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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로마교회는 복음을 다시 들어야 했다(Ⅱ)

by 【고동엽】 2022. 9.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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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옥한흠 목사님의 저서 로마서 강해 1권 <내가 얻은 황홀한 구원> 49쪽에 있는 글입니다.

 

 

3. 로마교회는 복음을 다시 들어야 했다(Ⅱ)

 

 

 첫째는 내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너희 모든 사람을 인하여 내 하나님께 감사함은 너희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됨이로다 내가 그의 아들의 복음 안에서 내 심령으로 섬기는 하나님이 나의 증인이 되시거니와 항상 내 기도에 쉬지 않고 너희를 말하며 어떠하든지 이제 하나님의 뜻 안에서 너희에게로 나아갈 좋은 길 얻기를 구하노라 내가 너희 보기를 심히 원하는 것은 무슨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눠 주어 너희를 견고케 하려 함이니 이는 곧 내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와 나의 믿음을 인하여 피차 안위함을 얻으려 함이라 형제들아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가고자 한 것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너희 중에서도 다른 이방인 중에서와 같이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로되 지금까지 길이 막혔도다 헬라인이나 야만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로마서 1장 8~17절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15절).
 
 여기서 "너희"는 믿음이 좋은 사람으로 소문난 자들이었고 전통 있는 교회에 소속된 성도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왜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려고 했을까요? 복음을 들어야 될 사람들이 교회 밖에도 많지만 교회 안에도 많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교회 안에 있는 신자들이 복음을 들어야 할 첫째 이유로는 잃어버린 구원의 감격을 회복하는 데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이제는 로마 교회가 다시 복음을 들어야 했던 두 번째 이유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16, 17절).
 
 이 두 구절을 흔히 로마서의 주제라고 부릅니다. 로마서를 이해하는 데 결정적인 열쇠가 되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16절에서 복음에 대한 자신의 강한 확신을 피력하고 있습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복음은 그것을 믿는 자는 누구든지 구원시키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그가 로마교회에 복음 전하기를 애타게 원하던 또 하나의 이유를 찾아낼 수 있습니다. 그것은 로마교회가 꺼져 가는 복음의 능력을 회복하기 원했기 때문입니다.
 
 구원이란 무엇인가?
 
 "당신은 구원받으셨습니까?" 이렇게 물으면 대개는 받았다고 대답합니다. 그런 사람들을 보고 "구원이 뭐죠?"라고 재차 질문하면, "죽어서 천당 가는 것을 말합니다." 보통 이렇게 대답을 합니다. 틀린 대답은 아닙니다. 그러나 다시 한 번 질문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구원이 무엇입니까? 17절을 주의해서 보면 구원이라는 말과 똑같은 의미로 사용되는 말이 나옵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여기서 '하나님의 의'와 '구원'은 같은 개념입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를 "복음에는 구원이 나타나서" 라는 말로 대치해도 큰 문제가 없습니다. 따라서 구원이 무엇이냐를 설명할 때는 하나님의 의에 대한 설명이 나와야 합니다. 하나님의 의에 대해서는 3장에서 자세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한두 마디로 정리하고 넘어가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의는 율법의 선한 행위를 가지고 의롭다는 인정을 받는 것과 대조되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인정받는 특별한 의를 말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내어 놓으신 새로운 의입니다. 선한 행위가 있어야 하나님께 의롭다 인정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자들에게 "아니야, 예수만 믿으면 내가 그것을 너의 의로 인정하기로 했어" 하고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을 뜻합니다. 믿음만 가지면, 의로운 것이 아무것도 없는 자를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하시는 것이니 사람의 지혜로 이해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이렇게 대답해야 합니다. "예수 믿어서 그 믿음으로 하나님께 의인으로 인정받는 것을 말합니다." 한문으로 '이신칭의(以信稱義)' 라고 합니다. 믿음으로 얻는 이 의 때문에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과 화목할 수 있는 것입니다. 죄와 죽음 그리고 사단의 세력에서 자유함을 얻습니다. 그리고 예수 안에 있는 새생명을 받아 누리는 영원한 나라에 들어가게 됩니다. 로마서는 이렇게 기막힌 구원의 은혜를 우리에게 다시 알게 하고 확신하게 하며 풍성하게 누리도록 하기 위해 기록된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의가 주는 선물이요, 축복입니다. 그래서 구원과 하나님의 의를 같은 의미로 보아도 좋은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구원을 다룰 때 한 가지 더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 믿고 하나님의 의를 얻었다고 하지만 그것이 당장 눈에 보이거나 손에 잡히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잘못하면 구원을 지나치게 형이상학적인 영역에 묶어버리기 쉽습니다. 구원에는 영적인 요소만 아니라 육적인 요소도 들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내세적인 복만이 아니라 현세적인 복도 포함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받은 구원에는 세상에 살면서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맛볼 수 있는 축복의 요소가 많이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죄가 세상에 들어오면서 영혼이 부패하게 되고, 이에 따라 사람은 정신적인 혼란과 육체적인 질병으로 고통받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복음을 듣고 구원의 능력을 체험하면 그것이 우리의 정신 세계는 물론 육체에까지 대단한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불안해하던 사람이 평안을 누리게 되고, 고독해하던 사람이 주님과 더불어 동행함으로써 고독을 잊게 되는 것입니다. 불평, 불만, 원한에 사무쳐 있던 사람을 모두 용서해버리기 때문에 마음에 신비스러운 자유가 찾아옵니다.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며 살기 때문에 세상에서 여러 가지 마음 상하는 일들이 있어도 그것으로 병이 든다든지 거꾸러지는 일이 거의 일어나지 않습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영혼의 구원이 정신적인 건강을 가져다 준 것입니다. 그리고 정신적 건강은 우리의 육체의 고통을 치료하기까지 합니다. 그뿐입니까? 술 마시고 도박하던 사람이 그 악한 죄를 끊어버리고 성실하게 일하니까 가정이 행복해집니다.
 제가 드리는 말씀의 요지는 구원의 의미는 우리 영혼이 의롭다 함을 얻고 천국에 들어가는 것만이 아닌, 우리의 정신계와 육체적인 영역에 미치는 결과까지 다 포함한다는 점을 알아 두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서 행복하게 사는 것만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행복하게 사는 현세의 축복까지 다 포함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전인격적인 구원이요, 현세와 내세의 구원을 망라하는 포괄적인 구원이라는 말입니다. 이러한 구원을 주시는 복음이니 그 능력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복음은 하나님의 능력이다
 
 지금부터 우리는 바울이 로마교회에 가서 복음을 전하여 다시 불붙이고 싶어 했던 하나님의 능력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살펴보아야 하겠습니다. 본문 말씀에서 우리가 금방 알 수 있는 사실은 복음과 능력은 같다는 것입니다. 복음이 곧 능력이라는 말입니다.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이름이 곧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복음이 처음으로 예루살렘을 요란하게 하던 당시, 베드로가 앉은뱅이를 향하여 큰소리로 한 말을 기억해 보시기 바랍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행 3:6).
 
 이 말을 듣자 앉은뱅이는 일어섰습니다. 바로 이런 능력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그 이름 하나가 굉장한 능력을 가지고 있어 그 이름 앞에서는 귀신이 떠나가고 마귀가 쫓겨갑니다. 그 이름 앞에서는 병마가 도망가고 그 이름 앞에서는 죄가 달아납니다.
 그리고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의미합니다. 바울은 고린도에서 선교활동을 할 때 자신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만 알고 전하기로 결심했다는 말을 했습니다(고전 2:2). 예수의 십자가가 하나님의 능력이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의 부활도 마찬가지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메시지를 증거하자 예루살렘에서 당장 3,000명이 회개하는 대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이것은 부활의 메시지 자체에 하나님의 능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십자가, 부활이라고 하는 복음 자체가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말에는 다른 중요한 요소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넘어가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 1:8).
 
 주님께서는 복음을 전하는 자에게 성령의 권능을 약속하셨습니다. 복음을 이 악한 세상에 전하기 위해서는 막강한 초자연적인 힘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까지도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먼저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에게 적용된 영적 원리가 그대로 그의 증인들에게도 적용이 됩니다.
 한 가지 물어볼까요? 우리가 복음을 직접으로나 간접으로나 전하는 행동은 사단을 방어하는 것이 됩니까, 아니면 공격하는 것이 됩니까? 말할 것도 없이 공격 행위입니다. 우리가 사회생활 하면서 '나는 예수 믿는다'고 자신을 소개합니다. 안 믿는 사람 보면 예수 믿으라고 권합니다. 믿는 사람들끼리 모이면 성경 공부도 하고 기도도 합니다. 주일에는 교회에 나옵니다. 이 모든 행동은 사단에 대한 공격 행위입니다. 우리는 방어자가 아닙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이 세상을 이기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공격하는 사람들입니다. 오히려 사단은 항상 방어하는 입장입니다.
 그렇다면 어느 쪽이 더 강해야 합니까? 제가 군사학에는 문외한이긴 하지만 전문가의 말을 들으니까 어떤 나라가 다른 나라를 침공하려면 공격하는 군대는 수비하는 군대보다 화력이 3배나 더 강해야 승산이 있다고 합니다. 화력이 비슷하거나 약하면 공격하는 쪽이 당연히 불리하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군사학에서 통하는 힘의 법칙이 영적 전투에도 통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복음 증거자는 사단보다 3배 이상 강해야 이길 수 있습니다. 어디서 이 능력을 얻을 수 있습니까? 성령의 권능을 받아야 합니다. 사단의 세력을 전복할 수 있도록 주시는 성령의 권능을 일컬어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말합니다.
 이상에서 검토한 복음의 능력이 얼마나 대단한가를 입증할 수 있는 중요한 말씀이 16절 안에 들어 있습니다. "모든 믿는 자" 라는 말입니다. 얼마나 능력이 큰지 믿기만 하면 한 사람도 빼놓지 않고 구원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복음의 능력이 약해서 구원하지 못하고 놓쳐버리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은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라는 말로 부연해서 증거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만 구원하는 것이 아니요, 헬라인까지 구원한다는 말은 믿는 사람이면 차별하지 않고 누구나 다 구원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한 가지 더 주목할 것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가지고 있는 능력이 얼마나 강한지 많은 구원의 조건이 필요없고 단지 한 가지만 요구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전혀 복잡하지 않습니다. 유일한 조건은 믿음입니다. 이것 저것 요구하지 않는 이유는 그만큼 복음의 능력이 대단하기 때문입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17절).
 
 이 말씀의 의미를 정확히 이해하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다음과 같이 풀어서 다시 정리하면 조금 이해가 빠를지 모르겠습니다. "복음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구원의 길이 열려 있는데 그 길에 들어가기 위해 필요한 것은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는 것이다."
 그러면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한다는 말씀이 무슨 뜻이라고 생각합니까? 성경 학자들은 여러 가지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혹자는 구약 성도들의 믿음으로부터 시작해서 신약 성도들의 믿음에 이르기까지 모든 믿음을 다 통틀어서 말한다고 합니다. 다른 사람은 첫 단계의 믿음으로부터 마지막 단계의 믿음까지를 의미한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제가 보기에는 본문의 의미를 가장 잘 보여 주는 해석은 '오직 믿음으로!'입니다. 시작도 믿음이요, 마지막도 믿음이라는 말을 '믿음으로 믿음에 이른다'고 표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직 믿음으로! 조건이 단순하다는 말입니다. 다른 조건이 필요없습니다. 오직 믿기만 하면 구원을 주십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복음의 능력을 상실한 현대 교회
 
 이상에서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에 대해 제가 두 가지로 말씀드렸습니다. 첫째는 복음 그 자체가 가지고 있는 능력이라고 했습니다. 둘째로 예수 믿는 사람에게 부어 주시는 성령의 권능이라고 했습니다. 교회는 이러한 하나님의 능력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항상 이 능력에 사로잡혀 있어야 합니다. 사람들의 눈에는 잘 보이지 않겠지만 예수 믿는 사람은 어린아이부터 어른까지 항상 이 능력으로 무장하고 있어야 마귀를 대적하고 세상을 이길 수 있습니다.
 이렇게 놀라운 능력임에도 불구하고 문제가 하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복음의 능력이 그 자체로는 엄청난 것이지만 그 능력을 수용하는 사람의 약점에 의해 제재를 받는다는 사실입니다. 육신의 연약은 경우에 따라 성령과 복음의 능력에 막대한 장애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기도를 게을리하면 이 능력은 힘을 잃어 버립니다. 복음을 듣지 않거나 잘 모르면 이 능력을 체험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범죄하여 성령을 근심하게 하면 이 능력이 식어버리거나 떠나버립니다. 아무리 잘 믿는 사람이라도 계속 사모하고 항상 조심하지 않으면 시종일관 유지하기 어려운 것이 이 능력입니다. 믿는 자는 누구든지 이 능력을 잃지 않기 위해서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교회가 교회답기 위해서는 이 능력의 불꽃이 꺼지지 않도록 정성을 쏟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에 대한 실천으로 복음을 자주 선포하는 교회, 자주 듣고 확신하는 교회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저는 현대 교회가 이 능력을 어느 정도 유지하고 있는지 의심스럽습니다. 너무도 답답한 일들이 많으니까요. 교회 안에 왜 그렇게 싸움이 많습니까? 왜 그렇게 중생받지 못한 주일 신자들이 많이 드나듭니까? 왜 구원의 감격이 식어버렸습니까? 왜 서로 용서하지 못합니까? 왜 성격이 바뀌지 않습니까? 왜 교회 밖에만 나가면 안 믿는 사람과 똑같습니까? 왜 죄를 범합니까? 왜 회개할 줄 모릅니까? 왜 변명만 늘어놓습니까? 왜 복음을 부끄러워합니까?
 이와 같은 사람들이 교회 안에 많은 것을 보면 교회가 복음의 능력, 성령의 능력을 잃어가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너무 답답합니다. 예수 이름, 우리가 얼마나 입이 아플 만큼, 침이 마를 만큼 자주 들먹입니까? 그런데도 그 예수 이름에 능력이 없는 것 같습니다. 십자가는 사방에 얼마나 많습니까? 여러분 가운데는 목걸이에, 넥타이에, 심지어 귀걸이에까지 십자가를 매달고 다니는 분이 많습니다. 우리 나라처럼 건물 옥상에 십자가를 마음대로 세울 수 있는 나라도 없을 것입니다. 제가 친구 목사를 통해서 들으니까 미국만 해도 건축법상 옥상에 십자가를 절대 못 달게 되어 있다고 합니다. 그들은 십자가를 교회의 벽에다 답니다. 그러나 우리는 달았다 하면 제일 높은 꼭대기만 골라서 달지 않습니까? 밤만 되면 울긋불긋 얼마나 화려합니까? 이 나라 전부가 금세 복음화될 것만 같은 착각을 일으킬 정도입니다. 십자가가 많은 만큼, 높이 다는 것만큼 거기에 걸맞는 능력이 나타나야 하겠는데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 우리의 고민이요 수치입니다. 차라리 십자가를 붙이지 말고 다시 출발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자주 듭니다.
 벤디에르라는 사람이 쓴 <요새의 함락>이라는 책이 있는데 거기에 보면 자신이 겪은 경험담 하나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B-17기를 타고 독일의 카젤이라는 도시를 폭격하게 되었는데, 폭격을 하다가 그만 독일 나치 군대가 쏘아대는 대공포에 연료 탱크가 맞았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전투기가 폭발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기지로 돌아왔습니다. 돌아와서 연료 탱크를 조사해 보았더니 열한 발의 탄환이 연료 탱크에 박혀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폭발을 하지 않았으니 얼마나 기적입니까?
 이 글을 읽으면서 제가 느낀 것은 비행기를 향해 쏘아댄 불발탄이 요사이 우리가 떠들기 잘하는, 예수니 십자가니 하는 말과 흡사하지 않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뭔가 폭발이 되어야 할 텐데 능력이 없으니까 터지지를 않습니다. 주일이면 골목이 터져라 하고 예배에 나오는 신자들이 많이 살고 있다는 사회가 지금 되어 가는 꼴을 보십시오. 정치계에서 활동하는 기독교인들이 어디 한둘입니까? 기업마다 신우회다 조찬기도회다 하면서 믿는 형제들이 열심히 뛰고 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 얼마만큼의 능력이 나타나고 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성직자는 성직자대로 겉모양만 거룩해 보이지 경건의 능력, 복음의 능력을 잃어가고 있지 않나 몹시 염려스럽습니다. 이와 같은 답답한 현실 속에서 우리가 다시 살기 위해서는 복음을 들어야 합니다. 성령의 능력이 활활 타오르는 복음을 받아야 합니다. 복음을 듣고 풍성한 은혜의 세계에 깊이 빠져야만 구원의 감격도 다시 회복될 수 있거니와 그 놀라운 능력이 우리의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입버릇처럼 함부로 올리지 마십시오. 그 이름은 능력입니다. 성령의 역사, 성령의 불, 함부로 떠들지 마십시오. 성령은 능력입니다. 그 능력을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날마다 가슴에 모시고 그분을 좀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그분이 왜 나를 위해 죽으셨는지 좀 묵상하자는 말입니다. 성경을 펴서 예수님과 그가 우리를 위해 행하신 일들을 놓고 열심히 좀 공부하자 그 말입니다. 그분의 십자가 앞에 나아가 무릎 꿇고 피 묻은 그의 발을 끌어안는 시간을 자주 가져야 합니다. 부활의 영광이 온누리에 찬란하게 뻗치던 그 동산에 올라가서 나를 죄에서 자유케 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면서 가슴이 터져라 소리치고 싶은 그 경지로 한번 찾아 들어가 보자는 말입니다.
 그것이 복음을 듣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복음을 들을 때에 우리는 잃어버린 구원의 능력, 성령의 능력을 다시 회복할 수가 있습니다.
 
 복음의 열매 - 전도
 
 마지막으로 로마교회가 복음을 들어야 했던 세 번째 이유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열매를 맺기 위해서 복음을 다시 들어야 했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가고자 한 것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너희 중에서도 다른 이방인 중에서와 같이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로되 지금까지 길이 막혔도다"(13절).
 
 여기서 열매란 전도의 열매를 말합니다. 로마교회가 복음을 다시 듣고 구원의 감격과 하나님의 능력을 되찾으면 그 순간부터 폭발이 일어나지 않겠습니까? 먼저 믿은 성도들이 다시 한 번 깨어나면, 가는 곳마다 사람들을 붙잡고 열심히 전도할 것이고 그 결과 당연히 전도의 열매를 풍성히 거두는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될 것입니다. 세계를 복음화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로마가 그리스도에게로 돌아와야 했습니다. 이것이 바울의 확신이었습니다.
 세계사를 살펴보면 바울의 꿈이 이루어진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로마서를 써서 보낸 3, 4년 후 바울은 죄인의 신분으로 로마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그때가 주후 62년 초 정도가 됩니다. 그 후 그는 로마에 3년 가까이 머물면서 감옥에서 지내기도 하고 풀려나기도 하면서 계속 복음을 전했습니다. 물론 바울 혼자만 한 것은 아닙니다. 베드로도 그곳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놀라운 것은 그 당시 로마교회가 거두게 된 전도의 열매였습니다. 네로 황제의 칼날에 바울이 순교를 하던 64년 초, 그러니까 그가 로마에 간 지 3, 4 년 지나서 로마 시내에는 예수 믿는 사람이 너무 많아졌습니다.
 어떤 역사가의 기록을 보면 네로 황제가 핍박을 시작해서 바울을 칼로 죽이고 베드로를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고 예수 믿는 사람들을 처참하게 죽일 당시에, 로마시에는 유대인으로서 예수 믿은 사람만도 2만명이 넘었다고 합니다. 유대인 아닌 사람 중에 예수를 믿은 숫자는 또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역사가들이 그들의 기록에 사용한 '거대한 군중'이라는 표현을 참고하면 그 수가 대단했던 것이 틀림없습니다.
 우리가 아는 바로는 예수를 믿는다고 경기장에 끌려 나간 성도들은 미친 개의 밥이 되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임을 당하고, 짐승의 가죽에 돌돌 말려 톱으로 잘림을 당했습니다. 심지어 네로는 궁전 뜰에 예수 믿는 사람들을 끌어다 소나무 막대기에 못을 박아 놓고 거기에 기름을 잔뜩 부어 횃불로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네로는 마차를 몰고 돌아다니며 "내가 만든 예술 작품을 보라"며 발광을 했던 것입니다. 당시 순교자의 수가 얼마인지는 역사가들도 모릅니다.
 당시 로마 교인들이 숨어 살던 카타콤에 들어가 본 분들은 아시겠지만 너무 넓어 그곳에 숨을 수 있는 수가 백만이 넘는다는 주장을 한 학자도 있다고 합니다. 그만큼 예수 믿는 사람들이 많이 생겼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바울이 모마 교회에서 거두고 싶어 한 열매였습니다.
 어떻게 로마교회가 그와 같은 넘치는 열매를 거둘 수 있었습니까? 그들이 그처럼 향기로운 순교의 제사를 하나님 앞에 드릴 수 있었던 이유가 어디에 있었습니까? 그것은 복음을 다시 듣고 구원의 감격과 능력을 회복했기 때문입니다.
 
 복음의 능력에 사로잡힌 자
 
 오늘 우리도 그렇게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은 한국 교회가 구원의 열매를 많이 맺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들만 예수 믿고 천당 오기를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바란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아무리 악한 자들이라 할지라도 멸망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무엇보다 먼저 복음을 다시 듣고 구원의 감격, 복음의 능력을 하루 속히 회복해야 합니다. 다윗이 간구한 것처럼 구원의 즐거움을 회복해야 합니다(시 51:12).
 저는 교회 증축 공사를 하고 있는 현장에 자주 가 보는데 노동자들은 그곳에서 하루 종일 일합니다. 그들이야말로 우리 나라의 보배입니다. 저는 그들을 볼 때마다 "저분들이 예수를 믿어야 할 텐데 어떻게 하면 전도할 수 있을까?" 하고 고심합니다. 현장 소장을 보고 예수 좀 믿으라고 한마디 했더니 "우리 집사람도 교회에 다니고 있어요. 그런데 목사님, 저같이 건축 현장에 나와서 일하는 사람은 예수 못 믿어요. 공사 현장에는 주일날도 없어요. 어떻게 예수 믿어요?" 라는 것이었습니다. 막노동 현장에서 제가 양복 입고 서서 "여러분,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십시오" 한다고 해서 그들이 들을 것도 아니고 식당으로 초대해서 어마어마하게 먹여 놓고는 "예수 믿으시오" 한다고 해서 들을 사람도 없습니다.
 그들을 구원하려면 믿음 좋은 사람들이 저런 막노동판에 들어가서 함께 일하고 생활해야 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다들 대학 나와서 높은 자리에만 앉아 있으면 안 됩니다. 우리는 사회 전반으로 골고루 진출해야 합니다. 각계각층의 사람들에게 파고들어 가 복음을 들고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을 입증하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함께 막노동하면서 전도할 수 있는 사람이 나와야 된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구원의 능력에 사로잡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열매를 드리기를 원하는 뜨거운 가슴이 우리에게 있다면, 우리는 전도하지 않고는 못 배깁니다. 어떤 초등학교 학생이 있었습니다. 너무 예수를 잘 믿습니다. 초등학교 학생이라고 깔보면 안 됩니다. 그들도 은혜받으면 놀랍습니다. 이 초등학교 학생이 은혜를 크게 받았습니다. 얼마나 예수를 잘 믿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의 아빠는 예수를 믿지 않았습니다. 그는 예수 믿고 구원의 감격을 가슴에 벅차게 느꼈기 때문에 "이 예수님, 나만 믿어서는 안 돼. 아빠도 믿어야 되고 엄마도 믿어야 돼!" 하는 견딜 수 없는 충동에 사로잡혀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 안 믿는 아버지를 보고 날마다 예수 믿자고 졸라댔습니다. 그 아빠는 그 아들이 그렇게 하는 것이 그저 귀엽기만 했습니다. "그래 그래. 너부터 먼저 믿어. 여유가 생기면 나도 믿을게. 너무 나를 괴롭히면 내가 오히려 부담스럽지 않니?" 이렇게 해서 적당히 달래 넘어가곤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가슴 아프게도 교통사고가 나서 그 아이가 죽고 말았습니다. 부모의 슬픔을 무엇으로도 달랠 수가 없었습니다. 아버지는 죽은 아들이 사용하던 방에 들어가 그 아이의 유품을 하나하나 만져 보았습니다. 옷도 만져 보고 읽던 책도 만져 보고 그러다가 노트 하나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일기장이었습니다. 그 일기장을 펴 본 아빠는 기절할 것 같이 놀라고 말았습니다. 죽기 며칠 전에 쓴 일기 내용인데 이런 기도문이 적혀 있었습니다. "하나님! 우리 아빠 꼭 예수 믿게 해 주세요. 하나님! 아빠가 예수 믿기 위해서 내가 죽어야 한다면 나는 죽기를 원합니다. 내가 죽어서라도 아빠가 예수 믿게 해 주세요."
 그가 그 글을 읽으며 받은 충격과 후회와 감동은 이루 헤아릴 수 없었습니다. "예수를 믿는 것이 이렇게 중요한 것인가? 생명 내어 놓고 내가 믿어야 할 일이었던가?" 드디어 그는 그 자리에서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게 되었습니다. 아들의 생명과 자기 구원을 바꾼 셈이 되었습니다. 그 사람이 누군지 아십니까? 지난 반세기 동안 세계 도처에서 수백만의 젊은이들을 그리스도 앞으로 인도하는 데 큰 몫을 담당하였던 대학생선교회(C.C.C.)의 국제 본부 부총재가 되는 사람입니다.
 구원의 감격, 복음의 능력을 회복하면 하나님께 열매를 드리고 싶은 마음이 가슴속에서부터 치솟아 올라 견디지 못합니다. 안 믿는 식구 보면 못 견디고, 안 믿는 이웃 보면 못 견딥니다. 우리 모두가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나는 복음의 능력이 식어 있지 않은가? 왜 그럴까? 내가 복음을 들은지가 너무 오래 되었어. 다 아는 것이요 귀가 아프게 들은 것 같지만 실은 예수의 이름, 예수의 십자가가 가진 복음의 능력, 성령의 능력을 잃어버리고 있었어. 내가 마음을 열고 복음을 귀담아들으며 감격한 일이 지난 수 년 동안 한 번도 없었어. 이것이 나를 무력하게 만들고 전도의 열매를 주님께 드리지 못하는 부끄러운 생활을 하게 만든 원인이었어. 그래 복음을 다시 듣자. 그리고 그 능력을 회복하자."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이제 어린아이 같은 심정으로 복음 앞에 나오지 않으시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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