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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게 하시다가 싸매시는 하나님 (욥5:17-27)

by 【고동엽】 2022. 9. 27.

아프게 하시다가 싸매시는 하나님   (욥5:17-27)


실존주의 철학자 키에르케고르(Kierkegaard)는 ‘나는 고통한다. 그래서 나는 존재한다.’라고 하였습니다. 사람은 자신의 불안하고 고통하는 것 자체를 의식할 수 있다는 사실 때문에 존재하는 실존이라고 한 것입니다.
저 동방 우스땅에 살던 성도 욥의 친구였던 엘리바스는 「인생은 고난을 위하여 났나니 불티가 위로 날음 같으니라」고 욥에게 말하였습니다(욥 5:7). 마치 불티가 위로 튀어 오르며 날음이 자연현상의 필연인 것처럼, 인생에게는 필연적으로 고난이 따르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욥이 당하고 있는 환난의 괴로움을 하나님께 징계를 받고 있는 것으로 해석하였습니다. 본문 17절에 「볼지어다 하나님께 징계받는 자에게는 복이 있나니 그런즉 너는 전능자의 경책을 업신여기지 말지니라」고 하였습니다.

엘리바스는 이것을 다르게 표현하기를 지금 하나님이 욥을 ‘아프게’ 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다음에는 ‘싸매실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마치 의사가 병자를 수술하고, 그 다음에 그 수술한 자리를 싸매고 고치는 것과 같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다시 이 사실을 「…상하게 하시다가 그 손으로 고치시나니」라고 하였습니다(욥 5:18).

Ⅰ. 아프게 하고, 상하게 하시는 하나님이라고 하였습니다.

5장 18절에 「하나님은 아프게 하시다가… 상하게 하시다가…」라고 하였습니다.

1. 하나님이 아프게 하시고, 상하게 하시는 경우가 어떠한가?

1) 그 대부분의 경우는 사람이 범한 죄를 깨닫게 하고, 회개를 요구한 경우들입니다.
사실상 이 세상에서 인생들이 겪는 고통은 죄의 결과입니다. 모든 인생은 사실상 고난 중에서 출생합니다. 다윗은 말하기를 모친이 나를 죄중에서 잉태하였다고 하였습니다(시 51:5). 욥은 말하기를 「재앙은 티끌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요 고난은 흙에서 나는 것이 아니라 인생은 고난을 위하여 났나니…」라고 하였습니다(욥 5:6-7).
인생은 죄 때문에 상하고, 죄 때문에 아파합니다. 죄 때문에 영혼이 아프고, 육신이 아픈 것입니다. 죄가 아픔과 상함을 낳는 것입니다. 죄가 고난을 낳고 말았습니다(욥 4:8, 잠 1:31).
아브라함의 아픔이 그러하였습니다(창 16:5, 21:12). 다윗의 아픔이 그러하였습니다(시 51:). 요나의 아픔이 그러하였습니다(욘 2:). 베드로의 아픔이 그러하였습니다(마 26:75). 이 세상을 살아갔던 모든 인류는 예외없이 죄 때문에 상하고 아파하였습니다.

2) 의인의 연단을 위한 경우들입니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욥의 경우입니다. 그는 순전하고 정직하며,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에서 떠난 자로서 하나님의 인정을 받은 자였습니다(욥 1:1, 8). 그럼에도 하나님은 욥을 더 연단하고 축복하기 위하여 그를 아프게 하시고, 상하게 하셨습니다.

7천 마리의 양과 3천 마리의 약대, 5백 겨리(1000마리)의 소, 5백 마리의 나귀, 심히 많은 종들이 일시에 절단이 났습니다(욥 1:13-17). 일곱 명의 아들과 세 명의 딸이 무너진 집 더미에 깔려 순식간에 죽었습니다(욥 1:18-19). 욥의 몸에는 원인 모를 악창이 나서 집에 거하지 못하고, 재 가운데로 거처를 옮겨야만 했습니다(욥 2:7-8). 나중에는 사랑하는 아내까지 하나님과 욥을 사실상 저주하였습니다(욥 2:7-10). 그리고 이제 그의 사랑하는 친구들로부터 책망과 힐난을 받고 있는 중입니다. 의인에게도 아프고 상하는 경우가 있었음을 봅니다.

3) 선민 구원을 위한 섭리적 연단의 경우들입니다.
그것은 요셉과 같은 경우들입니다. 하나님은 요셉을 그 형들의 마음과 손에서 미움을 당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애굽으로 보내게 하였습니다. 애굽 보디발 장관 집에서는 누명을 쓰고, 2년이 넘는 옥고의 아픔을 당하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고통의 장소가 바로왕에게 가는 첩경이 되었고, 마침내 애굽의 총리가 되었습니다. 그가 나중에 그 형들에게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이다」라고 간증한 사실을 보게 됩니다(창 45:5, 7, 8, 9).

복음의 사도 바울은 애매하게 수없는 고난을 받았습니다. 나중에는 예루살렘에서 로마군대의 보호를 받고 가이사랴로 내려왔습니다. 거기서 연금생활을 하다가 마침내 로마로 호송을 당하였습니다. 그것은 사실상 고통이 아니라 위대하신 하나님의 구속사를 전개하시는 세계선교의 수단이었습니다(행
28:16-20).
그는 복음 선교의 소망 때문에 쇠사슬에 매였다고 하였습니다(행 28:20). 그럼에도 그 모든 것들은 실로 아픈 것들이었습니다. 사람들(이방인, 본토인)의 핍박으로 말미암아 아팠고, 자연의 위험들로 말미암아 아팠습니다.

2. 아프게 하시는 방법들이 무엇인가?

1) 악인을 들어 의인을 아프게 하고, 상하게 하고, 괴롭게 하는 경우들입니다.
마치 이스라엘의 범죄를 징계(교정)하기 위하여 바벨론이나 앗수르 같은 이방인들을 들어서 선민을 아프게 하시고 상하게 하시는 것과 같은 경우들입니다. 그럼에도 저들은 선민을 괴롭힌 이유로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말았습니다(슥 1:15).

2) 사랑하는 동료들이 대적이 되어 아프게 하고 상하게 하는 경우들입니다.
다윗이 병중에서 「나의 신뢰하는 바 내 떡을 먹던 나의 가까운 친구도 나를 대적하여 그 발꿈치를 들었나이다」라고 한 경우입니다(시 41:9). 환난 날에 형제가 형제를, 아비가 자식을 죽는 데 내어 주며, 자식들이 부모를 대적하여 죽게 하는 경우들입니다(마 10:21). 욥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의 아내가 그렇게 대적하였습니다. 참으로 아프고 쓰라린 고통입니다.

3) 몸의 질병이나, 명예를 잃는 아픔이나, 물질(재산)이나 아니면 마음의 고통으로 인한 아픔과 상처입니다.
지금 욥의 경우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그를 아프게 하고, 상하게 하고 있습니다. 본문 5장 19절에 「여섯 가지 환난… 일곱 가지 환난…」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문자적 의미가 아니고 많은 환난, 무수한 환난, 그 수를 세거나 그 무게를 측량할 수 없는 아픔과 상함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물질과 자녀와 아내와 친구와 명예들이 합세해서 인간 욥을 아프게 하고, 상하게 하고 있었습니다.

Ⅱ. 싸매시고 고치시는 하나님이라고 하였습니다.

다시 본문 5장 18절에 「하나님은 아프게 하시다가 싸매시며 상하게 하시다가 그 손으로 고치시나니…」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치료하시는 하나님, 회복하시는 하나님, 위로하시는 하나님, 축복하시는 하나님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5장 19절에 「여섯 가지 환난에서 너를 구원하시며 일곱 가지 환난이라도 그 재앙이 네게 미치지 않게 하신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은 궁극적으로 얼마든지 구원하여 주신다는 내용입니다. 여섯 가지 환난이나 일곱 가지 환난같이 이루 셀 수 없는 아픔과 상처를 받았을지라도, 하나님의 마음과 하나님의 손이 그 아픔과 상처를 치료해주지 못할 것이 전혀 없다는 말입니다.

5장 20-27절에서 하나님의 회복을 열거하고 있습니다. 기근에서, 칼 권세(전쟁)에서, 악담과 훼방(혀의 채찍)에서, 멸망에서, 들짐승에서, 밭에 있는 돌들에서 구원하여 주신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징계를 잘 참고 신종하는 자들에게 장막의 평안함을 주신다고 하였습니다. 자손의 축복을 주신다고 하였습니다. 무엇을 잃지 않게 해주신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장수의 축복을 주신다고 하였습니다.
욥은 하나님의 그 약속대로 그 결과가 그대로 되었습니다. 욥기 23장 10절에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고 한 그대로였습니다. 욥기 42장 5절에는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그의 신앙인격은 정금 같은 보배로운 믿음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그의 모년에 전에 가졌던 그 모든 소유의 배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자녀 10남매를 다시 받았습니다. 세 딸들은 모두 당대의 미인들이었다고 하였습니다(욥 42:10-17).
하나님이 그를 아프게 하시다가 싸매주고, 상하게 하시다가 그 손으로 고쳐주신 결과입니다. 안전한 가옥, 풍부한 물질, 행복하고 번영하는 가족, 평화롭고 만족하며 평안하게 장수하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아프게 하시다가 싸매주는 사람은 복이 있는 자입니다. 하나님이 상하게 하시다가 그 손으로 고쳐주심을 받는 사람은 복이 있는 사람입니다.
이것을 가리켜 5장 17절에 「볼지어다 하나님께 징계받는 자에게는 복이 있나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징계를 받는 자는 불택자가 아니고, 선택받은 자이기 때문입니다. 아니, 하나님의 징계를 받는 자는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아프게 하시고 상하게 하시다가 싸매시고 고치시는 사람은 바로 하나님의 아들로 대우받는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히브리서 12장 6-11절에는,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신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채찍질하신다고 하였습니다. 결코 징계는 다 받는 것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아들에게는 징계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징계가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징계(paideuvw)’는 양육, 교육, 교정, 훈계를 뜻합니다.
하나님의 징계를 통하여 ① 우리가 그의 참 아들된 증거를 삼는다고 하였습니다. ② 그 징계를 통하여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참여케 하시는 유익을 목적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③ 그리고 그것이 당시에는 슬퍼 보이는 것 같아도,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달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는 결과론적 축복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를 아프게 하시다가 싸매시며, 상하게 하시다가 고치시는 징계의 비법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은 복이 있는 자라고 하였습니다.

미국의 영화배우이자 가수였던 토니 폰테인은 하나님이 아프게 하시다가 싸매 주고, 하나님이 상하게 하시다가 그 손으로 고쳐주심을 받은 축복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타고난 연예인으로서의 천부적 재능 때문에 부와 명예를 한몸에 지녔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목사의 아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멀리하고, 세상 영화에 푹 빠져버렸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뜻밖에 죽음에 이르는 교통사고를 당하였습니다. 갈빗대 일곱 개와 두 다리가 부러지고, 두개골이 파열되는 중상을 입어 혼수상태에 빠져 사경을 헤매게 되었습니다. 그때 그 부인이 병상 곁에서 무릎을 꿇고, 울고 소리치며 기도하였습니다. “주님, 이전에는 당신이 필요없는 줄로 알았습니다. 그러나 주님, 남편을 살려주십시오. 이제부터는 주님을 열심히 섬기겠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사고 소식을 듣고 노쓰다코다에서 목사로서 구급선교회를 운영하던 그의 아버지가 달려왔습니다. 그도 그 아들의 회복을 위해서 3시간 반을 울면서 기도하였습니다.
그 후에 그 아들에게 기적이 일어나기 시작하였습니다. 폰테인은 사경에서 의식을 되찾게 되고, 수술과 치료행위에 하나님이 회복의 축복을 주셨습니다. 그는 병원에서 치료를 받는 어간에 지난 어릴 때의 일들을 회상하는 기회를 갖게 되었습니다.
“토니야, 하나님이 너를 지켜 주실 거야.”라고 말씀하시던 어머니의 모습이라든지, 주일학교에서 열심히 성가를 불렀던 자신의 모습들이 떠올랐습니다. 그때 그는 많은 눈물을 흘리게 되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주신 천부적인 재능을 가지고 자신의 명예와 재산을 모으는데 혈안이 되어서, 하나님을 떠나고 교회를 등졌던 허물들 때문에 울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자비와 용서를 구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내 생명을 한 번만 더 연장해 주신다면, 남은 생명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겠다고 서원하였습니다.

그 후에 그는 회복의 은총을 받았습니다. 그는 덤으로 주어진 자기 생명이라고 확신하였습니다. 그 후에 그는 성가만을 부르기로 결심하고, ‘하나님이 이끄시는 자녀들’이라는 성가를 불러 많은 사람들에게 큰 영감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의 징계를 통하여 새 사람, 새 일, 새 목적을 되찾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대체로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모든 경우 아프고 상하는 일들로 가득 찬 곳입니다. 그 어느 환경, 그 어느 사건 하나도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영적으로 아프지 않고 상하지 않은 곳이 없습니다. 범죄하고 타락한 세상 자체가 사실상 우리에게는 아픈 곳이고, 상처를 내는 곳입니다. 거기에다가 인생된 우리 자신의 범죄로 인한 하나님의 사랑의 징계가 있습니다. 성도의 연단을 위한 징계가 있고, 선민 구원운동을 위한 하나님의 섭리적 징계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연의 산물이 아닌 하나님의 산물입니다. 심판과 진노의 산물이 아닌 축복의 산물입니다. 전화위복을 목적하는 하나님의 섭리적인 산물입니다. 우리는 확실히 압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줄을 확신합니다. 결국 30배, 60배, 100배를 계획하신 하나님의 목적에 이르는 섭리적 수단임을 확신합니다. 바로 아프게 하시다가 싸매시고, 상하게 하시다가 고쳐 주시는 하나님의 손길 안에 있는 행복 말입니다. 바로 2000년 한해가 그러하였습니다. 할렐루야!

출처/석원태목사 설교자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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