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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워하여 (요 19: 38~42)

by 【고동엽】 2022. 9. 29.

두려워하여  (요 19: 38~42)


오늘은 38절의 말씀을 중심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두려움은 범죄한 인간의 본능입니다.

창3:9-10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범죄한 아담을 향해,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9절)고 했을 때 아담은 숨었습니다. 그러면서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10절)라고 대답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범죄한 인간의 모습입니다.

따라서 인간에게는 누구에게나 두려움이 있습니다. 물론 그 두려움의 종류는 사람마다 다 다릅니다. 38절에 보면 아리마대 요셉이 [두려워하여]라고 했는데 왜 두려워했을까요? 왜 그는 예수님의 비밀제자로 활동했을까요? 바라기는 저와 여러분들은 두려움 없이,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확신을 가지고 날마다 승리하는 삶을 살기를 축원합니다.

1. 두려움이란 무엇인가?

[인간을 움직이는 4가지 동기]가 있습니다. 이 4가지 동기 때문에 인간은 활동하고, 선행을 하고, 또 큰 업적을 남깁니다. 첫째는 두려움 때문에 활동하고, 둘째는 미래에 대한 소망이 있기 때문에 활동합니다. 셋째는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끝으로 사랑이 있기 때문에 활동하고 선행을 행하고, 일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두려움이 네 가지 중에서 순서상 첫 번째라는 점입니다. 그러므로 두려움이 반드시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문제는 두려움으로 인해서 얽히게 되고, 두려움으로 인해서 쾌락에 빠지고, 두려움으로 인해서 우상숭배에 빠지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두려움은 인간으로 하여금 이 세상에서 많은 일들을 하게 하는 원동력이 되기도 합니다.

만약 우리가 노후의 두려움이 없다면 저축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미래의 불명예에 대한 두려움이 없다면 선행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만약 우리에게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두려움이 없다면 믿지도 않을 것이고, 기독교는 생기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은 나쁜 의미의 두려움을 더 많이 살펴보려고 합니다.

이런 우화가 있습니다. 한번은 알렉산드리아로 가는 마차에 어떤 할머니가 태워달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할머니에게 물었습니다. 어디로 가십니까? 예, 저는 호열자라는 병인데 알렉산드리아로 빨리 가야 합니다.

물론 마부는 거절했습니다. 그러나 호열자라는 할머니는 세 사람만 죽일테니 태워달라고 했습니다. 만약 더 죽인다면 자기를 죽이라고 칼 까지 주었습니다. 마부는 세 사람이야 뭐 괜찮겠지 하고 태워주었습니다.

며칠 후에 알렉산드리아에는 수만 명의 많은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마부는 화가 났습니다. 마침 그 호열자라는 할머니가 마차를 타려고 나왔습니다. 마부는 화가 나서 칼로 그 할머니를 죽이려고 했습니다. 왜 약속을 어긴 것이요?

그러자 할머니가 대답했습니다. 나는 약속대로 세 사람만 죽였습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 호열자가 돈다는 말을 듣고 다 두려워 죽었습니다. 이 우화는 두려움 자체가 무섭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사실 제2차 세계 대전 때 전쟁으로 죽은 미군은 30만 명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들과 남편을 일선에 보내고 염려와 불안과 근심으로 인해 심장병으로 죽은 미국인은 100만명이 넘었다고 합니다.

2. 왜 인간은 두려워하는가?

(1)위험이 다가오고 있는데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두려운 것입니다.

눅21:26절에 “사람들이 세상이 임할 일을 생각하고 무서워하므로”라고 했습니다. 이 두려움이 우리들에게 생기면 식은땀이 생기고, 얼굴이 창백해지고, 가슴이 뛰고, 침이 마르고, 머리털이 많이 빠지고, 숨이 가끔 멎게 되고, 몸이 떨리는 현상이 일어납니다.

(2)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에 다른 것들이 두려운 것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큰 두려움이 있으면 세상에서의 작은 두려움은 살아집니다. 왜냐하면 큰 두려움은 작은 두려움을 잊어버리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3)[아직 어리기 때문에] 두려워합니다.

삿8:20절에 “이는 어려서 두려워함이었더라”고 했습니다.

예를 들면 뱀에 놀란 사람은 새끼만 보아도 놀랍니다. 이것을 조건반응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재미있는 것은 사람들은 공포영화를 좋아합니다.

최근 광고 난을 보면 앞으로 상연될 [괴물]이란 영화가 벌써부터 난리입니다. 이 영화는 민노당 원인 봉 준호 감독이 만든 영화입니다. 내용은 괴생물체가 한강에 나타나 여중생을 잡아가고 가족들이 딸을 구하기 위해서 사투를 벌이는 내용입니다.

미군이 버린 화학물질 포롬알데히드가 한강에 흘러들어가 돌연변이 괴생물체가 출연한다는 것인데 문제는 이 영화가 반미감정을 일으키려고 만들었다는 데 있습니다.

미군이 화학물질을 한강에 버렸다는 것이나 여중생을 잡아간다는 내용은 전에 일어난 여중생의 죽음을 다시 떠올리게 해서 관객들로 하여금 반미감정을 갖게 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더욱이 이 사건을 은폐하기 위해서 미국 정부의 개입이 있다는 식의 내용은 영화를 정치문제화하고 있다는 비난을 피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런데 물론 제작자들이 관객을 많이 끌기위해서이기도 하지만 참 이상한 것은 공포영화를 많은 사람들이 특히 여름철에 보려고 돈을 쓴다는 점입니다.

(4)하나님의 능력을 손을 보는 [영적인 눈이 어둡기 때문에] 두려워하는 것입니다(왕하6:16).

도단에 있는 엘리사가 그의 하인, 게하시의 눈을 열어줄 때에 아람군대보다 하나님의 군대의 수가 더 많은 것을 보고 두려움을 극복했습니다. 지금도 하나님의 천군천사가 우리들을 보호하고 있는 것을 보면 우리는 두려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5)믿음이 없거나 믿음이 적기 때문에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갈릴리 바다를 건너갈 때에 파도가 일자 예수님의 제자들은 두려워하여 예수님을 깨웠습니다. 그 때 주님은 말씀했습니다.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마8:26)고 책망을 했습니다. 우리들도 믿음이 적기 때문에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3. 두려움의 종류는 무엇이 있는가?

크게 세 가지가 있습니다.

(1)하나님께 대한 두려움(출1:17)

첫째로 믿으면 살아계신 하나님을 두려워합니다.

(2)세상에 대한 두려움

둘째로 안 믿으면, 즉 의심과 불신하면 세상의 모든 것이 다 두렵습니다. 아리마대 요셉이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비밀제자로 있었던 것은 유대인들이 두렵고, 세상이 두렵기 때문이었습니다. 니고데모가 밤에 예수님을 찾아온 것도 세상이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다 믿음이 작기 때문이었습니다.

(3)그러나 인간은 [죽음을 가장 두려워합니다].

그것이 죽음 후에 무엇이 일어날 것인가를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에게 잊혀 지니 두렵고, 혼자서 서야 하기 때문에 두렵고, 지옥에 갈까보아 두렵고, 두고 가는 가족들이 어떻게 살까 걱정이 되어 두려운 것입니다.

4. 두려움을 극복하는 비결은 무엇인가?

(1)[죄의 문제를 해결해야]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죄를 지으면 죄책감과 심판에 대한 두려움이 마음속에 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두려움은 양심이 지은 죄에 대해 지불하는 세금과도 같습니다.

(2)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한다는 것을 [확신할 때]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출14:13).

다시 말하면 공포의 해독제는 믿음뿐입니다. 민14:9절에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말라”고 했습니다. 사41:10절에서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고 했습니다.

(3)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을 믿을 때 두려움은 살아집니다.

시23:4절에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찌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믿습니까? 눅21:18절에서는 “너희 머리털 하나도 상치 아니하리라”고 했으니 믿기만 하면 두려움은 살아집니다.

맺는 말

성경에 “두려워 말라”는 말이 365번 나오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날마다 우리는 두려움에서 벗어나 확신을 가지고 기뻐하는 삶을 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두려움을 주께 맡기고, 확신으로 승리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출처/신성종 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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