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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그래도 남보다 선하다는 사람

by 【고동엽】 2022. 9.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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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옥한흠 목사님의 저서 로마서 강해 1권 <내가 얻은 황홀한 구원> 125쪽에 있는 글입니다.

 

 

7. 그래도 남보다 선하다는 사람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무론 누구든지 네가 핑계치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이런 일을 행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판단이 진리대로 되는 줄 우리가 아노라 이런 일을 행하는 자를 판단하고도 같은 일을 행하는 사람아 네가 하나님의 판단을 피할 줄로 생각하느냐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케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의 풍성함을 멸시하느뇨 다만 네 고집과 회개치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그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좇지 아니하고 불의를 좇는 자에게는 노와 분으로 하시리라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게 환난과 곤고가 있으리니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며 선을 행하는 각 사람에게는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있으리니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라 이는 하나님께서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하심이니라 무릇 율법 없이 범죄한 자는 또한 율법 없이 망하고 무릇 율법이 있고 범죄한 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으리라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송사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 곧 내 복음에 이른 바와 같이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시는 그 날이라 .  

 

로마서 2장 1~16절

 

 

 

 

 법률 용어로 '항소'라는 말이 있습니다.
 하급 법원의 결정이나 명령에 대해서 당사자가 복종할 수 없다고 생각할 때 상급 법원에 재차 판결을 요청하는 행위입니다.
 아무리 공정하게 재판을 해도 형을 받는 피고인의 입장에서는 억울한 데가 있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할 수만 있으면 다시 한 번 재판을 받아서 자신이 무죄한다는 것을 인정받거나 아니면 약간이라도 감형을 받았으면 하는 것이 대부분의 피고의 심정일 것입니다.
 
 남보다 선하다는 사람
 
 제가 이렇게 재판에 관한 이야기를 서두에 말씀 드리는 이유가 있습니다. 이미 우리가 살펴보았듯이 1장에서 사람이 얼마나 악한 죄인인가를 하나님께서는 세밀하게 죄목을 들어 가면서 증거해 주시고 이 죄들은 사형에 해당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유죄가 확정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판결이 못마땅해서 승복할 수 없다고 항소를 하는 자들이 우리가 읽은 2장에서 등장합니다. "내가 사형이라고요? 하나님 너무 심합니다." 하고는 하나님 앞에 뭔가 변명할 것을 들고 서 있습니다.
 공의로우신 하나님, 거룩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오죽이나 잘 아시겠습니까? 우리의 마음을 손바닥 보듯이 환하게 들여다보고 계시는 그분이 오죽 답답하시면 우리 보고 죄인이라고 하시겠습니까? 양심을 가진 사람이면 "주여, 나는 죽어 마땅한 죄인입니다" 하고 깨끗이 무릎을 꿇어야 할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구원을 얻겠습니까? 이 죄인에게 가르쳐 주옵소서" 하고 부르짖어야 바른 자세가 될 것입니다. 불행하게도 2장에 등장하는 자들은 그렇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1절 앞에 나오는 '그러므로'라는 말에 주의합시다. 여기에는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이 죽음에 해당하는 죄를 범한 죄인이라고 말씀하셨으니 더 다른 소리를 하지 말아라" 라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유구무언이어야 옳을 것입니다. 그러나 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다음에 어떤 부류의 사람이 나오고 있는지 보십시오. 남을 판단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이 누구일까요? 1절 이하의 내용을 검토해 보면 그들은 하나님이 자신들을 죄인이라고 하시는 데 불만을 품고 있는 자들로 보입니다. 아무리 하나님께서 세상 사람들을 정죄해도 자기만은 아니라고 하는 생각에서 무엇인가 은근히 자랑할 것을 들고 나오는 자들입니다.
 이것을 놓고 어떤 성경학자는 유대인을 말한다고 합니다. 틀린 말은 아닐 것입니다. 유대인 가운데도 스스로 선하다고 하는 자들이 수두룩하니 말입니다. 또 헬라인을 말한다는 견해도 있습니다. 이방인 가운데서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 안 하려는 배짱 좋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그 수를 셀 수 없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유대인과 헬라인을 다 포함해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라고 불렀다는 견해도 있습니다. 1절부터 16절까지의 내용을 유대인이나 헬라인 중 어느 선을 그어서 말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9절과 10절을 보면 '유대인에게도 헬라인에게도' 하고 양 편을 다 언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세상에서 자기가 죄인이라는 것을 수긍하려고 하지 않는 모든 사람들을 포괄적으로 다루고 있는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한 것 같습니다.
 사실 우리 주변에는 선한 자들이 적지 않습니다. 인간적인 눈으로 볼 때 참 선하다고 할 사람이 많습니다. 이런 자들을 향해서 무조건 죄인이라고 말하면 심기가 굉장히 불편할 것이 뻔합니다. 가만히 있기가 힘들 것입니다. 가슴에서 무언가 울컥 하고 나오는 것이 있겠지요. 이런 자들은 도덕적으로 통찰력이 매우 발달한 사람들입니다. 보통 사람보다 수준이 높아요. 그리고 어떤 이상을 추구하는 경향이 많습니다. "인생은 이렇게 살아야 해" 하고 나름대로 높은 이상을 정해 놓고 거기에 맞추어서 살아 보려고 하는 독특한 데가 있습니다.
 그들은 언동이 선하고 비교적 양심적임을 긍지로 여기는 사람들입니다. 주변으로부터 착하다는 칭찬도 받고 법이 없어도 살 수 있는 사람이라는 말도 자주 듣습니다. 어떤 때는 도덕군자라는 고상한 별명을 얻기도 합니다. 종종 일반 사람들이 감히 엄두를 못 내는 선한 일에 뛰어들어서 주변 사람들로부터 박수 갈채를 받는 일도 많이 있습니다. 이렇게 선하게 보이는 자들을 향해 죽을 죄인이라고 말하는 것은 사람의 인격을 모독하는 것처럼 보일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들은 한결같이 마음속에 "그래도 나는 남보다 선해" 하는 강한 긍지를 숨기고 있습니다.
 자신을 선하다고 여기는 사람은 죄 이야기를 해도 별로 놀라지 않습니다. 자기 이야기가 아니니까 그렇습니다. 자기는 별로 해당되지 않는 이야기로 생각합니다. 로마서 1장을 귀가 아프도록 읽어 주고 설교해도 눈에 띄는 반응을 별로 찾아볼 수 없습니다. "이 말씀에 해당하는 자들은 따로 있겠지" 하는 막연한 생각을 갖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서, 지옥에 대해서 아무리 목사가 힘을 주어 말을 해도 불안해하는 기색이 별로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자기 같은 사람은 그런 곳에 가지 않을 것이라고 은근히 믿는 구석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라디오를 통해 교통사고가 났다는 뉴스를 들으면서 고속도로를 정신없이 운전해 갈 때가 있습니다. 그때 무슨 생각을 합니까? "나는 괜찮겠지" 하는 막연한 생각입니다. 이와 같이 죄 이야기가 전부 남의 말로 들리니 죄인으로 정죄하시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 무릎을 꿇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바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이요 그래도 남보다 선하다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버티고 있는 사람들을 2장에서 하나님이 다루고 계신다는 것을 알고 들어가야 합니다. 왜 하나님께서 이렇게 뻔뻔스러운 자들을 포기하지 않으실까요?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구원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대로 내버려 두면 창녀나 세리가 받는 하나님의 심판을 똑같이 받는 불행한 사람들이 되어버리니까 또 한 번 기회를 주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으로 인도하시려는 것입니다. 우리 중에는 비록 예배 때 나와 앉았지만 이 말씀을 꼭 들어야 할 사람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남자들 가운데 많다고 생각합니다. 예배는 점잖게 나와서 드리지만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이 와 닿지를 앉아서 멍하게 앉아 있다가 가는 자들이 없잖아 있을 것입니다. 먼 발치에서 예배를 마치고 나가는 성도들의 표정을 본 적이 있는데, 한 시간 내내 죄 이야기만을 듣고 나가는데도 무표정한 얼굴로 나가는 형제들이 많은 것 같았습니다. 왜 그럴까요? 점잖아서요? 생각이 깊어서요? 그럴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아무리 죄 이야기 떠들어 봐라. 그래도 나는 선한 데가 있어" 하는 자부심 때문에 설교를 귓등으로 들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이야기가 아니라 남의 이야기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이런 답답한 형제들이 교회마다 참 많습니다. 만일 여러분 중에 "그래도 나는 남보다 선해" 하는 은근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형제가 있다면 자신이 바로 로마서 2장에 등장하는 장본인이라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령이 여러분의 마음을 열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이 진심으로 구원 얻기를 원하신다면 "그래도 나는 남보다 선해", '그래도' 하는 이 고집, '그래도' 하는 이 변명, '그래도 ' 하는 이 구실까지 뿌리가 싹 뽑혀야 합니다. 그때 비로소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 앞에 무릎을 꿇고 "주여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눈물을 흘릴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 '그래도'를 가지고 30년, 40년 예수 믿어 보세요. 그 결과가 어떠할 것 같습니까?
 "그래도 남보다 선하다"는 은근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는 여섯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모두가 좋지 못한 특징들이지만 자신이 행여 선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아닌가를 확인하기 위해서 반드시 검토해 보아야 합니다. 이 여섯 가지 가운데 하나라도 자신에게 해당하는 것이 있다면 '그래도' 하는 고집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고 회개해야 할 것입니다.
 
 스스로 선하다는 자의 특징
 
 남을 비판하기를 즐김
 첫째는 남을 비판하는 경향이 강하다는 것입니다. 벌써 바울은 1절에서 이 사람의 별명을 '남을 판단하는 사람'이라고 붙였습니다. 왜 '남을 비판하는 사람'이 별명이 되어버렸을까요? 자기가 은근히 선하다고 여기는 사람은 자기도 모르게 남을 비판하는 경향이 강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결점은 눈에 잘 안 들어오고 남의 약점이나 잘못은 항상 크게 보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사람을 가리켜서 형제의 눈 속에 있는 작은 티는 잘 보면서 자기 눈 속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는 기이한 사람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왜 은근히 남을 비판합니까? 자기가 그 사람보다는 선하다는 것을 내보이는 것입니다. 비판을 함으로 자기는 더 의롭다는 것을 과시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과 비교해서 자기는 다른 데가 있다는 것입니다. 즉 같지 않다는 우월감입니다.
 이런 점에서는 바리새인을 따라갈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들의 눈에는 예수님도 옳은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창녀, 세리 등 자기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비판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래서 싸잡아서 비판하는 일에 익숙해 있었습니다. 그들의 기도를 들어 보세요.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눅 18:11).
 
 하나님의 아들이 직접 이 세상에 오셔서 양심이 아프도록 죄를 지적해도 바리새인들이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은 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왜 그들을 그렇게 호되게 저주하셨는가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자신이 의롭고 선하다는 생각 자체가 하나님 앞에 죄가 됩니다. 비판이라는 옷, 남을 정죄하는 옷, 은근히 위선하는 옷, 교만한 옷을 가지고 겉을 요란하게 치장하고, 진짜 악한 것은 드러나지 않게 속에다 감추어 놓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가끔 보면 같은 직장에서 일하는 자기의 상관이나 동료 가운데 예수 믿는 사람이 있으면 매우 비판적인 시각을 가지고 보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교회의 장로나 집사라는 사실 때문입니다. "장로가 뭐 저래?" 라는 식으로 보는 것입니다. 물론 그들이 덕을 세우지 못하는 점도 있고 종종 잘못하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또 가끔은 억울한 욕을 먹는 때도 있을 것입니다.
 제가 여기서 말씀 드리고 싶은 것은 "예수 믿는 사람도 별 수 없구만. 나는 안 믿어도 저 사람보다는 나아" 하고 자기를 추켜올리는 심리는 매우 불쌍하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자기가 더 선하다는 이유때문에 자기보다 못하게 보이는 동료들을 탓하면서 예수 믿기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쩌다 교회를 다니게 되어도 죄의식이 거의 없습니다. 이런 자는 하나님의 복음을 들을 수 없는 불행한 사람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사람끼리 비교하면 조금 더 선한 사람이 있을 수 있는지 모르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의인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자기 죄에 둔감함
 두 번째의 특징은 자기가 범하는 죄에 대해서 둔감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무론 누구든지 네가 핑계치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롬 2:1).
 
 무슨 뜻입니까? 남을 판단하는 사람에게 똑같은 죄가 있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남을 판단하는 사람은 같은 일을 행하는 동일범이라는 것입니다. 누가 보기에 그렇다는 것입니까? 하나님 보시기에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판단이 진리대로 된다"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3절에 똑같은 말씀이 다시 반복되고 있습니다.
 
 "이런 일을 행하는 자를 판단하고도 같은 일을 행하는 사람아 네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줄로 생각하느냐."
 
 이와 같은 말씀을 비추어보면 남보다 선하다고 여기는 사람은 자기 죄에 대해서 매우 둔감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남의 죄는 드러나서 자꾸 비판을 하지만 자기는 어떤 점에서 잘못되어 있는가를 잘 보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심지어 똑같은 악을 범해도 자기의 잘못에 대해서는 굉장히 관대합니다.
 관용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둔감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죄인지를 모릅니다. 남의 죄는 드러났으나 자기 죄는 드러나지 않았으니 기고만장해서 남을 비판하는 자기가 똑같은 죄를 범하는 죄인이라는 것을 잘 모른다는 말입니다. 바리새인들을 보고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사람 앞에서 스스로 옳다 하는 자이나 너희 마음을 하나님께서 아시나니"(눅 16:15).
 
 하나님이 그들의 마음을 들여다보니 엉망이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 앞에 그 마음이 돈만 사랑하는 사람으로 드러났습니다. 돈만 사랑하니까 남몰래 힘 없는 과부의 재산을 삼켰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죄인 줄 몰랐습니다. 간음한 사람을 죽이라고 소리치면서 속으로 여인을 향해 음욕을 품는 자기 자신은 비판하지 않습니다. 형제끼리 싸운다고 욕하면서 자기가 미워하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대수롭지 않게 여깁니다. 자기 죄에 대해 그만큼 둔감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이런 사람은 교회를 천 년 만 년 다녀도 예수님의 십자가가 자기 십자가로 믿어지지 않습니다. 구원받을 필요를 별로 느낄 수 없습니다. 교회만 왔다 갔다 하는 것으로 족하다고 생각합니다. 답답할 만큼 영적으로 어두운 사람들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자기의 선을 자랑함
 세 번째 특징은 자신의 형통이나 행복이 자기가 선해서 얻은 복으로 착각하는 것입니다. 4절을 좀 주의해서 봅시다.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케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의 풍성함을 멸시하느뇨"
 
 무슨 뜻인지 쉽게 이해가 됩니까? 이 사람은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듬뿍 받아 왔습니다. 하나님의 용서하심을 받고 살았습니다. 또 용납하심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잘못이 있어도 하나님이 오래 참아 주셨습니다. 길이 참는다는 말은 죄를 짓는 즉시 보복하지 않는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세상을 살면서 힘든 줄을 모르고 살아 왔습니다. 다른 사람은 교통사고를 당해서 장애자가 되어도 자기에게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어떤 사람은 감옥을 들락거리는데 자기는 법망에 걸리지 않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은 암으로 일찍 죽는 것을 보는데 자기는 아직도 건강해서 심지어 병원에 가본 일조차 없을 정도입니다. 자녀들은 물론 다 잘 자라고 있습니다. 이렇게 형통하는 것을 보면 은근히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아세요? "사람이 죄를 짓고는 못 살지. 양심을 바로 써야지. 그래야 집안이 잘되고 하는 일이 복을 받는 거야." 이와 같은 그의 생각에는 '그래도 나는 남보다 선하다'는 자부심이 깔려 있는 것을 금방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 사람의 생각이 옳다고 할 수 있습니까? 4절을 다시 봅시다. 하나님께서 이 사람에게 불행한 일이 생기지 않도록 지금까지 내버려 두신 이유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케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형통은 그가 회개하기를 기다리는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자기가 남보다 선해서 얻은 분복으로 알고 있으니 얼마나 기가 막힙니까? 만일 끝까지 마음 고쳐 먹지 않고 그대로 있으면 구원에서 완전히 탈락되고 말 것입니다.
 우리 중에 스스로 착각에 빠진 자가 있을까 두렵습니다. 자기는 새벽 기도 한번 안 나가도 자녀들이 공부 잘하고 부부애가 유별나게 좋은데, 이웃에 사는 누구 누구는 새벽마다 교회에 나가 눈물 콧물 짜며 기도하는데도 아이들은 시험에 낙방만 하니 참 이해할 수 없는 일이라고 하면서 은근히 자기 집안 잘되는 것이 남보다 선해서 그렇다는 생각에 빠져 있지는 않은지 모르겠습니다. 믿음 좋다고 해도 별 볼 일 없더라 하고 교만해하지는 않는지요? 이유가 어디에 있든 간에 자기의 선을 자랑하고 그것으로 인해 만사가 잘된다는 생각은 잘못된 것임을 알아두어야 합니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을 멸시하는 죄가 있다고 경고하는 본문의 말씀을 귀담아 들어야 합니다.
 
 자기 선의 무가치함을 알지 못함
 네 번째 특징은 자기의 선이 하나님 앞에 얼마나 무가치한가를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래도 나는 남보다 선해"라고 믿고 있는 사람은 자기의 선이 하나님 앞에 얼마나 무가치하고 형편없는 것인지 모르고 있습니다. 그러면 선이 무엇입니까? 진짜 선이 무엇입니까?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 영생으로 하시고"(7절).
 
 이 본문을 잘 이해하십시오. "참고 선을 행한다"는 말을 귄위 있는 최근 번역에서는 "인내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면"이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선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그 대답이 7절에 이어서 나옵니다.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기 위해서입니다. 여기서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은 하나님이 예수를 믿는 자기 자녀에게 주겠다고 약속하신 하나님 나라의 모든 축복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축복이 지금 우리 앞에 기다리고 있기 때문에 이것을 얻기 위해서 우리는 선을 행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자기가 은근히 선하다고 자랑하는 사람은 그 선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인지를 검토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 선을 가진 사람은 하나도 없는 것 같습니다.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선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의 뜻과 일치하는 어떤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그 목적이 썩지 아니하는 존귀한 영적 축복을 얻는 데 있지 않고 세상에서 편하게 살 수 있는 무엇을 얻는 데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스스로 선하다고 하는 사람은 선이 아닌 것을 선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무 가치도 없는 걸레 조각 같은 것을 가지고 사람들이 선이라고 칭찬하는 것입니다. 그 속에는 더 악한 것들이 숨어 있는 줄 모르고 말입니다.
 1983년 미국에서 '올해의 아버지'라는 영광스러운 명예를 얻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코도조도보수라는 특이한 이름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 큰 나라에서 한 해에 한 사람을 뽑는 자리에 선발될 정도의 사람이면 얼마나 그 생활이 남 보기에 선하고 의로워 보였겠습니까? 그는 고아 18명을 입양해서 키우고 있었습니다. 18명이나 되는 남의 아이를 데려다 키우니 얼마나 선한 사람이고 의로운 사람입니까? 사람들이 칭찬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그 사람의 선은 하나님과 아무 관계가 없는 선이었습니다. 입양된 애가 자라서 14세, 15세의 사춘기를 갓 넘기면 한 사람씩 붙잡아서 성적 노리개로 삼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체포되었습니다.
 사람이 스스로 선하다 하는 것이 얼마나 가소로운 일인지 제가 극단적인 예를 들었습니다만, 그렇지 아니한 경우라 해도 별로 다를 바가 없습니다. 칼뱅이 이런 말을 했어요. "성경에 보면 우리의 선행, 이것도 항상 불결한 것이 많다. 따라서 하나님은 당연히 우리의 선행을 보고 좋아하시지 않고 불쾌하게 여기고 노하신다." 칼뱅이 정곡을 찌르는 말을 했습니다.
 잠언 16장 2절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행위가 자기 보기에는 모두 깨끗하여도 여호와는 심령을 감찰하시느니라"(잠 16:2).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의 눈으로는 인간의 마음에서 선한 것을 찾기가 불가능하다는 말씀입니다.
 한국 사람들에게는 은근히 불교식 선(善) 개념이 밑바닥에 깔려 있습니다. 석가가 말했다고 하는 법구경에는 "사람의 본성이 선한 것이 마치 물이 아래로 내려가는 것과 같다. 사람치고 선하지 않은 자가 없고 물치고 아래로 내려가지 않는 물이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와 같은 사상에 물이 들어 수백년을 살았으니 자기가 악하다고 생각하겠습니까?
 제가 잘 아는 목사님이 미국에 있는 큰 식당에 가서 식사를 한 일이 있었습니다. 호화로운 테이블 위에 촛불이 켜 있고 그 위에는 분홍색의 유리잔 같은 것이 씌워져 있었습니다. 자연히 분위기가 매우 낭만적으로 느껴졌습니다. 목사님이 반농담으로 웨이터한테 "아니, 좀 밝은 데서 식사를 하게 하지, 왜 이렇게 어두컴컴하게 만듭니까?" 하고 물었답니다. 웨이터는 어깨를 으쓱하면서 "아무리 컴컴해도 음식을 코로 가져가는 사람은 없어요. 그리고 불이 어두우면 모두가 미인으로 보이지요"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사실입니다. 컴컴한 데서는 다 미인처럼 보이듯이 자기의 컴컴한 마음속에서 보면 전부가 선한 것처럼 보이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빛 되신 하나님 앞에서 나와서 보면 자기가 자랑하던 선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스펄전이라는 위대한 설교가가 재미있는 말을 했어요. "인간의 선이란 무엇이냐? 그것은 자기 몸을 쭉 뻗고 눕기에는 짧은 침대와 같고 자기 몸을 덮기에는 좁은 이불과 같다." 우리 중에 자신이 그래도 선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분이 계시면 제발 더 이상 속지 말고 진실 앞에 나오기를 바랍니다.
 
 자기 양심을 속임
 다섯 번째 특징은 자기 양심을 속이는 것입니다.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14절).
 
 이방인은 유대인이 가진 율법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그것이 무엇인지 잘 모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방인도 살인을 하면 죄책감이 일어납니다. 이런 경우 가책을 받은 자기 자신이 율법의 구실을 하게 됩니다. 그 사람 안에 양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송사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15절).
 
 우리의 양심은 죄로 부패해서 가다 말다 하는 시계와 비슷하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선과 악의 기준을 논할 수 있는 유일한 기능이라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율법을 모르는 자라도 죄를 지으면 마음속에서 고통이 일어나고 서로 송사하고 서로 변명하는 내적 갈등이 일어납니다.
 그러므로 자기를 남보다 선하다고 여기는 사람은 양심의 고소를 심각하게 여기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만일 그가 정말 양심적이라면 스스로 선하다는 망상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유대인은 율법으로 심판을 받습니다. 반면에 성경을 모르는 사람은 자기 양심으로 심판을 받는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가면 한 사람도 이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유대인의 심판 기준은 율법입니다. 그들은 율법을 알고 죄를 지은 자로 취급됩니다. 이방인은 양심의 법으로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율법이 없었다고 해서 핑계를 대지 못합니다.
 죄는 법이 있으면 나타나고 없으면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나타나지 않는다고 해서 죄가 아니라는 말은 성립이 안 됩니다. 세상에서는 몰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양심을 속일 수 없으므로 불가능합니다. 그러면 교회 다니는 우리는 어떻습니까? 율법도 알고 양심도 가지고 있습니다. 둘 중 어느 것을 속일 수 없는 처지에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선하다고 생각한다면 선과 멀어도 한참 멀리 떨어진 사람으로밖에 볼 수 없습니다. 자기 양심을 속이지 않는 한 그럴 수 없을 것입니다.
 
 심판의 무서움을 알지 못함
 여섯 번째 특징은 하나님의 심판이 얼마나 준엄하는가를 모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무엇입니까?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그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5,6절).
 
 하나님의 심판이 얼마나 무서운지 아십니까? 그것은 아주 소름끼치는 일입니다. 우리가 행한 대로 보응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하시기 때문입니다(11절). 또 있습니다. 유대인과 헬라인을 구별하지 아니하는 심판, 즉 편애하지 아니하는 공정한 심판이기 때문입니다. 끝으로 그 심판은 아무리 작은 악이라도 다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곧 내 복음에 이른 바와 같이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시는 그날이라"(16절).
 
 그러므로 누구든지 자신이 남보다 선하다는 교만을 가질 때에는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 매우 무식하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지금까지 스스로 선하다는 자의 여섯 가지 특징을 이야기했습니다. 다시 정리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1. 비판하기를 좋아한다, 2. 자기 죄에 대해 둔감하다, 3. 자기의 형통이 자기 선의 대가인 줄로 착각한다, 4. 자기의 선이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 가치가 없다는 것을 모른다, 5. 자기 양심을 은근히 속이고 산다, 6. 하나님의 심판이 얼마나 무섭고 준엄한지를 모른다. 이상 여섯 가지라고 했습니다.
 자신이 남보다 선하다는 교만은 구원받는 데 아주 큰 장애 요인입니다. 그 교만을 가지고는 아무도 십자가 앞으로 가까이 오지 못합니다. 예수님이 나를 위해 죽으셨다는 복음을 아무리 들어도 마음의 벽을 치고 공허하게 흩어지는 메아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신앙생활을 수십 년 해도 그 마음은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탕자의 죄가 있는가 하면 맏아들의 죄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탕자는 나가서 못된 짓을 다 하고 돌아왔어요. 잘못한 줄 알고 있기 때문에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자기는 아들이 될 자격이 없다고 고백했습니다. 놀랍게도 이런 아들을 향해 아버지는 죄인이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맏아들은 어떠했습니까? 그는 평소 아버지께 순종을 잘했습니다. 자연히 그 마음속에는 "나는 아버지 말 안 들은 것 없어. 나는 동생하고 같지 않아"라는 은근한 교만함이 있었습니다. 결국 맏아들은 아버지의 마음을 더 상하게 하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잔치에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죽은 자가 살아서 돌아온 기쁨을 나눌 수 없었습니다. 자기의 선을 내세우는 자는 그만한 대가를 기대하기 때문에 불만이 떠나지 않습니다. 그 마음에 구원의 감격이 차지할 자리가 나지를 않습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들이여, 당신의 선이 무엇입니까? 이 시간 포기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앞으로 가도 뒤로 가도 길이 없고, 우로 보아도 좌로 보아도 절망뿐인 죄인임을 하나님께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이와 같은 진실한 고백이 당신의 중심에서 나올 때에 비로소 피 묻은 예수님의 손이 당신을 끌어올리십니다. 십자가를 보게 합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저 하늘나라의 영광을 바라보게 합니다. "그래도 나는 남보다 선해"라는 생각이 당신으로 하여금 걸려 넘어지게 하는 걸림돌이 되지 않도록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도 선한 자가 없습니다. 이것이 진리입니다. 이 진리 앞에 아멘 하는 자만이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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