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δεδομένα 18,185편 ◑/उपदेश सामग्री 16,731편

나를 후대하시는 하나님 (시 116:1-7)

by 【고동엽】 2022. 9. 30.
 
목록가기
 

 

나를 후대하시는 하나님  (시 116:1-7)

본문의 저자에 대해서는 많은 학설이 있지만 우리는 누가 이 시편을 기록했는지 알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본문을 읽으면서 알 수 있는 것은 심각한 위기 상황 속에서 구원을 베푸신 하나님께 대한 감사와 찬양과 기도의 응답에 대한 감격적인 고백이 있다는 것입니다. 특히 시인은 본문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처럼 “평생토록 하나님을 사랑하며, 평생토록 기도하며, 평생토록 하나님 앞에 허물없이 행동할 것”을 결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에서 기억할 것은 시인이 이토록 하나님 앞에서 결심할 수 있었던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본문 7절에서 “내 영혼아 네 평안함에 돌아갈찌어다 여호와께서 너를 후대(厚待)하심이로다"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처럼 여호와 하나님께서 시인을 후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시인은 ”여호와 하나님! 평생토록 하나님만을 사랑하겠습니다. 평생토록 기도하며 살겠습니다. 기도한 것은 반드시 지키겠습니다. 평생토록 하나님 앞에 허물 없이 행동하며 살겠습니다“라고 결심하며 하나님께 감사 서원을 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 시인과 고백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우리에게도 시인과 같은 결심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우리에게도 시인과 같은 감사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성도는 세상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하나님의 은혜를 먹고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없다면 성도라 할지라도 이 세상에서 살아갈 방법이 없습니다. 먹고, 숨쉬고, 잠을 자고, 직장을 다니며, 사업을 할 수 있는 모든 것은 내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되어지는 것입니다.

물론 나그네 인생길을 가는 성도에게도 환난은 찾아옵니다. 인생 자체가 갈릴리 바다와 같이 순풍이 있는가 싶으면 역풍과 광풍이 대작하여 우리를 아주 힘들게 만듭니다. 그러나 그 환난과 고통의 역풍과 광풍이 우리로 하여금 힘들게 만들고 ?옴짝달싹?할 수 없지만 결코 낙망하지 않고 믿음의 주가 되시고 우리를 온전케 하시는 주님만을 바라보고 있다고 보면 언제 그러했느냐 듯이 역풍과 광풍이 물러가고 순풍의 닻으로 항해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 모든 것이 우리를 후대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은혜 가운데 생활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긍휼하심의 축복입니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에게는 후대해 주시는 여호와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후대 말을 국어사전에는 “두터운 대접”이라고 진술하고 있는데 그 의미가 부족합니다. 구약 히브리 원어로는 “까말”이라는 말인데, 이 말은 “하나님의 두터운 대접, 성도에게 특별한 혜택을 주는 것”을 말합니다. 바로 하나님의 후대하심입니다. 다시 말하면 성도에게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좋은 혜택을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말합니다. 다윗은 시편 23편에서 하나님이 자기 자신에게 후대하신 사실을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시 23:1-2,5)

본문 1절과 2절에서 "여호와께서 내 음성과 내 간구를 들으시므로 내가 저를 사랑하는도다. 그 귀를 내게 기울이셨으므로 내가 평생에 기도하리로다"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를 후대해 주시는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십니다.
그런데 기억할 것은 여기의 “들으시고”라는 말씀은 단순한 청취가 아니라 “아주 관심을 갖고 주의 깊게 듣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성도들의 기도 소리에 예민하신 분이십니다. 이러한 사실은 2절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데 “그 귀를 내게 기울이셨다”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는 “성도가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하는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상세히 들으신다”라는 말씀입니다. 이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도 눅 18:7-8 상반 절에서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저희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얼마나 행복한 일입니까? 이 얼마나 감격스런 일입니다. 아무도 우리들의 부르짖음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기뻐하지 아니하는데, 세상의 창조하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의 소리를 들어 주신다고 하니 이 얼마나 감사하고 감격스런 일입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와 같은 하나님의 후대하심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늘 의기소침(意氣銷沈)한 가운데 불평, 불만을 토로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아무도 나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나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고 계신다는 확신이 여러분에게 있습니까? 그렇다면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祈禱)는 하나님께 대한 최상의 경배 행위로서 인간적인 오만을 벗어버리고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태도입니다. 기도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을 무시하는 무서운 교만입니다. 하나님의 도움을 외면해 버리는 인간이 가진 거만입니다.

오늘 시편 저자에게도 참으로 어려운 환난이 그를 짓누르고 있었습니다. 그가 겪은 환난을 3절에서는 “사망의 줄”, “음부의 고통”으로 표현하고 있고, 6절에서는 “낮아짐”으로, 10절에서는 “큰 곤란”으로 자기의 어려움을 호소하고 있습니다. 그가 당하는 어려움이 죽음의 고통에 처하는 상태요, 생명의 위협을 느낄 정도로 심각한 상태였는데 거기에서 하나님이 건져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억할 것은 시편 저자가 당한 사망의 환난은 일회적인 사건이 아니었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본문 3절의 “사망의 줄이 나를 두르고”라는 말씀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여기의 “두르다”라는 말은 고통이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곧 계속적인 고통과 고난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도를 괴롭히는 사망의 줄이 시시각각(時時刻刻)으로 조여 오면서 극도의 위기에 처한 상태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인생의 현주소입니다. 그러나 성도에게는 소망이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어려운 고통이 나를 짓누른다고 할지라도 내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늘의 계신 우리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의 기도를 들으십니다. 우리를 도와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깊은 절망에 빠졌을 때에도, 우리가 눈물의 골짜기를 외롭게 걸어갈 때에도 하나님은 나를 도우시고 나의 소망이 좌절되지 않도록 도와주십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이 밤에 나오신 여러분들은 하나님께서 오늘도 나의 기도를 들으신다는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께 기도하심으로 여러분이 직면한 모든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은혜가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본문 6절에서 “여호와께서는 어리석은 자를 보존하시나니 내가 낮게 될 때에 나를 구원하셨도다”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를 후대해주시는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를 보존하여 주십니다.
본문에서 “어리석은 자”를 보존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에서 어리석은 자(폐타임)이란 말은 “단순한”이란 뜻입니다. 즉 순진 무구하고 그 마음에 간교한 잔꾀가 없는 사람이 바로 시인이 말하는 어리석은 자입니다. 일너 자는 그야말로 사악하고 약삭빠른 세상 사람들에게는 밥 곧 먹이가 되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이런 자를 세상 사람들의 표현대로 “어리석은 자”라고 번역했는지도 모릅니다.
아무튼 단순한 사람, 그 마음에 간교하고 잔꾀가 없는 사람, 이런 자는 세상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기 쉽고, 또한 약삭빠른 세상 사람들에게 쉽게 이용당하기 일쑤입니다. 그러나 우리를 후대해 주시는 여호와 하나님은 이렇게 순진하고 단순하여 한 마음으로 두 가지 생각을 않는 자를 보존하십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이 사람을 이용하고 어리석은 자로 치부해도 하나님만은 이런 순진 무구하며 그 마음이 변치 않는 자를 지키고 보호하여 주십니다. 왜냐하면 이런 자야말로 시련이 닥쳐도, 위급한 일이 생겨도, 또한 즐겁고 기쁜 일이 있어도 시종일관(始終一貫) 변함없이 끝가지 하나님을 향한 그 마음을 일편단심 변치 않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세상 사람들이 경멸하는 단순하고 순진 무구한 사람을 하나님만은 저버리지 않으시고 오히려 아끼고 사랑하시니 이런 주님게 감사 찬양함이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와 같은 사람들입니다. 다니엘은 기도를 하면 사자굴에 들어갈 줄 알고도 오히려 전과 같이 창문을 열어놓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또한 다니엘의 세 친구는 하나님을 신앙하는 일에 결코 타협을 하지 않았습니다. 적당하게 할 수도 있었지만 이들은 풀무불 속에 들어갈지도 결코 그렇게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기에 그들은 풀무법 속에도 하나님께서 지켜 주실 줄 믿었습니다. 그러나 “그리하지 아니하실지라도 결코 하나님을 부인할 수 없다”라는 모습으로 신앙을 지켰던 것입니다. 단 3:18에서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의 세우신 금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바로 이런 사람들은 세상의 눈으로 볼 때에는 어리석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런 자들을 보존하여 주십니다.

본문 7절에서 “내 영혼아 네 평안함에 돌아갈지어다 여호와께서 너를 후대하심이로다"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를 후대해 주시는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에게 평안을 주십니다.
그런데 기억할 것은 여기의 “평안”이란 “평화”를 뜻하는데, 히브리어말로는 “샬롬”이라고 말합니다. 이는 “평화, 번영, 안녕”이란 뜻입니다. 따라서 본문에서 말씀하시는 ?평안?이란 “하나님이 임재하신 결과로 나타난 충만한 평안의 상태“를 말씀하는 것입니다.
구약에 나타난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면 저들이 우상을 섬기고, 주변의 강대국을 의지할 때는 오히려 저들이 추구했던 평안은 사라지고 혼란과 전쟁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외세의 침략을 받을지라도 하나님만 의지하고 하나님 편에 섰을 때에는 나라가 평안해진 사실들을 성경을 통해서 우리는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삼상 7장 9절 이하에 보면 하나님께 범죄한 이스라엘 백성이 미스바에 모여서 사무엘 선지자를 중심으로 하나님께 젖 먹는 어린양을 취하여 온전헤 번제를 드리고, 이스라엘을 위해서 기도하였더니 여호와께서 응답해 주심으로 블레셋 전쟁에서도 승리하게 하셨습니다.
블레셋 사람이 굴복하였는데, 다시는 이스라엘 경내에 들어오지 못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여호와의 손이 사무엘이 사는 날 동안에 블레셋 사람을 막으셨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블레셋 사람이 이스라엘에게서 빼앗았던 성읍이 에그론부터 가드까지 이스라엘에게 회복되었고, 이스라엘이 그 사방 지경을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도로 찾았고, 이스라엘과 아무리 사람 사이에 평화가 있었습니다.(삼상 7:9-14)
우리를 후대하시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면 우리가 평안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후대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시지 아니하시면 우리를 결코 평안할 수 없습니다. 언제나 근심과 걱정 가운데 살아갈 수밖에 없는 연약한 존재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에게만 있는 평안을 다른 피조물에게 구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런 일을 속히 중단해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의 안식처입니다. 그에게만 편안히 거할 수 있는 곳이 있습니다. 그래서 시인은 본문 8절에서 "주께서 내 영혼을 사망에서, 내 눈을 눈물에서, 내 발을 넘어짐에서 건지셨나이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시인은 분명히 우리에게 평안을 주시는 주체는 우리를 후대해 주시는 “주님”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예수님도 요한복음 14장 27절에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도 바울도 롬 8:37-39절에서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를 사랑하시는 여호와 하나님 때문에 우리가 넉넉히 이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은 외부의 환경과 조건에 의해 제약을 받는 평안이 아니라, 환경에 지배되지 않는 평안, 죽음까지도 초월하는 평안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에게는 이러한 평안이 있습니까? 이러한 평안이 여러분에게 있다면 왜 우리는 불안해하고, 근심하고, 염려하고 있습니까? 우리 모두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을 가지고 이 어지러운 세상에서 당당히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후대하심을 체험한 성도는 믿음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시는 은혜를 받은 성도는 믿음으로 살아갑니다.

① 하나님만 사랑하며 살아야 합니다.(1절)
본문 1절에서 "여호와께서 내 음성과 내 간구를 들으심으로 내가 저를 사랑하는도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후대하심을 체험한 성도는 하나님만 사랑하게 됩니다.
성도의 아름다운 모습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데서 나타납니다. 예수님도 마가복음 12장 30절에서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으로부터 후대함을 받은 자의 신앙의 모습이요, 추구해야 할 목표입니다. 여러분의 전인격을 동원해서 하나님만을 사랑한다고 고백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② 평생 기도하며 살아야 합니다.(2절)
본문 2절에서 "그 귀를 내게 기울이셨으므로 내가 평생에 기도하리로다"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후대하심을 체험한 성도는 기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 “평생에”라는 말은 “나의 날들 동안에” 즉 내가 살아 있는 그 날까지 기도를 쉬지 않겠다는 결심입니다. 기도는 성도를 향한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하였습니다(살전 5:17-18). 기도는 하나님 절대 의존 신앙에서 비롯됩니다. 그래서 사무엘은 “기도하다 쉬는 것도 죄”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삼상12:23). 성도만이 가지는 최대의 무기인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도움의 손길을 느끼시기를 바랍니다.

③ 하나님 앞에서 살아야 합니다.(9절)
본문 9절에서 “내가 생존 세계에서 여호와 앞에 행하리로다"라고 하였습니다. 여호와 앞에서 행하는 삶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말씀대로 사는 생활입니다. 신구약 66권이 내 삶의 지표요, 나의 삶의 법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산다는 것은 곧 진실한 삶을 말해 주고 있고, 헌신된 삶을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창17:1)고 말씀하시고 있는 것처럼 우리는 아브라함처럼 하나님 앞에서 살아야 합니다. 다윗처럼 범사에 모든 일을 하나님께 물어보면서 사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사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삶이 바로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는 삶인데,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는 삶을 사는 사람은 하나님의 지도하심을 받습니다.(잠 36)

④ 하나님께 감사하며 살아야 합니다.(12절)
본문 12절에서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꼬"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믿음으로 사는 것은 하나님께 감사하며 사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주께로부터 받은 은혜에 대한 감사의 고백입니다. 우리가 교회 안에서 은혜 충만한 성도를 어떻게 식별할 수 있겠습니까? 성도의 입에서 감사의 소리가 끊이지 않으면 그 성도는 분명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입니다. 그러나 원망과 불평이 쉬지 않는 성도는 하나님의 은혜를 소멸했든지, 아니면 아직도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지 못한 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헤아릴 수 있는 지혜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실 우리의 존재는 하나님으로부터 사랑과 관심과 은혜를 받을 만한 자격도 없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우리를 후대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여기까지 온 줄 믿고 온전히 하나님께 영광과 찬양을 돌리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① 나를 후대하시는 하나님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도 성도의 기도를 들어주십니다. ② 나를 후대하신 하나님은 나를 보존하여 주십니다. ③ 나를 후대하시는 하나님은 불안과 근심으로 가득 찬 세상에서도 세상이 알지 못하는 평안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시인처럼 하나님을 사랑하며 삽시다. 우리도 시인처럼 평생토록 기도하며 삽시다. 우리도 시인처럼 하나님 앞에서 삽시다. 우리도 시인처럼 감사하며 삽시다. 우리가 믿음으로 살 수 있는 것은 나를 향한 하나님의 후대하심으로 말미암아 가능하게 됨을 기억하시고, 이제 다시금 이 은혜를 깨닫고 오늘도 우리의 흐트러진 신앙을 추스르시기를 바랍니다. 본문의 시인처럼 “평생토록 하나님을 사랑하며, 평생토록 기도하며, 평생토록 하나님 앞에 허물없이 행동하겠습니다”라고 결심하는 가운데 나를 후대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를 더욱 더 체험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출처:한국교회 부흥설교 설교 정보수집 편집위원 협조와 추천 중에서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