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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훈련 (디모데전서 4:6-16)

by 【고동엽】 2022. 9. 22.

영성훈련   (디모데전서 4:6-16)

I. 영성훈련

“내가 하루동안 피아노를 치지 아니하면 내가 알고 사흘을 치지 아니하면 전문가들이 알고 일주일을 치지 아니하면 내 팬들이 안다!? - 한 훌륭한 피아니스트의 말입니다.

역사상 위대한 예술가나 스포츠맨들이 어느날 우연히 그렇게 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모두 피나는 노력과 훈련의 산물들입니다. 이는 건강한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은혜의 삶을 빛내기 위해 부지런히 갈고 닦을 때 영향력 있는 하나님의 작품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말씀과 삶의 조화로운 모습, 영향력있는 신앙생활 - 이를 두고 영성이라고 부릅니다.

원래 영성이란, “누구 누구의 정신으로 살아간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기독교 영성은 예수님처럼 생각하고 예수님처럼 느끼고 예수님처럼 말하고 예수님처럼 살아가는 영광스런 단계를 말합니다.

영성은 우리 신앙인의 최고의 목표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으로서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찬사는 경건한 사람, 영성적인 사람입니다. 이 단계를 향해 한걸음 한걸음 걸어가는 삶을 우리는 영성훈련이라고 부릅니다. 이 영성훈련은 고된 훈련이거나 지루한 여행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함께 걸어가는 행복한 발걸음입니다.

성경에 영성훈련이란 말은 없습니다. 그러나 가장 근접한 단어를 찾아본다면 “경건을 연습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여기서 “연습하다”라는 말은 원어에 ‘귐나조’라는 단어로 되어있습니다. 영어에 귐나지움 (짐나지움) 즉 체육관, 운동장이라는 단어가 여기서 유래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이 편지를 쓸 당시 학교 교과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과목이 체육이었습니다. 그래서 고대 헬라의 청소년들은 이 짐나지움에서 달리기와 씨름 등으로 잘 단련이 되어 있었습니다.

이것을 보고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인들도 적절한 운동, 적당한 휴식, 식생활 조절이나 체중관리 등으로 자신의 신체를 관리하는 것은 아름다운 청지기적 태도로 바람직한 일이라고 격려하고 있는 것입니다.

많은 믿음의 선진들은 육체적 단련이나 연습이 성경적으로 정당할 것을 주장했습니다. 특별히 청교도들은 그들이 어떤 운동이나 오락을 하려고 할 때 몇 가지 중요한 질문을 던져서 그들이 그 일을 해야 하는지, 하지 말아야 하는지를 결정했습니다.

첫째, 그 운동이 우리 몸의 건강을 도와줄 수 있는가?
둘째, 그리스도인의 건덕상 해를 끼치지는 않는가?
셋째, 이 운동이나 오락이 나를 지배하는가? 아니면 내가 그것들을 이용하는가?

가령, 그 오락을 떠나서 보다 중요한 일을 하고자 할 때 쉽게 그 오락을 떠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오락의 종이 되어 때로 가정으로 돌아갈 시간을 잃어버리기도 하고, 하나님께 예배하는 시간조차 놓쳐 버리는 현대인들이 늘 물어야 하는 질문인 줄 압니다.

넷째, 주님이 지금 이 시간 이 자리에 오신다면 주님께서 우리가 하고 있는 이 활동을 기뻐하실까? 이 오락에 주님을 초대할 수 있는가? 라고 물었습니다.

마지막 다섯째, 이 오락이나 운동을 하는 목적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함인가? 즉 운동을 해도 건강한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헌신하기 위함이라는 숭고한 목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II. 훈련하라

연구보고서들에 의하면 현대도시인의 최대 관심사가 건강이랍니다. 미용과 건강에 좋다고 하면 지렁이도 잡아먹고 굼벵이도 잡아먹는 세상입니다. 그래서 건강식이 호황을 이루고 스포츠 센타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고 있습니다. 잘못될 것 없습니다. 좋은 일입니다. 말씀 그대로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거기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육체의 연습보다도 더 중요한 하나의 연습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경건에 이르는 연습, 즉 영성훈련입니다.

7절 말씀을 보십시다. “오직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

이 말씀을 의역하면 이렇습니다. 여러분 사라지는 육체를 위해서도 여러분이 모든 시간과 정성을 투자하며 수고하시는데 사라지지 아니할 여러분의 영혼을 위해서, 신앙과 인격을 위해서 당신은 무엇을 투자하고 계십니까? 육체의 연습은 유익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영원성이 없습니다. 아무리 공을 잘 차는 안정환, 홍명보이라고 해도 죽은 후에까지 공을 차지는 못합니다. 이승엽 선수도 죽은 후에까지 홈런을 날리지는 못할 것입니다.

여러분 육체는 조금 약하다고 할지라도 주님께서 우리 몸을 부활시키는 그 날 우리의 몸은 완전하게 될 것입니다. (몸 약한 사람위로.)

여러분 이 땅에서 건강과 안식과 평안을 줄 뿐만 아니고 영원한 내생의 약속에 축복이 되는 보다 중요하고, 보다 더 필요한 훈련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영성훈련입니다. 라고 풀이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과일나무의 열매는 분명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러나 그 나무를 가꾸는 일은 농부의 일입니다. 영성은 물론 성령의 선물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위해 자신을 훈련하는 일은 우리의 몫입니다. 부지런히 쓰고 사용하면 강해집니다. 우리 몸도 자꾸 사용하면 강해지고 튼튼해집니다. 그러나 조금도 걷지를 않고 차만 타고 다니면 팔다리는 약해지고 배만 나옵니다.

부지런히 기도하는 사람은 기도의 영성이 강해집니다. 부지런히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의 영성이 강해집니다. 열심히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사람은 말씀중심의 영성이 생깁니다. 부지런히 전도하고 목장을 섬기는 사람은 하나님 나라의 영성이 생깁니다.

영적인 성장은 요술이나 마술이 아닙니다. 하루 아침 기도하고 나면 하늘에서 떨어지는 요술방망이가 아닙니다. 간단없는 훈련입니다. 연습입니다. 건강한 신앙생활의 체질화입니다.

그러나 찬송(임재)을 멀리하고서야 강팍한 마음이 좀처럼 열려질 수가 없지요. 기도(권능)를 게을리 하는 사람이 하늘의 신령한 은혜를 받을 수 없습니다. 말씀을 등한히 하는 자의 생활에서 경건한 생활의 변화를 기대하기는 힘든 일입니다. 은사를 무시하면 무력해지고 은혜를 외면하면 은혜 밖에서 살게 되며 성령을 거역하면 결국 버림받고 말게 됩니다. 교회출석을 게을리하고 세상의 일이나 사람과의 약속을 따라가는 사람들이 어떻게 경건한 하나님의 자녀의 자리에 머물러 살 수 있겠습니까?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동창회모임(기도회), 계모임(성경공부), 헬스클럽, 수영장(전도하는 시간) 혹은 기타 여러 곳들을 갈 시간이 있는데도 경건에 이르는 연습을 하는 축복받는 자리에는 나오지 못하고 있음은 실로 유감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어리석게도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경건에 이르는 생활을 하려면 세상의 많은 것들을 잃어 버린다는 생각을 하고 있음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세상적인 것을 얻기 위하여 경건의 생활을 내어던지는 것은 슬픈 일입니다. 소돔성의 롯의 처가 살림하던 가구와 가꾸던 사과나무 때문에 경건에 이르는 생명의 길은 가볍게 생각하고 뒤를 돌아보다가 소금기둥이 된 사실은 후세 사람들에게 좋은 본보기가 되고 있습니다.

III. 영성훈련의 영역들

그러면 그 영성훈련의 목표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영성신학자들은 영성훈련의 목표를 이렇게 말합니다. 인간의 존재양식에서 하나님의 존재양식으로, 인간의 행동양식에서 하나님의 행동양식으로 바꾸어 가는 것이라구요.

이를 두고 본문 9절과 10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미쁘다 이 말이여 모든 사람들이 받을 만하도다 이를 위하여 우리가 수고하고 진력하는 것은 우리 소망을 살아 계신 하나님께 둠이니” 즉, 우리 인간의 시선을, 우리 삶의 목표와 소망을 살아 계신 하나님께 두는 것이 영성훈련의 목표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영적인 관심이 쇠퇴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성경에 대한 관심이나 기도에 대한 목마른 관심이 사라지고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우리가 우리의 소망을 하나님께 두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내 소망이 진정 하나님께 있다면 우리는 하나님께 매어 달리고자 할 것입니다. 현대인들이 오직 소망을 세상에 두고 있기 때문에 그들의 오만가지 관심이 세상으로만 집중되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돈! 땅! 아파트! 우리의 소망을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으로 대치하기 시작할 때 그것들이 우리의 인생을 지배하고 그것들이 내게 가장 좋은 것을 줄 수 있다고 착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부터 우리의 영적인 식욕, 영적인 관심은 쇠퇴하고 마는 것입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속지말라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오나니”(약1:15)

여러분! 속지 마십시오. 우리 생의 목표는 하나님 나라입니다. 우리의 소망은 하나님입니다. 지금 당신의 목마름이 무엇입니까? 바로 그 목마름이 당신의 관심사요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주신 축복입니다. 목마름이 영적인 사람은 영적인 사람이요 그 목마름이 육적인 사람은 육적인 사람입니다.

우리가 훈련 시켜야 할 영성훈련의 영역이 무엇입니까?

영성훈련의 영역을 본문 11절과 12절에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네가 이것들을 명하고 가르치라. 누구든지 네 연소함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고 오직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대하여 믿는자에게 본이 되어” 즉 - 말, 행실, 사랑, 믿음, 정절 다섯 가지 영역을 말합니다.

1. 영성훈련의 첫째 영역은 말, 언어생활입니다.

언어는 언제나 그 사람자체의 모든 것을 대변해 줍니다.

공부를 잘 안하는 아들보고 성적 좀 올려라 충고를 하는데,
채소가계 주인은 쑥쑥 올려라. 점쟁이는 점점 올려라. 한의사는 한방에 올려라.
성형외과 의사는 몰라보게 올려라. 구두닦이 아저씨는 반짝반짝 올려라.
자동차 판매원은 차차 올려라. 백화점 주인은 파격적으로 올려라.
총알택시 기사는 따따블로 올려라. 그런답니다.

신년초가 되면 우리가정의 기도제목을 쓰는 일이 있는데 한번은 저희교회 곽점봉 장로님, 김강자 권사님 가정에서 아들을 향한 기도제목을 똑같이 썼습니다. 장로님은 목수이신데 뭐라고 썼는고 하니 “하나님 우리 아들 재목감이 되게 해 주십시오.?운전하는 김강자 권사님은 “하나님 우리 아들의 미래를 운행하여 주십시오.”

본문 7절에 보면 “망녕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라”는 말씀이 나오는데 이 말의 뜻은 세상적 가치관속에서 떠드는 의미없는 잡담이나 험담을 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한 집단의 영성을 측량할 수 있는 좋은 측도가 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모일 때 무슨 얘기를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당신은 다른 사람을 만날 때 혹은 어떤 모임 속에서 어떤 얘기가 당신을 지배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얼마나 이야기가 되어지고 있습니까? 이웃에 대한 험담이나 부정적인 얘기나 수군수군하고 파당을 짓는 얘기, 이런 따위들은 당신의 영성을 죽이는 독소가 될 것입니다. 정치적인 편향성, 음담패설 등도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여러분, 모일 때마다 늘 불평이나 하고 짜증을 내고 부정적인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 속에 섞여 있을 때 당신의 인생도 찌들어 가는 듯한 삶의 황폐를 경험해 보지 못했습니까? 내 주변에 영적인 아름다운 교제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 만날 때마다 하나님을 찬양하고, 예수와 교회를 이야기하며 삶에 대한 아름다운 사건을 즐겨 말하는 사람들과 깊은 교제를 나눌 수 있다는 것, 이것이 얼마나 축복된 일입니까? 이 귀한 축복이 여러분 모두에 넘치시길 바랍니다.

영성훈련에서 이 언어생활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영적으로 인격적으로 잘 다듬어져 있지 않은 언어 때문에, 생각하지 않고 내 뱉는 말들 때문에 형제들의 가슴이 얼마나 많은 상처를 받고 있습니까?

예수님의 말씀 가운데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마12:34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Dei」라는 사람의 “세 황금문?이라는 시가 있습니다. 말하기 전에 세 황금문을 지나게 하라. 다 좁은 문들이다. 첫째 문은 네 마음에 간사함이 없는 진실한 말이냐? 그리고 둘째 문은 필요한 말이냐? 네 마음속에 참된 대답을 하라. 마지막 가장 좁은 문은 그것이 사랑에서 우러나온 친절한 말이냐 하는 것이다. 이 세 문을 지나 네 입에 왔을 때 비로소 담대히 말하라.

옛날 유대인 중에 「시락」이란 사람은 “나무나 돌이나 칼에 맞은 몸의 상처는 쉽게 나을 수가 있지만 마음에 받은 상처는 쉽게 낫지 않는다. 또한 세상에서 총과 칼에 죽은 사람이 많으나 이 혀, 독설에 죽은 사람과는 비길 바가 못된다?고 말했습니다.

여러분, 중심이 변화된 그리스도인에게는 제일 먼저 언어의 변화가 따르고 그것이 자신의 인격을 다듬어 가야 합니다.

2. 영성훈련의 두 번째 영역은 행실, 즉 진실한 삶입니다.

흔히 철학자들이 여러 가지 유형의 무신론자를 말하는 가운데 영성적 무신론자라는 것이 있습니다. 입술로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지만, 마음으로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자기 행위로는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살고 있는 사람, 날마다의 삶은 하나님과 전혀 상관없이 도무지 하나님이 없는 사람처럼 살고 있는 그런 사람들을 영성적 무신론자라고 말합니다.

설교하기가 어려운 것은 아니고 설교한 내용대로 살기가 어려운 게고 교인이 되는게 어려운게 아니고 신앙인답게 살기가 어려운 겝니다.

그의 등에 새들이 날아와 앉았다고 하는 저 유명한 아시스의 성자 프란시스를 아십니까? 이 분이 어느날 제자들을 데리고 어떤 마을을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제자들아 우리가 오늘 이 마을에서 위대한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하자? 제자들은 대단한 호기심을 가지고 스승의 뒤를 따라갔습니다. 그러나 그 마을을 다 지나기까지 프란시스는 한 마디도 입을 열지 않았습니다. ”선생님, 왜 설교를 하시지 아니하십니까?? “아니, 우리는 위대한 설교를 했다. 우리가 이 마을을 지나고 있을 때 사람들은 우리의 행동을 지켜 보았다. 그때 우리의 얼굴과 눈짓이 설교를 했고 그대들의 몸과 걸음걸이가 모두 설교였다.?

3. 그 다음 영성훈련의 영역으로 본문은 사랑과 믿음과 정절을 들고 있습니다.

이는 모든 이웃, 인간관계에서의 진실과 온유를 말합니다. 특별히 정절이라는 단어는 이성관계와 물질거래에서 깨끗하다는 뜻입니다.

초대교회시절 역사학자 플리디우스라는 사람은 그리스도인을 관찰하고 황제에게 보고한 보고서 가운데 이런 부분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결코 음란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도둑질을 하는 법도 없습니다. 그들은 약속을 어기지도 않습니다. 그들은 모두 부채문제에 대해서도 절대로 깨끗합니다.?

이것은 교회 밖에서 본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당시 교회 밖의 한 역사학자의 보고서를 읽으면서 오늘 이 시대의 교회는 그러지 못하고 있다는 아픔이 못내 우리를 아프게 하고 있습니다. 차원 높은 영성, 차원 높은 윤리가 그리운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풍성한 영성훈련이 더욱 목마르게 그리워지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을 지배했던 이 폭발적인 힘을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에게서 왜 찾아보기가 힘들어졌을까요? 좀더 진실해져야 합니다.

인간관계에서 앉을 자리와 못 앉을 자리, 사람과 나누는 대화속에서 해야 할 말과 하지 말아야 할 말을 구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독립기념관이 처음 문을 열었을 때에 시골에서 올라온 한 할머니가 이곳 저곳 구경다니다가 다리가 아팠던지 한 의자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런데 경비병이 달려오더니 할머니 이 의자는 김 구 선생님의 의자입니다. 거기 앉으시면 안됩니다. 일어나십시오. 할머니가 버럭 화를 내면서 임자 오면 일어나면 될 것 아니오. 그러더랍니다.

여러분 앉을 자리가 있고 못 앉을 자리가 있는 겝니다. 특별히 교회안에서 지체들과 더불어서 살아갈 때에 해야 할 말이 있는 게고 하지 말아야 할 말이 있는 것입니다.

신앙은 흉내내는 것이 아닙니다. 의식생활을 우리는 영생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존재적인 변화를 얘기하는 것입니다. 흉내 가지고는 되지 않습니다.

세계가 낳은 가장 유명한 희극배우로 알려진 챠리 채플린이란 사람이 있습니다. 어느날 채플린 흉내내기 대회가 있었는데 진짜 챠리 채플린이 자신의 신분을 감추고 이 대회에 참여했더랍니다. 모두들 분장을 하고 얼마나 꼭같이 흉내를 내는지 진짜 챠리 채플린은 3등 안에도 못들었다는 얘기입니다.

여러분 인생은 쇼가 아닙니다. 신앙은 연극이 아닙니다. 우린 경건, 영성을 흉내내려고 하면 안됩니다. 예수를 진실로 믿어야지 흉내를 내어서는 안됩니다. 무당도 강신 무당과 학습 무당은 다릅니다. 신앙인도 흉내 신앙인과 영적 신앙인은 다릅니다.

영성훈련의 영역을 영성신학들은 그렇게 요약합니다.
첫째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에 들어가는 것이요. 둘째 이웃과의 정직하고 순결한 관계요. 셋째 자연과의 올바른 관계입니다.

IV. 영성훈련의 방법들

그러면 어떻게 이 영성훈련이 가능하겠는가?

이에 대해 전통적으로 많은 방법이 있을 수 있겠으나 오늘 본문은 말씀을 가까이 하는 생활 그리고 받은 은사를 따라 봉사하는 생활을 들고 있습니다.

13절 말씀 “내가 이를 때까지 읽는 것과 권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에 착념하라!”

그렇습니다. 말씀을 떠나서는 영성훈련은 불가능합니다. 삶을 변화시키는 능력은 말씀입니다. 그리고 은혜받는 삶과 함께 은사를 따라 봉사하는 것입니다. 봉사생활없이 신앙은 성장하지 않습니다. 목장과 교회안에서 연약한 지체들을 안고 서로 섬겨주는 봉사의 삶을 통해 우리의 영성이 강해집니다.

도시 현대인들의 영적생활을 방해하는 사고방식 중 하나는 무교회적 의식입니다. “마땅히 교회는 나가야 하지만 교회 깊이 들어가면 골치가 아프다는 것입니다.” 서로 신경쓰기 싫다는 겁니다. 만약 이런 태도를 가지신 분이 우리 교인들 가운데 계시다면 지금 곧 수정하시기 바랍니다. 이런 태도로는 결코 영적 성장을 가져 올 수 없습니다. 교회생활에 무책임한 사람은 결국 하나님나라에 무책임한 사람입니다.

교회를 섬기다가 상처받을 수 있고 형제들 때문에 마음 아파 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들의 영광입니다.

어떻게 영성훈련이 가능합니까? 교회안에서 예배와 말씀을 통해 은혜받는 생활과 은사를 따라 다른 지체들을 섬기는 생활이 조화를 이룰 때 우리는 건강한 영성을 이룰 수 있습니다.

한국사람들은 어떻게 하면 건강한가? 독특한 생각들이 있습니다. 뭘 먹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얼굴이 헬쓱하고 힘이 없어 비실비실하다고 생각되어지면 여름 다가오기전에 보약 한재 먹어야지 하는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우리나라 사람들은 뭐든지 건강에 좋다고 그러면 먹습니다. 뿌리라는 뿌리는 다 먹습니다. 벌레라는 벌레는 다 잡아 먹습니다. 그래서 에덴 동산에 우리나라 사람갖다 놓으면 선악과 안따먹고 뱀잡아 먹었을 거라고 그러지 않습니까? 뱀도 남기질 않습니다. 외국에 나가서 여행하는 것도 보약여행을 합니다. 이게 우리나라 사람들입니다.

한국교회 그리스도인들은 신앙생활을 하더라도 뭘 먹는 걸 신앙생활의 전부인 양 생각합니다. 그래서 좋은 말씀을 찾아서 삼만리 헤집고 다닙니다. 말씀을 사모하는 것, 말씀을 통하여 은혜받겠다는 열망이 잘못된 것 아니고 나무랄 일 아니지만 거기에 머무는 신앙생활. 내가 무엇을 해야 될 것인가? 생각하지 아니하고 뭐든지 한첩 잘 먹으면 내 영성이 건강해 질 것이라는 착각에서 이제 우리가 벗어나야 할 것입니다.

잘 먹어야 하는 시대는 운동을 많이해야 건강해 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먹었으면 먹은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기도했으면 기도한 내용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이 깊어질수록 섬기는 운동이 체질화되어야 합니다. 특별히 교회 리더들에겐 건강한 영성이 필요합니다. 섬기는 운동이 필요합니다. 영적인 사역을 할수록 탈진이 찾아옵니다. 교회의 직분이 무거워 질수록 빨리 피곤해 지칠 수 있고 나도 모르는 사이에 순식간에 속물이 되어져서 어느덧 불평하고 원망하는 자리에 내가 앉아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신앙생활을 해야 할 것입니다.

출애굽기 17장에 보면 이스라엘과 아말렉과의 한판 전쟁이 나옵니다. 모세는 언덕위에 올라가 바위에 걸터앉아 손을 들고 기도합니다. 여호수아는 군사를 이끌고 칼을 휘두르고 피를 흘리며 전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의 놀라운 기록은 칼을 휘두르고 피를 흘리는 여호수아가 피곤했다는 얘기가 없습니다. 정작 피곤하고 지치고 탈진한 사람은 바위에 걸터앉아 손을 들고 기도하는 모세였습니다. 그래서 모세 옆에는 왼팔 오른팔을 붙들어 주는 아론과 훌이 있었던 것이지요. 영성적인 사람일수록 영적인 사역을 크게 감당하는 사람일수록 탈진할 수 있고 사탄의 활에 맞에 쓰러질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신앙생활하다보면, 성도들도 작은 눈빛 말 한마디에 상처를 받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지도자가 받는 상처는 그것보다 훨씬 더 깊고 많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영성을 강화시키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해야 합니다. 교회 지도자 그룹일수록 한편 은혜받는 생활에 실패하지 말아야 하며 또 한편 어린 신앙인들을 섬기는 장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목회하다가, 언제 피곤하고 탈진합니까? 주일마다 새가족들이 많이 등록해서 그들을 소개하고 환영하다가 지치는 목사를 보셨습니까? 목사가 열심히 설교를 준비해서 설교하는데 교인들이 “아멘 아멘” 은혜를 받습니다. 그때 피곤해 하는 목사를 보셨습니까? 기도의 응답이 되어서 너무 기뻐서 울고 웃다가 지치는 사람을 보셨습니까?

기계가 마모되는 것은 기계를 많이 사용해서가 아닙니다. 기름을 치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일에 기쁨과 보람을 잃어 버려서 그렇습니다. 왜 성도들이 세상 한복판에 살아가면서 사탄의 유혹에 쓰러지고 넘어지고, 봉사하고 헌신하다가 불평하고 원망하고 지쳐 하는 것입니까? 기름을 잘못쳐서 그런 것입니다. 영성이 잘못되어서 그렇습니다.

교인들이 신앙생활 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은혜받다가 지치는 교인 보셨습니까? 여러분 은혜받기 위해서 살아야 합니다.

앞으로 교회 성도들의 과제가 있다고 한다면 어떻게 이 영성을 강화해 가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1. 새들백 교회의 릭 워렌은 “내가 나무를 잘라야 한다면 나는 먼저 도끼를 갈겠다. 도끼를 가는데 쓰는 시간은 결단코 시간 낭비가 아니다.”

2. 홍사성의 채근담에 보면 “오래 엎드린 새가 높이 난다.”

자신의 영성의 칼날을 날카롭게 벼루기 위해서 교회 앞에 기도회 자리에 성도들 곁에 목자 곁에 오래 엎드릴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가 승리하는 것입니다.

3. 앙상블이 바이올린 첼로를 연주하기 전에 피아노 음에다가 현을 맞추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을 조율한다고 이름합니다.

피아노 음에 자신의 현을 조율하듯이 하나님의 말씀에 자신의 영성을 조율하고, 성령의 가르침에 자신의 영성을 조율하고, 이 교회를 목회하는 목사의 영성에 여러분의 영성을 조율할 때에 여러분 주변에 있는 많은 멘토들과 더불어서 서로가 서로를 조언하며 조율해 갈 때에 하나님 앞에 쓰임받는 사람이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음악회의 연주가 끝난 다음 바이올린을 조율하는 어리석은 음악가가 되려고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 앞에 서는 그 시간, 초라한 자신의 신앙생활을 돌이켜 보며 후회하고 조율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기회 주실 때에 건강한 영성, 능력있는 영성의 소유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옛말에 “못생긴 나무가 산을 지킨다?는 말이 있습니다.

잘생긴 나무는 일찍 베어져 산을 떠나지만 못생긴 나무는 눈에 띄지 않아서 산을 지키게 되는 것입니다. 얼굴 신자가 되려고 하지 마십시오. 교회에서 뿌리 신자가 되려고 하십시오. 인기와 박수 갈채에 따라 살려고 하지 마십시오. 자신의 감정과 기분에 따라 살려고 하지 마십시오. 흔들리지 않는 건강한 영성의 소유자가 되십시오.

뿌리 깊은 나무 바람에 아니묄세!
뿌리 깊은 영성은 세상 바람에 흔들리지 않습니다.

출처/류영모목사 설교 자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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