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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의 확신이 있습니까? (본문 눅19:1-10)

by 【고동엽】 2022. 10.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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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의 확신이 있습니까?  (본문 눅19:1-10)


'구원의 확신이 있는가' 하는 질문은 기초신앙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질문입니다. 구원의 확신 때문에 소위 '구원파'라고 하는 이단단체도 생겼습니다. 또 이것을 잘 모르면 이것으로 실족하여 신앙생활을 모두 팽개쳐 버릴 수 있습니다. 이처럼 구원의 확신 문제는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러면 '구원이란 무엇인가' 부터 알아야 겠습니다.

영국 성공회 주교인 '웨스트 콧' 이란 목사님이 기차를 타고 여행하는 중이었습니다. 성경을 보고 있는데 한 정거장에 이르자 여인이 목사님 옆에 앉게 되었습니다. 공교롭게도 이 여인은 전도에 뜨거운 열정이 있었습니다. 이 여인은 목사님이 성경을 읽고 있는 것을 보더니 "교회에 나가십니까? 그러면 당신은 구원을 받았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은 되물었습니다. "지금 뭐라고 말씀하셨지요?" 그랬더니 이 여인은 '아 이분은 교회에는 나가지만 구원이란 말을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사람이구나' 생각하고는 다시 한번 강조해서 물었습니다.


"당신은 구원을 받았습니까?"


그러자 콧 목사님은 정색을 하고 물었습니다.


"당신은 제게 구원을 받았느냐 물었지요? 그러면 그 질문은 과거형입니까, 현재형입니까, 아니면 미래형입니까?"


다시 말하면 구원을 받았는지, 구원을 받고 있는지, 구원을 받을 것인지 말입니다. 우리는 구원을 이야기할 때 그 여인과 같은 실수를 할 때가 많습니다. 죽음에서 생명으로, 죄인이 의인으로, 죄의 종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과거적인 구원, 즉 신분적인 구원이 구원의 전부인양 생각하고 다른 사람에게 동일한 경험을 요구하고 그렇지 못한 사람을 이상하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물론 과거 완료형인 신분적 구원도 중요합니다. 성경은 롬5:9-10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하는 미래형으로 얘기했습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역으로 우리는 죄인의 상태에서 의인의 상태가 된 것,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것, 죽음에서 생명으로 가는 신분적인 구원을 얘기한다면 미래형으로 얘기하는 구원은 수준적 구원을 얘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같은 구원이라는 말을 써도 신분적인 구원이 있는가 하면 수준적인 구원, 즉 성결과 거룩으로서의 구원, 온전히 변화되고 성화되는 구원이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신분적으로 죄에서 벗어나 의인의 신분이 되었다고 할지라도 죄라는 것은 여전히 우리에게 커다란 세력으로 남아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죄인의 신분으로 태어나 죄에 익숙한 사람들입니다. 죄와 아직도 친하고, 죄를 이길 만한 능력이 없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결심한다고 해서 죄를 짓지 않을 만큼 수준적으로 괜찮은 자들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내가 죄를 짓지 못하도록 간섭하시기 전 까지는 내가 죄를 이길 만한 능력이 내게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아무리 신분적으로 의인이 되었다고 할지라도 수준적으로 거룩하고 성결케 되는 것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도우심과 간섭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마28:28에 주님이 하신 말씀대로 주님이 우리와 항상 함께 하심으로 말미암아 수준적으로 성결하게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예수님의 사역 가운데 죽으심으로 죄에서 부활하셨다면 예수님의 부활하심, 살아나심, 하늘에 계심으로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지 않겠느냐 라고 반문하고 있는 것입니다. 죽는 것은 쉽습니다. 그러나 사는 것은 어렵습니다. 쉬운 죽으심으로 죄에서 구원하셨다면 이보다 더 어려운 사심으로 인해서 오늘날 우리들을 도와주시고 우리를 거룩하게 만들 능력이 주님께 없겠는가 하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목숨을 버리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셨는데 사심으로 우리를 위해 얼마나 더 큰 일을 하시겠는가 하는 말입니다. 요10:10 "내가 너희에게 온 것은 너희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 함이니라" 예수님이 오신 것은 첫째 생명을 주시고 두번째로는 풍성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죽은 것을 살려 내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이 생명 속에는 풍성함의 개념이 없습니다. 어떻게 우리는 풍성해 질 수 있습니까? 씨앗을 보면 아주 작고 미미해서 풍성함을 느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씨를 땅에 심어 놓으면 잎이 나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는 것을 보면 그렇게 풍성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약속한 구원은 죄 사함 받는 데서 즉 생명이 주어지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이 싹이 나고 잎이 나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기 까지 얘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신자들의 활동을 보면 모두 씨의 상태로 머무르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심어야 합니다. 우리가 자라는데 있어서 예수님은 햇빛, 바람,비, 좋은 토양입니다. 예수님의 도우심과 간섭으로 씨인 우리는 싹을 내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데 까지 가야합니다. 이것이 풍성함의 은혜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신자로서 요구하는 책임은 꽃피우고 열매 맺는 하나님의 의도 속에 우리가 어떻게 순종하며 발을 맞추느냐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죄인이었던 우리가 신분적으로 의롭다 함을 얻고 그것으로 끝이 아니라 하나님과 화평하여 화평을 누리고 하나님의 크신 은혜와 간섭 속에서 도리어 풍성하고 아름다운 자리에 이르기 까지 완성하게 될 것입니다. 죽었던 나무에 생명이 주어지고 거기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물 주시고 햇빛을 주시고 좋은 토양이 되셔서 싹이 나고 꽃이 피고 풍성한 열매 맺는 자리에 까지 이르는 여러분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성경에 보면 예수님께서 여리고로 가셨습니다. 그 동네는 부자동네입니다. 예루살렘에 가까이 있는 팔레스타인에서 가장 비옥한 땅입니다. 요세프스는 이 땅을 가리켜 "신선한 영역이다" 라고 할 정도로 좋은 땅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땅에는 부자들만 살았습니다. 착한 사마리아인 비유에도 보면 여리고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 강도가 나타났습니다. 그 이유는 부자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특히 당대 종교 지도자들, 제사장, 율법사들이 살았습니다. 그런 곳에 삭개오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세리장으로 부자였지만 사람들에게 죄인이라고 조롱 받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 보실 때에 그 곳에는 삭개오라는 죄인만을 보신 것이 아니라 스스로 의롭다 하는 죄인들도, 종교적인 지도자들도 있음을 보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생각하는 문제는 삭개오가 구원을 받았다,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주님의 칭찬과 인정을 받았음에 있습니다. 삭개오는 분명 세상 사람들이 볼때는 죄인이고 조롱받는 사람이었습니다만 주님은 삭개오를 향해 구원받았다, 아브라함의 자손이다라고 얘기한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원하시는 구원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봐야 할 것입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구원이 무엇입니까?

오늘 눅19장 앞장 18절에 보면 부자 관원이 예수님께 와서 "어떻게 하면 영생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질문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주님께서 젊은이를 향해 십계명을 잘 지켰는지 물으셨습니다. 젊은이는 자신있게 대답했습니다. 사실 젊은이에게 있어서 뿐 아니라 우리에게도 다 마찬가지 입니다만 행복의 조건을 세가지로 말합니다. 첫째 돈, 둘째 권력과 명예 , 셋째 건강이라고 합니다. 이 세가지가 충족되면 행복하고 잘 산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들이 잘 갖춰진 사람이 바로 젊은이였습니다. 그 젊은이에게 있어서 예수님께 드린 질문은 '어떻게 하면 돈을 잘 지킬까, 어떻게 하면 권력과 명예를 잃어 버지리 않고 영원히 가질까, 어떻게 하면 건강을 잘 유지할까'에 관한 것이었을런지 모릅니다. 예수님께서 젊은이에게 말씀하십니다. "제가 가진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라" 이 말씀을'예수님은 이 젊은이를 거지로 만드시는 것 아닌가' 라고 오해해서는 안됩니다. 눅6:38"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넘치도록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다시 말하면 네 가진 것을 다 주고 하나님만 믿으라는 것입니다. 주면 하나님이 채워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할 수 있으면 영원히 돈, 권력, 건강을 유지하면서 살수 있다는 뜻도 되는 것입니다. 잠19:17"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자는 여호와께 꾸이는 것이니 그 선행을 갚아 주시리라" 남에게 주는 것은 하나님이 꾸는 것이기 때문에 갚아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부자 청년은 부자인고로 근심하고 돌아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옛날에 물을 얻으려고 하면 우물에서 두레박을 이용하여 떴습니다. 그 후 펌프가 등장했는데 그 펌프를 통해 물을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물을 어느 정도 부어야 더 많은 물을 얻을 수 있습니다. 똑 같은 경우입니다. 가진 것을 주면 하나님이 주신다는 것입니다. 영생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의 것을 얻으려고 하면 내 것을 버리고 하나님이 주신 것을 사모하겠느냐는 뜻입니다.


삭개오는 어떻게 했습니까? 예수님이 삭개오의 집으로 간다고 하시니 즐거운 마음으로 예수님을 모셔 드렸습니다. 그리고 나서는 즉시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에게 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는 이제까지 살면서 재산을 가지고 인생을 설계하고 행복을 추구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만나고 주님이 나의 삶의 문제를 책임져 주실 줄로 믿는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구원의 확신을 얘기할 때 전통적으로 세 가지를 얘기합니다.

첫째,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확신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으로 믿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 말씀을 믿으면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우리는 그 말씀을 믿어 구원을 받았다고 합니다.

둘째 성령의 확신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으로 받은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다,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성령이 끊임없이 하나님의 자녀임을 들려 주시는 것입니다. 말씀을 외적인 증거라고 한다면 성령은 내적인 증거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이 구원의 확신에 대해 늘 불안해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삶의 변화가 없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 삶의 변화 그것은 오늘 삭개오를 통해 우리에게 주시는 귀한 말씀임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셋째 구원의 확신


예수님께서는 삭개오에게 구원을 이루었다는 것 뿐 아니라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합니다. 아브라함은 어떤 사람입니까? 그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향해 고향과 친척 모든 것을 다 내버리고 하나님을 좇은 사람입니다. 아브라함은 모든 것을 내어 버리고 하나님만 좇아 갔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이것을 요구하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삶을 살기 까지는 절대로 우리는 구원의 확신이라는 단어에서 자유함을 얻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김 중기목사님이 쓰신 채 가운데 이런 글이 있습니다.


한국에 온 선교사 가운데 "크레인"이란 선교사가 있었습니다. 이분이 안식년이 되어 미국에서 일년간 목회를 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일화로 떠올리고 싶지 않은 일입니다.
한 가정에 불이 났습니다. 평생동안 모든 재산이 불에 타 버린 것도 안타깝지만 그의 아내가 불길을 피하지 못하고 불에 타 죽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캠프에 참석하고 있는 그의 아들은 공교롭게도 그날 물에 빠져 죽었습니다. 사실 같지 않은 실화입니다. 아무튼 크레인 선교사는 그 장례식에 주례를 맡았는데 주례자로서 상주를 어떻게 위로하며 뭐라고 조문객에게 설교해야 좋을지 몰랐다고 합니다. 상상해 보십시오. 한쪽에는 물에 빠져 죽은 아들의 시체가 있고 또 다른 한쪽에는 불에 탄 아내의 시체가 있는, 미국 문화는 죽은 사람에게 화장을 시켜 놓습니다. 그 광경을 상상해 보십시오. 게다가 기구한 운명으로 참변을 당했다고 해서 더 많은 사람들이 장례식에 참석했는데 말입니다. 크레인 선교사는 한참동안 망설이다가 결국 상주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스미스씨, 이제 당신은 하나님을 원망할 수 있습니다. 지금 당신에게는 그럴 만한 이유가 충분합니다. 당신은 하나님을 저버릴 수도 있고, 그를 저주할 수도 있으며 심지어 당신은 하나님에게서 아주 떠나 버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특별히 당신은 하나님을 두려워 할 수도 있습니다. 오히려 당신은 이번 기회에 진정으로 하나님을 경외할 수도 있습니다. 그럴 만한 이유도 충분합니다. 그 선택은 당신의 것입니다."


그랬더니 상주는 눈물을 흘리면서 말했습니다.


"목사님 저는 하나님을 선택하겠습니다. 저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편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많은 조문객들이 그의 고백을 듣고 많은 은혜를 받았다고 합니다.
이스라엘 지도자 여호수아가 이렇게 외친적이 있습니다. "이제는 여호와를 경외하며 성실과 진정으로 그를 섬길 것이라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열조가 강 저편에 섬기던 신, 바알을 섬기던지 혹 너희 섬길 하나님을 오늘날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택하여 섬기겠노라" 훗날 여호수아 그의 집이 축복을 받았음을 물론이거니와 온 민족이 구원을 받았습니다. 구원의 확신은 나에게 가장 귀한 것이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 것도 아님을 시인하면서 주 예수님을 선택할 때 만 신앙의 씨가 싹트고 구원의 확신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지난 주간 이웃교회 목사님을 만나 세계선교에 대한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사실은 샤론의 집을 도와 달라는 목적을 가지고 만났습니다. 그런데 얘기 중에 그 교회는 앞으로 카자흐스탄 알마타에 선교를 계획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몇년전 그 교회 집사님이 알마타로 이민을 갔습니다. 이분은 본래 학교에서 유능한 영어 교사였는데 같이 근무하던 교목으로 계시던 분이 알마타 선교사로 가니 귀한 사역을 하시는 분을 도와 드려야 겠다는 생각으로 이민을 간 것입니다. 얼마나 귀한 생각입니까? 참 큰 결단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민을 간 집사님은 사업을 해서 도우려고 했지만 사업을 해 보지 않은 사람이 사업을 하려니 잘 되지 않았습니다. 주를 위해 하려고 하는 일도 안 되는 것입니다. 한번, 두번, 세번째 까지 사업에 실패하니 집에 전기, 물 모두 끊기고 심지어는 식량도 없어 굶기까지 했습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선교사에게 까지 버림을 받게 되었다고 합니다.

한국으로 다시 오려고 해도 쉽지 않았습니다. 할 일도 없을 뿐 더러 집도 없었고 더구나 주의 일을 하려고 떠난 사람이 망해서 돌아 왔다는 말을 듣는 것도 쉽지 않았습니다. 이제는 아무도 찾지 않는 집에 있을 뿐 아무 일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금시기 아니라 '굶식'을 하면서 자연히 하나님 앞에 엎드릴 수 밖에 없었습니다. 처음에는 하나님을 원망도 하고 불평도 했지만 마음이 시원치 않았습니다. 이것은 도저히 살 길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살려 달라고,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자신의 힘으로 살아온 것을 회개하면서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끝까지 하나님만 선택하고 따르겠다고 기도하면서 매달렸습니다. 며칠이나 기도했을까 비몽사몽간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사업의 지혜를 얻었습니다. 카자흐스탄 사람들은 차를 많이 마시는데 꼭 연유를 넣어 마신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연유가 넉넉치 않아 공급이 원활하지 못해 연유 값이 들쑥날쑥 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집사님은 한국에서 커피 마실 때 넣는 프림을 생각하고는 팔아 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그 프림이 날개 돋힌 듯 팔려 나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동서식품과 계약하여 컨테이너로 가져다가 팔았는데 너무나 많은 돈을 벌었다고 합니다. 막상 돈을 버니 선교사업에 써야 하겠는데 선교사에게 상처를 받아 한국의 목사님에게 연락하여 의논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알마타에 선교 센타를 지어 선교를 하기로 약속했다는 것입니다.


그는 그 때에 돈을 버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은혜를 부어 주시되 폭포수처럼 부어 주시고 하나님이 살아 계시고 영광 받으실 뿐 자신은 아무 것도 아니라고 고백 했다고 합니다.
우리가 수준적으로 구원을 받는 성화, 즉 거룩함은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거룩해 진다는 것은 내 속에서 내 능력이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상황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나는 여러분들이 풍성한 삶을 살기를 바랍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거룩함에 도전하는 일입니다. 내 능력, 내 생각에 도전하지 마십시오. 철저히 내것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역사하심에 맡겨 버리는 것입니다. 삭개오처럼 내어 놓는 것입니다. 내 놓을 때 내가 그것을 원하든 원치 않든 하나님은 내것을 주님께 드리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혹시 여러분 가운데 어려움을 당한 가정이 있습니까? 하나님은 그 가정을 통해 하나님의 거룩함을 드러내기를 믿으시기 바랍니다. 있을 때는 잘 안됩니다. 원치 않게 내 건강 가져가지고, 내 재산 가져가시고 때로는 자식까지 가져 가시는 상황 속에 있을 때 무엇을 선택하시겠습니까? 떠나시겠습니까? 원망하고 불평하시겠습니까? 불평하고 원망하고 떠나가면 좋아하는 것은 마귀 밖에 없습니다. 나도 손해고 하나님도 은혜 주실 기회를 놓쳐 버리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들께서 삭개오의 길을 걸어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인정받는 여러분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체험적인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그것은 구원의 조건은 아니지만 나에게 구원의 확신을 갖게 하는데 결정적인 역할도 하는 것입니다.

요셉이 애굽 땅에 가서 많은 고생을 하여 국무총리가 되었습니다. 누가 그에게 구원의 확신을 받았는지 물었습니까? 사도바울은 감옥의 문이 열려지는 기적을 겪었습니다. 그 사람에게 가서 누가 구원의 확신을 묻습니까? 아니면 자신이 그것 때문에 갈등하고 넘어지겠습니까? 체험적인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해야 합니다. 그리고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환상을 봐야 합니다. 하나님은 하늘에서, 땅에서 하나님의 기적과 하나님의 증거를 분명히 나타내 주실 줄로 믿습니다.


우리 구원의 확신은 이미 말씀 드린 대로 신분적인 구원에서 수준적인 구원에 까지 가야 합니다. 생명에서 풍성한 삶을 이루어 져야 합니다. 하나님을 선택하고 예수님을 선택하고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의 은혜 속에 승리해야 합니다. 삭개오는 가난한 사람에게 주었습니다. 나중에 삭개오는 여리고의 감독이 되었다고 합니다. 삭개오는 아무런 연고가 없는 가난한 자에게 주었는데 우리는 누구에게 주어야 합니까?

여러분 저는 지난 주간 우리 교회 온 집배원에게 전도를 했습니다. 우편 배달을 하면서 여러사람의 경우를 많이 보니 그 사람은 반문을 했습니다. "추석 때 어느 집에 보니 남편과 아이들은 모두 시골에 갔는데 부인은 기도원에 가고 시골에는 가지 않았다고 합니다. 부인이 기독교인으로 시댁의 제사를 드리지 않겠다는 이유였습니다. 목사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러나 여러분 가난한 자에게도 재산의 절반을 주고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칭함을 받아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다면 신앙적으로 핍박하는 시부모님들에게도 은혜를 나누어 주십시오. 돈도 시간도 모든 것을 투자하십시오.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믿을진대 정면 돌파하여 마음을 변화시키고 하나님의 기적을 경험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이 흔들어 넘치도록 여러분에게 채워 주실 줄로 믿습니다. 체험적인 신앙을 통해 승리하는 여러분이 되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출처/오창우목사 설교자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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