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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성한 생명을 주시는 분

by 【고동엽】 2022. 9. 18.
 
 
요 6:35-51

우리가 지금 몸담고 있는 교회는 어떤 마음의 자세를 가지고 보느냐에 따라 똑 같은 교회가 각기 다른 모습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교회 건물을 보면서 중세 성곽이나 박물관과 같다고 생각을 하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목사가 설교를 하고 성경을 가르치는 모습을 보면서 학교와 같다고 생각을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속에는'생각'이라는 씨알이 심겨져 있는데 사람의 마음속에 무슨 생각의 씨알이 들어 있는지 말하는 것을 보면 압니다. 어떤 사람은 물질의 소유 여부와는 상관없이 참 여유롭고 행복하게 잘 사는데, 어떤 사람은 자기는 참 지지리도 복도 없다고 말하면서 힘들고 어렵게 삽니다. 그 차이는 무슨 생각의 씨알을 심었는지의 차이입니다. 생각한 그대로 되는 것입니다.

생각이 열쇠이고, 생각이 말이고, 생각이 그 사람의 미래입니다. 행복한 생각을 하면 행복해지고, 사랑을 생각하면 사랑하게 되고, 성공을 생각하면 성공하게 되고, 기쁜 일을 생각하면 기쁜 일이 생기고, 풍성한 생각을 하면 풍성하게 살게 되고, 무엇이든 생각한 그대로 행동하게 됩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생각한 만큼 성공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란, 그동안 어떻게 되겠지~ 하고 운명에 맡기고 살았던 인생이, 예수님이 함께 하시니 무엇이든지 생각한 대로 반드시, 틀림없이, 확실하게 된다고 하는 생각의 변화입니다. 좋은 생각의 씨알을 마음속에 심어야 합니다.

가정과 같은 교회

그렇다면 과연 교회의 정체는 무엇이며 어떤 모습이 가장 바람직한 교회의 모습일까요?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사람들이 호감을 가지고 모여들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교회는 다름 아닌 가정과 같은 교회일 것입니다. 인간은 누구를 막론하고 다 가정에서 태어나서 자라고 어른이 되어 또 다른 가정을 만들어갑니다. 아무리 이상적인 가정이라고 할지라도 사랑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식구들이 함께 살아가다가 보면 때로는 식구들 간에 다툼과 이견이 있고 질병의 아픔도 있고 가장이 실직을 하여 온 가족이 경제적인 위기를 당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가정을 구성하는 가족은 남남이 아니기 때문에 잘못에 대해 정죄하거나 비판하는 대신 이해와 용서가 있으며, 설령 싸움이 있어도 칼로 물 베기가 되며, 한 사람의 질병이 온 식구들의 아픔이 되는 곳이 바로 한 부모를 모시고 사는 사랑의 가정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 사람들이 찾고 있는 교회, 주일이 기다려지는 교회, 한 번 등록을 하면 대물림을 할 수 있는 고향과 같은 교회는 과연 어떤 교회일까요? 조상 대대로 교회를 다니고 있는 사람과 달리 과거 불신자였다가 처음 교회를 나온 사람은 누구나 다 어색한 감정을 가지게 되며 잘 이해가 되어지지 아니하는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그 중에 하나가 사람이 무엇을 보려면 눈을 떠야 하는데 교인들은 두 눈을 지긋이 감고 두 손을 모아 기도하면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모습일 것입니다. 과연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우리의 육신을 낳아 길러 주신 분을 가리켜 아버지라고 하는 것처럼 하나님은 아름다운 세상을 창조하셔서 우리 인간을 이 땅위에 존재하게 하시며 매일 매일을 살아가게 하시는 창조주이시기에 스스럼없이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출신 가정 이 다르고 신분이 다르고 서로 남남이었으나 언젠 가부터 우리 모두 한 분 하나님을 하나님 아버지라고 부르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의 크신 축복인 것이며 알고 보면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거룩한 가족이 된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나님이 이 땅에 주신 천국인 하늘나라를 닮은 작은 천국 세 곳을 주셨는데 그 곳이 바로 천국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고 살아가는 우리의 마음이며, 우리의 가정이며 오늘 우리가 몸담고 있는 이 교회입니다. 우리가 가정에서 한 부모님을 모시고 형제자매가 서로 사랑하고 이해하고 용서하며 살아가는 것처럼 교회 안에서도 하나님 아버지를 모시고 그렇게 살아가야만 하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자라서 객지에 가서 공부를 하고 군에 입대를 하고 해외 출장을 가거나 집을 떠나 잠시 여행을 하게 될 때 마음에 가장 크게 느껴지는 것은 바로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며 그 중에 하나가 바로 식구들이 식탁에 둘러앉아 함께 음식을 나누며 이야기하던 때가 그리워지는 것입니다. 식구들이 함께 둘러앉아 음식을 나누는 가족의 모습은 아마도 가정을 가장 잘 나타내 보여주는 아름다운 그림일 것입니다. 일류 호텔의 뷔페식당과 비교하면 너무나 초라한 식단이지만 결코 호텔과 비교될 수 없는 가치를 가진 곳이 바로 가정인 것처럼 오늘 여기 하나님 아버지를 믿는 하나님의 권속들이 모인 이 교회는 분명히 천국이며 하나님의 거룩한 가족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가족 된 교회는 식구들끼리 어떤 음식을 나누어야 할까요?
아담과 양식

하나님께서 인류의 조상 아담을 하나님의 모양과 형상으로 지으시고 지상 낙원 에덴동산에서 살게 하실 때 생명나무의 열매를 따먹게 하신 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최초의 양식이었습니다. 그 때 인간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저희의 하나님이 되시는 가장 좋은 관계를 유지하면서 행복을 만끽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범죄하여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면서 하나님이 공급해주시던 신령한 식탁은 사라지고 인간은 다만 육신의 양식만을 추구하다가 죽고 마는 불쌍한 존재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 같은 인간이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고 영생을 얻기 위해서는 땅에서 나는 육신 의 양식만이 아니라 하나님이 공급해주시는 새로운 양식이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인간의 노력이 아니라 하나님이 준비해주시는 식탁인 것입니다.

이스라엘과 양식

인간이 가지고 있는 고정 관념은 중에 하나는 인간이 생존을 위해서는 땅에서 나는 곡식을 먹어야만 산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놀라운 사실은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해방되어 광야 생활을 하면서 그와 같은 고정관념을 벗어 던지는 놀라운 체험을 하였습니다. 그것이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농사를 지을 수 없는 광야에서 하나님이 매일 하늘에서 내려주시는 만나를 먹고 40년을 살아가면서 사람이 땅에서 나는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늘에서 준비하여 주신 식탁인 만나를 통해 서도 살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와 같은 경험은 오직 이스라엘 백성들만이 한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 범죄 하여 신령한 양식을 잃어버리고 땅에서 나는 양식만이 생존을 위해 절대적이라고 생각하는 인간에게 하나님이 하늘에서 내리는 만나를 맛보게 하신 의미가 무엇일까요?
그리스도인과 양식

인간이 살기 위해서 먹는 두 가지의 음식이 있습니다. 하나는 많이 먹을수록 죽음을 향하여 한걸음씩 다가가게 하는 것이며 또 하나는 먹으면 먹을수록 죽지 않고 영원히 살게 하는 음식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성찬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생명의 떡'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생명의 떡'이라고 자신을 말씀하신 것은 비유의 말씀입니다. 떡은 육신의 생명을 위해 없어서는 안 될 것이지만 우리는 육신의 생명만으로는 살 수 없고 영원한 생명이 있어야 합니다. 영원한 생명이 없으면 영혼을 만족시킬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에게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54절에 "내 살을 먹고 내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58절에서도 예수님은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살을 먹고, 그의 피를 마시면 영생을 얻는다고 했습니다. 다른 방법으로 영생을 얻을 길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살은 참되 양식이요, 예수님의 피는 참된 음료입니다.(55절)  

우리가 예수님의 살을 먹고, 그의 피를 마신다는 것은 우리와 예수님과의 실질적이고 직접적인 관계를 말합니다. 마음속으로 예수님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예수님의 말씀을 지키며 살겠다는 결심만으로도 부족하며 예수님을 본받아야 할 성현(聖賢) 가운데 한 분으로 여기는 것으로도 부족합니다. 우리가 영생을 얻기 위해서는 예수님이 인격적으로 내안에 들어오셔서 내 삶의 주인이 되셔야 하고, 내가 예수님 안에서 예수님의 지배를 받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하고 말씀하셨습니다.(56절)  예수님의 생명이 내 안에 있음을 깨닫는 것입니다.

이런 질문이 있습니다.'교회 나가면 떡을 주냐, 밥을 주냐?' 이 얄미운 질문에 대답은 할 수 있습니다.  교회는 떡을 주는 곳입니다. 세상에서 몇 푼의 돈으로 구입할 수 있는 떡이 아닙니다. 너무 귀중하고 돈으로 계산할 수도 없고, 계산한다고 하더라도 이것을 살 능력을 가진 사람이 이 땅에 단 한 사람도 없기에 거저 줍니다. 이런 떡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에서 내린 떡은 모세가 준 것이 아니라 오직 내 아버지가 하늘에서 내린 참 떡을 너희에게 주시나니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게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

여기에서 분명히 해둘 개념이 있는데 "하늘에서 내린 떡"이라는 말씀과 "모세가 준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가 하늘에서 내린"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오병이어를 경험하고는 임금을 삼으려고 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가르치시고 싶은 내용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만나는 먹을 것 이상의 의미가 아니었습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만나가 먹을 것 이상의 의미를 지니지 못하게 될 때 문제는 불평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마에 땀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먹을 것을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불평이 가득합니다. 여기에 감사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희한한 일입니다. 고생고생해서 먹게 된다면 먹고사는 것이 너무 힘드니까 그럴 수 있다지만 아침에 눈을 비비고 일어나서 나가기만 하면 먹을 것이 해결되는 삶을 살았습니다. 메뉴가 왜 만나 밖에 없느냐고 해서 메추라기까지 주셨습니다. 메추라기도 바람을 불게 하셔서 그들의 생활공간에 떨어지게 하셨습니다. 땀 흘리지 않고 먹을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살았으면서 광야 40년 동안 이스라엘은 온갖 불평을 쉬지 않고 세월을 보냈습니다. 이유가 있습니다. 만나만 보고 메추라기만 보아서 그렇습니다. 만나가 무슨 의미인지 몰라서 그렇습니다.

만나를 내리신 이유

만나를 내리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만나를 보고 그들이 알아야 할 것은 그들이 사는 방법이 먹을 양식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있다는 진리입니다. 가나안에 들어간 후 그들의 생존을 위해서는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떡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가나안 땅은 기름지고 넓습니다. 골짜기와 산에서 지하수가 터져서 여기저기 시냇물이 흐릅니다. 들과 밭에는 밀과 보리가 자라고 포도와 무화과와 석류가 주렁주렁 열립니다. 올리브나무 기름이 풍성하고 꿀이 나는 땅입니다. 거기에는 굶주림이 없습니다. 아쉬울 것이 없습니다. 그들이 가나안에서 본 것은 풍요입니다.  포도나무 한 그루, 기름진 한 평의 땅도 없었던 광야에서는 망하지 않았는데 그 풍요한 땅에서 이스라엘은 멸망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들의 진정한 양식인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하나님에 대한 경외를 잃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만나의 의미는 이렇습니다. 만나는 아무 것도 나지 않는 땅, 오히려 사람과 짐승의 생명을 삼키는 땅이라 할지라도 그곳에 하나님이 계시면 살 수 있다는 위대한 진리의 상징입니다. 여러분! 아무 것도 없어도 하나님 계시면 살 수 있다고 큰 소리 칠 줄 알고 실제로 그렇게 생각하고 고백하는 것, 이것이 믿음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내 인생의 주인이 되지 못하면 다른 것들이 내 인생의 아랫목을 차지합니다. 돈의 지배를 받고 명예의 지배를 받고 권세의 지배를 받고 유명한 이름의 지배를 받습니다. 건강의 지배를 받습니다. 그리고 그것들이 없어져 갈 때, 그것들로부터 내 인생을 정리해야 할 때 그 허망함을 달래지 못해서 고독하고 서럽습니다. 그리고는 '인생이 그런 거지' 자위합니다.

오늘 주신 말씀은 또 한 가지 초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35절입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생명의 떡이요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오병이어를 경험한 이스라엘 사람들은 예수님께 그들의 배를 위한 떡을 요구했습니다. 그들은 실제로 배고팠습니다. 먹을 것이 넉넉한 삶을 살아가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먹을 것을 해결해 주실 수 있는 능력의 지도자를 만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임금 삼으려 했습니다. 당연한 결론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요구를 다른 쪽으로 이끌고 가십니다. 그리고 이상한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그들이 먹을 떡을 만들어 주신 예수님께서 나는 생명의 떡이라고 말씀하시고 이 떡을 먹는 자는 주리지 않게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보리 떡 다섯 덩이와 물고기 두 마리가 오천 명을 먹일 수 있는 양식이 될 수 있는 것을 보고 '우리에게도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 떡 다섯 덩이 밖에 없는 인생인데 이것을 오천 명을 먹일 양으로 바꾸어 주십시오' 요구하는 것이 신앙생활의 핵심이 아닙니다. 신앙의 핵심은 이것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것이 아닌, 그 분을 바라보면 주님이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 주님이 주시는 생명의 떡이 우리 삶의 에너지가 됩니다. 주님 자신을 믿는 사람은 결코 불행하지 않고 참 행복을 맛봅니다. 십자가의 은혜로 눈물 흘리고 부활의 기쁨으로 만족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기 생명의 떡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생명의 떡입니다. 예수님 안에 우리 영혼의 샘물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마심으로 활기찬 삶을 살기를 원합니다.

여러 가정들이 식탁에서 주고받는 대화들을 보면 첫 번째는‘얼마만큼 넣을까요?, 가득!, 예, 다 넣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안녕히 가세요’하고 식구들이 집을 떠나 나가는 주유소와 같은 가정입니다. 두 번째는 밥, 반찬 등을 투정하는 가족들을 향해서 엄마가 훈계를 하고 야단을 치는 학교와 같은 가정입니다. 세 번째는 가족의 잘못만을 들춰내어 비판하고 성토하는 법정과 같은 가정입니다. 우리 육신의 가정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권속이 모인 우리 교회도 별로 차린 것이 없어도 사랑하는 넉넉한 마음으로‘참 밥이 맛있어요. 수고했어요. 많이 먹어요' 라고 하는 사랑의 대화가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지금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풍성한 은혜를 누리고 있습니까?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신다고 약속하였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보혈의 공로로 무서운 죄와 그 형벌로부터 자유를 누리십시오. 예수 안에 새 생명을 얻기를 바랍니다. 간혹 그리스도를 영접하셨다는 분들 중에 그리스도 안에서의 풍성하고 놀라운 사랑의 은혜에 대하여 무감각한 분들을 보게 됩니다. 그런 분들의 삶은 늘 자기 행위 중심적이고 죄책감에 지치고 무력하고 활력이 없고 우울합니다. 그런 분들은 마치 목욕탕에 갔으나 탈의실만 들어갔다가 돌아가는 사람과 같고, 요리 집에서 구경만 하다가 배곯아 돌아가는 사람과 같습니다. 누리십시오. 그리스도 안으로 뛰어드십시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이 모든 풍성한 축복을 누리며 나누며 살아가는 성도들의 교회가 아름다운 교회입니다.  

새해에는 풍성한 생명을 주시는 그리스도 안에서 풍성한 은혜를 누리면서 하나님 나라에 보물을 많이 쌓아두는 한 해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나라를 사모하고 그의 의를 구하는 자, 하나님 앞에 부요한 자, 사람들이 보기에는 가난할지 몰라도 하나님 앞에 부요한 자, 헌금도 육신적으로 물질이 많다고 헌금도 드리는 것이 아니고 믿음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비록 자기는 어렵고 가난해도 믿음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께 풍성하게 드리는 사람이 있는데 이것은 믿음으로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이 성장되어서 이제는 그리스도를 더 알아가고 발견해 갈 뿐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 부요한 자, 하나님 나라에 보물을 쌓아두는 영암교회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출처/서정호 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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