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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힘의 신비(고린도전서 2:1-5)

by 【고동엽】 2024. 12.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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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힘의 신비(고린도전서 2:1-5)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내 사전에 불가능이란 낱말은 없다"라고 자신 있게 말하던 세기의 영웅 나폴레옹이 전쟁에 패하고 세인트 헤레나 섬으로 정배를 가면서 남긴 말 중의 한 구절을 소개합니다.

"! 갈릴리 사람이여! 그대가 이겼소. 나는 무력으로 세계를 정복하려고 했지만 패하고 말았고, 사랑으로 온 세계를 점령한 그대가 이겼소." 여기서 갈릴리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말한 것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겼노라." 승리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말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8:37). 넉넉히 이기느니라고 고백했습니다. 넉넉히 이길 수 있고 또 이겨야 하는 승리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승리는 곧 영광이요, 실패란 언제나 비참합니다. 운동 선수들이 경기를 시작할 때는 언제나 다같이 의기양양합니다. 그러나 경기가 끝나고 나면 이긴 자는 영광을 얻고, 진자는 말할 수 없이 비참하고, 때로는 모욕까지 당하는 수가 있습니다. 한 사람이 이기면 한 사람이 지고, 한 사람이 영광을 누리면 한 사람은 모욕을 느껴야 합니다. 한 사람이 면류관을 쓸 때에 또 한 사람은 말할 수 없는 수치를 느껴야 합니다.

세상의 모든 승리는 대체로 이런 것이 많습니다. 또한 세상의 승리는 일시적인 것으로 오늘 승리하면 내일은 패합니다. 끝에 가서는 결국 패하는 것으로 막을 내립니다. 승리는 잠깐 비춰주는 번갯불과 같아서 숙명적인 괴롬이 있습니다. 소위 영광이라고 하는 것들이 이런 것들입니다.

세상 승리는 부분적인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돈을 버는 데 성공했지만 건강은 잃어버렸습니다. 건강을 지키는 데 패한 것이지요. 어떤 사람은 출세하는 데 성공했으나 사랑을 잃어버렸습니다. 어떤 사람은 명예도 얻었고 지위도 얻었습니다만 진실에 실패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세상에서 굉장한 것을 얻은 것 같고 존경을 받는 것 같으나 사실은 도덕에서 실패했습니다. 얻은 것이 있는가 하면 잃은 것이 더 많습니다. 그러므로 승리라 할 것도 없고 영광이라고 할 것도 없습니다.

로마는 온 세계를 무력으로 점령했지만 역사가들의 공통적인 견해로는 문화적으로 실패했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헬라 문화가 로마의 무력에 실려서 세계를 점령했다고들 말합니다. 두 대체 무엇이 이기고 무엇에 실패했단 말입니까?

이젠 온전한 승리, 절대적 승리, 영원한 승리는 없는 것입니까? 승리란 우선 힘에 있습니다. 재력, 돈의 힘도 대단합니다. 지력(知力)의 힘도 대단합니다. 무엇이든 알아야 하니까요. "아는 것이 힘이다"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그 외 권력, 영도력, 지도력, 덕의 힘, 영력 등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그러면 힘의 원리, 즉 역학의 원리는 무엇입니까? 첫째, 직선 상에 있어야 합니다. 구불구불 갈 지()자 걸음을 하면 승리하지 못합니다. 기둥으로 말하면 곧은 기둥이라야 합니다. 굽은 기둥은 쓸모가 없습니다. 인생을 사는 것도 마찬가지로 아주 직선적으로 사는 사람이 성공에 가깝습니다.

둘째, 힘은 단순한 가운데 있습니다. 너무 복잡하면 힘이 흩어지고 맙니다. 흔히 말하는 기억력을 놓고 보더라도 어린아이들은 기억력이 좋고 나이가 들면 기억력이 좋지 않다고들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의학적으로는 나이가 들었다고 기억력이 감퇴되는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그러면 왜 기억력이 없어진다고 느낍니까? 문제는 생각이 복잡하기 때문이라 합니다. 나이가 들면 들수록 무엇을 보든지 듣든지 한 가지만 생각지 아니하고 꼭 다른 생각을 더 한다는 것입니다. 정말 생각해야 할 것에 집중하지 못하고 생각하지 않아도 될 일을 많이 생각하기 때문에 기억력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단순한 마음, 깨끗한 마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신앙 생활도 좀 단순해야 합니다. 그래야 믿음에도 힘이 있습니다. 교회에 나와서 예배를 드릴 때도 어린애와 같은 단순한 마음으로 복잡한 것은 잊어버리고 찬송할 때 찬송하고, 기도할 때 기도해야 합니다. 공부할 때 놀 생각하고, 놀 때 공부 걱정하는 아이들이 있습니다. 둘 다 못하고 맙니다. 단순한 마음이어야 힘이 모이고 무엇이든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셋째로 힘은 결정적인 것이어야 합니다. 두 마음을 품고 이럴까, 저럴까 하는 동안은 아무 힘이 없습니다. 다시는 선택할 수 없고 고칠 수 없는 결정적인 상태에서 힘이 있습니다. 해도 괜찮고 안 해도 괜찮으면 전혀 힘이 없습니다. 뒤돌아보지 말고 결정적으로 나가야 힘이 있는 것입니다.

넷째로 힘은 합쳐야 합니다. 혼자보다 집중적으로 집합하여 밀고 나갈 때 힘이 되는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목적이 분명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일단 목적을 세웠으면 고치지 말고 후회하지 말고 목적을 향하여 나가야 합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반드시 보태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도덕적 뒷받침을 말합니다. 사람은 도덕적 존재이기에 선한 일에 강할 수는 있어도 불의한 일엔 강할 수가 없습니다. 선해야 하고 의로워야 하고 이타적이어야 합니다. 이기심처럼 사람의 능력을 마르게 하는 것은 없습니다. 다른 사람의 눈치볼 것 없이 나름대로 인류를 위하여, 세계를 위하여, 나를 위하여, 교회를 위하여라는 명분을 세워놓고 나가면 힘이 있습니다. 늘 나만 생각하는 사람은 그 양심이 그를 성원해 주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도 역시 자기를 성원해 주지 않음을 그는 압니다. 하나님도 자기편이 아니라는 것을 그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약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의 힘의 경험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는 다메섹 도상에서 결단하고 예수의 제자가 되며, 3년 동안 아라비아 사막에서 기도하고 수양을 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준비하고 사도된 지 약 10년이 넘었습니다. 10년 동안 복음을 전했기에 그에게는 지식의 힘이 있고, 믿음의 힘이 있고, 전적으로 위탁하는 헌심의 힘이 있습니다. 또 여기에다 경험의 힘까지 있었습니다. 사람이 해보지 않은 일을 하려면 주저하게 되는데 그는 10년의 경험의 힘까지 있었던 것입니다. 소위 바울에게는 힘의 요소가 다 갖추어졌습니다. 그러나 본문에 보면 처절하고 나약한 그의 인간의 일면을 볼 수 있습니다. "내가 너희 가운데 있을 때에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 왜 바울이 나약해졌습니까? 본문에서 암시한 대로 자기 의지, 자기 지혜, 자기 경험, 즉 자기의 어떤 것에 의지하려고 했을 때 약해졌다고 고백했습니다. 다 끊어버린 줄 알았는데 끊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다 죽어버린 줄 알았는데 완전히 죽지 못했고, 다 부정해 버린 줄 알았는데 아직도 남아 있었답니다. 그래서 약해질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술 끊은 지 30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술 냄새가 그리워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다 끊어버린 줄 알고 이제는 상관이 없는 줄 알았는데 아직도 미련이 남아있는 것입니다. 다 나은 부스럼도 긁으면 피가 납니다.

아직도 남아 있다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래서 약했노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아테네로 갔습니다. 아테네는 헬라의 수도로서 철학의 본산지였습니다. 바울은 원래 철학을 많이 공부한 사람이었습니다. 일생 처음 소크라테스, 아리스토텔레스, 플라톤이 살았던 철학의 본산지에 도착해 많은 학자들과 변론하니 옛날 솜씨가 나왔습니다. "너희가 모르고 섬기는 하나님을 내가 알게 하노라" 하며 한바탕 연설을 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들어주지 않았습니다. 그는 다른 곳에서는 가는 곳마다 교회를 세웠지만 아테네에서는 교회를 세우지 못했습니다. 별로 핍박도 없었는데 그는 실패하고 고린도에 갔습니다. 고린도에서 전도할 용기를 잃고 실의에 빠져 천막이나 치면서 지냈습니다. 사도행전 18장에 보면 성령이 바울에게 책망조로 말씀하셨습니다. "어찌하여 잠잠하느냐? 이 성에 구원받을 자가 많다. 담대히 말하라." 그는 큰 고민에 빠졌습니다. 옛날의 일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너희 가운데 있을 때에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 바울은 권력이나 죽는 것을 무서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왜 약해졌습니까? 여러분, 병이 났다고 약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정신이 강해질 수도 있습니다. 실패했다고 약해지는 것이 아니라 더 강해질 수도 있습니다. 환난이 사람을 더 강하게 할 수도 있습니다. 바울은 이런 환난에 무서워하는 자가 아니라 오히려 더 담대해지고 강해지는 사람입니다. 그러면 왜 이렇게 약해졌습니까? 문제는 자기 신뢰입니다. 자기 교만, 자기 지혜, 즉 자기라고 하는 문제가 나를 이렇게 괴롭혔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 바울의 깊은 고백을 깨달아야 합니다.

없어진 줄 알았던 혈기가 다시 나오고 다 없어진 줄 알았던 자가 교만, 자기애가 그대로 속에 남아 있습니다. 이것이 남아 있는 한 절대로 강할 수도 없고 지혜로울 수도 없음을 그는 알고 있었습니다. 고린도전서 15:31에서 그는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말했습니다. 자기를 죽여야 합니다. 자기를 죽이는 일에, 자기를 부정하는 일에 실패해서는 안됩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자기 부정 없이 예수를 따른다고 하면 언젠가는 내가 나를 믿는 것인지 예수를 믿는 것인지 구분이 잘 안 된다는 말입니다. 고린도전서 9:27"내 몸을 쳐서 나를 복종케 한다"고 했습니다. 자기를 쳐서 자기를 다스리는 일에 패하면 약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옛날 중국에서 문둥병이 자꾸 생겨 치료할 길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문둥병이란 진단이 내리면 그냥 총살을 시켰다고 합니다. 어느 서양 선교사인 의사가 환자 한 사람을 진단하게 되었습니다. 보기만 해도 문둥병자임을 쉽게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자기의 진단 결과에 따라 이 사람이 죽고 사는 것이 달려 있었습니다. 이 의사는 몹시 난처하여 말도 못하고 있는데 환자가 이렇게 말했답니다. "선생님, 솔직하게 말하세요. 제가 문둥병인 것을 저는 압니다. 벌써 죽은 몸인데 더 살아서 무엇합니까?" 예수 믿는 사람인 우리도 벌써 죽은 몸입니다.

내일 죽는다는 것이 아닙니다. 벌써 죽었어야 했고 장례 다 지내고 이제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과 그 은혜로 덤으로 사는 것입니다. 생각이 복잡할 것이 없습니다. 아직도 죽지 않았습니까?

십자가란 단순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멀리 바라보는 감상적인 것이 아닙니다. 바울처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다"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나는 지금 십자가에 못박혔습니다. 십자가를 달고 다니는 것이 아니라 내가 거기에 박혔다는 얘기입니다. 십자가는 장식품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 장례 지낸 것입니다. 아직도 무엇인가 남아 있습니까? 그러면 근심 속에 있어야 하고 나약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제 제3의 결단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1의 결단은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것이고, 2의 결단은 전 생을 다 복음을 위해 바치는 결단이고, 세 번째 결단은 오늘 본문대로 십자가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않기로 작정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만 알고 십자가만 높이고 십자가만 믿고 나갈 때 여기에 바울의 힘의 신비가 있었습니다.

바울은 십자가 속에서 힘의 신비를 깨달았습니다. 최고, 최강, 최대의 능력을 십자가 안에서 찾았습니다.

고린도전서 1:24에 보면 십자가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동시에 하나님의 지혜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십자가 외에는 알지 아니하기로 했고 생각지도 않기로 하고 십자가만 의지하는 제3의 결단을 한 것입니다. 이 길이야말로 의롭다 하시는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자기로서는 자기를 부정할 길이 없었습니다. 십자가만이 내가 나를 이길 수 있고, 의의 보증이 되어 주는 것입니다.

사랑은 최대의 능력입니다. 십자가로 보증한 하나님의 사랑을 믿음으로 강하게 되고 사랑을 실천함으로 강할 수 있습니다. 미움은 사람을 나약하게 만들고, 사랑은 위대한 능력의 발상입니다. 약속된 결정적 미래를 바라보고 있기에 사도 바울은 강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십자가의 힘의 신비를 체험한 바울을 생각해봅시다. 그는 십자가의 신비의 힘을 알고 있었습니다. 십자가를 바라볼 때 나는 나를 이길 수 있고 죽일 수 있습니다. 십자가를 믿을 때에 죄인이면서 의인으로 사는 영광의 신비를 발견합니다. 그는 그리스도를 전할 때 오직 십자가만을 전해야 구원의 역사가 나타남을 알고 있었습니다. 십자가는 구원의 능력입니다. 십자가의 신앙으로 죄를 이기고, 나를 이기고, 사망을 이기고, 세상을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과 의와 진리의 승리, 영원한 승리는 십자가에 감추어진 신비로운 능력입니다.

내가 이기는 것이 아니고 십자가로 이기는 것이고 그가 나로 하여금 이기게 하는 그리스도의 승리인 것입니다.

여러분! 이미 실패한 과거를 후회하지 맙시다. 이 실패를 완전히 시인하고 오직 십자가로 새로운 차원에서 승리의 생활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 : 사랑의 주님, 주님께서 어리석고 우둔한 사람들을 계속 사랑해 주시고 오늘도 불러주심을 감사합니다. 실패의 연속으로 살면서도 또 무슨 성공이 있을 것처럼 자기 자신에 대하여 혹은 세상 것에 대하여 막연하게 기대하고 있는 어리석음을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그리스도와 함께 자기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고 그리고 십자가가 주시는 신비로운 능력에 의하여 죄를 이기고, 나를 이기고, 세상을 이길 수 있는 승리의 생활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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