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와 도전 (행 19:21-41)
예나 지금이나 악한 원수 마귀는 주의 복음이 전파되지 못하도륵 가진 방법으로 역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성장하며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하나되어 화평을 이루어 나아감에 대해서 또한 여러 가지로 방해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도 마귀는 개인의 신앙을 헐어 넘어뜨리기 위해서 도전해오며, 가정의 신앙을 파괴하려고 도전해오며, 교회의 경건과 사랑을 헐어 내리려는 사탄의 역사가 계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를 향한 도전은 크게 둘로 나눌 수 있는데 하나는 밖에서의 도전이요 다른 하나는 안에서의 도전입니다. 어떤 면에 있어서 밖에서의 도전보다 안에서의 도전이 더 무서운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역사를 볼 때에 이스라엘 민족이나 교회가 밖에서의 도전보다 안에서의 도전으로 낭패를 당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즉 이스라엘은 아간 한 사람으로 인하여 아이성의 참패를 당하게 된 것입니다.
오늘도 교회 밖에서의 도전보다 교회 안에서의 도전으로 많은 교회가 어려움과 고통을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가 서에서는 포도동산을 허는 여우를 잡아내라고 하였습니다. 외적인 공격의 원인을 제거해내는 일보다 내적 공격의 원인을 제거해내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어쨌든 교회는 사탄으로부터 여러 가지 도전을 받기 마련입니다. 사탄은 공격의 무기로 개인을, 혹은 사회를 그리고 정부를 사용하여 크고 작은 도전을 해오는 것입니다. 이런 경우에 교회가 어떻게 하여야 할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물론 교회가 반성해야 할 것도 있고, 끝까지 고수해야 할 점도 있는 것입니다. 교회는 이를 잘 구별하여 사탄의 도전에 지혜롭게 대처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바울은 에베소에서 3년 동안 머물며 전도활동을 해왔는데 여기서 강력한 도전을 받게 되었습니다. 도전을 왜 받게 되는가에 대해서는 한마디로 말하면 어두움은 빛을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빛의 거하는 자는 즉 성도가 말씀대로, 진리대로 살려고 할 때에 사탄의 도전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그러한 도전을 왜 받게 되었으며 또한 어떻게 대처했던가를 살펴보면서 각자가 교훈으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1. 물질적 측면에서 오는 도전입니다.
모세의 율법에 보면 남의 소유를 침해하는 일을 엄금하고 있습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남의 재물에 손해를 입혔을 경우에는 가해자는 피해자에게 피해액의 다섯 배를 보상하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율법조문의 정신은 시민의 재산의 안전을 보장한다는 데에 있었으며 이러한 정신은 신약시대에 있어서도 그대로 계승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이 정신에 위배되지 않도록 처사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누구에게도 재산상의 손해를 입히는 일을 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서나 교회 밖에서나 사탄의 도전을 받기 쉬운 물질거래는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1). 위험성이 다분한 계모임을 가져서는 안됩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로서는 절대 손대서는 안됩니다. 계 때문에 신앙도 잃고, 가정도 잃고, 재산도 잃고, 친구도 잃어버리고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귀가 도전해올 틈을 조금도 주어서는 안됩니다. 투기와 이자놀음과 같은 것들은 사탄의 올무와 무서운 시험거리가 될 가능성이 큰 것입니다.
시편15장에 보면 “여호와의 장막에 유할 자는.....변리로 대금치 아니하며”라고 하였습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돈놀이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2). 성도들간에 물질 거래를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재산보증이나 물질 거래를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약속이 이행되지 않을 경우에 큰 문제가 생기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로 인해서 내가 어떤 손해가 있다 할지라도 그 손해를 아무소리 않고 다 감당하겠다는 마음이 있다면 보증을 서도 좋습니다. 돈을 꾸어주어도 좋습니다. 나중에 돌려주면 받고 돌려주지 못하면 받을 생각을 하지 않는다면 하세요. 누가 말리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 나는 혼자가 아닙니다. 남편이 있고 아내가 있고 자녀가 있습니다. 나의 실수로 나만 고통을 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온 식구가 당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 생각대로 행동해서도 안 되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 있어서 성도들간에 물질거래는 거의가 다 사탄의 시험을 받아 물질적으로 영적으로 큰 손해를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영국 속담에도 ‘친구와 돈 거래를 하지 말라 그것은 결국 돈도 잃고 친구도 잃게 된다’라고 하였습니다. 성도와 돈 거래를 하면 돈도 잃고 성도도 잃고 내 자신의 신앙도 잃게 될 위험성이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더욱이 하지 말라한 주님이 명령을 불순종한 것이니 범죄 하여 죄만 짖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을 빙자하여 범죄 하는 상황 윤리 자와 같은 것입니다.
여러분, 진정으로 도와주려면 주고받을 생각하지 마세요. 그러나 가정식구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범위 안에서 도와주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돈 거래는 아니지만 나 한 사람의 행동으로 인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물질의 피해를 주는 경우가 발생하였습니다.
에베소에는 금속수공업자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에베소에 있는 아데미 신전의 모형을 은으로 조각하여 우상 섬기는 자들에게 파는 장사꾼들로서 소득액이 높은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에베소에 전도활동이 활발히 전개되고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의 수가 날로 늘어감에 따라 우상 판매실적이 날로 줄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들 우상 장사꾼들은 교회 때문에 자기네들의 장사가 안되고 손해를 입게 되었으니 가만히 있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모여 교회를 향해서 도전해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의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종종 직면하는 도전이기도 합니다.
예를 들면 교회가 흥왕하고 그리스도인의 수가 날로 증가됨에 따라 술장사가 부진하거나, 무당의 수입이 줄어 들어 간다든가, 포주의 사업이 쇠락해 가는 것 때문에 이들로부터 쏟아져오는 교회에 대한 원성이나 적대행위 같은 것들입니다.
이에 대한 성경의 대답은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무당이나 술장사나 포주와 같은 비율리적이고, 비양심적이며, 반사회적인 자들의 치부를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자들에 대하여 교회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양보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2. 대인 관계에서 오는 도전입니다.
사람은 사회적인 존재입니다. 함께, 그리고 더불어 사는 공동체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나와 남과의 관계형성을 외면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성경은 대인 관계에서 다음과 같이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레19:18절에 보면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였고, 빌2:3절에는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라고 하였고, 롬12:10절에는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할 것이며 라고 하였고, 고전10:33절에는 나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고 다른 사람의 유익을 구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내 자신이 손해를 볼지언정 다른 사람에게 손해를 끼쳐서는 안됩니다. 그리고 누구에게나 고통을 주거나 적대행위를 해서는 성경의 가르침에 어긋나는 일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런데 바울과 에베소의 우상장사들 사이에 관계가 자못 불편해가고 있었습니다.
바울의 전도로 신앙인구가 증가되므로 우상이 팔리지 않게 되고 그래서 그들의 기분이 상할 뿐만 아니라 생계에까지 위협을 받기에 이르게 되었으니 문제가 아닐 수가 없습니다. 성경에는 아무에게도 손해를 끼치지 말라고 했으니 말입니다.
이러한 문제로 고민하는 분들이 여러분들 가운데 계실지 모릅니다. 신앙생활을 개떡같이 할 때는 별 문제가 생기지 않습니다만 내가 신앙생활을 철저하게 잘 하므로 써 나 자신은 구원의 확신과 기쁨 속에서 살 수 있으나 이로 인하여 안 믿는 부모가 노여워하고, 남편이 불쾌해하며, 상사가 언잖아 할 경우가 생깁니다. 이런 때에는 어떻게 할 것인가?
이에 대하여 성경은 무어라고 말하고 있는 가를 들어봅시다.
그리스도인은 원칙적으로 남의 기쁨을 파괴하거나 남에게 괴로움을 주는 일을 해서는 안됩니다. 그러나 내가 올바른 신앙생활을 하는 이유 때문에 상대방이 불쾌해하거나 상심한다면 그것은 내가 책임질 일이 아니므로 이로 인하여 신앙을 버려서는 안 된다는 것을 성경이 가르치고 있습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술친구의 기분을 맞추기 위해서 그와 함께 주색잡기를 일삼을 수가 없으며, 동료의 마음을 즐겁게 해 주기 위해서 그와 함께 공금횡령에 공범자가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부모의 마음을 기쁘게 해드리기 위해서 제사에 참여하여 우상에게 절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것들을 단호하게 거절하여야 합니다.
3. 사회문제에서 오는 도전입니다.
마5:41절에 보면 ‘오리를 가자고 하면 십리를 같이 가주라’고 하였고 롬12:18절에는 ‘할 수 있거든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하라’고 하였고 롬13:1절에는 ‘다스리는 자에게 복종하라’고 하였습니다.
교회가 사회에 대하여 처신해야 하는 법을 가르쳐주는 교훈으로써 양보와 희생과 화평과 사회작인 안녕과 질서의 유지를 위해 노력하라는 뜻입니다.
과연 그리스도인들이 나 한 사람으로 인하여 가정과 직장과 사회의 안정이 파괴되지 않도록 할 수 있는 데까지 양보하고 희생할 것이요, 어떤 경우에도 사회적인 불안이나 소란을 유발하는 언동은 자제해야 옳은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에베소 교회로 인하여 당시 사회적인 소란이 생겼습니다. 즉 사업부진의 불안을 품은 우상장사의 두목 데메드리오라는 자가 동업자들을 선동하여 교회타도를 위하여 큰 소란을 일으켰습니다.
그렇다면 바울과 에베소 교회는 여기서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전도를 포기하고 교회를 철수해서라도 사회의 안정을 도모해야 할 것인가? 아니면 그러한 소란에도 불구하고 계속 복음을 전하며 교회의 부흥을 도모해야 할 것인가?
여기에 대한 성경의 대답은 분명한 것입니다. 즉 그리스도인은 절대로 사회적인 불안이나 소요를 유발시키는 일을 해서는 안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려는 순수한 신앙 때문에 사회적인 소란이 일어난다면 거기에 굴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축첩을 반대합니다. 이로 인하다 축첩 자들이 작당하여 교회를 반대하는 소란을 일으킨다고 해서 교회가 축첩을 찬성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요새 보면 교회당 옆집의 집 값이 떨어지기 때문에 일부의 지역에서는 주민들이 새 교회당이 세워지는 것을 반대하는 경향이 많습니다.
물론 그 책임이 교회에 있다면 교회는 마땅히 반성하고 그릇된 일에 시정하는 일에 인색치 말아야 할 것입니다.
사실 교회가 광신적이고 이교적인 예배행위로 주위를 소란케하고 안면을 방해하는 것은 탈선현상이라고 아니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가 정당하게 하는 예배와 프로그램 때문에 이웃에서 반대하여 소란을 일으킨다고 하면 그 잘못은 이웃에게 있는 것이지 교회에 있는 것이 아니므로 교회가 철수해야 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할 때 그것은 교회의 독선이 아니냐고 반문 할 사람이 있을지 모릅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절대로 독선이 아닙니다. 독선은커녕 이것이냐 말로 이웃에 대한 사랑이요, 나라에 대한 충성이요, 사회에 대한 봉사인 것입니다. 그 까닭은,
첫째, 부당한 행위로 취득한 행위는 결과적으로 그를 파탄에 빠뜨리게 합니다. 그러므로 일시적인 재산 피해가 있다고 하드라도 실제는 피해가 아니라 유익입니다. 언제나 올바른 신앙을 확립하는 것은 이웃을 위하는 첩경이 되기 때문입니다.
둘째, 불의한 일을 방관하므로 써 그것을 행하는 자의 기분을 상치 않게 해주는 것보다는 그가 불쾌하게 여기더라도 그 불의를 저지하고 추방하여 그를 불의로부터 구해내는 것이 진정으로 그를 위한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셋째, 하나님의 진리와 공의에 입각하지 않는 평화와 안정은 진정한 평화와 안정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일시적으로 안정을 위해 영구적인 불안에 빠지도록 하는 것보다는 영구적인 평화와 안정을 위해서 일시적인 소란을 감수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으로 나라와 사회를 위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사탄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서 절대로 죄악과 타협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보이는 사람과 사회를 생각하기에 앞서서 그 속에서 역사 하는 사탄의 역사를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의 싸움이 아니라 어두움의 권세인 마귀와 싸우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님께서 주시는 지혜와 권세를 가지고 이 영전에서 다 승리하여 뭇 심령들을 구원해내는 복된 역사에 참여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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