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 4:22-38
그날은 세례요한의 목 베임에 관한 소문으로부터 시작되었던 아주 괴로운 날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바다를 건너 광야 건너편으로 가자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이 광야로 나아갔을 때 그들은 거기에 그들을 기다리는 많은 군중들이 있었습니다. 오후 늦게 제자들은 그들을 돌려보내자고 예수님께 말씀드렸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예수와 제자들에게 무엇을 요구하고 있었음을 잘 알 수 있었고 그들의 요구를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우리가 먼저 그들을 먹인 후에 돌려보내자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오병이어를 취하셔서 5천명의 남자들과 또한 여자와 아이들을 먹이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제 제자들에게 배에 올라 건너편으로 가라고 명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거기 남으셔서 군중들을 돌려보내고 홀로 아버지에게 기도하는 시간을 가지셨습니다. 그 동안 제자들은 풍랑을 만났으며 강한 폭풍이 그들을 거슬려 불어 닥쳤으므로 그들이 밤새도록 노를 저었으나 앞으로 더 나갈 수가 없었으며 바다 한 복판에서 죽을 지경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들은 그렇게 몇 시간을 고생을 했습니다. 죽음의 두려움은 점점 그들에게 닥아왔으며 폭풍우는 조금도 그 기세를 늦추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심신은 극도로 피곤해 지고 낙심되어 있었습니다. 깜깜한 바다와 계속 넘치는 파도와 잃어버린 방향과 무능한 지신들의 능력 앞에서 그들은 죽음을 기다라는 공포에 찬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새벽 3시 이후쯤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서 그들에게로 오셨습니다. 처음에 그들은 예수님이 유령인 줄로 알고 두려워했었습니다. 예수께서 “내니 두려워 말라”고 안심을 시키셨습니다. 이때 베드로가 “주여, 만일 주시어 든 나를 명하사 물위로 오라 하소서”라고 말씀 드렸으며 예수께서 “오라”고 명하셨습니다.
I. 베드로는 예수께로 향하여 물위로 걸을 수 있었습니다.
베드로가 물위를 걸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우리는 이 시간 이 사실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필요로 하는 우리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하겠습니다.
A. 하나님께서는 믿음 안에서 기꺼이 모험을 하는 이들을 사랑하십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그의 가족을 떠나 진실로 목적지도 알지 못한 채 그의 여행을 시작하는 모험을 했던 것입니다. 이 일에 대하여 히브리서 기자는 “(히11:8)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 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라고 말했습니다.
다윗도 믿음으로 시내로부터 돌을 주워 들고 거인(골리앗)을 대면하여 싸우기 위하여 올라가는 모험을 했었습니다. 성경에 보면 골리앗이라는 사람은 불렛셋의 맹장으로서 그의 힘과 거대한 몸에 대하여 “(삼상17:5) 머리에는 놋 투구를 썼고 몸에는 어린 갑을 입었으니 그 갑옷의 중수가 놋 오천세겔이며 (삼상17:6) 그 다리에는 놋 경갑을 쳤고 어깨 사이에는 놋 단창을 메었으니 (삼상17:7) 그 창자루는 베틀채 같고 창날은 철 육백 세겔이며 방패 든 자는 앞서 행하더라”하였으며 “(삼상17:41) 블레셋 사람이 점점 행하여 다윗에게로 나아 오는데 방패 든 자가 앞섰더라”하였으니 골리앗을 본 이스라엘 사람들은 “(삼상17:11) 사울과 온 이스라엘이 블레셋 사람의 이 말을 듣고 놀라 크게 두려워 하니라”라고 하였습니다. 반면에 골리앗과 싸우자고 나선 다윗은 “(삼상17:42) 그 블레셋 사람이 둘러보다가 다윗을 보고 업신여기니 이는 그가 젊고 붉고 용모가 아름다움이라”하여 아직 어린아이의 모습을 벗지 못한 청년이었습니다. 더욱이 그는 “(삼상17:40) 손에 막대기를 가지고 시내에서 매끄러운 돌 다섯을 골라서 자기 목자의 제구 곧 주머니에 넣고 손에 물매를 가지고 블레셋 사람에게로 나아 가니라”하였으니 이는 상상할 수도 없는 커다란 모험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누구도 가지지 못한 특별한 믿음을 가졌습니다. 그는 말하기를 “(삼상17:37) 여호와께서 나를 사자의 발톱과 곰의 발톱에서 건져 내셨은즉 나를 이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라고 하였고 골리앗에게 말하기를 “(삼상17:45)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 (삼상17:47)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로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붙이시리라”라고 말했습니다. 그가 누구를 믿고 이런 말을 할 수 있었겠습니까?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아니고서는 감히 할 수 없는 말인 것입니다.
베드로가 풍랑이 일고 있는 물위를 걷자고 했을 때 어떤 사람들은 “베드로가 또 무슨 실수를 저지르려고 저렇게 나서는구나”라고 말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안전하기 위해 가만히 있는 사람보다도 실수를 하더라도 하나님을 위해 일하겠다는 사람을 더 사랑하십니다. 우리가 실수가 없는 사람처럼 보이기 위해서는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 되겠으나 그런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은혜와 기적이 있을 수 없습니다. 또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무엇을 한다고 다 실수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실수를 전재로한 모험은 없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하다 보니 실수가 되는 일이 있는데 그럴지라도 하나님께서 축복을 하신다는 말입니다.
아이들이 밖에 나가 놀면서 넘어지기도 하고 다치기도 하지만 그러는 가운데 기력이 생기고 창조력이 생기며 자기의 일을 자기가 알아 처리할 줄 아는 지각과 이성과 판단력이 발전되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밖에 나가 놀다가 다치면 안되기 때문에 방안에 가두어 기르면 결국 사회성을 가질 수 없고 담력도 모험심도 가지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순하고 착하기는 하지만 용감하고 진취적이고 도전적인 사람은 되지 못해서 세상살이에 낙오를 할 것입니다.
베드로가 바다 위로 걷기를 시도했었음을 칭찬 받아야 합니다. 비록 짧은 순간이었긴 하지만 최소한 그는 약간의 성공을 했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배에 남아 있었던 나머지 제자들보다도 나은 것입니다. 적어도 베드로는 “(마14:29) 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믿음으로 잠시나마 물위를 걷게 된 것입니다. 그는 물위를 걷고 있었습니다. 그 일을 이루고 있었던 것입니다.
II. 베드로는 물에 빠져 가고 있었습니다.[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가는지라 소리질러 가로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
때때로 위대한 승리의 직후에 실패가 옵니다.
엘리야가 바알의 선지들과 더불어 겨루어 하나님께서 불로서 응답하시고 백성들이 여호와가 하나님이시라고 인정하고, 그 기회를 잡아 엘리야가 모든 바알의 선지자들을 죽인 직후에 사악한 왕비 이세벨이 엘리야의 행한 일을 듣고 그를 죽이겠다고 맹세하자 엘리야가 그의 생명을 인하여 두려워하므로 도망하여 이세벨의 눈을 피하여 숨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죽기를 구할 정도로 낙담했던 것입니다. 이 일에 대하여 성경은 “(왕상19:4) 스스로 광야로 들어가 하룻길쯤 행하고 한 로뎀나무 아래 앉아서 죽기를 구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취하옵소서 나는 내 열조보다 낫지 못하나이다 하고”라고 기록하였습니다.
삼손이 당나귀 턱뼈로 천명의 블레셋 인을 죽인 직후에, 그는 갈증을 인하여 자기가 죽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삿15:18) 삼손이 심히 목마르므로 여호와께 부르짖어 가로되 주께서 종의 손으로 이 큰 구원을 베푸셨사오나 내가 이제 목말라 죽어서 할례 받지 못한 자의 손에 빠지겠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사탄은 우리가 가질 수 있는 최고의 정상의 경험 직후에 있는 골짜기의 밑바닥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점을 스스로 경계하고 조심해야 합니다.
Ⅲ. 아무리 그럴지라도 베드로는 최소한 그가 빠져 갈 때에 누구에게 도움을 구할지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부르짖기를 “(마14:30)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소리질러 가로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 그는 주님을 향하여 부르짖었던 것입니다.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우리는 저마다 우리 자신 이상의 어떤 분에게 도움을 요청해야 할만큼의 위기의 시간들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럴 때 사람들이 누구를 믿고 살았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누구에게 도움을 구합니까? 누구에게 손을 내 밀고 있습니까? 어떤 이는 술을 향하여 손을 내밉니다. 다른 사람들은 귀신을 양해 손을 내 밈니다. 어떤 사람은 돈의 자기를 구해 줄 것이라고 돈을 찾습니다. 병이 들어 죽어 가는 사람은 인간의 한계와 의학의 한계를 느끼고 낙심한 있는 의사에게 손을 내 밈니다. 그러나 죽어 가는 사람에게 아무도 구세주가 될 수 없습니다. 돈도, 권력도, 의학도 첨단 과학도 물에 빠진 절망적인 상황에서 그를 구할 수 없습니다. 돈이다 권력이다. 학연이다. 혈육이다. 지연이다 무어다 하는 것들은 사실 죽어 가는 사람이 아닌 산 사람에게 효과가 있을 수 있지만, 죽어 가는 사람에게는 아무 효과도 없는 것입니다. 다만 우리을 구하실 분은 오직 그리스도 그 분밖에 없습니다.
우기가 당하는 생의 억압과 긴장은 우리가 더 이상 대처할 수 없을 만큼 엄청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당하는 죽음의 공포와 전율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이 황당하기 그지없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당하는 죽음과 고난에 대한 깨달음이 없고 지각이 없다고 해서 죽음의 저주가 우리를 비켜 가는 것은 아닙니다.
이제 우리는 이 사실을 알고 신속히 베드로처럼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라고 부르짖어야 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기도할 때 하나님은 우리을 구원하실 뿐 아니라 많은 위로를 주십니다.
Ⅳ.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저를 붙잡으시며”
우리는 이 장면에서 우리 심장을 강타하는 전율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극적인 장면을 좋아합니다. 그것은 위기의 순간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나중에 그를 꾸짖으시지만 먼저 그를 구해 주셨습니다.
여러분이 지금 어떤 위험에 빠져 가고 있다고 느끼면 예수님을 부르십시오. 그러면 곧 당신에게로 손을 내미시는 예수님을 당신은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주님의 도우심이 얼마나 가까이 있었는지 보십시오. 베드로가 “주여 나를 구하소서”라고 말한 그의 입술만큼 가까이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로마서 10장에서 우리와 함께 게신 주님에 대한 말씀을 들을 수 있습니다. “네 마음에 누가 하늘에 올라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올라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모셔 내리려는 것이요 혹 누가 음부에 내려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내려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모셔 올리려는 것이라 그러면 무엇을 말하느뇨 말씀이 네게 가까와 네 입에 있으면 네 마음에 있습니다 하였으니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라고 말씀하셨는데 주님의 도우심은 바로 그와 같이 우리들에게 심히 가까이 있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의 구원과 도우심은 받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오직 예수님을 부르는 일이며, 그리하면 예수께서는 즉시 우리들을 구원해 주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죄책감으로 인하여 감히 고개를 들지 못하고 성전에서 있던 한 죄인에 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그는 가슴을 치며 “하나님이여 죄인인 내게 은총을 베푸소서”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죄사함을 받고 돌아갔던 것입니다. 우리도 이렇게 솔직히 우리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면 아주 가까이 계신 주님에게 큰 도우심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Ⅴ. 베드로는 의심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베드로는 아주 좋은 출발을 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향하여 물위로 걸어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믿음의 걸음을 용감히 내어 딛었으며 주님은 그것을 칭찬하셨습니다. 그러나 갑자기 그가 물에 빠지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 주님께서는 이 부분에 대하여 “믿음에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라고 말씀하셔서 베드로가 믿음이 좀 부족했다고 생각이 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그를 이렇게 책망하실 때 분노했다고 생각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약간의 미소를 띠고 계셨을 것이라고 상상해 봅니다. 그 이유는 이 물으심이 전혀 꾸짖음이라고 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그것은 그가 왜 물 속으로 빠져들어 갈 수밖에 없었는지를 알려 주시는 주님의 교훈을 위하여 계획된 질문이었고 생각됩니다.
베드로야 네가 왜 빠질 수밖에 없었는지 분석해 보라는 말씀입니다. 그 의심이 무엇 때문에 생긴 것입니까? 베드로는 사납게 몰아치는 바람을 보았기 때문에 의심했었던 것입니다.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라는 말씀이 그 원인을 밝힙니다.
그는 예수님께로부터 눈을 떼어 풍랑을 바라보았습니다. 아마도 큰 파도가 하얗게 거품을 물고 그에게 다가 왔을 것입니다. 아마도 그 바람이 그를 붙들기도 하며 또한 그를 강타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그 바람과 파도로 몸의 균형을 잃고 비틀거렸을 것입니다. 순간 그는 죽음을 생각하고 물에 빠져 버렸을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무엇을 교훈하고 있는가?
예수님을 바라보았을 때 그는 물위로 걷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지금 당하고 있는 어려운 상황을 발견하고 그것을 바라보았을 때 즉 예수를 바라보던 그의 시선이 자기의 문제에 머물렀을 때 그는 물 속으로 가라앉기 시작했었습니다. 그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바람이 불고 풍랑이 심한 밤에 물위에 서 있다는 것입니다. 그가 그 문제를 바라보았을 때 그 문제 속으로 빨려 들어간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문제를 바라볼수록 그것은 더욱 커져서 마침내 내가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문제인 것처럼 커져 보이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의학은 우리에게 많은 놀라운 진전을 가져왔습니다. 외과 수술의 절차도 매우 진전되어서 한때는 오랫동안의 입원을 요하던 수술들도 지금에 와서는 외래환자 병동에서 행할 수 있게 치료되었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의약으로 치료되지 않는 어떤 질고나 만성 질병들이 있습니다. 암의 징후라든지, 치매 현상 그리고 각종 성인병들은 우리의 마음에 공포를 가져오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병뿐만 아니라 우리들에게 일어나는 해결할 수 없는 많은 문제들을 바라보면서 걱정하고 근심하면 그 문제가 해결되기는커녕 오히려 더 커져서 그 문제 속에 빠져 낭패를 당할 것입니다.
이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주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이제 예수께 나의 시선을 고정 시켜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아직도 인간의 능력으로서 완치가 불가능할지라도 예수님께서는 아주 간단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어찌하여 의심하는가? 예수님을 바라볼 때 그가 물위로 걸었던 것을 보라 그는 불가능한 일을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부서지는 파도를 바라 볼 때에 그는 가라앉았습니다.
이것이 당신에게 무엇을 가르치고 있는가? 눈을 예수님께로 향하라!
몰아치는 바람을 바라보았을 때 그는 두려워했습니다. 믿음과 두려움은 서로 배치되는 것입니다. 믿음은 두려움을 없이하고, 두려움은 믿음을 없이 합니다. 예수께 내 눈을 들 때에 나의 믿음은 성장합니다. 그러나 나의 큰 문제를 바라 볼 때에는 나의 두려움이 자랍니다. 이것이 나에게 무엇을 교훈 하겠는가? 나의 눈을 예수님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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