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코드 인사 (삼상 16:6-7)
노대통령의 인사스타일을 코드 인사라고 해서 비난도 하고 그것이 특성이라고도 말합니다. 코드인사라는 말은 능력을 고려치 않고 자기와 마음이 맞는 사람만 골라 등용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사람을 선택하고 등용하시는 모습도 보면 그 방법과 기준이 아주 독특합니다. 그래서 오늘 제목을 “하나님의 코드 인사”라고 붙였습니다. 하나님이 사람들을 골라 사용하시는 것을 보면 어쩌면 사람의 생각과는 정반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상의 기준과도 정반대의 방법을 사용하십니다. 우리들이 신앙생활을 할 때 이 점을 참고해야 합니다. 이것을 알아야 하나님의 생각과 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신앙인은 하나님의 마음과 생각을 알아야 하나님의 뜻을 이루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야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은총을 입고 복을 받는 방법을 알 수 있습니다.
“일등보다 꼴찌를”
하나님은 일등도 좋아하시지만 꼴찌도 예민하게 살피십니다. 이것부터가 사람의 생각과 다릅니다. 사람들은 무조건 일등을 선택하고 엘리트를 좋아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일등하려고 일류가 되려고 안간힘을 씁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정반대의 방법을 구사하십니다. 오히려 꼴찌와 실패자와 낙오자들도 살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예를 들면 본문을 보면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왕을 선택하는 과정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사무엘에게 이스라엘의 왕을 삼는데 이새의 집으로 가서 그 아들 중에서 기름 부어 왕을 삼으라고 하십니다. 이새는 다윗의 아버지입니다. 그래서 사무엘이 이새의 집으로 가기 전에 미리 “아들들을 모아놓으라”고 전했습니다. 그리고 사무엘이 가면서 마음으로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왕을 삼으려는 사람이니 얼마나 잘 생겼을까” 그런 기대를 하고 상상을 하면서 가고 있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사무엘에게 주의를 주셨습니다. “키와 용모를 보지 말라, 사람들은 외모와 키를 보지만 나는 중심을 보느니라“. 그 말은 선택받는 사람의 외모나 생김새에 대해서 크게 기대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새의 집에 가 보니까 여섯 명의 아들들이 다 모였는데 모두 참 잘났습니다. 모두 키가 훤칠하고 생김새가 아주 준수했습니다. 그래서 6절을 보면 “과연 여호와께서 기름 부으실 자가 주님 앞에 있도다“하고 기름을 부으려고 하는데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그는 아니다” 그렇습니다. 그래서 다음 아들도 보니까 또 준수했습니다. 그에게 기름을 부으려 하니까 또 “아니다”그렇습니다. 그렇게 여섯 아들 모두를 거절하십니다. 이제는 없습니다. 그래서 “아들이 또 없느냐” 하니까 이새가 말하기를 “말째가 하나 더 있기는 한대 그 아이는 지금 들에 있습니다” 그럼니다. 지금 막내아들은 들에서 양을 치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 말은 아버지도 그 막내아들은 좀 부족해서 기대도 안하고 그날 그 자리에 아예 부르지도 않은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구지 그 막내아들을 불러다 그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왕을 삼으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보면 하나님의 생각은 사람들의 생각과 이렇게 다르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사람들은 우선 잘 생긴 것을 따집니다. 그리고 1등을 좋아합니다. 우리나라는 2등은 모두 별로 알아주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는 소수 외에는 모두 실망당하며 살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회사에서 사원을 뽑을 때도 우선 학교를 보고 성적을 보고 생김새를 보고 키를 보고 실력을 먼저 봅니다. 모두 외적인 조건을 우선합니다. 그래서 회사에서 자꾸만 사고가 터지고 배반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사람됨의 진정한 가치는 내면에 있는 것인데 세상에서는 그것들을 무시합니다. 그래서 세상에서 배반이 일어나고 속임이 일어나고 불행한 사건들이 자꾸만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사람을 보고 택하시는 방법은 사람들과 다릅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1등한 사람보다, 엘리트보다 꼴찌를 생각하십니다. 1등하는 사람도 엘리트도 유능하지만 꼴찌하는 사람에게도 상당한 장점이 있습니다. 꼴찌하는자는 공부는 좀 못해도 순박함이 있고 순수함이 있습니다. 그리고 인정이 있고 마음에 여유가 있고 자기 일에 최선을 다하는 자세가 있습니다. 오늘 세상에서는 꼴찌를 무조건 무시하는데 공부 못한 사람이 후에 성공한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오늘 꼴찌하는자, 가난한자, 배경 없는 사람, 자본 없는 사람들은 더 열심히 일합니다. 그래서 마침내 크게 성공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오늘 우리는 배경이 없다고 현재 공부에 쳐진다고 가진 것이 적다고 유산이 없다고 그런 것 때문에 비관하고 침울해 할 필요가 없습니다. 여러분, 저를 보십시오. 저 같은 사람도 이렇게 부름 받아 지금 일하고 있지 않습니까. 저도 목회자인데도 특출한 말재주가 없는 사람입니다. 목사는 우선 언어구사에 재능이 있어야 합니다. 평생 언어구사를 해야 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저에게는 그 재능이 없으니 얼마나 답답한 일입니까. 또 저는 공부하는데 1등은 한번도 못해 보았습니다. 늘 2등만 했습니다. 그런데도 오늘 이렇게 일하고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다윗을 사용하시는 것을 보십시오. 그 아버지도 그 아들이 왕이 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막내아들은 부르지도 않았습니다. 그 형들이 훨씬 유능해서 자신 있게 내 놓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구지들에서 양을 치고 있는 막내아들을 불러다 그에게 기름 부어 왕으로 삼으라고 하십니다. 사람들은 모두 외모를 보고 생김새를 보고 조건을 먼저 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나 키를 보지 않으시고 그 마음과 중심을 보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은 희망이 있는 것입니다.
“작은 겨자씨를 중시”
겨자씨는 작음의 상징입니다. 우리는 작다는 것을 표현할 때 겨자씨를 들어 비유로 말합니다. 예수님이 복음서에서 겨자씨를 비유로 말씀하신 의도도 “이 작은 것“을 말씀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이 겨자씨는 오늘은 이렇게 작지만 나중에 땅에 심겨지면 결코 작지 않다는 것을 말씀하려고 이 겨자씨를 비유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생각할 것은 이 겨자씨의 중요성은 작다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겨자씨의 중요성은 그 작은 겨자씨 안에 들어있는 생명력입니다. 그 생명력이 그 겨자씨가 지니고 있는 가치이고 중요성이고 생명입니다. 지금은 이렇게 작지만 이것을 땅에 심으면 크게 자라서 새들이 깃들만한 은신처가 되고 쉼터가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양을 따지고 부피를 따지고 크기를 따집니다. 사람들은 얼마나 크냐, 얼마나 많으냐, 얼마나 길고 높으냐 하고 물량을 따집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는 더 많이, 더 크게, 더 높게들 지향합니다. 이사를 갔다 하면 몇 평이냐를 따집니다. 서로 크고 높은 것을 자랑합니다. 오늘 우리의 관심은 더 커지고 많아지고 높아지고 유명해지는 것을 선호합니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크고 높고 잘 생긴 것만 좋은 것은 아닙니다. 평생 풍부하게 사는 것이 반드시 좋은 것만도 아닙니다. 살다보면 때로 한때 배가 고팠던 때가 있었던 것도 아주 좋은 경험이 되고 추억이고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런 경험을 가진 사람은 적어도 경거망동은 하지 않습니다. 또 사람이 살아가다가 때로 출세하고 성공해서 높은 사회적 지위를 갖는 것도 좋은 일입니다.
그런데 그것도 반드시 좋은 것은 아닙니다. 오늘 정치권의 모습을 보십시오. 그것이 반드시 좋다고만 말할 수도 없습니다. 또 다 잘생기고 예뻐지고 멋있고 날씬하기를 원하는데 그것은 기왕이면 좋은 것입니다. 그것도 다 좋은 것은 아닙니다. 어떤 분은 날씬하고 아름다움이 특출해서 그 인생이 참 불행하게 된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리고 세상 사람들이 모두 다 잘생기면 누가 이 세상을 웃깁니까. 여러분 TV에 아주 잘생긴 사람이 나와서 웃긴다면 웃음이 나오겠습니까. 웃음은 코미디언이 나와서 웃겨야 웃음이 나옵니다. 하나님이 그런 재주를 좀 못생긴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셨습니다. 오늘 좀 못생겼다고 비관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참 우스운 이야기입니다. 그것은 자신을 두 번 죽이는 것입니다. 자신이 못생겼다고 생각하는 편견을 버려야 합니다.
하나님은 결코 많고, 크고, 높고 긴 것만을 따지지 않습니다. 결코 잘생기고, 키 크고, 부하고, 많은 것만 선호하지도 않으십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내게 들어있는 생명력입니다. 내안에 들어있는 살아있는 정신이고 순전한 마음이고 신선한 생명력이고 맑고 깨끗한 영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서 그것을 원하십니다. 하나님이 다윗에게서 그것을 보셨습니다. 다윗의 신장이나 아름다움이나 준수한 외모를 보신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보았다면 다윗의 다른 형제들 중에서 뽑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다윗에게서 보신 것은 외모가 아니고 그의 중심이었고 마음이었고 생각이었고 그의 맑은 영과 삶의 책임감을 보신 것입니다. 다윗이 들에서 양을 칠 때 생명을 내놓고 양을 지키는 그 용기 있는 모습을 하나님은 내려다 보셨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다윗에게 당신의 백성을 맡기면 틀림없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다윗을 선택하신 것입니다. 이를테면 다윗의 마음속에 간직되어진 그 생명력을 보신 것입니다.
사람이 아무리 외모가 출중하고 조건이 좋고 배경이 좋아도 그에게 이 믿음이 없고 용기도 없고 거기에 생명력도 없다고 하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씨가 아무리 크고 실하다 해도 그 속에 생명력이 없다면 그 씨를 어디다 사용하겠습니까. 그래서 주님은 겨자씨를 들고 비유로 교육하신 것입니다. 이 겨자씨는 아주 작지만 이 속에 강한 생명력이 들어 있음을 강조했습니다. 그리고 그 겨자씨가 마침내 땅에 심겨져 싹이 나면 큰 숲이 되어 새와 들짐승들의 쉼터를 만들어 준다는 것을 가르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서 그런 생명력을 원하십니다. 여러분의 마음속에 이 영적 생명력을 가지고 있습니까. 우리는 무엇보다도 이 영적 생명력을 가져야 합니다. 주님이 그것을 원하십니다. 그것이 주께로부터 은혜를 입고 선택받을 수 있는 코드입니다.
“버려진 돌멩이를 선택하심”
누가복음 20:17절을 보면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 돌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석수장이들이 버린 돌이 때로 요긴한 모퉁이 돌이 된다는 말입니다. 그 말은 세상에서 쓸모없다고 버림받은 사람들이 때로 하나님이 부르셔서 아주 요긴하게 사용된다는 말입니다. 그 경우가 모두 버린 돌이 모퉁이 돌이 되는 격입니다. 하나님은 때로 사람들이 버리고 무시하는 사람들을 불러내서 훈련시켜 큰 인물을 만드십니다.
예를 들면 무디같은 경우입니다. 무디는 초등학교 밖에 공부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그 무디가 얼마나 무뎠는가 하면 요한복음을 찾으라면 창세기부터 찾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무디는 어려서부터 왕따를 당합니다. 친구들이 너를 가까이 하는 것이 창피하다고 무시하고 따돌렸다고 합니다. 그 무디는 말하자면 버려진 돌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버려진 소금입니다. 그래서 이리 밟히고 저리 밟혔습니다. 이름도 좋아야 합니다. 그 이름이 무디입니다. 얼마나 사람이 무디게 생겼을까를 생각하게 됩니다. 무디는 아마 지혜가 참 둔하고 무디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모두 그 시대의 낙오자들이었습니다. 마리아와 요셉도 그 시대 가장 가난한 사람들이었고 낙후된 사람들이었습니다. 전도자 빌리 그래함도 전도사 때 교도소를 방문해서 설교를 하는데 얼마나 말주변이 없는지 재소자들로부터 “너는 전도사 하지 말고 다른 일이나 하라”고 야유를 받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가 후에 세계적인 전도자가 되지 않았습니까. 누가 그렇게 될 줄 상상이나 했습니까. 아브라함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내가 너를 별과 같이 모래와 같이 자손을 번창하게 해 줄 것이라고 약속하고 불러내셨습니다. 그런 약속을 하시려면 젊은 사람들을 택하고 체형이 다산체형을 골라내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나이 75세 된 아브람을 선택하십니다. 그리고 그의 아내 사라는 아이를 낳을 수 없는 여인이었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때로 사람들의 생각과 정반대 일 때가 있습니다.
주님께서 전도자로 바울을 뽑았습니다. 전도자를 뽑으려면 우선 언변이 좋아야 합니다. 그래도 설교하려면 언변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뽑은 것이 바울입니다. 바울은 언변 없기로 소문난 사람입니다. 고린도교회에서 목회할 때 언변 없다고 얼마나 어려움을 당했습니까. 그러면서도 전도 집회는 다녔습니다. 집회한다고 하니까 사람들이 무슨 소리를 하는가 모여들었습니다. 그런데 언변이 얼마나 없었으면 모두 기대를 가지고 모였는데 사람들이 다 졸았습니다. 어떤 청년은 창틀에 앉아 졸다가 떨어져 죽는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재미없는 설교일수록 또 길고 오래 끕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택해서 사용하셨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이렇습니다.
그렇다고 여기서 여러분은 오해하면 안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꼴찌만 불러 사용하시는 것이냐고 생각할 수 있는데 그것은 오해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생각 없이 사람을 선택하시는 분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골라내신 사람들에게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순수함이고 충성됨이고 부지런하고 최선을 다한다는 장점입니다. 그것은 모두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요소들입니다. 하나님은 유능보다는 진실을 보십니다. 재주보다는 진실함을 보십니다. 겸손함을 보십니다. 엘리트들, 일류 자들, 1등한 사람들은 성적은 좋으나 대부분 교만합니다. 자만합니다. 자기 과신에 빠져 있습니다. 자존심이 강합니다. 그리고 서로 융합을 잘 못합니다. 긍정적인 정신도 부족합니다. 수용력도 적습니다. 사람이 가져야 할 인간성은 1등한 사람이나 엘리트 보다는 꼴찌가 훨씬 더 좋습니다. 꼴찌에게는 책임감이 있고 열심이 있고 화합할 줄 알고 더불어 살아가는 마음과 따뜻한 인간애가 있습니다. 그리고 꼴찌들에게는 교만할 이유가 없기 때문에 겸손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어쩌면 그런 마음을 높이 보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교만하고 자만한 것을 가장 싫어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를 사랑하신다고 했습니다.
어떤 강도가 집에 침입을 했습니다. 그 집에는 부인 혼자 있었습니다. 들어가자마자 “손들어” 하고 소리를 쳤는데 부인은 한쪽 손만 들었습니다. “왜 두 손 다 들지 않느냐”고 다그치니까 한쪽 팔은 신경통으로 들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 말에 이 강도가 갑자기 온순해졌습니다. 그리고 “나도 한 팔이 신경통으로 고생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앉아서 그 부인을 위로하면서 나도 본심은 선한 사람인데 살기가 어려워 이 짓을 하고 있다고 용서하라고 말하고는 조용히 나가더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온정이고 인간애입니다. 세상에서 실패를 경험한 사람에게는 이 온정, 인간애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에게서 그 마음을 읽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선택한 사람들을 보면 한결같이 이 순수함과 우직할 정도로 충성됨과 무서운 결단력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세상 어디에 숨어 살던지 하나님은 그들을 불러내 사용하십니다. 그 사람이 시골에 있건, 산골에 있건 농사꾼이건 불문하고 불러내서 사용하십니다. 엘리사는 시골에서 밭을 갈고 있을 때 부름을 받았습니다. 제자들은 시골 강에서 고기잡고 있을 때 부름을 받았습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시골에서 초라하게 살 때 성령으로부터 부름을 받았습니다. 이들은 한결같이 우직할 정도로 순전하고 순종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부름 받고 선택받는 자세중 하나는 이 우직함입니다.
베드로에게 주님께서 “나를 따르라”고 하니까 그는 모든 것을 그대로 놓아두고 그 길로 따라나섭니다. 아브람도 고향을 떠나라 하시니까 그 길로 고향을 떠납니다. 그때 아브람 나이 75세였습니다. 바울에게 나를 따르라고 하니까 바울은 모든 것을 분토와 같이 버린다고 고백하며 따라나섰습니다. 엘리야가 엘리사를 찾아가서 나를 따르라 하니까 그는 쟁기를 부수고 소를 잡아 동네사람들에게 잔치하고 그 길로 따라 나섰습니다. 그들은 모두 따지고 계산하고 주저하고 그러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한결같이 무서운 결단력을 발휘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그들을 선택하신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너무 배경을 따지고 학벌을 따지고 조건을 따지며 살아갑니다. 우리는 너무 따지고 재고 셈합니다. 그러니까 기회를 놓치고 주어진 일을 회피하게 되는 것입니다. “일 좀 합시다” 그러면 “시간 없어 못해요” 그럼니다. 그것이 모태신앙입니다. “찬양대 좀 하시지요” 그러면 “음치라서 못해요” 그럼니다. 그것도 모태신앙입니다. 누구는 잘해서 하는 것입니까. 하다 보니까 목이 트이고 열려서 오늘 잘하게 되는 것입니다. “찬양대 좀 하시지요” 그러면 “예 잘은 못하지만 순종하겠습니다” 그것이 신앙인의 자세입니다. 그 자세가 자신을 발전시키고 하나님으로부터 사용되는 삶입니다.
하나님은 다윗을 선택했습니다. 그 선택의 이유는 하나님의 코드에 맞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다윗에게서 외모나 생김새를 보신 것이 아니고 그 마음에 있는 생명력을 보셨습니다. 책임감을 보셨습니다. 영적 자질을 보셨습니다. 믿음을 보셨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그에게 나라의 모든 것을 송두리째 맡겨버린 것입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우리에게서 그런 모습을 원하십니다. 그런 생각과 용기가 약동하는 생명력을 찾으십니다. 그 삶이 하나님 앞에서 순종하는 삶입니다.
출처/이정익목사 설교 중에서
'◑δεδομένα 18,185편 ◑ > उपदेश सामग्री 16,731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충성함으로 부흥하는 교회 (히3:6) (0) | 2022.09.23 |
---|---|
주사모 공동체 (마22;34-40) (0) | 2022.09.23 |
행복하고 즐거운 이야기 (창 24:12-16) (0) | 2022.09.23 |
심령을 새롭게 하자 (느헤미야 8:8-9) (0) | 2022.09.23 |
멸시와 싫어 버림 받은 자들을 찾아간 사람 (사53:30) (0) | 2022.09.23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