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과 성령 (요 3:1-8)
"바리새인 중에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유대인의 관원이라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가로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의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라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니고데모가 가로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삽나이까? 두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삽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
한 감리교 목사님께서 주님과 기도 속에서 깊이 교제하다가 그만 깊이 잠이 들어 천국에 가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가 천국에 들어서기 전에 천국 문을 지키고 있던 천사에게 이렇게 물어보았습니다. "나와 함께 영광스런 복음 운동인 메소디스트(Methodist) 운동을 하던 친구들이 얼마나 천국에 들어와 있습니까?" 그 천사는 잠깐 기다리라고 한 후 명부를 한참 뒤져보더니 "미안하지만 감리교인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깜짝 놀란 웨슬레는 다시 물었습니다. "그렇다면 칼빈을 따르는 장로교인들이 다 천국에 온 모양이지요? 그들은 몇 명이나 왔습니까?" 천사는 한참을 뒤져보더니 "미안하지만 장로교인도 한 사람도 오지 않았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아무래도 우리 종교개혁은 대단한 실수였나 보군요. 그러면 천주교인들은 얼마나 들어와 있습니까?" 이번에도 천사의 대답은 똑같았습니다. 그러자 그 목사님은 큰소리로 되물었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천국에 들어왔단 말이오?" 그러자 천사는 방긋 미소를 지으면서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이 천국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참으로 개인의 구주와 주님으로 영접한 사람인 성령으로 거듭난 그리스도인들만이 와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과 니고데모와 나눈 대화를 통하여 오늘도 구원에 대하여 생각해 보겠습니다. 세 가지로 나누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먼저, 인간은 거듭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먼저 거듭나야 한다는 필요를 느끼는 것이 인간 편에서 볼 때 구원의 첫 걸음입니다. 부자든 가난뱅이든, 남자든 여자든, 노인이든 어린이든, 귀하든 천하든, 선생이든 학생이든, 지배자든 피지배자든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인간은 모두 구원을 받아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거듭남의 필요를 느끼고 거듭나고 싶은 열망이 있어야 합니다. 사람이 거듭나야 한다는 것만 느끼고 알고 몸부림을 친다고 해도 이미 큰 은혜를 받은 사람입니다. "나도 거듭나고 싶다." "나도 구원받고 살고 싶다"는 열망은 구원받을 사람의 첫 번째 자세입니다. 이미 그런 열망이 있다는 말은 자신이 죄인이란 사실을 깨달았다는 말입니다. 그 고백 속에는 바른 인간관과 바른 죄관이 숨어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바울이 에배소 4장 22-24절에서 옛 사람과 새 사람을 나누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옛 사람은 유혹의 욕심을 따라 사는 삶이요, 썩어져 가는 구습을 쫓아 사는 삶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 옛 사람을 벗어나 새 사람이 되고 싶다는 말은 옛 사람의 죄를 벗어나고 싶다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
저는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교회를 다녔습니다. 그리고 죄인이란 사실을 수도 없이 들었고, 또 깨달았고, 고백도 했습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내가 죄인이란 사실을 깨닫고 몸부림을 치고 눈물을 흘린 것은 18년을 살고 난 후였습니다. 그 때야 십자가를 바라보고 그 십자가의 사랑을 알게 되어 거듭나게 되었습니다.
본문에서 "거듭나야 한다"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 또는 "거듭나야 한다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말라"고 한 말씀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것이 요한복음의 큰 주제요 또한 성경의 대주제입니다.
"거듭난다"는 말을 다른 말로 "중생"이라고 하는데, 중생이란 단어가 명사로는 한 번 사용되었고, 동사로는 두 번, 부사로 두 번 사용되었습니다. 명사로는 디도서 3:5에 "중생의 씻음"이란 말로 나오고, 동사로서는 베드로가 베드로전서 1:3과 l:23에서 사용하였고, 부사로 쓰여진 곳은 오늘 본문인 3절과 7절에 사용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말을 직역하면 "위로부터 출생한다"(born from above)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영어로는 중생을 "born again" 또는 "renew" 또는 "regeneration"이라고도 합니다.
그런데 거듭남이란 옛것의 반복이 아닙니다. 완전한 새것, 새사람을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삶의 목적과 의미와 가치와 기쁨이 새로 생겨나는 것입니다. 새 행복, 새 윤리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정말 그럴까?" "과장일거야." "목사니까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말할 거야"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중생을 경험한 사람은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것입니다.
방탕한 생활을 하다가 신앙을 받아들이고 변화된 어거스틴(AD 354-430)이 어느 날 자신을 '정욕의 구렁텅이'에 빠지게 한 여인과 마주치게 되었는데 목례만 하고 지나갔다고 합니다. 그러자 그 여인은 반가워서 "저를 모른 체하긴가요? 보세요. 저예요."라고 하며 어거스틴을 붙들고 말하자 그는 조용히 웃으며 대답했습니다. "이제 나는 더 이상 옛날의 내가 아니랍니다." 이것이 거듭남입니다. 그래서 <요한 웨슬레>는 중생의 본질에 대하여 "중생은 하나님께서 인간 심령 속에서 일으키는 큰 변화이다. 이것은 죄로 죽은 영혼이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 지음을 받아 의와 참된 거룩함으로 하나님의 형상으로 새로 나는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마치 애벌레와 나비의 관계와 같습니다. 애벌레가 자라서 나비가 되는데 애벌레는 나비에 대하여 아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셀 실베스타인>이란 사람이 쓴 "꽃들에게 희망을"이라는 책에 보면, 노랑 애벌레는 애벌레 상태가 자신의 모든 것인 줄 알고 애벌레 상태로서 행복을 찾아 헤맸었는데, 정작 나비가 되고 보니 애벌레 때와 비교할 수 없는 만족과 행복과 자유가 넘쳐나는 것을 경험하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병아리와 오리새끼가 어렸을 때는 구별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들을 물가로 몰고 가보면 누가 병아리고 누가 오리새끼인지 쉽게 알 수 있다고 합니다. 물을 보면 미친 듯이 뛰어 들어가는 것은 오리 새끼요, 그러나 물을 보면 가능하면 멀리 가는 것은 병아리라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구원받은 사람과 구원받지 못한 사람은 그 근본이 다른 것입니다.
다음으로는 행위로 구원받지 못하고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입니다.
미국 사람들의 대부분 경우 천국과 지옥이 있다고 믿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지 않는 것은 구원받는 길을 모르고 있다는 말입니다. 천국에 가고 싶지만 천국 가는 길을 모르고 있다는 말입니다. 심지어 교회에 출석하는 사람들 중에 무려 85%의 사람들이 구원에 대하여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천국은 가고 싶은데 이렇게 천국 가는 길을 모르고 있다는 말입니다.
유명한 찬송가 작가인 뉴톤 (John Newton)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하늘나라에서 세 가지 놀라움이 있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는 틀림없이 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들이 안보여서 놀라고, 둘째는 하늘나라에는 문턱에도 못 갈 것이라고 판단했던 사람이 와있는 것을 보고 놀라고, 셋째는 나 같은 인간이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음을 알고 놀랄 것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이 줄기차게 말하고 있는 공통점은 행위로 구원받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행위라고 할 때 믿음을 포함한 의미의 넓은 의미로 행위를 말할 때가 있고 그러나 구원을 말할 때는 항상 행위와 구별된 의미로 말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로마서 3:20에서는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다'고 하였고, 27-28절에서는 '행위로서가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 되었다' 하며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고 하였습니다. 로마서 11:6에서도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 되지 못하느니라"하였습니다. 갈라디아 2:16에서도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고로 우리도 그리스 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고 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에배소서 2:9에서도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이렇게도 분명하게 여러 번 믿음과 행위를 구별하는 것은 구원을 얻으려면 이 점을 알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로마서 3:23에서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라고 했고, 에베소 2:1에서는 '죄와 허물로 죽었던 너희들'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죽었던 우리가 생명을 얻으려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길 외에 다른 길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요한은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요일5:12)고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친히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라고 하였고, 바울은 "천하 인간에게 구원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예수 외에 주신 일이 없느니라(행 4:12)"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을 여러 가지로 증명해 보겠습니다. 먼저 불교를 통해서 보는 것이 유익하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불교는 행위로 구원 얻겠다는 대표적 종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스님들에게 구원을 위한 고행은 있을지 몰라도 구원에 대한 답은 없습니다. 보초스님, 한암스님, 효봉스님, 경봉스님 등 불교의 고승들이 남긴 말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평생 수도하고 고행의 길을 걸었어도 얻은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이성철 스님의 유명한 말이 무엇입니까? 81년 조계종 종정 취임법어에서는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라고 했고, 90년 신년 법어에서는 "각 종교 교조들의 말씀은 본마음에게 가장 큰 장애와 병폐가 되나니 불교를 믿는 사람은 석가를 버리고 예수를 믿는 사람은 예수를 버려야 한다"고 했고, 87년 석탄절 법어에서는 심지어, "사탄이여! 어서 오십시오. 나는 당신을 존경하며 예배합니다. 당신은 본래로 거룩한 부처님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행위로 구원을 받으려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다음으로 천주교를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비록 천주교가 믿음을 말하지만 그러나 칭의에 인간의 행위를 첨가한다는 점입니다. 얼마 전에 김수환 추기경이 예수님을 사생아라고 주장하였던 도올 김영옥이란 사람과 좌담을 하면서 선행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하였습니다. 바로 이것이 천주교라는 점입니다. 그러나 이들의 말이 맞다면 십자가의 강도도, 향유를 붓던 마리아도, 우물가의 여인도 구원받지 못할 것입니다. 더욱이 스님은 물론 김수환 추기경도 구원받지 못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저들 모두 절대로 구원받을 만큼 선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제 본문에서 보겠습니다. 니고데모는 바리새인으로 관원이었습니다. 당시에 6,000명 바리새인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더욱이 바리새인은 아무나 되는 게 아닙니다. 남들보다 뛰어나게 잘 믿어야 하며 그것이 공적으로 인정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리새인이 되려면 공적으로 투표하여 직위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볼 때 니고데모가 얼마나 하나님을 잘 믿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더욱이 그는 관원입니다. 관원 중에서도 당시 유대사회 전체를 움직였던 산헤드린 공회의 회원이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 사람이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였다는 것입니다. 무엇을 말해 줍니까? 인간의 노력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도덕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인간에게 인정받았다고, 교회의 직책이 높다고 그것으로 구원받은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감리교의 창시자 <웨슬레>의 경우만큼 구원에 대하여 잘 설명할 수 있는 사람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목사가 된 후에야 구원의 확신을 가진 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명문 대학인 옥스포드 대학을 졸업하고 목사가 된 사람입니다. 그는 어릴 때부터 어머니마저 신기해 할 정도로 열성적인 신앙생활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대학 생 때에는 "holy group"이라는 그룹을 만들어 경건한 삶을 추구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거듭나지 못하였습니다. 구원의 기쁨도 없었습니다.
그러다 그는 어느 날 미국에서 전도여행을 하고 돌아오는 길에 모라비안 교도들을 만났습니다. 그들은 폭풍우가 몰아치는 가운데서도 두려움 없이 기뻐하며 찬양을 부르는 것을 본 것입니다. 웨슬레는 "당신들은 이 폭풍우가 두렵지 않소?"라고 묻자,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데 우리가 무얼 두려워하겠소?"라고 대답하는 것이었습니다. 웨슬레는 목사인 자신의 신앙이 너무 보잘것없음을 깨닫고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모라비안 교도들이 모여 예배드리는 한 예배에 참석하였는데, 그 때 마침 로마서 주석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 순간 그는 드디어 거듭남을 경험하게된 것입니다. 그 때를 회고하며 웨슬레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나는 구원을 위해서 그리스도, 그리스도만을 의지하고 있음을 느꼈다. 그는 인류의 죄들을, 바로 나의 죄까지도 가져가셨으며 죄와 사망의 법에서 나를 구원하셨다는 확신을 주셨다."
무엇을 말합니까? 노력으로도, 목사라는 직책으로도, 도덕적 삶으로도 받지 못하는 것이 구원이라는 말입니다. 중생이란 공부를 많이 했다고 알게 되거나, 도를 닦고 거룩한 생활을 한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믿음으로만 얻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구원 얻는다는 것이 가장 어려운 것 같지만 가장 쉬운 것입니다. 행위로 구원받겠다고 하는 것은 나는 지옥에 가겠다고 선언하는 것과 같고, 또 쉬운 길로 천국 가는 길을 버리고 어려운 길로 지옥에 가겠다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영국의 <스로스츠>란 죄수는 영국과 오스트레일리아에서 40년간이나 교도소 생활을 하고 가죽 채찍으로 50번씩 여덟 차례나 맞았으나 그의 생활은 전혀 변화되지 않았습니다. 그러한 그가 구세군 숙박소에서 하룻밤 신세를 진 인연으로 그리스도의 구원을 받고 거듭난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 후 그는 구세군 출옥자 보호소에서 18년간 봉사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에 대하여 말하기를 "400번의 가죽 채찍이나 40년간의 교도소 생활로도 변화되지 않은 내가 그리스도로 인해 불과 1, 2분만에 변화되었습니다."라고 간증하였습니다.
한 목사가 구원받기 위해 12년 동안을 하나님께 기도했다는 농부 한 사람을 만났다고 합니다. 12년간 기도를 하였다는데 그는 여전히 어두움 가운데 허덕이고 있었습니다. 그는 "나는 아무래도 택함 받은 사람이 아닌 것 같아요."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은 그에게 성경을 펴서 요한 일서 5장 13절 말씀을 보여주면서 간단히 그것을 설명하였습니다. 그리고 함께 무릎을 꿇고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그 때 성령이 그 속에서 역사하였습니다. 그러자 그는 밝게 웃으면서 "저는 이제 제가 구원받았다는 것을 확신합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는 12년 동안이나 찾던 것을 단 5분만에 발견한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그리고 성령으로 거듭난다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천국에 갈 수 없다고 했습니다.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결단코 하나님 나라에 갈 수 없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물이 무엇이냐에 대하여 4가지 견해가 있습니다.
첫째는 물을 세례로 보는 견해로 천주교회와 성공회가 주장하는 견해입니다. 이것이 물 세례로 보는 것은 잘못이지만 물 세례가 죄사함 받는 자가 받는 표라는 점에서는 볼 때 일리가 있습니다. 그리고 둘째는 물을 말씀으로 보는 견해로서 야고보서 1:18("자기의 뜻을 좇아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과 벧전1:23("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의 말씀에 의하여 주장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셋째는 물을 회개로 보는 견해도 있고, 그리고 넷째는 칼빈의 주장처럼 물을 성령으로 보는 견해들이 있습니다. 다 일리가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거듭나는 것은 성령으로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다른 곳에서도 여러 번 그것도 강한 어조로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딛3:5)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느니라"(고전6:11)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롬8:9)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8:2) 예수님께서도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요1:12-13)
이처럼 성령이 아니면 우리는 거듭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제가 오늘 세례를 받는 분들을 보니까 만족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다 성령께서 함께 하신 것입니다. 성령을 받아야 믿어지고 성령을 받아야 영접하게 되는 것입니다. 반드시 위로부터 성령이 임해야 구원의 역사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비입니다.
본문 8절에 보면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요 3:8)고 하였습니다. 바람은 신비롭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선명합니다. 나뭇가지가 흔들리고 때로 나무가 뽑히기도 합니다. 마찬가지로 어떻게 성령이 역사하여 우리가 믿음을 얻었는지 모두 신비롭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분명해야 합니다. 그 고백이 선명하고 그 변화가 선명합니다.
그러나 니고데모의 반응을 보십시오. 참으로 재미있는 반응을 보였습니다. 그는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어머니 뱃속에 다시 들어갑니까?"라고 질문합니다. 거듭난 사람, 성령을 체험한 사람이라면 이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아무 것도 어려울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 유대인의 관원이요 바리새인이란 사람이 우매한 질문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그를 책망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랍비로서 그것도 모르느냐?"고 말입니다. 이처럼 중생하지 못한 사람은 중생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성령을 체험하지 못한 사람은 성령을 모릅니다. 아무리 지식이 많아도 모릅니다. 그러나 성령을 경험한 사람에게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마태복음 16장에 보면 베드로가 위대한 고백을 했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16절)라고 말입니다. 그 때 이 때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17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독생자 아들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아들이 우리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대속의 죽음을 죽으셨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그를 믿음으로만 영생 곧 구원을 얻게됩니다. 그런데 이것을 믿어지게 하고 영접하게 하는 것은 성령으로 가능하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인간은 구원받아야 합니다. 구원은 믿음으로 받습니다. 그리고 오직 성령이 역사할 때 믿게 됩니다.
출처/최삼경목사 설교자료 중에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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