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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 얻을만한 믿음(사도행전 14장 8절~18절)
루스드라에 발을 쓰지 못하는 한 사람이 있어 앉았는데 나면서 앉은뱅이 되어 걸어 본 적이 없는 자라. 바울의 말하는 것을 듣거늘 바울이 주목하여 구원받을만한 믿음이 그에게 있는 것을 보고, 큰 소리로 가로되 네 발로 바로 일어서라 하니 그사람이 뛰어 걷는지라. 무리가 바울의 행한 일을 보고 루가오니아 방언으로 소리질러 가로되 신들이 사람의 형상으로 우리 가운데 내려오셨다 하여 바나바는 쓰스라 하고 바울은 그 중에 말하는 자이므로 허메라 하더라. 성밖 쓰스 신당의 제사장이 소와 화관들을 가지고 대문 앞에 와서 무리와 함께 제사하고자 하니 두 사도 바나바와 바울이 듣고 옷을 찢고 무리 가운데 뛰어들어가서 소리질러 가로되, 여러분이여 어찌하여 이러한 일을 하느냐, 우리도 너희와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 너희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이 헛된 일을 버리고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유를 지으시고 살아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함이라. 하나님이 지나간 세대에는 모든 족속으로 자기의 길들을 다니게 묵인하셨으나 그러나 자기를 증거하지 아니하신 것이 아니니 곧 너희에게 하늘로서 비를 내리시며 결실기를 주시는 선한 일을 하사 음식과 기쁨으로 너희 마음에 만족케 하셨느니라 하고 이렇게 말하여 겨우 무리를 말려 자기들에게 제사를 못하게 하니라.
어느 곡예사가 나이애가라 폭포에서 한쪽 절벽과 맞은편 절벽에 쇠줄을 이어놓고 까마득한 그 공중에서 줄타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손에, 손에 땀을 쥐고 구경했습니다. 곡예사가 아슬아슬하게 줄타기를 끝내자, 사람들은 일제히 손뼉을 치며 환호하였습니다. 그러자 곡예사는 더욱 우쭐해져서 반대쪽으로 다시 건너오겠다고 장담했습니다. 그는 의자 하나를 등에 걸머지더니 사람들을 보고 물었습니다. "내가 이 의자를 걸머진 채 저편까지 무사히 건너갈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러자 사람들은 박수를 치며 성원을 보냈습니다. "당신은 해낼 수 있어요. 우리는 그것을 믿어요." "그렇다면 좋습니다"하고 곡예사는 한가지 제안을 했습니다. "내가 이 줄을 타고 저 끝까지 무사히 건널 수 있다고 진정으로 믿으신다면 누가 와서 이 의자 위에 올라타십시오." 그러나 올라타려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여러분, 믿음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저 사람은 무사히 갈 수 있을 거야. 암 그렇고말고'-이것이 믿음일까요?
우리는 무엇을 믿고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까? 우리의 믿음을 한번 재점검해보십시다. 믿음은 추상적인 이론이나 관념이 아닙니다. 우리는 때때로 지식과 믿음을 혼동할 때가 있습니다.
성경을 알고, 성경의 내용을 알고, 진리를 좀 알고, 다소간에 지식을 좀 얻었다고 해서 그것이 믿음인 줄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천만에요. 그런 것은 믿음과는 별개입니다. 때로는 자신의 감정의 격동을 믿음으로 착각합니다. 어느 순간에 마음이 북받쳐 오르는 어떤 충격이 있으면 이것을 믿음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감정 순화를 믿음과 동일시하는 유(類)의 신앙도 봅니다. 그것도 믿음이 아닙니다. 제일 잘못되기 쉬운 것은 의지와 믿음의 혼동입니다. 나의 의지, 나의 주관적 의지를 믿음과 같은 의지로 생각해서 고집부리는 믿음---이것이 가장 엄청난 오해입니다. 제 고집대로 살면서 믿음으로 산다고 자처합니다. 결코 믿음이 아닌 것입니다. 의지가 약할 때에 믿음도 약한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런가하면 종교 의식을 믿음으로 착각할 때도 있습니다. 종교 의식에 많이 동참했다고 해서 믿음의 성장이라 착각합니다. 종교 의식에 익숙한 생활을 믿음의 생활인 양 잘못 생각하는 경우가 있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구원에 이르는 능력입니다. 생명력입니다. 간혹 '믿음으로 믿음으로'라고 말을 하면 어떤 분들은 반문합니다. "믿기만 하면 되는 것이냐? 믿고만 있으면 되느냐?" 성경은 분명히 말씀합니다. 참믿음, 살아 있는 믿음이면 됩니다. 믿음 하나면 그만입니다. 참된 믿음을 가지고 있으면 믿음 하나로 승리를 얻을 수 있습니다. 17세기의 유명한 신학자 에이브 에이허먼은 '한 알의 산 신앙이 한 파운드의 역사 지식보다 낫다. 한 방울의 사랑이 과학의 힘보다 낫다-믿음은 형식이 아니요 지식과 이론이나 추상적 관념이 아니라는 것을 이렇게 표현해 말하고 있습니다. 본문 성경의 한 구절은 제가 무척 사랑하는 요절입니다. "구원받을만한 믿음(9절)"-여러분, 믿음이 많으면 무엇하고, 있으면 무엇합니까? 구원 얻는 믿음이라야 합니다. 구원 얻을만한 믿음이라니, 도대체 어떤 믿음일까요? 저는 그러한 미음을 가지고 싶습니다. 이 믿음만은 절대로 잊어서는 안되고, 잃어서 안되고, 떠나서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구원이란 소극적으로 보면 죄와 사망과 사단과 율법과 진노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합니다. 죄를 지은 자마다 죄에 매입니다. 죄의식에 매입니다. 죄의 공포에 쫓깁니다. 구원받은 자는 이러한 불안과 공포와 두려움으로부터, 다시 말하면 죄의 속박으로부터 자유 합니다. 속박과 관계없는 이런 자유의 마음, 자유의 몸으로 삽니다. 이것이 곧 구원입니다. 또, 사망의 권세로부터의 자유-사망의 권세는 엄청난 것입니다. 그 모든 불안과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나 영생의 기업을 누리며 살아갑니다. 이것이 구원입니다. 그리고 사단의 권세로부터의 자유-악마의 역사, 두루 돌아다니며 오늘도 삼킬 자를 찾고 있는 이 무서운 악마의 세력으로부터 자유함을 얻는 것, 이것이 구원입니다. 율법과 진노로부터의 자유-이것도 구원입니다.
적극적 의미에서는 의롭다 함을 얻는 것이 구원입니다. 우리는 다 죄인입니다마는 십자가의 보혈 공로로 의롭다 함을 얻어서 떳떳한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갑니다. 나의 죄된 과거, 진노의 자녀였던 지난날은 이제 아무 상관도 없습니다. 오직 우리는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하나님의 자녀된 관계로 살아갈 뿐입니다. 이것이 구원이요 영생입니다. 오늘의 본문에서는 이것을 비유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앉은뱅이된 사람이 있습니다. 그사람은 나면서부터 앉은뱅이였기 때문에 평생을 얻어먹고 삽니다. 얻어먹을 권리가 있습니다. 그래서 언제나 길거리에 나앉아 오가는 사람에게 손을 내밀어 구걸해 살아갑니다. 그런 사람이 구원을 받아서 펄펄 뛰고 활동을 하고-이렇게 자유 합니다. 온전한 인격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온전한 인간의 회복, 전인적 회복, 전인적 치유, 재창조된 인간-이것이 구원입니다. 신학적으로는 이것을 '샬롬'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인간과의 바른 관계, 자기와의 바른 관계, 물질과의 바른 관계, 세계와의 바른 관계-이런 관계에서 살 때, 이것을 화목된 관계라고 해서 샬롬이라 합니다. 그 평화, 그 화평이 곧 구원이라고도 말합니다.
어떤 어머니에게 아들 4형제가 있었다고 합니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게 되자 머리맡에 나란히 앉아 있는 아들들을 보고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가면서 유언을 합니다. 너는 앞으로 이렇게 살아다오, 하고는 끝에 가서 "굿 나잇, 내일 아침에 다시 만나자, 굿 나잇!" 이렇게 말합니다. 둘째아들에게도 '굿 나잇,' 셋째 아들에게도 '굿 나잇'하고 인사를 합니다. 그런데 유독 넷째 아들한테는 '굿바이'라고 말합니다. 넷째 아들은 어리둥절했습니다. 어머니가 곡절을 설명합니다. "나는 20년을 두고두고 너에게 예수 믿으라고 해왔지만 너는 끝내 믿지 않고 방탕에 빠졌다.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살았으니 너는 아무래도 소망이 없는 것 같다.
나는 천당으로 가지만 너는 아무래도 못 올 것 같구나. 그러니 너와는 오늘로 굿바이 아니겠니? 너는 오늘로 나와는 마지막이구나 굿바이!" 넷째 아들은 다급해졌습니다. "어머니, 제게도 굿 나잇 해주세요. 이제부터 예수 믿고 어머니 가신 곳으로 저도 꼭 갈께요." 넷째는 눈물로 호소했다고 합니다. 여러분, 잘 생각해보십시오. 굿나잇과 굿바이는 엄청난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이 마지막날이라고 생각하는 사람과 하늘나라에서 다시 만날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얼마나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까? 그야말로 하늘과 땅 차이지요. 저는 목사라서 장례식에 많이 갑니다. 가서 보면요, 학벌이고 명예고 과거의 지위고, 다 아무 것도 아니더구먼요. 그저 신통치 않게 믿어도 예수 믿는 사람이 최고입디다. 내일 아침 만납시다, 며칠 후 며칠 후, 요단강 건너가 만나리……그런데 그 사람하고는 이제 끝이려니 하고 절망과 비통에 빠져 우는 모습들, 영 틀렸어요. 여러분은 어떤 믿음으로 오늘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특별히 성경은 막중한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줍니다. 성경 창세기부터 끝까지 목줄처럼 연면히 흐르는 중요한 교리 하나를 여러분은 잊어서 안됩니다. 바로, 인간은 스스로 구원하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자기 노력으로, 자기 의로-자구지책(自救之策)은 없습니다. 다시 말하거니와 내가 나를 구원하지는 못합니다. 명예가 나를 구원하지 못합니다. 내 인격을 내가 세우지 못합니다.
내가 나를 구원하는 의가 없습니다. 그래 이렇게 비유하는 이도 있습니다. 홍수에 떠내려가는 불쌍한 사람이 저를 구원하겠다고 제 손으로 제 머리카락을 자꾸 잡아당깁니다. 위로 자꾸 잡아당깁니다. 구해지겠습니까? 점점 더 깊이 빠져들 따름입니다. 소용없는 일입니다. 하나님께로서 능력이 나타나야만 구원이 있습니다. 이것이 진리입니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하나님의 재창조 역사(役事)입니다. 하나님 주도적인 사역입니다. 하나님이 다시 손을 내미셔서 구원의 역사를 이룰 때에만 이루어지는 것이 구원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성경 전체가 말씀하는 확실한 진리입니다. 자기가 자기를 구원하겠다는 사람, 바리새인입니다.
주님께서는 저를 용납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그 구원의 역사가 우리에게 임할 때, 개인적으로 볼 때에는 이 구원의 대상에게 요구하는 바가 있습니다. 바른 응답, 바른 자세, 바른 관계를 원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믿음은 은혜를 받는 그릇입니다. 저는 '그릇' 하면 늘 생각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평생 잊을 수 없을 것입니다. 1․4후퇴 때 피난 나오다가 백령도에서 한 두어 달 반쯤 피난살이를 하다가 군대에 입대했었습니다. 쌀 배급소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언제 쌀을 준다는 통보도 없지만 행여나 해서 자꾸 가서 서 있어 봅니다. 한 일주일, 매일같이 다녀보아도 한 됫박의 쌀을 받지 못했습니다. 하루는 '보나마나 오늘도 헛걸음이겠지' 하면서 빈손으로 갔더니 웬일인지 그날 따라 쌀을 많이 줍니다. 배가 들어왔다며 쌀을 주는데, 정히 맹랑합니다. 받을 그릇이 있어야지요. 그런데 여자들은 참 좋습디다. 보십시오, 치마 벗어 가지고 떡 펴드니까 몇 말씩 거뜬히 담아요. 남자야 치마가 어디 있습니까? 할 수 있나요? 웃옷을 훌렁 벗어 가지고 적당히 벌려 잡고 갖다댔지요. 해서 겨우 몇 됫박 얻어 오면서 생각했습니다. '오늘따라 왜 그릇을 안 가져갔담.
좀 큼직한 그릇을 가져갔더라면 좋았을걸, 쯧쯧……'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고자 하시는데 받을 그릇이 없습니다. 도대체 대통 만한 것도 없어요. 바늘구멍 만한 마음을 가지고 어떻게 은혜를 받을 것입니까? 하나님이 주시고자 하시는 엄청난 은혜가 준비되어 있다 하더라도 닫힌 마음, 그릇이 준비 안된 마음에 어떻게 은혜가 담기겠습니까? 은혜를 받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방송국에서 아무리 좋은 방송을 한다 해도 라디오가 없으면 듣지 못합니다. 텔레비젼 방송국에서 컬러로 좋은 프로를 내보내고 있는데 내가 가진 텔레비젼 수상기가 흑백이면 화면이 흑백으로 나옵니다. 아무리 깨끗한 방송을 내보내도 내 수상기가 고장난 것이면 화면이 시원찮습니다. 마음의 그릇, 그 믿음에 고장이 났으면 하나님께서 아무리 좋은 은혜를 주시려해도 받을 수가 없어요. 은혜의 역사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구원받을만한 믿음"-무엇일까요? 사도 바울 같지는 못합니다마는 교역자로서 저는 이것을 조금 알 수 있다고 생각해봅니다.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어떤 때에는 시간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밤새껏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 때도 있다고 합니다. 그래 유두고 같은 사람은 졸다가 이층에서 떨어지지 않았습니까? 다시 못 만날 사이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조금이라도 더 많이 전하고자 열심을 냈던 모양입니다. 거기가 노천이었는지 어느 다락방이었는지 알 수 없으나, 바울의 말씀을 듣는 사람 중에 앉은뱅이가 한 사람 있었습니다. 이 앉은뱅이가 바울을 쳐다보는데, 뚫어져라 쳐다봅니다. 그렇게 열심히 쳐다보며 듣는 것입니다. 그 쳐다보는 모습을 내려다보다가 구원받을만한 믿음이 있는 것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저 역시 이런 경험이 없지 않습니다. 말씀을 전하다가 보면 어떤 분은 너무 열심히 쳐다보기 때문에 '저분은 듣는 것이 아니라 받아먹는구나!'하고 느낄 때가 있습니다. 빨래줄에 앉은 제비새끼가 엄마 제비 물어다주는 먹이를 받아먹으려고 기를 쓰며 입을 벌리는 것과도 같이, 백 퍼센트 입을 딱 벌리고 받아먹는 모습의 심령들을 봅니다. 거기에 분명 구원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반면에 어떤 분들은 참 유감스러워요. 하나님 말씀 들으면 내가 듣고 내가 좋아할 생각은 하지 않고 곁에 앉아 있는 마누라를 쿡 찔러요. 잘 들어두라고 말입니다. 그런가하면 또 어떤 분은 그 동안을 못 참아서 이리 비틀고 저리 부시럭거리고, 마치 귀신들린 사람과도 같아요. 잠시도 가만있지를 못해요. 사단이 귀를 틀어막기 때문입니다. 듣지 못하게 말입니다. 말씀의 역사가 나타나지 못하도록 사단이 방해하는 것입니다. 이 1시간 동안은 집중적으로 몰입해서 집중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야 능력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가장 불쌍한 것이 무엇입니까?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인간 중에 가장 불쌍한 인간이 모처럼 교회까지 나와서 말씀 못 듣는 사람이라고요. 못나온 사람이야 못나왔으니 그렇지만 여기까지 일껏 나와 가지고도 들리지를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괴로워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심판입니다. 그 심령은 심판 받은 심령입니다. 우리는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다른 일 다 없어도 좋지만 말씀의 채널은 분명히 이어져야 합니다. 가사(假死) 상태에 빠졌던 어떤 분이 잠깐 하늘나라에 갔다가 돌아와 이야기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이렇게 말하더군요. 매주일 교회에 나오는 것이 마치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는 것 같은데, 한 주일 빠지면 사다리 한 칸이 빠져나간 것 같답니다. 한 주일 빠졌다가 나오면 두 칸 건너뛰어야 하니 힘들겠지요. 두 주일 빠지면 세 칸을 건너뛰어야 합니다. 그러니 매주일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또 받고 계속 받아야 차곡차곡 한 칸씩 올라갈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참으로 일리 있는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일용할 양식이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한 시간 못 들으면 그만큼 내 영혼 상태가 힘들어집니다. 한 주일 하나님의 말씀을 못 들었으면 그 다음 한 주일 동안 시험에 빠지기 쉽습니다.
넉주일 동안 하나님 말씀 못 들었으면 이미 시험에 빠진 것입니다. 조심해야 합니다. 정신차려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일용할 양식을 달라고 기도하라 하셨습니다.
매일매일 하나님 말씀을 들어야 하는데, 단 한순간이라도 못 들으면 안 되는데, 줄곧 못 듣는다면 내 심령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말씀이 사로잡아야 할 내 마음을 엉뚱한 생각이 차고앉아 사로잡게 되면 내 심령은 어느 방향으로 가느냐, 그 말입니다. 마르틴 루터는 말했습니다. '마귀는 만성적 불평불만자이다. 하나님의 말씀 못듣도록 방해하는 자다. 그게 마귀다' 라고요. 여러분, 그런데 오늘 본문 말씀에 보면 루스드라의 앉은뱅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적으로 받아들입니다. 백 퍼센트 받아들입니다.
요새 젊은 사람들하고 이야기를 하다보면 좀 기분 나빠지는 때가 있어요. 죽음을 앞둔 한 아버지가 아들보고 자신의 옛날 경험을 이야기하면서, 내가 이렇게 했다가 실수했다, 이렇게 했다가 실패했다, 이렇게 했다가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나 너는 그러지 마라, 하고 설명을 했더니 이 아들이 하는 말인즉 아버지의 경험으로 보아서는 일리가 있습니다, 하더랍니다. 기가 막힌 아버지, "그만큼이라도 인정해주니 고맙다." 그러고는 다시 말합니다. "그러나 한가지는 분명히 알아라. 너도 내 나이가 되면 나와 같은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 나이가 되어서 알기보다 지금부터 그렇게 생각해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분명히 같은 후회가 있고 같은 이야기를 하게 되겠는데, 이 답답한 아들이 아버지의 유언도 안 지키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도 똑같은 길을 갈 수 밖에요.
여러분,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 앉은뱅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적으로 받고 백 퍼센트 받아들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그는 자기를 부정하고 있습니다. 나면서부터 앉은뱅이 된 사람이니 걸어본 적이 없어요. 그런데 '네 발로 일어서라' 한마디에 벌떡 일어서요. 자기가 앉은뱅이였던 사실을 다 잊어버렸어요. 생전 걸어보지 못했다고 하는 것부터 잊어버렸어요. 우리에게는 이 같은 자기부정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이처럼 완전한 자기부정은 스스로 이룬 것이 아닙니다. 자기 의지나 자기 결단이 아니었습니다.
자기부정은 말씀을 긍정하게 될 때에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여기에 오묘한 진리가 있습니다. 말씀이 자기를 부정케 했습니다. 자기 과거의 경험, 구제불능이었다는 자기의 주제를 깨끗이 잊어버리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말씀을 받아들이면서 아멘, 아멘, 예 그렇습니다, 하고 마음으로 순종해나가면서 일어나라니까 벌떡 일어났지요. 아무 생각도 없어요. 여느 생사람 같았으면 이렇게 나왔을 것입니다.
"무슨 말씀을 하십니까, 바울 선생님. 저보고 일어서라니요? 제가 보통 앉은뱅인 줄 아십니까? 저는 난생 일어나 본 일이 없는 사람입니다. 일어나라는 말조차 들어본 일이 없단 말입니다." 이렇게 나왔다면 이야기는 끝나는 것입니다.
여러분, 믿을 수 있는 것만 믿는 것은 철학입니다. 믿을 수 없는 것을 믿어 그것을 전적으로 받아들이면 이것이 믿음입니다.
자신의 일반적 상식이나 경험 따위는 깨끗이 부정해버리는 데서 기적이 나타납니다.
공자가 말하기를 '군자는 행동으로 말하고 소인을 혀로 말한다'고 했습니다. 요사이는 혀로 말하는 것이 너무 많습니다. 군자는 말이 없다-믿었으면 행동할 뿐입니다. 루스드라의 앉은뱅이가 무슨 말이 있습니까? '아멘'이라고 합니까? '할렐루야'라고 합니까? '그렇게 하도록 힘쓰겠습니다'라고 합니까? 일어나라니까 벌떡 일어났어요. 그것뿐입니다. 거기에 기적이 있습니다. 즉각적인 증거, 우주적인 요청에 대하여, 창조적 역사에 대하여, 낙관적으로 신뢰한 것입니다. 자기부정은 깨끗하게 이루어지고 오직 말씀만을 백 퍼센트 긍정했습니다.
구원은 기적입니다. 그런데 이 구원은 합당한 믿음 안에서 창조됩니다. 말씀이 들려질 때에,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할 때에, 즉각적으로 받아 순종할 때에, 걷지 못하던 사람이 걸었습니다.
말씀의 능력이 저를 일으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구원받을만한 믿음이 그에게 있었던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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