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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의 취미(시편 27:1-7)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 나의 대적, 나의 원수된 행악자가 내 살을 먹으려고 내게로 왔다가 실족하여 넘어졌도다 군대가 나를 대적하여 진칠지라도 내 마음 두렵지 아니하며 전쟁이 일어나 나를 치려 할지라도 내가 오히려 안연하리로다 내가 여호와께 청하였던 한 가지 일 곧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나로 내 생전에 여호와의 집에 거하여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앙망하며 그 전에서 사모하게 하실 것이라 여호와께서 환난 날에 나를 그 초막 속에 비밀히 지키시고 그 장막 은밀한 곳에 나를 숨기시며 바위 위에 높이 두시리로다 이제 내 머리가 나를 두른 내 원수 위에 들리리니 내가 그 장막에서 즐거운 제사를 드리겠고 노래하여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여호와여 내가 소리로 부르짖을 때에 들으시고 또한 나를 긍휼히 여기사 응답하소서
예수님보다 6개월 먼저 이 세상에 온 세례 요한은 광야에 살면서 "길을 곧게 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는 헤롯 왕의 불의를 고발하는 무서운 심판을 함으로 마침내 투옥되었고, 감옥 속에서 고생이 길어지자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내어 무엇인가 물어보게 됩니다.
본래 세례 요한은 분명히 예수를 눈으로 보았습니다. 그리고 예수에게 세례를 베풀었고, 성령의 비둘기같이 그 머리에 임하는 것을 보고 이 분이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증거 했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자기의 제자도 예수님께 양보한 것 같습니다. 이렇게 확실하게 메시야가 오신 것을 보고 증거한 사람인데도 불구하고, 감옥에서 그가 개인적으로 오랫동안 억울한 고생을 할 때에 마음속에 흔들림이 왔습니다.
요한의 질문은 너무나 비참합니다. 사람을 보내어 예수님께 물어 보기를 "오실 이가 당신이오니까 아니면 다른 사람을 기다리오니까?" 어찌 질문을 할 수 있겠습니까? 섭섭한 질문이었습니다. 이 질문에 대하여 예수님은 "보고 듣는 대로 가서 말하라" 이렇게 대답하시고 다시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갔더냐? 흔들리는 갈대냐? 부드러운 옷을 입은 사람이냐? 부드러운 옷을 입은 자는 왕궁에 있느니라. 무엇을 보러 광야에 나갔더냐?"고 되물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우리들에게 다시 물으십니다.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교회에 나왔더냐?" "여러분! 무엇을 보려고 교회에 나왔습니까?" 간혹 어떤 분들에게서 교회에 나와 실망했다는 소리를 듣습니다. 무엇을 바랐고, 무엇에 실망했다는 것입니까? 원래 바람과 실망은 직선 상에 있습니다. 바람에 따라서 실망이 오는 것입니다. 무엇을 바라고, 무엇에 실망했다는 것입니까?
어떤 분들은 기적을 바라고 교회에 나옵니다. 죽을병을 고치고, 안될 일을 되게 하는 이런 기적을 원합니다. 그러나 분명하게 성경이 말해주는 것은 기적은 믿음 위에서만 세워집니다. "네가 믿는 대로되리라." 믿음 없이 기적을 받을 수가 없고 기적을 볼 수도 없고 설사 기적이 있어도 기적을 기적으로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아무 믿음도 없는 사람에게 무슨 기적이 일어날 수 있겠습니까? 또 한 번 실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혹 어떤 분은 특별한 지식을 바라고 나옵니다. 그러나 지식은 겸손한 자의 것이기에 세상을 다 아는 듯한 교만한 자에게 무슨 새로운 지식이 있겠습니까? 유명한 종교 개혁자 칼빈이 말하기를 "교만한 자에게 신령한 진리를 가르치는 것은 당나귀에게 음악을 가르치는 것보다 더 어렵다"고 했습니다. 끝까지 교만한 그 마음에 무슨 지식이 있단 말입니까? 교만한 지성인은 이래서 교회에 나왔다가 실망을 하게 됩니다. 들을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새 것을 원합니다. 무조건 새 것, 기발한 것, 창조적인 것을 찾겠다는 것입니다. 창조란 원래 하나님만 하시는 것이지 사람은 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새 것을 찾아보아도 성경은 2천년 전 이야기입니다. 성경은 주로 2천년 전의 십자가 이야기, 3천년 전의 이야기뿐이니 무슨 새로운 것이 있습니까? 적어도 "사랑은 영원히, 영원히 새로운 것이다"라고 하는 정도의 진리는 알아야 성경의 진리의 새로움도 알 것입니다. 그렇지가 못하니 실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사랑을 받고자 하여 교회에 나옵니다. 외롭고 고독해서 위로와 사랑을 받기 위해 나옵니다. 그러나 수천 명의 교인들이 모여도 한결같이 사랑 받겠다는 사람뿐이고 사랑 주겠다는 사람은 없습니다. 교회에 사랑이 없다고 하는데 도대체 교회가 무엇입니까? 교회는 건물도 아니고 교인들이 모인 공동체인데 사랑을 주겠다는 사람이 없으니, 받을 사람이 있겠습니까? 누가 주고 누가 받는다는 것입니까? 친절하다 안 하다가 무슨 말입니까? 내가 베풀지 않은 친절을 누구에게 받겠다고 합니까? 나는 베풀지 않고, 주지 않으면서 사랑을 받겠다고만 생각하고 나오니 실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어떤 분은 '나'라는 존재를 인정받기 위해 나오는 사람이 있습니다.
나를 알아달라고 하는 것 참 어렵습니다. 목사들은 그 마음을 알지만 알아드릴 길이 없습니다. 어떻게 알아달라는 것입니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여기에는 죄인들이 모인 곳입니다. 목사들이 강단에 섰을 때 여기에는 의인이 한 사람도 없다고 생각하고 설교합니다. 다 죄인이며, 그것도 죽을 죄인이라 생각하고 설교합니다. 그런데 누구를 어떻게 알아달라는 것입니까? 돈 좀 있다구요? 몇 푼 안됩니다.
명예가 좀 있습니까? 바람직하지 못합니다. 문제는 다 죄인임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진리란 자기부정부터 시작합니다. 완전히 넘어지고, 부숴지고, 꺾어져야 이야기가 될 수 있습니다. 알아줄 것이 없는데 이래도 알아달라는 것입니까? 깨끗하게 자기를 비어놓고야 서로가 서로를 받아들일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입니다.
사회학자들이 연구한 것에 의하면 다음과 같이 교회를 분석했습니다. 20대 사람들은 주로 교제를 위해서 교회에 나오며, 30대 사람은 신령한 지식을 찾는 탐구파들이며, 40대 사람은 뭔가 일을 하고 싶어 나오며, 50대는 명예를 원하고, 60대는 먹기 위해서 나온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은 한결같이 실망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12세 때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가서 서기관들과 제사장들과 같이 성경 토론을 하다가 완전히 심취되어 날짜 가는 줄을 몰랐습니다. 예수님의 부모 마리아와 요셉은 아들을 잃어버려 사흘 길을 찾아 되돌아와서 나무라는 조로 얘기합니다. "우리가 너를 얼마나 찾았는지 아느냐?" 이 때에 대답하기를 "내가 내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할 줄을 몰랐습니까?" "당연히 내가 여기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건물이 좋아서도 아니고 누가 나를 반겨서도 아니며 당연히 내 아버지의 집이기에 이 곳에서 만족한다는 것입니다. 마음의 고향, 이것이 교회였습니다. 옛날 다윗 왕은 시편 84편에서 아들의 반란으로 피난 길을 다니면서 한 말이 있습니다. 참새와 제비는 마음대로 날아서 하나님 전에 가는데 나는 왜 이렇게 쫓겨다니는 신세냐고 제비와 참새를 부러워했습니다.
"여호와의 집에 거하는 자는 복이 있고 시온의 대로가 마음에 있는 자가 복이 있습니다"라고 여러 가지로 노래하다가 "악인의 장막에 거함보다 내 하나님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84 : 10)하며 그저 하나님의 집 가까이만 있는 것이 그의 소원이며 "아버지의 집에서 하루를 사는 것이 다른 곳에서 천 날을 사는 것보다 아름답습니다"라고 노래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일주일 동안 시달리다가, 한 시간 교회에 나와 예배드리는 이 시간이 내 마음에 흐뭇하고 기쁘고, 이 한 시간이 다른 곳에서 천 시간을 보내는 것보다 더 좋다는 마음이 있습니까? 잘 믿는다는 것을 복잡하고 어렵게 생각할 것 없습니다. 교회에 잘 나오고 교회를 사랑하면 되는 것입니다.
토요일부터 교회에 나오기 위해 목욕하고, 옷을 준비하여 일요일 아침에 일찍 서둘러서 나오는 것이 바로 믿는 사람입니다. 이뿐만 아니라 마음이 흐뭇하고 교회에 나오는 것에 온 즐거움이 다 있는 사람입니다.
요즘 현대인들 중에는 이런 사람이 많습니다. 교회에 나가자니 별로이고 안 나가자니 꺼림직하고 그래서 주저주저 하다가 지각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아침부터 온 마음이 교회에 가 있으면서 준비되면 늦을리가 없지요.
가만히 보면 늦는 사람이 꼭 늦으며 매번 그 시간만큼 지각을 하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집, 아버지의 집을 그리워하는 그 마음, 이것은 하나의 신앙의 순례의 길입니다.
병원에서 생명의 일각을 다투는 사람에게서 자주 듣는 말이 있습니다. "목사님, 나 다시 걸을 수 있으며, 교회에 나갈 수 있을까요? 건강해서 교회에 한 번만 더 나가보고 죽으면 한이 없겠습니다." 이 말이 남의 먼 얘기만이 아닙니다. 우리도 그 언젠가는 같은 말을 하게 될 것입니다. 예외는 없습니다. 그 언젠가는 한 번만 더 교회에 나가보고 죽었으면 한이 없겠다고 할 수 있는 곳이 교회입니다. 이것이 교회의 취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올 때마다 기도합니다. 교회는 만민이 기도하는 집입니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대화이며 하나님과 만남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 나왔습니다. 얼굴과 얼굴로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지 건물 보러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 만나려고 나온 것도 물론 아닙니다.
어느 분이 큰마음을 먹고 많은 돈을 없애며 관광 단체의 한 일원으로 구라파 일대를 여행하고 돌아왔습니다. 그래서 제가 무엇을 보고 왔느냐고 물었더니 그 분은 "그저 노란 깃발 하나 보고 왔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한 번 가보신 분은 압니다만 여러 단체가 서로 섞여 있으니 자가 안내원의 깃발만 보고 따라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만약 여기서 깃발을 놓치면 언어도 통하지 않으니 큰 일이지요. 그래서 그저 깃발만 따라다니느라고 본 것도 없는 것 같았던 것입니다.
여러분! 교회 와서 무엇을 보았습니까? 사람 만나서 악수하기 위해 오셨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왔습니다. 눈으로는 건물도 보고 사람도 보지만 마음만은 그래서는 안됩니다. 어떤 말씀을 듣고 어떤 사람을 만나든 마음은 계속 하나님을 만나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 바로 교회에 나오는 취미입니다. 이것은 종합적인 인식입니다. 지. 정. 의를 논할 것 없습니다. 깨달음도 중요하고, 느낌도 중요하고, 결단도 중요합니다만 문제는 종합적 인식입니다.
만나기 전에는 물어볼 것도 많고, 따질 것도 많다가 얼굴과 얼굴을 마주보면 그만 물어볼 것이 다 없어집니다. 들어볼 말도 없고 할 말도 없는 이것이 종합적 인식인 것입니다. 구태여 무엇을 깨달았느냐, 들었느냐 할 것이 없습니다. 그저 내 아버지의 집, 하나님 만나는 집으로 들어서는 것입니다.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어떤 분이 교회에 나와서 자꾸 졸기에, 자려면 왜 교회에 나오냐고 했더니, 내 아버지의 집에서 편안히 쉬려는데 왜 그러느냐고 해서 웃었습니다. 이것도 좋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어떤 말씀을 듣든지 하나님의 말씀으로 듣는 것에 의미가 있습니다. 어느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자 하면 교회에 나올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내 기도의 응답으로, 하나님께서 내게 향한 말씀으로 내가 받을 때에만 교회가 교회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설교는 특별히 오늘 내게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이고 나를 만나 주시는 말씀으로 들려지고 받아들일 때 교회가 교회 되고 내가 교회에 나온 바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내가 나 됨을 알게 되며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에서 나 자신을 깨닫게 됩니다. 내가 어떤 존재인가를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나요, 십자가 안에서 구속받은 나요, 그 많은 대가를 지불하고 구원하신 나로서 그 십자가 안에 있는 나의 무궁 무진한 값을 재발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을 구체적으로 확인하는 것입니다. 현실에 살다보면 희미해지고 고달파지는 것을 십자가를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재확인하는 것입니다.
시편 73편에 보면 다윗이 고민을 합니다. 세상에 왜 악인이 잘 되는 일이 있고 선한 사람이 고생을 합니까? 불의한 자가 잘살고 의로운 사람이 가난하게 살아야 합니까? 왜 세상에 이런 모순이 있고 부조리가 있느냐고 고민을 하다가 다음과 같은 결론을 얻었습니다. "내가 여호와의 전에 들어갈 때에야 그 결국을 깨달았나이다."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하나님과 나와 만날 때에 비로소 문제의 해답을 얻습니다. 왜 그래야 하고 또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깨닫고 그 속에 하나님의 사랑이 있음을 깨닫는 것입니다.
히스기야 왕은 무서운 전쟁의 도전을 받고 선전포고의 편지를 하나님 전에 가지고 가서 "하나님 이런 일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이 주의 백성을 이렇게 모독합니다"라고 하나님과 이야기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말을 들었든지 어떤 사건을 보았든지 하나님 앞에 놓고 하나님과 대화를 하기 위해 교회에 나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죄사함을 받는, 소위 의롭다 하는 축복을 받습니다. 너의 죄를 사했다고 하는 약속을 재확인합니다.
바리새 교인은 성전에 나가서 "나는 십일조를 바치고 금식을 한다."는 자기 자랑의 기도를 하고, 세리는 하나님 앞에서 고개를 들지 못하고 무릎을 꿇고 통회 자복하며 죄인이라고 기도했다 합니다. 예수님의 결론은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갔느니라."(눅 18:14)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갔느니라 하는 이것이 우리가 교회에 나오는 목적입니다. 비록 내가 어려운 고생을 치르고 있지만 이것은 죄인의 고난이 아니요, 의인의 고난이요, 의미가 없는 고난 같으나 이제 하나님을 만나는 순간에 보니 엄청나게 뜻 있는 고난이요, 약속이 있는 고난입니다.
여기 하나님의 섭리가 있고 내게 향한 축복이 있고, 내가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은 벌써 아셨고, 이루셨고, 약속을 성취하고 계십니다. 이 사실을 깨달으면서 순간 순간 하나님의 사랑을 재확인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 나오는 목적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능력을 주십니다. 아무리 고급 차라도 기름이 떨어지면 쓸 수가 없습니다. 때에 따라 기름을 넣어 주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을 계속 듣고 그 양식을 먹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 은혜에 접하며 하나님의 얼굴을 계속 뵈어야 합니다. 계속 만나야 합니다. 그래야만 내 영혼이 살고, 내 생활이 윤택하고, 내가 능력의 사람이 되고 지혜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사람은 듣는 대로, 보는 대로됩니다. 계속적으로 이 은혜에 접해야 합니다.
어머니가 어린아이에게 젖을 먹일 때 꼭 배가 고파서만 주는 것은 아닙니다. 울면 주고, 짜증을 부려도 주고, 배가 고파도 젖을 줍니다.
비록 서로 말은 하지 않아도 젖을 먹이는 엄마와 먹는 아기는 서로 통하고 있습니다. 젖을 먹이는 바로 그 순간 엄마는 "나는 너를 사랑한다"는 대화를 주며, 젖을 먹는 아기는 어머니가 나를 사랑하는구나 하는 대화를 느끼며 안심하고 편안한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젖만 먹는 것이 아니고 사랑의 젖을 먹는 것입니다.
우리는 도의 젖을 계속 먹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다윗이 말하기를 "내 생전에 한 가지를 구합니다. 하나님 전에 평생 살면서 주를 앙망하고 싶습니다. 그 장막에서 즐거운 제사를 드리겠고 노래하여 여호와를 찬송하리이다." 하나님 앞에 나와서 아버지 집에서 그를 찬송하는 것이 우리의 목적입니다. 여기에 우리 문제의 해결이 있고, 능력이 있고, 지혜도 있기 때문입니다.
기도 : 은혜로우신 아버지 하나님, 이 시간도 주님 앞에 나와 위로 주시는 은혜를 기다립니다. 주의 얼굴을 뵙고자 합니다. 주의 음성을 듣고자 합니다. 간구하오니 주의 얼굴빛을 우리에게 향해 주시고 한 사람 한 사람을 개별적으로 만나주시고, 들려주시고, 응답하여 주시옵소서. 그리고 주를 만난 체험을 가지고 어려운 세상을 승리의 생활로 항상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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