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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자의 길에서 이탈한 사람 (요 6;66-71)
지난 주일 우리는 대망의 입당 예배를 드렸습니다.
두 가지 기적을 이루었습니다.
하나는 125억원을 이루는 기적입니다.
다른 하나는 1300명 목표 달성 기적입니다. 본당 1,300석이 넘쳤습니다. 서서 예배드리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교육부 이전도 보통 어려운 것이 아닌 데 242명이 출석하였습니다.
그러나 나는 90% 온 교인들보다 10% 안 온 교인들 때문에 울적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날 목사님 한 분이 입당 기념 선물로 사진 액자 하나를 우리 교회 6층 벽에 걸었습니다. 사진 제목은 <오리 가족 나들이>입니다.
모두 12 식구입니다. 그런데 오리 새끼 한 마리가 대열에서 이탈하였습니다. 오리 어미가 그 오리 새끼를 유심히 쳐다 보고 있는 사진입니다. 어미가 이탈하는 새끼를 보는 장면을 찍으려고 30 장을 찍었다는 것입니다.
나는 이 사진을 보면서 예수님의 모습을 그려 보았습니다.
12명 제자들과 함께 사시다가 가롯 유다가 이탈하였습니다.
<내가 너희 열 둘을 택하지 아니 하였느냐? 그러나 너희 중에 한 사람은 마귀니라.>
다른 11명의 제자들은 모두 성자가 되었습니다. 지구상에서 가장 명예로운 제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유독 가롯 유다 하나만 이탈하여
성자에서 마귀로,
제자에서 배반자로,
축복에서 저주로,
존경의 대상에서 저주의 대상으로 이탈하였습니다.
오늘 본문을 살펴 보려고 합니다.
지금 우리는 요한복음 6장에 머믈러 있습니다.
2장을 보면 예수님이 유월절에 기적을 일으키자 예수를 믿기 시작하였습니다(요 2;23)
수가성 여인이 예수를 증거하자 수많은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수를 믿었습니다(요 4;39) 서서히 많은 사람들이 따르더니 드디어 큰 무리가 예수를 따랐습니다(요 6;2)
그러나 얼마 후 사람들은 다 예수님을 떠나 갔습니다. 잠시 흥분이었습니다. 이탈하였습니다. 그 때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물었습니다.
<너희도 가려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였습니다.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신 줄 믿고 알았삽나이다>(68-69)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 열 둘을 택하지 아니 하였느냐? 그러나 너희 중에 한 사람은 마귀니라.>
예수님을 따라다니던 제자들은 모두 12명이었습니다. 12명은 예수님을 붙들고 천국으로 들어 갔습니다. 그 중에 가룟 유다는 마귀를 붙들고 지옥으로 들어 갔습니다.
영원히 영원히 만날 수 없는 곳으로 갈라졌습니다.
12 명의 제자들은 지옥에 있는 가롯 유다에게 말할 것입니다.
<왜 너만 빠졌니?>
<왜 너만 멋진 길에서 이탈하였니?>
그런데 이탈한 유다 이야기 바로 전에 나오는 이야기가 베드로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 물으셨습니다.
<너희도 가려느냐?>
그 때 베드로가 대답하였습니다.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신 줄 믿고 알았삽나이다>(68-69)
말속에는 그 사람의 사상이 들어 있고, 말속에는 그 사람의 인격이 들어 있고, 말속에는 그 사람의 믿음이 들어 있습니다. 이 짧은 말속에서 베드로가 어떤 믿음을 가지고 있었기에 이탈하지 않고 끝까지 예수님을 따랐는 지를 역역히 볼 수 있습니다.
1. 주여!
베드로는 예수님을 이렇게 불렀습니다.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
예수님을 유대인들은 사생아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아버지도 없이 난 아들입니다. 불교인들은 세계 4대 성인중에 하나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회교도들은 선생이라고 불렀습니다.
베드로도 누가복음 5장에서 예수님을 처음 만났을 때에는 주라고 부르지 않았습니다.
<선생이여! 내가 밤이 맞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만은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내리리이다.> 선생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예수님을 주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주여!>
주라는 말은 큐리오스입니다. 큐리오스는 깡패적인 언어로 말하면 두목이라는 말입니다. 정치적인 언어로는 보스라는 말입니다. 노예적인 언어로는 주인이라는 말입니다. 한마디로 절대자입니다. 내게 제일인자가 주입니다. 그 분이 하라고 하면 왜가 없습니다. 연기가 없습니다. 절대자가 <주>입니다.
지난 주간 우리 교회가 성공적으로 이전을 마쳤습니다.
바로 며칠 전에 초상이 났습니다. 집사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너무나 바빴습니다. 정신이 없었습니다. 어머니는 우리 교인도 아닙니다. 더구나 집사님은 소문에 우리 교회에 안 따라 오겠다고 하였다는 것입니다. 이래 저래 가지 못 할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새벽에 그 가정을 위하여 기도하는 데 나의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강 문호야! 만사를 다 뒤로 미루고 가라!> 나는 주님께 말씀드렸습니다.
<주님! 나 그 보다 더 중요한 일이 많아요. 그리고 돌아 가신 분은 다른 교회 권사님이세요. 그리고 그 집사님은 내일 모래 우리 교회 이전인 데 안 따라 오겠데요.>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누구 종이니?>
나는 이 말에 대답을 하면 주님이 무슨 말씀을 주실 지 알았습니다. 그래서 침묵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 때 머믓거리고 있었습니다. 주님이 다구쳐 말씀하셨습니다.
<내 명령이다. 가라!>
나는 일어나 심방을 갔습니다. 오늘 그 집사님이 여기에 나오셨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선생이라 부르지 않았습니다. <주>라고 불렀습니다. 진실로 여러분은 예수님을 주라고 부르실 수 있나요? 유다는 예수를 주라고 부르지 못 하였습니다. 예수님을 주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만이 주님의 대열에서 이탈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진정으로 <주>로 고백하십니다. 그렇다면 내가 싫어도, 내가 어려워도 주님께 물어 보면서 주님이 말씀하여 주시는 지 그대로 살아야 합니다.
유다는 마귀가 주였습니다. 그래서 마귀를 따라 갔습니다.
유다는 돈이 주였습니다. 그래서 돈을 따라 갔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주라고 불렀습니다. 그래서 이탈하지 않았습니다.
2. 영생의 말씀
베드로는 고백하였습니다.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
예수님은 영생의 말씀을 주러 이 땅에 오신 분이십니다. 천하에 구원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적이 없습니다. 예수님만이 영생입니다.
우리 인간에게 가장 두려운 것은 죽음입니다.
나포레옹만큼 용감한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내 사전에는 불가능이 없다고 당당하게 외쳤던 영웅입니다. 전쟁하러 나갈 때에도 부하가 두려워하면서 군목을 모셔다가 하나님께 기도드리고 전쟁터로 가자고 제의하자 외쳤습니다.
<필요없어. 전쟁은 내가 하는 것이지 하나님이 하는 것이 아니야.>
이렇게 당당하고 무서운 것이 없는 나포레옹에게 부하가 물었습니다.
<각하! 각하는 무서운 사람이 없으신 분이신 데 그대도 가장 무서운 사람은 누구입니까?>
나포레옹이 이 때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일주일에 한번씩 면도를 하는 이발사가 가장 무섭다네. 이 놈이 면도칼로 내 목줄기 털을 밀 때 내 목까지 밀어버릴가 항상 두렵고 떨리지.>
부하가 다시 물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나포레옹이 말했습니다.
<이발사 아들을 데려다 놓고 목에 칼을 대고 있지. 이발사가 내 목을 베는 순간 이발사 아들 목도 베어 버리라고 명령하였지.>
사람에게 가장 무서운 것은 죽음입니다. 죽음을 해결할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 예수님뿐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분이십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오래 된 이야기입니다.
미국 캘리포니아 연안에서 호화 개인 보트 한 척이 침몰되었습니다. 침몰 직전에 해안 구조대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여기는 해안 구조대. 당신을 구조하러 가겠다. 당신의 위치를 알려라.>
이 때 호화 보트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나는 한국에 있는 모 은행 은행장이다.>
그리고 회신이 끊어지고 말았습니다. 결국 이 배는 구조되지 못 하였습니다.
<당신의 위치를 알려라(What is your position?)>
이 말을 당신의 지위가 무엇인가라고 묻는 줄 알았던 것입니다. 결국 죽었습니다.
죽어가는 데 명예가 무엇이 중요합니까? 죽어가고 있는 데 은행장이면 어떻고, 대통령이면 무엇합니까?
결국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생명입니다. 영생입니다.
우리 교회가 이 곳에 왜 세워졌습니까?
생명을 구하라고 세워졌습니다. 영생의 말씀이 여기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까라고 외친 베드로의 고백과 같이 우리는 오직 생명을 구하려고 이 교회로 이주하였습니다.
나는 식인어 삐얀야 두 마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물고기는 정말 심상치 않은 물고기입니다. 브라질 아마존 강가에서 선교하던 선교사님 한 분이 원주민과 함께 조그만 배를 타고 건너고 있었습니다. 악어 한 마리가 배를 뒤집어 엎었습니다. 원주민은 대처 능력이 능숙하였습니다. 그러나 선교사님은 그런 능력과 경험이 없었습니다. 황급히 건졌습니다. 불과 5분이었습니다. 선교사님의 몸은 하얀 뼈만 남았습니다.
식인어가 순식간에 달려들어 살점을 뜯어 먹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물을 내려 식인어를 잡았습니다. 그래서 선교사님 살점이 들어 있는 식인어를 말려서 한 마리에 1,000 불씩 헌금하는 사람에게 주기로 하였습니다.
나는 두 마리를 샀습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두 마리가 바로 이 것입니다. 나는 이 물고기를 볼 때마다 눈물을 가만히 적십니다. 그리고 선교의 불을 지르고 있습니다.
우리는 생명을 구하여야 합니다.
베드로는 영생의 말씀이 예수님을 알고 고백하였습니다.
3. 예수님은 거룩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베드로는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신 줄 믿고 알았삽나이다>(68-69)
보통 사람은 알고 나서 믿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총을 입은 사람들은 믿고 나서 알게 됩니다.
자녀가 부모를 아버지, 어머니라고 부를 때에 알고 믿나요? 믿고 아나요? 어느 자녀가 부모에게 <당신 내 아버지 어머니인을 증명해 봐요. 호적 등본을 보여 주세요. 피조사해 보고 말해요>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아버지 어머니로 믿습니다. 그리고 따릅니다. 그러면 아버지 어머니인 것을 알게 됩니다.
베드로는 처음에는 알고 믿으려고 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말하고 있습니다.
<믿고 알았삽나이다.>
과학적인 사실은 알고 나야 믿게 되지만 신앙은 그렇지 않습니다. 믿으면 알게 됩니다.
어느 기업체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근로자들이 노사 분규가 격심하였습니다. 작업이 중단되고 회사가 파경지경이 되었습니다. 사장은 문제를 해결하려고 무던히 애를 썼습니다. 그러나 근로자들은 막무 가내였습니다. 회장이 사장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어떻게 되었나?>
<너무 강경하여 풀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할 셈이야?>
<양보하지 않겠습니다. 이번 기회에 버르장머리를 바꾸어 버리겠습니다. 강경하겠습니다.>
<그러지 말게. 회사 사정이 지금 어렵지 않은가? 어려운 사정을 가감하지 말고 알아 들을 수 있도록 설명하게. 사정이 나아지면 월급을 올려야지. 이 회사가 내 회사인가? 근로자들이 없이 이 회사가 어떻게 존재하겠나? 다 잘 살아야지. 사정이 나아지면 나누어야지. 강경하지 말게. 사랑하게.>
이런 대화를 비서가 들었습니다. 비서는 회장님의 마음을 파업 주동자에게 알려 주었습니다.
주동자가 근로자들에게 말했습니다. 두 가지 의견이었습니다.
<그렇다면 회장을 데려다가 확인하고 믿으십시다.>
그러나 다른 사람이 말했습니다.
<거냥 그 말을 믿으십시다.>
결국 믿자는 말이 가결되어 농성을 풀었습니다. 회사가 잘 되었습니다. 좋은 결과를 맺었습니다. 알고 믿는 것는 세상적인 방법입니다. 그러나 믿고 아는 것은 신앙적인 방법이었습니다.
베드로는 말했습니다.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신 줄 믿고 알았삽나이다.>
우리는 예수님은 거룩하신 하나님이심을 믿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믿게 되면 정말 그 분을 알게 될 것입니다.
작년에 나는 아내와 함께 백두산 천지에 올라 가 본 적이 있습니다. 가파른 마지막 언덕을 오르기가 힘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앞에 아주 쉽게 돈을 버는 중국인이 있었습니다. 막대기를 꺽어 막대기를 만들어 가지고 1000원씩 파는 이였습니다. 지팡이였습니다.
그 지팡이를 1000원에 사가지고 천지에 올라 보았습니다. 2700m 산꼭대이에 있는 연못이라고 말하기에는 어마어마한 호수가 펼쳐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연못에서 두 강이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동쪽으로 흐르는 물은 두만강을 이루어 동해를 통하여 태평양에 빠지고 있었습니다. 서쪽으로 흐르는 물은 압록강을 이루어 서해로 이루어 대서양 물이 되니다. 태평양과 대서양은 도저히 만날 수 없습니다. 전혀 딴 세상 물이 됩니다.
베드로와 유다는 같이 살았습니다. 3년을 같이 다녔습니다. 그야말로 동거동락하였습니다. 그러나 한 사람은 예수님을 주로 믿고 천국으로, 한 사람은 예수님을 떠나 지옥으로 영원히 갈라졌습니다. 대서양 물과 태평양 물은 만날 가능성이 있어도 베드로와 유다는 만날 가능성이 전혀 없습니다.
한 사람은 성자로, 한 사람은 악마로,
한 사람은 천국으로, 한 사람은 지옥으로,
한 사람의 존경의 대상으로, 한 사람은 경멸의 대상으로 운명이 바뀌고 말았습니다.
성자의 길에서 이탈한 사람 가롯 유다
성자의 길을 끝까지 걸어간 베드로.
어느 길로 가시렵니까?
마지막으로 어빙이라고 하는 유명한 학자 이야기입니다.
어느 날 도서관에서 공부하고 있는 데 도서관 벽에 그 도서관에서 공부하였던 세계적인 석학들 초상화가 일렬로 걸려 있었습니다. 그는 공부하다가 잠간 잠이 들었습니다. 잠간 꿈을 꾸었습니다. 사진에서 한 명 한 명 일어나더니 자기에게 오는 것이었습니다.
한 명 모자를 벗기면서 말했습니다.
<이것은 내 것이다.>
또 한 명이 와서 위에 옷을 벗기면서 말했습니다.
<이것은 내 것이다.>
마지막 한 사람이 팬티를 벗기면서 말했습니다.
<이것은 내 것이다.>
그는 알몸이 되었습니다. 그는 깜짝 놀라 깨어났습니다. 그는 중얼거렸습니다.
<그렇다. 이 모든 것은 다 내 것이 아니다. 내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베드로는 배도, 가족도 다 버리고 주님을 영생이라고 따랐습니다. 그러나 유다는 은 30냥 돈을 받고 예수님을 팔아 버렸습니다. 오늘 날 유다는 아무 것도 없이 다 빼앗겼고 베드로는 화려한 베드로 성전에서 영광을 받고 있습니다.
오직 예수!
그 분만 따라가면 천국입니다.
그 분만 따라가면 영생입니다.
출처/강문호 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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