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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자료실 종합모음

내가 갈 길을 가야 하리니 (누가복음 13:31-35)

by 【고동엽】 2022. 9. 22.

내가 갈 길을 가야 하리니   (누가복음 13:31-35)

지금부터 40여 년 전에 오스트리아의 한 초등학교에 말라깽이라고 놀림을 받는 빈약한 체구의 소년들이 한반에 몇 명씩 있었습니다. 친구들로부터 ‘홀쭉이 말라깽이’라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그 소년들은 온 몸의 피가 역류하는 듯한 심한 고통을 겪었습니다.
이들은 그런 소리를 들을 때마다 ‘우람한 근육질의 사나이가 되고 싶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소년들은 그런 희망을 무시해버렸습니다. 그중에 몇몇 친구들은 체육관에 가서 열심히 운동을 하면서 좋은 체격을 가지려고 노력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운동하는 게 너무 힘들어 얼마 후엔 거의 모든 친구가 그만두었습니다. 그런데 오직 한 소년만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열심히 운동을 했습니다. 그 소년도 가끔은 너무 힘이 들어 모든 걸 포기하고 싶었습니다. 누가 뭐라고 하는 것도 아닌데 혼자 열심히 운동하는 것이 어리석게 여겨지기도 했습니다. 먼저 운동을 그만둔 친구들은 온갖 말로 그를 회유하였습니다.
“너무 힘들지? 다른 친구들도 다 그만두었는데 너도 그만두는게 어때? 그동안 열심히 했으니까 여기서 그만둔다고 해도 누가 뭐라고 하겠어. 너무 과도한 운동은 건강을 해친다고 하더라. 너무 심하게 운동하면 심장마비로 죽을 수도 있대. 적당한 선에서 그만둬.”
그러나 그는 모든 난관을 극복하고 체력의 한계를 극복하면서 매일 서너 시간씩 열심히 운동을 했습니다. 드디어 그는 우람한 근육을 갖게 되었습니다. 더 나아가 세계적인 보디빌더가 되어 각종 육체미 대회에서 10여 차례 석권한 것은 물론 ‘미스터 유니버스’, ‘미스터 올림피아’가 되었습니다. 이후 그는 영화배우가 되어 세계적으로 명성을 날렸으며, 현재는 정치계에 입문하여 미국 캘리포니아의 주지사로 재직하고 있습니다. 그의 이름은 ‘아놀드 슈활제네거’입니다.
성도들 가운데 ‘홀쭉이 말라깽이’같은 신앙 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신앙 생활이 건강한지 진단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신앙 생활이란 주님을 닮아, 능력있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건강한 신앙 생활입니다. 여러분은 그분의 성품과 능력을 닮기 위해, 건강한 신앙생활을 위해 어떤 노력을 하고 있습니까? 우리 같은 죄많은 사람이 어떻게 주님을 닮을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는 주님의 그 위대한 성품을 닮으려고 부단히 노력해야 합니다. 주께서 함께 하신다는 믿음으로 최선을 다할 때, 우리에게도 우람한 신앙의 근육이 만들어질 것입니다.
오늘은 ‘총동원 50일 선포주일’입니다. 우리 교회는 지난 가을에 ‘예수 사랑 큰 잔치’라는 제목으로 총동원 전도를 실시하였습니다. 그때 전 성도들이 영혼 구원을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했고, 결과적으로도 많은 수확을 얻었습니다. 기존 성도들에게 지난 번 총동원은 신앙의 근육을 키우는 좋은 기회였습니다.
근육은 쉽게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반복된 훈련을 통해서만 만들어집니다. 우리의 신앙근육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번의 성공으로 만족하기보다는 매년 진행되는 총동원을 통해 강남교회의 신앙은 더욱 굳건해 질 것입니다. 이번에도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사역에 최선을 다해 동참하고자 합니다. 4월 22일 예수 사랑 큰잔치에 예비되고 준비된 영혼을 하나님께 인도할 수 있도록 많은 기도와 참여를 바랍니다.
총동원 전도는 예수께서 목숨걸고 이루려했던 구원사역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구원사역을 위한 예수님의 결연한 의지를 다시 한 번 묵상하면서 은혜를 나누기를 바랍니다.

1. 예수는 고난의 길을 묵묵히 가셨습니다.

예수께서 갈릴리 지방을 중심으로 사역을 펴시다가 때가 되자,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습니다(눅 9:51).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 가시는 것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눅 9;53). 왜냐하면 그곳에는 예수에게 적대적인 사람들이 많아 예루살렘으로 간다는 것은 상당히 위험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생각을 가진 것은 제자들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예수에 대해 호의적인 바리새인들도 예수를 걱정하는 마음을 가지고 예루살렘으로 올라 가시는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들은 헤롯이 얼마 전에 세례 요한을 죽였기 때문에, 예수도 죽이려고 한다는 소문을 듣고 급히 예수님께 그 소식을 전했습니다. “나가서 여기를 떠나소서. 헤롯이 당신을 죽이고자 하나이다”(눅 13:31)이 사람들 중에는 예수를 만찬에 초대했던 바리새인(눅 7:30)도 있었을 것입니다. 또한 예수를 찾아와 구원의 도리를 물었던 니고데모도 있었고, 예수의 시체를 묻도록 했던 아리마대 요셉도 있었습니다. 이들은 당시 예수에 대해서 못마땅하게 생각하던 바리새인 무리 속에서도 예수를 생각해 주고 도움을 주려고 했던 사람들이었음이 틀림없습니다.
우리는 이들에게서 한 가지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어떤 경우나 상황에서도 우리는 언제나 선한 편에 서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기의 유익에 따라 수시로 입장을 바꾸는 사람은 결코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사람이 아닙니다.
진정 예수를 걱정하는 이들의 모습은 선한 것이었습니다. 우리에게도 누군가 이렇게 진심어린 걱정을 해준다면 이처럼 고마운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이들의 간청에 따르지 않았습니다. “가서 저 여우에게 이르러 내가 귀신을 쫓아내며 병을 낫게 하다가 제 삼 일에는 완전하여지리라 하라. 그러나 오늘과 내일과 모레는 내가 갈 길을 가야 하리니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는 법이 없느니라”(눅 13:32)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찾아온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안위를 제일 걱정하고 있었지만, 예수께서는 자기를 죽이려고 한다는 소식을 듣고도 그의 갈 길을 재촉하셔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셨습니다. 이는 자신의 안위보다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감당하는 것이 예수님에게는 더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 사명이 어렵고 위험하다고 해서 일시적으로 피하거나 숨지 않고, 당당하게 그 맡은 사명을 향해서 나아갔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잠깐 우리의 신앙 생활을 되돌아 볼 필요가 있습니다. 성도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은 신앙 생활을 하다가 간혹 어려운 시련이 오면, 그만 그 길을 중단하거나 우회하려고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당장 자신이 피해를 입는 것을 견딜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바른 신앙 생활이 아닙니다.
신앙은 언제나 순교자의 자세로 임해야 합니다. 초대 교회에서 예수의 증인이 된다는 것은 곧 로마 권력과 반대의 길을 간다는 의미였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사람들은 로마 황제를 ‘주님’(큐리오스)으로 고백하고 섬겨야 했는데, 그리스도인들은 로마 황제가 아닌 예수를 그리스도요, 주님으로 고백했기 때문입니다. 그 길이 결코 평탄할 리가 없었습니다. 그 길은 필연적으로 희생과 손해를 감수해야하는 길이었습니다. 땅끝까지 나가서 증인이 되라고 할 때, ‘증인’(마르투스)라는 말은 ‘순교자’(마터 martyr)에서 온 말입니다. 즉, 죽음까지도 각오하지 않으면 갈 수 없는 길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초대교회 교인들은 그 길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오늘날 우리 나라에서는 그처럼 국가 권력에 의해 순교 당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갖기 위해서는 오늘날에도 순교자적인 각오를 다져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쉽게 세상의 풍조에 휩쓸려 형식적인 그리스도인이 되어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떠한 삶의 현실 속에서도 십자가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신 예수님을 따라, 순교자적인 각오로 나서야 할 것입니다.

2. 예수님은 사랑으로 우리를 대하십니다.

제가 오래 전에 이스라엘 히브리대학에서 한 학기 동안 수업을 받고 있을 때, ‘압둘라’라는 쿠르드 족 출신의 미국 대학교수와 사귀게 되었습니다. 그는 자기 민족의 슬픔을 저에게 털어놓으면서, 오늘날 쿠르드족은 자기 나라를 잃고 세계 여기 저기에 흩어져 살고 있는 비참한 민족이라고 했습니다. 자기 민족을 위해 기도해 달라고 하는 그 교수의 눈에는 어느새 이슬이 맺혀 있었습니다.
우리가 일본에게 나라를 잃었을 때가 바로 그런 처지였습니다. 오늘은 3.1절 기념주일이기도 한데, 우리 나라는 일본 제국주의에 의해서 36년간이나 국권을 잃고 나라 없는 슬픔을 되씹어야 했습니다. 그 고통과 설움은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그러나 우리 민족은 그 어려운 현실 속에서도 절망하지 않고, 일본으로부터 자유와 해방을 얻기 위해 전 민족적으로 항거하였습니다. 우리의 선각자들은 세계에 흩어져서 목숨을 걸고 독립운동을 전개 하였습니다. 그러한 우리의 눈물과 수고를 보시고 하나님께서는 우리 민족이 해방을 주셨습니다. 저는 이것이 이스라엘 민족의 출애굽과 같은 하나님의 역사라고 믿습니다. 아무리 많은 이들이 독립운동을 했다고는 하지만, 그 당시 상황은 도저히 우리의 힘으로 해방을 얻기 힘들었던 것이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하나님께서는 역사의 흐름을 통해 우리가 새로운 광명을 찾을 수 있도록 인도하신 것입니다.
그 이후 우리 나라는 남북이 갈라지는 아픔과 동족상잔의 비극과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발전을 거듭하여, 오늘날 세계적인 경제대국의 대열에 합류할 수 있도록 인도해 주셨습니다. 이에 대해 많은 학자들이 여러 가지 요인을 열거하고 있지만, 어느 것 하나 충분한 설명이 될 수 없습니다. 이것은 모두 하나님의 은혜요, 사랑이요, 축복입니다. 우리는 이와같은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해야 합니다.
개인적인 삶에 있어서도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감사해야 합니다. 세상사가 고달픈데 감사할 일이 어디 있냐고 하는 사람도 있지만, 우리가 예수 믿고 구원 받은 것 만으로도 감사해야 할 이유는 충분합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에 나타나 있듯이, 지금도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넘치고 있습니다.
반면에 죄와 허물에 빠져있는 인간들은 창조주 하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하나님을 거역합니다. 이스라엘 민족 또한 그들을 출애굽시켜 가나안으로 인도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잊고 죄에 빠져 버렸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보내신 선지자들을 핍박하고 죽이기까지 하였습니다. 그것도 모자라서 오늘 본문에 보는 바와 같이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까지 죽이려고 음모를 꾸미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안타까운 마음을 감추지 못하셨습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같이 내가 너희의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눅 13:34)
선지자들을 거부하고 거역하였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수의 구원 사역도 거부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를 죽이려고 모의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모든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위해 눈물 흘리시며, 그들을 품으시고자 예루살렘으로 나아가신 예수님의 사랑을 우리는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3. 예수의 심판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우리를 사랑하시는데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외면하고 자기 마음대로 삽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시지만 회개하지 않는 자는 징계하십니다.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 바 되리라”(눅 13:35)
이 말씀은 예수를 받아들이지 않은 이스라엘에 내려질 심판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누구든지 예수를 믿는 사람은 구원을 받지만, 그 큰 사랑을 거부한 사람은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을 받아 황폐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은 정말 무섭습니다. 아무리 이스라엘 백성이 선택받은 민족이라 하더라도 그들이 하나님께 범죄하고 회개치 않을 때에, 이방 민족의 포로로 끌려가기도 했습니다. 그것도 모자라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를 영접하지 않고 십자가에 못 박는 죄를 저지른 결과, 서기 70년에 로마에 의해서 또다시 멸망당하고 말았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 3:23), “죄의 삯은 사망이요”(롬 6:23)라는 말씀처럼, 모든 인간은 멸망 받을 수밖에 없는 처지입니다.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말씀은 없었던 것으로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기 원하셨지만,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무효로 하지 않으셨습니다. 대신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그 대가로 지불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예수를 믿기만 하면 누구든지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요 3:16).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공의와 사랑을 동시에 이루기 위해 실로 엄청난 댓가를 지불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사랑은 인간의 사랑과는 다릅니다. 다윗은 자신의 아들인 압살롬을 매우 사랑하였습니다. 압살롬이 사사로운 복수를 위해 형인 암논을 죽이고 망명생활을 하게 되었을 때도 부하들의 요청을 못이기는 척하며 압살롬을 용서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회개 없는 용서는 아들의 반란이라는 큰 재앙을 불러왔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이와 다릅니다.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사람은 구원해주시지만, 끝까지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영원한 형벌을 피할 길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인간은 죄에서 떠나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 길 만이 살 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은 인류 구원의 사명을 위해 가던 길을 멈추지 않으셨습니다. 사람들이 위험하다고 만류하는 예루살렘을 향해 더욱 당당히 올라가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그 길을 함께 가자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예수 없이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생명의 주님이신 예수를 전하는 것입니다. 앞으로 50일 동안 우리의 가야 할 길을 힘차게 걸어가시길 바랍니다.

출처/전병금목사 설교자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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