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요한복음 7:37-52)
풍요 속의 빈곤
서구 사회에 중요한 영적 영향력을 끼쳤던 분 가운데 헨리 나우웬이란 분이 있습니다. 그분은 노틀담 대학교, 예일 대학교, 하버드 대학교 등에서 교수사역을 하였으나, 시기와 질투, 소외로 얼룩진 엘리트 경쟁 사회 집단에 대한 회의를 느꼈습니다. 그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어느 날 잠에서 깨어보니 내가 어두운 곳에서 살고 있음을 깨닫게 되었고, ‘탈진’이란 말이 영적 죽음의 심리학적 표현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리고는 이제까지 쌓아놓은 모든 부와 명예를 버리고 캐나다 토론토 근교에 위치한 ‘데이브레이크’라는 공동체에서 정신 지체 장애우들을 돌보며 마지막 삶을 살았습니다.
헨리 나우웬의 ‘상처입은 치유자’라는 책에 이런 글이 나옵니다. “자동차를 몰고 다니고 라디오를 듣고 텔레비전을 보지만, 그들은 자신이 사용하는 그 도구들의 작동원리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 무언가의 결핍이 더 이상 삶의 동기가 되지 못하는 물질 풍요의 시대... 그럼에도 사람들은 삶의 방향과 의미 및 목적 등을 찾고 있다.”
물질적으로 풍요한 삶을 누리는 시대 속에 사람들은 점점 더 자신이 무엇이 부족한지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물질적은 풍요를 누리는 일에 점점 더 익숙해져 있습니다. 사실 저도 컴퓨터가 어떤 원리로 작동하는지, 오늘 설교하는 이 마이크와 스피커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잘 모릅니다. 그런데도 그것을 배우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냥 주어진 것을 받아들이고 누리는 것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세상은 점점 풍요로워져 가고, 점점 더 많은 물질과 문명의 이기를 누리며 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삶의 방향과 의미와 목적을 찾고 있다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내가 왜 사나?’ 이 고민을 한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부와 명예와 권력을 가져도 왜 인간은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라’라는 인생의 채워지지 않는 목마름을 고백할 수밖에 없을까요? 그것은 사람은 영혼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짐승들처럼 잘 먹고 잘 자면 더 이상 부족한 것을 모르는 것이 아니라, 아무리 잘 먹고 잘 산다 할지라도 영혼의 갈증이 채워지지 않으면 깊은 목마름 속에서 신음하게 되는 것입니다.
헨리 나우웬은 또 이렇게 말했습니다. “모든 사람은 수많은 고통스러운 상처를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나 자신을 향해, 그리고 하나님을 향한 영적 발돋움을 시작해야 한다.” 즉 모든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내 자신을 돌아보는 영혼의 목마름을 해결하기 위한 여행을 시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처럼 모든 인생은 그가 위대한 학자이던지, 또는 성공한 경영인이던지, 또는 권력의 최고의 자리에 있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영혼의 목마름의 문제가 있습니다.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아무리 좋은 밥에 반찬을 가져다 주고, 아무리 좋은 집에 산다 할지라도 항상 영혼의 깊은 갈증 속에 ‘내가 왜 사나?’ 하면서 항상 가슴 답답한 인생을 살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문제를 해결하셨습니까? 오늘 말씀은 바로 이 문제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 문제를 해결해 주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우리 영혼의 타는 듯한 목마름을 해결해 주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목마른 자에게 생수의 강을 흘러넘치게 하시는 예수님을 만나고 인생의 목마름이 해결되시기를 진심으로 기도합니다.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 초막절
37a. “명절 끝날 곧 큰 말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때는 명절 끝날, 곧 초막절 절기 중 마지막 날인 8일째가 되는 날이었습니다. 초막절은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천막살이를 한 것을 기념하는 절기였습니다. 먹을 것도 없고 마실 물도 없는 사막과 같은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40년을 지냈습니다. 그런데 그 40년 동안 하나님은 그들에게 먹을 것과 마실 것을 끊이지 않고 주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해 주셨습니다. 이것을 기념하는 절기가 바로 초막절이었습니다.
당시 초막절 절기는 8일 동안 지켜졌습니다. 이 초막절 절기 동안 제사장은 매일 실로암 연못에서 물을 길러 제단에 뭇는 ‘헌수 의식’을 행하였습니다. 이사야 12:3절에도 기록되어 있듯이 “그러므로 너희가 기쁨으로 구원의 우물들에서 물을 길으리로다”는 노래를 부르며 매일 물을 길어와 성전 제단 위에 물을 붓는 의식이었습니다. 그들은 광야의 반석에서 물이 터져 나오게 하신 하나님의 생수의 역사를 기념하며, 오늘에도 그런 생수의 역사가 있기를 기대하면서 물을 부었습니다. 또한 다음 해에도 풍년을 주시기를 기도하면서 물을 부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날인 제 8일에는 실로암 못에서 물을 길어오지 않았습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이른비와 늦은비를 적당히 내려주셔서 일 년 내내 농사가 잘 되기를 간절히 기도함으로 모든 초막절 의식은 끝을 맺었습니다. 그리고는 초막을 다 거두고 집으로 돌아가면서 초막절 행사는 막이 내렸습니다.
유대인 학자들은 초막절의 의식이 두 가지 사실을 상징한다고 믿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께서 출애굽한 이스라엘 조상들에게 광야에서 물을 포함한 모든 필요를 공급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이렇게 수확의 기쁨을 누릴 수 있는 것도 하나님께서 공급해 주신 것임을 믿고 기뻐하며 감사를 드렸습니다. 둘째는, 에스겔서와 요엘서, 그리고 스가랴서에 나타나는 ‘사막에 강이 흐르리라’는 약속을 상기시키는 것이었습니다. 언젠가 메시야가 오시면 ‘사막에서 강물이 넘쳐 흐르듯이’ 우리의 삶 속에 구원의 기쁨과 감사와 감격이 넘치리라는 큰 기대감이 초막절에는 흐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날에는 7일간 머물었던 초막을 떠나 집으로 돌아갑니다. 이것은 광야의 생활이 끝이 나고 가나안 땅의 안식에 들어간 것을 기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마지막 날에는 성회로 모여 즐거워하며 큰 잔치를 벌였습니다. 그러나 큰 잔치 뒤에는 더 큰 허탈감만 남았습니다. 왜냐하면 사막에 강물이 넘쳐흐르듯이 메시야가 오셔서 우리를 이 고통에서 해방시켜 달라고 물도 길어다 붓고 기도도 했지만, 여전히 상황은 바뀌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여전히 로마는 그들을 칼과 창으로 압제하고 있었고, 여전히 그들은 먹을 것과 입을 것을 걱정해야 했으며, 여전히 영적 목마름에 신음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초막절을 지키러 올라올 때는 기쁨과 희망과 기대를 가지고 올라왔지만, 또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야 하는 그들은 깊은 허탈감에 가슴을 쓸며 내려갈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크게 외치신 예수님
오늘 말씀은 바로 이런 상황 속에서 주신 말씀입니다. 모두가 메시야를 기다리지만 절망 속에 빠져 있을 때 예수님은 바로 그들 앞에 서서 큰 소리로 외치셨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정말 얼마나 안타까우셨을까요? 초막절에 물을 길어다가 성전의 제단 위에 붓는 의식은 앞으로 오실 생수되신 그리스도에 대한 예표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반석에서 물을 내신 것처럼 그리스도가 오시면 목마른 인생들에게 생수를 주실 것을 기대하며 행하는 의식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지금 생수되신 예수님을 눈앞에 두고도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고 헛된 축제의 마지막을 보내고 있었던 것입니다. 비록 대제사장들과 관원들은 예수님을 잡아서 죽이려고 기회만 엿보고 있었지만, 만약 오늘 예수님께서 자신이 생수이심을 가르쳐 주시지 않는다면 그들은 또 다시 사람이 행하는 축제의 허무함만을 맛볼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절정의 순간에 큰 소리로 선포하셨습니다. 37b.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축제 이후의 허탈감에 빠질 사람들에게 참된 생수를 주시고 싶은 간절한 마음으로 예수님은 외치셨습니다. “너희가 목마르냐? 내게로 와라! 내가 채워 주겠다!” 목이 터질 정도로 간절하게 부르짖는 예수님의 모습! 안타까움과 애절한 사랑의 모습! 상한 목자의 심정! 비록 예수님을 반대하는 적대적인 분위기이지만, 그것보다 불쌍한 인생들의 목마름을 해갈해 주시는 것이 더욱 중요하기에, 자신을 잡으려고 하는 사람들 앞에 오히려 당당히 서서, 성전 한 가운데서 애절하게 외치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우리가 인생의 목마름의 방황을 끝내고, 예수님께로 와서 생수를 마심으로 영혼의 기쁨과 행복이 가득한 삶을 살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또한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기도 합니다. 하나밖에 없는 독생자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셔서,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죽게 하실 정도로 하나님은 우리 영혼이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오기를 간절히 원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의 이 마음, 이 음성이 여러분에게도 들려지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내게로 오라고 초청하셨습니다. 가난하든지 부자이든지, 남자이든지 여자이든지, 유대인이든지 헬라인이든지, 심지어 바리새인, 서기관, 대제사장이라 할지라도, 빈부귀천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누구든지 목마른 사람은 예수님께로 나아오라고 초청하셨습니다. 오늘 예수님은 여러분도 초청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광야에서 목마른 백성들에게 생수를 주신 것처럼, 예수님은 모든 사람에게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를 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진리를 알고 구원에 이르기를 원한다고 하셨습니다(딤전 2:4). 그러므로 누구든지 예수님께로 나오기만 하면 풍성한 구원의 잔치에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우리의 목마름을 해결해 주시는가?
그러면 예수님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고 하셨는데, 예수님은 어떻게 우리의 목마름을 해결해 주십니까? 38절.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예수님은 “목마른 자는 내게로 와서 마시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마신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38절 말씀처럼 예수님을 믿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을 인생의 구주로 영접하고 믿을 때 비로소 생수의 강이 넘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을 때 영생을 소유하게 되며 풍성한 삶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성취하시고자 하셨던 구속 사역이며, 사람들에게 그토록 주시고 싶어 하셨던 선물입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심으로 영원한 생명, 풍성한 삶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고서는 어디에서도 영생을 얻을 수 있는 길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당신께 찾아 나오는 목마른 자에게 영생을 주실 것입니다. 그래서 믿는 자는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게 하실 것입니다.
‘그 배’는 마음이라고도 하고 양심이라고도 하는 인간의 가장 깊은 내면을 말합니다(NIV. within him). 예수님을 믿는 자는 그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기쁨의 생수가 흘러넘칩니다. 그런데 그 생수는 조그마한 우물물이 아니라 강물이라고 했습니다. 즉 예수님을 믿는 자는 항상 그 심령 깊숙한 곳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넘치게 되는 것입니다. ‘생수의 강’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39절.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못하신 고로 성령이 아직 저희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 생수의 강은 바로 성령님을 가리킵니다.
정리합니다. 메시야로부터 생수를 기대하는 초막절에 예수님은 성전에서 애타는 심정으로 외치셨습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이것은 예수님을 더 이상 배척하지 말고, 영접하고 믿으라는 초청이었습니다. 그러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생수의 강은 바로 예수님을 믿는 자가 받게 될 성령을 말씀하신 것이었습니다. “나를 믿으면 성령을 받을 것이다. 그러면 너희 안에서 생수의 강이 넘쳐흐르리라” 이것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진리입니다.
헛된 잔치를 벌이는 사람들
여러분 이 진리가 사람들의 생각과 얼마나 다릅니까? 사람들은 인생의 만족을 위해 잔치를 찾습니다. 그래서 육의 잔치를 벌이고, 돈의 잔치를 벌이고, 허무의 잔치를 벌입니다. 한번 이 세상에 벌어지는 잔치들을 보십시오. 우리나라만 해도 지방자치제 이후에 얼마나 많은 축제들이 생겨났는지 모릅니다. ‘2007 한국축제연감’에 따르면 1995년 지방자치제가 실시된 이래 급속히 증가하여 현재 1,000여 개가 넘는 축제가 열리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많은 축제들이 우리의 삶을 진정한 축제로 인도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런 잔치들은 다 놀고 먹고 분위기에 몰려다니며 죄짓고, 죄의 흔적으로 상처 입는 허무의 축제들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브라질에서는 삼바축제가 해마다 열리는 데 강한 음악과 화려한 춤으로 사람들을 술과 음란으로 이끈다고 합니다. 독일에서도 부활절 축제(Easter Carnival) 후에 축제 baby들이 많이 생긴다고 합니다. 부활절의 참된 의미는 모른 채 육신의 정욕이라도 채워 영혼의 목마름을 해결해 보려는 인간의 어리석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나고, 십자가를 만나고, 부활의 참 의미를 깨닫고, 소망 가운데 믿음으로 행하는 축제가 아니라, 헛된 풍선에 바람을 집어넣으며 죄를 짓고 죄의 결과를 낳는 것이 오늘날 세상의 축제입니다.
오늘 말씀 속에 유대인들이 바로 그 모습이었다. 초막절 축제를 풍성하게 치렀지만 참된 만족을 얻지 못해 항상 허탈감만 남을 뿐이었습니다. 근본적인 갈증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생의 목마름은 바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것이 원인입니다. 죄의 결과로 목마름이 생긴 것입니다. 그러나 생수의 근원이신 예수님은 이 문제를 아셨습니다. 그래서 너무나도 간절한 마음으로 ‘내게로 와서 마시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받고, 용서를 받고, 감사하게 될 때 생수의 기쁨이 우리 속에 넘치기 때문입니다.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우리에게 ‘생수의 강’을 약속하셨습니다. 믿는 자에게는 성령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성령님은 창조의 하나님이십니다. 성령님은 생명이 없던 이 지구에 생명을 불어넣어 주신 분이십니다. 성령님은 예수님을 잉태시키셔서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이 땅에서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하시는 동안 늘 충만하게 함께 계심으로 십자가를 감당하게 하시고 부활의 역사를 일으키셨습니다.
또한 성령님은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신다고 했습니다(요 16:8). 죄인들의 심령에 역사하셔서 “나는 잘못을 저질렀습니다.”(죄), “나는 하나님의 의의 기준에 도저히 도달할 자격이 없는 자입니다”(의), “나는 마땅히 지옥에 갈 자입니다.”(심판)라고 고백하게 만드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구주로 입으로 시인하여 영접하시고, 다시 태어나게 하시고, 죄로부터 자유를 주시고(롬 8:2), 하나님의 자녀라는 도장을 찍어주시는 분이십니다(엡 1:13).
그러므로 예수님을 영접하면 성령님이 우리 안에 내주하시게 되며, 그 성령께서 주시는 놀라운 기쁨과 감격으로 새로운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사마리아 우물가의 여인이 이 성령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 기쁨과 감격에 이제까지 자신을 배척하던 동네 사람들에게 달려가 내가 그리스도를 만났다라고 외쳤습니다. 세리 마태도 이 성령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매일 세관에 앉아서 세금을 걷으며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던 그가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가 되었고, 잃어버린 자를 찾아오셔서 구원하시는 위대한 왕의 이야기인 마태복음을 기록하는 위대한 사도가 되었습니다. 세리장 삭개오도 이 성령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도 기쁨이 충만해서 예수님을 위해 큰 잔치를 벌이고 자기의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성령을 받으면 삶이 바뀌는 것입니다. 인생의 갈증이 해결되고 참 만족과 기쁨 속에 영원토록 솟아나는 생수의 강의 기쁨이 강물처럼 우리 안에 역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역사는 이처럼 우리가 처음 믿었을 때만 감동적이고 감격적인 기쁨으로 다가오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성령님은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닮게 만드십니다. 그래서 내적으로는 사랑과 기쁨과 화평의 열매를 맺게 하시고, 다른 사람들과는 오래 참음과 친절과 선을 행하는 열매를 맺게 하시며, 하나님께는 신실함과 온유와 절제의 열매를 맺게 하시는 것입니다(갈 5:22-23).
또한 성령님은 진리의 영이십니다. 성령님은 말씀을 기록하셨고, 말씀을 가르쳐주시며, 말씀대로 살도록 인도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계속 말씀과 함께 살아야 합니다. 말씀을 듣고 읽고 공부하고 묵상하고 암송하는 삶과 기도하는 삶을 통해 성령님과 늘 동행해야 합니다. 그럴 때 성령께서 우리 안에 역사하셔서 생수의 강이 계속 넘치게 해주십니다.
말씀에 대한 반응
40절부터 52절까지는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반응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백성들 사이에는 분열이 일어났습니다. 40-44절을 보면, 무리들은 예수님을 단지 갈릴리 출신으로 알았기 때문에, 그리스도는 다윗의 씨로 베들레헴에서 탄생해야 한다고 하면서 예수님을 배척했습니다. 45-49절을 보면 예수님을 잡으러 왔던 하속들이 오히려 예수님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이제까지 예수님처럼 말씀하시는 분을 본적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의 그분의 말씀의 진실성과 계시성을 인정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을 보낸 종교 지도자들은 돌과 같이 굳은 마음을 가지고 오히려 하속들마저 미혹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한편 그들 중에 니고데모는 예수님의 말과 행실로 판단해야 한다고 하며 예수님을 인정했습니다. 참으로 우리는 무엇이 진리이고 무엇이 거짓인가를 판단할 수 있는 말씀의 지혜, 성령의 지혜가 있어야겠습니다. 이런 지혜를 가질 수 있도록 성경을 열심히 연구해야 합니다.
결 론
오늘 예수님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고 초청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만이 우리에게 생수를 주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만이 우리 인생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을 구세주로 인정하고,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모든 인생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사랑을 받아야, 근본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어야 영혼의 목마름이 해갈될 수 있는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생수이신 예수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나의 주 나의 하나님으로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인간의 목마름은 해결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나를 믿는 자는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이 약속을 붙들고 예수님을 구주로, 내 인생의 주인으로 영접하여, 생명을 주시고 기쁨을 주시고 진리로 인도하시는 성령님과 동행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출처 : 김성기 목사 설교 중에서
'◑δεδομένα 18,185편 ◑ > उपदेश सामग्री 16,731편'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말씀에 의지하자 (눅5:1-6) (0) | 2022.09.22 |
---|---|
성령을 주시는 목적 (요14:16-17) (0) | 2022.09.22 |
찬송을 받으시는 하나님 (0) | 2022.09.22 |
새로운 꿈 새로운 출발 (0) | 2022.09.22 |
하나님이 창조하셨다 (0) | 2022.09.22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