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이 깨어나는 교회 (삿 5:11~12, 막15:40~41)
오래 전 프랑스를 여행할 때에 그 곳에서 들은 이야기입니다. 프랑스 사람들은 ‘프랑스의 4대 인물’로 루이 14세, 나폴레옹, 잔 다르크, 드골을 꼽는답니다. 이 네 사람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프랑스를 대표할 인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네 사람의 공통점은 첫째, 싸움을 많이 하였습니다. 둘째, 싸움을 많이 하였기에 자연히 사람을 많이 죽였습니다. 셋째는 독재자의 성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넷째, 국민을 위한 독재자입니다. 프랑스를 대표하는 네 인물 가운데 여성 한 사람이 있다는 것은 상당히 좋은 일입니다.
잔 다르크는 근대 프랑스의 드보라입니다. 나라가 위태할 때에 몸을 버려 나라를 구한 위대한 여인입니다. 자기를 구한 사람은 가정을 구하고, 가정을 구한 사람은 나라를 구한다고 합니다. 자신을 구하는 것이 가장 소중한 일입니다. 여성 한 사람이 깨어나면 가정이 깨어납니다. 특히 여성이 깨어나면 남편이 깨어납니다. 그리고 자녀가 깨어나고, 교회가 깨어나고, 사회가 깨어납니다.
발자크는 “여자는 훌륭한 남편을 만드는 천재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맞습니다. 그러나 바꾸어 말하면 “여자는 남편을 무능하게 망치는 천재이다”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여자가 하기에 따라 남편은 훌륭하게도 되고, 반대도 됩니다. 남편에게 있어서 아내는 절대적 존재입니다.
유엔이 발표한 여성 관련 주요 통계자료를 보면 이렇습니다. 지구상에 있는 주인 있는 땅 가운데 여성 소유는 1%입니다. 전 세계 기업 경영자 가운데 여성은 21%입니다. 유엔 회원국 194개 나라 가운데 여성이 지도자인 나라는 12개국입니다. 성인 문맹자 중 여성이 67%입니다. 영국 여자 아이의 기대 수명은 81세이며, 아프리카의 빈국 스와질란드의 여자 아이의 기대 수명은 39세입니다. 그런데 이 통계 자료에 너무 기죽지 마세요. 통계는 어디까지나 통계에 불과합니다. 전 세계 남성 100%는 여성이 소유하고 있습니다. 기업 경영자는 남성이지만 돈 쓰는 사람은 여성입니다. 여성이 국가 지도자인 나라는 적지만 가정 지도자의 대부분은 여성입니다. 이게 더 중요하지 않습니까?
이근영의 ‘막시무스의 지구에서 인간으로 유쾌하게 사는 법’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여자는 멍청하다. 여자보다 더 멍청한 남자를 상대해야 하기 때문이다. 미인은 보통 여자보다 더 멍청하다. 보통 여자보다 더 많은 남자를 상대해야 하기 때문이다”. 사실은 역사적으로 봐도 여자를 멍청하게 만든 것은 남자들입니다. 사람을 멍청하게 만드는 것은 멍청한 짓입니다.
성경에는 참 좋은 여인들이 많이 나옵니다. 요게벳, 한나, 나오미, 룻, 수넴여인, 수로보니게 여인 등은 좋은 여인으로 등장합니다. 특히 예수님 곁의 여인들은 슬기롭고 훌륭했습니다. 예수님 곁에서 물질로 도왔던 여 제자들이었습니다. 요안나, 수산나, 마리아 등이 이런 여인들입니다. 바울 곁의 여인들도 훌륭합니다. 브리스길라, 루디아, 뵈뵈, 드루베나, 드루보사, 율리아 등 바울 곁에는 더 많은 여인들이 있었습니다.
성경에는 참 나쁜 여인도 많았습니다. 아합 왕의 부인이었으며 이방신을 들여와 섬겼던 이세벨이 나쁜 여인입니다. 아하수에로 왕의 명령을 거역했던 부인이었던 와스디가 나쁜 여인입니다. 고통당하는 남편에게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으라고 했던 욥의 아내가 나쁜 여인입니다. 세례요한의 목을 베게 했던 헤로디아가 나쁜 여인입니다. 남편과 공모하여 성령을 속였던 삽비라가 나쁜 여인입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입니까? 성경의 인물들은 우리에게 교훈을 줍니다. 이 교훈을 잘 받고 슬기로운 여인이 다 되기를 바랍니다.
첫째, 신앙적 담대함으로 여성이 깨어나야 합니다.
사사기 5:11에는 “깰지어다 깰지어다 드보라여 깰지어다 깰지어다 일어날지어다”라고 합니다. 드보라가 깨어날 것을 노래합니다. 드보라가 일어나면 나라가 일어납니다. 드보라가 일어나야 나라가 희망이 있습니다. 한 여성이 깨어나면 나라가 다시 섭니다. 여성이 깨어야 나라가 된다는 말입니다.
“아버지가 살아야 교회가 산다”, “남성이 살아야 교회가 산다”는 말이 있습니다. 사실은 “어머니가 살아야 교회가 삽니다”. “여성이 살아야 나라가 삽니다”. 여성이 깨어나면 가정이 깨어나고, 교회가 깨어나고, 민족이 깨어납니다. 여성이 살아나면 환경도 살아납니다. 여성이 살아나면 건강도 살아납니다.
드보라는 사사기 4장에서 5장까지 나타난 여성입니다. 여호수아의 죽음에서 왕정 시작 까지 약 300년은 이스라엘의 혼란기였습니다. 이 와중에 사사라고 하는 12명의 카리스마적 지도자가 나타납니다. 사사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범죄하여 고난당하고, 회개하여 구원을 얻고 평화를 얻는 순환이 연속되는 역사였습니다. 이 혼란기의 유일한 여성 사사가 드보라였습니다.
가나안왕 야빈이 20년 동안 이스라엘을 지배하였습니다. 그의 군대장관 시스라는 아주 포악한 장군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의 신음을 들으시고 드보라에게 바락과 함께 전쟁에 나가라고 하십니다. 바락은 드보라에게 “당신이 가면 내가 가겠다”고 합니다. 드보라의 치맛자락을 잡은 바락을 보세요. 그 때 드보라는 바락에게 “내가 같이 가지만 승리한 후에 당신의 이름은 날리지 못할 것입니다. 시스라는 여인의 손에 죽을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전쟁이 한참일 때 가나안의 군대가 패주하게 시작합니다. 장군 시스라도 도망하였습니다. 어느 천막 곁을 지나다가 야엘이라는 여인을 만납니다. 시스라는 야엘에게 물을 얻어 마시고, “나를 찾거든 모른다고 하시오”라고 하고 천막 안에서 잠이 들었습니다. 이 때 야엘이 시스라의 몸에 말뚝을 박아 죽였습니다. 야엘이 얼마나 세게 쳤든지 말뚝이 몸을 뚫고 땅에 박혔다고 합니다. 여자들이 얼마나 무서운지 보세요. 죽다가 살아나는 해산도 여성들은 예사로 해요. 정말 여성들은 강하고 힘이 있습니다. 이런 여성의 힘이 신앙으로 뭉치면 담대함이 극치를 이룹니다.
에스더는 포로민의 후예로 바사의 아하수에로왕의 왕비가 되었습니다. 이 때 유대인에게 위기를 맞이합니다. 하만이라는 사람이 그의 삼촌 모르드게를 죽이려고 궁중에 장대를 높이 세웠습니다. 그의 간계에 빠져 모르드게뿐만 아니라 유대인들이 다 죽게 되었습니다. 당시에는 왕이 부르기 전에는 왕비라도 왕에게 나아갈 수 없었습니다. 그 때 에스더는 “죽으면 죽으리라”라고 하며 왕이 부르지도 않았지만 왕에게 나아갔습니다. 신앙적 담대함입니다.
가나안의 수로보니게 여인은 귀신 들린 딸을 고쳐달라고 예수님께 나아갔습니다. 예수님은 여인에게 “자녀의 떡을 개에게 주는 것이 옳지 않다”고 하십니다. 얼마나 기분 나쁩니까? 자신을 개 취급합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개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지 않습니까?”하면서 애원합니다. 개라도 좋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여인의 믿음을 칭찬하시며 그 딸을 고쳐주십니다. 신앙적 담대함은 관용으로 나타납니다.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던 여인이 예수님의 옷 가에 손을 대었습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의 옷 가에 손만 대어도 낫겠다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혈루증은 불결한 병이었습니다. 혈루증 환자는 군중 속에 나타나지 못하는 것이 법입니다. 그런데 거기가 어디라고 감히 와서 옷에 손을 댑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이 여인의 믿음을 칭찬하시며 고치십니다. 신앙적 담대함을 고침을 받습니다.
예수님께 와서 발에 향유를 부은 한 여인이 있었습니다. 이 여인은 죄 많은 여인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창녀라는 말입니다. 창녀는 밤의 얼굴입니다. 낮에는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의 집에 어딘데 거길 나타나서 예수님의 발에 불의하게 모은 돈으로 산 비싼 향유를 붓습니까? 신앙적 담대함은 구원함을 받습니다. 이 여인의 담대함은 회개로 생겨난 담대함입니다. 회개하면 담대함이 생깁니다. 회개하고 나면 겁날 것이 없습니다. 신앙의 담대성은 회개와 확신에서 생깁니다.
예수님 곁의 여인들을 보세요. 남자들이 다 도망갔습니다. 그런데 여인들은 겁도 없이 와서 예수님의 십자가 아래를 지킵니다. 또 여인들은 혼자 무덤을 찾아갑니다. 성경에 보면 당시에 무덤에는 귀신 들린 사람이 많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무섭지도 않았습니다. 도둑이 들면 남자들이 부인들 뒤에 숨어 있기도 합니다. 신앙적 사랑은 담대함을 줍니다. 사랑하면 담대해집니다. 사랑하면 사랑하는 사람을 위하여 목숨까지 버릴 수 있습니다.
제가 아주 오래 전에 했던 “다시 오기만 해봐라” 얘기 기억하세요? 어느 집에 도둑이 들었습니다. 부인이 도둑이 왔다고 남편을 깨웠습니다. 남편은 이불 속에서 무서워 나오지도 못하고 “이놈의 도둑놈, 들어오기만 해봐라”고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했습니다. 그런데 들어옵니다. 다시 말합니다. “이놈의 도둑놈, 문을 열기만 해봐라”. 다시 물을 열고 들어왔습니다. “이놈의 도둑놈, 장롱을 뒤지기만 해봐라”. 장롱을 뒤집니다. “이놈의 도둑놈, 나가기만 해봐라”. 그런데 다 훔치고 나갑니다. 그 때 일어나더니 큰 소리로 말합니다. “이놈의 도둑놈, 다시 오기만 해봐라. 다리몽둥이를 부러뜨려 놓을 테다”. 남자들이 이래요. 이해하시고 힘을 주세요.
디모데는 참 훌륭한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에게 아들 같은 동역자이었고, 교회의 좋은 일꾼이었습니다. 그는 어머니 유니게와 외조모 로이스에게 신앙을 이어받았습니다. 바울은 이런 디모데에게 거짓이 없는 믿음을 가졌다고 하였습니다.
최근의 보고에 의하면 실제로 외할머니의 힘이 크다고 합니다. 미국 뉴욕타임지 신문에 난 기사를 보면 좁게는 외할머니, 넓게는 여성 연장자가 가족에게 미치는 영향이 크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외할머니 연구가 활발하답니다. 외할머니와 사는 아이들의 영아사망률이 그렇지 않은 아이의 절반 수준이랍니다. 여성의 힘이 얼마나 큰가를 말해줍니다.
영국에서 윌리엄 4세가 죽던 날 밤에 궁중의 한 처녀가 이튿날 왕으로 간택됩니다. 이 여인이 빅토리아 여왕입니다. 빅토리아는 64년 동안 영국을 통치했습니다. 영국에는 건축이나 의복 등에 ‘빅토리아 풍’이라는 말이 많을 정도로 그녀의 역할은 대단했습니다. 빅토리아는 왕이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즉시 무릎을 꿇고 성경을 쥐었습니다. “주여, 내가 왕이 되면 하나님의 말씀대로 정치를 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하고 기도하였습니다. 인도의 한 왕자가 여왕을 알현하러 와서 물었습니다. “정치를 잘 하는 비결이 무엇입니까?” 여왕은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성경을 펴들고 “바로 이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신앙적 담대함은 성경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순교자 주기철 목사님의 사모님도 대단한 분이셨습니다. 주목사님이 평양 남산 경찰서에 두 번째 구속되었을 때에 오정모 사모님은 담요 한 장을 가지고 가서 강단 밑에 깔아놓고 목사님이 출옥하실 때까지 철야기도와 금식기도를 계속하셨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의 사모님도 그랬습니다. 목사님께서 신사참배를 하지 않는다고 옥에 갇혔습니다. 사모님께서는 그 비참한 모습을 보면서도 오히려 “당신이 신사참배하고 나오면 내 남편이 아닙니다”라고 하셨답니다. 목사님이 순교하신 다음 목사님의 시체를 두고 자녀들을 데리고 사진을 찍어 놓으셨습니다. 담대한 신앙인에게 담대한 여인들이 있습니다.
“여자가 혼자 살면 구슬이 서 말이고, 남자가 혼자 살면 이가 서 말이다”는 말이 있습니다. 여성의 본성적 강인함, 담대함을 신앙으로 승화하여 주님을 섬기는데 사용하는 여성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둘째, 변치 않는 사랑으로 여성이 깨어나야 합니다.
마가복음 15:41에는 “이들은 예수께서 갈릴리에 계실 때에 따르며 섬기던 자들이요”라고 합니다. 막달라 마리아, 작은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와 살로메 등은 예수님의 십자가 아래까지 따라가서 예수님의 죽음을 보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께서 편안할 때, 군중에게 인정받을 때뿐만 아니라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에, 궁지에 몰렸을 때에, 자신의 신변에 위협을 당할지도 모를 때에도 변치 않고 예수님을 사랑한 사람들입니다.
성경의 여인들 가운데 마르다 와 마리아는 예수님께 대한 사랑이 특별했습니다. 두 여인이 다 예수님을 사랑했습니다. 마르다 때문에 마리아의 일이 돋보입니다. 마리아 때문에 마르다의 일이 가치 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께 대한 사랑 때문에 말씀을 열심히 들었습니다. 예수님께 대한 사랑 때문에 부엌일을 열심히 하였습니다. 이들의 사랑이 자신의 오라버니 나사로를 다시 살게 한 것입니다. 마리아와 마르다의 극진한 사랑이 예수님을 감동케 하였을 것입니다. 여성이 사랑으로 깨어나면 다른 사람을 살립니다. 남편을 살리고, 자녀를 살리고, 교회를 살리고, 나라를 살립니다.
반면에 여자가 한을 품으면 죽음이 닥칩니다. 무섭게 변합니다. 한 달 전에 이런 사건이 있었습니다. 어느 60세 된 부인이 67세 된 전남편을 살해하였습니다. 이 사람은 결혼생활 37년 동안 부인을 무시하고 폭력을 휘둘렀습니다. 두 사람은 자녀 때문에 이혼 상태에서 동거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부인이 신문을 보고 있는데 “정신병자가 신문을 보면 뭐하냐?” 하면서 주먹으로 머리를 때렸습니다. 이 부인이 순간적으로 옆에 있던 둔기로 남편의 머리를 쳐서 죽였습니다. 분노가 얼마나 쌓였으면 그랬겠습니까? 사랑은 살리지만 미움은 죽입니다. 사람이 미움을 가지고 분노를 품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모릅니다.
잠언 31:30에는 “고운 것도 거짓되고 아름다운 것도 헛되나 오직 여호와를 경외하는 여자는 칭찬을 받을 것이라”고 합니다. 사랑이 많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착한 아내는 칭찬을 받습니다. 가정에서 남편을 위하여, 자녀를 위하여 하는 수고와 사랑이 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에서 나오면 힘이 들지 않습니다. 칭찬을 받습니다. 이런 부인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얼마 전 들은 얘기입니다. 어느 부인이 아들 하나 낳고 남편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청상으로 아들을 키운다는 것이 힘이 들었지만 아들이 잘 되어 결혼을 했습니다. 그런데 며느리가 볼 때는 아들과 어머니의 관계가 아니라 남편과 아내의 관계 같았습니다. 아들 퇴근 시간이 되면 어머니가 세수하고 화장을 하고 아들을 기다립니다. 며느리 입장에서 보니 기가 막힙니다. 며느리의 자리가 그 집에서는 없는 것 같았습니다. 며느리가 아들을 낳아 학교에 입학하였습니다. 한 번은 아들이 시험을 쳤는데 100점을 받아왔습니다. 며느리는 시어머니에게 손자의 100점짜리 시험지를 보이면서 “어머니, 아들이 100점 받았네요” 하면서 자랑을 했답니다. 그랬더니 시어머니가 “내 아들은 네 아들보다 공부 더 잘 했다” 그러더랍니다. 사랑하면 아무 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 며느리에 대한 사랑은 트이지 않을까요? 정말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친구처럼 며느리를 사랑해 주어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 어떻게 그리스도의 사랑을 말할 수 있겠습니까?
“딸이 주는 돈은 서서 받고, 아들이 주는 돈은 앉아서 받고, 영감이 주는 돈은 누워서 받는다”는 말 아시지요? 사실은 더 편하고 좋아야 할 관계는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관계입니다. 며느리에게 잘 하면 아들 여생이 편안합니다. 며느리 주는 돈은 뒹굴며 받아야 합니다. 꼭 이런 관계가 되기를 바랍니다.
제가 얼마 전에 ‘아줌마 영성’이란 글을 썼습니다. 오래 전 얘기로 아줌마와 조폭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떼로 몰려 다닌다”, “형님이라고 한다”, “문신을 한다. 조폭은 등에 하지만 아줌마는 눈썹에 한다”, “제 식구를 끔찍이 챙긴다”, “밤만 되면 무서워진다”, “칼을 잘 쓴다”. 제가 한번은 결혼 주례 하는데 신부가 퇴장할 때 후배들이 퇴장 길을 막고 “나는 아줌마다”를 세 번이나 외치게 합디다. 그 후배들 아줌마 무서운 줄 몰라서 그래요.
아줌마는 힘이 있습니다. 열정이 있습니다. 아줌마 특유의 강인함이 있습니다. 아줌마에게는 야성이 있습니다. 이런 아줌마의 특성을 영성적으로 다듬으면 엄청난 힘이 있습니다. 여성의 심장이 강심장이기에 나쁘게 사용하면 무서움이 드러납니다. 좋게 사용해야 합니다. 미래는 여성 인력을 어떻게 활용하는가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과제입니다.
교회의 여성인력을 똑똑하게 만들고, 아줌마를 힘 있게 만드는 것이 교회의 역할입니다. 여성인력을 복음적 인력으로 훈련하여 활용하는 것이 미래교회의 중요한 역할입니다. 교회의 미래는 아줌마에게 달려 있습니다. 아줌마의 영성은 미래교회의 핵심 영성입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을 가지고 여성의 영성을 잘 개발해야 합니다. 여성 여러분이 스스로 이 일을 하셔야 우리 가정, 교회, 사회가 희망이 있습니다.
결론
이태준의 ‘딸 삼 형제’에는 “여자가 뭔지 알기 전에 시집가고, 어머니가 뭔지 알기 전에 아기 낳고, 인생이 뭔지 알기 전 죽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이 그렇데 철이 들기가 힘이 든 것입니다. 신앙적으로 철든 여성은 여성의 역할을 증대합니다. 신앙적으로 철이 들어 우리의 삶의 현장을 개혁하는데 앞장 서는 여성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바울은 여성 동역자들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습니다. “나의 동역자 브리스가”, “내가 사랑하는 에베네도”, “많이 수고한 마리아”, “내 사랑하는 암블리아”, “주안에서 수고한 드루배나와 브두보사”, “주 안에서 택하심을 입은 루포의 어머니”라고 합니다.
사랑하는 여성 여러분들에게 우리 주님이 붙여주실 말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에게 이 좋은 수식어들이 다 붙여지기를 바랍니다. 더 좋은 수식어들을 다 얻기를 바랍니다.
여성 시대에 신앙적 담대성을 가지고, 변치 않는 사랑으로 좋은 이름을 얻고 칭찬 듣는 여성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출처/이성희 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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