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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에 대하여 막9:47-48, 계14:11
요한 웨슬리 목사님의 설교를 개작한 설교
Concerning Hell – Adapted from a sermon by John Wesley
R. L. Hymers, Jr.
※로버스 하이머스 주니어 목사는, 평소 설교에 <회심>의 체험을 매우 강조합니다.
그런데 17, 18, 19세기까지, 부흥한다는 교회는, 사실 다 회심을 강조했습니다.
아래 설교는, ‘회심하지 않으면 지옥 간다’는 주제의 설교입니다.
요한 웨슬리도 그렇게 설교했다는군요! 그냥 예수 <믿음>이 아니라 <회심!>
◑서론
▶저 하이머스는 요한 웨슬리의 "지옥에 대한" 메시지를 토대로
여러분께 설교하려고 합니다.
조지 휫필드와 요한 웨슬리는 18세기의 두 위대한 설교자들이었습니다.
이 두 분은, 하나님에 의하여, 설교로 세상에 불을 지피는데 사용되었습니다.
그들의 목회 동안에 아주 위대한 부흥이 있었는데, "1차 영적 대각성 운동"이라고 부릅니다.
당시 18세기는, 휫필드와 웨슬리가 이 세상을 뒤집어 놓았다고 말합니다.
휫필드는 순회설교자였는데,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한 칼빈주의자 이었습니다.
웨슬리는 반대 측면인 인간의 책임을 강조한 알미니안 이었습니다.
그러나 두 사람은 모두 ‘회심의 필요성’을 설교하였으며,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목회 아래 구원을 받았습니다.
※강력한 회심의 강조는, 17세기 청교도주의, 18세기 휫필드/웨슬리의 1차 대각성
18세기 피니의 2차 대각성까지 계속 강조되었는데, 즉 기독교의 전통이었는데,
19세기말 무디의 부흥운동 때부터 사라진 것이, 오늘날까지 이르고 있습니다.
무디의 부흥 운동은, 집회의 대형화가 시작되기는 했으나, ‘회심’에 대한 강조가 약화되었습니다.
휫필드가 죽었을 때, 그가 그의 장례 설교를, 웨슬리가 담당하기 원했습니다.
서로 신학적으로 일부 영역에 있어서, 상반된 입장을 갖고 있었지만,
서로를 존중하였던 것이지요.
한 신자가 휫필드에게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당신은 웨슬리와, 신학과 진리에 대한 이해가 다른데,
목사님께서 천국에 가시면 웨슬리 목사님을 만나실 수 있을까요?”
그러자 휫필드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아마도 우리는 천국에서 웨슬리를 보지 못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웨슬리는 하나님의 보좌 가장 가까운 곳에 앉아 있을 것이고,
우리는 멀리 떨어져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칼빈주의적 측면을 강조함과 아울러, 웨슬리적 측면을 동시에 강조합니다.
우리는 두 측면 다 받아들여서, 균형을 잃지 않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을, 어느 한쪽만 극단적으로 강조하면, 균형을 잃을 수 있습니다.
(오늘날 '칭의 구원'이 유행하는 이유는, 칼빈주의만 받아들이고, 웨슬리를 무시하기 때문입니다.)
▶아래에 웨슬리의 "지옥에 대하여"라는 설교가 있습니다.
웨슬리는 우리에게, 프로테스탄트와 침례교회들의 옛날 설교방식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 날 얼마나 많은 목회자들이, 이런 담대한 설교를 선포할 수 있을까요?
그러나 옛날에는, 이런 주제의 설교를 많이 했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들은, 그런 전통에서 많이 벗어나 있는 실정이지요.
오늘날은, 중세의 Dark Age가 다시 찾아왔다고 할 만큼, 기독교계가 어둡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믿기로 결신만 하면, 구원을 얻는다는 ‘결단주의’가 유행하고 있습니다.
이 어두운 시기에, 전통적 설교들이, 다시 회복되기를 바랍니다.
▶오늘날의 구미권의 목회자들은, 중년 부인들을 매우 두려워합니다.
그들은 교회의 주축인데,
그 중년 부인들이, 설교의 주제와 내용을 컨트롤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지옥’과 같은 주제의 설교는.. 듣기 싫다는 것이지요.
좀 듣기에 부담 없고, 실생활에 유익한 설교를 해 달라고, 목회자에게 강력하게 요청합니다.
그런데 목회자가, 그들의 의견을 따르지 않으면, 나중에 배척당할 수도 있는 거죠.
이런 상황에서
진정한 부흥이 없는 것은 놀라울 일이 아닙니다!
중년부인들은, 설교의 주제와 내용에 대하여, 컨트롤하지 말아야합니다.
저는 웨슬리에 의한 이런 설교들이 더 많이 우리에게 필요하다 믿습니다.
▶예수님은 무서운 고통의 장소로 지옥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지옥은 희망이 없는 사람들, 즉 “회심하지 않은 사람들”이
자기 여생을 영원히 보내는 장소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회심하지 않은 사람들 unconverted’이란, 교회를 다니지만,
지적동의나, 결단주의로 예수 믿은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세상 불신자가 아닙니다.
여러분은 지옥에 대한 이런 사실들이,
오직 큰 죄인들, 세상 죄인들에게만 해당이 된다고 생각하지 말아야합니다.
예수님의 지옥 설교를 보면,
그 당시에, 의심할 것이 없이 가장 거룩하다는 사람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지옥에 대한 언급인, 본문 막9:47~48절 단락은,
9:35절부터 시작합니다.
"예수께서 앉으사 열 두 제자를 불러서 이르시되... (막9:35).
예수님이 본문에서 지옥을 말씀하신 것은, “제자들에게” 직접 하신 말씀입니다.
"거기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막9:48)
그리스도가 “제자들에게” (세상 불신자가 아니라요) 이 말씀을 주신 이래로
오늘날 우리도, 지옥에 대하여, 크리스천 친구들에게 말하는 것이 옳습니다.
지옥의 주제는, 단지 큰 죄인들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지옥은 공포의 장소이고, 그리고 우리 모두는 그것에 대하여 매우 심각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1. 지옥의 형벌과 고통에 대해서 생각해 봅시다.
▶그가 죽는 ‘바로 그 순간에’
그가 지옥에 들어가서, 지상의 모든 것들을 다 잃을 것입니다.
어떤 유예기간, 기다리는 기간 없이
모든 일은 ‘즉시로’ 일어날 것입니다.
주님의 재림이 아직 이르지 않았으므로,
불못 지옥은, 아직 이르지 않았다고 볼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영혼수면설은 비성경적입니다.
죽으면 시공을 초월합니다.
눅16장의 부자는, 지옥에 들어갈 때, 대기한 것이 아닙니다.
죽으면 즉시 심판을 받고, 즉시 지옥에 간다고 봅니다. 천국도 마찬가지고요.
바로 그 순간에, 그가 살아 있을 동안에,
그가 가졌던 모든 기쁨을, 즐거움을 잃게 되는 것입니다.
그의 몸은 죽고, 그의 몸을 기쁘게 하던 것들이 다 사라질 것입니다.
지옥의 불속에서, 모든 지상의 기쁨들은 다 잃어버릴 것이고,
오히려 그가 지옥에서 고통을 당하는 이유가,
자기가 지상에서 누렸던 ‘죄악된 기쁨들’ 때문이었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지옥에는 위로가 없고, 위로해줄 친구도 없습니다.
그 어두운 장소에는. 그 고통을 위로하고 달래줄, 어떤 아름다움이나 위로가 없습니다.
거기는 빛이 없으며, 그러나 불꽃만이 있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새로운 것이 전혀 없으며,
오직 공포 위에 또 다시 공포가 따라오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음악이 없고, 오직 이를 가는 소리와, 우는 소리와, 울부짖는 소리가 있고,
오직 저주받은 영혼의 저주의 소리와, 하나님을 모독하는 소리와
서로를 향해 끝없이 소리치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좋은 느낌을 받게 하는 것은 전혀 없습니다.
지옥에 가는 그들은 부끄러움을 상속받고, 영원히 멸시를 받을 것입니다.
그럼으로, 지옥에 들어가는 사람들은 그들이 지구에서 사는 동안
그들이 사랑하는 모든 것으로부터 분리 될 것입니다.
다시 말해, 위에서 육체적인 고통을 언급했다면,
지금은 정신적인 고통과 외로움, 소외감입니다.
지옥에 들어간 그들은 그들이 지구에서 사랑하던 모든 사람들을, 영원히 잃게 될 것입니다.
그들의 아내, 남편, 부모님, 자녀들, 그리고 가까운 친구들을
그들로부터 영원토록 빼앗기게 되는 것입니다.
지옥에서는 우정이 있을 수 없습니다.
어떤 친구들이나 친척들이나 그에게 다가와 위로할 사람들이 없을 것입니다.
그는 영원히 그들을 이별하게 될 것입니다.
▶무엇보다 큰 고통은, 천국과 주님을 잃어버리는 고통.
지옥에서 또 하나 잃는 것이 있습니다. 천국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잃어버립니다.
그는 천국에 가는 소망을, 영원히 잃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아버지로, 섬길 기회가 다시 주어지지 않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절대 만나지 못할 것이고
구원 받은 자들과 또는 천사들을 만나지 못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를 떠나라, 저주를 받은 자들아!’
그는 천국으로부터 언제나 그리고 영원히 단절 되고 말 것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이런 자들은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로다” 살후1:9
주님의 존전으로부터 영원히 추방을 당하는 것은
아주 비극적인 것입니다. 그 추방은 영원히 계속 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영원한 멸망”입니다.
우리가 절대로 들어서는 안 될 무서운 저주가 잇습니다.
그것은 주님이 “나를 떠나라! 저주를 받은 자들아!” 라고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마25:41
만약에 다른 구원의 소망이 전혀 없다면, 얼마나 무서운 저주인가오!
그러나 지옥에서, 그것은 전혀 없습니다.
그 절망은, 예수님의 말씀에 의해, 이렇게 설명되었습니다,
“거기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막9:48
저는 이것은 진짜 벌레라고 믿습니다. 상징적인 벌레가 아닙니다.
※관련글/ 천국은 이 세상과 크게 다르지 않다!
◑2. 지옥의 느낌을, 간접 경험으로 한 번 생각해 보십시다.
※현실은 영생/영벌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아래와 비슷한 현상들이, 현실에서 나타나고 있으면, 지옥을 살다가 나중에 지옥에 가고요,
그렇지 않으면, 현실에서 천국을 살다가, 나중에 영원한 천국에 들어갈 것입니다.
▶사람이 이 세상의 삶을, 고통스럽게 느끼는 것은,
육체적 고통뿐만 아닙니다. 자기 느낌, 감정이 괴롭게 때문에.. 심지어 자살까지 합니다.
지옥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니, 이 세상에서 느꼈던 모든 감정적 괴로움과 고통들을
매일 더 심하게 느낄 것입니다.
죄책감, 자기 스스로 자기를 정죄함, 탄식, 부끄러움, 후회,
그리고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강렬한 두려움.. 이런 감정들로, 고통을 당할 것입니다.
누가, 죄책감으로 말미암아, 자기 양심의 꿰뚫는 깊은 고통에서 능히 견딜 수 있겠습니까?
의인들은 천국에서, 죄 용서받은 자유와 기쁨을 느끼는 대신,
죄인들은 지옥에서, 뒤늦게 죄책감과, 용서를 못 받은 괴로움과,
하나님의 진노로 인한 고통으로 떠는 것입니다.
그들이 만약 지구상에서 이런 압박감을 경험했다면,
많은 사람들이 사는 것보다, 차라리 자살을 선택할 것입니다.
그만큼 그 정신적 고통이, 크다는 뜻입니다.
물론 지옥에서 겪게 될 그 정신적 고통은,
사람이 지상에서 겪는 그 어떤 정신적 고통보다..
비교할 수 없이 더 큰 정신적 고통이 될 것입니다.
더 적나라하게, 그 정신적 고통들을 나열해 볼까요?
두려움, 무서움, 분노, 악한 정욕, 시기, 질투, 분노, 원수 맺기.
예수님의 보혈로 용서 받지 못한 영혼들은, 이런 죄를 짓고,
그 결과로 인해 스스로 고통을 당합니다. 여러분이 화를 한 번 내어 보십시오!
누구보다 자기가 먼저 제일 괴롭습니다.
이런 모든 것들은, 지상에서 그의 영혼을 끊임없이 갉아 먹었는데,
지옥에서도 한층 더 그를 좀먹듯이 괴롭히고 고통을 줄 것입니다.
‘좀먹듯이’란.. 매일 조금씩 파고 들어가는/갉아 먹는.. 이란 뜻입니다.
헤롯이 충이 먹어서 죽었는데, 마치 지옥의 장면을, 현실에서 연출한 것 같습니다.
실제 벌레와 또한 정신적 고통이
좀 먹듯이, 서서히 느리게, 그에게 고통을 줄 것입니다.
마치 독수리가 죽어가는 사람의 간을 조금씩 뜯어 먹듯이,
그런 고문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피의 용서를 받지 못했기에,
지옥에서도 이런 죄들을 계속 짓고, 계속 고통을 당할 것입니다.
그런데 빈익빈 부익부처럼,
이렇게 지옥에서 고통을 당하는 자들이, 하나님을 향해 증오심을 더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더 큰 고통을 당하게 되는 것이죠.
▶지구에서도 석면은, 불에 타지 않고, 벌겋게 달구어만 집니다.
지옥에서도, 사람들은 불에 타지만.. 완전히 소멸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거기는 ‘불못 Lake of fire’입니다.
만약에 그의 몸 전체가 밖으로 나와서, 불이 터치할 수 없는 안전한 장소에 있고
그리고 오직 한 손이나 한 발이 불속에 들어가 있다면
그것이 그에게 편안할까요? (아니죠)
그러면 그 몸 전체가 유황으로 불타는 연못에 던짐을 받는 것은 과연 어떤 것일까요?
그래서 예수님은, 차라리 눈 하나, 손 하나 잘라내고 천국에 가는 것이 낫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한 눈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거기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막9:47-48
그만큼 철저한 회개와, 죄로부터 단호한 돌아섬이 중요한 것입니다.
◑3. 그 외 지옥에 대한 간접 경험들
▶첫째로, 그가 지옥에서 둘러싸일 사람들에 대해 생각해 보십시다.
감옥에 간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오 나는, 세상 어디든지 다른 곳에 있는 것을 소원합니다.
나는 이 포악한 죄인들에게 둘러싸여, 감옥에 있는 것이 끔찍합니다!"
그러나 지상 최악의 범법자들을 모아놓은 최고의 나쁜 감옥도
지옥에 거하는 자들과 비교하면, 약과인 것입니다.
만약 그가 큰 감옥 속에 수감되었는데,
자기 주위에 살인자들과, 연쇄 살인범들과, 성폭행자들과, 사람 살을 먹는 사람들과
변태성욕자들과 함께 수감된다는 것을, 상상할 수 있겠습니까?
이러한 감옥에서, 이런 수감자들과 하루 밤을 지내는 것도 상상할 수 없을 텐데
한 달이나 일년을 보내는 것도 아닙니다. 영원히 보내야 합니다.
중세에 악명 높았던 가톨릭의 종교재판소의 고문은
고문 받는 사람이, 기절하면
고문을 멈추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지옥에서 고통당하는 사람들은
종교재판소의 심문보다 더 악독한 것입니다.
사람들이 기절해도, 거기서는 고문을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거기는 법적으로 제지하는 자들이 없기 때문입니다.
마귀가 지옥에서 여러분에게 무엇을 할 것인지 생각하고
하나님이, 이들 악한 영들로부터
그들을 보호하지 않을 것을, 미리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이런 끔찍한 설명을 드려서, 죄송합니다만
지금 우리의 이러한 간접 경험이,
어쩌면 직접 경험을 피하는데, 도움을 주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거기는 어떤 ‘휴식’도 없는 곳입니다.
육체적인, 정신적인, 그리고 영적으로 어떤 중단됨이나 중간 휴식 없이
끝없이 지속될 모든 고통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들에게 고통을 주는 불과 유황의 연기가, 그 구덩이에서 영원토록 올라올 것이며
그 짐승과 그 우상에게 절을 하고 그 이름의 낙인을 받는 자는
밤에도 낮에도 쉼을 얻지 못할 것이다” 계14:11
밤과 낮으로! 그것도 24시간 계속, 지옥에서는 계속되는 고통만 있을 뿐입니다.
거기에는 지옥에서는 잠자는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의 고통이 아무리 크거나, 그 고통이 얼마나 강렬한지 상관을 하지 않고,
그가 기절하는 것도 없고, 잠시도 쉼의 가능성도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절대 잠을 잘수 없고, 또는 무의식이 되지도 않고.
계속적으로 그 고통이, 밤낮으로 계속되는 것입니다.
또한, 지구에 사는 동안은, 고통스러운 순간을 당할 때,
음악을 듣거나, 밖에서 아이들이 노는 행복한 소리를 듣거나,
태양의 빛을 받거나, 대자연을 거닐면서
자기 우울함으로부터 기분을 전환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옥에서 그들은, 그 고통으로부터 그들의 마음이 쉬거나
흥을 돋워줄 엔터테인먼트가 전혀 없는 것입니다. 단 일분 동안도!
거긴 전적인 일식, 월식이 계속되는 곳입니다. 즉 태양도 없고, 달도 없습니다!
해도, 달도 없는 세상을 한 번 상상해 보십시오.
그러므로 계절의 변화가 없고요,
여러분에게 다가와서 기쁘게 할 친구도 없고, 음악도 없고,
소일할 비즈니스가 없고, 오직 무서운 장면에서 떠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들은 단지
언제나 두려워 떨며 살고,
그리고 빈틈이 없이 모든 생각 속에 괴로워합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이 고통이 끝이 없습니다. 무슨 생각을 합니까!
여러분은 영원히 지옥 신세가 되었습니다.
여러분, 바다의 모래 알갱이의 숫자를 셀 수가 없듯이,
그 영원한 날 수들은, 결코 셀 수가 있습니까?
▶지구에서 모든 고통은, ‘언젠가 해결될 희망’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 희망 때문에, 참고 견딜 수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죽고 싶을 만큼 큰 고통에 있는 사람이라도, 이 세상에서는
‘그 고통이 언젠가 끝날 것이라’는 희망이 있습니다.
그러나 지옥에서는, 죽음의 희망조차도 없는 곳입니다.
그는 거기서 절대 죽지도 않고, 고통의 탈출이라는 희망도 없는 곳입니다.
그래서 더욱 절망적인 곳입니다.
그 깊은 구덩이 속은 얼마나 어둡고, 얼마나 깊은지요!
지나간 수백만의 날들, 수만 년, 흘러가 세월들을 다 계산해도,
아직도 영원한 고통의 시작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옥의 고통을, 절대 쉽게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아이작 왓츠 박사의 글을 인용하며, 끝맺으려 합니다. *Isaac Watts 1674-1748
우리는, 자기 죄에서 떠난, 많은 죄인들을, 지금 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부드러운 긍휼이
우리를 매주, 매달 덮는 것도, 지금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얼마나 자주 우리들은, 하나님을 거역하고 반복하여 부패함으로써
자기 유죄 선고를 자초합니까!
지금도 우리들은, 아직도 그분의 임재 앞에서 살고 있고,
여전히 구원과 희망의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오, 우리가 뒤를 돌아보면
무서운 벼랑 끝에 서 있는 것입니다.
기회가 있을 때에, 피난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로 훨훨 날아가십시다.
지금은
여러분이 그리스도께로 나오고, 여러분의 죄를 그의 보혈로 씻김을 받을 시간입니다.
만약에 여러분이 "지금" 그리스도께로 나오지 않는다면,
그리고 분명하게 회심한 경험이 없다면, 여러분은 곧 ‘가게↓’ 될 것입니다.
"거기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막9:48).
...........................
주1)
"지옥에 대하여," 설교 73, Wesley’s Works Vol. 2,
Grand Rapids, Baker Books, 1979, 381-39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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