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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의 조건 (살후 2:13-17)

by 【고동엽】 2022. 9. 17.

감사의 조건   (살후 2:13-17)  


"주의 사랑하시는 형제들아 우리가 항상 너희를 위하여 마땅히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하심이니 이를 위하여 우리 복음으로 너희를 부르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러므로 형제들아 굳게 서서 말로나 우리 편지로 가르침을 받은 유전을 지키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를 사랑하시고 영원한 위로와 좋은 소망을 은혜로 주신 하나님 우리 아버지께서 너희 마음을 위로하시고 모든 선한 일과 말에 굳게 하시기를 원하노라"(데살로니가후서 2:13-17)

객관적으로 볼 때 감사할 조건이 많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감사할 조건이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감사할 조건이 많으면서 전혀 감사하지 않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감사할 조건이 없는데도 조건을 찾아 감사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스데반, 베드로, 바울, 디모데 등 하나님의 사람들은 감사할 이유가 별로 없음에도 불구하고 감사의 조건을 찾고 만들어 감사했습니다.

그 가운데 바울 사도를 예로 들 수 있습니다. 그는 시쳇말로 빈털터리 인생이었습니다. 율법교사도 포기했고, 결혼도 포기했고, 성공도 다 포기했습니다. 건강도 좋지 않았습니다. 생활도 가난하기 그지없었습니다. 그런 그가 입 열 때마다 강조한 것은 감사였습니다. 감사란 찾으면 얼마든지 찾을 수 있는 것입니다. 원망이나 불평도 찾으면 얼마든지 쏟아져 나오는 것입니다. 감사 쪽으로 눈을 돌리면 감사가 보이고 불평 쪽으로 눈을 돌리면 불평이 보입니다.

감사와 불평은 공존합니다. 그 거리가 아주 가깝습니다. 바라보면 감사, 뒤짚으면 불평, 그래서 손바닥의 양면과 같습니다.
감사는 하나님의 선물이고 불평은 사탄의 선물입니다. 하나님은 단 한번도 불평하는 마음을 주시지 않습니다. 감사와 불평은 그 결과가 전혀 다릅니다. 하늘과 땅이 다른 것처럼 그 결과가 너무도 다르고 차이가 납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날마다 체험하고 받은 사람이었습니다만 그러나 감사할 줄 모르고 원망 불평하다가 광야에서 다 죽고 말았습니다.

개인도 감사를 외면하고 불평 불만을 가슴에 품고 토해내기 시작하면 그 영이 병들고 삶이 실패로 기우러지게 됩니다.

감사하면 어떻게 됩니까?
첫째, 내 마음이 기쁘고 평안해 집니다. 감사는 긍정적 행동 표현입니다. 부정적인 사람은 생각을 품고, 긍정적인 말을 하다 보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 마음이 평안해지게 됩니다.

그 사람의 마음은 얼굴로 드러납니다. 성난 짐승의 얼굴을 보십시오. 일그러지고 사납습니다. 그리고 눈빛이 무섭습니다. 사람의 얼굴 역시 성난 사람은 무섭게 일그러지고 눈빛이 무섭습니다.

그러나 감사하는 마음을 품으면 얼굴도 평안해지고 눈도 말도 순해집니다.

둘째, 분위기가 좋아집니다. 언젠가 어느 회사에 들어간 일이 있었습니다. 현관 벽마다 벽보가 난잡하게 붙어 있었습니다. "몰아내자 깨부수자 타도하자 물러가라 쟁취하자"등 붉은 글씨로 쓴 구호들이었습니다. 살벌한 분위기였습니다.

다른 회사에 들어간 일이 있었습니다. 단정한 글씨로 쓴 벽걸이가 여기 저기 삽화와 암께 걸려 있었습니다. "어서 오십시오. 환영합니다. 감사합니다. 수고하셨습니다."라는 족자들이었습니다.
제가 들어갔던 두 회사 분위기는 완전히 달랐습니다. 회사뿐이겠습니까? 가정 분위기, 교회 분위기도 다를 바 없습니다.

국가 분위기도 마찬가지입니다. 대통령이나 국무총리나 장관이나 국회위원들이 싱글벙글 웃으며 "감사합니다. 수고하셨습니다"라고 인사하는 나라가 왜 어려워지겠습니까? 왜 문제가 안 풀리겠습니까? 전투적인 사회, 공격적인 분위기는 좋지 않습니다.

셋째,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원망 불평은 마귀가 기뻐하는 제사입니다만 감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사입니다.
시편 50:14을 보면 "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지극히 높으신 자에게 네 서원을 갚으며"라고 했고, 50:23을 보면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고 했습니다.

감사 제사를 드리는 사람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감사 제사를 드리며 행위를 옳게 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구원을 보여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 만큼 감사로 드리는 제사가 중요하고 위대하다는 것을 설명해 줍니다.

넷째, 감사할 일이 일어납니다. 감사하면 감사할 일이 계속 일어난다는 것은 영적 조건 반사인 것입니다.
한숨쉬는 것을 되풀이하면 한숨쉬는 일이 익숙해집니다. 포기를 자주하면 포기가 익숙해집니다. 그러나 감사를 반복하면 감사가 익숙해지고 그러다 보면 감사할 일이 많아지게 되는 것입니다.

엎드려 팔 굽혔다 폈다 하는 운동이 있습니다. 처음 하는 사람은 다섯 번 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반복하다 보면 열 번 스무번 반복이 가능해집니다. 그만큼 반복이 중요한 것입니다.

기도도 반복하다보면 생활화되고 감사도 찬송도 반복하다보면 생활화되는 것입니다. 나쁜 일을 반복하다보면 익숙해집니다. 반대로 좋은 일을 반복하다 보면 역시 익숙해집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좋은 일을 계속 반복해야 합니다. 감사하기를 힘써야 합니다.
본문 속에서 바울 사도가 밝힌 감사의 조건들을 살펴보겠습니다.

1. 구원하심을 감사합니다
13절을 보면 "주의 사랑하시는 형제들아 우리가 항상 너희를 위하여 마땅히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하심이니"라고 했습니다.
"택하시고 거룩하게 하시고 구원하시고" 아무런 자격도 없는 우리를 뽑고, 택하시고, 더럽고, 추하고, 허물 투성이인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고 아무런 조건도 없이 우리를 구원해 주신 것을 감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구원받았다는 죄의 문제를 해결했다는 것입니다. 내가 벗어 던질 수 없고 내가 풀지 못하는 죄의 사슬을 풀어주신 것입니다.
죄보다 무서운 것은 없습니다, 죄는 육체도 영혼도 다 파멸시킵니다. 그리고 지옥에 떨어지게 만듭니다.

미국의 과학자들은 최근 박테리아나 바이러스 같은 병균이나 기생충이 사람의 정신까지도 파괴한다는 사실을 밝혀내고 있다고 합니다. 박테리아나 바이러스가 라임병, 강박장애, 양극성 장애, 정신분열증, 자폐증, 거식증도 유발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아시는 대로 박테리아나 바이러스는 현미경을 통해서만 볼 수 있는 미세한 생물입니다. 육안으로는 보이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정신까지 좀먹는다는 것입니다.

헬리코박터라는 박테리아가 있습니다. 이놈은 주로 위벽에 붙어 기생하는데 위벽을 갉아 상처를 냅니다. 상처 난 위 속에 김치나 커피를 집어넣으면 그 아픔은 상상을 초월한다고 합니다.

그 균도 역시 눈으로는 보이지도 않습니다. 죄는 작아도 죄입니다. 안보여도 죄입니다. 숨겨도 죄입니다. 그러나 그 죄는 육신을 망가뜨리고 영혼을 갉아 먹어버립니다. 그런데 그 죄를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다 해결하시고 용서하시고 믿기만해라! 용서받는다는 사죄의 은총을 선포해 주신 것입니다. 그 어찌 감사치 않을 수 있습니까?

바울은 그 사실을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하셨다"고 설명했습니다. "감사합시다. 감사합니다"라고 고백합시다. "감사합니다"라고 찬양합시다.

2. 위로와 좋은 소망을 은혜로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16절을 보면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와 우리를 사랑하시고 영원한 위로와 좋은 소망을 은혜로 주신 하나님 우리 아버지께서"라고 했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셔서 영원한 위로를 주셨고 좋은 소망을 은혜로 주신 것이 감사하다는 것입니다.
왜 구원하셨습니까? 왜 예수님이 죽으셨습니까?
요한복음 3:16을 보면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라고 했고, 에베소서 2:4을 보면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사랑을 인하여"라고 했습니다.

사랑 때문에, 사랑하기 때문에 죽으셨고 우리를 살리신 것입니다. 그뿐입니까? 영원한 위로와 좋은 소망이란 말을 주목해야 합니다.

얼마 전 친구 목사님 아버님이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밤늦게 문상을 갔습니다. 늦은 밤이라 문상객이 거의 없었고 가족들만 자리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보니 새벽 2시가 가까워 왔습니다. 새벽기도 인도 때문에 더 이상 있을 수도 없고 피곤도 겹쳐 그곳을 떠나야 했습니다. 낮 시간에는 앉을 겨를도 없이 조문객이 줄지어 찾아왔지만 새벽이 되면서 발길이 끊어진 상가를 보면서 뭘 느꼈겠습니까? 사람이 사람을 위로하는 건 다분히 의례적이고 형식적이라는 것, 그리고 사람은 영원히 곁에 있을 수도 없고 함께 할 수도 없다는 것.

그러나 주님의 위로는 바울의 말씀대로 영원히, 영원히 함께 하신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바울은 본문에서 영원한 위로와 좋은 소망을 주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좋은 소망이 뭡니까? 나쁜 소망도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거는 소망들, 사람에게 걸었던 기대들 그런 것들은 좋은 소망이 아닙니다. 이유는 흔들리고, 무너지고, 기대대로 안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좋은 소망을 주셨습니다. 찬송가 539장 가사가 좋은 소망이 무엇인가를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이 몸의 소망 무엔가 우리 주 예수 뿐일세
우리 주 예수 밖에는 믿을 이 아주 없도다"

그렇습니다. 예수가 소망입니다. 그러기에 히브리서 저자는 12:2에서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라고 했습니다.

생각해 보면 힘들고 불평스런 일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정치도 짜증나고, 경제는 악화되고, 하는 일은 잘 안되고...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원망하고, 불평하고 누구 탓을 하다보면 더 꼬이고, 힘들어지고 짜증스러워 집니다.

그러나 눈을 돌려 소망이신 예수님 바라보고 감사의 마음을 쏟으면 수천, 수만 가지가 감사한 것들뿐이라는 걸 알게 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일생동안 참으로 많은 사랑을 받고 살아 왔습니다. 저를 도와 준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잊지 못합니다. 낱낱이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일생동안 많은 사람을 도왔습니다. 그런데 단 한번도 감사하다는 말도, 글도 보내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도와주면서도 돕고 싶은 마음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들을 계속 도우십니까? 감사하는 사람들입니다. 은혜를 저버리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입으로, 마음으로, 물질로 감사하는 사람들입니다.
감사의 조건은 너무나 많습니다. 주님! 감사합니다. 아멘.  


출처/박종순목사 설교자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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