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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복을 받는 간단한 길 (베드로전서 4장 7-11절)

by 【고동엽】 2022. 9. 25.

축복을 받는 간단한 길  (베드로전서 4장 7-11절)

사람을 감동시키는 헌신  

지난주에 저는 감동적인 두 통의 메일을 받았습니다. 하나는 목요일 오후에 받은 여승훈 선교사님 메일입니다. “목사님! 목사님의 사역을 위해 저희 가족은 늘 기도합니다. 선교의 열정을 가진 목사님과 성도들을 통해 큰 도전을 받습니다. 이번에 미션퍼블릭에서 출판할 목사님의 3번째 책 ‘40일간의 성령님 묵상’ 책 출판을 위해 기도하는 중에 하나님께서 감동 주셔서 작은 비용을 보냈습니다. 지금 마음이 기뻐요. 하나님이 주시는 마음인 것 같습니다.”

그 메일을 받고 은행에 확인해보니까 30만 원이 입금되어 있었습니다. 선교사님의 어려운 형편을 잘 아는데 그렇게 헌신한 것을 보고 제가 속으로 중얼거렸습니다. “사랑에 미쳤구나! 내가 어떻게 선교사의 돈을 받고 책을 출판하나? 이것은 돈이 아니고 피다!” 지금 초임 선교사로서 후원자도 많지 않은 상태에서 재정이 얼마나 절실히 필요하겠습니까? 그런 상황에서 선교사의 헌신을 보고 제가 가슴이 뭉클했습니다.

그날 계속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저는 이 돈을 받지 못하겠습니다.” 그러나 바로 돌려주면 선교사님의 눈물의 헌신을 외면하는 것 같아서 선교사님의 헌신은 그대로 받고, 대신에 따로 선교사님을 위해 헌신하기로 결심하고 다음날 받은 것을 뻥튀기해서 선교사님에게 보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책 출판보다 선교사 후원이 우선이었기 때문입니다. 선교사님도 깜짝 놀랐을 것입니다. 헌신은 사람을 감동시키는 제일 요소이고 축복을 받게 하는 가장 간단한 길입니다.

어제는 밴쿠버의 김정연 집사로부터 이런 메일을 받았습니다. “목사님! 요새 남편이 사랑칼럼으로 마음 문이 많이 열렸습니다. 한국 사업은 어려웠지만 이곳은 잘 됩니다. 한국에서의 어려움이 약이 된 것 같습니다. 지금은 많이 바빠서 믿음이 약해질까 염려됩니다. 얼마 전 어머님과 통화하다가 선교센터 소식을 들었습니다. 부족하나마 목사님의 비전에 동참하고자 헌금을 보냅니다. 너무 적어서 속상하고 안타깝지만 캐나다에도 목사님의 비전에 동참하는 사람이 있음을 알아주세요. 제가 더 힘이 되었으면 좋을 텐데...”

은행에 확인하니까 5백만 원이 입금되어 있었습니다. 지난주에 선교센터를 위한 한 성도의 1만원 헌금을 받고 “하나님! 감사합니다. 이것이 축복의 오병이어가 되게 하소서!”라고 기도했는데 하나님께서는 이번에 많이 채워주셨습니다. 이제 선교센터를 위해 헌금한 사람이 모두 4명이 되었습니다. 필요한 것에 비해서는 아직 멀었지만 아름다운 헌신들이 모여서 선교센터와 선교사 훈련학교의 비전도 이루어질 줄 믿습니다.

항상 하나님의 뜻과 성령의 인도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자기를 드리는 일에 용감하십시오. 나중에 주님 만났을 때 우리의 말 한마디와 행동 하나가 모두 심판의 기준이 됩니다. 그때 주님은 물으실 것입니다. “너는 주님을 위해 몸과 마음과 물질과 시간을 드려 최선을 다했는가?” 그 질문을 항상 기억하며 사랑과 헌신을 실천하며 살아야 합니다.

< 마지막 때의 삶의 원리 >

지금은 마지막 때입니다. 본문 7절 말씀을 보십시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으니...” 약 2천년 전에 마지막이 가까웠다면 지금은 더 가까워졌습니다. 그래서 ‘마지막 때의 마지막’이란 의미로 ‘말세지말(末世之末)’이란 표현을 씁니다. 그처럼 마지막 때를 살아가는 성도에게 어떤 삶이 가장 필요할까요?

1. 기도하는 삶

본문 7절 말씀을 보십시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베드로는 마지막 때의 삶의 원리 중 첫 번째로 기도하는 삶을 권면합니다. 이 구절에서 “정신을 차리라!”는 말은 거꾸로 생각하면 마지막 때는 사람들이 정신을 차리지 못할 정도로 스피드 시대가 된다는 말입니다.

지금 너무 많은 것이 변화하고 너무 할 일이 많은 시대입니다. 이런 때에 무엇보다 필요한 것이 바로 기도입니다. 기도하면 어떻게 살아야 할지, 무엇을 먼저 해야 할지, 그리고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깨닫게 됩니다. 사람들은 기도할 때 대개 문제해결을 위해 기도하는데 사실 더욱 중요한 기도 이유는 문제해결보다는 삶의 목적과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기도는 힘들 때도 필요하지만 바쁠 때도 필요합니다.

어떤 분들은 바빠서 기도 시간이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바쁠 때는 더 기도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바쁠 때는 일의 우선순위를 정하는 지혜와 짧은 시간에 일을 효율적으로 하는 능력이 더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마르틴 루터는 종교개혁 때문에 바빠서 잠자는 시간이 6시간에서 3시간까지 줄어들자 “정말 바쁘다! 더 기도해야겠다.”라고 생각하고 하루 새벽 기도시간을 2시간에서 3시간으로 늘렸습니다. 그처럼 바쁠수록 더 기도 시간을 내야 합니다.

기도는 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 중의 하나입니다. 기독교는 기도교입니다. 기도가 없으면 진짜 신앙의 맛과 축복을 알 수 없습니다. 어떤 목사님은 말했습니다. “교회에 다니면서 여러 기적을 목격하지만 그 중에서 가장 놀라운 기적 중의 하나는 기도하지 않고 교회에 다니는 것이다.” 성도는 문제가 있어도 기도하고 문제가 없어도 기도해야 합니다. 이제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 가까워지고 더욱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며 사십시오.

2. 사랑하는 삶

본문 8절 말씀을 보십시오.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이 구절을 보면 베드로는 마지막 때에 필요한 삶으로 먼저 기도하라고 하면서 바로 이어서 “무엇보다 열심히 사랑하라!”고 하며 기도보다 사랑을 더 강조합니다. 그것은 마지막 때 가장 필요한 것이 바로 사랑임을 잘 말해줍니다.

특히 이 구절에서 ‘열심으로’란 말은 경주자가 목표를 향한 절실한 마음으로 뛰는 모습을 뜻합니다. 그처럼 사랑의 목표를 정하고 사랑을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13장 4절 말씀을 보면 “사랑은 오래 참고”라고 했습니다. 때로는 바른 사랑을 위해 징계와 채찍과 외면이라는 수단을 동원해도 사랑하는 마음만은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로마서 13장 8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하나님은 성도들이 빚지는 것을 싫어하십니다. 그러므로 빚지지 않도록 열심히 규모 있게 버는 범위 내에서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사랑의 빚은 많이 져도 좋습니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 사랑이 무엇일까요?

1) 죄와 허물을 보지 않는 것

본문 8절 후반부 말씀을 보십시오.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사랑은 망원경으로 보는 것이고 미움은 현미경으로 보는 것입니다. 겉으로 멀쩡한 것도 현미경으로 보면 세균이 득실득실합니다. 그처럼 현미경으로 보면 허물만 보입니다. 그러나 얼굴에 큰 점이 있어도 망원경으로 보면 보이지 않습니다.

제가 미국에서 공부할 때 랜디 비비고스라는 친구가 있었습니다. 키도 크고 친절하고 착한 친구였습니다. 어느 날, 그가 홍콩 출신의 여자와 사랑에 빠졌는데 처음에 그 여자를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제가 그때까지 살면서 정상인으로서 그렇게 스타일이 없는 여자는 처음 봤습니다. 얼굴은 완전히 네모였고, 눈은 와이셔츠 단춧구멍이었습니다. 키는 약 145센티 정도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랜디는 185센티 정도였습니다.

너무 이상해서 제가 팀 스티만이라는 룸메이트에게 물었습니다. “미국인이 보기에 랜디가 잘생긴 얼굴이냐?” 혹시 랜디가 미국인들이 보기에는 하도 못생겨서 사귈 사람이 없어 그런 동양의 스타일이 없는 여자와 사귈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팀은 미국 사람의 관점에서도 랜디는 잘생긴 편에 속한다고 했습니다.

그 말을 듣고 저는 잠깐 혼란에 빠졌습니다. “어떻게 이것을 이해해야 할까?” 그런데 혼란에 빠질 것 없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사랑 때문입니다. 사랑하면 거룩한 소경이 됩니다. 그래서 그 둘이 가면 항상 사람들이 이상한 눈길로 쳐다보지만 본인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붙어 다녔습니다. 그처럼 사랑하면 허물이 보이지 않게 됩니다.

사람은 다 부족합니다. 나는 남보다 특별히 바르고 특별히 떳떳한 존재가 아닙니다. 다 실수하면서 사는 사람들입니다. 또한 사람은 어느 정도 부족함과 허물이 있어야 사람답게 느껴집니다. 그 사실을 인정하고 남의 죄와 허물을 들추지 말고 덮어주십시오. 허물을 드러내면 서로 불행해지지만 허물을 덮어주면 서로 행복해집니다.

2) 상처를 기억하지 않는 것

사랑은 허다한 죄도 덮지만 과거의 상처도 쉽게 잊게 만듭니다. 성도는 감사한 일은 오래 잘 기억하고 원망스런 일은 금방 잊어버려야 합니다. 그런데 사랑하면 신기하게도 원망스런 일이 대한 기억력은 감퇴하고 감사한 일에 대한 기억력은 좋아집니다. 과거의 불행과 상처를 잘 잊을수록 성공과 행복의 확률은 커지고, 과거의 불행과 상처를 잘 기억할수록 실패와 불행의 확률은 커집니다.

어느 날, 연세대학교의 한 철학과 명예교수가 천안에서 초청강연을 할 때 제자를 만났습니다. 14년 만에 만난 제자에게 그는 “결혼해서 잘 사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때 제자가 표정이 어두워지며 자신이 결혼 못한 사연을 얘기해 주었습니다. 그는 숙명여대를 나온 한 여자와 결혼을 약속했습니다. 그 얘기를 하자 아버지가 좋아하면서 말했습니다. “좋은 규수구나. 네가 좋으면 우리도 좋다. 결혼하자. 그런데 할아버지한테도 그 사실을 알려야지.”

곧 할아버지에게 그 얘기를 했습니다. 그러자 할아버지도 좋아하면서 말했습니다. “그래? 참 잘 됐구나. 그런데 우리가 뼈대가 있는 집안이니까 볼 건 봐야지. 두 가지만 보자. 첫째, 사주를 받아오라. 둘째, 집안이 좋아야 하니까 족보를 복사해 와라.” 청년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사주를 받아오고 족보를 복사해 드렸습니다.

할아버지가 사주를 보더니 무릎을 탁 치며 말했습니다. “얘야, 내가 이제까지 궁합을 많이 봤지만 너희처럼 좋은 궁합이 없다. 너희 참 잘 살겠다.” 청년은 생각했습니다. “이제 됐구나!” 왜냐하면 여자 가문이 자기 가문보다 더 나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음을 놓았는데 할아버지가 족보를 뒤적이다 곧 얼굴색이 달라지며 말했습니다. “이 결혼은 안 되겠다.”

깜짝 놀라서 청년이 말했습니다. “할아버지! 무슨 말씀이세요? 그 집안이 우리 집안보다 낫고 출세한 집안이에요.” 할아버지가 말했습니다. “안다! 그러나 잊지 말라! 그놈의 집안은 우리 집안하고 이백년 전 원수다. 그놈의 집안 때문에 우리가 낙향해서 천안까지 왔다.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까지는 그놈의 집안하고는 절대 사돈이 될 수 없다.”

너무 막무가내라서 아버지한테 할아버지를 설득해 달라고 부탁하자 아버지가 말했습니다. “얘야! 우리처럼 바른 집안에서 할아버지가 반대하는데 어떡하니? 네가 양보해야지. 할아버지가 들으면 정말 불효한 소리지만 할아버지가 살아야 얼마나 더 살겠니? 앞으로 할아버지가 돌아가시면 다음날이라도 결혼시켜 주마.”

할 수 없이 청년이 여자 집을 찾아가 말했습니다. “아버님! 저의 할아버지가 너무 반대해서 어쩔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할아버지가 돌아가시면 결혼시켜 준다니 그때까지 기다려 주시면 좋고 그렇지 않다면 전 어쩔 수 없습니다.” 여자 아버지가 말했습니다. “할아버지가 몇이시냐?” “일흔 넷입니다.” “그러면 한번 기다려 보자.” 그 뒤 결혼을 위해 14년을 기다렸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말했습니다. “지금 할아버지가 88세인데 아직도 펄펄 날아다니세요.”

이백년 전 조상의 원한을 내세워 손자의 행복을 막으니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과거의 안 좋은 일에 매이는 것을 자신을 사슬에 묶는 것입니다. 그러면 몸과 마음은 피곤해집니다. 이제는 과거의 상처에 연연하지 말고 선한 것만 기억하십시오. 그것을 위해 무엇보다 열심히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하면 나쁜 것을 잘 잊고 좋은 것은 잘 기억하게 됩니다.

3) 서로 대접하고 봉사하는 것

본문 9절 말씀을 보십시오.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 하고.” 이 구절을 보면 사랑은 단순히 ‘대접하는 것’이 아니라 ‘원망 없이 대접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원망 없이 대접하려면 무엇보다 겸손하고 사심이 없어야 합니다. 교만한 마음으로 사심을 가지고 대접하면 나중에 꼭 원망과 불평이 나오게 됩니다.

하나님은 교만을 제일 싫어하십니다. 성공도 다 좋은 것이 아닙니다. 성공하고 교만해지면 실패한 것입니다. 반면에 실패를 통해 겸손함을 얻으면 사실 성공한 것입니다. 기적을 체험하고 자신이 남보다 영성이 높고 자기만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는 것으로 착각하면 실패한 것이고, 기적의 체험이 없어도 겸손함을 잃지 않고 범사에 감사하면 성공한 것입니다. 성도는 더 많이 알고, 더 많이 배우고, 더 많이 은혜를 받을수록 더 겸손해야 합니다.

왜 하나님께서 은혜와 은사를 주셨습니까? 본문 10절 말씀을 보십시오.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같이 서로 봉사하라.” 하나님께서 은혜와 은사를 주신 것은 더 봉사하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위대한 봉사를 해도 내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힘 주셔서 한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런 자세가 없으면 다툼과 갈등과 상처가 끊이지 않게 됩니다.

어떤 목사님은 교회에서 제일 무서운 마귀는 섭섭 마귀라고 합니다. 그 마귀는 자기를 알아주지 않으면 어느새 찾아와서 섭섭한 마음을 불어넣고 갈등과 불평을 일으킵니다. 어떻게 그 마귀를 물리칩니까? 11절 전반부 말씀처럼 말을 할 때도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봉사를 할 때도 하나님이 주시는 힘으로 하면 됩니다. 그렇게 할 때 본문 11절 후반부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십니다.

< 축복을 받는 간단한 길 >

하나님께 최고로 영광 돌리는 길은 바로 사랑하고 헌신하는 것입니다. 그처럼 사랑하고 헌신하면 반드시 열매가 있습니다. 축복을 받는 가장 간단한 길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하고 헌신하는 것입니다. 대접받으려고 하면 상처와 불행이 찾아오지만 대접하려고 하면 상급과 행복이 찾아옵니다. 그러므로 진정 복된 삶을 원하면 욕심과 자기중심주의를 버리고 언제나 사랑하고 대접하려는 마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어떤 교인은 목사가 실수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왜 그런가 했더니 비판하고 넘어뜨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때 실수한 목사님을 더 섬기는 기회로 삼기 위해서입니다. 어떤 분은 목사가 실수하면 이렇게 말합니다. “목사님! 요새 교인들은 목회자가 너무 완벽하면 오히려 거부감을 가져요. 너무 실망하지 마세요. 힘내세요.” 그런 말을 들으면 목회자는 더 자신의 부족함을 성찰하고 더 좋은 목회자가 되려고 노력하게 됩니다.

목회를 하다 보면 남이 말하기도 전에 자기의 부족함과 허물을 잘 압니다. 옛날에는 누가 그 허물을 지적하며 “왜 그렇게 못해!”라고 하면 은근히 화도 났지만 지금은 정당한 지적에는 오히려 “그건 그래!”하고 맞장구를 치는 편입니다. 자신이 못난 줄을 알면 성도들도 더 섬겨주고 하나님께서도 더 은혜를 주십니다.

그처럼 목회자를 섬겨주는 자세로 배우자와 자녀와 이웃을 섬겨주면 하나님께서 그 마음을 얼마나 기뻐하시겠습니까? 우리는 어느 곳에 가든지 주위에 평화와 기쁨과 즐거움을 전해주는 사람들이 되어서 남에게 부담이 되는 존재가 아니라 남에게 사랑 받는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축복의 문도 저절로 열리게 됩니다.

서울 강남의 한 부자에게 두 명의 동생이 있었습니다. 첫째 동생은 만날 때마다 형이 부자라고 받을 생각만 하니까 더 도와주기 싫고 꼴도 보기 싫어합니다. 반면에 둘째 동생은 형이 부자임에도 불구하고 받을 생각보다는 더 섬길 생각을 하니까 만날 때마다 마음이 즐겁고 무엇이든지 더 주고 싶었습니다. 결국 월세를 사는 둘째 동생을 위해 기쁜 마음으로 분당에 아파트 한 채를 사주었습니다.

받으려고만 하면 남의 짐이 되지만 주려고 하면 남의 기쁨이 됩니다. 남에게 짐을 지우기만 하면 축복의 문은 더 닫히고 남에게 기쁨을 주면 축복의 문은 활짝 열리게 됩니다. 이제 열심히 서로 대접하기를 힘쓰십시오. 큰 것을 대접해야 감동하는 것이 아닙니다. 작은 것으로도 얼마든지 감동시킬 수 있습니다.

미국에서 공부할 때 저는 결혼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가끔 한식이 먹고 싶었습니다. 그것을 알고 결혼한 동료 전도사님이 가끔 식사 초청을 했습니다. 그래서 그 집에 가면 사모님들마다 대접이 다릅니다. 어떤 사모님은 친구들이 자기 집에 오는 것을 아주 귀찮아합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그 집을 꺼리게 되고 남편들도 덩달아 꺼리게 됩니다. 그때마다 이런 생각이 듭니다. “저런 태도가 남편의 성공에 큰 지장이 되겠구나!”

반면에 어떤 사모님은 남편의 동료들을 환대하면서 “저들이 앞으로 내 남편의 동역자구나!”라고 생각하고 기쁨으로 대접합니다. 그러면 그 보이지 않는 내조로 남편도 덩달아 평가가 좋아지고 주위 사람들의 인정을 더 받는 것을 봅니다.

그런 태도가 그때는 별로 차이가 없는 줄 알았지만 목사가 된지 15년이 지난 지금에 보니까 그때 잘 대접했던 가정은 비교적 목회를 행복하게 잘하고 성공한 동료 목사님들이 이끌어주려고 하지만 그때 대접을 잘 못했던 가정은 대체로 좋은 사역지도 잘 찾지 못하고 목회에 어려움을 겪는 것을 봅니다. 그러므로 정말 복된 삶을 원하면 먼저 사심 없이 사랑하고 헌신하고 대접하기를 힘써야 합니다.

지난 주 주일 저녁에 안성에서 있었던 임병철 선교사님의 선교집회에 우리 교인들과 함께 참석했을 때, 한 목사님이 예배 전에 저에게 긴급히 할 말이 있으니까 예배 후에 만나자고 했습니다. 그날 집회가 늦게 끝났습니다. 그래서 그 목사님에게 오늘은 늦었으니 다음에 얘기하면 안 되겠느냐고 했습니다. 그러자 그 목사님이 간단하게 본론만 얘기하겠다고 하면서 저에게 말했습니다. “목사님! 저희 학교 법인의 이사장을 맡아주세요.”

아예 이미 논의와 결정이 다 끝났다는 듯이 말했습니다. 그런데 너무 말이 되지 않는 소리였습니다. 지금 현재 있는 8명의 이사 중에는 성결교단의 총회장을 지냈던 원로목사님도 있습니다. 그런 대 원로 목사님들과 장로님들이 있는데 제가 어떻게 이사장이 됩니까? 요새 이사장님이 84세로 몸이 많이 불편하신데 이번에 은퇴하시면서 저를 후임 이사장으로 지목하신 것 같았습니다.

제가 너무 어이가 없어서 말했습니다. “목사님! 그 자리는 이사장님의 장남이고 저보다 나이가 6살이나 많으신 목사님이 하셔야죠? 제가 이번에 처음 이사가 되었는데 어떻게 이사장을 해요? 말이 되는 소리를 하셔야지요. 그리고 제 얼굴을 보세요. 이렇게 젊은 얼굴로 47세밖에 되지 않은 제가 이사장을 하면 학교 격이 떨어질 거예요. 다른 분을 모시세요.”

그 목사님이 말했습니다. “목사님! 저희 아버님도 40대부터 이사장을 했어요.” 제가 말했습니다. “수백억의 사재를 드려 학교를 설립한 분하고 저하고 어떻게 같아요? 저는 돈도 없고, 교회도 작고, 능력도 없어요.” 그렇게 말하면서도 저는 그 목사님이 왜 저를 그 자리로 추천했는지 궁금해서 물었습니다. “목사님! 제가 어떤 면이 있어서 이사장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셨나요?” 그 목사님이 간단하게 말했습니다. “목사님은 욕심이 없잖아요.”

사실 진짜 욕심이 없는 분은 그 이사장 장남 목사님입니다. 그분은 정치적 술수와 계산적인 태도를 싫어하는데, 아마 정치적 술수를 배제하고 순수하게 학교를 이끌어갈 사람을 찾다가 저를 그런 사람으로 여기고 강력히 천거했던 것 같습니다. 이 세상에 욕심이 없는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저도 있습니다. 그런데 원래 계산이 조금 둔합니다. 그래서 선교한다고 하면서 내 집 마련의 기회를 버리고 아직도 월세를 살고 있습니다.

그처럼 정치적 인맥도 별로 없고, 이사장의 친인척도 아니고, 월세 사는 작은 교회 목사를 작은 단체도 아닌 큰 학교 법인의 이사장으로 모시려는 사람이 세상에 어디에 있습니까? 그것을 보면 저를 천거한 그 목사님이야말로 정말 너무 계산이 없는 분입니다. 아마 그런 예를 찾기가 힘들 것입니다. 그런 일련의 상황을 겪으면서 계산적으로 살지 않는 것이 손해 보는 삶이 아니라 오히려 수지맞는 삶임을 다시 한번 하나님이 생생하게 가르쳐주셨습니다.

나누고 섬기고 대접하는 삶을 통해 사람의 마음에 들어도 축복의 문이 열리는데, 그런 삶을 통해 하나님의 마음에 든다면 축복의 문이 열리지 않겠습니까? 축복을 받는 길은 너무 간단합니다. 사랑하고 헌신하며 됩니다. 이제 거룩한 소경이 되어 남의 허물을 덮어주고, 더욱 남을 대접하고 선교에 힘써 참여하십시오. 그래서 주님의 기쁨이 되고 마지막 때에 큰 축복을 받는 분들이 되길 바랍니다.

출처/ 이한규 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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