 먼저 깨끗해야 합니다. 이것이 기본적인 것입니다.

또한 깨끗하다는 말은 온전하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깨진 그릇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진실과 청결이 먼저요, 그 다음으로 인내와 순종과 충성이 뒤따라야 합니다. 그릇에다 무엇을 담았는데 그대로 새어버리고 만다면 무엇에 쓰이겠습니까? 이미 그릇으로서 가치를 잃은 것은 금 그릇이나 은그릇이라도 아무 소용이 없는 쓸모 없는 것에 지나지 못합니다.

우리 주위에는 이렇게 깨어진 인격이 얼마나 많습니까? 진리의 귀한 말씀이 그 마음속에 가만히 담겨 있지 못하고 줄줄 새어 사라지는 경우가 정말 허다합니다. 이런 인격에 무엇을 기대하고 또 어떻게 믿겠습니까? 그러므로 그리스도에게 필요한 그릇은 깨끗하고 청결한 그릇 그리고 진실과 인내에 기초한 그릇입니다. 주님은 한 번 말씀을 받아들이면 꾸준하고 변치 않는 사람을 원하십니다.

숭전대 교수로 있던 제 친구가 있는데 그 친구는 대학 다닐 때도 그랬지만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교회에 나오는 것이다"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는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목사님의 설교나 장로님의 설교를 가리지 않고 꾸준히 교회에 출석하여 들었습니다.

정말 믿음직스러운 벗입니다.

때때로 우리는 너무나도 입맛이 까다롭습니다. 너무나 비판적이고 실리적입니다. 그 그릇이 너무나 얇아 마치 알루미늄 냄비 같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좀 지조가 있고 긍지가 있어야 되겠습니다.

교회에 나올 때마다 은혜를 받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때는 졸다 갈 때도 있고, 또 어떤 때는 이런 생각 저런 생각으로 예배를 제대로 드리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이럴 때 공연히 나왔다고 생각하지 맙시다. 또 어떤 때는 설교 말씀에 그다지 큰 감명을 받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설교자가 열심히 기도하고 많이 준비하였다 하더라도 그 시간에 말씀이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은혜로울 수는 없습니다.

진실한 그리스도인라면 꾸준히 교회에 나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말씀하실 수 있는 기회를 드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믿음직스럽고 튼튼한 그릇이 되어야 하나님이 보다 귀한 것을 넘치도록 담아 주실 것입니다. 지식이나 재주보다도, 두뇌나 아름다움보다도 더 귀한 것은 진실입니다. 진실함이 없는 지식이나 기술은 극히 위험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 어거스틴은 "믿음 없는 교육은 악마를 생산한다"라는 말을 하였습니다. 현대에 필요한 것은 많은 소유나 통계 숫자보다도 오히려 정결인 줄로 생각합니다.

더러워지기는 쉬워도 정결해지기는 참으로 어렵습니다. 어떤 사람은 단 1분 동안에 더러워지고 일생을 두고 씻지 못하고 더러운 상태에 머물러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자취할 때 경험한 일이 있습니다.

밥은 어느 정도 하겠는데 설거지하기는 정말 싫었습니다. 더럽히기는 쉬워도 다시 깨끗하게 하기는 어렵습니다. 항상 깨끗하게 보존하기란 무척 어려운 것입니다. 금 그릇, 은 그릇 그리고 나무 그릇, 질그릇을 논하지는 맙시다. 깨끗하게 보존되어 주인이 필요한 경우에 쓰여질 수 있느냐가 문제일 뿐입니다. 귀하게 쓰여지는 존재가 될 때 거기에 삶의 보람이 있고 삶의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깨끗함이란 무엇일까요? 성경 본문에는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과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좇으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이 곧 깨끗한 것입니다. 변론과 다툼과 정욕, 이러한 것들은 모두가 더러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혹 미워하는 마음이 있다면 열심히 기도하시고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어떤 분이 이런 경험을 한 적이 있다고 합니다. 어느 날 아는 사람이 다급하게 찾아와서 돈을 꾸어 달라고 하기에 거절할 수가 없어서 다른 사람에게 돈을 빌려다가 꾸어 주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3일 후에는 돌려주겠다고 하더니 한 달이 지나고 서너 달이 지나도록 돈은커녕 찾아오지도 않았다고 합니다. 이 분은 자기도 꾼 돈이기 때문에 매달 꼬박꼬박 이자를 주었는데, 이자를 줄 때마다 마음이 괴롭고 속이 상했답니다. 마음의 더러움으로 기도도 되지 않고 "도대체 무슨 예수 믿는 사람이 그럴 수가 있을까"라는 생각이 머리 속에서 맴돌기만 하더랍니다. 견딜 수 없어 수없이 기도한 끝에 새로운 것을 발견하게 되었는데 잊어버리기로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그 사람을 한 번 찾아보기로 결심을 하고 방문했더니, 그 사람은 그만 빚더미에 올라앉아 밥도 못 먹고 있는 처지였다는 것입니다. 너무 불쌍해서 쌀 한 가마를 사주고 얼마간의 돈을 주면서 보태 쓰라고 하였더니 그 사람은 "차라리 죽으라고 하는 것이 마음 편하지 이런 것은 견딜 수 없습니다"라고 하며 미안하여 어쩔 줄을 모르더랍니다. 그 때 이 분은 "아닙니다. 전에 진 빚은 잊어버리십시오. 잊어버리는 표로 제가 이렇게 하는 것입니다. 절대로 갚을 생각은 하지 마십시오"라고 말을 하고 집에 돌아오는데 마음이 얼마나 홀가분한지 모르겠더랍니다. 그 동안 마음을 짓누르고 있던 모든 고통은 사라지고 날 것 같은 기쁨으로 엎드려 기도하니 하나님이 당장 응답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깨끗한 영혼은 오직 사랑과 화평 속에 있는 것입니다. 의와 진리와 사랑과 화평을 좇아 마음을 깨끗하게 하십시오. 그러면 주님이 쓰시기에 합당하고 긴요하게 사용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에 우리 그리스도인의 모든 삶의 의미와 영광이 깃들어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기도복의 근원이 되시는 아버지 하나님, 오늘도 저희 더러운 인간들을 불러주셔서 깨끗하라 하시는 말씀을 다시 들려주시니 감사합니다. 우리 마음속에는 어지러움과 더러움이 있습니다. 우리의 상황은 모순과 부조리로 때묻었습니다. 기도하오니 이제 저희를 십자가의 보혈로 씻겨 주시고 하나님 앞에 온전히 쓰일 수 있는 그릇이 되게 하옵소서. 사랑과 믿음과 화평을 좇아 정결하게 하시고, 오로지 주님이 쓰시기에 합당한 그릇이 되게 하옵소서. 그리고 그 속에 우리의 보람과 가치, 행복이 있음을 깨닫도록 인도하옵소서. 아멘.  

깨끗한 그릇(디모데후서 219-26)

 

그러나 하나님의 견고한 터는 섰으니 인침이 있어 일렀으되 주께서 자기 백성을 아신다 하며 또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마다 불의에서 떠날지어다 하였느니라 큰 집에는 금과 은의 그릇이 있을 뿐 아니요 나무와 질그릇도 있어 귀히 쓰는 것도 있고 전혀 쓰는 것도 있나니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예비함이 되리라 또한 네가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과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좇으라 어리석고 무식한 변론을 버리라 이에서 다툼이 나는 줄 앎이라 마땅히 주의 종은 다투지 아니하고 모든 사람을 대하여 온유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참으며 거역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징계할지니 혹 하나님이 저희에게 회개함을 주사 진리를 알게 하실까 하며 저희로 깨어 마귀의 올무에서 벗어나 하나님께 사로잡힌 바 되어 그 뜻을 좇게 하실까 함이라

 

희소 가치라는 말이 있습니다.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많으면 가치가 없고 흔하지 않는 것이라야 가치가 있다는 말입니다. 예를 들어 사람들이 귀하게 여기는 다이아몬드가 흔한 돌멩이처럼 아무렇게나 길에 굴러다닌다고 합시다. 아무도 그 다이아몬드를 귀중하게 생각하거나 가치가 있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요즈음은 희소 가치가 사람에게도 적용되는 것 같습니다. 점점 사람의 수가 많아져 지구가 만원이 되어지자 상대적으로 사람의 가치는 점점 하락되어 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사람을 가리켜 천하를 주고도 바꿀 수 없는 생명을 가진 존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사람이란 많아졌다고 하여 가치가 떨어지는 그런 존재가 아니라 절대 가치에 사는 존재요, 결코 상대 가치에 의해 평가받는 존재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신앙이란 무엇입니까? 이것은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에 있어서 절대 가치의 발견을 의미합니다. 누가 무어라 하여도 그리스도 안에서 평가하는 새 가치, 곧 절대 가치를 찾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요즈음의 보편적인 평가 경향은 소유와 기능에 의해 그 사람의 가치를 판단하는 것 같아서 슬픈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얼마나 많은 것을 소유했으며 어떤 기능을 가졌는가 하는 면이나 그와 관련되는 것으로 평가 기준은 하락된 것 같습니다.

사람의 가치는 그 사람 속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에 의해 평가되어야 합니다. 그 중심에 하나님의 형상이 얼마나 짙고 깨끗하게 보존되어 있으며, 얼마나 오늘도 밝게 빛나고 있느냐 하는 것이 평가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얼마나 아름답고 건강한가, 혹은 그의 기술이 뛰어났는가 하는 것은 세상이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입니다. 그런 것은 절대로 우리 기독교인을 판단할 기준이 될 수가 없습니다. 성경이 판단하는 것은 그 사람 속에 하나님을 닮은 하나님의 형상이 얼마나 있으며, 또한 살아있느냐 하는 것이 평가 기준이 된다는 말입니다.

사람의 행복은 그가 가진 소유나 기능에 의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의 삶 속에서 보람을 얼마나 얻느냐 하는 것에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이란 밥을 먹고 사는 것이 아니라 보람을 먹고 사는 존재라고까지 비약해서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 보람이 없는 삶이란 육체의 길이요, 동물의 길인 것입니다.

인간을 인간 되게 하는 보람은 어디에서 올까요? 이 해답은 다음 세 가지 차원에서 온다고 생각합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부름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개별적으로 절대적으로 그를 필요로 한다고 느끼는 그런 신앙에서 자기 보람을 찾을 수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가 바로 그 보람을 우리에게 계시해 주는 것입니다. "나는 이만한 댓가를 주고 너를 샀노라"고 하는 예수님의 십자가는 바로 나 자신의 절대적 가치를 의미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평가하든지 간에 예수님이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이상 그것이 바로 나의 기본 가치요 밑천이며 또한 나의 보람인 것입니다. 거기에다가 이제 예수님이 나를 필요로 하신다면 그 무엇이 문제가 되겠습니까? 나의 병이 문제입니까? 아니면 나의 가난이 문제입니까? 적어도 믿음을 가진 우리들로서는 예수님께서 인정하여 주시고 또한 개별적으로 필요로 하여 불러주신다면 바로 그것이 우리의 행복이며 보람이 아니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그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온 생을 오로지 복음의 사도로 살게 된 것입니다.

둘째로는 각기 자신에 의한 평가입니다. 자기 스스로가 얼마나 필요로 하고 있는가 가만히 한 번 생각해 보기로 합시다. 우리의 이상과 현실을 생각해보고, 나에게 진정 나 자신이 필요하다는 부름을 들을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항상 양심으로부터 혹은 이성의 비판으로부터 또는 내 자신의 깊은 반성 속에서 스스로 나는 나 자신을 어떻게 평가해 주고 있습니까? 자신이 스스로가 필요한 존재로 평가해 주는지 아닌지 조용히 생각해 봅시다. 나의 진실이 나를 필요로 한다는 부름이 또한 나의 보람이 된다는 것을 잊지 맙시다.

셋째는 이웃들이 나를 필요로 하는 점입니다. 내 주위에 있는 친구나 이웃 사람들이나 동료나 가족, 더 나아가서는 이 사회와 민족이 나를 필요로 한다는 것은 정말 크나큰 행복입니다. 그런데 어떤 때는 꼭 필요한 존재가 아닌 듯한 느낌이 들 때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과연 가족이나 자녀들에게 혹은 주위 친구들이나 이 사회에 진정 필요한 존재입니까? 아니면 무위도식(無爲徒食)하고 불로소득(不勞所得)으로 지내는 그런 사람들입니까? 내 이웃으로부터 필요한 사람으로 부름은 나의 삶의 보람을 안겨주는 것입니다.

이상에서 살펴본 우리에게 보람을 주는 세 가지 부름을 하나로 통합해 볼 때 그것을 오늘 성경 본문에서는 "그릇"이라는 상징적인 말로 나타내 주고 있습니다. 우리 인간들의 삶 속에서 그릇은 매우 중요하고 요긴한 물건입니다. 어떤 내용물이든지 담는 그릇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 그릇의 가치는 겉모양에 있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담는 그릇인가라는 내용물에 의해 판별되는 것입니다. 그 위에 또 한 가지 생각해야 할 문제는 주인이 인정하는 가치 구성입니다. 성경 본문에는 "주인이 쓰시기에 합당하다"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 가정에서 여러 가지 형태의 그릇들이 있게 마련입니다. 넙적한 접시들로부터 길쭉한 병이나 항아리에 이르기까지 무수한 그릇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만든 재료에 따라 금 그릇, 은 그릇 혹은 나무 그릇이나 질 그릇 그리고 사기 그릇과 플라스틱 그릇 등 많은 종류의 그릇이 있습니다. 이 중에서 나무 그릇은 사라진 지 오래지만 아직도 미국 사회에서는 이 그릇을 사용하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그릇은 언제나 샐러드(Salad)를 만들 때 사용합니다. 샐러드를 만들 때에는 절대로 쇠를 대지 못하게 합니다. 왜냐하면 쇠붙이가 닿으면 비타민이 파괴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꼭 나무그릇에다 재료를 넣고 반드시 나무 수저로 젓는 것을 보았습니다.

아무튼 여러 형태와 여러 재료들로 만들어진 그릇들이 있습니다.

이 많은 그릇들은 각기 필요한 용도에 따라 여러 형태와 재료로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만든 모양이나 색깔이 아주 투박스러운 뚝배기라는 질그릇이 있습니다. 우리 한국 사람들이 좋아하는 된장찌개는 바로 이 뚝배기에 담아 먹어야 제 맛을 볼 수 있습니다.

미국에 있을 때 어느 집에서 설렁탕을 먹었는데 그 그릇이 뚝배기 였습니다. 설렁탕은 밑창을 긁으면 덜그럭 덜그럭 소리가 나는 한국 뚝배기가 아니면 제 맛이 나지 않기 때문에 한국에서 직접 보내어 온 뚝배기라는 것이었습니다. 모양도 별로 없고 깨끗하지도 않은 것 같은 이런 질그릇이라도 각기 쓰일 곳이 있는 것입니다.

사람을 한 번 생각해 봅시다. 사람에게도 여러 가지 종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고위층의 사람도 있고 노동자도 있으며, 남자와 여자도 있고 젊은이와 노인도 있습니다. 그리고 세상에는 대통령도 필요하지만 수위나 근로자도 필요합니다.

대광학교 교사로 근무하다가 덴마크에서 4년 동안 공부하고 돌아온 한 친구가 있었습니다. 그 곳에서 공부할 때 그 곳의 어린이들과 어울리게 되었답니다. 그는 아이들에게 "너희는 커서 무엇이 될래?" 하였더니, 그 중에서 한 어린아이가 전기공이 되겠다고 하더랍니다. 이상하게 여겨 그 이유를 물었더니 그 아이의 대답은 "학교 수업 도중에 자꾸 불이 켜졌다 꺼졌다 해서 그것을 그렇게 안되도록 해보겠다"는 것이더랍니다. 그리고 어떤 아이는 운전수가 되겠다고 하더랍니다.

우리 나라 어린이들은 어떻습니까? 장래 희망을 물으면 대부분 대통령이나 장군이 되겠다고 대답합니다. 어린아이들이 저마다 윗자리만 바라보고 있습니다. 도대체 이런 꿈을 키워 준 사람이 누굽니까? 그것은 바로 부모님들의 허영심입니다. 대체 누가 그렇게 가르쳤습니까? 그것은 바로 이 사회가 가르친 것입니다. 필요한 자를 생각하지 못하고, 귀한 것, 높은 것만을 생각합니다. 이것이 얼마나 부조리하고 오늘까지 이 사회를 불행하게 하며 자신들도 불행해지게 하는 것인지 모릅니다.

가만히 우리 주위를 둘러보십시오. 우리 사회에서 대학 총장을 하다가 교수로 내려앉은 사람 보았습니까? 저는 이런 사람을 본적이 있습니다. 은행장을 하던 분이 바로 그 은행의 수위를 하고 있었습니다. 이해가 되지 않아서 여쭈어 보았더니 박사 학위를 따고 가장 두뇌의 회전이 잘 될 때는 은행장을 했지만, 나이가 많아짐에 따라 머리가 둔해지고 피곤하여 도저히 은행장이라는 지위에 앉아 있기가 힘들더랍니다. 그래서 자리를 좀 낮추어 달라고 하니 어떤 과장 자리를 내주는데 그것도 골치가 아프고 힘이 들어 수위를 시켜달라고 하여 지금 수위직을 맡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못할 것이 없지 않습니까? 못할 이유가 전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못합니까? 무엇이 잘못된 것입니까?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형상이 그 중심에 있느냐가 평가 기준이지 절대로 지위의 높고 낮음으로 평가될 수는 없습니다. 주님이 그 사람을 쓰시기에 합당한 그릇인가가 중요한 과제입니다. 가끔 늙은 부모님들이 모여 자식 자랑을 할 때가 있습니다. 현실적으로 높은 지위나 많은 돈을 번 아들을 둔 부모는 크게 자랑하지만, 그렇지 못한 부모들은 아무 소리도 못하는 것을 봅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은 정말 좋지 못합니다. 높으면 높은 대로 겸손해야 하며, 낮으면 낮은 대로 비굴해지지 말아야 합니다. 정말로 가난하고 낮은 사람은 비굴한 사람입니다. 돈보다도 더욱 사람을 가난하게 만드는 것은 '비굴'이라는 것입니다.

여러 가지 많은 그릇들을 어떻게 어느 곳에 사용할는지가 다 주인의 용도에 따른 것입니다. 그의 필요는 다원적이며 다양합니다. 이 사회는 여러 유형의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가치는 지위나 신분의 높고 낮음이나 재산의 많고 적음에 따라 결정하는 상대적인 것이 아니라, 주인과의 관계에서 오는 절대적인 관계인 것입니다. 주인이 쓰기에 합당하고 필요하게 쓰이면 그뿐입니다. 절대적인 가치 이것이 바로 신앙입니다. 교환 가치나 상품 가치가 아닌 필요 가치입니다.

흔히 비유되는 것으로 우리의 몸을 생각해봅시다. 우리의 각 지체, 발 등이 서로 비난하고 서로 필요 없는 존재라고 욕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가령 손이 발에게 "너는 더러우니까 존재할 가치가 없다"고 해서 과연 발이 필요 없는 것입니까? 우리의 몸은 이 모든 것이 필요하며 이것들이 서로 조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그것들이 그대로가 주인과의 관계에서 절대적 가치를 지니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우리에게는 지식이나 돈이나 나이 또는 건강이 문제가 아닙니다.

다만 주인의 필요에 따르는 것뿐입니다. 죽음도 하나님이 필요하시면 그것으로 만족합니다.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왜 순교를 당해야 합니까? 그것 역시 하나님의 역사에 필요한 일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여기까지 우리는 하나님의 필요, 하나님과 나와의 구체적 현실 속에서 절대적 가치를 인정하고 바로 붙들고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여러분, 이제는 지난날을 돌아보며 그 모든 굴곡 있는 어려운 현실이 신앙적인 차원에서 하나님의 선교에 필요한 것이었다라고 생각할 수는 없겠습니까? 그뿐만 아니라 이제 그릇으로서의 제일 중요한 것은 주인에게 필요한 그릇입니다. 그러면 어떤 그릇이 주인에게 필요한 그릇으로 사용될 수 있습니까? 금 그릇이나 은그릇이라 해도 더러워진 그릇이라면 필요 없으며 절대로 사용할 수가 없습니다. 깨끗하지 못한 그릇은 오히려 그 내용물을 못 쓰게 만들뿐입니다. 비록 질그릇이나 나무 그릇이라도 깨끗하면 귀히 쓰일 수 있습니다.

얼마 전에 어린이들이 번데기를 먹고 죽은 사건이 신문에 보도된 적이 있습니다. 그 이유는 번데기를 담았던 자루에 농약이 묻어 있었기 때문이었음이 밝혀졌습니다. 독이 묻어 있는 그릇, 이것은 주인이 쓰시기에 합당하지 않습니다. 깨끗한 그릇이어야만 주인이 인정하는 그릇입니다.

심리학에서는 사람의 마음을 더럽히는 것으로 다섯 가지 요인이 있다고 합니다. 첫째는 복수하고자 하는 복수심이며, 둘째는 야망, 셋째는 질투이며, 넷째는 욕심, 곧 소유욕, 그리고 다섯째는 자존심이라고 합니다. 이런 것들이 사람의 마음에 있을 때 그 마음이 더러워진다고 합니다.

어떤 사회학자는 현대인의 문제를 묘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소위 타자(他者)에 의한 세계관(Other oriented world view)입니다. 자신에 의한 세계관이 아니요, 그렇다고 하나님에 의한 세계관도 아닌 다른 사람들의 눈으로 보는 세계관을 의미합니다. 가령 옷을 입는 것에도 자신의 체형이나 기호는 생각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눈에 어떻게 보일까를 생각하여 선택하는 행위 같은 것입니다. 내 형편에 의해 옳고 그름을 판단하지 않고 다른 사람은 어떤가를 먼저 생각합니다. 그래서 가끔 이런 말을 하는 것을 듣습니다. "남편을 잘못 만나서가 아니라 친구가 너무 잘 사는 것이 문제다." 다시 말하면 남편을 친구의 부를 기준으로 평가하는 것이 요즈음 현대인의 문제인 것입니다. 이런 세계관과 질투는 그 사람의 마음을 더럽히고 맙니다. 이렇게 더러워진 그릇은 쓰여질 수가 없으며 가치 없는 것입니다.

본문 22절에 청년의 정욕, 불과 같이 타오르는 정욕, 그 야망과 욕심, 때로는 환상, 이러한 지나친 것들이 그 사람을 더럽힌다고 하였습니다. 오늘날 청년들이 깊이 새겨 둘 말씀입니다. 기술도 지식도 모두 중요하지만, 그 이전에 먼저 깨끗해야 합니다. 이것이 기본적인 것입니다.

또한 깨끗하다는 말은 온전하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깨진 그릇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진실과 청결이 먼저요, 그 다음으로 인내와 순종과 충성이 뒤따라야 합니다. 그릇에다 무엇을 담았는데 그대로 새어버리고 만다면 무엇에 쓰이겠습니까? 이미 그릇으로서 가치를 잃은 것은 금 그릇이나 은그릇이라도 아무 소용이 없는 쓸모 없는 것에 지나지 못합니다.

우리 주위에는 이렇게 깨어진 인격이 얼마나 많습니까? 진리의 귀한 말씀이 그 마음속에 가만히 담겨 있지 못하고 줄줄 새어 사라지는 경우가 정말 허다합니다. 이런 인격에 무엇을 기대하고 또 어떻게 믿겠습니까? 그러므로 그리스도에게 필요한 그릇은 깨끗하고 청결한 그릇 그리고 진실과 인내에 기초한 그릇입니다. 주님은 한 번 말씀을 받아들이면 꾸준하고 변치 않는 사람을 원하십니다.

숭전대 교수로 있던 제 친구가 있는데 그 친구는 대학 다닐 때도 그랬지만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교회에 나오는 것이다"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는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목사님의 설교나 장로님의 설교를 가리지 않고 꾸준히 교회에 출석하여 들었습니다.

정말 믿음직스러운 벗입니다.

때때로 우리는 너무나도 입맛이 까다롭습니다. 너무나 비판적이고 실리적입니다. 그 그릇이 너무나 얇아 마치 알루미늄 냄비 같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좀 지조가 있고 긍지가 있어야 되겠습니다.

교회에 나올 때마다 은혜를 받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때는 졸다 갈 때도 있고, 또 어떤 때는 이런 생각 저런 생각으로 예배를 제대로 드리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이럴 때 공연히 나왔다고 생각하지 맙시다. 또 어떤 때는 설교 말씀에 그다지 큰 감명을 받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설교자가 열심히 기도하고 많이 준비하였다 하더라도 그 시간에 말씀이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은혜로울 수는 없습니다.

진실한 그리스도인라면 꾸준히 교회에 나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말씀하실 수 있는 기회를 드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믿음직스럽고 튼튼한 그릇이 되어야 하나님이 보다 귀한 것을 넘치도록 담아 주실 것입니다. 지식이나 재주보다도, 두뇌나 아름다움보다도 더 귀한 것은 진실입니다. 진실함이 없는 지식이나 기술은 극히 위험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 어거스틴은 "믿음 없는 교육은 악마를 생산한다"라는 말을 하였습니다. 현대에 필요한 것은 많은 소유나 통계 숫자보다도 오히려 정결인 줄로 생각합니다.

더러워지기는 쉬워도 정결해지기는 참으로 어렵습니다. 어떤 사람은 단 1분 동안에 더러워지고 일생을 두고 씻지 못하고 더러운 상태에 머물러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자취할 때 경험한 일이 있습니다.

밥은 어느 정도 하겠는데 설거지하기는 정말 싫었습니다. 더럽히기는 쉬워도 다시 깨끗하게 하기는 어렵습니다. 항상 깨끗하게 보존하기란 무척 어려운 것입니다. 금 그릇, 은 그릇 그리고 나무 그릇, 질그릇을 논하지는 맙시다. 깨끗하게 보존되어 주인이 필요한 경우에 쓰여질 수 있느냐가 문제일 뿐입니다. 귀하게 쓰여지는 존재가 될 때 거기에 삶의 보람이 있고 삶의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깨끗함이란 무엇일까요? 성경 본문에는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과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좇으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이 곧 깨끗한 것입니다. 변론과 다툼과 정욕, 이러한 것들은 모두가 더러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혹 미워하는 마음이 있다면 열심히 기도하시고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어떤 분이 이런 경험을 한 적이 있다고 합니다. 어느 날 아는 사람이 다급하게 찾아와서 돈을 꾸어 달라고 하기에 거절할 수가 없어서 다른 사람에게 돈을 빌려다가 꾸어 주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3일 후에는 돌려주겠다고 하더니 한 달이 지나고 서너 달이 지나도록 돈은커녕 찾아오지도 않았다고 합니다. 이 분은 자기도 꾼 돈이기 때문에 매달 꼬박꼬박 이자를 주었는데, 이자를 줄 때마다 마음이 괴롭고 속이 상했답니다. 마음의 더러움으로 기도도 되지 않고 "도대체 무슨 예수 믿는 사람이 그럴 수가 있을까"라는 생각이 머리 속에서 맴돌기만 하더랍니다. 견딜 수 없어 수없이 기도한 끝에 새로운 것을 발견하게 되었는데 잊어버리기로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그 사람을 한 번 찾아보기로 결심을 하고 방문했더니, 그 사람은 그만 빚더미에 올라앉아 밥도 못 먹고 있는 처지였다는 것입니다. 너무 불쌍해서 쌀 한 가마를 사주고 얼마간의 돈을 주면서 보태 쓰라고 하였더니 그 사람은 "차라리 죽으라고 하는 것이 마음 편하지 이런 것은 견딜 수 없습니다"라고 하며 미안하여 어쩔 줄을 모르더랍니다. 그 때 이 분은 "아닙니다. 전에 진 빚은 잊어버리십시오. 잊어버리는 표로 제가 이렇게 하는 것입니다. 절대로 갚을 생각은 하지 마십시오"라고 말을 하고 집에 돌아오는데 마음이 얼마나 홀가분한지 모르겠더랍니다. 그 동안 마음을 짓누르고 있던 모든 고통은 사라지고 날 것 같은 기쁨으로 엎드려 기도하니 하나님이 당장 응답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깨끗한 영혼은 오직 사랑과 화평 속에 있는 것입니다. 의와 진리와 사랑과 화평을 좇아 마음을 깨끗하게 하십시오. 그러면 주님이 쓰시기에 합당하고 긴요하게 사용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에 우리 그리스도인의 모든 삶의 의미와 영광이 깃들어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기도복의 근원이 되시는 아버지 하나님, 오늘도 저희 더러운 인간들을 불러주셔서 깨끗하라 하시는 말씀을 다시 들려주시니 감사합니다. 우리 마음속에는 어지러움과 더러움이 있습니다. 우리의 상황은 모순과 부조리로 때묻었습니다. 기도하오니 이제 저희를 십자가의 보혈로 씻겨 주시고 하나님 앞에 온전히 쓰일 수 있는 그릇이 되게 하옵소서. 사랑과 믿음과 화평을 좇아 정결하게 하시고, 오로지 주님이 쓰시기에 합당한 그릇이 되게 하옵소서. 그리고 그 속에 우리의 보람과 가치, 행복이 있음을 깨닫도록 인도하옵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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