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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유대인이라 칭하는 네가

by 【고동엽】 2022. 9.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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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옥한흠 목사님의 저서 로마서 강해 1권 <내가 얻은 황홀한 구원> 145쪽에 있는 글입니다

 

8. 유대인이라 칭하는 네가

 

 

 유대인이라 칭하는 네가 율법을 의지하며 하나님을 자랑하며 율법의 교훈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알고 지극히 선한 것을 좋게 여기며 네가 율법에 있는 지식과 진리의 규모를 가진 자로서 소경의 길을 인도하는 자요 어두움에 있는 자의 빛이요 어리석은 자의 훈도요 어린 아이의 선생이라고 스스로 믿으니 그러면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네가 네 자신을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도적질 말라 반포하는 네가 도적질하느냐 간음하지 말라 말하는 네가 간음하느냐 우상을 가증히 여기는 네가 신전 물건을 도적질하느냐 율법을 자랑하는 네가 율법을 범하므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느냐 기록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로 인하여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는도다 네가 율법을 행한즉 할례가 유익하나 만일 율법을 범한즉 네 할례가 무할례가 되었느니라 그런즉 무할례자가 율법의 제도를 지키면 그 무할례를 할례와 같이 여길 것이 아니냐 또한 본래 무할례자가 율법을 온전히 지키면 의문과 할례를 가지고 율법을 범하는 너를 판단치 아니하겠느냐 대저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라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신령에 있고 의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 그런즉 유대인의 나음이 무엇이며 할례의 유익이 무엇이뇨 범사에 많으니 첫째는 저희가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음이니라 어떤 자들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어찌하리요 그 믿지 아니함이 하나님의 미쁘심을 폐하겠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지어다 기록된 바 주께서 주의 말씀에 의롭다 함을 얻으시고 판단받으실 때에 이기려 하심이라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우리 불의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나게 하면 무슨 말 하리요 내가 사람의 말하는 대로 말하노니 진노를 내리시는 하나님이 불의하시냐 결코 그렇지 아니하니라 만일 그러하면 하나님께서 어찌 세상을 심판하시리요 그러나 나의 거짓말로 하나님의 참되심이 더 풍성하여 그의 영광이 되었으면 어찌 나도 죄인처럼 심판을 받으리요 또는 그러면 선을 이루기 위하여 악을 행하자 하지 않겠느냐 어떤 이들이 이렇게 비방하여 우리가 이런 말을 한다고 하니 저희가 정죄받는 것이 옳으니라.  

 

로마서 2장 17절~3장 8절

 

 

 

 

 우리가 배우고 있는 로마서 1, 2장의 흐름을 다시 한 번 정리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진노를 피하고 심판을 면할 수 있는 자는 세상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마치 칼로 쪼개듯이 명확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 모두는 우상 숭배자요, 각종 불의를 행하는 자요, 그래도 남보다는 선하다고 하는 교만을 가진 자들이라고 정죄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 이렇게 말씀하시는데 감히 "아니오" 하고 대들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런데 놀랍게도 이 말씀에 수긍하지 않는 일련의 무리가 있습니다. 세상 사람이 다 죄인일지 모르나 자기만은 아니라고 고집스럽게 버티고 있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이 시간 우리가 읽은 말씀에 나오는 유대인입니다.
 
 유대인의 특권 의식
 
 '유대인'은 이스라엘 백성을 가리킵니다. 그들은 과거에 적국인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서 70~80년간 노예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하나님의 은혜로 해방되어 고국으로 돌아온 뒤부터 유대인이라는 호칭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유대인이라는 말은 '칭찬' 또는 '찬송'이라는 매우 아름다운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사실 이 이름이 뜻하는 바에 못지않게 유대인은 세계에서 가장 자랑스러운 혈통을 가진 민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가졌던 우월감은 정말 대단했습니다. 오죽하면 자기 민족이 아닌 이방 사람들을 '지옥불의 땔감' 정도로 여겼을까요? 그만큼 그들은 위대한 민족임을 과시했고 자부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많은 민족 가운데서 유일하게 이스라엘 민족을 선택하셨습니다. 또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메시아로 보내 주시겠다는 것과 그분을 통해서 온 세계가 복을 받도록 하시겠다고 언약을 하셨습니다. 이 정도로 하나님께 보장을 받은 백성이라면 대단한 축복을 받은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 고로 그들이 커다란 긍지와 자부심을 가질 만도 합니다. 그러나 우월감이 지나친 나머지 그들은 잘못된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다 멸망해도 자기 민족만은 구원받는다는 어처구니 없는 교만에 빠진 것입니다. 우리가 펴놓은 말씀을 보면 그들이 이방인들보다도 더 악한 죄를 가지고 있다고 지적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시간 유대인의 죄가 무엇이며 왜 그들이 하나님 앞에서 무서운 죄인이 되었는가를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그들이 지닌 문제점들을 검토해 봄으로써 그들을 통해 반사되는 우리 자신의 모습을 다시 한 번 발견하고 치료받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먼저 17절부터 24절에 나타난 유대인의 치명적인 문제점이 무엇인지 찾아보기로 하겠습니다.
 
 "유대인이라 칭하는 네가 율법을 의지하며 하나님을 자랑하며"(17절).
 
 이 말씀은 세밀하게 읽으면서 뜻을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유대인이라 칭하는 네가.' 이것은 유대인의 긍지를 꼬집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유대인이라고 우쭐대는 자네 말이야" 라고 돌려서 말할 수 있습니다. 그들이 가진 좋지 못한 특권 의식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또 '율법을 의지하며', 이 말씀은 율법에 기댄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보호를 받는, 가장 복된 민족이라는 사실을 과시하기 위해, 필요하다고 생각되면 어느 때고 율법을 들고 나오는 태도를 지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자랑하며', 이 말씀은 하나님은 오직 유대인만의 하나님이라고 자부하는 그들의 독선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러니 그들이 얼마나 하나님을 자랑했겠습니까? 유대인들이 하얀 모자를 쓰고 다니는 것을 보신 적이 있나요? 지름이 약 20cm 정도 되는 빵모자인데 회당에 예배드리러 갈 때는 물론, 심지어 전쟁터에 나갈 때도 철모 밑에 받쳐 쓰고 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여호와가 오직 유대 민족만의 하나님이라는 것을 내보이는 행동 중의 하나입니다. 그만큼 그들은 하나님에 대해서 굉장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율법의 교훈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알고"(18절).
 
 여기서 율법은 특히 십계명을 가리킵니다. 유대인은 자녀를 낳으면 어려서부터 십계명을 철저히 가르친다고 합니다. 어른이 되어 계명을 범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처럼 그들은 십계명을 배우면서 자랐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무엇을 원하시는가를 아는 데 남다른 영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지극히 선한 것을 좋게 여기고" 라는 말씀은 선한 것이 무엇인가를 분별할 수 있는 식견이 유대인에게 있다는 말입니다.
 
 "네가 율법에 있는 지식과 진리의 규모를 가진 자로서"(19절).
 
 율법에 대한 해박한 지식 때문에 진리가 무엇인지 잘 파악하고 그것을 실제적인 생활에 적용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렇게 진리를 꿰뚫어 볼 수 있는 민족이라면 얼마나 대단한 경지에 이른 사람들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유대인에게만 율법을 주셨고 그 율법을 배울 수 있는 특권을 주셨습니다.
 
 "그런즉 유대인의 나음이 무엇이며 할례의 유익이 무엇이뇨 범사에 많으니 첫째는 저희가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음이니라"(롬 3:1, 2).
 
 유대인에게 특별히 우월한 점이 있다면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굉장한 특권입니다.
 신명기 4장 6절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율법을 소유한 것 때문에 지혜로운 민족이 될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지켜 행하라 그리함은 열국 앞에 너희의 지혜요 너희의 지식이라 그들이 이 모든 규례를 듣고 이르기를 이 큰 나라 사람은 과연 지혜와 지식이 있는 백성이로다 하리라."
 
 유대인의 죄악상
 
 그만큼 유대인은 율법으로 인해서 하나님 앞에 받은 은혜가 컸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컸던 만큼 유대인의 우월 의식 또한 대단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점차 자기 교만에 빠져드는 함정이 되고 말았습니다.
 
 "소경의 길을 인도하는 자요 어두움에 있는 자의 빛이요 어리석은 자의 훈도요 어린아이의 선생이라고 스스로 믿으니"(19, 20절).
 
 여기서 소경, 어두움에 있는 자, 어리석은 자, 어린아이는 모두 동일한 의미를 갖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에서 유대인이 율법을 갖지 못한 이방 사람들을 얼마나 깔보고 있었는가를 엿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율법을 갖지 못한 모든 세상 사람들을 위한 선생으로 자처했습니다. 물론 그들이 스스로 이방인들을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한 것은 잘못이 없습니다. 율법을 가진 민족으로서 당연히 생각할 수 있는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유대인에게 있어서 문제점이 무엇입니까? 남을 가르치기를 원하면 자기부터 먼저 순종하고 살아야 하는데 불행하게도 그렇게 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다음 말씀을 주목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네가 네 자신을 가르치지 아니하느냐"(21절).
 
 얼마나 무섭고 날카로운 책망입니까? 하나님은 나무라실 때 밑도 끝도 없이 말씀하지 않습니다. 구체적으로 증거를 들이대며 나무라십니다. 그들이 왜 이런 책망을 받아야 하는지를 사례를 들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도적질 말라 반포하는 네가 도적질 하느냐"(21절).
 
 여기서 반포한다는 말은 큰 소리로 떠든다는 뜻이요, 도적질하는 것은 제8계명을 지키지 않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그들은 도적질이 제8계명에 저촉되는 줄 잘 알면서 겁 없이 남의 것을 훔쳤던 것입니다. 저는 유대인들이 어떤 도적질을 했는지 잘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상식적으로 아는 것이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지난 수세기 동안 고리대금업으로 악명을 떨쳤던 민족입니다. 그들의 상술과 금전욕은 정말 지독해서 인정사정없이 재물을 긁어 모으는 것으로 정평이 나 있습니다. 세익스피어가 쓴 <베니스의 상인>에 나오는 샤일록 같은 인물이 바로 좋은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유대인은 하나님 앞에 서 직접, 간접으로 도적질을 자행한 사람으로 취급될 수 있습니다.
 다음에 두 번째 사례가 나옵니다.
 
 "간음하지 말라 말하는 네가 간음하느냐"(22절).
 
 저는 유대인이 성적으로 얼마나 많은 죄를 범했는지 잘 모릅니다. 그러나 유대 랍비들이 성적 범죄로 물의를 일으킨 예가 여러 기록에 남아 있습니다. 구약성경에는 유대인들이 우상 숭배를 하면서 성적으로 얼마나 타락했는지를 보여 주는 곳이 많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간음죄는 제7계명을 범하는 것이라고 남을 가르치면서 그들 자신은 은밀한 방법으로 그 계명을 어겼던 것입니다. 그리고 또 있습니다.
 
 "우상을 가증히 여기는 네가 신전 물건을 도덕질하느냐"(22절).
 
 인류 역사상 유대인들만큼  우상 숭배에 천부적인 소질을 가졌던 사람들도 드문 것 같습니다. 그들은 평소에 하나님을 잘 섬기다가도 조금만 여유가 생기면 우상 쪽으로 눈길을 돌렸습니다. 이것이 구약에 기록되어 있는 유대 민족의 종교 역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미 잘 아는 바와 같이 유대 민족은 우상 숭배로 인하여 하나님 앞에 무서운 형벌을 받아서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그곳에서 70~80년간 엄청난 고난을 겪으며 연단을 받았습니다. 그 후 그들이 해방되어 귀환했던 주전 538년부터 시작하여 바울이 로마서를 기록하던 당시까지 약 600년 동안 한 번도 우상 숭배를 한 일이 없었습니다.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이것이 본문에서 유대인이 우상을 가증히 여겼다고 인정하는 이유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표리부동한 태도를 보였습니다. 우상 숭배는 멸시하였지만 돈을 벌 수 있을 때는 우상을 훔쳐서 팔아먹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직접 우상 숭배는 하지 않았지만 이방인들에게 우상 숭배에 필요한 물건을 팔아서 돈벌이 하는 데는 열을 올렸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니까 유대인들은 돈을 벌 수 있어서 좋았고 이방인들은 우상 섬기는 데 필요한 것들을 싸게 살 수 있어서 좋았던 것입니다. 훔쳐서 파는 장물은 아무래도 값이 떨어지기 마련이니까요. 어떻게 보면 누이 좋고 매부 좋다는 식이 된 것입니다.
 그들이 율법을 몰라서 그런 죄를 범했나요? 차라리 몰라서 그랬다면 변명의 여지가 있었을 것입니다. 알면서 훔치고, 알면서 남을 죄 짓게 만들었으니 그죄를 피할 수가 없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나오는 도적질, 간음, 우상 물건을 훔쳐 팔아 먹는 것 등은 몇 가지 예를 든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 외에도 그들은 온갖 가증스런 죄악을 거침없이 자행했습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습니까?
 
 "율법을 자랑하는 네가 율법을 범함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느냐 기록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로 인하여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는도다"(23, 24절).
 
 그들의 언행을 보고 욕을 안 할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들이 욕을 먹는다는 것은 곧 하나님을 욕 먹게 하는 것이 되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유대인은 입만 벙긋하면 하나님이니 율법이니 하고 늘어놓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그들의 죄를 한 마디로 말하면 종교적 위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위선은 겉으로만 착한 척하고 언행이 일치하지 않는 것을 가리킵니다. 입으로는 거룩한 말을 늘어놓지만 행동은 거룩하지 못한 것입니다. 요즘 같이 악한 세상에서 도적질, 간음, 우상 숭배 따위는 흔히 볼 수 있는 죄입니다. 우리도 자칫 잘못하면 범할 가능성이 많은 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동일한 죄라도 유대인이 범할 때는 그 죄가 더 무겁다는 사실입니다. 그 이유가 궁금하지 않습니까? 대략 세 가지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 첫째 이유로 나쁜 줄 뻔히 알면서도 죄를 범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세리와 창기의 죄보다 바리새인의 죄가 더 크고, 불신자의 죄보다도 신자의 죄가 더 크며, 이방인의 죄보다 유대인의 죄가 더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둘째 이유로는 표리부동한 행동을 하기 때문입니다. 입으로는 거룩을 외치지만 가증스러운 죄를 함부로 행한다면 이것은 하나님 앞에 무서운 죄가 됩니다.
 
 "저희는 말만 하고 행치 아니하며"(마 23:3).
 
 예수님은 이런 이중성을 꼬집어서 꾸짖으시고 이것을 회칠한 무덤에 비유하셨습니다. 겉모양은 깨끗해 보이지만 그 속에는 온갖 더러운 것이 가득 차 있다는 말입니다. 표리부동한 행동 때문에 유대인의 죄가 더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셋째 이유로는 하나님을 욕되게 하기 때문입니다. 이방인이 죄를 범하면 하나님께 욕이 돌아가지 않습니다. 그러나 유대인이 죄를 범하면 결과적으로 하나님께 욕이 돌아가게 됩니다. 그러므로 유대인의 죄가 더 크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유대인의 세 가지 문제
 
 순종이 따르지 않는 믿음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는 지금 유대인의 죄에 대해서 살펴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의 죄가 우리와 아무 상관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유대인이 섬기는 하나님을 우리도 섬깁니다. 유대인이 배우고 실천하려는 율법을 우리도 배웁니다. 그러므로 유대인의 문제는 남의 문제가 아닙니다. 바로 우리 자신의 문제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알고 거룩한 말을 많이 합니다. 그러나 나쁜 줄 알면서도 죄를 범할 때가 있습니다.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못할 때도 많습니다. 예수 안 믿는 사람들 앞에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잘못을 범할 수 있는 가능성이 우리 모두에게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불신자의 범죄보다 신자의 죄가 더 크게 취급될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도 반드시 명심해야 합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말씀이 있습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 7:21).
 
 이것은 매우 엄숙한 경고입니다. 순종이 따르지 않는 믿음을 가지고는 천국에 들어올 수 없다는 경고입니다. 이 말씀의 전후를 잘 읽어 보십시오. 선지자 노릇을 하는 아주 귀한 직분을 가진 사람이라도 위선자는 천국에 못 들어온다고 합니다. 귀신을 쫓아내고, 권능을 베푸는 특별한 은사를 받은 사람도 위선적이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올 수 없다고 합니다.
 성직을 가졌다고 해서 위선적이지 않나요? 저는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유대 민족은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난 우월성을 갖고 있다는 것 때문에 위선자가 될 소지가 더 많았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도 교회 안에서 인정받는 직분을 가졌다는 것 때문에 오히려 더 위선자가 될 수 있는 위험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미국에서 TV 방송 설교로 유명한 어떤 목사가 있었습니다. 그는 TV 설교 인기 순위에서 1,2위를 마크할 정도로 명성이 높았던 목사였습니다. 많은 사람이 그 목사를 통해서 예수를 영접했고, 육신의 병이 치유되기도 했고, 또 여러 가지 인생 문제를 해결받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목사가 창녀와 관계를 가진 사실이 발각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방송 설교를 중단했습니다. 그러나 약 반 년 정도 지난 뒤에 그는 다시 TV에 모습을 드러내었습니다. 자기가 죄를 지어보니까 죄를 짓고 사는 사람이 얼마나 불쌍한지 복음을 전하지 아니할 수가 없어서 다시 출연하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TV에서 다시 활동을 시작했는데 최근에 또 창녀와 관계를 맺은 것이 발각되었습니다.
 성직자라고 해서 위선적이지 않습니까? 능력이 많은 사람이라고 해서 위선적이지 않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을 많이 아는 사람일수록 위선적이기 쉽고, 직분이 높은 사람일수록 위선적이기 쉽습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염두에 두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중요한 사실 한 가지를 반드시 명심해야 합니다. 순종이 따르지 않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면 행위 구원을 강조하는 모순에 빠지지 않느냐고 이의를 제기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오해한 것입니다. 예수 믿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손에 들고 읽을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축복인지 모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율법을 받은 것과 다름없는 축복을 얻은 것입니다. 이것은 정말 큰 은혜입니다.
 그렇다면 순종은 무엇입니까? 나 같은 죄인을 구원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 고마워서 그 은혜에 보답하려고 애쓰는 태도를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순종은 은혜받은 자의 자연스러운 반응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믿는 자는 반드시 순종하게 되어 있습니다. 참믿음은 순종을 통해서 그 진가를 발휘하게 됩니다.
 우리 중에 하나님께 순종하지 못하는 자기 자신을 놓고 고민하고 있는 분이 있습니까? 그러면 당신에게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을 좀 안다는 것으로 거드름을 피우지 마십시오. 반드시 행동이 뒷받침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위선자가 되고 맙니다.
 
 종교적 형식주의
 이제 유대인의 두 번째 문제점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25절부터 29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유대인들이 끔찍이 귀하게 여기는 할례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우리는 창세기 17장에서 하나님이 유대 민족의 조상인 아브라함과 언약을 하시는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그 언약의 핵심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너는 열국의 아비가 되리라'는 약속과 '나는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는 약속입니다. 유대 민족이 택함을 받은 동시에 하나님은 유대 민족의 주권자가 되시고 보호자가 되시며 축복자가 되신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할례는 하나님이 약속하신 축복을 받을 자격증을 얻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언약의 후손임을 증명하는 표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자손들은 태어난 지 8일 만에 꼭 할례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언약에 동참할 수 있는 권리를 인정받았다는 점에서 할례를 매우 자랑스럽게 여깁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할례를 너무 귀하게 여긴 나머지 매우 잘못된 착각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할례만 받으면 자동적으로 구원받는 것처럼 오해를 했던 것입니다. 할례를 구원의 수단으로 간주한 것입니다. 그들이 쓴 글 중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유대인은 하나님 앞에서 개인 자격으로 심판을 받지 않는다. 국가적으로 민족적으로 구원의 약속을 받았기 때문에 개인은 자동적으로 그 구원에 포함된다. 할례만 있으면 비록 죄인이라도, 순종치 않아도 아브라함의 혈통을 타고난 자손들은 천국을 상속받게 된다."
 이 얼마나 비약적인 논리입니까? 할례라는 형식만 있으면 구원 문제는 자동적으로 해결됩니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유대인의 문제점이 바로 여기에 있었습니다. 그들은 종교적 형식주의에 빠졌던 것입니다. 우리는 25절에서 29절까지의 내용을 간단하게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첫째, 순종 없는 할례는 무효가 된다는 것입니다.
 
 "네가 율법을 행한즉 할례가 유익하나 만일 율법을 범한즉 네 할례가 무할례가 되었느니라"(25절).
 
 아무리 할례를 자랑스럽게 여겨도 순종이 따라오지 않으면 그 할례는 무효라는 것입니다.
 둘째, 할례 없는 순종이 유효하다는 것을 가르칩니다.
 
 "그런즉 무할례자가 율법의 제도를 지키면 그 무할례를 할례와 같이 여길 것이 아니냐"(26절).
 
 할례받지 않은 사람이라도 하나님의 법을 순종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면 오히려 그 사람은 할례받은 사람보다 훨씬 낫다고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27절에 나오는 "의문"이라는 말은 글로 씌어진 율법책을 의미합니다. 율법과 할례가 있어도 순종하지 않는 유대인보다 율법책도 없고 할례도 없이 순종하는 이방인이 하나님 보시기에 의인이라는 것입니다.
 셋째, 진짜 할례는 몸에다 표를 남기는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마음이 변화하는 데 있다고 가르칩니다.
 
 "이면적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29절).
 
 이면적 유대인, 즉 영적으로 할례받은 사람이 진짜 유대인이지, 몸에 할례를 받았다고 해서 진짜 유대인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성령을 통하여 마음이 할례를 받아 새사람이 된 자라야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을 받을 수 있습니다. 몸에다 할례 자국만 남겼다고 해서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 할례받은 사람이 순종하지않는 것은 큰 모순입니다. 할례는 하나님의 언약에 동참하는 증표이기 때문입니다. 그 언약에서 하나님은 유대인의 주권자가 되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할례받은 사람은 하나님을 왕으로, 주인으로, 절대 권력자로 모셔야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순종하겠다는 것을 전제합니다. 할례는 하나님 앞에 절대 복종을 서약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내가 할례를 받는 각 사람에게 다시 증거하노니 그는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가진 자라"(갈 5:3).
 
 할례받으면 율법에 순종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런대 유대인들은 순종의 책임을 다하지 않았습니다. 할례를 형식이라고 한다면 순종은 내용입니다. 형식과 내용을 함께 갖추는 것이 더없이 좋지만 그것이 여의치 않다면  내용을 취하는 편이 바람직합니다. 바꾸어 말한다면 할례를 포기하고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유대인에게는 내용은 없어지고 형식만 남았으니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큰 죄가 된 것입니다.
 어떤 신학자는 할례를 '사인(sign)'에 비유했습니다. 사인이 무엇인지 우리는 잘 압니다. 특별히 값이 나가는 진품일 때 그 물건의 가치를 인정할 수 있도록 사인을 남기거나 도자을 찍은 증서를 동봉합니다. 지난번에 우리나라에서 가짜 악기 사건이 발생한 적이 있습니다. 저는 바이올린에 대해서 잘 모르지만 17, 18세기에 이태리에서 생산되던 불후의 진품은 이제 나오지 않는다고 합니다. 아마티, 스트라디바리, 과르네리 같은 바이올린은 굉장한 고가품으로 보통 사람은 구입하기가 어렵다고 합니다. 그러한 진품은 반드시 사인이 있기 마련입니다. 사인이 있더라도 내용물이 가짜일 경우에는 그 진품의 가치는 인정될 수 없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할례라는 형식이 유효하려면 순종이라는 내용이 반드시 뒷받침되어야 합니다. 유대인에게 이것이 문제가 된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이 형식주의는 굉장히 위험한 함정입니다. 결코 유대인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교회를 오래 다신 분 중에 신앙생활을 타성으로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습관적으로 교회에 나와서 예배드리고 또 기도를 건성으로 드리는 것에 익숙해진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자신의 마음을 드리지 않는 사람은 형식적인 신자입니다. 이런 사람은 비행기에서 낙하산 대신에 시멘트 포대를 어깨에 걸치고 뛰어내리는 사람과 같다고 누군가가 말했습니다. 자살이나 다름이 없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이 형식주의를 경계해야 합니다.
 
 죄의 정당화
 세 번째로 유대인이 가지고 있던 문제점이 무엇인지 살펴보겠습니다. 3장 3절부터 8절에 나타나 있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이 본문은 이해하기 어려운 성경 말씀 중의 하나로 꼽힙니다. 이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궤변을 기록한 것이어서 우리가 이해하기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 위에서 본 바와 같이 바울은 유대인들을 향하여 위선자요, 형식주의자요, 구원받을 수 없는 죄인이라고 혹독하게 비판을 했습니다.
 바울은 유대인들이 자기 말을 듣고 절대로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머리 잘 돌아가기로 유명한 그들이 반드시 이런저런 논리를 펴면서 나올 것이라는 것을 미리 짐작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선수를 쳐서 그들의 입을 막으려고 본문의 말씀을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유대인 중 어떤 사람이 바울에게 이렇게 질문합니다. "당신 말대로 하나님의 율법을 순종하지 않아서 구원받지 못한다면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와 약속한 언약을 일방적으로 깨뜨리는 것이나 무엇이 다릅니까? 할례를 받으라고 할 때는 언제고 우리를 버리신다는 말입니까? 그런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여기에 대해서 바울은 다음과 같이 대답합니다. "하나님을 신뢰할 수 없다니 무슨 말입니까? 당신이 순종하지 못한 죄 때문에 하나님이 당신을 버리신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증거가 됩니다. 죄를 적당히 봐주는 하나님을 믿을 수 있겠소? 말도 안 됩니다. 다윗이 말하기를 하나님의 말씀은 어느 것이나 의롭지 않은 것이 없고 하나님의 판단은 어느 것이나 옳지 않은 것이 없다고 하지 않았소? 하나님은 항상 의로우신 분이오."
 그러자 유대인이 또 질문을 합니다. "좋소, 당신 말을 들으니 우리의 불순종은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드러내는 호기를 만들어 주었다는 말인데 그렇다면 하나님 편에서는 잘된 것 아니오? 그런데 왜 우리를 향해 진노하시는 거요? 우리가 죄를 지으면 지을수록 하나님은 더 의롭게 보일 것이 아니오? 그런데도 우리를 죄인 취급하시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오. 오히려 우리에게 공로상을 주어야 하지 않겠소?" 바울의 대답입니다. "그렇게 궤변을 늘어놓는 당신들이야말로 하나님의 정죄를 받아 마땅한 사람들이오." 이렇게 해서 논쟁이 끝이 납니다.
 여기서 우리는 유대인들이 자신들의 잘못을 조금도 인정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유대 민족을 특별히 선택하셨기 때문에 자기들에게 잘못이 있다는 것은 곧 하나님에게도 잘못이 있다는 식으로 논리를 펴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그들이 자기들의 위선과 형식주의를 정당화하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인간이 한 번 죄에 빠지고 즉시 회개하지 않을 때에는 자기 잘못을 정당화하는 데 놀랍도록 영악할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유대인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이 완악해지는 데에는 세 단계가 있습니다. 처음에는 죄를 범하는 것이고 그 다음 단계는 회개하지 않는 것이고 마지막 단계는 자기의 행동을 정당화하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유대인은 악해질 대로 악해진 사람들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마음의 할례가 필요하다
 
 그런데 우리도 반성할 점이 너무나 많습니다. 자신의 죄를 정당화하려는 것이 어찌 유대인에게만 해당하는 이야기겠습니까? 불행하게도 교회를 드나드는 형제들 중에 이렇게 자기 행동을 정당화하려는 습성에 빠져 있는 자들이 적지 않습니다. 이 시간 여러분에게 자신을 테스트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드리겠습니다. 유대인처럼 자신을 정당화하려는 습관을 가지고 있지 않나 하는 것을 알아보는 것입니다. 그 중에 한 가지라도 공감되는 부분이 있다면 자신도 유대인과 똑같은 문제를 안고 있는 사람이라고 인정해도 될 것입니다.
 가룟 유다에 대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인류를 구원하려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야 하는데 그러면 누군가가 예수를 팔아야 할 것 아니야? 그런데 아무도 나서지를 않았어. 가룟 유다가 생각다 못해서 자기가 희생양이 된 거야. 그런데 왜 가룟 유다를 욕하는가? 오히려 상을 줘야지" 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만약 여기에 공감한다면 자신도 유대인과 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에덴 동산의 선악과에 대해서, "왜 하나님이 선악과를 심어 놓고 유혹을 받게 하는가? 그러고는 왜 그 결과를 힘 없는 인간에게 뒤집어 씌우냐는 말이야" 라고 생각하는 분이 있다면 그에게도 유대인의 악함이 숨어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아니, 하나님이 그렇게 무한한 사랑을 가진 분이라면 만인을 무조건 구원해야 마땅하지, 왜 믿는 자만 구원하는가? 째째하게.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고 하는데 왜 자꾸 순종하라고 해? 그러면 행위 구원에 빠지지. 이렇게 악한 세상에서 어떻게 성경대로 살 수 있어?" 하고 자기 마음속에 은근히 변호하고 싶은 생각이 있다면, 그 생각 자체가 유대인의 근성과 흡사하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참 신자는 하나님 앞에서 자기 변호를 하지 않습니다. 자기 정당화를 절대로 하지 않습니다. 설혹 억울하고 고통스러운 일을 당해도 "하나님은 옳습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옳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하고 겸손하게 무릎 꿇는 사람이 됩니다. 이런 사람이 마음의 할례를 받은 이면적 유대인입니다. 그러나 겉으로만 할례받은 유대인처럼 형식적으로 신앙생활 하는 자는 "내가 잘못되면 너도 잘못되었지?" 하는 식으로 하나님 앞에 따지고 듭니다. 얼마나 무서운 죄인의 모습입니까?
 하나님이 유대인의 죄를 날카롭게 경고하고 책망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들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죄인으로 인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죄인을 구속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아를 영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 중에 교회를 다니면서도 아직까지 유대인의 죄를 버리지 못한 분이 있습니까? 위선을 하고 정당화를 하며 하나님 앞에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고백하기를 꺼리는 형제가 있습니까? 이 시간 하나님께서 당신의 마음에 성령으로 할례 주시기를 바랍니다. 지금 즉시 회개하고 성령으로 새사람이 되기를 기도하십시오. "주여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유대인의 죄가 바로 나의 죄입니다." 하고 고백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주인으로 모시고 살고 있습니다. 비록 온전하게 실천은 못해도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아는 것만큼 살아보려고 몸부림치고 있습니다. 한편에는 온전하게 순종하지 못하는 고통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때에는 위선자가 됩니다. 어떤 때는 형식주의자가 되기도 합니다. 어떤 때는 잘못된 것을 변호하려고 하나님 앞에 이런저런 구실을 내어놓기도 합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따져보면 우리는 자기가 죄인이라는 것을 긍정하는 사람이요, 말씀을 아는 것만큼 실천하지 못한다는 것 때문에 부끄러움을 느끼는 사람이요, 말로만 떠들고 행동이 따라오지 못하는 데 대해서 가책을 받는 성령의 사람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와 같은 은혜를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우리는 유대인과 같은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매일매일의 생활 현장에서 하나님이 세상 사람들한테 모욕당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순종합시다.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을 최고의 이상으로 삼고 이 세상을 살아야 할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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