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종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왕상 17:8~16)
히 13:17절“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저희는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기가 회개할 자인 것같이 하느니라 저희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하고 근심으로 하게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아멘
어느 교회를 갈지라도 성도와 목사님과 관계 목사와 교역자들과의 관계, 성도들과 교역자들과의 관계가 좋은 교회는 참으로 행복하게 보이고 축복이 넘치는 서로의 관계로 보여서 좋습니다. 특히 성도들과 목사님과의 관계는 참으로 밀첩한 관계입니다. 떨어질 수 없는 관계입니다. 가장 불행한 양들은 누구입니까? 목자가 없는 양들이다. 목자가 없는 양은 유리방황하게 된다. 또한 양떼가 없는 목회자 역시 허탈하고 공허합니다. 그래서 양과 목자는 서로 공생관계입니다. 공존관계입니다. 서로를 필요로 해서 목자는 양들을 위해서, 목숨을 버릴 각오가 되어 있으며, 양들은 목자의 음성을 반드시 들어야 합니다. 이렇게 될 때 여러분은 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목자는 어떤 양들을 원하느냐?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양들을 원하십니다.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주일을 거룩하게 성수하는 모습을 볼 때 본 교회 목회자는 너무도 행복합니다. 그러한 성도들이 역시 복을 받습니다. 사 58:13?“ 만일 안식일에 네 발을 금하여 내 성일에 오락을 행치 아니하고 안식일을 일컬어 즐거운 날이라, 여호와의 성일을 존귀한 날이라 하여 이를 존귀히 여기고 네 길로 행치 아니하며 네 오락을 구치 아니하며 사사로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14 네가 여호와의 안에서 즐거움을 얻을 것이라 내가 너를 땅의 높은 곳에 올리고 네 조상 야곱의 업으로 기르리라 여호와의 입의 말이니라”아멘.
하나님과 주의 종은 어떤 양들이 되어주기를 원하느냐? 말 3:10절의 말씀을 지키는 자들을 원하십니다.“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하나님 앞과 교회에는 어떤 양들을 원하시는가? 열심히 봉사하고 충성을 다하는 양들을 원하십니다. 대접을 잘하는 양들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생선 한 마리를 살지라도 주의 종에게 가운데 토막을 갖다드릴 수 있는 그러한 양들이 복을 받습니다.
이 시간 잠깐의 주제는 양에 대해서 입니다. 양들은 단점도 많고 장점도 있다. 양의 단점을 말한다면 방향감각이 없다. 한번 길을 잃었다하면 다시는 그 길을 찾지 못한다. 다른 짐승들은 길을 잃었을지라도 다시 찾아옵니다. 그러나 양은 길을 잃어버리면 찾아오지 못한다. 이처럼 성도들은 너무도 어리석고 나약하기 때문에, 이 악하고 캄캄한 죄악된 세대를 올바로 분간하지 못하고 현세의 대한 판단력이 없다. 그래서 그릇된 길로 가기 쉽다. 아무리 정신력을 가다듬고 산다지만 그러나 그 선한 길에서 탈선하기 쉬운 것이 바로 우리 신자들이다. 이것이 단점입니다.
둘째로 양은 눈이 나쁜 것이 단점이다. 양의 눈은 너무도 나쁘기 때문에 13.6미터 밖을 보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를 인도할 목자가 필요합니다. 목자 없이는 절대로 자신의 생명을 지킬 수 없다. 이와 같이 성도들도 목자 없이는 죽음의 길로 떨어질 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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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로 양은 판단력이 없다. 그래서 그릇 행하기에 익숙합니다. 사 53:6에“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그랬다. 이처럼 사람은 어리석은 존재이다. 학식이 없는 사람은 아예 몰라서 어리석은 것도 있다지만 학식이 풍부한 사람일수록 하나님 앞에서 너무도 어리석은 짓들을 많이합니다. 신앙생활에 있어서 너무 무식해서 큰 일이 아닐 수 없다. 학식이 풍부할수록 범죄하기 쉽고, 죄악에 깊이 빠지기도 하고, 한번 빠졌다하면 헤어나오질 못한다. 그토록 무능합니다. 그래서 사람은 그토록 어리석은 존재이다.
넷째로 양의 단점은 허약하다. 허약하기 때문에 언제나 위험하게 살고 있다. 광야에나 어디든지 사나운 짐승들이 양을 헤치려고 노리고 있기 때문에 양은 목자의 보호가 필요하다. 목자의 보호가 없이는 언제 찢기고 짐승의 밥이 될지 모른다. 양은 이런 점에서 항상 위험속에서 살고 있다. 이처럼 성도들 역시 이 험악하고 위험한 세상에서 각가지의 위험속에 노출되어 있다. 실패의 위험, 이별의 아픔, 질병의 위험, 속고 속이는 위험, 각가지의 협박으로부터 위험, 각종 사소로 인한 위험, 적의 위험과 전쟁의 위험, 지진과 각가지 재앙으로부터의 위험 앞에 노출되어 있다. 이것이 성도들의 단점이다.
다섯째로 양의 단점은 고집이 황소고집이다. 짐승 중에 양이 제일 고집이 강하다. 사 53:6에“각기 제 길로 갔거늘”그랬다. 이는 한마디로 제 고집대로 행한다는 내용이다. 앞을 잘 보지 못하고 판단력도 없고 그릇 행하면서도 고집은 황소처럼 강하기에 왼 만해서는 고집이 꺾이지 않는다. 특히 저녁때가 되면 제 맘대로 갈 곳도 알지 못하고 달아난다. 또한 병들면 죽으면 죽었지 목자의 말은 듣지 않는다. 땅바닥에 그대로 주저앉아서 고집을 부리는데 얻어터져도 꼼짝 않고 버틴다는 것이다. 그래서 목자는 최선의 방책을 쓰는데, 양의 다리를 붙잡고 사정없이 다리를 부러뜨린다는 것이다. 그리고 어깨에 메어다가 기브스를 해주고 양을 발라서 치료해주고 그러한 기간에 목자와 정이 들고 그렇게 해서 치료함 받은 양은 주인을 너무도 잘 따른다는 것이다.
이처럼 고집이 센 성도들도 이와 같습니다. 성도들이 한번 고집부리기 시작하면 주의 종이 금식하고 죽어야 돌아올까 말까합니다. 기도원이나 교회를 다니면서 집회를 인도하다보면 고집부리다가 목회자와 성도들 앞에서 지독히도 속을 석이던 성도가 결국 얻어터지고 망해서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옵니다하고 올라온 사람들이다. 그 사람들을 보면 교회에서 아주 순종을 잘합니다.
두 번째 양은 장점도 많다.
1) 시각은 나쁘지만 청각이 좋다. 귀가 아주 밝습니다. 그래서 자기의 목자와 다른 목자의 음성을 즉시 분별한다. 우리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시기를 요 10:3에“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10:27에“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고 하셨다.
2) 양은 어리석은 것도 있지만 슬기로운 점이 있다. 위에서도 말씀드렸듯이 양은 자기의 목자의 음성을 정확하게 구분한다. 자기 목자의 음성이 아니면 죽어도 따르지 않는다. 지조 없는 교인들은 이리로 갔다 저리로 갔다하고 하지만 양은 절대 그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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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분이 목자를 잘 따르는 모습을 보고 감탄해서 주인에게 양해를 구하고 주인의 옷을 그대로 빌려 입고 주인이 가진 지팡이도 신발도 모자도 다 빌려 입었다. 그리고 주인의 나팔을 들고 주인이 했던 그대로 호령을 해 보았지만 결과는 양들이 꼼짝달싹도 하지 않더라는 것이다. 그러나 주인이 지팡이를 들고 손짓을 하자 양들이 일제히 따르더라는 이야기이다. 이처럼 양들은 자기 목자를 잘 알고 있다. 타인을 따르지 않고 도망한다는 요10:5절의 말씀과 같습니다.
3) 양의 장점은 목자를 잘 따르고 순종한다는 점이다.
요10:4에?“자기 양을 다 내어놓은 후에 앞서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오되”라고 했고, 27절에“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고 말씀하고 있다. 이처럼 양들의 장점은 순종뿐이다. 여기에 양들의 존재가치가 있는 것이다.
4) 양의 장점은 깨끗합니다.
목자는 수시로 양들의 털을 물로 씻어줍니다. 그리고 너무 털이 길지 않도록 양들의 털을 깎아줍니다. 특히 양들은 더러운 것들은 먹지 않습니다. 깨끗한 것들만 먹습니다. 정결한 짐승입니다. 양들이 이처럼 깨끗한 짐승들이기에 하나님 앞에 드려지는 제물로 사용되었다. 여기서 양은 예수님으로도 비유합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목자가 되신다는 사실이 너무도 중요합니다. 성경에서 이를 잘 말씀해주고 있다. 그러므로 양들의 가치는 어린양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가지고 계신 존귀함과 같은 가치를 소유하고 있다.
그러므로 구약에 위대한 지도자들은 모두 양치는 목자였으며, 양들을 잘 관리할 줄 아는 충성된 목자들이었다. 양들의 영적교훈을 든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말씀합니다.
요1:29“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라고 했다. 계5:6“내가 또 보니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사이에 어린 양이 섰는데 일찍 죽임을 당한 것 같더라 일곱 뿔과 일곱 눈이 있으니 이 눈은 온 땅에 보내심을 입은 하나님의 일곱 영이더라”아멘. 또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리켜 하나님의 양으로 비유하셨다.
시23:1~5에서, 겔34:1~34에서, 민27:17절에, 왕상22:17에서, 왕하 18:16에서 하나님의 선민된 이스라엘을 가리켜 양들로 비유하고 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선민을 주의 기르시는 양이요, 이 백성은 잃어버린 양떼로다.(시79:13, 100:3, 렘50:6, 눅15:3.)고 말씀하셨다. 또한 우리 예수님은 사랑하는 제자들을 전도 파송하시면서 말씀하시기를‘눅10:3“내가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다”고 하셨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기르시는 양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시 23편의 말씀대로 푸른초장으로 쉴만한 물가으로 인도하시고 먹이시며 기르시고 계십니다. 할렐루야!
특히 시23편은 양들의 생활환경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양떼들인 우리에게 푸른초장이 둘러있다. 평안이 눕고 쉴 수 있는 초장이 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시원한 물가가 있습니다. 꼴을 먹으며 시원하게 물을 마시며 너무도 평화롭게 살고 있는 모습이다. 항상 내 곁에는 목자장 되시는 예수님이 함께 하고 계십니다. 이것이 엄청난 위로요 축복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저 멀리서 원수마귀들이 짐승들이 엿보고 있다. 그러나 무엇을 두려워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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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양들 위에는 하나님께서 기름으로 내 머리에 부어주십니다. 또한 양떼들의 뒤에는 목자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평생토록 정녕 따르고 있다. 시23:6에“평생토록 염려할 것도 없고 영원토록 기뻐하게 된다. 또한 양떼들의 장래에는”여호와 하나님께서 양떼들 위에 준비한 집이 있다.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고 했다.
요14:1~2에서“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라고 말씀했다. 이처럼 준비한 집, 그곳에서 성도들인 우리가 영원토록 주님과 함께 산다는 것입니다. 지금 말씀드린 양들과 목자와의 관계가 어떠하다는 것을 잘 이해되었으리라고 믿어집니다. 이를 생각할 때, 성도들과 목회자와의 관계는 떨어질 수 없는 관계입니다. 성도들은 목회자와의 참된 관계를 이루어야 한다.
그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특히 하나님의 종은 기름부어 쓰시기 위해서 이 땅에 태어나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의 사자를 잘 모시고 대접해 드려야 한다. 렘3:15절?“내가 또 내 마음에 합하는 목자를 너희에게 주리니 그들이 지식과 명철로 너희를 양육하리라”아멘.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목자를 보내주신다는 것입니다. 어느 단체이든 반드시 지도자가 필요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 시킬 때에도 모세를 지도자로 보내셨으며, 그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해 내셨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모시고 있는 목사님도 양들을 인도하기 위하여 보냄을 받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자님을 대할 때 고넬료 처럼 모셔 들여야 합니다. 고넬료는 주의 종에게 겸손하게 대하여 그에게 먼저 인사드렸다, 행10:25절?“마침 베드로가 들어올 때에 고넬료가 맞아 발 앞에 엎드리어 절하니”아멘. 그리고 그를 통하여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를 원했다. 행10:33“내가 곧 당신에게 사람을 보내었더니 오셨으니 잘하였나이다 이제 우리는 주께서 당신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듣고자 하여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아멘.
고넬료의 겸손함을 우리는 배워야 합니다. 주의 종 베드로를 맞아 자신의 영적 지도자로 삼고 모든 것을 지도받겠다는 독특한 태도를 보여주고 있다. 고넬료는 누구인가? 로마의 군대장교이다. 그는 가이사랴에 주둔하고 있는 로마 군대의 백부장이다. 가이사랴는 팔레스틴 총독 본부가 있는 곳이다. 사실 고넬료는 누구인가? 이방인이다. 그는 개종한 유대교 신봉자로 경건한 사람이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구제할 줄 아는 자비의 사람이었다. 그러나 주님이 보신 고넬료는 더 큰 구원의 은혜와 축복이 필요했다. 고넬료는 마치 시냇물을 찾기에 갑급한 한 마리의 사슴과도 같았다. 그래서 그는 전도자 베드로가 전하는 말씀을 하나님의 명하신 말씀으로 들었다.
고넬료는 다른 사람들까지 지신의 집으로 불러온 뒤 함께 말씀을 들었습니다. 고넬료는 신분의 차이를 과시하지 않고 주의 사자 베드로 앞에 겸손했습니다. 사실 베드로와 고넬료의 차이는 신분상 하늘과 땅 차이라고 볼 수 있다. 베드로는 배운 것이 없는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 잡는 어부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백부장 고넬료는 학식이 풍부한 자요, 권력가요, 군 장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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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만 그러한 고넬료가 주의 종 베드로 앞에 엎드리어 절을 했다.(행10:25). 두 무릎을 꿇고 엎드리어 절하면서 환영했다. 그리고 베드로가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아멘으로 화답하며 겸손하게 말씀을 받았습니다. 이처럼 고넬료의 아름다운 행동은 너무도 놀랍고 축복이 아닐 수 없다. 베드로를 단지 사람으로 보지 않고 물론 사람이지만 하나님이 보내신 사자라는 것을 그 마음에 확실히 믿었다는 예기입니다. 학식이 풍부하고 남달리 뛰어난 자기 자신이지만 그러한 자기 자신 가지고는 하나님을 알 수가 없고, 가까이 할 수 없다. 그넬료는 그걸 다 버린 것이다. 고넬료를 하나님의 종으로 믿었을 때 그는 하나님께로부터 복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넬료와 같이, 이 전에서 말씀을 먹이시는 주의 종을, 하나님이 보내신 목자로 알고 겸손하게 대해야 합니다. 대접해 드려야 합니다. 주의 종을 대접하고 환영하고 겸손하게 대해드 릴 때, 이는 곧 사람에게 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을 환영하고 대접하고 겸손하게 맞이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는 엄청난 축복입니다. 할렐루야!
오늘날 어떠한 교회 신자들 중에는 너무도 불쌍하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왜 신자들이 불쌍하게 신앙생활을 할까요? 예배드리는 데는 관심이 없고 오늘 목사님의 학식이 높고 낮음을 논하고 있다. 설교를 자기들 마음대로 평가를 해 가면서 앉아 있으니, 그러한 사람을 바라볼 때 너무도 가슴이 아프고 마음이 찢어질듯이 불쌍한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예배드리는 자신은 습관처럼 되어버린 그 태도에 대해서서는 전혀 아는바가 없다. 자신이 불쌍하다는 것을 느끼지 못하고 있으니, 그러한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설교자의 마음은 찢어질 듯이 가슴이 아프다는 예기입니다.
이 시간 여러분 가운데는 오늘 설교자를 바라보면서 그러한 습관을 가지고 있습니까? 여기서 설교자가 바라볼 때 분명히 있습니다. 벌써 주의 종의 마음은 그를 바라보면서 가슴으로 울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고넬료처럼 겸손하십시다. 고넬료와 같이 주의 종을 엎드리어 절하면서 겸손하게 맞아드릴 수 있는 성도가 되십시다. 할렐루야! 고넬료와 같이 되려면 많이 회개하고 많이 울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받고 지금 자신이 어떠한 성격의 소유자인가를 점검해 보시기바랍니다. 그리고 자신이 깨달았을 때 그때부로부터 하나님의 축복이 임합니다. 아멘.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교회가 있으며, 주의 사자를 이곳에 보내주셨다는 것을 믿고 목회자를 잘 받들고 협력하며 순종하고 복종하는 참된 신앙생활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성도들에게 복을 주시되 여름에 쏟아지는 장대비처럼 복을 부어주실 것입니다. 아멘.
크게 두 번째, 우리가 어떻게 해야 복을 받을까요? “대접을 잘 해드릴 때 복이 있다”
하나님은 주의 종을 통하여 역사하십니다. 주의 종을 통하여 복을 주십니다. 암 3:7에?“주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비밀을 그 종 선지자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고는 결코 행하심이 없으시리라”아멘.
우리의 하나님은 반드시 오늘 이 시대 우리를 위하여 보내주신 지도자를 통하여 역사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를 들어서 “노아홍수 때에도 노아를 들어서 그 시대에 지도자로 세우시고, 홍수를 경고케 하시고, 소돔성을 멸하실 때에도 롯을 지도자로 삼고 심판을 경고케 하고, 인도하심을 봅니다. 하나님께서는 필요할 때마다 사사들이나 선지자들이나 사도들을 통하여 그 민족을 지도하시고, ( 6 )
인도하셨다. 하나님은 어거스틴이나 존 칼빈이나 루터와 같은 인물들을 지도자로 세우시고 이 땅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었음을 봅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주의 사자들을 통하여 말씀을 전하게 하시고 말씀을 받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큰 역사가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살전 2:13에?“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쉬지 않고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속에서 역사하느니라”아멘.
뵈뢰아 교인들은 말씀에 얼마나 충실했던지 주의 종의 말씀을 받을 때에 간절하게 받고, 성경을 펼쳐들고 대조해가면서 말씀대로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하나님은 주의 종 사자를 통하여 성경을 가르치게 하시고 가르침을 받는 성도들을 통하여 역사하시고 계십니다. 할렐루야! 이 사실을 기억하시고 주의 종 목사님을 잘 대접할 때 하나님은 그에게 복을 주실 것이며, 넉넉하게 채워주실 것입니다. 할렐루야!
세 번째로, 복받는 비결은“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할 때”복을 받습니다.
주의 종을 대접할 때, 좋은 것으로 하라는 것이다. 갈 6:6에?“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아멘. 서로가 잘해야 합니다. 좋은 것들을 함께 하는 것은 신앙적인 면과 물질적인 면과 정신적인 면과 육체적인 면, 할 것 없이 좋은 것으로 함께 하라는 것입니다. 갈라디아 교인들은 주의 종 바울을 대하는데 있어서 모든 면에서 좋은 것으로 함께 했다는 것이다. 또한 주의 종 바울의 신변에 어떠한 어려운 문제가 있을 때에도 갈라디아교회 성도들은 바울을 경이여기거나 업신여기지 않았으며, 주의 종 바울을 천사와 같이 예수처럼 영접했고, 기도해 주었으며, 할 수만 있다면 눈이라도 빼서 바울에게 줄 정도로 섬겼다는 것이다.
다함께 갈 4:13~15절?“내가 처음에 육체의 약함을 인하여 너희에게 복음을 전한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14 너희를 시험하는 것이 내 육체에 있으되 이것을 너희가 업신여기지도 아니하며 버리지도 아니하고 오직 나를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또는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하였도다 15 너희의 복이 지금 어디 있느냐 내가 너희에게 증거하노니 너희가 할 수만 있었더면 너희의 눈이라도 빼어 나를 주었으리라”아멘. 여러분도 축복받기를 소망한다면 주의 종 사자를 아끼고 사랑하고 대접해 드리고 기도해 드리고, 섬기시며, 협조자가 되어 축복된 삶이 다 되시기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위에서도 언급하였듯이 엘리사를 대접한 수넴여인도 복을 받았다. 엘리야를 대접한 사르밧 과부도 복을 받았습니다. 수넴여인은 주님의 사자 엘리사를 잘 모시기 위하여 작은 방 하나를 지어 숙소로 제공해 드렸으며, 연구실과 모든 편의를 제공하여 드리고 엘리사의 축복을 마음껏 받았습니다.
다함께 왕하 4:8~17절“하루는 엘리사가 수넴에 이르렀더니 거기 한 귀한 여인이 저를 간권(懇權)하여 음식을 먹게 한고로 엘리사가 그곳을 지날 때마다 음식을 먹으러 그리로 들어갔더라 여인이 그 남편에게 이르되 항상 우리에게로 지나는 이 사람은 하나님의 거룩한 사람인 줄을 내가 아노니 우리가 저를 위하여 작은 방을 담 위에 짓고 침상과 책상과 의자와 촛대를 진설하사이다 저가 우리에게 이르면 거기 유하리이다 하였더라 11 하루는 엘리사가 거기 이르러 그 방에 들어가서 누 ( 7 )
웠더니 12 자기 사환 게하시에게 이르되 이 수넴 여인을 불러오라 곧 부르매 여인이 그 앞에 선지라 13 엘리사가 자기 사환에게 이르되 너는 저에게 이르라 네가 이같이 우리를 위하여 생각이 주밀하도다 내가 너를 위하여 어떻게 하랴 왕에게나 군대 장관에게 무슨 구할 것이 있느냐 여인이 가로되 나는 내 백성 중에 거하나이다 하니라 14 엘리사가 가로되 그러면 저를 위하여 무엇을 하여야 할꼬 게하시가 대답하되 참으로 이 여인은 아들이 없고 그 남편은 늙었나이다 15 가로되 다시 부르라 부르매 여인이 문에 서니라 16 엘리사가 가로되 돐이 되면 네가 아들을 안으리라 여인이 가로되 아니로소이다 내 주 하나님의 사람이여 당신의 계집종을 속이지 마옵소서 하니라 17 여인이 과연 잉태하여 돐이 돌아오매 엘리사의 말한대로 아들을 낳았더라”아멘.
이 말씀에서 보았듯이 수넴여인은 주의 사자 엘리사를 잘 모신 결과 아들이 없던 그 가정에 아들까지 낳게 해 주셨다. 엄청난 축복이 아닐 수 없다. 수넴여인이 축복받기 위하여 그렇게 한 것은 아니다. 오직 하나님의 사람인 것을 알았기에 기쁜 마음으로 엘리사를 대접하고 방을 만들고 침상과 책상과 의자와 촛대를 진설하여 드렸다. 할렐루야!
선지자 에스겔은 겔 44:30절?“또 각종 처음 익은 열매와 너희 모든 예물 중에 각종 거제 제물을 다 제사장에게 돌리고 너희가 또 첫 밀가루를 제사장에게 주어 그들로 네 집에 복이 임하도록 하게 하라”아멘. 각종 처음 익은 열매와 모든 예물 중에 각종 거제 제물을 제사장에게 돌리라고 했다. 또한 첫 밀가루를 제사장에게 주어 네 집에 복이 임하도록 하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거제란“테루마”인데 제사장이 그 예물을 제단 위에서 높이 들었다가 내려놓는 제사로 하나님께 바쳐진 것을 다시 제사장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을 상징한다. 내 교회 목회자와 좋은 것들을 함께할 때에 복이 임한다고 했습니다.
이와는 반대로 하나님의 부름받은 종을 협력해 드리지 못하고 괴롭게 해 드린다면 결과는 뻔한 것이다. 구약에서 아론과 모세를 거역하던 고라와 그 자손들이 처절하게 망했다. 고라(기회) 1. 에돔 사람 에서의 아들인데, 첩 오홀리바마(히위족속)의 소생이다. (창36:5, 14, 18, 대상1:25) 보아 알 수 있다. 2. 레위의 증손이요 고라의 조상이다(출6:21,24, 민 26:58, 대상 6:22,37, 대하 20:19, 시42:44~49, 84,85,87, 88편)의 제목에 나와 있다. 그 자손들은 성전에서 찬송 부르는 일을 맡았다. 또한 성막에서 문지기와 수종 드는 일을 맡았다.(대상9:19,31, 26:1). 그런데 광야에서 모세에게 반역한 것이다.
고라는 모세의 종형인데 오만불손했고, 명예욕이 커서 르우벤 자손의 다단과 아비람과 온이 작당한 결과 이스라엘 자손 총회에서 택함받은 유명한 족장 250명과 한 무리가 되어, 모세와 아론을 반역함으로 망합니다. 하나님의 택한 사자를 괴롭히면 유익될 것은 아무것도 없다. 망하는 일밖에 없다. 거듭 말씀드린다면 하나님이 기름 부어 세운 사자를 인간적인 차원에서 생각한 결과, 모세 형제가 분수에 지나치게 굴며, 총회 위에 스스로 높인다면서 괴롭혔다. 그 결과 그들과 그 모든 소속들이 산체로 땅속으로 삼켜지고 음부에 뚝 떨어지고 말았다. (성경 민16:1~35절 참고) 그들이 총회 중에서 망했다. 제가 서울시 화곡동에 있는 어느 교회를 가서 식사 대접을 사택에서 하게 되었다. 그 때 목사님의 어머님 되시는 권사님이 계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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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아들 목사를 부르실 때는 야! 전목사야 이래라 저래라 합니다. 그리고 전화가 걸려 와도 예 전목사 전화 받아라 합니다. 물론 지금은 목사님 하고 예의를 갖추고 부릅니다. 당시 제가 권사님! 앞으로는 이러이러 하시면 안됩니다. 하고 말씀드렸습니다. 그 때 이후로는 절대 야! 목사야 하시지 않습니다.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여러분 중에 아들이나 딸 중에서 목사님이 되었다고 합시다. 육적으로는 내 아들이요 딸이지만 이는 하나님께서 기름부어 세우신 주의 종이 되었기 때문에 과거의 자식처럼 대해서도 안될 것이며, 함부로 책망하고 반역하는 불순종하는 일을 삼가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종이기 때문에 부모라 할지라도 그를 섬기고 순종하고 그 가르침에 따라야 합니다. 잘 모셔야 합니다. 할렐루야!
민16:31~35절을 보시면 하나님의 진노가 나타나서 고라당과 그 소속들이 갑자기 땅이 갈라져서 땅 속으로 다 떨어지고 멸망하고 말았다. 그리고 고라를 따르던 250명도 불에 타서 죽었다. 땅에 묻혀서 죽은 사람들 중에는 고라. 다단. 아비람. 세 사람과 그 가족들과 또는 고라의 종들(고라에게 속한 모든 자들)이었다. 그렇지만 고라의 아들들은 죽지 않고(26:9~11) 번성하였으며, 다윗의 시대에는 성전에서 노래하는 자들로 유명했음을 봅니다.(대상 9:19, 대하 20:19). 또한 하나님의 사자를 아이들이 조롱했다가 암곰들에게 처참하게 찢겨죽고 말았다. 왕하 2:23~25에서 엘리사가 여리고를 떠나 벧엘로 올라가는 도중에 아이들이 나와서 대머리라고 조롱을 합니다. 아이들에게 조롱을 받던 엘리사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저주를 하자 수풀에서 암곰 두 마리가 뛰쳐나와서 무려 42명이나 찢어서 죽인 것이다.
또한 구약에서 모세를 비방했던 미리암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는 아론과 모세의 누이이며, 여선지자이다. (출15:20, 민 26:59). 미리암은 모세를 갈 상자에 넣어 나일강 갈대 숲 사이에 두었으며 멀리서 모세를 지켜보기도 했다. 그때 바로의 딸이 아기 모세를 발견하게 되었으며, 미리암의 주선으로 유모를 정하게 되었다. 사실 그 유모는 바로 모세의 생모이다. 그녀는 여선지자로서 동생들과 더불어 하나님께 선택되어 히브리인의 지도자가 되었다(출4:15, 29, 30). 그렇지만 문제가 터지고 말았다. (민12:1~16절)을 읽어보면 자세히 알 수 있다.
여기서 모세는 구스 여인을 아내로 맞아드린 것이다. 그러자 아론과 미리암이 모세를 비방했다. 세상에 택함받은 주의 종이 이러한 죄를 저질렀다고 비방을 한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모세를 자신의 발바닥 밑으로 끌어내리는 비방과 자신들이 주의 종을 책망하는 영권을 가진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주의 종 모세가 구스 여인을 취하게 되자 이제는 모세가 형편없는 인간으로 알았고, 자신은 그러한 일을 안 했기 때문에 모세보다 깨끗한 줄 알았다. 그래서 모세에게 하는 말이 민12:2에?“여호와께서 모세와만 말씀하셨느냐 우리와도 말씀하지 아니하셨느냐”라고 말합니다. 마치 자신들에게도 모세에게 주어진 영권과 같은 은혜가 있다고 주장한 것이다.
결과는 하나님의 뜻에 대한 불순종 때문에 모세의 누이 미리암은 문둥병이 걸렸으며, 눈과 같이 희게 되었다. 이 모습을 바라본 모세는 누이 미리암을 위하여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으며 하나님은 그녀의 문둥병을 고쳐주셨습니다. 그렇지만 미리암을 진밖에 칠 일을 가두어 그 후에 돌아오라고 말씀합니다. 이 내용은 민12:14~15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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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미리암은 민20:1에 보면 그는 정월에 이스라엘 백성이 가데스에 머물고 있을 때 생을 마치고 맙니다. 죽었습니다. 이뿐만 아니라 아론의 두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제단에서 분향 한번 잘못한 죄로 불에 타서 죽어버린 사실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섬기는 일, 거룩한 일에 범죄 한다는 것은 참으로 두렵고 떨리는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꿈속에서라도 주의 종 사자를 가슴아프게 대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섭섭하게 대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잘 모시고 주의 일에 힘써 나아갈 때에 절대 손해 볼 일이 없다. 위에서도 말씀한대로 하나님의 복이 임한다고 했습니다. 할렐루야!
우리 한국교회와 성도들이 참으로 복 받았다. 그 이유는 주의 종들이 많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홍수를 이루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종들이 이처럼 많지만 하나님은 주의 종들을 참으로 귀하게 여기십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귀한 사자님을 참으로 귀하게 가치가 넘치게 여기시고 잘 대해 드려야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약시대에나 신약시대를 물론하고 죄악이 관영한 자들을 당장에 벌하신 일이 많습니다. 어떤 신학자들은 악한 자들을 벌하시는 하나님의 행동은 구약에만 있었지, 신약에 와서는 없다는 듯이 말한다. 그 이유는 구약은 죄인들을 심판하고, 신약은 죄인들을 용서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렇지만 이 해석은 성경을 세대주의적으로 잘못 보고 있기 때문이다. 세대주의 자들은 용서하여 구원하는 일이 신약에만 있는 것처럼 생각하고 말하지만, 사실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십니다.(히13:8), 그리스도를 계시하는데 있어서 구약과 신약은 동조하고 있는 만큼 심판의 진리와 용서의 진리가 구약에도 있고 신약에도 있습니다. 구약시대에도 믿음으로 구원받았고, 신약시대에도 믿음으로 구원받습니다. (창15:6, 히 11:7). 그런가 하면 강퍅한 죄인이 그 죄 값으로 죽임을 당한 사건이 신약에서도 기록되어 있다. 행5:1~11절에서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사건이 이를 증명해 주고 있다. 가룟유다가 목 메달았다가 떨어져서 배가 터져서 죽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여러분은 목회자와 성도와의 관계를 잘 들었습니다. 주의 종과 성도들과의 참된 관계가 바로 될 때 복이 임합니다. 피차가 위로하고 권면하면서 남은 여생을 좋은 것으로 함께 하면서 주님의 듯을 따라 살면서 하나님께서 부어주시는 복을 넘치도록 받는 역사가 있기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할렐루야!
네 번째로 복받는 비결은 “주 안에서 헌신을 다하는 것이다.”
엡1:23절에서“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라”고 하셨습니다. 바울 사도는 교회를 위하여 받는 고난을 자기 육체에 다 채우겠다고 했다(골 1:24). 교회에 대한 관심과 헌신과 봉사하는 가정과 국가는 복을 받는 것입니다. 다윗 왕이 법궤를 모시고 오다가 웃사가 죽자 법궤 옮기는 것을 중단합니다. 이때 가드사람 오벧에돔의 집에서 법궤를 3개월 동안 모시게 됩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그 가정에 복을 내리셨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다윗 왕은 기쁨으로 하나님의 언약궤를 다시 옮겨 왔음을 삼하6:10~12절을 보아 알 수 있다. 이 시대에도 몸된 주님의 제단을 통하여 복을 주십니다. 하나님의 교회를 위하여 헌신하고 봉사하는 성도들에게 하나님은 복을 내리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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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헌신할 수 있을까요?
1) 예배드리는 처소를 하나님의 전으로 섬겨야 합니다. 합 2:20“오직 여호와는 그 성전에 계시니 온 천하는 그 앞에서 잠잠할지니라”고 했다. 하나님의 교회는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집입니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서 경건하고 성스러워야 하기 때문에 조심해야 합니다. 말하는 것도 조심하고 행동하는 것도 조심하고 모든 면에서 조심해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의 마음을 성전삼고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그러므로 내가 출석하는 교회가 내게 있어서 안식처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행동과 언어구사에 조심하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책임이 있다. 무엇보다도 이를 위하여 노력하는 것이 바로 헌신과 봉사가 되는 것입니다. 내 언행을 항상 조심하고 그 헌신을 통하여 하나님의 교회를 거룩하게 만들어야 한다. 이것이 성도들이 해야 할 일입니다. 이를 위하여 힘쓰고 애써서 헌신할 때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2) 헌신할 수 있는 것은 “교회는 형제를 사랑해야 한다”
요 1서4:21“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아멘. 형제를 사랑하는 것은 교회를 위하여 헌신하고 봉사하는 것이다. 바울은 골1:24에“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라고 했다. 하나님의 교회를 위해서는 어떠한 희생도 감당하리라는 각오한다는 것이다. 바울은 또 말기를 고전10:31~33절“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32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나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 33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나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하라”고 했다.
자신의 유익보다는 많은 사람의 유익을 위하여 일 하겠다는 것이다. 이는 참으로 교회를 위하는 것이요 참된 헌신이요 봉사이다. 자신이 희생함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유익을 줄 수 있는 일로 인하여 성도들이 은혜를 받고 그들도 주의 일에 힘쓰는 것을 볼 때, 이것은 참으로 기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관심으로 직분자들이 앞장서서 나아갈 때 복을 받는 것이며, 헌신의 보람이 여기에 있는 것이다. 할렐루야!
3) 어떻게 해야 헌신할 수 있는가? 교회의 발절을 위하여 힘쓰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눅14:23에“주인이 종에게 이르되 길과 산울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여러분은 하나님의 교회에 신자들이요 직분자요 하나님의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몸된 교회를 발전시킬 의무가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교회를 부흥시키기 위해서는 헌신하고 봉사할 책임이 주어져 있다. 때로는 밀알처럼, 자신이 썩어서 많은 열매를 맺어야 한다. 어찌했던 교회가 부흥되어 갈 방법을 기도함으로서 찾아야 합니다. 이것만이 자신이 주님을 위하여 헌신하는 것이다.
바울은 12:18에서“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교회에 모여서 서로를 평안하게 하고, 교회를 평안하게 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교회는 부흥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 시간도 교회가 성도들이 일치가 되고 연합되기를 원하십니다. 참된 교회의 부흥은 여러분들이 일치가 되어졌을 때 그리고 참된 교제가 있을 때 일어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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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로역정의 저자 죤번연은 말합니다.“이상하다.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사실이 하나 있다. 마귀와 더불어 싸워야할 성도들이 왜 자기들끼리 싸우고 있는가? 우리의 대적은 사탄이 아닌가.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다. 그런데 왜 성도들은 일치된 교제를 나누지 못하고 있는가. 우리의 대적은 사탄인데 우리는 우리의 시선을 왜 그리스도 예수 안의 다른 성도들에게 돌려 불편한 인간관계를 맺고 있는가”라고 했다. 이 말이 16세기에 남긴 말이지만 오늘 우리들에게도 적용되는 말이기도 합니다.
오늘 여러분 가운데 단 한 사람, 그가 비록 단 한 사람일지라도 그가 다른 사람과의 불편한 관계라면 결정적으로 그 한 사람으로 인하여 교회의 부흥을 저해하게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교인 한 사람이 교회를 오래동안 나오지 않아서 전도사와 함께 심방을 갔습니다. 만나서 축복을 빌어주고 왜 그동안 교회를 나오지 못했습니까? 하고 묻자 아무런 말도 못하고 있다가 한참 만에 하는 말인즉 저는 혼자 믿는 것이 편해요 교회 나가서 복잡한 인간관계 속에 휘말려 드는 것이 부담처럼 여겨집니다, 합니다.
그래서 목사는 활활 타오르는 장작나무에 대해서 말합니다. 성도님 장작불이 많이 쌓을수록 그 불길은 강해집니다. 그러나 잘 타고 있는 장작 하나를 끄집어내면 그 장작은 얼마 안가서 불이 꺼지고 연기만 피우다가 영영 꺼져 버립니다. 이와 같이 성도님이 함께 있지 못하고 떨어져서 혼자 신앙생활한다는 것은 불이 꺼지고 만 장작과도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를 연합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다시 나와서 함께 불을 붙여할 것이라고 권면해 주었습니다.
어느 농장에서 어린아이를 잃어버린 사건이 있었다. 일하던 농부들과 종들이 그 넓은 농장을 헤치면서 아이를 찾아보았지만 헛수고였다. 해는 벌써 기울어지고 있다. 그때 일하던 하인이 좋은 의견을 제시했다. 우리가 저 밀밭 끝에 가서 손을 나란히 잡고 앞을 향해 나란히 해져 나가자는 것이다. 몇 시간을 찾아도 찾지 못했던 아이가 나란히 손을 잡고 해져 나갔을 때 불과 30분 이내에 밀밭 속에 쓰러져 있는 아이를 찾았다는 것이다. 이처럼 교회는 성도들이 서로가 손을 나란히 잡아야 합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교회는 손을 잡아야 합니다. 뜨겁게 밀착된 성도들의 교제를 통해서 하나님의 역사는 나타난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바로 교회가 평안케 되는 일이요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할렐루야!
행9:31에“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고 했다. 하나님의 교회가 화평을 도모하면 교회는 저절로 부흥될 수 밖에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헌신해야 합니다. 그래야 축복이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위에 임합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마 5:9에서“화평케 하는 자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행2:47에서“2:47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날마다 착한 행실을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하나님께는 영광을 돌려드려야 한다. 그리고 사람들에게는 칭찬받는 삶이 된다면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교회 부흥과 발전을 위해서 우리가 조심성 있게 행동하고 말할 때 이것이 곧 헌신이요 축복의 사람이 되는 비결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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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함께 겔 36:37~38절“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래도 이스라엘 족속이 이와 같이 자기들에게 이루어 주기를 내게 구하여야 할지라 내가 그들의 인수로 양 떼같이 많아지게 하되 제사드릴 양 떼 곧 예루살렘 정한 절기의 양 떼같이 황폐한 성읍에 사람의 떼로 채우리라 그리한즉 그들이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하셨느니라”아멘.
땀 흘려 기도할 때 교회는 부흥되며 교회가 발전된다. 이것이 위대한 헌신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막 9:29에“기도 외에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고 하셨다. 이 말씀 외에도 성도들이 모여서 교회를 위하여 내 교회 목사님과 사모님을 위하여 장로님들과 권사님, 전도사님들과 성도들과 교사들을 위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각 기관의 선교를 위하여 헌금하고 성전 건축을 위해서도 또는 성전 확장을 위해서도 기도해야 한다. 왕상 8:13~14절에 ? “내가 참으로 주를 위하여 계실 전을 건축하였사오니 주께서 영원히 거하실 처소로소이다 하고 14 얼굴을 돌이켜 이스라엘의 온 회중을 위하여 축복하니 때에 이스라엘의 온 회중이 섰더라”아멘. 하나님이 계실 성전을 건축하니 하나님이 받으시고 솔로몬이 이스라엘의 온 회중을 위하여 축복했다. 하나님의 복이 임했습니다.
우리가 학개서를 보면 성전을 지어 하나님 앞에 헌당할 때 하나님이 기뻐하셨고 복을 크게 내리셨음을 학1:2~11절을 보아 알 수 있다. 그 외에도 교회의 부흥과 발전을 위하여 최선을 다할 때에 하나님은 기뻐하시고 복을 명하여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전인 교회에서 봉사하는 일 헌신하는 일, 참된 교제와 연합하는 일을 할 때에 이 일은 너무도 복된 일이기에 헛되지 않습니다. 눅2:36~38절“또 아셀 지파 바누엘의 딸 안나라 하는 선지자가 있어 나이 매우 늙었더라 그가 출가한 후 일곱 해 동안 남편과 함께 살다가 37 과부 된 지 팔십사 년이라 이 사람이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야에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섬기더니 38 마침 이 때에 나아와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예루살렘의 구속됨을 바라는 모든 사람에게 이 아기에 대하여 말하니라”아멘.
다섯 번째로 어떻게 해야 복을 받을 수 있는가? “철저히 회개하라”
욥 42:6에“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한하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라고 했다. 욥이 철저히 회개할 때 하나님께서 욥의 곤경을 돌이키시고 과거에 잃었던 소유보다도 배나 더하여 주셨다.
욥 42:10에“욥이 그 벗들을 위하여 빌매 여호와께서 욥의 곤경을 돌이키시고 욥에게 그전 소유보다 갑절이나 주신지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갑절로 복을 받으려면 회개하는 것 외에는 없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회개할 것인가?
1) 자신이 하나님 앞에 죄인임을 고백하라는 것이다. 바울은 딤전1:15에“나는 죄인 중에 괴수라”고 고백했다. 만일 자신이 죄가 없다고 생각한다면 회개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고 시인한다면 회개할 여지가 있는 것이다. 바리새인들은 죄가 없다고 자랑했지만 세리는 나는 죄인이라고 했다. (참고 눅 18:10~14절) 행 2:38에서 회개하면 하나님께서 성령을 선물로 주심을 봅니다. 그러므로 철저히 회개하여 성령의 충만한 역사가 있기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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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어떻게 회개할 것인가? 죄 범하는 일을 슬퍼해야 한다.
시 38:18절에서“내 죄를 슬퍼하나이다”고 했다. 바울은 고후 7:10~11에서 죄를 슬퍼하는 마음은 회개를 이루어 구원을 얻는다고 했다. 사실입니다. 지금까지 지은 죄를 슬퍼하고 회개할 때, 하나님께서는 기쁨을 주십니다. 회개하면서 슬퍼할 때 용서받는 기쁨이 충만하게 되는 것이다.
3) 어떻게 회개할 것인가? “고치는 생활을 해야 한다”
마 3:8절에“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고 하셨다. 이는 고치는 회개를 말한다. 사도 바울은 엡4:28에서 도적질하는 자는 다시 도적질하지 말고 돌이켜 빈궁한 자에게 구제할 것이 있기 위하여 제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고 했다. 과거의 자신의 지은 죄를 끊어 버리고 회개하고 고치면 주님은 과거의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히 10:17절에“저희 죄와 저희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합니다. 주님은 내가 저지른 모든 죄를 회개하면 용서하시고 복이 임한다고 하셨습니다.
요 1서 1:9절에“만일 우리가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라고 했다. 우리는 철저하게 회개하여 약속하신 하나님의 복 주심을 풍성하게 받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섯 번째로 복받는 비결은 내 집에 찾아오신 손님을 잘 대접했을 때 복이 임한다.
히 13:1~2절“형제 사랑하기를 계속하고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아멘. 여기서 말한 형제란 혈통이 아닌 영통으로 하나된 형제들을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성화된 성도들을 가리킨다. 그렇다고 해서 믿지 아니한 형제들을 사랑하지 말라는 예기가 아니다. 특히 주 안에서 만난 신자들은 서로가 사랑해야 한다. 계속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쉬운데 그러나 계속해서 사랑한다는 것은 쉽지 않다. 예수님은 그 사랑을 계속하되 그 사랑으로 손님 대접하는 것은 대단히 값진 것이다. 이는 복받는 일이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마10:40~42절에서“냉수 한 그릇이라도 대접하는 자는 하늘에서 그 상을 잊지 않겠다”는 것이다. 바울은 롬12:13절“손 대접하기를 힘쓰라”고 하셨다. 사람이 사는 집에는 사람들이 찾아오기 마련이다. 내 집에 찾아주신 손님을 어떻게 대접하느냐에 따라서 기분이 좌우되고, 대접하는 집의 인심여하가 들어난다. 같은 목회자라도 어느 목사님은 없어도 손님으로 오신 분을 커피 한잔이라도 더 대접해서 가시도록 하는 분이 있는가 하면, 어느 목사님은 대접받기는 좋아하는데 대접하는 데는 아주 인색하다. 교회를 보면 즐겨 대접하는 교회는 교회 성도들까지 닮아간다. 그러나 대접하는 데 인색한 교회는 그 교인들까지도 인색하다.
이러한 말이 있다. ‘오는 손님 기쁨으로 맞이하고 가는 손님 인상 깊게 하자’는 것이다. 명심보감 성심편에 보면“손님으로 가서 오래 머물면 남에게 업신여김을 받고 자주 오면 친분도 멀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고 하셨다. 그러나 주위할 일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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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로몬은 잠 25:17절에서“너는 이웃집에 자주 다니지 말라 그가 너를 싫어하며 미워할까 두려우니라”고 했다. 까닭은 잠11:13절에서“두루 다니며 한담하여 남의 비밀을 누설하기 때문이고”잠 16:28에서“친한 벗을 이간하기 때문이며” 잠6:18절에서“형제 사이를 이간하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그러므로 손님으로 가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고, 손님을 대접하는 일도 쉬운 일은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대접을 해야 할까요?
1) 유쾌하게 대접하라는 것입니다.
창18:5절“당신들의 마음을 쾌활케 하신 후에 지나 가소서”하였다. 아브라함은 손님을 유쾌하게 대접하여 보내는 사람이다. 손님이 대접해 주기를 청하지 아니하고 주인이 손님에게 유쾌하게 대접하여 보내는 사람입니다. 아브라함은 유쾌하게 대접을 받아주실 것을 청하였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신앙심에서 손님을 대접해 드린 것이다. 요한 1서 4:20절“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느니라”고 했다.
마22:37~40절?“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아멘. 그래서 아브라함은 조건부의 대접이 아니며, 무조건적인 대접이었다. 유쾌하게 대접해 드렸다.
2) 손님을 대접하는 것은 정성껏 대접하라는 것이다.
창 18:6~7절에서 아브라함은 떡과 고기로 요리를 해서 손님을 대접하였다. 손님을 대접하되 가장 좋은 송아지를 선별하여 잡았으며, 요리를 잘 해서 손님을 대접해 드렸다. 이는 사랑의 대접이었다. 사랑의 음식은 그 어떠한 음식보다도 맛이 좋은 것이다. 그래서 손님을 해충과 같이 여기지 아니하고 대접하되 정성껏 대접해야 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손님이 오면 한때는 최선을 다해서 대접하고, 그 다음부터는 대접하는데 문제가 있다. 프랑스의 의사인 바블레는 이렇게 말합니다.“첫날은 손님이지만 둘째날은 짐이요 셋째날은 해충이다”라고 했다. 결국은 냉대를 받는다는 것이다. 한번은 방랑시인 김 삿갓이 친구 집에 갔는데 때가 되었음에도 밥상이 들어오지를 않는다. 그래 이상한 일이야 하고 생각하고 있는데 그 집 하인이 와서 하는 말인즉“人良卜一(인량복일)하오니이까? 합니다. 이는 식상을 올일까요? 그런 예기이다. 이 말을 듣고난 친구가 하는 말이 月月山山커든 합니다. 이 말은 친구가 가거든 밥상을 가지고 오라, 그런 예기이다. 화가난 김 삿갓은 그 친구 집을 나오면서 이렇게 말합니다.(대 점자로다)하였다. 大·者 즉 犬者(견자) 개 같은 놈이란 뜻이다. 이렇게 되어서는 안될 일이다. 손님이 찾아오면 잘 대접하든지 못 대접하든지 정성껏 대접하여 가실 때 유쾌한 마음으로 가시도록 하는 것이 예의이다.
3) 손님을 대접하는데 있어서 전송하는 예의로 하라는 것이다.
창 18:16절에서“그 사람들은 거기서 일어나서 소돔을 향하고 아브라함은 그들을 전송하러 함께 가니라”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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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사람을 대할 때 유종의 미를 거두어야 한다. 거짓 선지자나 이단들은 언제나 끝이 다른 것이다. 바울이 에베소 교회를 떠날 때 에베소교회 성도들은 주의 종 바울의 목을 안고 입 맞추고 울면서 배를 타는 곳까지 전송하였음을 행20:37~38절에서 말해주고 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말하기를 요 3서 1: 6절에서 ‘사랑으로 합당하게 전송하는 것이 가하다’고 하였다.“네가 하나님께 합당하게 저희를 전송하면 가하리로다”고 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찾아오신 손님을 유쾌하게 대접하고 정성껏 대접하고 끝까지 전송하는 예의가 필요하다. 이렇게 하면 아브라함이나 롯처럼 하나님과 천사들을 대접하게 되는 축복을 받게 되는 것이다.
수넴여인은 찾아온 엘리사를 잘 대접하여 복을 받았다. (왕하 4:8~37)
사르밧 과부도 찾아온 엘리야를 잘 대접함으로 그 집에 큰 축복이 임했다.(왕상 17:8~16)
나와 여러분도 손님 대접하기를 힘써서 하나님의 복이 여러분과 가정 위에 그리고 교회 위에 크게 임하시기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상과 같이 주의 종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는 말씀을 주제로 하여 손님대접에 이르기까지 복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출처:한국교회 부흥설교 설교 정보수집 편집위원 협조와 추천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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