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른 종교개혁 (고후 5:17)
오늘은 484주년을 맞는 종교개혁주일이다. 우리교회가 따르는 신학을 개혁주의라고 하거나 칼빈주의라고 한다. 종교개혁주일을 맞아 우리의 교회도 개혁되어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교회는 모든 일을 할 때 성경대로 해야 한다. 그러므로 교회는 사람들이 좋아하는 민주주의 방식도 참고할 뿐이고 크고 작은 모든 일을 성경주의 방식으로 해야 한다. 마틴루터의 종교개혁 원리 속에는 세 기둥이 있다. 첫째기둥은 오직 은혜, 둘째 기둥은 오직 믿음, 셋째기둥은 오직 성경이다. 우리 개혁교회에도 세 기둥과 같은 개혁이념이 있다.
1. 바른 신학
건전한 기독교라면 바른 신학위에 서 있어야 한다. 바른 신학은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세속주의 신학, 자유주의 신학, 많은 이단 사설들이 판을 치기 때문이다. 그러면 바른 신학이 무엇인가? 다른 말로 바꾸면 보수주의 신학, 칼빈주의 신학, 정통주의 신학, 또 다른 말로 바꾸면 성경주의 신학이다. 여기에는 매우 소중한 5대교리가 있다.
①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이다. 19세기 후반부터 과학주의와 실증주의의 영향을 받은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성경의 교리를 비판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예수님의 처녀탄생을 바벨론 신학의 영향을 받은 여러 모형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사야 7:14에 나오는 히브리어의 '알마'라고 하는 것을 처녀라고 번역하지 않고 '젊은 여자'라고 번역을 해서 기독교의 예수님의 처녀탄생을 부인하려고 했다.
② 예수님의 육체의 부활이다. 자유주의 신학자들에게는 예수님의 육체부활이 부딪치는 걸림돌로 되어 있다. 그러나 알,에이,톨리박사는 '예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육체 부활하셨다는 사실은 기독교 교리의 모퉁이 돌이 된다'고 했다. 무덤에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지금도 말씀하신다. '내가 곧 부활이요 생명이니 이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고 살리라'
③ 성경무오설이다. 많은 신학자들이 이론적으로는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한다. 그러나 실제적으로는 성경 무오설에 고등비판을 가하고 있다.
④ 예수님의 속죄의 죽음이다. 세속주의 신학자들 태반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들 한다. 그러나 만일 예수님께서 내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 죽어 주시지 아니했더라면 내 죄를 어떻게 할 도리가 없다.(나의 죄를 씻기는 예수의 피 밖에 없네)
⑤ 예수님의 재림이다. 예수님의 재림은 우리 모두의 소망이다. 나의 소망도 된다. 그런데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예수님의 재림을 믿으려 하지 않는다.
2. 바른 교회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인본주의, 물량주의로 떨어져 가는 형편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주
장하시기 전에 사람들이 주장하려고 판을 친다. 오직 은혜, 오직 믿음 하지 않고 오직 물질, 오직 교권, 오직 자기 이렇게 하면서 예수님께서 교회를 주장하기 전에 사람이 교회를 주장하려고 한다. 바른 교회는 어떤 교회인가? 오직 예수 교회이다. 누가 교회를 세우셨는가? 마16:18에서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셨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교회의 주인이 누구인가? 결코 사람이 아니다. 권사도 아니고, 안수 집사도 아니고, 장로도 아니고, 교회 개척자도 아니고, 목사도 교회의 주인이 아니다.
어떤 교회가 바른 교회인가? 교회의 주인이 예수님 되게 하는 교회가 바른 교회이다. 그런데 바른 교회 주변에도 음부의 권세가 있다. 그 권세가 교회를 소란하게 하고, 교회에 잡음을 만들고, 교회의 부흥을 막는다. 이것이 음부의 권세가 하는 일이다. 그러나 교회의 주인이신 예수님께서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신다. 바른 교회가 무엇인가? 예수님을 나타내는 교회이다. 바른 교회의 특징은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 언어로 예수님을 나타내고 행실로 예수님을 나타내는 바로 그 것이다. 성도의 삶 속에서 항상 예수님이 나타나야 한다. 나의 입술에서 예수님이 나타나고 나의 생활 속에서 예수님이 나타나야 한다. 나의 가정생활, 직장생활에서 예수님이 나타나야 한다. 그런데 어떻게 예수님이 나타나고, 소개되어 지는 것인가? 전도할 때이다. 누가 예수님을 잘 믿는가는 전도에 달려있다. 또
찬송할 때이다. 봉사할 때이다. 내가 형제를 지극히 사랑할 때 예수님이 나타나고, 소개되어 진다. 또 예수님이 어떻게 나타나는가? 내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야 한다. 땅에 떨어지는 밀알처럼 밀알이 되어야 한다. 또 어둠을 밝히는 촛불처럼 내 몸을 태워야 한다. 바른 교회는 하나님의 밭이요, 바른 성도는 좋은 씨뿌리는 농부이다. 그렇다고 저절로 부흥하는 교회는 없다.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 농부가 되어 새벽부터 저녁까지 씨를 뿌리고, 물을 주고, 거름을 주고, 벌레를 잡아 주고, 잡초를 뽑아 주어야 30배, 60배, 100배의 수확을 거둔다. 부흥하는 교회가 되도록 힘쓰는 성도가 되어야 한다.
3. 바른 생활
주석가 바클레이가 로마서 주석에서 '진정한 예배는 하나님께 정교한 기도를 드리는 것도
아니고 장엄한 의식을 드리는 것도 아니다. 진정한 예배는 하나님께 날마다 경건된 삶을 드리는 것이다'고 했다. 바른 생활 이것이 진정한 예배란 뜻이다. 참 성도는 누구인가? 예배만드리고 생활하는 성도가 아니다. 참 성도에게는 예배드리는 생활이 있을 뿐이다. 잘못하면 시간적으로 주일의 성도 되기 쉽고, 공간적으로 예배당 성도가 되기 쉽다. 예배는 신령한 의미에서 봉사이다. 봉사는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요, 사람에게도 하는 것이 봉사이다. 그러니까 양면성이 있다. 하나는 종교요, 또 하나는 윤리이다. 이것을 십자가가 잘 설명해 주고 있다. 수직으로 '주여! 주여!'해야 된다. 그러나 이것에만 치중하면 신비주의자가 된다. 수평적으로 '서로, 서로'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여기에만 치중하면 세속주의자가 된다. 그래서 이 수직과 수평이 하나가 되어져야 한다. 하나님께 봉사하는 자는 반드시 이웃에게 봉사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 앞에서 거듭난 사람은 사람 앞에서도 거듭난 사람이어야 한다.
하나님 앞에서 신자인 사람은 사람 앞에서는 선한 자가 되어야 한다.
바른 신학, 바른 교회, 바른 생활 얼마나 훌륭한가? 그런데 오늘날 한국교회의 모습은 종교개혁의 정신과 거리가 멀다. 그 이유는 먼저 인간 개혁, 이것이 이루어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인간 개혁이 가능한가? 본문 말씀이 답해 준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새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가능하다. 요3장에는 인간 개혁에 대한 진리가 소개되어 있다. 거기에 나타난 인물 니고데모는 어떤 사람인가? 착한 사람이고, 도덕적으로 별 흠이 없는 사람이고, 경제적으로 이스라엘 선생님이며, 바리새인이다. 유대인의 관원도 된다. 별로 나무랄 데가 없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해야 한다. '죄 많은 삭개오가 거듭나야 된다. 물 길러 온 죄 많은 수가성 여인이 거듭나야 한다' 이렇게 말하지 않고 니고데모를 향해서 '네가 거듭나야 된다'고 했다. 이 말씀이 우리에게 큰 교훈을 준다. 타인을 향해서 '말하지 말아라. 네가 거듭나야 한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저는 그대로 믿는다. 제가 거듭나야 한다. 뿐만 아닙니다. 여러분들을 향해서 '네가 거듭나야 한다'고 말씀하고 계신다.
요3:3을 보면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고 했다. 사람이 문제라는 것이다. 물론 개혁되어져야 할 것들이 주변에 많다. 병들고, 곪고, 터진 것 많다. 신문사 기자들의 구부러진 펜촉이 거듭나야 한다. 사법부에 무디어진 본분이 개혁되어 져야 하고, 국민의 소리를 들을 줄 모르는 정부의 귀가 개혁되어야 한다. 그러나 먼저 인간 개혁 이것이 중요하다. 정치, 교육, 경제가 나쁜 것 아니다. 그것을 요리하는 사람들이 문제이다. 정치를 움직이고, 교육을 만지고, 경제를 주물럭거리는 인간이 문제이다.
좋은 나무라야 좋은 열매를 맺는다. 그리고 나쁜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는다. 열매로 보아서 알 수 있다. 가시나무는 가시를 맺고, 포도나무는 포도를 맺는다. 육으로 난 것은 아무리 변장하는 재간이 있어도 육이다. 성령으로 거듭나야 영이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넣어야 된다. 새 시대일수록 새 사람이 요청된다. 그래서 바울이 말한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참 새 것이 그립다.
이제는 새 사람이 필요하다. 새 사람이 나와야 된다. 그러면 누가 새 사람인가? 새 사람은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이다. 예수님 안에 있으면 새 사람이 된다. 번데기가 고추 안에 있으면 벌레가 되어 나오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해바라기가 태양아래 있으면 열매를 맺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계란이 어미 닭 품안에 있으면 병아리로 태어난 것과 마찬가지이다. 예수님은 새 사람이 되게 하는, 새 출발하게 하는 바탕도 되고, 다리도 되고, 모태가 된다.
배가 빵빵한 처녀도 유명한 디자이너가 만든 새 옷을 걸치면 멋진 숙녀가 된다. 그러나 이러한 방법으로는 새 사람이 될 수 없다. 교양으로나 수양으로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예수님 안에 있으면 다소곳이 겸손하게 나를 죽이고 마음을 비우고 그냥 예수님 안에 있으면 누구든지 개혁될 수 있다. 여기 누구든지를 기억해야 한다. 과거에 무슨 죄를 지었느냐? 과거에 무슨 언행의 실수를 했느냐? 묻지를 않는다. 그래서 성경에 보니까 귀신들린 막달라 마리아가 개혁되었다. 재물만 탐하던 삭개오가 개혁되었다. 오늘 종교개혁주일을 지키면서 무엇이 새로워져야 하는가? 곰곰이 생각해 보시기 바란다. 무엇이 새로워졌으면 좋겠는가? 나의 옹졸한 사고방식이 개혁되어야 할 것이다. 행함이 없는 나의 믿음이 개혁되어져야 할 것이다. '주여, 주여'하는 것만 가지고는 천국에 못 간다. 독선적인 나의 아집이 개혁되어져야 한다.
사랑하는 성도들 마음속에 개혁되어져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물어야 될 것이다. 모든 것이 개혁되기 전에 먼저 인간개혁이 매우 중요하다. 군데군데서 잡음이 있는 것은 제도가 나빠서 그런 것이 아니라 사람이 문제라는 말이다. 예배를 드릴 때는 천사를 닮았다. 바른 신학, 바른 교회, 바른 생활이 있다. 그런데 왜 삶의 현장에서는 냄새가 나는가? 이는 사람이 문제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개혁되어야 된다. 그러면 누가 먼저 개혁되어야 하는가? '너, 너'아니라 '나, 나'먼저 내가 개혁되어져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를 해야 된다. '주여 내가 개혁 되게 해주시옵소서' 개혁주일을 맞아 예배드리는 모두에게 바로 여기에 초점이 있어야 되고, 개혁주일을 지키는 의의가 여기에 있어야 한다. 사람이 개혁되어야 한다. 내가 개혁되어져야 한다.
출처/박종갑목사 설교자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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