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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땅을 고칠지라(역대하 7장 11절~18절)

by 【고동엽】 2024. 11.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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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땅을 고칠지라(역대하 71118)

 

솔로몬이 여호와의 전과 왕궁을 필역하고 무릇 그 심중에 여호와의 전과 자기의 궁궐에 어떻게 만들고자 한 것을 다 형통하게 이루니라. 밤에 여호와께서 솔로몬에게 나타나사 이르시되, 내가 이미 네 기도를 듣고 이곳을 택하여 내게 제사하는 전을 삼았으니 혹 내가 하늘을 닫고 비를 내리지 아니하거나 혹 메뚜기로 토산을 먹게 하거나 혹 염병으로 내 백성 가운데 유행하게 할 때에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겸비하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구하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 죄를 사하고 그 땅을 고칠지라. 이곳에서 하는 기도에 내가 눈을 들고 귀를 기울이리니, 이는 내가 이미 이 전을 택하고 거룩하게 하여 내 이름으로 여기 영영히 있게 하였음이라. 내 눈과 내 마음이 항상 여기 있으리라. 네가 만일 내 앞에서 행하기를 네 아비 다윗같이 하여 내가 네게 명한 모든 것을 행하여 내 율례와 규례를 지키면 내가 네 나라 위를 견고케 하되 전에 내가 네 아비 다윗과 언약하기를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한 대로 하리라.

 

 

몇달 전, 서울 봉천동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한 병원에 교통사고를 당한 위독한 생명이 이르렀습니다. 차에 치인 어린 소녀가 피를 흘리며 택시 운전기사에게 업혀 온 것입니다. 이 어린아이의 부모가 누구인지는 모릅니다. 다만 그 생명이 위독하다는 사실만 분명할 뿐입니다. 병원 원장은 보호자가 없다는 이유로 이 아이의 치료를 거절했습니다. 운전기사는 헐레벌떡 다른 병원을 찾아나섰습니다. 그 병원에서도 치료를 거부당했습니다. 다시 몇몇 병원을 더 전전해보았으나 외면 당하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어린아이는 끝내 죽고 말았습니다. 사후에 조사를 해보니, 그 어린아이는 맨 처음에 치료를 거부했던 병원의 원장 딸이더랍니다. 말문을 닫을 일입니다.

철학자들은 현대를 가리켜 나름대로의 정의를 내리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획스터는 현대를 '혼란의 시대'라고 일컫는가 하면, 소로킨은 '위기의 시대', 오든은 '불안의 시대', 알렉산더는 '불합리의 시대', 괴슬러는 '갈망의 시대', 드러커는 '단절의 시대', 갤브레이드는 '불확실성의 시대'로 표현합니다. 여러분은 현대를 어떤 시대라고 정의할 것입니까? 여러분이 경험하고 여러분이 느끼는 대로는 이 세대를 무슨 말로 표현해야 할 것 같습니까? 현대가 병든 시대인 것은 분명합니다. 정상(正常)이 아닙니다. 건강하지 못합니다. 고통스럽고 불안스럽고 괴롭습니다. 가장 괴로운 것은 병의 원인을 모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병의 원인을 모르면 치료할 길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치료D똃똕TXT];를 받기는 받아야 합니다. 개선(改善)도 해보고 개혁(改革)도 해보고 혁명(革命)도 해봅니다. 이렇게저렇게 해봅니다마는 아무리 해보아도 갈수록 태산입니다. 점점 더 어렵습니다. 나아지는 것이 없습니다. 병은 날로 악화 일로(惡化一路)일 따름입니다. "옛날이 좋았다" --- 흔히들 몇년 전을 이렇게 회고합니다. 그러나 그 몇년 전에는 그때대로 죽을 지경이라고 푸념을 하면서 살았던 것이 사실입니다.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심리학자 에리히 프롬(Erich Fromm)은 건강하지 못한 사회를 세 가지로 특징지어서 정의합니다.

첫째는 적의(敵意)입니다. 사람들을 적으로 대합니다. 원수 맺는 일이 많아집니다. 모든 사람들을 평안한 마음으로, 사랑으로 대하지 않고 원수처럼 대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불신입니다. 사람은 서로 믿고 살게 마련인데 아무도 믿지 않습니다. 세상에 믿을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판단합니다.

사람도 병들었고 사회도 병들었습니다.

셋째는 도구화(道具化)라는 것입니다. 상대방을 이용하려듭니다. 상대방을 수단화합니다. 인격 대 인격으로 대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을 부()를 축적하는 수단으로, 생산 도구로 향락의 방편으로 이용하려드는 것입니다. 사람들을 친절하게 대하는 것도 진정한 친절이 아니라 장삿속 때문입니다. 심지어는 교인들 중에도 이런 사람이 있다고 합니다. '이 교회는 교인이 많아서 장사하는 데 큰 도움이 되겠다'라고 생각하여 교회에 나온다는 것입니다. 무엇이든지 수단화하려는 생각으로 가득찬, 병든 세상입니다.

오늘의 본문말씀에서 14절은 미국의 34대 대통령 아이젠하워가 적절히 인용해서 그를 돋보이게 만든 구절입니다. 14절의 말씀을 다시 한번 읽어봅시다.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겸비(謙卑)하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구하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 죄를 사하고 그 땅을 고칠지라."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취임식에서 이 말씀을 봉독하고 그 위에 손을 얹어 선서를 했다고 합니다. 이 말씀에 의지하고 이 말씀으로 기도한 것입니다.

요즈음에 와서 우리는 천재지변(天災地變)이 발생했다는 불길한 소식들을 자주 접하게 됩니다. 도처에서 지진이 난다고 합니다. 대기오염이 심각해졌고 생태계의 파괴도 눈에 띄게 확인되고 있습니다. 이상 기후, 이상 기온, 원인 모를 새로운 질병들이 날로, 날로 우리 앞에 다가옵니다. 어떻게 대처해야 합니까? 우리는 이것이 자연이 내리는 재앙이라기 전에 회개를 촉구하는 하나님의 음성임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원인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인간에게 있다는 말입니다. 이제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 구체적으로 확인해봅시다.

아담이 에덴동산에서 범죄했을 때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3:17-18)." 또 가인이 동생 아벨을 죽이는 무서운 죄를 지었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가인에게 말씀하십니다. "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은즉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네가 밭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여 유리 하는 자가 되리라(4:11-12)." 이러한데 어디에 가서 평화를 구하겠습니까? 하나님께로서 저주받은 사람이 땅을 간다고 하여 농사가 됩니까? 아무리 부지런해봐야 부자가 되지 않습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인간이 문제입니다. 더는 자연을 탓하지 말 것입니다.

세상을 비난하지 말 것입니다. 기술의 문제도 능력의 문제도 아닙니다. 정치의 문제는 더구나 아닙니다.

근자 우리나라의 고질적인 문제 가운데 하나가 시위(示威)라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입니다. 파업과 쟁의가 끊이지 않습니다. 노동문제 전문가는 오늘의 노동 현실을 두고 이렇게 말합니다. "파업과 쟁의의 문제는 더 이상 임금의 문제가 아니다" - 월급을 인상해달라는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경제적인 문제가 아닙니다. 보다 근원적인 문제가 도덕성에서 기인한다는 것을 직시해야 합니다. 이제는 정치 경제 문제로 시비를 벌이지 맙시다. 사람을 바꾸고, 제도를 바꾸고, 헌법을 바꾸어보아도 별수 없습니다. 백 번 바꾸어봐야 소용이 없습니다. 문제는 도덕성이요, 인간성에 있습니다. 나 자신의 문제임을 깨닫고 영적인 각성을 촉구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과 나 개인의 문제, 본질적인 문제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 샬롬(평강)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 만물을 인간을 위하여 주셨습니다. 천지를 창조하시고 만물을 아름답게 지어주시면서, '네가 이름을 짓고 네가 다스려라' 하셨습니다. 다스려라, 정복하라 - 만물은 확실히 인간을 위하여 존재하나 그것은 우리와 하나님의 관계가 정상적일 때에 한합니다. 우리의 영이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있을 때에만 만물은 인간에게 복종하고, 인간을 돕게 됩니다. 이것이 본래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병리현상이 일어나면서 자연은 인간을 원수로 대하게 됩니다. 보복의 상대로 바뀝니다. 사람은 본디 건강하도록 창조되었습니다. 어떤 병균도 이겨낼 수 있습니다. 질병을 물리칠 능력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병듭니다. 병이라 함은 본래적이자 생리적인 문제로부터의 이탈을 의미합니다. disorder, 곧 무질서를 의미합니다. 질서 이탈, 질서 파괴입니다. 정상적인 관계가 파괴되면서 그 파급효과로 모든 일들이 제 궤도에서 이탈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몸과 정신과 영으로 창조되었습니다. 영은 하나님의 지배를 받고 정신은 영의 지배를 받으며 몸은 정신의 지배를 받습니다. 그리고 만물은 사람의 지배를 받게 됩니다. 이처럼 세계는 질서 있게 화평되게 조화롭게 창조되었습니다. 그런데 상황이 거꾸로 됩니다. 정신이 물질의 노예가 되고 그릇된 이념의 노예가 됩니다. 영이 그만 육체의 노예가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모든 질서는 무너지고 병리현상으로 치닫게 되는 것입니다.

심리학자들은 건강하지 못한 인격의 하나로 피해망상(被害妄想)을 들고 있습니다. 정신적으로 건강하지 못한 사람은 늘 피해망상에 시달립니다. 그래서 상대방을 의심합니다. 거리에 나서면 모든 사람이 나를 해치려고 하는 것만 같아 보입니다. 만나는 사람마다 나를 모략하고 거짓말을 하는 것 같습니다. 마지막에 가서는 아무도 내 편에 있는 사람이 없다고 두려워합니다. 모두가 내게는 가해자요, 나는 피해자일 뿐입니다. 하루하루를 움츠리고 뒤로 물러서고 벌벌 떨면서 살아갑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세상을 적대감으로 대하게 되고 공포와 시기, 질투, 증오로 가득차 있습니다. 또한 건강하지 못한 사회에는 불신과 폭력과 분열, 파괴가 난무합니다. 하지만 이 모든 현상은 사실상 참된 원인이 아닙니다. 병의 근본 원인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근본 원인은 보다 더 깊은 데에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에서는 병의 근본 원인이 죄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세상이 병드는 것은 죄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이요, 죄를 반복하고 회개하지 않기 때문이요,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면서도 하나님께 마음을 돌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죄를 정당화하기 때문입니다.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전가하고 내 불행이 다른 사람 때문이라고 합니다. 내 가난이 다른 사람 때문이라고 합니다. 내 죄까지도 타인 때문이라고 원망합니다. 죄의 책임을 전가하고 원인마저 부정합니다. 여러분, 가장 무서운 죄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것은 교만의 죄입니다.

현대인의 교만죄는 대체로 네 가지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 첫째는 지적(知的) 교만입니다. 과학주의(scienticism)라고 하는 우상이 현대인의 마음속에 있어 무서운 죄를 짓게 합니다. 둘째는 권력적 교만입니다. 권력이면 모든 것이 다 가능한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하면 된다고 큰소리를 칩니다. 되긴 무엇이 됩니까? 이러한 교만이 권력적 교만입니다. 셋째로 도덕적 교만이 있습니다. 권력으로 위장해놓고 내가 가장 정당하고 가장 애국적이며 정의 면에 있다고 주장합니다. 사실은 그렇지 않으면서 정의요, 진리요, 가장 옳은 것으로 스스로를 정당화하는 것이 도덕적 교만입니다. 넷째로 종교적 교만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부인합니다. 그 결과로 인간은 병들고 인간성이 상실되어 모든 관계가 파괴되고 망해 가는 것을 우리는 역사 속에서 분명히 보아왔습니다.

그래서 신학자들은 말하곤 합니다. "하나님을 부인하는 순간 인간 존재도 함께 부인되었다".

본문말씀은 또다시 우리에게 가르쳐줍니다. "내가 그 땅을 고칠지라" - 여기에는 네 가지의 전제 조건이 있습니다. 네 가지의 회개를 하라고 말씀합니다.

첫째, "겸비(謙卑)하라" - 겸손하라고 하십니다. 나를 스스로 낮출 때에 진실을 알게 됩니다. 교만한 자는 나를 높이면서 진실을 잊어버립니다. 어리석음을 낳습니다. 겸비한 자만이 지혜롭게 되고 모든 책임을 스스로 질 줄 압니다. 모든 것이 나 때문이며, 내 죄이며, 내 잘못이라고 시인할 수 있습니다. 어떤 비난에도 대항하지 않습니다. 역경 속에서도 비굴해지지 않습니다.

이것이 겸손입니다. 겸손할 때에 비로소 자기 자신을 직시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너무 교만했습니다. 625의 폐허에서 일어나 살만큼 되었다고, 또 간신히 올림픽 한번 치렀다고 해서 마치 특별한 민족인 것처럼 교만했습니다. 개인도 민족도 국가도 교만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속으로 깊이 병들고 있는 것을 몰랐습니다. 아무 것도 없으면서 다 있는 것처럼 교만하게 굴었던 것입니다. 이제 우리 스스로 겸비해야 할 때입니다. 스스로 낮추라-하나님의 음성이 들릴 만큼, 모든 문제에서 진실을 깨달을 만큼 스스로 낮추라고 말씀하십니다.

둘째, "기도하라"하십니다. 더는 자기 주장을 내세우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물어야 하겠습니다. 기도는 하나님께로 나아와 하나님의 뜻을 묻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으로 돌아와서 기도하십시오. 기도하지 않는 죄 만큼 큰 죄가 없습니다. 진실하게 또 겸손하게 무릎을 꿇어 하나님께 열심히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셋째, "내 얼굴을 구하라" 하십니다. 마치 어린아이가 어머니의 얼굴을 올려다보는 것과도 같이 위를 쳐다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비와 하나님의 긍휼,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간절한 눈으로 하나님을 올려다보아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마음, 하나님의 긍휼만을 간절히 기다리는 마음으로 돌아갑시다. 하나님의 뜻에 관심을 두어야 합니다.

넷째, 악한 길에서 떠나야 하겠습니다. 이는 회개의 결단을 의미합니다. 회개의 열매맺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삶의 자세를 고쳐야 합니다.

우리 조상들은 하나님을 모르는 가운데에서도 아주 지혜로웠던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비가 오지 않아 한재(旱災)가 닥치면 기우제(祈雨祭)를 드리지 않았습니까? 사람의 힘으로는 도저히 안되므로 하나님의 능력에 의지하는 것이지요. 하나님을 모르는 입장에서 보면 참으로 괜찮은 행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만이 아니었습니다. 감옥에 있는 죄수들을 석방해주었습니다. 사람들이 제아무리 공정하게 재판한다고 해도 완전한 것은 아닙니다.

어딘가에 억울한 사람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감옥에 있는 죄인들을 석방했습니다. 그렇게 하면서 하늘로부터 비가 내리기를 기다렸습니다. 참으로 지혜로운 발상이었다고 하겠습니다.

또 하나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조선 제3대 임금 태종 때에 있었던 일입니다. 오랫동안 비가 내리지 않아 농사를 지을 수가 없었습니다. 사람들이 굶어죽게 되었습니다. 감옥에 갇혀 있던 죄수들을 석방하고 기우제를 정성껏 드렸지만 비가 내릴 기미는 보이지 않습니다. 왕은 가만히 생각합니다. 생각이 궁녀들에게 미쳤습니다. 수천 명이나 되는 궁녀들은 어쩌다가 궁으로 들어와 아리따운 청춘을 고스란히 희생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중에는 시집가서 자녀 낳으며 살고 싶은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왕은 궁녀들에게 혼수감까지 후하게 주어 사가(私家)로 보내 출가하게 했습니다. 그렇게 하자 마침내 비가 내렸다고 합니다.

여러분, 노력도 좋고 부지런함도 좋습니다. 기술 개발도 좋고 생산 증대도 좋지만 그것만 가지고는 안됩니다.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기는 바가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먼저 내 안에 있는 죄를 살펴야 합니다. 오늘의 본문에서는 회개하고 악에서 떠날 때에 하늘에서 보시고 하늘에서 들으시고 하늘에서 죄를 사하여 주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에스겔 1821절 이하에서도 회개를 촉구하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나 악인이 만일 그 행한 모든 죄에서 돌이켜 떠나 내 모든 율례(律例)를 지키고 법과 의를 행하면 정녕 살고 죽지 아니할 것이라. 그 범죄한 것이 하나도 기억함이 되지 아니하리니 그 행한 의로 인하여 살리라.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지난날의 죄가 많지만 이제 회개하면 그 지은 죄가 하나도 기억되지 아니하리라, 그리고 오늘 행한 이 의로 인하여 살리라고 간절히 회개를 촉구하십니다. 과거와는 상관없이 지금 이 자리에서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으면 하나님께서 약속하십니다. "그 죄를 사하고 그 땅을 고칠지라." 문제의 원인은 죄에 있습니다. 불행은 교만에서 비롯됩니다. 스스로 겸비하고 자세를 낮추고, 그리고 회개하십시다. 진정으로 회개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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