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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누구냐 (행 19:11-16)

by 【고동엽】 2022. 10.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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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누구냐   (행 19:11-16)

1. 들어가는 말

여러분, 만약 이 시간 누군가가 여러분에게 “너는 누구냐?” “당신은 누구입니까?”라고 질문한다면 여러분은 무엇이라고 대답하겠습니다. “너희는 누구냐?” 이 질문은 거창하게 말하면 자기 정체성(identity)과 관련된 질문이지요. 그런데 사실 이런 질문에 선뜻 쉽게 대답하는 사람이 그렇게 많은 것 같지는 않습니다. 아주 쉬운 질문인데도, 막상 우리는 이런 질문을 받으면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를 몰라 당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우스개 소리가 있습니다. 사오정과 손오공이 대학을 졸업하고 입사시험을 치르러 어느 회사에 갔습니다. 손오공이 먼저 면접장에 들어갔습니다. “15번 손오공입니다.” 면접관이 이런 질문들을 합니다.
“자네 축구 선수 중에 누구를 제일 좋아 하는가?” “예, 옛날에는 차범근이었는데 지금은 박주영입니다”
“산업혁명은 언제 시작됐나?” “예, 18세기입니다”
“하나님은 있다고 믿는가?” “예, 과학적으로 증명은 안 되었지만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면접을 마치고 나간 손오공이 밖에서 면접순서를 기다리면서 벌 벌 떨고 있는 사오정을 보고는, 불쌍해서 첫 번째 질문부터 순서대로 잘 가르쳐 주었습니다. 사오정은 열심히 질문과 답을 순서대로 외우면서 자기 차례가 되기를 기다렸습니다. 마침내 자기 이름이 호명이 되자 사오정은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들어가자마자 사오정은 “17번입니다”라고 자기 번호를 말했습니다.
그런데 사오정이 자기 이름을 말하지 않자, 심사위원이 묻습니다.
“자네 이름이 뭔가?”
“예, 옛날에는 차범근이었는데, 지금은 박주영입니다.”
“뭐? 자네 언제부터 그렇게 되었나?”
“예, 18세기부터입니다.”
“자네 혹시 바보 아닌가?”
“예, 과학적으로 증명은 안 되었지만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누군가가 만든 우스개 소리이지만, 사오정의 모습은 어쩌면 자신이 누군지 모르고 살아가는 오늘 현대인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우리들도 의외로 나 자신을 잘 모르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철학가 소크라테스가 “너 자신을 알라”는 유명한 질문을 했지만, 우리는 사실 내가 누구인지를, 나의 정체성을 잘 모르면서 지내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떻습니까? 오늘 우리들은 내가 누구인지 알고 있습니까? 여기 오늘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에도 “너희는 누구냐?”라는 질문 앞에 그 대답을 못한 체 당황해 하는 사람들을 볼 수 있습니다.  

2. 몸말
1) 본문의 배경

그들은 바로 스게와라는 유대인 제사장의 일곱 아들들입니다. 오늘 본문 사도행전 19장은 사도 바울이 에베소에서 교회를 개척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며, 또한 여러 가지 이적과 기사를 일으킨 사역을 소개하고 있는 곳입니다. 바울은 에베소에서 사역을 하는 동안 성령의 충만함에 힘입어 세 가지 중요한 사역을 했습니다. 제일 먼저 바울은 주의 제자들과 함께 회당에 들어가 담대하게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강론하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특별히 두란노 서원을 세워서 그곳에서 제자들을 따로 세우고 2년 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집중적으로 가르치고 양육을 하였습니다.  말씀 사역, 이것이 바울의 에베소에서의 가장 중요한 첫째 사역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성령의 능력에 사로잡혀, 능력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무장한 바울에게는 여러 가지 놀라운 은사들이 나타나게 되었는데, 그것은 바로 치유의 능력이었습니다. 바울의 치유능력이 얼마나 놀라웠는지, 오늘 본문은 기록하기를 “희한한(놀라운) 능력”(11절)이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또 12절에서는 “심지어 사람들이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그 병이 떠나갔다”(11-12절)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정말로 그를 통하여 나타난 하나님의 능력은 너무나 희한한 능력이었습니다. 바울이 쓰던 손수건을 환자에게 갖다 대어도 병이 낫고, 그가 천막을 만들 때  입던 앞치마를 갖다 대어도 병이 떠나갔습니다. 그러므로 치유사역, 이것이 에베소에서 행한 바울의 둘째 사역이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의 사역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세째로 그에게는 중요한 사역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사탄의 세력을 물리치는 축사(귀)사역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을 우리가 다시 읽어보면, 바울을 통해서 나타난 능력이 얼마나 희귀한지, 바울의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들에게 얹으면 병이 나을 뿐만 아니라, 악한 귀신들도 떠나갔다고 했습니다(12절).
  
그런데 그 당시 에베소를 중심한 소아시아 지역에는 우상을 숭배하는 신전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특별히 에베소에는 아데미 신전을 중심으로 많은 우상들이 세워져 있었는데, 자연히 에베소에는 마술을 하는 사람들, 주문을 외우는 주술가들, 그리고 소위 귀신을 쫓아내는 무당들(Exorcist)들이 많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에베소에서 복음을 전할 때에 이런 모든 종류의 악한 세력들과 능력대결(power encounter)을 했던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바울이 에베소 교인들에게 한 이런 말씀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엡 6:12). 이렇게 바울이, 후에 에베소 교인들에게 편지할 때에, 그의 서신에서 악한 세력들과의 영적인 전쟁을 언급하고 있듯이, 많은 악한 영적인 세력들이 모여서 사람들을 공격하던 곳이 바로 에베소였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많은 악한 영들이 그 세력을 확대하고 있던 에베소에는 그 중에서도 마술과 악령에 의한 마법이 아주 강한 곳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배후에는 사탄의 세력이 있었고, 따라서 귀신들의 활동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귀신들의 힘을 빌려 마술을 하던 마술사들 가운데 바울의 사역을 눈여겨 본 이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보니까 바울의 능력이 참으로 대단합니다. 바울이 병도 낫게 하고, 귀신도 쫓아내는데, 바울이 하는 이런 일들이 그들이 보기에도 아주 희한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도대체 바울이 어떤 주문을 외우길래 저렇게 병도 금방 낫고, 악귀들도 쫓겨나는가?” 하는 궁금한 마음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바울의 사역을 유심히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생각하기를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귀신아! 나가라”고 외치는 바울의 주문에, 악귀들이 도망간다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래서 그들 가운데 일단의 유대인 마술사들이 바울의 흉내를 내기 시작했습니다.

13절을 보십시오. “이에 돌아다니며 마술하는 어떤 유대인들이 시험적으로 악귀 들린 자에게 대하여 주 예수의 이름으로 불러 말하되, 내가 바울의 전파하는 예수를 빙자하여 너희를 명하노라 하더라”
  
그 마술사들은 귀신들린 자들에게 바울의 흉내를 내면서 시험을 해 본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 가운데 스게와 라는 유대 제사장의 일곱 아들들이 있었습니다. 한번은 이들도 다른 마술사들의 흉내를 내면서 귀신에게 떠나갈 것을 명하였는데, 이게 웬일입니까? 귀신이 나가기는 커녕 오히려 이렇게 대꾸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악귀가 대답하여 가로되 예수도 내가 알고, 바울도 내가 알거니와 너희는 누구냐?”(15절) 그들은 당황했습니다.

분명히 바울이 하는 것을 보고 그대로 흉내를 내었는데, 예수의 이름으로 명령했는데, 악귀가 나가지를 않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오히려 악귀가 그들을 공격해 왔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아주 간단하게 기록되어 있지만, 그 장면을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아마도 스게와의 아들들은 당황한 나머지 별의별 소리를 다 질렀을 것입니다.

“베들레헴에서 나서 골고다에서 죽으신 예수의 이름으로 나가라”고 해보기도 하고,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나가라”를 외치기도 하고, 혹은 “갈릴리에서 이적과 기사를 일으킨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나가라”고 떠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악귀는 도무지 나가지 않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들에게 달려들어 공격을 해 왔습니다. 마침내 스게와의 아들들은 악귀들에게 정신없이 얻어맞고는 입고 있던 겉옷마저 찢기고 빼앗긴 체, ‘다리야 날 살려라’ 하고 도망을 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2) 왜 이런 수모를 당하였나?
  
그렇다면 무엇이 잘못된 것입니까? 스게와의 아들들은 왜 이런 수모를 당하게 된 것입니까? 우리는 오늘 본문의 사건을 통해서 아주 중요한 한 가지 메시지를 발견하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하나님과의 관계, 예수님과의 관계가 바로 서 있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스게와의 아들들은 비록 제사장의 아들들이었지만, 그들은 하나님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그들은 제사장의 아들들로서 경건의 모양은 있었는지 모르나, 주님과의 관계에서 오는 경건의 능력은 전혀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바울의 놀라운 능력은 도대체 어디서 비롯된 것이었습니까? 바울의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갖다 대어도 병이 낫고, 악귀들이 도망가는 이런 놀라운 능력의 근원은 어디서 온 것이었습니까? 그것은 바울 자신의 능력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주신 능력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것을 분명하게 선언합니다. 11절을 보세요.

“하나님이 바울의 손으로 놀라운 능력을 행하게 하시니”

능력의 주체는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희한한 능력은 바울이 하나님과 맺은 관계에서 비롯된 것이지, 일종의 마술과 같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여러분, 이렇게 신앙은 우리를 위하여 고난당하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신 그리스도와의 관계 속에 들어가는 것이며, 바로 그 관계에서 놀라운 능력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스게와의 아들들은 이것을 몰랐습니다. 이것을 착각했습니다. 그들이 바울과 같은 놀라운 능력을 행하려면, 무엇보다 먼저 그들은 하나님과의 관계, 주님과의 관계에 들어가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주님과의 관계는 아랑곳없이 그저 예수님의 이름만을 주술적으로 외우면 되는 줄도 생각했습니다. 한 마디로 그들은 예수님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악귀들에게 그런 수모를 당한 것이었습니다.
  
악귀들이 “너희는 누구냐?”라고 물었을 때, 적어도 그들은 다른 것은 다 몰라도, 예수님과 그리고 바울과의 관계만은 분명히 설명할 수 있어야 했습니다.

“예수님은 나의 주님이시다. 예수님은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목숨까지 내어 놓으신 나의 주님이시다. 그리고 바울은 그 예수님의 제자요, 우리의 동역자다.”

이렇게 대답할 수 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과도 바울과도 아무런 관계가 없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지금 자신들이 부르고 있는 예수님이 누구신지 전혀 모르고 있었고, 예수님께서 바울을 비롯한 제자들에게 위임하신 능력에 대해서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단지 주술적으로 예수님과 바울의 이름을 인용하고 있었습니다. 본문 13절에 마술하는 유대인들이 악귀 들린 자에게 말하되, “내가 바울이 전파하는 예수의 이름을 의지하여 너희에게 명하노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여기 “명하노라”는 단어는 “호르키조”라는 말로 “부탁한다” “애원한다”(막 5:7절 참조)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 동사가 성경원문에는 명령형으로 사용된 것이 아니라, 단순 현재 직설법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즉 “내가 애원한다. 내가 부탁한다”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는 악한 귀신을 쫓아내기 위한 단호한 명령이 아니라, “얘, 내가 예수의 이름으로 부탁하는데, 좀 나가줄래?”라는 일종의 타협이요, 애원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이, 단지 예수의 이름으로 이교적인 축귀 관습을 따라 주술을 외우듯 인용하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러기에 그들은 “내가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알거니와 너희는 누구냐?”라고 묻는 악귀들의 질문에 아무런 대답도 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악귀들은 그들이 예수님과 아무런 관계도 없고, 바울과도 아무런 관계가 없는 그런 자들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오히려 공격을 가한 것입니다.  
    

참 안타까운 것은, 인류 역사를 통하여 사람들은 끊임없이 예수님의 정체성에 대해서, 예수님의 하나님 되심에 대해서 믿지 못하고 의심을 해 왔습니다. 그런데 아이러니칼 하게도, 오히려 귀신들은 예수님의 정체에 대해서 그 어떤 의심도 가지지 않았습니다. 귀신들과 악한 영들은 오히려 예수님이 “하나님의 거룩한 분”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눅 4:34), 그 분 앞에서 두려워 떨었습니다. 우리가 복음서의 기록을 보면 여러 곳에서, 오히려 귀신들은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알고 고백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예를 들어 눅 4장 31-37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갈릴리 가버나움에서 사역을 하실 때에, 한 더러운 귀신이 예수님을 보고는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눅 4:34)라고 소리를 지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귀신들은 예수님을 보자마자 그 분이 누구인 줄 알았습니다.


또한 막 5장 1-20절에도 보면 군대 귀신이 들어 고생을 하던 사람을 고쳐주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볼 수 있는데, 거기에도 귀신은 예수님을 보고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나와 당신이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원하건대 나를 괴롭히지 마옵소서”

라고 애원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귀신들은 하나 같이 다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앞에서 믿고 떨었습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약 2장 19절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네가 하나님은 한 분 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약 2:19)

오늘 본문 15절에서도 악귀가, “내가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안다”고 했습니다. 우리 성경은 모두 ‘안다’고 번역을 했지만, 여기서 악귀가 예수님을 안다고 한 단어는 ‘기노스코’인데, 이는 ‘본질을 속속들이 알다’라는 뜻으로 예수님의 정체에 대해서 정확하게 알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바울을 ‘안다’고 할 때의 단어는 ‘에피스타마이’인데, 이는 ‘안면이 있다’는 뜻으로, 바울이라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몇 번 보아 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귀신들과 악한 영들은 예수님이 누구신지 정확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귀신들과 악한 영들은 예수님의 정체에 대해서 그 어떤 의심도 하지 않는데, 오히려 사람들은 계속해서 예수님이 누구신지에 대해서 의심하고, 믿지 않습니다. 아무튼 오늘 본문의 스게와의 아들들은 “내가 예수도 확실히 알고, 바울도 안면이 있어 아는데, 그런데 너희는 누구냐?”라고 도전하는 악귀의 질문에 대답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주술처럼 인용하고 있는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전혀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귀신들조차도 알고 있고, 귀신들조차도 믿고 떠는 예수님을 알지 못하였고, 예수님과 아무런 관계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제사장의 아들들이었는데도 말입니다.  

3) 나는 누구인가?
  
사랑하는 동안교회 성도 여러분,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어떻습니까? 오늘 저와 여러분은 예수님과 어떤 관계에 있습니까? 혹시 오늘 우리의 모습이, 이 스게와의 아들들과도 같은 모습은 아닙니까? 겉으로는 제사장의 아들들이요, 그래서 하나님을 아는 것 같고, 예수님과 관계가 있는 사람들인 것처럼  보이지만, 교회에 출석하는 교인인 것처럼 보이지만, 혹시 우리의 속사람은 오히려 주님과 별로 상관이 없는 것은 아닙니까?
  
만일 오늘 저와 여러분이, 사탄으로부터 “내가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아는데, 너는 누구냐?”라는 이런 공격적인 질문을 받는다면, 오늘 우리는 무엇이라고 대답할 것입니까? 우리는 내가 누구인지 분명하게 대답할 수 있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로 하여금 바로 이 질문에, 분명하게 대답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하여 우리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누구인지 분명하게 가르쳐 주시기 위하여 예수님께서는 저 2천년 전, 십자가의 길, 예루살렘의 길로 들어가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길을 가시면서 가르쳐주신 우리의 신분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우리는 하나님의 놀라우신 사랑을 받는 자들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누구인지를 말해주는 답은 사실 여러 가지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죄인들입니다. 또 우리는 이전에는 하나님과 원수 된 자들이었습니다. 우리는 경건치 않은 자들이었습니다. 우리는 죄로 말미암아 죽어 마땅한 자들이었습니다. 우리는 진노의 자식들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우리는 지옥의 땔감으로 밖에 쓸 수 없는 그런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런 우리들을 불쌍히 여기시사, 우리를 살리시려고 당신의 외아들을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우리의 모든 죄를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하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하나님께서 가장 사랑하는 그의 자녀로 삼아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을 너무나 사랑하셔서, 십자가에서 그 귀한 피와 물 한 방울까지 다 쏟으셨습니다. 그리고 저와 여러분을 살려 주셨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요한일서에서 하나님의 이 사랑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요일 4:9-10)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 1:12)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저와 여러분을 죄와 죽음에서, 멸망에서 구원하시고, 우리를 그의 자녀삼아 주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고, 온갖 조롱과 멸시와 천대를 당하셨습니다. 그는 우리의 허물 때문에 찔림을 당하셨고, 우리의 죄악을 사하시기 위하여 대신 징계를 받으셨고, 우리의 연약함과 상함을 고치시기 위하여 채찍에 맞으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십자가에서 돌아가셨고, 사흘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우리는 인간의 말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난 이 하나님의 사랑을 아무리 설명을 해도 다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사야는 언젠가 이 하나님의 사랑을 이렇게 설명한 적이 있습니다.

“오직 시온이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나를 버리시며, 주께서 나를 잊으셨다 하였거니와,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 너의 성벽이 항상 내 앞에 있나니”(이사야 49:14-16)

사랑을 말할 때 흔히 가장 깊은 사랑을 어머니의 사랑으로 비유합니다. 여기 이런 어머니의 사랑 이야기가 있습니다.

지난 1995년 우리 한국에서 삼풍백화점이 무너져 500여명의 귀한 생명들이 희생되었는데, 그 해 성탄절이 가까운 때에 舊소련 연방의 아르메니아 지역에서 커다란 지진이 일어난 적이 있었습니다. 그 때에 그 엄청난 지진 때문에 무려 55,000명의 사람들이 희생되고 말았습니다. 그 때에 한 어머니와 딸이 무너진 건물더미에 함께 갇히고 말았습니다. 그 어머니의 이름은 수산나였고, 딸의 이름은 구이안(Guian)이었습니다.

몇 시간이 지났을까? 조금도 움직일 수 없는 공간에 갇혀 있는 모녀의 몸은 점점 차갑게 식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언제나 구조의 손길이 임할지 알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어린 딸은 무서워서 자꾸 울기 시작했습니다.
“엄마, 무서워” “엄마, 우리 여기서 못나가는 거야?”
“아니야, 걱정하지 마라. 조금만 기다리면 아저씨들이 우리를 금방 찾으러 올 거야”
“만일에 아저씨들이 우리를 찾지 못하면 어떻게? 엄마, 그러면 우리 여기서 못 나가는 거야? 우리 여기서 죽는 거야?”

무서워 떨고 있는 딸을 향하여 엄마는 계속해서 우리는 괜찮을 것이라고 위로하였습니다. 그러나 밤이 되면 어두운 공간은 그야말로 칠흙같이 어두워 아무 것도 볼 수 없었습니다. 그들이 애타게 기다리던 구조의 손길은 닿지 않았고, 그렇게 사흘이 지났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아이는 공포와 허기에 지쳐 점점 그 힘을 잃어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목이 마른 아이는 엄마에게 계속해서 먹을 것과 물을 달라고 울면서 보채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모릅니다. 이제는 아이도 엄마도 배고픔과 목마름으로 인하여, 그 생명의 불꽃이 가물가물 사라져 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어머니의 손에 무엇인가 예리한 것이 잡혔습니다. 그것은 건물이 무너질 때 쏟아진 유리조각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엄마는 그 유리조각으로 자신의 팔뚝을 그었습니다. 그리고는 아이에게 자신의 피를 마시게 했습니다. “구이안아, 여기 물이 있다. 이 물을 마셔라”라고 그 어머니는, 자신의 몸에서 흐르는 물과 피를 아이에게 마시게 했습니다. 그리고 가물가물 의식이 흐려져 가던 아이는, 어둠 속에서 엄마의 몸에서 흐르는 물과 피를 받아 마시고는 비로소 갈한 목을 축이고, 의식을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또 시간이 흘러 마침내 구조대가 이 두 모녀가 갇혀 있는 곳을 지나다가, 아이의 울음소리를 듣고, 건물 더미들을 치웠습니다. 구조대가 건물 더미들을 다 치우자, 거기에는 비교적 건강한 모습을 한 여자아이가 울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아이의 옆에는 모든 물과 피를 다 흘려, 싸늘한 시체가 되어 있는 엄마가 평화스러운 모습으로 누워있었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어머니의 희생적인 사랑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이사야 선지자의 말씀에 의하면, 세상에 자식에 대한 가장 진한 사랑이 어머니의 사랑인데, 그 어머니의 사랑보다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진한 것이, 바로 하나님의 우리에게 대한 사랑이라는 말씀입니다. 세상의 부모들도 때로는 전쟁과 같은 극한 상황에서는, 그렇게도 사랑하는 자식들을 버릴 때도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을 결단코 버리지 않으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기에 주님께서는 저와 여러분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셨고, 그리고 십자가에 물과 피를 아낌없이 다 쏟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모든 죄의 값을 대신 치러주셨습니다. 내가 달려야 할 십자가에 그가 대신 달리셨습니다. 내가 찔려야 할 창에 그가 대신 찔리셨습니다. 내가 맞아야 채찍을 그가 대신 맞으셨습니다. 내가 당해야 할 멸시와 천대를 그가 대신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내가 흘려야 할 물과 피를 그가 대신 흘리셨습니다. 아낌없이, 최후의 한 방울까지 다 흘리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우리 하나님께서는 바로 저와 여러분을 그렇게도 사랑하시고 계십니다. 나는 누구입니까? 우리는 이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들입니다. 우리가 다른 어떤 대답을 잘 못해도 좋습니다. 그러나 이 대답만큼은 분명히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저와 여러분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받은 자들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제가 지난 2월 말에 갑자기 심한 복부의 통증으로 밤에 병원 응급실에 실려 갔습니다. 병명은 급성 담낭증이었습니다. 3일 동안 너무 통증이 심해서 병원을 두 곳이나 갔는데, 그 원인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그 사이에 담낭의 염증은 더욱 심해져 갔고, 세 번째 병원인 현대 아산 병원에 갔을 때에는, 담낭이 염증과 담석으로 인해 부어서 터지기 일보직전이었습니다. 그래서 응급실에서 옆구리를 뚫어서 긴급조취를 하였고, 결국 수술을 통해서 담낭(쓸개)을 완전히 제거하게 되었습니다. 수술 후에 한 이틀은 통증이 심해서 매우 고통스러웠는데, 토요일 밤에 통증으로 인하여 잠을 못 이루다가 기도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기도 중에 깜빡 잠이 들었는데, 이런 꿈을 꾸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저를 높은 산에 세워놓고는 제게 휘황찬란한 우주의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더 이상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그 수많은 별들과 함께 형형색색의 아름다움과 신비함을 간직하고 있는 우주를 보여주시다가, 갑자기 하나님께서 제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들아, 우주가 참으로 놀랍고 신비스럽지? 그런데 내가 너를 이 온 우주보다도 더 사랑한단다. 그래서 내가 너를 위하여 나의 외아들을 이 세상에 보냈단다.” 저는 꿈속에서 그 말씀을 듣고 얼마나 감격했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번에는 제게 온 삼라만상의 아름다운 것들, 꽃들과 푸른 들과 물과 산 등의 너무나 아름다운 자연을 보여주시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는 또 말씀하시기를 “아들아, 삼라만상이 너무 아름답지. 그런데 내가 이 모든 아름다운 것들보다 너를 더 사랑한단다. 그래서 내가 내 아들 예수를 너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게 했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 자리에서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저는 일어나 밤새도록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올려드렸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을 이토록 사랑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이 너무나도 사랑스러워서 견디지를 못해 하십니다. 그래서 이 사랑을 두고 스바냐 선지자는 이렇게 노래한 것이 아닙니까?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습 3:17)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됩니다. 내가 누구인지? 나는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라는 사실을 언제 어디서나 잊어서는 안 됩니다.

3. 나가는 말

사랑하는 동안교회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 오늘 이 주님의 사랑을 다시 한번 깊이 묵상하십시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나와 하나님의 관계, 나와 우리 주님과의 관계를 다시 한번 확인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내가 너를 얼마나 사랑하는 줄 아느냐?”고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사탄이든 누구든 “너는 누구냐?”고 우리에게 물을 때,

“나는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다. 예수님은 나의 주님이시고, 주님은 지금도 나를 이 세상에서 나만을 사랑하듯이 나를 사랑하신다. 그리고 나도 주님을 그렇게 사랑한다”

라고 우리가 담대히 외치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다른 어떤 대답은 오늘 설교 처음에 소개한 사오정처럼 잘못해도 괜찮습니다. 그러나 이 대답만큼은 분명히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이 대답을 제대로 할 수 없다면, 우리의 삶과 신앙생활은 아무런 의미가 없어집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다함이 없는 사랑을 먼저 받은 우리가, 아직도 이 사랑을 깨닫지 못하여, 신음하며, 죄와 사망 가운데서 방황하고 헤매고 있는 자들을 향해 나아가 “하나님이 당신을 사랑하십니다”라고 외치라고 말씀하십니다.  

출처/주승중 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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