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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의 분열을 깨우자 (단5:25~28, 요17:21~22)

by 【고동엽】 2022. 9. 27.

민족의 분열을 깨우자  (단5:25~28, 요17:21~22)

최근 인터넷에는 사람을 찾는 광고를 찍어 올린 기사가 있습니다.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드라마 ‘주몽’을 본방으로 봐놓고 또 본다고 하기에 못 보게 했더니 가경이 엄마가 가출했습니다. 제 마누라를 보신 분은 연락 바랍니다. 아내에게 보내는 글-”여보 내가 잘못했소. 제발 집에만 돌아와요. 내가 HDTV도 장만해 놨소. 예술을 모르는 내가 죽일 놈이지. 앞으로 예술을 사랑하는 착한 아빠가 되겠소.” 이게 어디 가출할 일입니까? 이게 어디 부부가 헤어질 일입니까? 이게 어디 남편이 아내를 찾을 이유가 됩니까? 그런데 요즘에는 이게 가출하고 헤어질 이유가 되고 있습니다. 이렇게 쉽게 쪼개지는 것이 현 세태라고 볼 수 있습니다.
  얼마 전에도 보세요. 황혼 부부 간에 그간의 앙금을 극복하지 못하고 헤어집니다. 이번 설에는 형제가 유산 문제로 시비가 붙어 형이 동생을 엽총으로 쏴서 중태라고 합니다. 부모와 자식 간에 끊임없는 경영권 마찰이 계속됩니다. 동창회에 만나서 술김에 사소한 시비로 친구를 밀쳐서 엘리베이터 아래로 떨어져 죽었습니다. 이웃 간에 골목길 주차문제로 칼부림하여 한 쪽이 중태에 빠졌습니다. 우리 사회는 이런저런 이유로 쪼개지고, 분열되고 있습니다.
  교수신문은 교수들의 뜻을 모아 ‘올해의 사자성어’를 매년 발표합니다. 2004년에는 ‘당동벌이’(黨同伐異)였습니다. 같은 편끼리 모이고 다른 편을 공격한다는 뜻입니다. 2005년에는 ‘상화하택’(上火下澤)이었습니다. 위는 불 아래는 못이란 의미로 모두가 불과 물처럼 서로 상극이란 뜻입니다. 2006년에는 ‘밀운불우’(密雲不雨)입니다. 구름은 빽빽하나 비는 오지 않는 상태라는 뜻입니다. 편 가르기에서 서로 상극으로 나뉘고 그래서 이제는 암울하고 답답하여 돌파구가 보이지 않는 상태라는 말입니다.
  교회가 부흥되고, 국가가 재건되고, 민족중흥의 전기를 마련하기 위하여 필요한 것은 분열을 봉합하고, 하나 되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쪼개지고 분열되고 상처 난 민족을 치유할 수 있는 길은 하나님의 사랑에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교회가 책임지고 해야 할 일입니다.
  구약 다니엘의 본문을 보세요. 느부갓네살왕은 벽에 하나님의 손가락으로 쓰신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이란 글을 발견합니다. “메네”란 ‘하나님이 왕의 시대를 세어서 끝나게 했다’는 뜻입니다. “데겔”이란 ‘왕을 저울에 달아보니 부족함이 보였다’는 뜻입니다. “베레스”는 ‘왕의 나라가 나뉘어서 메데와 바사사람에게 준 바 되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의 환상이 느부갓네살에게 보이신 것입니다.
  아직은 강대국이요, 아직은 부요한 나라요, 아직은 크고 하나인 나라입니다. 그러나 그 나라가 나뉠 것을 예고합니다. 절대로 멸망당할 것 같지 않은 나라이지만 하나님의 보시기에는 이미 함량이 미달입니다. 우리 교회는 민족의 분열을 깨우쳐주고, 민족이 하나 되게 하고, 함께 부흥을 맛보게 해야 합니다.
  요한복음 17장은 흔히 ‘대제사장의 기도’라는 별명을 붙여준 장입니다. 아론의 후손들이 백성들의 죄를 위하여 야훼를 부르며 기도한 것 같은 대제사장의 기도입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서 교회를 위해 기도하십니다. 그리스도는 교회와 백성들 사이에서 대신 죽으셔서 영원한 대제사장이 되신 주님이십니다. 예수님의 대제사장의 기도를 통하여 분열을 깨우고, 사분오열 찢어진 이 사회, 이 나라를 치유하는 힘 있는 우리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첫째, 우리가 하나님 안에 있으면 하나가 됩니다.

  요한복음 17:21에는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라고 기도하십니다. 대제사장의 기도의 첫째 대목은 하나 됨입니다. 전 세계 모든 민족과 나라가 하나 되게 하는 것이 주님의 간절한 기도의 내용입니다.
  하나가 되어야 하나님 안에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안에 있으면 하나가 됩니다. ‘하나님 안’과 ‘하나 됨’은 서로 연관 되어 있습니다. 모두가 한 울타리 안에 있어서 한 공동체를 이루는 것입니다. 하나님 안에서는 마땅히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고, 한 말씀이시고, 한 성령이시기에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한 하나님이신데 그 안에서 다를 수는 없습니다.
  마틴 루터는 교회의 교리의 차이란 서로 왕래할 수 있을만한 거리에 있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는 이것을 시계추의 폭이라고 하였습니다. 서로 왕래하지 못할 만큼 멀면 안 됩니다. 그리고 그 벽은 서로 고개를 내밀고 볼 수 있을만해야 합니다. 보지 못할 만큼 높으면 안 됩니다.
  남편과 아내를 보세요. 같은 게 뭐 있습니까? 한 쪽은 남자이고, 한 쪽은 여자입니다. 서로가 만나기 전의 신분이나, 성장과정이나, 성격이나, 생활습관이 다 다릅니다. 바울은 아내에게 복종과 남편에게 사랑을 주문합니다. 복종과 사랑이란 모두 죽는 것입니다. 죽어야 복종이 되고, 죽어야 사랑이 됩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힘든 것이 부부가 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5:21에는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고 합니다. 그리고 22절 이하에 아내와 남편에 대한 가르침이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경외하면 죽음 같은 복종도 사랑도 가능하게 됩니다. 하나님 안에 있으면 가장 힘든 것도 될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다 다르게 만드신 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런데 왜 다른 것이 문제가 됩니까? 피부색이나, 지위나, 가문이나, 소유나, 성별이 분열의 조건은 아닙니다. 천하에 같은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다르게 만드신 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오히려 다 같으면 안 됩니다. 인간은 동질성을 거부하게 만들어져 있습니다. 동질은 조화가 안 됩니다. 성별도 동질은 동성애를 낳습니다. 동물도 동질끼리 있으면 싸웁니다. 하나님은 동질만의 세상을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우리가 하나 될 수 없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죄의 뿌리 때문입니다. 서로 분리하게 하는 죄 때문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고 나서 이미 갈등관계에 있었습니다. 아담이 하나님께 자기 아내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나서 아마 아담과 하와가 부부싸움을 심하게 했을 것입니다. “이걸 남편으로 믿고 살아?”하고 탄식했을지 모릅니다. 가인과 아벨도 그렇습니다. 농사와 목축업이 서로 갈등과 죽음을 몰고 올 차이는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바벨탑을 쌓는 인간에게 언어를 혼잡하게 하셔서 그 다음부터 인간의 갈등은 고조되었습니다. 성경에는 그 다음부터 인간사에 전쟁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인간의 분리 원인 가운데 하나는 이념입니다. 자신의 주장입니다. 아집입니다. 공산주의와 민주주의 같은 이데올로기가 인간을 갈라놓고 지금까지 우리나라에서는 갈등의 불씨가 되고 있습니다. 기독교는 엄밀히 말하면 신정주의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역사를 통치하신다는 겸허한 생각을 가지면 갈등을 가질 이유가 없습니다.
  18세기 프랑스의 사회학자이며 정치이론가인 알렉시스 드 토크빌은 은 ‘미국의 민주주의’라는 저서를 남겼습니다. 그는 7개월 동안 미국을 여행하면서 미국이 프랑스 보다 더 민주적인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특히 지방자치, 배심원 제도 등이 미국의 민주주의를 발전시켰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미국의 국토, 농토, 지하자원, 과학, 의회 질서가 아니라 강단에서 외쳐지는 의와 십자가의 복음이 민주주의의 바탕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거대한 미국도 무너질 수 있습니다. 복음이 무너지면 나라가 무너집니다.
  우리는 이념적으로 조금만 안 맞으면 ‘수구골통’이라고 매도합니다. 지금도 사학법을 재개정하라고 외치며 삭발한 목사들을 수구골통이라고 합니다. 저는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저는 누구보다 사고나 삶에 진보적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저는 출시된 지 2달밖에 안된 PDA를 사용합니다. 제가 왜 수구골통입니까? 미래공부도 저 만큼 많이 한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저를 수구골통이라고 합니까? 이미 이 지구상에서 실험이 끝난 사회주의식 사고를 개혁이라고 우기는 편이 오히려 진짜 수구골통이라고 봅니다. 흘러간 과거를 붙잡고 사니 수구골통이지요.
  최근에 와서는 지역이나 세대의 갈등보다 빈부갈등이 더 심각합니다. 갈등의 70%는 인식에 근거(perception-based)하고, 30%는 사실에 근거(fact-based)한다고 합니다. 우리가 경험하고 가지고 있는 선입견이나 전이해 등이 갈등의 요인이 되는 것입니다. 선입견을 벗어버리고 사람을 대하면 분열을 막고 하나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에스겔 37:17에는 “그 막대기들을 서로 합하여 하나가 되게 하라. 내 손안에서 둘이 하나가 되리라”고 합니다. 하나님 안에서 둘이 하나가 되고, 서로 다른 점을 보완하고, 분열이 치유되는 역사가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의 힘으로 민족이 하나 되는 은총이 있기를 바랍니다.

둘째, 우리는 분열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17:22에는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하나님처럼 하나 되기를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그 영광을 주셨습니다. 우리도 그 영광이 있습니다. 우리도 하나 됨의 넉넉한 힘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을 보세요. 하나 되지 못한 제자들입니다. 예수님 앞에서 서로 다투던 사람들입니다. 조금 전만 하더라도 ‘누가 크냐’라고 다투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승천과 성령의 강림을 체험한 그들은 다툼이 사라지고 하나가 되는 힘을 가졌습니다.
  초대교회는 히브리파 유대인과 헬라파 유대인들의 갈등으로 갈라질 뻔했습니다. 헬라파 유대인들이 자신들의 과부가 매일의 구제에 빠진다고 불평한 것입니다. 그 때 히브리파 유대인들인 사도들은 헬라파 유대인 일곱 사람을 지도자로 세워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서로 용납하고 조화하는 가운데 결과적으로 교회가 성장 발전했습니다. 이전보다 더 좋은 교회가 되었습니다. 교회의 문제는 교회가 성장되는 동기를 제공합니다. 문제는 없습니다. 조금만 마음을 크게 하고 열면 분열을 극복하고 교회가 성장합니다.
  ‘여섯 단계의 분리’(six degrees of separation)라는 말을 아세요. ‘6단계 인간관계’라는 말이 있습니다. 서로 전혀 모르는 두 사람 사이를 연결하려면 그 사이에 몇 명이 필요할까요? 1967년 하버드대학교의 스탠리 밀그램 교수는 미국인을 상대로 실험을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평균 6명의 지인을 거치면 두 사람이 연결된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미국인은 6명이지만 한국인은 실험 결과 평균 4명만 거치면 아는 사람을 만난다고 합니다. 이제는 ‘이웃사촌’이 아니라 ‘온라인 사촌’시대입니다. 몇 명만 거치면 금방 아는 사람을 만납니다. 그 만큼 모두가 이래저래 아는 사람들인데 서로 갈등을 가질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나라의 동서와 남북을 보세요. 영남과 호남이 갈등을 가질 이유가 없습니다. 영호남이 사돈관계를 많이 맺었으면 좋겠습니다. 미국은 지방자치가 극도로 발달하여 자동차 넘버판도 주마다 다릅니다. 그림도 들어가고 재미있는 글씨도 들어갑니다. 제가 한번은 어떤 분에게 우리나라도 그렇게 해서 지방마다 특징 있게 했으면 좋겠다고 했더니 그렇게 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지방에서 온 차를 차별하고 괄시하기 때문에 어느 지방 차인가를 표 나지 않게 하려고 숫자만 넣는다는 것입니다. 별게 다 차별의 이유이지요?
  남과 북이 다를 것이 뭐가 있습니까? 내가 남쪽에서 태어나고 싶어 선택한 것도 아닌데요. 세계화 시대라는 요즘도 이북 출신, 이남 출신을 찾고 따지는 교회가 있습니다. 진보와 보수도 그렇습니다. 중도 성향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있어야 합니다. 제가 볼 때는 진보와 보수의 차이는 시간차입니다. 보수도 얼마쯤 지나면 진보가 하는 일들을 하고 있습니다. 종교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나라는 다종교 사회입니다. 절대로 다른 종교에 대하여 폐쇄적이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전도는 해야 합니다. 몇 명만 거치면 다 아는 사람입니다. 우리 모두가 남이 아닙니다.
  “우리 사회는 담을 쌓은 사람은 많이 있지만 다리를 놓는 사람은 많지 않다”는 말이 있습니다. 정말 다리 놓은 사람들이 많아져야 합니다. 사소한 차이점들은 그대로 놔두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나 주관적인 편애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반드시 없애야 합니다. 사소한 차이점은 누구에게나 다 있습니다. 그 차이가 갈등이 되게 하면 안 된다는 말입니다.
  빌립보서 2:2에는 빌립보 교회에 권합니다.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 마음을 품어”라고 합니다. 마음을 같이 하고 한 마음을 품는 것은 마음에 벽이 없음을 의미합니다. 마음의 분열이 없음을 의미합니다. 교회는 마음의 분열이 없어야 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마음의 벽은 사람들을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나가지 못하게 막는 몹쓸 물건입니다. 우리는 장벽을 다시 쌓아 올리려는 성향이 있습니다. 성전은 이미 휘장이 없거늘 우리 마음에는 휘장이 쳐져 있습니다. 그 휘장을 걷어내야 예수님의 죽으심이 가치가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화목하게 하다’는 말은 헬라어로 ‘상태를 되돌려 놓는다’는 뜻입니다. 원래 상태로 돌아가면 화목하게 되는 법입니다. 사람이 가진 원래의 마음, 예수님이 주신 원래의 마음, 하나님이 지으신 본성적 마음으로 돌아가면 화목하게 되고 갈등이 없어지게 되고,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김두완 장로님이 작곡하신 ‘서로 사랑하자’라는 찬송을 보세요.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우리를 살리게 하시려 화목제로 보내셨도다, 화목제로 보냈도다”고 노래합니다. 화목제는 우리를 살리는 힘입니다. 우리가 하나 되게 하는 힘입니다. 우리는 “화목케 하라신 구주의 말씀을 온 세상 널리 전하세”라고 찬송해야 합니다.
  남북전쟁이 끝나고 링컨은 분단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하여 “어느 누구에게도 악의를 품지 맙시다. 모두를 향해 사랑의 마음을 품읍시다”라고 외쳤습니다. 이런 마음과 치유가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에베소서 1:10에는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고 합니다.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고 바울은 권합니다. 하나 됨은 그냥 되는 것이 아니라 힘써야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힘써야 분열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나를 다른 사람과 달리 생각하는 것을 고쳐야 합니다. 이런 마음을 순간순간 품어야 분열을 극복하고 하나 되게 할 수 있습니다.

결론

  기독교의 종파 가운데 아미쉬가 있습니다. 이들은 미국의 펜실바니아 랭카스터에 대표적인 그들의 집단 거주지가 있습니다. 원래 아미쉬는 독일 알자스 지방에 살던 재세례파 교인들입니다. 이들의 지도자 제이콥 암만이 더 엄격한 신앙생활을 강조하면서 분리되었습니다. 메노나이트나 퀘이커 등과 더불어 가장 근본주의적인 신앙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암만의 이름을 따서 아미쉬라고 불렀습니다. 아미쉬들은 남자들의 옷에 단추를 달지 않고 단추 대신 훅을 답니다. 단추를 달 것이냐 말 것이냐를 두고 단추 때문에 메노나이트와 결별하였습니다. 옷에 단추를 다는 문제 때문에 교회가 갈라진 것입니다.
  옛날 정교회에서는 성직자의 가운의 길이를 얼마로 할 것인가 하는 문제로 나누어지고 가운에 다는 장식으로 교회가 갈라지기도 했습니다. 세족례를 성찬 대신 하는 교회에서는 오른 발을 먼저 씻을 것인가 왼 발을 먼저 씻을 것인가의 논쟁으로 교회가 나눠지기도 했습니다. 하나 되기보다 나눠지기가 훨씬 쉬운 것입니다.
  인간의 죄성이 있습니다. 인간의 마음의 근본은 불화, 분열, 갈등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마음만 가지고는 절대로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로 치유되고, 말씀으로 깨어나게 해야 분열이 치유되고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공자는 소인은 동이불화(同而不和)하고 대인은 화이부동(和而不同)하다고 하였습니다. 소인은 같음에도 불구하고 불화합니다. 대인은 같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화합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대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모두 대인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크시고, 넓으시고, 무한하신데 우리가 소인일 수 있겠습니까? 대인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은 통 큰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죄성으로 마음이 분열되고 깨어졌습니다. 우리 사회와 교회가 분열되고 갈등 투성이입니다. 갈라지고 나누어지고 분열된 우리 마음과 사회와 민족이 땜질하러 오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다시 하나가 되기를 바랍니다.

  회개와 각성과 부흥의 해를 맞이하여 민족의 분열을 깨어나게 하는 교회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출처/이성희 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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