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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교회의 재정지출, 과연 이대로 좋은가?

by 【고동엽】 2022. 10. 18.

한국 교회의 재정지출, 과연 이대로 좋은가?
- 교회의 정통성을 위협하는 재정지출양상 -  



박득훈 (기윤실 건강교회운동 운영위원장)

교회간에 엄청난 빈부의 격차가 있기는 하지만 한국교회는 막대한 재정적인 능력을 가지고 있는 집단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슬픈 것은 그 재정 중에서 교회와 사회의 약자를 위해서 직접 지출되는 부분, 그리고 더 나아가 사회적 약자들을 보호하기 위한 다양한 사회운동들을 지원하기 위해 쓰여지는 부분은 너무나 미약하다는 현실이다. 물론 모든 교회들이 그런 것은 아니다. 개중에는 사회적 약자에 대한 사랑을 재정지출을 통해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감동적인 교회도 있다. 이러한 교회들의 선한 사역에 대한 좀더 적극적인 홍보의 부족이 교회의 위상을 악화시킨 면도 없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평균적으로 볼 때 사회 봉사비의 명목으로 지출되는 재정은 전체 예산의 5%를 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분석결과이다. 그러니 건강한 소수의 교회들이 한국교회 전체의 부패현상을 방지하고 치료해가기에는 너무나 역부족이 아닌가? 마치 건강한 세포가 온 몸에 퍼져가고 있는 암세포의 거센 힘을 당해내지 못하는 불행한 형국과도 같다. 이런 현실을 딛고 일어서 교회의 건강을 회복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깊이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사회봉사를 위한 교회재정지출이 단순히 좋은 일이라는 것에 공감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최근에 들어서 이 점에서 한국교회의 의식수준은 상당히 성장한 것으로 보여진다. 문제는 우선순위이다. 사회봉사비 지출을 아무리 좋다고 인정한다고 해도 중요성과 긴박성에서 뒤로 밀린다면 결과는 마찬가지이다. 한국교회가 절실히 깨달아야 할 진리는 사회봉사를 위한 건강한 재정지출이 바로 교회의 정통성을 가늠하는 기준이 된다는 무서운 사실이다. 오랜 세월의 교회사를 통해 정통성의 논쟁은 교리를 중심으로 이루어져 왔다. 물론 정통성을 가늠하는데 있어서 교리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함에 틀림없다. 그러나 그에 못지 않게, 아니 어쩌면 궁극적으로 더 중요한 기준은 실천적인 삶이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특히 교회와 사회의 약자를 위해 아낌없이 재정을 지출하는 구체적인 삶이 하나님의 백성들과 교회의 정통성을 가늠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소위 정통교리를 수호하고 있음을 자랑으로 삼는 교회일수록 이 불변의 진리를 더욱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러한 교회들이 재정지출과 관련해서 부패한 생선처럼 썩은 냄새를 풍기고 있으면서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는 현실을 우리는 비껴 가서는 안 된다. 한국교회는 이러한 현실을 자신의 모습으로 받아드리고 슬피 울며 하나님 앞에서 먼저 철저히 무너지고 깨져야 한다. 그 뼈아픈 무너짐 속에서 정통성의 매우 중요한 기준이 물질적으로 나누는 삶이란 것을 깨닫고 다시 일어설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한국교회는 진정한 정통성을 상실할 위험에 직면해 있는 것이다.


이스라엘이 정통성을 상실한 이유

하나님은 이사야를 통해 사정없이 이스라엘 백성을 책망하신다(사 1:1-17). 이스라엘 백성은 범죄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식에서 소나 나귀만도 못한 존재로 전락해버리고 말았다. 발바닥부터 머리까지 성한 곳이란 도무지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을 소돔과 고모라 같은 이방인으로 취급하신다. 하나님 백성으로서의 정체성과 정통성을 상실하고 만 것이다. 하나님의 판단 기준은 무엇이었는가? 교리나 종교적 형식이 아니었다. 그들은 다양한 제사와 각종 성회 그리고 기도에 관한 교리들을 철저히 수호하였고 실천에 옮겼다. 그러나 그 좋은 일들이 하나님을 기쁘게 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마음에 견딜 수 없는 고통을 안겨 드렸다.


여기서 오해를 말아야 할 점이 있다. 하나님이 제사, 성회와 기도 자체를 싫어하신 것이 아니다. 하나님을 고통스럽게 한 것은 종교적 위선과 거짓이었다. 즉 겉으로는 정통성이 있는 하나님의 백성처럼 보이는데 실상은 이방인이었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그들이 교리와 형식에 있어서는 그럴듯해 보이는 데 정말 중요한 삶에 있어서 하나님의 법을 어기고 악을 행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공의를 저버렸다. 구약에서 공의의 핵심적 내용은 약한 자들의 권리를 지켜주는 것이다. 즉 힘이 없어 억압받는 자, 부모가 없어 돌볼 자가 없는 고아들과 남편이 없어 지켜 줄자가 없는 과부들을 잘 돌보고 그들의 권리를 보호해주는 것이다. 여기에는 정치적이고 법적인 차원과 직접적인 물질적 도움의 차원이 있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은 이 중대한 사명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살았던 것이다. 가나안에서 젖과 꿀이 흐르는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는 축복을 얻은 것은 억압적인 애굽과는 상반된 공의로운 공동체를 건설하라는 하나님의 뜻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깊은 뜻은 이미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도 시사된 바가 있었다(창 18:17-19). 그러나 이스라엘은 선지자들의 거듭되는 경고에도 불구하고 불순종하였다. 결국은 바벨론의 침략을 받아 나라를 잃는 민족적 비극을 겪게되고 만다.


예레미야 역시 그 멸망을 예견하면서 그 이유가 공의를 저버리고 사회적 약자를 정치적으로 물질적으로 돌아보지 않은데 있음을 분명히 하였다(렘 22:3). 더 놀라운 것은 그것이 바로 우상숭배와 본질상 같다는 것이다(렘 22:16). 아무리 입술과 형식으로 하나님을 찾는다고 해도 그것은 다른 신에게 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바른 지식은 최종적으로 사회적 약자들을 정치·경제적으로 보살피는데서 증명될 수 있기 때문이다(렘 22:16). 이와 같이 성경은 정통교리(orthodoxy)와 정통실천(orthopraxis)이 한 동전의 양면과 같아서 결코 분리될 수 없는 것임을 분명히 가르쳐 주고 있다. 분리되는 순간 양면이 분리된 동전처럼 그 정체성을 상실하고 쓸모 없는 존재가 돼버리고 마는 것이다. 교회의 정통성을 보장해주는 실천의 내용은 바로 가난하고 의지할 때 없는 약한 사람들의 고통을 함께 느끼고 그들을 끌어안아 존엄성을 회복시켜주는 다양한 활동에 참여하는 것이다.


정통성에 대한 예수님의 교훈

어느 부자 청년이 예수님께 영생의 길에 대한 질문을 던졌다(마 19:16-22). 예수님께서는 그가 익히 아는 십계명 중 사람에 대한 의무들인 5-9계명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레 19:18)는 명령을 지킬 것을 말씀하셨다. 그러자 그는 ''이 모든 것을 지키었사오니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나이까''라고 질문하였다. 계명들에 대한 그의 피상적 이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핵심을 찌르시면서 영생을 누리려면 자신의 재산을 모두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어야 함을 분명히 말씀하셨다. 그는 재산이 많은 사람이었기에 그만 예수님의 요청을 감당할 수 없어 근심 빛을 띤 체 물러가고 말았다. 예수님은 이어서 제자들에게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약대가 바늘구멍으로 들어가는 것보다도 더 어렵다고 말씀하심으로서 그 부자 청년이 진정으로 변화되지 않는 한 천국에 들어갈 수 없음을 못박아 말씀하셨다. 이것은 행위구원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이 그 진정성과 정통성을 인정받으려면 이러한 삶이 동반되어야만 함을 가르쳐주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 명령이 모든 사람에게 똑 같이 기계적으로 요청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가난한 사람에 대한 진실한 사랑과 그들을 위해 물질을 기꺼이 나누어 줄 헌신이 결여되어 있는 사람은 신앙의 정통성을 인정받을 수 없다는 점이다. 여기서 무너지면 신앙적인 사람이라고 인정받을 만한 다양한 객관적 조건들을 갖추었다고 해도 결국 쓰레기처럼 무용지물이 되고 만다.


최후심판에 대한 예수님의 양과 염소 비유가 이 점을 너무나 극명하게 확인시켜 주고 있다(마 25:31-46). 사회적 약자를 실질적으로 도와주는 삶의 여부에 따라 예수님에 대한 신앙의 진정성과 정통성이 결정되며 영생과 영벌이 갈라짐을 분명히 하셨다. 여기서도 해방신학자들이나 민중신학자들의 해석처럼 행위구원 혹은 ''익명의 그리스도인''이 암시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예수님 교훈의 전체적 그림 속에서 이 본문을 볼 때 그 점은 더욱 분명해 진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의 결론을 맺으시면서도 하나님의 뜻을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삶이 없다면 어떠한 신앙적 고백이나 종교적 행위도 백해무익함을 가르치셨다(마 7:21-23). 이렇게 신앙과 교회의 정통성에 대한 교훈에 있어서 예수님은 구약의 가르침을 완성하고 계시다.


예루살렘 교회의 정통성

오순절 성령경험과 베드로의 능력 있는 복음 설교를 통해 3000명이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게됨으로 예루살렘 신앙공동체가 형성되었다(행 2:1-47). 그 공동체 안에는 국외에서 거주하던 유대인, 유대교에 귀의한 이방인들, 그레데인과 아라비아인들 등 다양한 사람들이 있었다. 정통성과 관련해서 주목해야 할 부분은 그들의 물질생활이다. 그들은 서로 낯선 사람들이었지만 아낌없이 자신들의 모든 재산과 소유를 팔아 공동체 구성원들의 필요에 따라 나누어주었다. 자신의 재물에 대해 배타적인 사적소유권을 주장하는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었던 것이다(행 4:32). 놀라운 사실이 아닐 수 없다.

이 점에 주목하면서 해방신학자 미란다(José P. Miranda)는 ''누가에 의하면 선택의 여지가 있는 것은 공산주의가 아니라 기독교이다''라고 까지 선언하였다. 즉 기독교를 선택하는 것은 자유에 속하지만 일단 기독교를 선택한 이상에는 자신의 배타적 소유권을 포기함으로 공산주의를 수용하는 것은 선택의 여지가 없는 의무라는 주장이다. 물론 미란다는 사유재산권의 자발적 포기를 마르크스의 제도적 공산주의와 등치하고 그 포기를 역사적 상황과 무관한 절대적인 기독교인의 보편적 사명으로 주장함으로서 단선적이고 기계적인 해석학의 여러 가지 문제점을 안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여기서 분명히 해야 할 점이 있다. 정통성이 있는 교회라고 하면서 주변에 가난한 사람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무관심하거나 가난을 해소하기 위한 나눔의 삶에 적극적으로 동참하지 않는 것은 자가당착적인 모순이라는 사실이다. 즉 진정한 성령충만과 정통복음주의를 증명하는데 있어서 강력한 설교, 방언, 뜨거운 예배, 착실한 성경공부, 열정적인 기도, 가득 찬 다양한 교회 모임들로는 부족하다는 것을 말한다. 그 모든 것을 갖추었다고 해도 가난한 자들을 위한 다양하고 구체적인 재정지출에 우선순위를 두지 않고 구색 맞추는 수준에 머물거나 입술로만 떠든다면 그러한 교회의 신앙적 정통성은 의심되어 마땅하다.

여기서 유의할 점은 예수님이 가난한 과부의 보잘것없는 두 렙돈의 연보를 칭찬한 것에 서 알 수 있듯이 중요한 것은 재정지출의 절대적인 액수가 아니라 전체 재정에서 차지하는 비중이다. 예컨대 대형교회의 사회봉사비가 절대액수에서 그럴듯하다해도 그 비중이 여전히 5%를 밑돈다면 교회의 정통성과 관련해서 다른 작은 교회보다 긍정적인 평가를 받을 근거가 전혀 돼지 않는다. 궁극적으로 정통성은 사회적 약자들을 위한 물질적 헌신도의 진정성에 의해서 판가름나기 때문이다. 그것이 결여된 모든 종교행위는 아무리 그럴듯하고 열정적이라고 해도 본질적으로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섬기는 우상숭배에 지나지 않는다.


가난한 자에 대한 바울의 깊은 관심

가난한 자를 정성껏 돕던 예루살렘 교회의 전통은 바울을 통해서 이어졌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들은 바울을 이방인의 사도로 깊이 인정하고 동역자로서의 연대를 굳건히 하면서 한 가지를 부탁하였다(갈 2:9-10). 그것은 바로 가난한 자들을 돌봐달라는 것이었다. 바울은 이 부탁을 받으면서 자신도 원래부터 그 일을 힘써 행해 왔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실제로 바울이 목숨의 위협을 무릅쓰면서까지 예루살렘을 방문한 중요한 목적 중에 하나가 예루살렘의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이방교회에서 마련한 헌금을 전달하는 것이었다(행 24:17; 롬 15:25-27).

고린도 교회 교인들에게 바울은 구제헌금에 동참하는 것이 우리를 부요하게 하기 위해 스스로 가난해 진 예수님의 은혜에 참여하는 것임을 밝힘으로서 그 중요성을 강조하였다(고후 8:9). 아울러 시편 말씀을 인용하면서 가난한 사람에게 물질적 도움을 주는 일이 바로 하나님 정의의 핵심임을 분명히 하였다(고후 9:9; 시 112:9). 이처럼 바울에게 있어서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것은 신앙의 주변적인 표현이 아니라 핵심적 내용이었다. 예수님을 깊이 만난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가난한 사람들을 물질적으로 돕는 일에 전적으로 헌신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을 다시 한번 보여주는 대목이다.


교회의 정통성 확립을 향한 발돋움

이렇게 성경적으로 보면 예수님을 뜨겁게 사랑하고 전도하고 선교한다고 하면서 가난한 사람을 제대로 돌보지 않는다는 것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그런데도 그런 일이 심각한 문제의식 없이 수용되고 있다면 교회는 형편없이 썩어 있다는 것을 웅변해주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오늘 한국교회의 현실이라는 점에 우리는 큰 슬픔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대부분의 한국교회는 아름다운 교회건물을 짓기 위해서는 상당한 규모의 은행 빚을 지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다. 그 안에 들여놓을 각종 고급스러운 장비들을 위해서는 아낌없이 재정을 배정한다. 교회의 다양한 대내적 행사를 성대하게 치르기 위해서도 물질을 풍성하게 사용한다. 그러나 전·월세 상승압박을 견디다 못해 쓰러져 가는 자기 교회 성도에게는 눈길을 주지 않는다. 그러니 세계화의 거센 물살을 이겨내지 못하고 낙오한 세상사람들의 피눈물과 고통이 어찌 교회의 진한 관심이 될 수 있겠는가? 우선순위의 왜곡은 결국 진리의 왜곡시키면서 교회의 정통성을 위협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정통성을 잃어 가는 교회의 상대적 무관심 가운데 가난한 이웃을 돕기 위한 각종 기관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가난한 이웃들의 복지증진을 위해 제도적 개혁을 추진하는 시민운동들은 대체적으로 자금 부족에 시달리고 있는 실정이다. 지금은 이런 문제를 가볍게 다룰 여유가 없다. 정통성에 위협을 받고 있는 한국교회! 기적적인 부흥을 경험했다는 자만감에 젖어서 뼈아픈 자성의 길을 외면한다면 타이타닉호의 비참한 운명을 피할 길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이라도 회개하고 돌이킨다면 은혜가 풍성한 하나님은 한국교회의 정통성을 새롭게 하심으로 세상의 아름다운 빛과 소금이 되는 교회로 새롭게 발돋움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곧 열리게 될 건강교회 포럼이 이러한 교회의 진정한 개혁에 작은 밑거름이 되기를 기도하는 마음이 간절해진다. 많은 분들이 참여하여 개혁의 불씨를 퍼뜨리는 역사가 일어나기를 열망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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