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좁은 문의 신비(마태복음 7:13, 14)

by 【고동엽】 2024. 10.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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좁은 문의 신비(마태복음 7:13, 14)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영국의 자연주의 과학자 알프레드 월리스(Alfred Russel Wallace)가 하루는 천잠나비(참나무산누에나방)가 번데기에서 나비로 변하여 고치를 뚫고 나오는 것을 자세히 관찰했습니다. 안에서 꼭 바늘구멍만한 구멍을 하나 뚫고는 그 틈으로 몸 전체가 나오기 위하여 꼬박 한나절을 애씁니다. 그렇게 애를 쓰면서, 아주 힘든 고통을 치르면서 나비가 되어 나옵니다. 이 모습을 보고 측은히 여긴 나머지, 그는 그 구멍을 가위로 잘라서 좀 넓혀주었습니다. 나방은 쉽게 밖으로 나올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좁은 구멍으로 나오려고 안간힘을 쓰던 나방은 영롱한 빛깔의 날개를 가지고 금방 팔랑거리며 날아가는데, 쉽사리 구멍을 벗어난 나방은 제대로 날지도 못하고 그 무늬나 빛깔도 영 곱지 않더랍니다. 간신히 푸덕푸덕 날개짓을 하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그만 죽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애처로이 여겨서 베푼 자비가 나방을 죽인 셈이 된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하나님의 능력을 얼마나 믿고 있습니까? 무엇이나 초월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지혜에 대하여 어느 만큼 긍정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창조주되심과, 하나님께서 우리 개개인의 운명과 체질에 대하여 알고 계시는 그 지식을 어느 만큼 인정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절대적 능력, 절대적 은총, 그 은혜로운 사랑에 대하여 얼마나 믿고 있습니까? 아마도 모두들 믿는다고 쉽게 말하겠지요. 그러면 이제 묻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능력도 많으시고 지혜도 많으시고 또한 나를 사랑해주십니다. 그런데 왜 내가 고생을 해야 됩니까? 왜 성도가 고생을 해야만 됩니까? 왜 성도에게 이토록 많은 시련이 있어야 되는 것입니까? 가난은 웬일이며 질병은 웬일입니까? 왜 이런 일들이 있어야 합니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리고 고향을 떠나라고 분부하십니다. 아브라함은 갈 바를 알지 못한 채 나그네길을 떠납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에 절대순종 하는 그였지만, 아브라함은 발붙일 만큼의 땅도 얻지 못했습니다. 아브라함은 분명 자기 소유는 있었으나 땅을 차지하지는 못했습니다. 땅이 없이 나그네의 생활로 평생을 전전긍긍하며 살아가야 했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하십니다. 열 가지 재앙을 내리신 그 굉장한 기적 속에서 백성들은 출애굽 합니다. 그런데 기왕 그리하셨으면 가나안으로 훌쩍 옮겨놓으실 것이지, 어째서 40년이라고 하는 그 긴 세월을 광야에서 헤매도록 하신 것입니까? 도대체 하나님의 사랑이 있는 것입니까, 없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능력이 정말 있는 것입니까, 없는 것입니까?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해답을 얻어야 합니다. 많은 성도들은 가나안 복지를 소원합니다. 가나안 복지에 들어가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광야 40년을 통과하기는 싫어합니다. 그러나 가나안 복지는 광야를 통해야만 합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능력이 있고 하나님의 섬세하신 지혜가 있는 것입니다. 사람마다 가나안 복지는 좋아하여도 광야 생활은 싫어합니다. 그러나 광야 생활은 필요한 것입니다. 이 광야를 통과하지 않고는 가나안에 못 들어갑니다. 가나안의 기쁨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광야 40년이 없다면 가나안의 행복을 지켜갈 수 없을 것입니다. 광야 생활을 통하여 가나안에 들어갈 자격을 갖추게 하셨습니다. 가나안땅에 들어가 살 수 있는 인간을 새롭게 창조하시려는 은총이 거기에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소유케 하시고, 깨닫게 하시고,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의 축복이 광야에 있었습니다.

무릇 기쁨과 행복은 그것을 얻기 위하여 지불하는 수고와 희생과 고통에 정비례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우리에게 아들딸이 있습니다. 똑같이 소중한 아들딸입니다. 내 자식이나 남의 자식이나 똑같이 귀한 생명입니다. 객관적으로는 다 같습니다. 그러나 자식을 사랑하고 소중히 여기는 데서는 서로 다릅니다. 지금 이 자리에 남자 분들도 많이 계시지만 남자 분들은 양보를 해야 할 줄로 압니다. 생명을 위해서 가장 수고하고 가장 많이 투자한 사람은 아버지가 아니고 어머니이기 때문입니다. 돈 벌어오는 수고는 아버지의 몫일 수 있으나 생명을 나누어 가지는 수고는 없었습니다. 해산의 수고, 밤을 새워가며 어린아이를 돌보고 키우는 어머니된 수고---이것이 있었기 때문에 어머니의 사랑이 소중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자식으로 인하여 오는 기쁨도 더욱 큰 것입니다. 이것은 돈주고 살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어떤 교과서를 통해서 배우는 것도 아닙니다. 해산의 수고를 치르지 않은 여인은 진정으로 행복을 체험하지 못하고 사는 사람입니다. "해산함으로 구원을 얻으리라" 하는 성경말씀도 있지 않습니까? 구원을 기쁨이라고 한다면 여성의 기쁨은 해산에서 얻어지는 것입니다. 생명을 건 희생에서 얻어지는 것입니다. 객관화한 이 사건이 다시 주관적으로 이해되는 것은 엄청난 희생과 수고가 요구되기 때문입니다. 가치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것을 위하여 지불된 피와 땀과 정비례하는 것입니다. 잊지 말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말씀합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13절)." 왜 하필이면 '좁은 문'입니까? 성경을 읽어나가다가 여기서 걸립니다. 예수 믿어 복 받고 예수 믿어 잘살고 예수 믿어 병낫고 예수 믿어 하늘나라 간다고 하니까 '그것 참 좋은 얘기다'라고 합니다. 그런데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하니까 '어? 얘기가 좀 틀려지는데……'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마 16 : 24)……"라 말씀하십니다. 자기생명도 자기 지식도 자기명예도 심지어 자기목숨까지도 미워하고야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있다고 하십니다. 우리 생각과는 다른 얘기입니다. 그래서 힘든 것입니다. 간혹 보면 이 걸림돌에 넘어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여기서 여러분께 신학적인 질문을 하겠습니다.

믿음으로 구원 얻는 것입니까, 행함으로 구원 얻는 것입니까?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하니 행함으로만 구원 얻는다는 것 같아 보입니다. 어떤 때에는 믿음과 행함의 양자 중 택일을 하려고 신학적 고민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쓸데없는 고민입니다. 믿음으로 구원 얻는다는 것을 전적으로 목숨걸고 주장한 마르틴 루터는 말했습니다. '믿음으로 구원 얻는다는 말은 행함으로 구원 얻는다는 말보다 더 어려운 것이다.' 이해하시겠습니까? 보세요. 가나안의 축복은 약속된 은혜입니다. 가나안땅은 그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광야는 가나안으로 들어가게 하는 축복의 길입니다. 이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다 같은 은혜입니다.

오늘의 본문말씀을 자세히 보십시오. 이것은 닫힌 문이 아닙니다. 좁은 문이로되 열린 문입니다. 못 들어가는 문이 아닙니다.

들어갈 수 있도록 열린 문입니다. 잊지 말 것입니다. 쉽지는 아니하나 불가능한 것이 아닙니다.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입니다.

이 문을 통해서만 생명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생명 최우선, 생명 절대성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마취하기 전, 수술대 위에 누워 있는 환자가 의사에게 고백합니다.

"선생님, 제 생명을 도로 찾게 해주세요. 제발 저를 살려주세요.

그렇게만 해주신다면 제 재산 전부를 드리겠습니다. 다른 무엇이라도 다 드리겠습니다. 그러니 제발 제 생명만은, 제 목숨만은 살게 해주세요." 여러분, 동감하십니까? 진작 그랬더라면 얼마나 좋을 뻔했습니까? 이제야 깨달았는데 때가 늦었습니다. 의사도 이제는 대답할 것이 없습니다. 생명은 그 누구도 보장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좁은 문'이라고 하는 것은 생명 되게 하는 문입니다. 생명 위주의 인간, 생명만을 소중히 여기고 영생을 가장 귀중하게 여기는 사람을 만드는 길이 여기에 있습니다.

아주 좁습니다. 좁다는 말은 내게 있는 많은 소유, 다른 거추장스러운 것들을 가지고 들어갈 수 없다는 얘기입니다. 어리석은 부자 이야기는 우리가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성경에 보면 부자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친히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마 19 : 23, 24)." 이것이 무슨 말씀입니까? 이 문은 좁아서 무엇을 많이 가지고는 못 들어간다는 이야기입니다. 생명만 생각해야 들어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요사이 저는 이런 이야기를 듣습니다. 어떤 분이 성경을 몇 십년 동안 죽 읽어왔지만 처음으로 깨달은 진리가 하나 있답니다.

그것은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마 5 : 3)"라는 말씀이요, 이 말씀은 수없이 들은 말씀인데도 요새처럼 절실하게 딱 들어맞을 수가 없답니다. '진작 가난했었더라면 좋았을 것을……'하고 생각되는 사람들 많습니다. 여러분, '삼권분립'이라는 말이 요즘 이렇게 재해석된다고 합니다. '돈과 명예와 권세의 셋 중에서 하나만 가져라. 다 가질 생각은 말아라.' 생각해보세요. 권력을 가지고도 돈 가지려다가 망신당하는 것이 아닙니까? 명예를 가졌으면 되었지, 무슨 권력은 또 가지려고 합니까? 돈 가졌으면 되었지 정권까지 잡으려고 합니까? 결국에는 이러다가 망신당하는 것이 아닙니까?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하나만 가지지 이것저것을 다 가질 생각은 말아라, 영생이라고 하는 이 중요한 것 하나면 됐지 달라는 것이 왜 그리도 많으냐? 가질 것이 그리도 많고 탐낼 것이 그리도 많더냐?' 이 말씀입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갈 것입니다.

독일의 문호 헤르만 헷세(Hermann Hesse)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사람에게는 세 가지 유혹이 있다. 육체의 욕망, 잘난 체 하는 교만, 그리고 불손한 이기심이다.' 달리 설명할 필요도 없습니다. 이것들은 다 거추장스러운 것입니다. 이 유혹들을 딱 깨어버리고 살아갈 수만 있다면 정말 자유할 것입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다른 것들을 가지고 들어가려 하니까 못 들어가는 것입니다. 문 밖에서 수십 년 동안 뱅뱅 돌기만 하지 한번도 못 들어가는 것입니다. 기웃거리기만 하지 못 들어갑니다. 욕심도 버리고 자존심도 버리고 교만도 버리고 불손한 이기심도 떼어버리세요. 성경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하십니다.

좁은 문은 고독한 문입니다. 좁다는 말은 많은 사람들과 관계없다는 말입니다. 다수의 사람들은 현재적으로 살아가고 다 넓은 길로 살아가지만, 예수 믿는 사람은 어떤 의미에서는 아주 고독한 길을 가야 합니다. 어떤 바라문교도 한 사람이 하루는 제사를 드리기 위하여 잘 고른 신성한 산양 한 마리를 어깨에 메고 제단을 향하여 갑니다. 그런데 이 모양을 본 세 명의 못된 사람이 '어떻게든 저걸 빼앗아야겠다'하고 마음먹습니다. 그것도 강제로 빼앗는 것이 아니라 유혹해서 빼앗으려고 모의를 했습니다. 우선 한 사람이 바라문교도 앞에 다가가서 이렇게 말을 겁니다. "성자여, 제물로는 양을 바쳐야지 어떻게 이 더러운 개를 제물로 드리려 하십니까?" 이 말을 들은 바라문 교도는 펄쩍 뜁니다.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요? 이건 깨끗한 산양이란 말이오." 그렇게 대답을 하고 길을 가는데 또 한 사람이 다가와서 묻습니다.

"지금 그 더러운 개를 제물로 바치려고 하십니까?" 바라문 교도는 산양을 내려놓고는 "보십시오. 이것은 개가 아니라 산양이오"하고 말했습니다. 조금 더 걸어가느라니 또 한 사람이 역시 같은 말로 묻습니다. "성자여, 정결한 양을 바쳐야지 어째서 더러운 개를 바치려고 합니까?" 바라문 교도는 찬찬히 산양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정말 개로 보이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그만 내버리고 갔더랍니다. 여러분, 무슨 얘기인지 아시겠습니까? 귀를 막으세요. 뭇 사람의 이 소리 저 소리에 마음을 빼앗기는 것은 좁은 길을 가는 사람의 도리가 아닙니다. 좁은 문으로 가는 길은 고독합니다. 신앙생활이 때로는 절대적으로 고독합니다.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가 있을 뿐입니다. '오직 홀로' 이 길을 가는 것입니다.

본문은 다시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14절)"라고 말씀합니다.

헬라어 원문을 보면 이 말에는 조금 다른 뜻이 있습니다. 가고 싶어하는 사람이 적다는 말이 아니라 정작 이 문에 들어가는 사람이 적다는 말입니다. 생각은 하지만 결국은 못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들어가야 되겠다고 결심은 합니다. 그러나 못 들어갑니다.

이런 사람이 많습니다. 좁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들어가려면 버려야 될 것이 많기 때문입니다. 부정해야 될 것이 많이 있기 때문에 못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발견하는 자가 적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못 들어갑니다. 이것저것 거추장스러운 것이 너무도 많습니다. 무얼 그렇게 부수입을 많이 요구합니까? 우리가 구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좁은 문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그리고 이 문은 신비로운 문입니다. 분명히 고통스럽습니다.

그러나 행복합니다. 왜냐하면 영생의 약속이 여기 있기 때문입니다. 눈앞에 영생을 바라보며 살기 때문에 결코 고통스럽지 않습니다. 이것은 분명히 좁은 문입니다. 그러나 이 문으로 들어가고자 하는 이는 자유 합니다. 끊어버릴 것은 다 끊어버렸고, 잊어버릴 것은 다 잊어버렸고, 부인할 것도 다 부인해버렸기 때문에 단순합니다. 비록 좁은 문이지만 자유한 문입니다. 자유케 하는 문입니다.

좁은 문은 고독한 문이로되 그리스도께서 함께 하십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사람은 주님께서 동행하십니다. 결코 고독하지 않습니다. 생각컨대 이것은 우주적 원리입니다. 여러분, 회개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회개는 진실을 찾는 것입니다. 회개나 진실, 그 자체가 좁은 문입니다. 회개하려고 할 때 버려야 할 것이 많습니다. 못 버릴 때에는 회개할 수 없습니다. 진실하기 위하여 버릴 것이 많습니다. 그러나 못 버리기 때문에 이 진실의 문으로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요새도 소위 사정(査正) 문제로 세상이 복잡합니다만, 구태여 그런 사건이 꼭 신문에 나야 됩니까? 그렇게 비판을 받고 증거가 나와야만 되겠습니까? 스스로 솔직하게 '나는 이렇소'하는 사람이 왜 그렇게도 없습니까? 생각해보세요.

왜 이다지도 진실하기가 어려울까요? 진실의 용기가 없기 때문입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용기가 없습니다. 훨훨 벗어버리고 진실로 돌아가면 그 얼마나 자유롭겠습니까? 그런데 아직도 무엇인가를 붙들려고 애쓰는 것을 보면 참으로 한심하기 짝이 없습니다.

여러분, 사랑하고 있습니까? 사랑은 좁은 문입니다. 결혼식 할 때에 보면 두 사람은 그저 좋아하지만, 사실 결혼이란 '좁은 문'입니다. 이제는 한 사람만을 사랑해야 됩니다. 제주도에 가서 이런 얘기를 들어본 적이 있습니다. 신혼여행에 가서 옛날 애인한테 몰래 전화 걸다가 들켜서 얻어맞는 신부들이 있다고 합니다.

그런 맹추가 어디 있습니까? 과거에 남자친구가 몇이었건 간에 결혼식을 올리고 나면 이제는 끝난 사이가 아닙니까? 결혼은 좁은 문입니다. 그런데 여전히 '넓게' 살려다가 다치는 것입니다. 아셔야 합니다. 사랑도 좁은 문입니다.

생명의 길은 좁은 길이요, 십자가의 길은 좁은 길이요, 그리고 영생의 길은 좁은 길입니다. 그러나 결코 불행한 길이 아닙니다. 자유로운 길이요 행복한 길입니다. 영생을 보증 받았을 뿐만 아니라 그 자체가 영생의 길입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생명으로 통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좁은 문의 신비(마태복음 7:13, 14)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영국의 자연주의 과학자 알프레드 월리스(Alfred Russel Wallace)가 하루는 천잠나비(참나무산누에나방)가 번데기에서 나비로 변하여 고치를 뚫고 나오는 것을 자세히 관찰했습니다. 안에서 꼭 바늘구멍만한 구멍을 하나 뚫고는 그 틈으로 몸 전체가 나오기 위하여 꼬박 한나절을 애씁니다. 그렇게 애를 쓰면서, 아주 힘든 고통을 치르면서 나비가 되어 나옵니다. 이 모습을 보고 측은히 여긴 나머지, 그는 그 구멍을 가위로 잘라서 좀 넓혀주었습니다. 나방은 쉽게 밖으로 나올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좁은 구멍으로 나오려고 안간힘을 쓰던 나방은 영롱한 빛깔의 날개를 가지고 금방 팔랑거리며 날아가는데, 쉽사리 구멍을 벗어난 나방은 제대로 날지도 못하고 그 무늬나 빛깔도 영 곱지 않더랍니다. 간신히 푸덕푸덕 날개짓을 하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그만 죽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애처로이 여겨서 베푼 자비가 나방을 죽인 셈이 된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하나님의 능력을 얼마나 믿고 있습니까? 무엇이나 초월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지혜에 대하여 어느 만큼 긍정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창조주되심과, 하나님께서 우리 개개인의 운명과 체질에 대하여 알고 계시는 그 지식을 어느 만큼 인정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절대적 능력, 절대적 은총, 그 은혜로운 사랑에 대하여 얼마나 믿고 있습니까? 아마도 모두들 믿는다고 쉽게 말하겠지요. 그러면 이제 묻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능력도 많으시고 지혜도 많으시고 또한 나를 사랑해주십니다. 그런데 왜 내가 고생을 해야 됩니까? 왜 성도가 고생을 해야만 됩니까? 왜 성도에게 이토록 많은 시련이 있어야 되는 것입니까? 가난은 웬일이며 질병은 웬일입니까? 왜 이런 일들이 있어야 합니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리고 고향을 떠나라고 분부하십니다. 아브라함은 갈 바를 알지 못한 채 나그네길을 떠납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에 절대순종 하는 그였지만, 아브라함은 발붙일 만큼의 땅도 얻지 못했습니다. 아브라함은 분명 자기 소유는 있었으나 땅을 차지하지는 못했습니다. 땅이 없이 나그네의 생활로 평생을 전전긍긍하며 살아가야 했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하십니다. 열 가지 재앙을 내리신 그 굉장한 기적 속에서 백성들은 출애굽 합니다. 그런데 기왕 그리하셨으면 가나안으로 훌쩍 옮겨놓으실 것이지, 어째서 40년이라고 하는 그 긴 세월을 광야에서 헤매도록 하신 것입니까? 도대체 하나님의 사랑이 있는 것입니까, 없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능력이 정말 있는 것입니까, 없는 것입니까?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해답을 얻어야 합니다. 많은 성도들은 가나안 복지를 소원합니다. 가나안 복지에 들어가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광야 40년을 통과하기는 싫어합니다. 그러나 가나안 복지는 광야를 통해야만 합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능력이 있고 하나님의 섬세하신 지혜가 있는 것입니다. 사람마다 가나안 복지는 좋아하여도 광야 생활은 싫어합니다. 그러나 광야 생활은 필요한 것입니다. 이 광야를 통과하지 않고는 가나안에 못 들어갑니다. 가나안의 기쁨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광야 40년이 없다면 가나안의 행복을 지켜갈 수 없을 것입니다. 광야 생활을 통하여 가나안에 들어갈 자격을 갖추게 하셨습니다. 가나안땅에 들어가 살 수 있는 인간을 새롭게 창조하시려는 은총이 거기에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소유케 하시고, 깨닫게 하시고,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의 축복이 광야에 있었습니다.

무릇 기쁨과 행복은 그것을 얻기 위하여 지불하는 수고와 희생과 고통에 정비례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우리에게 아들딸이 있습니다. 똑같이 소중한 아들딸입니다. 내 자식이나 남의 자식이나 똑같이 귀한 생명입니다. 객관적으로는 다 같습니다. 그러나 자식을 사랑하고 소중히 여기는 데서는 서로 다릅니다. 지금 이 자리에 남자 분들도 많이 계시지만 남자 분들은 양보를 해야 할 줄로 압니다. 생명을 위해서 가장 수고하고 가장 많이 투자한 사람은 아버지가 아니고 어머니이기 때문입니다. 돈 벌어오는 수고는 아버지의 몫일 수 있으나 생명을 나누어 가지는 수고는 없었습니다. 해산의 수고, 밤을 새워가며 어린아이를 돌보고 키우는 어머니된 수고---이것이 있었기 때문에 어머니의 사랑이 소중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자식으로 인하여 오는 기쁨도 더욱 큰 것입니다. 이것은 돈주고 살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어떤 교과서를 통해서 배우는 것도 아닙니다. 해산의 수고를 치르지 않은 여인은 진정으로 행복을 체험하지 못하고 사는 사람입니다. "해산함으로 구원을 얻으리라" 하는 성경말씀도 있지 않습니까? 구원을 기쁨이라고 한다면 여성의 기쁨은 해산에서 얻어지는 것입니다. 생명을 건 희생에서 얻어지는 것입니다. 객관화한 이 사건이 다시 주관적으로 이해되는 것은 엄청난 희생과 수고가 요구되기 때문입니다. 가치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것을 위하여 지불된 피와 땀과 정비례하는 것입니다. 잊지 말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말씀합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13절)." 왜 하필이면 '좁은 문'입니까? 성경을 읽어나가다가 여기서 걸립니다. 예수 믿어 복 받고 예수 믿어 잘살고 예수 믿어 병낫고 예수 믿어 하늘나라 간다고 하니까 '그것 참 좋은 얘기다'라고 합니다. 그런데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하니까 '어? 얘기가 좀 틀려지는데……'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마 16 : 24)……"라 말씀하십니다. 자기생명도 자기 지식도 자기명예도 심지어 자기목숨까지도 미워하고야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있다고 하십니다. 우리 생각과는 다른 얘기입니다. 그래서 힘든 것입니다. 간혹 보면 이 걸림돌에 넘어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여기서 여러분께 신학적인 질문을 하겠습니다.

믿음으로 구원 얻는 것입니까, 행함으로 구원 얻는 것입니까?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하니 행함으로만 구원 얻는다는 것 같아 보입니다. 어떤 때에는 믿음과 행함의 양자 중 택일을 하려고 신학적 고민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쓸데없는 고민입니다. 믿음으로 구원 얻는다는 것을 전적으로 목숨걸고 주장한 마르틴 루터는 말했습니다. '믿음으로 구원 얻는다는 말은 행함으로 구원 얻는다는 말보다 더 어려운 것이다.' 이해하시겠습니까? 보세요. 가나안의 축복은 약속된 은혜입니다. 가나안땅은 그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광야는 가나안으로 들어가게 하는 축복의 길입니다. 이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다 같은 은혜입니다.

오늘의 본문말씀을 자세히 보십시오. 이것은 닫힌 문이 아닙니다. 좁은 문이로되 열린 문입니다. 못 들어가는 문이 아닙니다.

들어갈 수 있도록 열린 문입니다. 잊지 말 것입니다. 쉽지는 아니하나 불가능한 것이 아닙니다.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입니다.

이 문을 통해서만 생명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생명 최우선, 생명 절대성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마취하기 전, 수술대 위에 누워 있는 환자가 의사에게 고백합니다.

"선생님, 제 생명을 도로 찾게 해주세요. 제발 저를 살려주세요.

그렇게만 해주신다면 제 재산 전부를 드리겠습니다. 다른 무엇이라도 다 드리겠습니다. 그러니 제발 제 생명만은, 제 목숨만은 살게 해주세요." 여러분, 동감하십니까? 진작 그랬더라면 얼마나 좋을 뻔했습니까? 이제야 깨달았는데 때가 늦었습니다. 의사도 이제는 대답할 것이 없습니다. 생명은 그 누구도 보장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좁은 문'이라고 하는 것은 생명 되게 하는 문입니다. 생명 위주의 인간, 생명만을 소중히 여기고 영생을 가장 귀중하게 여기는 사람을 만드는 길이 여기에 있습니다.

아주 좁습니다. 좁다는 말은 내게 있는 많은 소유, 다른 거추장스러운 것들을 가지고 들어갈 수 없다는 얘기입니다. 어리석은 부자 이야기는 우리가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성경에 보면 부자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친히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마 19 : 23, 24)." 이것이 무슨 말씀입니까? 이 문은 좁아서 무엇을 많이 가지고는 못 들어간다는 이야기입니다. 생명만 생각해야 들어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요사이 저는 이런 이야기를 듣습니다. 어떤 분이 성경을 몇 십년 동안 죽 읽어왔지만 처음으로 깨달은 진리가 하나 있답니다.

그것은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마 5 : 3)"라는 말씀이요, 이 말씀은 수없이 들은 말씀인데도 요새처럼 절실하게 딱 들어맞을 수가 없답니다. '진작 가난했었더라면 좋았을 것을……'하고 생각되는 사람들 많습니다. 여러분, '삼권분립'이라는 말이 요즘 이렇게 재해석된다고 합니다. '돈과 명예와 권세의 셋 중에서 하나만 가져라. 다 가질 생각은 말아라.' 생각해보세요. 권력을 가지고도 돈 가지려다가 망신당하는 것이 아닙니까? 명예를 가졌으면 되었지, 무슨 권력은 또 가지려고 합니까? 돈 가졌으면 되었지 정권까지 잡으려고 합니까? 결국에는 이러다가 망신당하는 것이 아닙니까?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하나만 가지지 이것저것을 다 가질 생각은 말아라, 영생이라고 하는 이 중요한 것 하나면 됐지 달라는 것이 왜 그리도 많으냐? 가질 것이 그리도 많고 탐낼 것이 그리도 많더냐?' 이 말씀입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갈 것입니다.

독일의 문호 헤르만 헷세(Hermann Hesse)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사람에게는 세 가지 유혹이 있다. 육체의 욕망, 잘난 체 하는 교만, 그리고 불손한 이기심이다.' 달리 설명할 필요도 없습니다. 이것들은 다 거추장스러운 것입니다. 이 유혹들을 딱 깨어버리고 살아갈 수만 있다면 정말 자유할 것입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다른 것들을 가지고 들어가려 하니까 못 들어가는 것입니다. 문 밖에서 수십 년 동안 뱅뱅 돌기만 하지 한번도 못 들어가는 것입니다. 기웃거리기만 하지 못 들어갑니다. 욕심도 버리고 자존심도 버리고 교만도 버리고 불손한 이기심도 떼어버리세요. 성경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하십니다.

좁은 문은 고독한 문입니다. 좁다는 말은 많은 사람들과 관계없다는 말입니다. 다수의 사람들은 현재적으로 살아가고 다 넓은 길로 살아가지만, 예수 믿는 사람은 어떤 의미에서는 아주 고독한 길을 가야 합니다. 어떤 바라문교도 한 사람이 하루는 제사를 드리기 위하여 잘 고른 신성한 산양 한 마리를 어깨에 메고 제단을 향하여 갑니다. 그런데 이 모양을 본 세 명의 못된 사람이 '어떻게든 저걸 빼앗아야겠다'하고 마음먹습니다. 그것도 강제로 빼앗는 것이 아니라 유혹해서 빼앗으려고 모의를 했습니다. 우선 한 사람이 바라문교도 앞에 다가가서 이렇게 말을 겁니다. "성자여, 제물로는 양을 바쳐야지 어떻게 이 더러운 개를 제물로 드리려 하십니까?" 이 말을 들은 바라문 교도는 펄쩍 뜁니다.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요? 이건 깨끗한 산양이란 말이오." 그렇게 대답을 하고 길을 가는데 또 한 사람이 다가와서 묻습니다.

"지금 그 더러운 개를 제물로 바치려고 하십니까?" 바라문 교도는 산양을 내려놓고는 "보십시오. 이것은 개가 아니라 산양이오"하고 말했습니다. 조금 더 걸어가느라니 또 한 사람이 역시 같은 말로 묻습니다. "성자여, 정결한 양을 바쳐야지 어째서 더러운 개를 바치려고 합니까?" 바라문 교도는 찬찬히 산양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정말 개로 보이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그만 내버리고 갔더랍니다. 여러분, 무슨 얘기인지 아시겠습니까? 귀를 막으세요. 뭇 사람의 이 소리 저 소리에 마음을 빼앗기는 것은 좁은 길을 가는 사람의 도리가 아닙니다. 좁은 문으로 가는 길은 고독합니다. 신앙생활이 때로는 절대적으로 고독합니다.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가 있을 뿐입니다. '오직 홀로' 이 길을 가는 것입니다.

본문은 다시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14절)"라고 말씀합니다.

헬라어 원문을 보면 이 말에는 조금 다른 뜻이 있습니다. 가고 싶어하는 사람이 적다는 말이 아니라 정작 이 문에 들어가는 사람이 적다는 말입니다. 생각은 하지만 결국은 못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들어가야 되겠다고 결심은 합니다. 그러나 못 들어갑니다.

이런 사람이 많습니다. 좁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들어가려면 버려야 될 것이 많기 때문입니다. 부정해야 될 것이 많이 있기 때문에 못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발견하는 자가 적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못 들어갑니다. 이것저것 거추장스러운 것이 너무도 많습니다. 무얼 그렇게 부수입을 많이 요구합니까? 우리가 구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좁은 문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그리고 이 문은 신비로운 문입니다. 분명히 고통스럽습니다.

그러나 행복합니다. 왜냐하면 영생의 약속이 여기 있기 때문입니다. 눈앞에 영생을 바라보며 살기 때문에 결코 고통스럽지 않습니다. 이것은 분명히 좁은 문입니다. 그러나 이 문으로 들어가고자 하는 이는 자유 합니다. 끊어버릴 것은 다 끊어버렸고, 잊어버릴 것은 다 잊어버렸고, 부인할 것도 다 부인해버렸기 때문에 단순합니다. 비록 좁은 문이지만 자유한 문입니다. 자유케 하는 문입니다.

좁은 문은 고독한 문이로되 그리스도께서 함께 하십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사람은 주님께서 동행하십니다. 결코 고독하지 않습니다. 생각컨대 이것은 우주적 원리입니다. 여러분, 회개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회개는 진실을 찾는 것입니다. 회개나 진실, 그 자체가 좁은 문입니다. 회개하려고 할 때 버려야 할 것이 많습니다. 못 버릴 때에는 회개할 수 없습니다. 진실하기 위하여 버릴 것이 많습니다. 그러나 못 버리기 때문에 이 진실의 문으로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요새도 소위 사정(査正) 문제로 세상이 복잡합니다만, 구태여 그런 사건이 꼭 신문에 나야 됩니까? 그렇게 비판을 받고 증거가 나와야만 되겠습니까? 스스로 솔직하게 '나는 이렇소'하는 사람이 왜 그렇게도 없습니까? 생각해보세요.

왜 이다지도 진실하기가 어려울까요? 진실의 용기가 없기 때문입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용기가 없습니다. 훨훨 벗어버리고 진실로 돌아가면 그 얼마나 자유롭겠습니까? 그런데 아직도 무엇인가를 붙들려고 애쓰는 것을 보면 참으로 한심하기 짝이 없습니다.

여러분, 사랑하고 있습니까? 사랑은 좁은 문입니다. 결혼식 할 때에 보면 두 사람은 그저 좋아하지만, 사실 결혼이란 '좁은 문'입니다. 이제는 한 사람만을 사랑해야 됩니다. 제주도에 가서 이런 얘기를 들어본 적이 있습니다. 신혼여행에 가서 옛날 애인한테 몰래 전화 걸다가 들켜서 얻어맞는 신부들이 있다고 합니다.

그런 맹추가 어디 있습니까? 과거에 남자친구가 몇이었건 간에 결혼식을 올리고 나면 이제는 끝난 사이가 아닙니까? 결혼은 좁은 문입니다. 그런데 여전히 '넓게' 살려다가 다치는 것입니다. 아셔야 합니다. 사랑도 좁은 문입니다.

생명의 길은 좁은 길이요, 십자가의 길은 좁은 길이요, 그리고 영생의 길은 좁은 길입니다. 그러나 결코 불행한 길이 아닙니다. 자유로운 길이요 행복한 길입니다. 영생을 보증 받았을 뿐만 아니라 그 자체가 영생의 길입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생명으로 통한다고 말씀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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