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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으로 드리는 영혼의 기도 (창세기 32장 30~ 35절)

by 【고동엽】 2022. 10.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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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으로 드리는 영혼의 기도  (창세기 32장 30~ 35절)  

12년간 매년 전 세계 고통 받는 아이들을 만나기 위해 수십 시간씩 비행기를 타고, 장거리 흙길을 달리며, 사막을 건너가 만난 아이들의 웃음소리, 눈물과 신음소리를 하나도 빠짐없이 가슴에 찍어두고는 그 이야기들을 담아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는 제목의 책을 낸 영화배우 김혜자씨, 그는 남대문 교회 권사님입니다. 권사니까 얼마나 신앙생활이 오래 되었고 인정받았을까요?  그런데도 놀랍게도 그 권사님은 방송가에서 유명한 골초였습니다. 심지어는 성경을 읽으면서도 담배를 피웠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담배 냄새가 싫더랍니다. 그래서 담배를 끊었습니다. 방송가에서는 그 일로 화제가 되었습니다. 담배를 끊고 권사님이 미국에 있는 딸한테 전화하다가 그 사실을 알렸습니다. "얘야, 이상한 일이다. 담배 냄새가 갑자기 싫어졌다. 그래서 담배를 끊었다."

그 얘기를 듣고 딸이 갑자기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알고 보니까 딸이 엄마가 담배를 끊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매달리는 3개월 작정 새벽기도를 드렸다고 합니다.
권사인 엄마의 담배를 끊게 해 달라는 딸의 기도를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순수하고, 깨끗하고, 하나님 뜻에 합당한 기도입니까? 그 기도에 응답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은 먼저 딸에게 기도할 간절한 마음부터 주셨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무엇인가를 이루기를 원하십니다.
그 일을 이루기 위해서 먼저 기도할 사람을 찾으십니다.  그리고 기도에 응답하심으로 일을 이루기를 기뻐하십니다.  문제가 없기를 기도하지 마시고 문제 속에서 기도를 배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성경의 믿음의 인물들은 모두 기도의 사람입니다. 그만큼 하나님과 긴밀한 교제를 가졌다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모세도 예외가 아닙니다. 그는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무릎 꿇어 기도했습니다.  우리는 출애굽기 32장을 통해서 모세가 드린 두 개의 기도문을 보게 됩니다.  하나는 시내산위에서 드린 기도이고 또 하나는 산 아래로 내려와 백성들의 현실을 보고 백성들로 하여금 헌신케 한 뒤에 다시금 하나님께 올라가 드린 사죄를 위한 기도입니다. 그런데 그 모든 기도가 다 백성들을 위한 기도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렇게 질문할 수 있습니다. 아니 이미 산 위에서 기도했지 않은가? 하나님께 백성들에게 화를 내리지 마시도록 기도하였고 그 결과 하나님께서 뜻을 돌이키시어 말씀하신 화를 내리시지 않으셨는데 왜 또 다시 이렇게 백성들을 위하여 사죄의 기도를 드려야 하는가? 하나님이 용서하심을 제대로 믿지 못한단 말인가요? 아니 그렇지는 않습니다. 이미 진노를 거두신 하나님의 은혜를 목격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모세가 이렇게 기도드린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죄악된 현실을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산 위에서 내려왔을 때 백성들이 만든 송아지와 그들이 그 앞에서 춤추며 방자하게 뛰노는 것을 보았습니다. 백성들은 이방 종교의 제사 의식에서와 마찬가지로 우상 앞에서 벌거벗고 광란의 축제를 지낸 것입니다. 그런데 백성들을 방자하게 한 아론은 모세의 질책에 구구한 변명을 하며 자신이 져야 할 책임을 백성들 편으로 은근히 떠넘겼습니다. 백성들이 방자하게 된 결과 원수에게 조롱거리가 된 것입니다.
사실 그 누구보다 아론이 책임이 제일 커서 죽음을 면할 수 없었지만 그래도 하나님이 그에게 제사장으로 세워주실 것을 말씀하였기에 그렇게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죄악된 현실은 참담하고 심각했습니다. 비록 레위 사람들이 헌신되어  3,000명을 제거했지만 그것으로 다 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백성들 가운데는 이러한 일에 반감을 갖는 사람도 있을 수 있고 아직 자신들의 죄악이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 모로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저들은 죄의 현실에 부딪히면 또 다시 죄의 자리로 나갈 수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현실 앞에 모세는 하나님 앞에 다시 기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전과 같이 사십 주야를 여호와 앞에 엎드려서 떡도 먹지 아니하고 물도 마시지 아니하면서 아론을 위하여, 민족을 위하여 기도드렸습니다. (신9:18,20)

여러분 우리가 드리는 기도는 두 종류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하나는 피상적, 형식적, 습관적인 기도, 자기 과시적인 기도입니다.

그리고 하나는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실제적이고 간절한 영혼의 기도입니다. 사도바울은 누구보다 동족들의 죄악을 보았습니다. 집요하게 가는 곳마다 따라다니며 선교를 방해하고 하나님의 대적하는 저들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저들을 생각하면서 화를 낼 수도 있었고 치를 떨 수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어쨌든  손 좀 봐달라고 기도할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저들을 생각하며 간절한 영혼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왜냐하면 저들을 통해서 그 옛날의 자신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았습니다. 바울도 사울이었을 때 그렇게 극성스럽게 성도들과 교회를 박해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자신을 벌하지 않으시고 빛으로 찾아오시어 구원해 주시고 사명을 주셨습니다. 이러한 주님의 사랑을 생각할 때에 동족들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동족을 위해 기도드렸는데 그에 관한 것이 로마서 9:1~3, 10:1절에 다음과 같이 나와 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나에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와 더불어 증언하노니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형제들아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니 곧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함이라 (롬9:1~3,10:1)
우리는 이번에 자신들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무고한 사람들도 납치하고 억압하고 죽이는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인 탈레반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이 민족의 비춰지는 한국교회의 현실을 보았습니다. 민족의 기대에 어긋난 한국교회는 지금 엄청난 질책을 받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에 틈을 타 한국교회를 무참히 짓밟고 선교를 막아버리는 사탄의 궤계도 보게 됩니다. 또한
주님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교회에 무참히 돌팔매질을 하는 이 민족의 영적인 상태도 보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열방과 선교를 위해, 아프칸의 평화를 위해서 그리고 이 민족과 한국 교회를 위해 간절하게 기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또 우리는 대가없이, 목숨을 걸고 선교와 봉사를 위해 헌신하는 이들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물론 선교에 지혜롭게 하는 면이 요구되지만 그래도 전 세계에 봉사하는 사람들의 대다수가 우리 크리스천이라는 사실을 이번 일을 통해서 더욱 알게 됩니다. 어쨌든 우리는 해외에 나가 봉사하며 선교하는 이들을 위해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더욱 체험적인 기도를 위해 고통의 현실, 죄악된 현실에 부딪쳐야 합니다. 현장을 가져야 합니다. 봉사의 현장, 전도의 현장입니다. 그 현장이 있을 때 우리는 더욱 깨어 기도하게 됩니다.

이번에 온누리 지체들이 와서 뜨겁게 기도하며 귀한 사랑의 땀을 흘리며 뜨겁게 헌신하였습니다.  이들의 사역을 아웃리치(outreach)라고 합니다. 아웃리치란 보다 멀리 미치다, ~의 밖에까지 퍼지다, 넘다 (손·팔을) 앞으로 내밀다 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이들은 온누리교회, 서울이라는 경계를 넘어 문경까지 사랑의 손을 뻗치고 내민 것입니다. 이곳 문경이라는 곳에 선교의 현장을 두고 귀한 사역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에게는 구체적인 기도의 현장이 생긴 것입니다. 바라기는 이제 오늘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아이들을 가슴에 품고, 남부시민교회, 문경을 가슴에 품고 기도하는 온누리 지체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계속 좋은 관계가 이어지기 바랍니다. 재작년 총각 처녀였던 배영안, 김미연 두 선남선녀가 결혼을 하고 요셉이라는 튼튼한 아들까지 낳아 이렇게 같이 왔습니다.  계속 이렇게 교제가 계속되는 것이 감사하고 아름다운 일입니다.

물론 우리도 기도할 제목이 생겼습니다. 온누리 교회를 위해서, 헌신한 귀한 지체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더욱 온누리가 글자 그래도 온누리를 위해 헌신할 수 있도록, 주님의 꿈, 비전을 가지고 주님의 복음을 민족의 가슴 가슴에, 열방에 전할 수 있도록 말입니다.

그러면 모세는 어떻게 기도했습니까?
생명을 걸고 영혼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만큼 간절하게 원한 것입니다.

바울도 생명을 내 걸 정도로 원하는 바가 있었습니다.  바로 복음을 위해 목숨을 걸었습니다.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행20:24절)

여러분은 목숨을 걸 일이 있습니까? 있다면 과연 무엇을 위해서 입니까?
주님을 위해, 영혼을 위해, 복음을 위해, 주님의 몸된 교회와 주님의 사랑을 전하기 위해서입니까? 아니면 그 어떤 것입니까?

이번에 탈레반 무장 세력에게 무려 10발의 총격을 받고 피살된 것으로 전해진 배형규목사는 신학교 시절부터 주님의 말씀에 따라 이웃사랑과 봉사활동에 큰 애착을 가졌던 '사랑의 전령사'였습니다. 배 목사는 외지에서 음식을 잘 못 먹고 소화가 잘 안 되는 등 자주 고생하였는데 4년 전 지병인 폐질환으로 생명이 위독할 지경에 이르러 1년간 안식년을 갖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배 목사는 병이 완치된 뒤 교회로 다시 돌아와 청년회를 이끌고 아프간. 우간다 등 해외 오지 봉사활동에 매년 2차례 이상 나서는 등 더욱 왕성한 활동을 펼쳐왔고 지난 4월 방글라데시 봉사 활동을 다녀왔으며, 이번 아프간 봉사 활동을 마치고 돌아온 뒤에는 올해 안에 다시 아프리카 봉사 활동을 떠날 계획이었던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그리고 배 목사의 가족들은 고인의 소신에 따라 장기를 안양의 모 병원에 연구용으로 기증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배형규목사는 몇 해 전 자신이 가진 모든 것으로 이웃을 위해 내놓고 싶다면서 시신을 기증했습니다. 그 부인도 얼마 전 백혈병 환자에게 골수를 이식해 주었는데 기증자의 신분을 알려달라는 환자의 끈질긴 요청에도 끝내 신분을 밝히지 않은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가 이번에 아프가니스탄을 방문한 것도 어려운 이웃들을 볼보겠다는 평소의 지론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아프간을 방문하기에 앞서 아프간 국민들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그들의 아픔을 보다 세심히 살피며 현지의 문화를 이해하기 위해 청년부원들과 매 주일 스터디그룹 활동을 하면서 최선의 준비를 했던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그리고 그는 아프간에서 귀국한 뒤엔 아프리카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루라도 빨리 현지를 방문하길 원했습니다. 하지만 이역만리, 아프가니스탄에서 생을 마감한 배형규목사의 '따뜻한 비전'들은 이제 남겨진 우리들의 몫이 되어 버렸습니다. 아마 배목사는 누군가 죽어야 한다면 함께 같던 이들 중에 자신이 죽기를 바랐을 것입니다. 저도 그럴 경우에 처해진다면 다른 누가 아닌 제가 죽기를 바랄 것입니다. 예레미야 22장 10절은 죽은 자(요시야)를 위하여 울지 말고 그를 위하여 애통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서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가시던 예수님은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이제 우리는 죽은 자를 위해서 울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자들을 위해서 그리고 바로 우리 자신들과 우리 후손들을 위해 울어야 할 것입니다. 남은 22명이 무사하게 귀환할 수 있도록, 그리고 우리 자신들의 안일함과 죄악을 애통하면서 주님께 뜨겁게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영혼의 기도를 드려야 할 것입니다.

이번에 아프간의 일에 대한 인터넷 상의 무차별적으로 쏟아지는 비판은 기독교인으로서 나아가 목사로서 너무도 감당키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만일 인질로 잡힌 이들이 기독교인이 아니었다면 그런 여론의 뭇매를 맞지는 않았을 것이다. 처음부터 본질은 기독교에 있었습니다. 이번 일로 한국 기독교가 얼마나 불신을 받고 있으며 얼마나 많은 적을 만들어 냈는지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해외 선교도 중요하지만 현재 국내 선교가 얼마나 실패하고 있는가를 보여 준 것입니다. 이제 교회에 등을 돌리고 돌팔매질 하는 이들에게 우리는 그렇지 않다고, 당신들이 잘못 알고 있다고 항변하는 것보다 애통하는 마음을 가지고 우리의 죄악을 회개하며 그들을 가슴에 끌어않고 기도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여러분 모세는 여호와께 다시 나아가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슬프도소이다. 이 백성이 자기들을 위하여 금 신을 만들었사오니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그러나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여기 이 백성은 이방인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들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께서 구원해 주신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바로 저들이 그런 죄악을 저지른 것입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구원받은 한국교회가 죄악을 저지르고 이웃에 등졌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슬픕니다. 주님 우리가 우리를 위하여 물질의 우상, 탐욕의 우상을 만들었으니 큰 죄를 범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또한 모세의 입장에서 이스라엘은 동족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동족들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을 알지 못하고 죄악된 삶에 젖어 살아가는 영혼들, 진리에 대해 무관심하고 주님과 교회를 대적하는 이들, 우상숭배에 젖어든 영혼들을 위해 뜨거운 가슴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모세의 뜨거운 가슴은 그렇지 아니하시오면 원하건대 주께서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 주옵소서 라고 기도하기 까지 했습니다. 백성들이 죄악을 범했지만 그래도 자신의 생명보다 저들의 생명이 더 귀했던 것입니다.

주님의 기록하신 책은 성경 다른 곳에서는 '생명책'으로도 표현되었습니다. (시 56:8; 69:28; 139:16; 단 12:1; 빌 4:3; 계 3:5; 13:8; 17:8; 20:12). 그리고 이 책에 이름이 기록된 사람들만이 영생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 주옵소서라는 기도는 자기 동족  유대인들을 위해 중보 기도하던 바울의 기도와 유사한 것입니다. (롬9:3). 책임을 회피했던 아론과 달리 모세는 이처럼 자기 민족을 위해 생명까지 내놓을 만큼 투철한 책임 의식과 동포를 사랑하는 정신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실로 모세나 바울은 그 누구보다도 천국의 기쁨과 지옥의 고통을 잘 아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영적인 생명까지 걸고서 그토록 간절히 중보기도 드리는 이유는 죄 중에 죽어갈 저 무지하고 불쌍한 뭇 영혼들에 대한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즉 불쌍한 영혼들에 대한 불타는 사랑이 지옥의 그 고통스런 불꽃(눅16:24)까지도 극복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사랑의 힘은 크고 위대합니다. 예수님께서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그 치욕스런 십자가를 흔쾌히 지신 것도 '오직 사랑' - 그 이유 하나 때문이었습니다. 따라서 오늘날 저 죽어가는 뭇 영혼들을 생명의 길로 인도할 책임이 있는 우리들도 이 같은 사랑의 마음을 지니고 영혼을 위하여 민족을 위하여 열방을 위해 그리고 주님의 교회를 위해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영혼의 기도를 드려야 할 것입니다.

출처/박승남 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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