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령을 새롭게 하자 (느헤미야 8:8-9)
<本文>
"8 하나님의 율법책을 낭독하고 그 뜻을 해석하여 백성으로 그 낭독하는 것을 다 깨닫게 하매 9 백성이 율법의 말씀을 듣고 다 우는지라~" (느8:8-9上)
<序言>
미국에 한인들이 많습니다. 남가주만 해도 120만이라고 합니다. 한국에서 많은 사람들이 오고 있는데 한인교회에서 교인이 처음 왔을 때 절대로 물어 보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고 합니다. "무엇하다가 왔느냐?" "왜 왔느냐?" "가족관계는 어떻게 되느냐?" 라고 합니다. 그것은 그만큼 미국에 온 사람들이 어려운 상황에 있는 사람들이고 그런 사람이 많이 간다는 것은 한국 상황이 힘들다는 반증이기도 합니다. 그리스도인이라 해도 인생살이에서 고통스런 일이 일어납니다. 그럴 때 우리는 힘든 일이 왜 일어났는지,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생각하며 현재의 자리를 하나님 앞에서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BC.586년에 유다와 예루살렘은 바벨론(바빌로니아) 느부갓네살왕에 의해 멸망했습니다. 성전이 불타고 성벽이 무너지고 왕과 정치인과 학자와 기능인 모두 사로잡혀 갔습니다. 그 곳에서 50~70년 동안 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메데를 이긴 바사(페르시아)가 바벨론 왕국을 무너뜨리고 패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바사의 초대왕 고레스는 하나님의 감동을 받아 사로잡혀 온 유다 사람들을 본국으로 돌아가라는 조서를 내렸습니다. 그래서 1차로 귀환한 자들이 스룹바벨을 중심으로 성전을 재건했고 (BC538), 2차로 귀환한 자들이 에스라를 중심으로 성벽 수축운동을 했으나 주변국들의 방해와 고레스 왕의 아들인 아닥사스다 왕의 중단 명령으로 중단하게 되었고 (BC457), 아닥사스다 왕 때 3차로 귀환한 자들이 느헤미야를 중심으로 성벽을 중건하게 됩니다 (BC445). 그러나 백성들은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했습니다. 자신들의 위치를 확인하려 했습니다.
<本論>
1. 말씀 듣기를 사모했습니다.
8장 1절부터 보면 이스라엘 자손이 7월 1일(나팔절)이 되자 일제히 수문(水門) 앞 광장에 모여 학사(學士) 에스라에게 율법책을 가져오게 했습니다. 에스라는 율법책을 가지고 나와 나무 강단에 서서 율법책을 펴자 모든 백성이 일어났습니다. 에스라가 새벽부터 정오까지 율법책을 낭독했습니다. 에스라가 율법책을 낭독하며 하나님을 송축할 땐 백성들이 '아멘' '아멘'으로 응답하고 몸을 굽혀 얼굴을 땅에 대고 하나님께 경배했습니다.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은 에스라가 낭독한 율법을 듣지 못한 사람들에게 율법책을 낭독해 주고 해석해 주고 깨닫게 해 주었습니다. 백성들은 그 율법의 말씀을 깨닫고 울었습니다 (8:1-9).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 말씀을 사모한 것은 당연합니다. 그들은 과거에 왜 바벨론에서 수십년 동안 고난을 겪어야 했는지 정확히 몰랐습니다. 현재에 처한 상황이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지 잘 몰랐습니다. 미래에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하나님이 과거에 왜 그렇게 하셨는지 알고 싶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앞으로 어떻게 하기를 원하시는지 알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제사장겸 학사인 에스라에게 성경을 낭독하기를 청했고 말씀을 들을 때 아멘으로 받았고 말씀을 깨달을 때 운 것입니다.
잠언6:23에 "대저 명령은 등불이요 법은 빛이요~"라고 했습니다. 시편19:7-9에는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케 하고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로 지혜롭게 하며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도다"고 했고 시편107:20에는 "저가 그 말씀을 보내어 저희를 고치사 위경에서 건지시는도다"고 했습니다. 디모데후서3:16-17에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말씀을 항상 갈급한 심정으로 사모해야 합니다. 금을 사모하는 것 보다 더 사모해야 합니다 (시19:10). 입을 열고 헐떡이는 심정을 가져야 합니다 (시119:131). 초대 교회에도 그러했습니다 (행6:7, 12:24)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하나님 말씀을 사람의 말로 듣지 않고 하나님 말씀으로 받았으니 그 말씀이 믿는 자 속에서 역사한다고 했습니다 (살전2:13). 뵈뢰아 사람들은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아 그것이 그런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했다고 했습니다 (행17:11).
2. 죄를 찾아 회개했습니다.
9장 1절부터 보면 이스라엘 자손이 7월 24일에 모여 금식하며 굵은 베옷을 입고 티끌을 무릅쓰고 회개를 했습니다. 이방 사람들과 절교를 하고 서서 자기들의 죄와 열조의 허물을 자복했습니다. 낮의 ¼은 율법책을 낭독하고 낮의 ¼은 죄를 자복하며 하나님을 경배했습니다. 낮의 ¼인 6~9시까지는 성경을 읽고 낮의 ¼인 9~12시까지는 회개를 한 것입니다 (9:1-6).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은 하나님께 부르짖고 하나님을 송축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택하시고 그의 후손인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종살이 하던 상황에서 괴로움을 들으시고 건지셨다는 것입니다. 광야에서 불과 구름 기둥으로 인도하시고 하늘에서 만나를 내려 먹이시고 반석에서 물을 내어 먹이시고 옷이 해어지지 않게 하시고 발이 부릍지 않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아모리 왕 시혼과 바산 왕 옥을 물리치게 해 주시고 약속하신 가나안 땅의 거민들을 이기게 해 주시고 차지하게 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포도원과 감람원과 온갖 과목으로 풍성한 복을 누리게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마음이 교만해져 하나님의 율법의 말씀을 거역하고 우상을 섬겼다는 것입니다. 선지자들을 보내어 책망해도 듣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앗수르와 바벨론 군대를 통해 징계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율법의 말씀을 깨달아 회개하고 보니 하나님께서 바벨론 군대를 통해 심판하심이 마땅하고 공의로심을 나타냈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심판 가운데서도 아주 멸하거나 버리지 않으시고 긍휼을 베풀어 본토로 돌아와 다시 풍성함을 얻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9:7-38).
한 어머니가 아들이 전쟁터에 나갔다가 적탄에 맞아 죽었다는 전사 소식을 들었습니다. 아들을 무척이나 사랑했던 어머니는 슬픔을 이겨낼 수없었습니다. 아들의 사진을 보면서 '한번만이라도 만날 수 있다면! 단 한번만이라도...." 그리고 날마다 기도했습니다. 하루는 기도 중에 천사가 찾아와 "네 소원이 그렇다면 아들을 5분 동안만 만나게 해주마 그런데 몇 살 때의 아들이 보고 싶은가? 군인으로서 조국을 위해 싸우고 있는 아들인가? 전쟁터로 떠날 때의 아들인가? 졸업식 때 단상에 올라가 우등상을 타던 때의 아들인가? 친구들과 어울려 놀던 때의 아들인가? 아니면 당신 품에 안겨 재롱을 부리던 갓난애 적의 아들인가?" 어머니는 잠시 생각하다가 조용히 대답했습니다. "그 애가 아마 7살 때의 일로 기억하는데 한 번은 나한테 무언가 잘못을 저지르고 용서를 구하려고 뜰에서 나에게로 달려들어 왔지요. 그 때의 아이와 만나게 해 주세요. 그 때 그 애는 아직 어려서 매우 낙심하고 있었지요 조그만 두 손으로 흐르는 눈물을 닦고 있었어요. 내 품으로 온 힘을 다해 뛰어들던 그 때 그 애의 모습을 아직까지 잊지 못하고 있답니다." 어머니가 가장 그리워 하는 아들의 모습은 잘못을 뉘우치고 자신을 절실히 필요로 하고 있을 때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죄를 회개하며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구하는 모습 보기를 원하십니다.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를 범하고 우리야를 살인한 이후 큰 고통 가운데 있었지만 나단 선지자의 책망을 듣고 침상에 요가 뜨도록 회개를 했습니다 (시51:1-19) 시편6:6에 "내가 탄식함으로 곤핍하여 밤마다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며 내 요를 적시나이다"고 했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죄를 사해주셨고 그로 인하여 다윗은 평안을 얻었습니다(삼하12:1-14). 요한일서1:9에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죄를 철저히 고백하고 자복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시62:8).
3. 바로 살기로 결단했습니다.
10장 1절부터 보면 인(印)을 친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방백들 이름이 나옵니다 (10:1-27). 이 인(印)은 9:30에 보면 견고한 언약을 세우고 인을 찍은 것입니다. 그리고 나머지 백성들도 그들을 따라 저주로 맹세를 합니다. 자녀들을 이방인과 통혼시키지 않을 것이며, 안식일에 상거래 행위를 하지 않을 것이며, 7년 마다 돌아오는 희년에 땅을 쉬게 하고 빚을 탕감해 줄 것이며, 성전세를 바칠 것이며, 성전에 나무를 공급할 것이며, 곡물의 첫 것과 가축의 첫 것과 아들의 첫 것을 드릴 것이며, 소산의 십일조를 드릴 것이며, 성전을 버리지 않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10:28-39). 곧 하나님을 떠나지 않고 하나님의 성전을 버리지 않고 율법의 말씀을 철저히 지키겠다는 언약의 맹세를 한 것입니다.
구약시대에 언약을 세우는 방법은 짐승을 잡아 둘로 쪼갠 후 그 사이로 지나가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언약을 어겼을 경우 그 짐승처럼 죽게 된다는 의미를 가진 의식이었습니다. 언약을 세운다는 것은 그런 의미를 가진 것입니다. 본문에서 인을 쳤다(10:1)는 것은 언약을 확약하는 의미가 있고 저주로 맹세했다(10:29)는 것은 만일 이 언약을 깨뜨릴 경우 저주를 받아 마땅하다는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제 8회 파리 올림픽에 영국 국가 대표로 출전한 '에릭 리들'이라는 육상 선수가 있었습니다. 주 종목 100m에서 유력한 금메달 후보였습니다. 그런데 100m 첫 예선 경기 일정이 주일 오후 3시와 5시에 잡혔습니다. 그는 일정표를 보고 "저는 주일에는 안 뜀니다"라고 단호한 결정을 알렸습니다. 주일 성수를 위한 자기 희생적 결단이었으며 신앙의 표현이었습니다. 그리고 당일에는 평소처럼 교회에서 보냈습니다. 그런 에릭 리들에 대한 영국 전체의 반응은 냉소적 이었습니다. "편협하고 옹졸한 신앙인", "신앙을 소매 끝에 달고 다니는 신앙심 깊은 척 하는 위선자", "조국의 명예를 버린 위선자" 라고 비난하였습니다. 결국 100m 경기는 영국의 헤롤드가 금메달을 땄습니다. 에릭 리들은 기쁜 마음으로 헤롤드의 우승을 축하해 주었습니다. 에릭 리들 자신의 주 종목이 아닌 200m에서 동메달을 따게 되었고 400m에도 출전하게 되었습니다. 많은 우승 후보들를 제치고 47초 6 이라는 세계 신기록 까지 세우면서 금메달을 땄습니다. 결승전에 출전할 때 담당 안마사가 쥐어 준 쪽지가 응답되었던 것입니다. "구약에 이런 글이 있네.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나도 존중하리라 - 최선의 영광이 있길 빌면서." 그는 400m우승 비결을 묻는 기자들에게 이렇게 답하였다. "처음 200m 는 제 힘으로 최선을 다했고 나머지 200m 는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빨리 달릴 수 있었습니다" 저는 이 선수가 비록 우승을 하지 못했다고 할지라도 내적인 기쁨을 가지고 있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말씀을 지키는 것이 목적이었기 때문입니다 (단3:17-18).
초대교회는 말씀의 작은 부분까지 철저히 지키므로 날로 부흥했습니다 사도행전 16:4-5에 "성으로 다녀갈 때에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와 장로들의 작정한 규례를 저희에게 주어 지키게 하니- 여러 교회가 믿음이 더 굳어지고 수가 날마다 더하니라"고 했습니다 (행15:29). 주님은 빌라델비아 교회에 대해서 칭찬할 때에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주의 말씀을 지켰기 때문에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열린문을 준다고 했습니다 (계3:8). 천국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다가 순교한 자들이 하나님과 가장 가까운 곳이 있게 됩니다 (계6:8). 하나님 나라에서는 말씀 한마디를 지키려다가 순교한 자들이 왕노릇을 하게 됩니다. 요한계시록20:4에 "-또 내가 보니 예수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목 베임을 받은 자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도 아니하고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도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로 더불어 천 년 동안 왕 노릇 하니"라고 하였습니다.
<結言>
이스라엘 백성들은 율법의 말씀을 깨닫고 회개하고 결단을 했습니다. 그런데 결단으로 그친 것이 아니고 행동으로 옮겼습니다. 13장 1절부터 보면 지도자 느헤미야가 율법의 말씀대로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 세우고 성전 제도를 다시 세웠습니다. 안식일을 범한 자들은 유다인이든 이방인이든 징계하여 꾸짖었고 안식일에는 아예 성문을 닫았습니다. 그리고 이방인과 통혼한 자들은 징계하였고 대적과 통혼한 자는 대제사장의 손자라도 내어 쫓았습니다.
출처/차용철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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