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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와 후회 (요 19:28-30)

by 【고동엽】 2022. 10.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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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와 후회  (요 19:28-30)


우리가 한 인생을 순례자처럼 살면서 여러분이나 저나 지나온 발자취가 있습니다. 남자든지 여자든지 누구든지 만약에 우리 지나온 인생을 단 두마디로 압축해서 설명하라고 하면 제 생각같아서는 딱 두마디로 말 할 것 같습니다. 하나는 '감사'라는 단어고 또 하나는 '후회'라는 단어일 것입니다. 결국 우리의 인생은 감사와 후회로 전부를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모두에게 감사가 있습니다.

저도 지금 5학년 7반에 재학 중에 있습니다. 지나온 세월을 돌이켜 보면 저에게도 참으로 감사가 있습니다. 기도하시는 부모님 밑에서 자라나게 해 주신 거 생각하면 감사합니다. 공부할 기회를 주셨고 제 눈에 딱 맞는 와이프 만나서 살게 해주신 거 감사하고 뭐 제 눈에 안경입니다. 또 귀한 아이들를 주셨고 가정을 주셨고 또 신앙 주셨습니다. 저같은 타입은 뭘 잘 믿지 못하는 데 하나님이 중간에 저에게 손을 대시니 얼마나 잘 믿게 만들어 주셨는지 제가 목사가 되어서 예수님을 잘 믿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을 잘 믿으니까 하나님이 저를 목사로 시켜 주신 것 같습니다. 여러분도 그런 감사의 제목이 많을 것입니다. 특별히 저는 목사가 되어서 사람들 앞에 늘 서야 되는데 어떻게 보이는가 참 중요하거든요. 저는 제가 압니다. 인물은 뭐 볼거 없는데 다 인상이 좋다고 그래요. 그래서 그것도 참 감사한 일이예요. 한분 한분에게 감사의 제목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거 뿐이였으면 좋겠는데 또 다른 한면을 보면 우리 모두에게 뼈아픈 후회라는 것이 있습니다. 후회 없는 분은 없습니다. 지금까지 살아온 세월을 돌이켜 보면서 왜 내가 그 때 그 쪽을 택했는지, 내가 왜 그 때 부모님 말을 안 듣고 속을 썩였는지, 내가 왜 그 때 그 사람을 그렇게 대했어만 했던가, 아니면 내 입에서 왜 그런 말이 나와가지고 지금까지도 그에게 상처가 되고 나에게도 상처가 되고 있는지 없는 분 안 계실 것입니다. 심지어 너무 후회가 되서 뼈가 아파서 때때로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야 될 때가 있습니다. 이 후회라는 측면에서 예수님을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 예수님에게도 후회라는 측면이 있으셨을까요? 그는 여러분과 저와의 구주시고 생명의 주인이십니다. 그런데 그 분도 눈물을 흘리셨어요. 엄청난 고통을 겪으셨 때 있으셨어요. 가끔 우리 중에 사람에게 시달리는 분도 계시지만 아마도 이 땅에 오셔서 사람에게 시달린 걸로 꼽으면 주님보다 더 시달린 사람 없으셨을 거예요. 나중에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셨어요. '엘리엘리 라마 사막다니' 그 주님에게도 후회가 있으셨을까요? 저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후회가 없으셨던 그 분이 바로 저와 여러분의 주인이십니다.

이 본문의 말씀에도 '다 이루었다' 말씀하시잖아요. 이것은 엄청난 말입니다. 한 인간이 이 땅에 한 존재로 살고 끝날 때 '다 이루었다.' '내가 다 이루었다.' 어떻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분이 누가 있겠어요. 'Ihave finished' '다 마쳤다.' 'I have completed' '내가 다 완성했다' 물론 그 말씀은 하나님이 나를 이땅에 보내신 대로 내가 온 인간의 죄를 씻기 위해서 구속의 재물로 다 완성했다 그 뜻도 물론 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뿐만 아니죠. 다 내가 이루었다는 말씀 속에는 돌이켜 보면 하나님이 보내신 사람답게 유감없이 살았단 뜻이죠. 후회가 없이 살았다. '다 이루었다.'는 말씀 속에는 땅을 크게 소유해봤다. 권세를 쥐어봤다. 돈으로 세상을 주물어 봤다. 명함에다가 수없이 뭘 기록하면서 업적을 살려봤다. 소위 말하는 그 넓이의 개념은 전혀 없으십니다. 그런 걸 가지고 다 이루었다는 말씀이 아닌 걸 아실 겁니다. 오히려 주님은 하나님이 이 땅에 보내신 목적답게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들을 하나 하나 철저하도록 깊이있게 파고 들어갔다는 말씀인 겁니다. 유감이 없고 후회가 없도록 하나님께서 주신 삶을 살아 드렸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제자들이라면 한가지 분명한 가치관이 있어야 되는데 우리는 이 세상을 넓이로 사는 삶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깊이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것이 주님을 믿는 사람들의 차이점입니다. 지금 이후도 계속 여러분과 저에게 감사와 후회가 있을 겁니다. 오늘도 또 어제때문에 후회하면서 인간의 아이러니 한 것은 그렇게 후회를 싫어하면서도 오늘도 또 내일을 후회할 일을 만들고 있는 우리 존재들입니다. 모순아닙니까? 이런 후회가 우리에게 지나가기 위해서는 여러분, 넓이는 후회의 제목이 될 뿐입니다. 그러나 깊이가 이 후회를 없애는 것임을 믿고 우리 주님을 따라서 깊이로 나머지 인생을 살아가십시다. 그것이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의 위대한 삶의 비밀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다 이루었다. 후회가 없도록 살았다.' 하시는 우리 예수님을 가장 본받아야 할 것은 신앙의 깊이가 중요합니다. 여러분이나 저나 깊이로 신앙생활하는 것이 이제부터 후회없는 인생을 위해서 중요한 제목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신앙인들입니다. 우리 얼굴 생긴거, 우리가 이 땅에 발을 붙이고 사는 거 어차피 나가면 똑같아요. 그러나  세상사람들과 우리 크리스챤이 다른 것이 있다면 신앙때문에 다른 것입니다. 그런데 신앙은 그냥 신앙이라고 이름 붙인 것이 신앙이 아니라 신앙의 본질은 그 깊이에 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데 깊이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되 목에 칼이 들어와도 믿는 깊이로 믿는 것입니다. 예배도 깊이입니다. 인격도 깊이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도 깊이입니다. 우리 삶이 주의 진리앞에 깊이로 신앙의 깊이로 추구할 때 우리 인생 다 끝나는 날 우리도 신앙에 관한한 후회없이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주여 오늘부터 저의 신앙이 깊이로 살 수 있게 하여 주십시오. 시편1편에 보면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쫓아 과실을 맺으니 잎사귀가 무성한 것은 그 나무가 잘 나서 그런게 아니예요. 그 나무가 깊은 시냇가에 뿌리를 내리고 영성의 깊이, 체험의 깊이, 간증의 깊이가 영광의 하나님, 은혜의 하나님이 깊이 깊이 우리 삶에 뿌리가 내릴 때 우리 역시 시절을 쫓아 과실을 맺고 잎사귀가 무성할 수 있습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이 잘나서 그런 게 아닙니다. 우리 믿음에 깊이가 있을 때에 우리도 흔들림이 없습니다. 우리도 이 땅에서 존경받고 당당하게 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하나님의 깊이있는 사람들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저는 엘리야선지자를 생각할 때 마다 야고보서 5장에 보면  그는 똑같이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그에게 뭐가 있었어요? 850명의 바알과 아세라의 선지자들 앞에서 꿈적 안하는 떳떳하고 견고한 믿음의 깊이가 있었습니다. 아무나 다 덤벼봐라 하나님 한분 만으로 내가 너희를 이기리라. 그게 바로 신앙의 깊이예요. 3년반동안 막혔던 하늘이 열리고 엄청난 비가 쏟아내렸지 않습니까? 신앙의 깊이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는 왜 이렇게 깊이 허약하고 나약하게 흔들려가면서 세상을 살아야 될 사람들입니까? 우리 크리스챤들이 넓이로 예배하는 횟수, 3대째 4대째 믿는 집안, 교회에서 맡은 직분은 하나의 넓이 일 수 있습니다. 하나의 업적의식일 수 있습니다. 그건 하나님 앞에서 하나도 소용없을 수 있어요.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내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사랑하고 그 분의 깊이 있는 그 분의 인격과 은혜와 영생이 내 인생에 뿌리 내리는 신앙의 깊이가 중요합니다. 그래서 모세는 하나님 앞에서 40일동안 지내면서 신앙의 깊이가 그의 얼굴에 이 세상 사람들이 눈 뜨고 볼 수 없는 환한 광채가 나게 하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심지어 모세얼굴에 수건을 씌웠습니다. 하나님의 임재와 하나님의 현존앞에 우리는 왜 사람 앞에 신앙인의 삶을 살지 못하고 있습니까? 신앙인들의 가장 깊고도 거룩한 비지니스는 하나님과의 비지니스, 하나님을 알고 그 얼굴을 뵙고 그의 영광을 보고 마치 사도 바울이 셋째 하늘에 올라가서 말할 수 없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영적인 세계를 보고 왔던 사도바울의 간증처럼 신앙의 깊이입니다.

여러분, 우린 아직 믿음의 깊이에 제대로 들어가 보지 않은 사람들일 수 있습니다. 아직도 무궁무진한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신앙생활에 바쁘고 교회생활에 바쁜 것이 있다면 주님이여, 신앙의 깊이로 들어가느라고 바빠지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것이 여러분께 드리는 축복이 될 줄로 믿습니다. 기도도 깊이가 있습니다. 예배도 깊이가 있습니다. 주님과의 관계도 세상도 없고 나도 없고 오직 주님만 우리 앞에 계실 수 있는 신앙의 깊이입니다. 베드로가 변화산에 올라가셨을 때에 얼마나 영적인 신앙의 깊이에  노출됐으면 '오주여, 여기가 좋사오니' 이 말은 영적인 체험의 깊이입니다. 주기도문 하나를 외워도 그 속의 깊이는 우리가 아직 문도 못 열고 들어가 보지 못했을 겁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인간의 이해차원으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깊이입니다. '나라이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우리 일생을 그 깊이에 들어가도 그 한 구절을 마스터를 못할 만큼 하나님 나라의 영적인 비밀은 함부로 말할 것이 못됩니다. 거기에는 진리와 하나님 영적인 세계의 깊이가 있는 것이죠. 그런데 주기도문 하나 외우는데 하나의 관례화된 형식이 되어 버렸습니까? 주기도문 많이 외우는 횟수를 가지고 신앙이 된다고 말했습니까? 중간에 외우다가도  그 뜻을 한번 되새기며 '악에서 구하여 주시옵소서. 대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밀려드는 신앙의 깊이가 주는 환희가 있어요. 한번은 저희 성도들이 베델동산이라는 곳에 올라가서 십자가 앞에서 회개하고 이런 영적인 세계가 있는 것이구나 체험했습니다. 이것은 신비만이 아니예요. 임재하신 하나님을 발견 할 때 말 할 수 없는 말씀의 깊이와 신앙의 깊이로 우리 영혼이 환희에 넘치며 성찬식을 가졌어요. 거기서 친히 못 박히신 주님, 부활하신 주님이 마치 우리에게 성찬식을 집례하는 모습을 보는 것 같았어요. 집례하던 저도 눈물이 나서 무릎을 꿇었어요. 저는 결혼식 주례가 있어서 먼저 산에서 내려왔는데 옷을 갈아입기 위해 집에 가서 문을 연 순간 아내가 저의 얼굴을 보더니 '어- 당신 무슨 일 있었구나.'놀라며 물었습니다. '맞어. 나 방금 성찬을 드리면서 나 주님 뵈었어. 주님이 우리 가운데 계셨어. 주님이 친히 떡과 잔을 우리에게 나눠 주시는 것 같았어.' 그러면서 저도 모르게 눈물이 났어요. 그랬더니 저의 아내가 '얘기 안해도 알아. 당신 얼굴을 보는 순간 당신에게 뭔가 일이 일어났다는 걸 알았어.' 제가 여러분에게 교만할려고 드리는 말씀이 아닙니다. 우리가 신앙의 깊은 문을 열려고 작정하는 순간부터 이 땅에서 도저히 상식과 지식으로 이해하지 못하는 세계가 우리 앞에 무궁무진 한 것을 기대합니다. 사모하십시다. 사람은 일과 사람과 교회와 봉사 이런 일들도 중요하지만 주님이 더 급한 것입니다. 내 남은 일생동안 신앙을 넓이로 살지 아니하고 깊이로 들어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늘 우리에게 작정되게 성령이 우리를 도와 주실것입니다. 그것은 틀림없이 후회없는 우리의 신앙으로 인도하여 주실 것입니다.


또 한가지는 사랑의 깊이입니다. 주님이 다 이루었다. 유감없이 후회없도록 살았다 하신 말씀은 사랑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죽으실 때 마지막 말 '다 이루었다'라는 말 속에 무슨 뜻이 숨겨 있을까요? 이렇게까지 사랑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그의 독생자를 이 땅에 주시기 까지 하셨습니다.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는 하나님 사랑의 깊이 때문에 그의 아들을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마지막 떠나시기 전에 '다 이루었다.'하셨습니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사랑은 그냥 우리 사랑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사랑의 깊이였습니다. 사랑이라는 말을 하기 전에 사랑의 깊이를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깊이 없는 사랑에 우리는 너무 많이 지쳤잖아요. 말뿐이고 자기 이익적이고 그냥 적당히 넘기는 그런 사랑때문에 오히려 상처입고 고단해 졌잖아요. 이제 우리에게 후회가 없는 이 시간 다 지나가기 전에 후회가 없는 인생을 살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그 깊이 있는 사랑을 본받아 우리가 하는 사랑의 깊이를 조금 더 깊게 들어갈 때 후회가 물러갈 줄을 믿습니다.

저도 한 부모의 아들, 한 아내의 남편, 아들, 딸 두 자녀를 둔 아버지, 수천의 성도를 섬겨 보기도 했습니다. 돌이켜 보면 가장 후회되는 것은 사랑한 줄 알았으나 사랑의 깊이가 없는 사랑이었습니다. 저의 아내를 정말 사랑하는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저를 사랑하느라고 저의 아내를 사랑하는 척 했던게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우리에게 보이신 사랑을 보니 그런 사랑은 아니었습니다. 그 몸을 불살라 산산조각 나셨던 그 주님. 그 사랑으로 살면 세상을 이기고 가정이 살고 우리 가정이 한번 깊이 있는 사랑에 올바로 서면 우리 자녀들이 사단 마귀한테 절대 뺏기지 않습니다. 그 비밀이 바로 사랑의 깊이입니다. 위대하고 무서운 문제입니다.  '다 이루었다.' 말씀하시고 사랑에 관한한 후회가 없으셨던 주님이십니다. 그분을 따르는 것이 우리에게 얼마나 소중한 것입니까? 딸 아이가 이제 제 품을 떠나 살게 되었을 때 주인도 없는 딸아이 빈방을 들어가 침대가 걸터 앉았는데 네 눈에서 눈물이 어찌나 흐르는지 이렇게 빨리 내 곁을 떠날 줄 알았으면 이렇게 너를 대하는 것이 아니었는데 난 너를 사랑하였지만 사랑의 깊이가 없었던 같다. 딸이 없는 그 방이 후회라는 공기로 꽉 차는 느낌을 받았어요.

여러분, 사랑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있을 때 그 사랑을 깊이로 바꾸시길 바랍니다. 예수님이 수가성 한 여인을 만났을 때 그  여인이 어떤 삶을 살았으며 어떤 손가락질을 당하며 상처입고 타락한 더러워진 존재인 줄 알면서도 사랑하나 때문에 굳이 스케줄을 바꾸고 찾아 가셨습니다. 물달라고 친근감을 보이시고 나중에는 '내가 주는 이 물을 마시면 영원히 네가 다시는 목 마르지 아니하리라.' 그렇게 말씀 하셨던 그 사랑. 저는 사랑이라고 부르고 싶지 않아요. 그것은 그 여인을 향한 사랑의 깊이였습니다. 상처 입고 고독한 인간은 그 깊이 앞에 목을 놓아 울 수 있어요. 부활한 주님을 뵙고도 배반하고 갈릴리 호수가로 도망가 있던 베드로한테 주님이 찾아가셔서 숯불 피우고 와서 먹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니가 나를 사랑하느냐.  사랑하느냐. 사랑하느냐' 세번씩이나 물으셨던 주님, 아가페라는 말로 사랑하셨어요. 니가 죽도록 깊이있게 사랑할 수 있느냐. 베드로가 사랑의 깊이 앞에 녹아져 버렸습니다. 그는 다시는 주님 앞에 돌아서지 않았어요. 수 년 후에 로마의 바티칸에서 베드로는 주님처럼 똑같이 똑바로 달려죽을 수는 없다고 거꾸로 매달려 죽으며 아마도 갈보리 십자가 언덕을 생각했을 것입니다. 사랑의 깊이는 한 인간을 이렇게 바꿔 놓을 수 있습니다. 사랑의 깊이가 조금 깊어지면 부부가 달라집니다. 신앙이 달라집니다. 식었던 사랑이 부글부글 끊어버려서 다 녹아버리고 다 이뤄버릴 것입니다.


우리 교회에 저처럼 5학년 7반에 재학 중이 집사님 한분이 계십니다. 큰 사업을 하다가 몽땅 망했어요. 그 와중에 그분은 드디어 십자가 사랑의 깊이를 체험했어요. '오 하나님의 사랑이 이렇게 나타나니.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이 분이 그 사랑의 깊이 앞에서 얼굴이 달라지고 눈빛이 달라고 가정이 달라지고 삶의 스타일이 달라지고 심지어 언어까지 달라졌습니다. 그 분의 아버님이 80세 중반 경상도 분인데 경상도 남자 분들이 어디 말씀을 많이 합니까 속은 따뜻한 지 몰라도 몇 마디로 끝나시는 분들이잖아요. 9년전에 호산나교회에서 설교 한 적 있었는데 나오시는 분마다 딱 한마디 '조았심더' 그게 다 셨어요. 경상도 아들과 아버지가 통화하면 '아버지 접니다. '어 잘있나.' '잘있심더' '아아들은?' '마 공부 열심히 하고 있습니더' '별일없나?' '별일 없습니다' 그러면 뭐 더 할 말이 없잖아요. '끊자' 이러면 끝이잖아요. 늘 이렇게 부자간에 살아왔는데 이분이 그리스도 십자가 사랑의 깊이에 끓어 올려진 후 내 아버지가 이 땅에 살아계시는 동안에 후회없도록 아버지께 드릴 말씀이 있구나 생각했답니다. 한 번은 전화해서 '아버지 접니다.' 하고 '끊자'하시기 전에 '아버님, 오늘 저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뭔데?' '아버님, 제가 아버님을 사랑합니다. 제가 아버님을 진심으로 사랑합니다.' 일생동안 들어 본 적이 없는 말을 들은 아버지가 어떡할 줄을 몰라가지고 당황하셔서 '알았다'하고 끊었답니다. 그 사건은 그 가정에 엄청난 시작이 되었습니다. 그 다음날 아침에 어머님한테서 전화가 오셨는데 '도대체 어제 무슨 얘기를 했길래 아버지가 밤새도록 잠을 못 주무시노?' 무슨 얘길 했냐고 야단치시더래요. '어머님, 제가 어제 아버님 사랑한다는 말 밖에 한 말이 없습니다.' 몇 달 후 제삿날이 와서 큰 며느리가 미국에서 제삿상 차리러 한국에 왔습니다. 다 차리고 나니까 그 아버지가 제삿상 앞에서 하시는 말씀이 '조상님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 큰 아들이 예수님 믿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오늘로 제사가 마지막입니다.' 그 말을 옆에서 듣던 큰며느리가 소리없이 눈물을 흘렸답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감동받아 운전하며 돌아오는데 왜 그렇게 통곡이 나오는지 나도 내 생전에 아버지한테 세상 떠나기 전에 한 번만 그 얘기를 할 수 있었다면 이렇게 후회하지 않을 텐데... 운전대 붙잡고 울었어요. 사랑의 깊이에 조금만 들어가 봐도 우리는 엄청난 후회없는 삶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십자가의 사랑을 체험한 자가 있다면 본받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마지막 주님이 '다 이루었다.' 이 말에는 순종의 개념이 들어가 있습니다. 순종의 깊이입니다. 순종은 깊이가 본질입니다. 순종은 내가 정한 것이 순종이 아닙니다. 내 순종을 홀로 받으실 분에게 내 자신의 삶 모든 것이 순종으로 변하는 재물이 될 때 그것이 진정한 순종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하지 않고 하나님이 보내신 대로 오셔서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하고 많은 사람의 목숨을 위하여 대속물로 목숨을 주기 위해 오셨습니다.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는 말씀은 '다 순종하였도다'하고 똑 같은 말씀인 것이다. 창조주 앞에서 피조물로 지음을 받은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몰랐으면 모르고 십자가의 사랑을 몰랐으면 모른다고 하지만 십자가의 사랑을 안 다음부터는 순종의 깊이가 있어야 합니다.


미국에서 저는 25년째 목회하고 있습니다. 한국사람들 미국에서 성실하고 열심히 이를 악물고 독을 품고 일합니다. 하여간 전력을 다하여 제일 먼저 집을 삽니다. 교회도 열심히 다니고 교회 건축도 많이하고 정말 뜨겁게 신앙생활합니다. 그런데 우리 한국사람 기질상 순종이 잘 안됩니다. 맘에 드는 거는 잘 합니다. 하지만 맘에 안 드는 거는 쳐다보지도 않고 순종 안 합니다. 순종의 선택을 항상 내가 결정하고 순종의 절대권을 가지시도록 주님을 잘 인정하지 않습니다.

순종을 시작하는 순간부터, 순종의 깊이를 손대기 시작한 순간부터 축복의  순간도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 말씀 앞에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을 조금이라도 시작하면 그 다음엔 생각지도 못했던 일들이 터지기 시작합니다. 순종의 시작이 바로 곧 축복의 시작입니다. 저희 교회에 담배 못 끊던 집사님 한 분이 계셨는데 끊어보려고 노력하는데 잘 안 끊어진다고 저한테 기도 받으러 오셨드라구요. 제가 그 때 짧은 한마디 드려서 결정적으로 끊었습니다. '집사님, 담배를 피우느냐 안피우느냐 지금까지 고민되었던 것은 지금까지 선택의 문제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진정 그리스도의 사람이라면 순종의 문제로 봐야 합니다.' 선택의 문제로 보니까 자기가 하니 안하니 쥐고 흔들었습니다. 하지만 순종의 문제로 보면 그것은 곧 결단이 되고 결단은 성화로 이끌어 갈 것입니다. 하나님의 몸된 집인데 이 몸을 거룩한 성령이 거주하는 거주지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날 반사체로 될려면 선택이 아니라 순종입니다.

그분 작은 거부터 순종하기 시작하니까 순종의 시리즈마다 축복의 시리즈로 바뀌기 시작합니다. 가정에서 소리치던 분이 서서히 자녀들의 존경을 받게 되고 교회에서도 안수집사님으로 섬기게 되었어요. 저는 교회에서 그 분 만나면 꼭 끌어안고 냄새를 맡습니다. 단순히 냄새를 맡기 위해 끌어앉는 것이 아니라 워낙 사랑스러워서 끌어안습니다. 순종을 주 앞에 시작한  한 사람이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자기를 버리고 주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작은 순종이 시작되면 큰 축복이 뒤를 이어 따라오는 위대한 신앙의 비결이 여러 성도들께 충만하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순종이 가치가 있습니다. 순종의 깊이는 놀라운 기적과 역사를 일으킵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에 나와 보니까 너무너무 손가락질 받아요. 천만명이 넘는 성도와 오만이 넘는 한국교회가 침묵하고 온 나라가 혼란 중에 온 세계가 주목하는 위기 가운데 있는 중에 한국교회의 가장 큰 특징은 침묵이예요. 지금은 순종할 때입니다. 한국교회 성도들을 지금 바로 이 때를 위하여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만들지 않았느냐. 하나님이 지금 바로 저희들에게 원하시는 일이 무엇입니까? 순종의 깊이 입니다. 주의 뜻이 이루어지길 바라십니다.

어느 미국 목사님의 수기를 소개하겠습니다. 휴스턴에 큰 교회가 있습니다. 어느 날 교회 맨 앞 자리에 백발이 성성한 한 노인 분이 앉아 있었습니다. 목사님이 그 분을 앞에 부르시더니 간증을 부탁했습니다. 노인은 인자하게 웃으면서 '수십년 전 저에게 있었던 한 사건을 오늘 비로소 소개해 드립니다. 아들에게 죽고 못사는 가장 친한 친구가 있었는데 어느 날 보트를 몰고 앞 바다에 두 아이를 태우고 나갔는데 바다에 돌풍이 불어 갑자기 그 보트가 확 밀려 나갔습니다. 그리고 갑자기 파도가 보트를 덮쳐 힘없이 뒤집어 지게 되었습니다. 자기는 어른인 지라 간신히 구명대 하나를 쥐고 정신을 차리고 보니 아들은 저쪽 아들 친구는 이쪽에서 허우적대며 있었습니다. 구명대는 하난데 이걸 어느 쪽으로 던져야 하나 갈등에 빠져 그 와중에도 기도 하게 되었습니다. 내 아들은 분명히 구원 받고 천국가는 영생의 선물을 분명히 받았는데 언제 죽어도 하나님 앞에 가는데 하지만 아이 친구는 전혀 예수님을 모르고 구원받지 못한 아입니다. 그것을 아는 내가 기도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 주의 뜻이 무엇입니까? 이 시간 내가 하나님 앞에서 어떤 선택을 하기를 원하십니까? 기도하고 난 후에 확신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아들을 보고 '아들아, 사랑한다. 우리 다시 천국에서 만날 거야.' 크게 외치고 구명대를 아들 친구한테 던졌습니다. 그 다음 아들 쪽을 돌아봤을 때 아들은 다신 볼 수 없었습니다. 여러분, 그 때 구한 제 아들의 친구가 바로 여러분의 이 교회 담임목사님입니다.' 그 순간 고민하고 기도할 것 없이 당연히 아들한테 던질 수 있었을 텐데 그 아버지는 깊이 그 순간에도 순종하였던 것입니다. 신앙을 살되 깊이있게 순종을 주 앞에 드리되 깊이 있게 그러한 순간에도 그런 제목이 갈등과 기도의 제목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저는 한국에 나와서 이런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남한은 남한대로 허덕이며  고통 속에 있고 그러나 또 다른 저쪽에서는 우리 동족들 300만이나 먹을게 없어서 굶어 죽고 30만 탈북자들이 중국에서 인신매매 당하고 팔려 다니고 있는데 굶어 죽을 뿐 아니라 복음을 들을 수 없는 지금 북한의 현 상황에 통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 권세의 구명대를 북한으로 던지길 원하오니 저들을 살려내셔서 주여 온 세계를 구할 수 있는 사도의 민족이 될 수 있도록 한국 민족을 다시 한번 일으켜 세워 주시옵소서. 정말 지금은 순종의 깊이로 들어갈 때 입니다.

아무리 세상이 급변하고 변하여도 깊이 있는 그리스도 인으로 살면 넓이를 따지지 않고 깊이를 따지면 우리는 세상을 이길 수 있습니다.

신앙의 깊이입니다.
사랑의 깊이입니다.
그리고 순종의 깊이입니다.

잊지 마십시다.

"하나님, 인간의 본성이 넓이를 자랑하기쉽고 업적을 따지기 쉽고 내가 누구인지를 앞세워보지 않고는 삶의 재미가 없는 이 속성들이 우리 모두에게  있습니다. 우리를 십자가 그리스도 앞에 새사람 만들어 주시고 우리에게 깊이가 우리 삶에 축복이 되게 하셨나이다. 주여 이제 우리 모두 한 마음이 되어 주 앞에 기도하오니 이 어려운 때에 넓이로 신앙생활하지 말고 깊이로 시작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위기의 때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사랑의 깊이 순종의 깊이로 가정을 살리고 우리 젊은 세대들을 살려내고 위기에 빠진 민족을 구해내게 주여 한국 교회를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십자가 사랑의 깊이로 우리를 구하여 주시옵소서.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복하며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출처/극동방송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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