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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자료실 종합모음

새롭게 다시 서는 사람들 (사60:1 ~3, 엡 5:11~14)

by 【고동엽】 2022. 9. 27.


  새롭게 다시 서는 사람들   (사60:1 ~3, 엡 5:11~14)

지난주의 뉴스 가운데는 캄보디아에서 8살 때 사라진 뒤 19년 동안 야생생활을 하다 돌아온 한 여성에 대한 소식이 있었습니다. 지난 1988년에 소를 몰고 나갔다가 실종된 로참 프니엥이란 아가씨는 야생생활 19년 만에 고향집으로 돌아왔지만 인간 세상에 적응하지 못하고 다시 정글로 돌아가고 싶다고 한다고 합니다. 프니엥은 아직도 걷기보다는 기어 다니며 자주 울면서 정글로 가겠다는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를 들으면 키플링의 1894년 소설 ‘정글북’을 연상하게 합니다. 호랑이 시아 칸에게 쫓기던 소년 모굴리를 늑대가 구해주고 키웁니다. 늑대 소년이 사람에게 발견되었을 때에 서서 다니지 못하고 두 발과 두 팔로 기어 다니고 있었습니다. 서서 다닐 수 있지만 서서 다니는 것을 잊은 사람들입니다.
  ‘직립원인’(直立猿人)이란 말이 있습니다. 학명으로는 ‘피테칸트로푸스 에렉투스’라고 합니다. 헬라어의 ‘피테코스’는 원숭이입니다. ‘안트로포스’는 사람입니다. 말하자면 ‘원인(猿人)’ 즉 ‘원숭이 사람’입니다. 사람과 원숭이를 연결하는 가상 생물에 이 명칭을 붙였습니다. 여기에서 나온 ‘호모 에렉투스’란 ‘직립인간’을 말합니다. 서서 다니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사람은 꼿꼿이 서서 다닐 수 있게 하나님께서 창조하셨습니다.
  서서 다녀야 하는데 서는 것을 잃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서지 못하고 아예 누워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경은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고 합니다. 빛을 발하려면 일어나야 합니다. 마태복음 5:15에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않고 등경 위에 두나니”라고 합니다. 등불은 등경 위에 둡니다. 산 위의 동네가 숨겨지지 못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숨겨질 수 없습니다. 빛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숨으려고 해서도 안 됩니다.
  지난주에는 29년만의 강진이 일어났습니다. 강원도 강릉 서쪽 23킬로 지점이 진앙지라고 합니다. 진도가 4.8도였는데 서울에서도 느낄 정도였습니다. 이 지진으로 전국이 한바탕 난리였습니다. 이 정도의 지진으로 전국이 야단인 것을 보고 제가 아내에게 그랬습니다. “예수님 다시 오실 때는 어떨까? 진짜 난리겠지?”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는 땅이 흔들리고, 별이 떨어지고, 하늘이 종이 축 같이 말린다고 했는데 그 때는 정말 난리가 날 것입니다.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은 산 뒤에 숨으려고 할 것입니다. “바위야, 나를 가리어라”라고 할 것입니다. 발밑에 숨으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가리어집니까? 어림도 없습니다. 모두가 드러날 수밖에 없습니다. 히브리서 4:13에는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라고 합니다. 서야 하고, 높이 들려야 하고, 가리어지지 말아야 희망이 있습니다. 가리어지지 않고 서서 모든 만물 앞에서 드러나게 서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새로운 부흥을 향한 우리의 자세입니다.

첫째, 어두움에서 일어나 빛으로 살아야 합니다.

  에베소서 5:11에는 “너희는 열매 없는 어둠의 일에 참여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하라”고 합니다. 빛으로 살려면 어두움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참여하다’는 말은 헬라어로 ‘수그코이노네오’(sugkoinoneo)입니다. 이 말은 교제에 참여하다(to join in fellowship)는 말입니다. 지속적이고 습관적인 일을 말합니다. 이런 일을 벗어야 빛으로 살 수 있습니다.
  어둠의 일은 열매가 없는 일입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세요. 어둠에 열매가 맺힙니까? 빛에 열매가 맺힙니까? 열매 없는 것이 어둠입니다. 어둠에서는 열매가 맺힐 수 없습니다. 일조량이 적은 해에는 열매도 벼도 작 익지 않아 수확이 적고 과일도 맛이 없습니다. 열매를 맺으려면 빛에 살아야 합니다. “역사는 밤에 이루어진다”고 하는데 누구의 역사입니까? 하나님의 역사입니까? 사람의 역사입니까? 하나님의 역사는 낮에 이루어집니다.
  수박을 살 때 우리는 손으로 두드려보고 삽니다. 한 번은 제가 미국에 있을 때에 마켓에 가서 습관적으로 수박을 손으로 두드렸습니다. 그랬더니 제 뒤에 따라오던 미국사람이 자기도 두드려봅디다. 그러고는 물어보는 것이었습니다. “잘 익었어요?” 저는 그 미국 사람에게 “당신이 방금 두드려봤잖아요?” 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모르겠다는 겁니다. “그럼 왜 두드려 봤지요?” 그 사람은 “당신이 두드리니 나도 두드렸지요” 그러더라구요. 그래서 제가 “잘 익었어요”라고 했습니다. 사실은 미국 마켓에 나온 수박은 잘 익지 않은 것이 없거든요. 우리는 손으로 두드려보고 소리 들어보고, 손끝에 오는 느낌으로 압니다. 그러나 미국인들은 밑 둥을 들여다보고 압니다. 수박의 초록 부분과 아랫부분의 노란 색 부분의 색깔 차이가 많으면 햇볕을 많이 봤기 때문에 잘 익었다고 합니다. 손과 눈의 차이입니다. 직관과 논리의 차이입니다.
  따사로운 햇볕은 열매를 익게 합니다. 어두움에는 열매가 익지 않습니다. 빛의 자녀는 빛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9절). 어두움의 일은 이교도의 일입니다. 육의 일입니다(갈 5:19). 악한 일입니다(골 1:21). 죽음의 일(히 6:1)입니다. 어두움의 일은 아무리 열심히 해도 열매가 없는 일입니다.
  영성가 십자가의 요한은 영적인 메마름, 의심, 하나님과 멀어진 이 시대를 ‘영혼의 어두운 밤’(the dark night of the soul)이라고 하였습니다. 헨리 나우웬은 이런 시대를 ‘부재의 사역’(the ministry of absence)이라고 하였습니다. A. W. 토저는 ‘밤의 사역’(the ministry of night)이라고 하였습니다. 또 어떤 이는 ‘마음의 겨울’(The winter of heart)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시대는 빛보다 어두움이 지배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키엘케고르는 이런 인간의 상태를 3층집을 소유하고 있으면서도 한사코 어두운 지하실에만 머무는 사람에 비유하였습니다. 어두움의 자녀는 지하실에 사는 사라입니다. 밝은 빛을 싫어하는 시대의 사람입니다. 마음에 감추는 것이 너무 많습니다. 자신의 마음이 투명하지 못하고 항상 무엇인가 가려 있고 거짓이 가득합니다.
  우리 사회도 보세요. 투명하지 않는 사회입니다. 세계투명성기구(TI)에서 발표한 것을 보면 우리나라는 항상 투명하지 못하고, 부정부패가 많고, 뇌물이 많고, 맑지 못한 나라로 지목됩니다. 이것이 우리의 어두운 모습입니다.
  갑자기 예고 없이 심방 가보세요. 야단납니다. 언제나 누구에게나 공개하고 개방할 자신이 있습니까? 여러분의 집 말고, 마음 말입니다. 누가 갑자기 들어와도 “어서 들어오세요”라고 할 수 있습니까? 여러분의 마음이 투명합니까? 어둠이 없습니까?
  방안에 밝은 빛이 비취면 먼지가 보입니다. 어두움에서는 보이지 않던 먼지가 낱낱이 보입니다. 빛이 없을 때는 괜찮고 편하게 살지만 빛이 있으면 보이는 먼지 때문에 기침을 시작합니다. 더러움을 깨닫기 시작합니다. 빛이 있어야 우리의 더러움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로마서 1:29에서 말하는 당시의 더러움을 보세요.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왜 이렇게 되지요? 성경은 “상실한 마음대로 버려두사”라고 합니다. 마음을 상실했다는 말이 무슨 말입니까? 미쳤다는 말입니다. 돌았다는 말입니다. 세상이 완전히 돌았습니다. 세상이 돌았습니까? 아닙니다. 내가 돌았습니다. 우리가 상실한 마음 때문에 돈 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난 주간의 어느 신문에는 서울의 물가가 비싸다는 기사를 실었습니다. 영국 BBC의 기자는 서울의 “스테이크 값이 미쳤다”고 표현했습니다. 우리가 미쳤으니 스테이크 값이 미친 것입니다.
  “히로뽕 투약 횡설수설 하다 방화 들통”, “무시당했다 PC방 업주 살해”, “유사 성행위 알선 업주 영장”, “전 동거녀 정신지체 딸 성폭행”, “ ‘휴대폰 많이 쓴다’에 어머니 살해”, “의붓 두 딸 성폭행 40대 구속”, “자동차 극장 여화장실서 몰카”. 이게 무슨 이야기 같습니까? 이게 누구 이야기 같습니까? 이게 어제 그제 신문 기사 제목들입니다. 다른 나라가 아니라 우리나라 이야기입니다. 우리 주변의 일들입니다. 어쩜 그렇게 어두운 이야기들이 신물을 도배하고 있는지 몰라요.
  캘빈 밀러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지 않는 문화가 가장 어두운 문화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문화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없는 문화입니다. 일그러진 우리의 모습이 보입니다. 망가진 우리의 영혼의 상태가 우리 사회에 보이고 있습니다.
  탈무드에는 “사람의 눈은 흰 부분과 검은 부분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어째서 하나님은 검은 부분을 통해서만 사물을 보도록 만들었을까?”라고 합니다. 인생은 어두운 곳을 통해서 밝은 곳을 바라보아야 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일그러진 인간은 밝은 데서 어두운 곳을 봅니다. 어두운 곳을 그리워합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어두운 곳을 밝은 곳으로 만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의 빛인 우리의 사명입니다.
  이사야 60:1은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고 선포합니다. 여호와의 영광이 우리 위에 임하였습니다. 우리가 여호와의 영광이 머문 곳입니다. 어두움에서 일어나 빛을 발하고 밝게 삽시다.

둘째,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 산 자로 살아야 합니다.

  에베소서 5:14에는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고 합니다. ‘일어나다’는 말은 “에게이레”라는 현재 능동태 명령형입니다. 이 말은 “당장 일어나라”는 말입니다. 잠시도 머뭇거리지 말고 우리가 일어나야 합니다. ‘죽은 자’는 도덕적 감각이 없는 자입니다. 하나님과 분리되어 영성이 죽은 자입니다. 이런 자리에서 당장 일어나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육적인 모습은 갖추었으나 그 속에 생명이 없는 자가 있습니다. 사울 왕은 당시에 가장 멋진 남자였습니다. 보통 사람보다 머리 하나가 더 큰 멋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이스라엘에 사울만큼 준수한 자가 없었다고 했습니다. 요즘 말로 그는 얼짱이었습니다. 몸짱이었습니다. 조각 미남이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속에 생명이 없었습니다. 박물관에 가면 밀랍인형이 있습니다. 어떤 인형은 섬뜩할 정도로 실제 인물과 같은 것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속에 생명이 없습니다. 얼핏 보면 무섭지만 무서워할 대상이 아닙니다. 생명이 없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생명이 없는 것은 우선 무서워 보이지만 전혀 무섭지 않습니다. 생명을 이기는 죽음이 없습니다.
  산자로 살아야 세상이 두려워합니다. 초대교회 교인들을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라고 하였습니다. 왜요? 살아 있으니까 두려운 존재입니다. 전도서 9:4에는 “모든 산 자들 중에 들어 있는 자에게는 누구나 소망이 있음은 산 개가 죽은 사자보다 낫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산 자가 소망이 있지 죽은 자는 소망이 없습니다. 우리 속에도 생명이 있어야지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존재가 됩니다.
  박제한 호랑이나 곰이나 사자를 봅니다. 박제는 얼핏 보기에는 실물 같지만 자세히 보면 겁이 하나도 안 납니다. 입을 벌리고 포효하는 호랑이는 무서워 보이지만 입을 다물지 못하는 호랑이는 무섭지 않습니다. 생명이 없는 것을 알고 나면 생명이 있는 것들은 겁내지 않습니다. 우리가 혹시 ‘박제 그리스도인’이 아닙니까? 그래서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이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생명력을 상실한 껍데기가 아닙니까? 사립학교법을 자기들 마음대로 여야가 합의하지도 않고 국회의장이 직권상정하여 여당이 날치기로 통과하고, 건학이념을 훼손할 정도로 만들어 놓고, 목사가 머리를 자르고 항의해도 본체만체 하는 것도 우리가 그들에게 박제같이 보이기 때문에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 아닐까요?
  에스겔 골짜기의 마른 뼈들은 죽은 지 오래 되어 다 말랐습니다. 그러나 그 속에 생기가 들어가니 살아나 심히 큰 군대가 되었습니다. 아무리 무기력한 뼈라고 하더라도 생명, 생기만 들어가면 힘이 있습니다. 무서운 군대가 됩니다. 생명이 들어가야 군대가 되고 힘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은 자들로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고 하십니다. 죽은 자 가운데 있는 죽은 자가 되지 말고, 죽은 자 가운에서 일어나 산 자가 되라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관심이 죽은 자가 아니라 산 자이어야 합니다. 우리가 죽은 자가 아니라 산 자로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지난 주간에 가수 유니의 자살 소식을 접했습니다. 저는 TV에서 본 기억도 없고 유니의 노래도 모르지만 할머니가 교회 갔다 오니 목맨 채로 죽어 있었답니다. 이태 전에는 어느 여배우가 자살을 했습니다. 왜 그들이 명색이 그리스도인인데 자살을 택했습니까? 아무리 악플이 고통스럽게 했다고 하더라도 생명의 말씀이 마음에 살아 있었다면 죽음을 이기지 못하겠습니까? 무늬는 그리스도인인데 알맹이 없는 신앙이 그렇습니다. 우리도 생명이 없이 죽은 신앙으로 지탱한다면 살았지만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산 신앙은 생명으로 알맹이를 채워야 합니다. 생명이 채워져야 죽음이 물러갑니다. 죽음이 무서운 것이 아니라 생명 없이 사는 것이 더 무서운 것입니다.
  한국말을 막 배운 외국인들에게 가장 무서운 간판이 뭔지 아세요? “할머니 뼈다귀 해장국”이랍니다. “할머니 보쌈”도 무서워요. 한국은 완전 몬도가네래요. 한국에서는 할머니 잡아서 뼈다귀로 해장국 해 먹는 줄 안데요. 옛날처럼 할머니도 보쌈 해 가는 줄 안데요. 사실은 그렇지 않은데 무시무시한 표현들이 많은 것이 우리말입니다. 죽이는 것이 아니라 사는 것이 우리 문화가 돼야 합니다. 살리는 것이 우리의 삶이 되어야 합니다.
  얼마 전에 인터넷에 보니 ‘일본의 엽기 사시미’라는 제목으로 동영상이 올라왔습니다. 개구리를 잡아서 심장을 꺼냅니다. 심장이 계속 빨딱거립니다. 그런데 어떤 서양 남자가 젓가락으로 심장을 집더니 한참 들여다보더니 입에 집어넣는 겁니다. 그리고는 한참 맛을 보더니 “괜찮은데”(Not bad)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남의 생명을 하찮게 생각하면 자기 영적 생명이 죽은 것입니다. 산자는 모든 산 것을 소중히 여기는 법입니다.
  내 자신 속에 죽음이 있고, 분노가 있고, 감정이 우울하면 밖으로 드러날 수밖에 없습니다. 지난 월요일 새벽에 4시가 조금 지나서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제가 공부하는 방 천정에서 “똑똑” 소리가 나는 것이었습니다. 자세히 보니 위에서 물이 떨어지고 있었습니다. 아내를 깨워서 함께 보고는 아파트 기관실에 전화를 하였습니다. 기관실의 기사가 집에 들어오자마자 “많이 안 떨어지면 낮에 천천히 부르시지?”라는 겁니다. 순간적으로 저의 감정이 격해졌습니다.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세요? 물이 떨어지고 있는 우리는 한시가 급해요. 아저씨 할 일이 그건데 왜 그렇게 말씀하세요? 그럴거면 오시지 말지요”. 그 기사 아저씨도 미안했든지 잠시 후에는 친절하게 모든 걸 설명해 주었습니다. 저도 뒤에 생각하니 죄송했습니다. 조금만 참을 걸 하고 후회했습니다. 사실은 내 속에 분노가 있으면 감정이 격해집니다. 내 속에 죽음이 있으면 생명을 발할 수 없어요. 그 사람이 문제가 아니라 내 속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 속의 생명이 나와 모든 주위 사람을 살게 합니다.
  피에르 신부는 프랑스의 행동하는 양심이며 프랑스인들에게 존경받는 성직자입니다. 그는 현실 정치에 참여하여 세상을 바꾸려고 노력도 했습니다. 나치에 의하여 고난도 겪었습니다. 엠마우스라는 공동체를 설립하여 노숙자들과 가난한 자들에게 쉼터를 제공하였습니다. 그러던 그가 지난주에 94세로 세상 떠났습니다. 그는 정말 어두움 가운데 빛이었습니다. 자신에게 빛이 있으니 어두움 속의 사람들에게 빛을 전했습니다. 자신에게 생명이 있으니 죽음 가운데 있는 사람들에게 생명을 전했습니다. 빛을 전하고, 생명을 사랑하는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우리 속의 생명은 예수님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4에는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이 빛이라”고 합니다.

결론

  아기들은 돌이 되면 걸음마를 하기 시작합니다. 어떤 아이는 조금 빨리 걷기도 합니다. 저는 8개월에 걸었대요. 그 전에는 기어 다닙니다. 흔히 배밀이라고 합니다. 저는 앞으로 보다 뒤로 밀고 다니더라고 합니다. 그래서 지금도 자동차 운전할 때 후진을 잘 합니다. 그런데 계속 기어 다니기만 하고 걷지 못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우리가 이제 다시 일어서야 합니다. 일어나야 빛을 발합니다. 우리가 일어나야 우리 사회가 희망이 있습니다. 복음 성가에 이런 가사가 있습니다. “일어나 걸어라 내가 새 힘을 주리니 일어나 너 걸어라 내 너를 도우리”.
  1907년의 부흥을 재현하려는 우리의 꿈은 우리가 다시 서면 이루질 것입니다. 우리가 다시 일어나면 반드시 부흥도 일어날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다시 섭시다. 다시 일어납시다. 어두움에서 일어나 빛에 삽시다. 죽음에서 일어나 생명에 삽시다. 우리가 다시 서야, 우리가 다시 일어나야 이 땅 한국에 소망이 있습니다. 우리 민족에 빛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일어나 우리 사회와 국가가 다시 새 시대를 향하여 일어서는 놀라운 부흥의 은총이 우리와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출처/이성희 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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