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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자료실 종합모음

하나님 안에 있는 나 (시139편1-12)

by 【고동엽】 2022. 9. 14.

하나님 안에 있는 나  (시139편1-12)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에서 왔으며 지금은 어디에 있고 이디로 가고 있는지? 그리고 나는 무엇 하는 사람이며 누구와 함께 하고 있는지?나는 누구이며 누구 사람인가? 나의 실제 소속은 어디인가? 도대체 나는 어떤 존재인가?라는 이 질문은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고 근본적인 질문이지만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모르면서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모습을 잘못 알고 있습니다. 자신을 가장 위대한 존재로 여기거나 자신의 모습과 환경을 원망하고 자학하여 인생을 포기한 채 하루하루를 살아갑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에 대하여 무관심하거나 자신의 참 모습 알기를 두려워하여 회피하며 살아가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본래의 자기 모습보다는 꾸며진 자신의 모습을 지니고 사람들과 하나님을 대하며 살기도 합니다. 인간은 스스로 자신을 알 수 없는 존재이기에 어느 누구도 이 질문에 대한 확실한 대답을 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자신을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현대인을 무엇이라 특징지을 수 있느냐고 어느 칼럼니스트가 당대의 석학에게 물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현대인은 우주에 대해서 많이 알고 있습니다. 세상에 대해서 많이 알고 있고, 앞으로도 더 많이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점점 무지해가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현대인은 자신에 대해서 무지한 존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고독이 필요한 것입니다. 사색이 필요합니다. 명상이 필요합니다.
혼자서는 잠시도 견디지 못하는 인간- 인간 됨을 잃어버린 인간입니다. 어차피 인간은 혼자입니다. 생각해 보면 아내를 위해서 사는 사람도 아니요, 남편을 위해서 사는 사람도 아닙니다. 자식이 아무리 소중하지만 내 생과 바꿀 수는 없습니다. 자식을 위해서 세상에 태어난 사람은 없습니다. 내게는 나대로의 존재가, 생이 있습니다. 우리는 언젠가는 고독하게 될 존재요 본질적으로 고독한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독을 다스릴 줄 알아야 합니다. 즐길 줄도 알아야 합니다. 스스로 조용히 명상할 줄도 알아야 하고, 내 존재의 의미도 생각할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그저 무엇엔가 끌려 바삐 돌아다닙니다. 텔레비젼의 연속극을 보면 주인공이 어려운 일을 당했을 경우, 사업에 실패했거나 실연을 당했을 경우, 작가들이 그리는 그 다음 모습은 어떠합니까? 열이면 열 포장마차에 쭈그리고 앉아 술을 마시는 장면으로 이어집니다. 왜 조용히 혼자 앉아서 생각하는 인간을 그리지 못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런 인간은 정말 없는 것입니까?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자기 존재를 생각하도록 하기 위하여 부득불 비상조치를 쓰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사업에 실패합니다. 그렇게 중요하던 사업이 망하고 나니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제야 '나는 과연 누구인가'하며 자기 정체를 생각하기 시작합니다. 때로는 병들기도 합니다. 바쁘게 이리저리 쫓기며 다니다 덜커덕 병에 걸려 입원을 합니다. 입원실에 누워서 난생 처음으로 '나는 누구인가'를 생각하기 시작합니다. '나는 누구입니까?'- 바로 이 한마디의 질문을 받아내기 위해서 이 모든 사건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것은 모두 하나님의 오묘한 섭리와 놀라운 경륜 속에서 일어납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정체를 잃어버려 가는 무지몽매한 인간들을 깨우쳐 자기로, 본질로 돌아가도록 하기 위하여 나 자신이 누구냐고 스스로에게 묻고 깊이 생각하도록 경륜하시고 계십니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의 바른 해답을 찾기까지는 사실상 인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탈무드"는 남자의 일생을 7단계로 나누어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한 살 때는 임금님과 같다. 모두가 자기만을 위해주고 기분을 떠받들어주니까, 두 살 때는 돼지와 같다. 진흙탕에서도 아무 거리낌 없이 뒹굴고 뛰어 놀 수 있으니까. 열 살 때는 새끼 양과 같다. 아무 생각 없이 웃고 떠들고 뛰어 다니니까. 열 여덟 살 때는 말과 같다. 다 성장하여 힘을 자랑하고 싶어서 그저 모든 일을 다할 수 있을 것처럼 행동하니까. 결혼하고 나면 당나귀와 같아진다. 가정이라는 무거운 짐을 지고 묵묵히 걸어가야 하니까. 중년이 되면 개와 같아진다. 가족들을 부양하기 위하여 사람들에게 호의도 구하고, 하고 싶지 않은 일도 하면서 살아야 하니까. 그리고 노년이 되면 원숭이와 같아진다.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고 이제 다시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만 아무도 그에게 관심을 두지 않으니까.' 과연 일리가 있는 말입니다.

여러분은 저마다의 신분증을 가지고 계십니다. '나'라는 존재를 설명해 주는 신분증에는 우선 내 이름이 있고, 생년월일이 있습니다. 그리고 소속이 있습니다. '나'라는 존재를 설명하는 곳이 고작 그것입니다. 엄격히 따져 보면 그 전부가 소속에 관한 것뿐입니다. 어느 집안 사람이냐, 어떤 직장에 다니고 있느냐, 이렇듯 소속에 의해서 나를 증명합니다. 그 이름 석자마저도 한 자는 내 것이 아닌 아버지의 성을 그대로 딴 것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나는 누구입니까?

사람은 세 개의 이름을 가지고 살아간다고 "탈무드"는 말합니다. 하나는 나면서부터 부모님이 지어준 이름이요, 두 번째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나와 관계된 모든 사람들, 특히 친구들이 나에게 붙여준 별명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은 죽은 뒤에 명성이라는 이름으로, 이름 가운데 제일 소중한 이름입니다. 그렇습니다. 죽은 뒤에 나를 어떤 사람이라 불러줄 것인가가 가장 중요합니다.

건강한 삶을 살려면 가장 필요한 것이 건강한 자아상(Self Image)입니다. 건강한 자아상을 가진 사람만이 건강한 미래를 향하여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종종 왜곡된 두 가지의 극단적 자아상을 갖기가 쉽습니다. 이 두 가지는 다 나쁜 것인데, 우리는 이 두 가지의 극단적 자아상에 빠질 수 있는 가능성이 많습니다. 하나는 아주 교만한 자아상이고, 또 하나는 자학하는 자아상입니다.

나는 거룩한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 얼마나 진지하게 반응하고 있습니까?

나의 삶 속에서 하나님께서 깊이 개입하셨던 사건은 무엇입니까? 그 감동이 아직 살아 있습니까?
나는 누구인가?-용 혜 원  
홀로 눈물을 흘려본 적이 있습니까?

무너져 내린 슬픔도 없고 뼛속을 찌른 듯 괴로운 일도 없는데 홀로 있을 때 창밖을 내다 보다 갑자기 슬픔이 목구멍까지 차올라 서글퍼 벽에 기대어  울었던 날이 있었습니까? 가만히 생각해 보면뒤돌아 볼 겨를도 없이 너무나 숨차게 달려온 삶이기에 나 자신을 생각해 볼 틈도 없었습니다. 너무나 많은 것들을 잃어버리고 살아온 것만 같을 때도 있습니다.

"나는 누구인가?" 수많은 질문들이 머릿속에 가득해 허무한 생각이 몰려와 소리내어 울었던 날이 있습니다. 살다 보면 흘러만 가는 인생살이가 덧없이 떠도는 구름만 같아 홀로 팬터마임이라도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나는 누구인가

"삶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당신이 갖고 있는 소유물이 아니라 당신 자신이 누구인가 하는 것이다.  단지 생활하고 소유하는 것은 장애물이 될 수도 있고 짐일 수도 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으로 우리가 어떤 일을 하느냐가 인생의 진정한 가치를 결정짓는 것이다."- 헬렌 니어링의 《아름다운 삶, 사랑 그리고 마무리》중에서

* 나는 누구인가. 나는 과연 어떤 일을 하고 있는가. 이따금 직면하는 자기 점검의 물음입니다. 어제와 오늘의 나를 스스로 어떻게 생각하고 바라보느냐가 내일의 나를 결정하고 미래를 지배합니다. 가치 있는 인생은 무엇을 갖고 있느냐가 아니라 어떤 가치 있는 일을 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나는 누구인가? 깨닫는 마음이 없는 상태에서 기도하는 것보다는 깨달음이 있고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한 후 그 하나님의 마음으로 주님이 기뻐하시는 기도 제목들을 발견하여 기도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 기장 훌륭한 기도의 방법입니다. 그 사람의 기도가 바뀌는 것과 함께 사람 자신이 변화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를 잘 아시는 주님

세상을 살아가면서 자아도취에 빠져 살아가는 사람들을 만나면 역겨울 때가 많습니다. 자아도취는 착각 속에서 사는 경우인데 내가 가장 아름답고 나만이 진실하고 정직하며 남에게 아량을 베풀고 신앙생활도 제일 잘하는 줄로 착각하며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보면 참 자기 자신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밖으로 드러내놓고 자기 자신을 자랑하지 않는다고 해도 많은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 잘난 것으로 생각하며 자기가 사는 방식이 옳은 것으로 믿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인간은 자신에 대해 모르는 것이 참 많습니다. 그래서 어떤 현인은 사람의 인생을 평생 자기의 참모습을 발견해 가는 과정이라고 말했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자기 자신도 잘 알지 못하는데 오직 하나님은 나의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십니다. 아주 정확하게 알고 계십니다.


다윗은 자기 인생의 전부를 아시는 하나님 앞에서 감탄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무엇을 아십니까? 나의 모든 것을 아시되 특별히 나의 생각과 말과 행동을 아십니다. 오늘은 나의 모든 것을 아시는 주님을 묵상하면서 우리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보다 진실한 삶을 살겠다는 결단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나의 생각을 아십니다. 하나님은 나의 말을 다 아십니다. 하나님은 나의 행동을 아십니다. 주님은 그 형편을 다 아십니다. 주님께 두 손 들고 의지하고 맡깁시다. 그때 주님은 그의 오른 손으로 우리를 지켜주시고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누군가가 나를 잘 안다는 것은 두 가지 의미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첫째는 부담과 두려움입니다. 내가 싫어하는 사람이, 나에 대해서 늘 부정적으로 말하는 누군가가 나를 너무나 잘 알고 있다면 그것은 오히려 부담이 될 것입니다. 혹은 잘못을 범한 어떤 사람이 누군가에 의해서 감시를 당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두려움이 될 것입니다. 나에게 좋지 않은 계획을 가진 제 3자가 나를 너무나 잘 알고 있다면 그것은 긍정적인 느낌보다는 부정적인 느낌이 더 가까울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처럼 누군가가 나를 너무나 잘 알고 있다는 것은 때로는 부담과 두려움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누군가가 나를 잘 안다는 것이 기쁨과 위로가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내가 관심을 두고 있는 사람이,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그 역시 나에게 관심을 가지고 나를 잘 알고 있다면, 그리고 나를 주목하고 있다면 그것은 기쁨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고난 중에 허우적거리며 갈 길을 몰라 애태우고 있을 때에 누군가가 내 형편과 처지를 헤아리고 나를 돕기 위해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그것은 그야말로 큰 위로와 기쁨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나는 이런 사람입니다

“나는 이런 사람입니다” 라는 글을 소개합니다.

“나는 과거에 의해 종속되거나 규정 될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나는 미래에 의해서도 구속 될 수 없는 존재입니다. 나는 지금 여기의 현실에서 언제라도 새롭게 재창조 될 수 있는 가능성의 존재입니다. 과거에 내가 그런 일을 경험했다고 해서 내가 지금도 그런 사람이라고 믿는 것은 큰 착각입니다. 과거의 일로 해서 미래도 그럴 것이라고 믿는 것은 더욱 큰 착각입니다. 과거도 미래도 지금 여기에 있습니다. 내 현재의 가슴 속에 과거가 있고 내 현실을 살아내는 지금 속에 미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의 과거도 미래도 내가 지금 여기에서 언제라도 다시 해소하고 결정하고 창조할 수 있습니다. 나는 그런 사람입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너무나 잘 알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힘들 때마다 돕고 계신다는 것을 또한 느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감시자로서가 아니라 돕는 자로서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는 확신을 하게 될 때, 그 은혜에 감격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첫 부분에서 언급하고 있는 고백들이 바로 그러한 내용들인 것입니다. "하나님, 하나님께서 나에 대해 어찌 그리 잘 알고 계십니까? 나도 잘 모르는 부분들까지 하나님은 다 헤아리고 계시니 나로서는 그저 놀랄 뿐입니다."이런 고백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모든 형편과 처지를 너무나 잘 알고 계시는 분입니다. <마 10:30, 눅 12:7>의 의하면, '심지어 우리의 머리털까지도 세신바 되었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나에 대해서, 우리에 대해서 모르시는 것이 전혀 없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향해 고개를 들고 믿음의 생각들을 가지고 행하고자 할 때에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가상히 여기시고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십니다. 반대로, 신앙을 가지고 산다고는 하나 왠지 세상을 향해 점점 기울어지기만 하는 우리의 현실 앞에서는 우리의 연약함을 긍휼히 여기시고 또한 용기 주시기 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나에 대해서, 우리에 대해서 하나님은 모르시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숨길 것이 무엇이 있겠으며, 또 말 못할 사정이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가 입술을 열어 하나님께 아뢴다면 하나님은 분명 말씀하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자여, 내가 이미 다 알고 있느니라. 나는 네가 나에게 나와 입술을 열고 마음 쏟아놓기를 기다렸노라."라고 말입니다. 그리고는 우리의 모든 형편과 처지를 아시는 하나님께서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도록 우리를 도우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보다 나를 더 잘 알고 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광대한 지식의 세계 안에서 우리 인간이 안다고 하는 것은 지극히 작습니다. 마치 태평양의 물을 조개껍데기로 퍼내는 것과 같습니다. 아주 하찮은 정도입니다. 우리는 그 무궁무진한 신비의 세계를, 그 실재를 조금 씩 조금 씩 깨닫고 배워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새로운 것을 무엇인가 알려고 무던히 애를 써도 그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에 불과합니다. 이 중요한 사실을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내가 아는 '나'가 있고, 다른 사람이 아는 '나'가 있는데 여러분은 어느 쪽입니까? 나보다 다른 사람이 나를 먼저 알고, 더 잘 알 때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느 수준에 살아가고 있습니까? 내가 아는 내가 옳은 것입니까? 다른 사람에게 알려진 내가 옳은 것입니까? 일생을 살아가면서 우리 안에는 때 묻지 않고 오염되지 않고 상처 받지 않았던 맑은 물이 가득 차 있었는데 수많은 사람들과의 관계와 수많은 사건들 속에서 우리 마음은 흙탕물과 구정물이 가득 차 있게 됩니다. 다른 사람들이 내 안에 있는 흙탕물을 마시려고 하지 않습니다. 열심히 내게 인정과 칭찬과 격려를 통해 부어지는 맑은 물을 그대로 우리 안에 받아서 내가 나를 인정하는 ‘나’와 하나님이 인정해주시는 ‘나’가 일치되도록 살아가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詩人은 노래합니다. 그가 살아가면서 만났던 하나님, 그의 삶에 동행하셨던 하나님, 그의 인생을 통해 실제 경험했던 하나님을 고백하며 하나님이 자신을 어떻게 사랑하시는지 노래하고 있습니다. 본문1절에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감찰하시고 아셨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보면 "감찰하시고"라는 말은 히브리어 원어로 "하카르타니"라고 하는데 이는 "찾으셨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본문을 직역하면 "당신은 나를  찾으셨다"라는 말인데 이 말은 원래 물줄기나 금속을 찾기 위하여 땅을 파거나  뚫는 것을 가리킬 때 사용하는 말입니다. 이는 결국 하나님께서 땅을 파고 헤치고 드러내듯이 자세하고 정확하게 우리를 살피시고 아시고 계신다는 말입니다.

‘감찰하다’ 는 표현은 또한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면 모든 것이 궁금해집니다. 그래서 모든 수단을 다 동원하여 그를 알고자 합니다. 하나님이 다윗을 감찰하셨고 그에 대한 모든 것을 알고 계셨다는 것은 단순히 전지전능하시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에 대한 관심과 사랑이 그만큼 크셨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 결과로 다윗에 관한 모든 것을 알게 되셨습니다. 여기에 다윗이 범접할 수 없는 신적인 능력이 개입되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두 가지 측면에서 놀라고 있습니다. 첫째는 다윗을 향한 지극한 관심과 사랑이요, 두 번째는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입니다. 이 사랑과 능력이 다윗을 둘러 보호하시고 안위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나타났습니다. 이 은혜는 모든 하나님의 자녀에게 그대로 적용됩니다. 하나님은 여러분보다 여러분에 대해서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여러분을 향한 사랑 때문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나를 아십니다. 우리는 이 앞에서 도망갈 수가 없습니다. 피할 수 없습니다. 이미 다 알려졌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은 서로에 대하여 모를 때는 사랑하다가도 알고 나면 미워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비밀이 지켜졌을 때는 사랑하다가도 비밀이 드러났을 때는 미워합니다. 이렇듯 우리는 내 약점을 아는 사람을 사랑할 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내 모든 비밀을 다 아는 사람을 사랑하고 존경할 수 있을 때에 비로소 인격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내 진실이, 내 비밀이 알려졌을 때에 도망가는 사람은 위선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나를 아십니다. 다 아시고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내 허물도, 내 죄도 알고 계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 사랑하십니다. "이는 저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의 진토임을 기억하심이로다(시편103:14)" 내가 흙덩이에 불과하다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다 알고 계시다고, 그런 나를 사랑하고 계시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동행하시는 하나님

다윗은 여러 차례 인생의 흑암을 경험하였습니다. 생명을 부지하기 위하여 그가 죽인 골리앗의 고향인 가드까지 도망쳤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미친 행세를 하며 살고자 몸부림을 쳤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 음부의 자리에도 하나님이 계셨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는 어둠이 어둠일 수 없고 절망이 절망일 수 없었던 것입니다. 고난 중에 형통케 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를 체험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 요셉은 노예였을 때에도 형통했고, 심지어 인생의 가장 밑바닥인 수인이 되었을 때에도 형통했습니다. 하나님이 그와 함께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인생의 흑암 가운데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함께 계시기 때문에 이미 흑암이 아닙니다. 우리는 눈을 감았다 할지라도 우리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이 정확한 인생의 좌표로 인도하시며, 우리가 실수해도 그 실수를 성공으로 이끄십니다.

나를 감찰하시는 하나님

우리는 예배 때마다 고백하는 신앙 고백을 통하여 하나님을 "전능하신 하나님"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나를 아시고 나의 삶의 모든 행위를 감찰하십니다. 본문2절에 "주께서 나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며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통촉하시오며"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 "앉고 일어섬"이라는 말은 인생의 삶의 모든 행위를 의미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억하여야 할 것은 하나님이 항상 우리의 행위를 살피시며 우리의 생각을 아시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행위만 감찰하여 아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까지 아시는 분이십니다. 본문에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통촉하시오며"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 "통촉"이란 "밝게 살피는"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비록 우리에게서 멀리 계시는 분 같지만 우리의 생각을 아신다는 것입니다. 내가 비록 말하지 아니하여도 주님은 아신다는 것입니다. 내가 주를 위하여 살겠다고 마음만 먹어도 그 마음을 아시고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고 능력을 주시는 주님이십니다.

초대교회에서 많은 사람들이 밭을 파고 집을 팔아서 사도들 앞에 가져다가 바칠 때에 아나니아와 삽비라도 자기들의 소유를 팔아 바치기로 마음먹고 자기들의 소유를 팔았으나 팔고 나니 생각이 바뀌어 반을 감추어 두고 반만 가져다가 바칠 때 주님의 사도 베드로는 사도행전 5:3에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임의로 할 수가 없더냐.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아나니아의 마음을 아시고 계신 것입니다. 베드로는 삽비라에게 "그 땅 판 값이 이것뿐이냐?"고 물었을 때 삽비라는 "예 이뿐입니다"하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때 베드로는 사도행전 5:9절에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어찌 함께 꾀하여 주의 영을 시험하려 하느냐? 보라 네 남편을 장사하고 오는 사람들의 발이 문 앞에 이르렀으니 또 너를 매어 나가리라 한대"하였습니다. 그 말이 떨어지자 삽비라도 그 자리에서 죽은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 앞에 온전히 마음을 다하여 섬기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너무 기이한 하나님의 지식

주님의 알고 계심은 정말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본문6절에 "이 지식이 네게 너무 기이하니 높아서 내가 능히 미치지 못하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 "지식"은 우리의 모든 것을 알고 계시는 하나님의 지식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시는 지식은 우리 인간으로서는 감히 생각지도 못할 놀라운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놀라운 하나님의 지식은 어떤 것입니까?

알지 못하는 것이 하나도 없으신 분이십니다. 본문4절에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직역을 하면 "한마디의 말도 아직 내 혀에 없을 때에 조차 오 여호와여 당신은 모든 것을 아십니다"라는 말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행위만 아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생각도 아시며 우리의 속마음까지 꿰뚫어보시는 하나님이시라는 말입니다. 오늘 우리는 어려움을 당할 때나 혹은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만났을 때 "누가 나를 알아주리요"라고 말합니다. 나를 알아 줄 자가 누구이겠습니까? 나와 함께 먹고 자고 같이 생활하는 식구들도 나를 완전히 알지 못하며 나를 낳아주신 부모도 나를 완전히 알지 못합니다. 심지어 나 자신도 나를 확실하게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나의 마음을 아시며 나의 생각도 아시며 나의 육체를 아시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몸에 고장이 생기면 하나님이 잘 아시고 계심을 우리가 믿어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우리를 만드셨기 때문인 것입니다.

탕자가 집을 나설 때부터 아버지는 알고 있었습니다. 형편없는 모습으로 다시 돌아오리라는 것을, 그리고 기다린 것입니다. 나는 몰라서 버려진 존재가 아닙니다. 내 실패, 내 질병, 내 고통, 내 역경은 하나님께서 나를 모르시기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다 알고 계십니다. 다 알고 사랑하십니다. 다 알고 사랑하시는 그 안에 내 현실이 있습니다. 여러분, 실패했습니까? 하나님께서 나를 아시고,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기에 그 실패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모든 것을 알고  계시는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바로 나를 두르시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본문 5절에 "주께서 나의 전후를 두르시며 내게 안수하셨나이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에 "두르시며" 라는 말은 히브리어 원어로 "추르"라고  하는데 그 의미로는 "밀다, 압축하다, 누르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용어는 성을 포위하고 있는 피할 길이 없는 상황을 말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은 나의 앞뒤를 밀착하여 포위하시고 계시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의 형편을 잘 아신다는 것입니다. 시편121:5에 "여호와께서 우편에서 네 그늘이 되시나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늘이란 항상 실체에 붙어 있으며 실체를 따라 다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므로 우리를 잘 아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중심에 와서 내주하심으로 우리의 생각까지도 아시는 분이신 것입니다. 여기에 "안수하셨나이다"라는 말은 인간의 행동과 사역이 하나님의 뜻 아래 있을 뿐이라는 의미입니다. 즉 우리 인간의 모든 삶이 하나님의 빈틈없는 계획 가운데 있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능히 미칠 수 없는 하나님의 지식이십니다. 본문6절에 "지식이 내게 너무 기이하니 높아서 내가 능히 미치지 못하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지식과 우리 인간의 지식과는 비교할 수 없는 것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이사야 55:8이하에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고 하였습니다. 사실 우리의 지식과 하나님의 지식은 비교할 수 없으므로 우리로서는 하나님의 지식을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고난 중에 있는 욥이 친구들과 변론을 마치고 하나님 앞에서 고백하기를 욥기 42:3에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우는 자가 누구오니까? 내가 스스로 깨달을 수 없는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 없고 헤아리기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정말 우리는 하나님의 놀라우신  지식에 오직 찬양과 감사할 뿐인 것입니다.

피할 수 없는 하나님의 손길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감찰하시므로 우리의 모든 것을 아시고 계시며 우리를 인도하시며 붙잡고 계심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어디서든지 하나님의 낯을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피할 곳이 없습니다. 본문7절에 "내가 주의 신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무소부재하시는 하나님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다스림을 피하여 살기를 원하지만 하나님의 통치를 피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흔히들 교회를 안나오면  하나님의 통치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닌가? 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거기서도 역사하시고 섭리하시고 주관하신다는 것입니다. 본문8절에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음부에 내 자리를 펼지 거기 계시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우리가 이 땅에 살 때도 하나님의 낯을 피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죽어서 하늘에 올라가든지 아니면 지옥에 들어간다 하여도 하나님의 낯을 피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본문9절에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할지라도"라고 했습니다. 여기에 "새벽 날개를 치며"라는 말은 문자적으로는 "내가 아침 날개들을 갖는다면"이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아침 날개"는 해가 동편에서 솟아오를 때에 날개처럼 비쭉비쭉 하늘을 찌를 듯 뻗치는 빛줄기를 가리킵니다. 그런데  당시 사람들은 세상에서 가장 빠른 것에 관해서 말할 때 해가 뜰 때 순식간에 하늘을 향해 뻗치는 빛줄기를 사용하였습니다. 또 본문에 "바다"란 지금의 지중해를 가리키는 것인데 당시에 사람들의 "바다 끝"은 바로 "지구 끝"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의 저자는 세상에서 가장  빠른 빛줄기를 타고 가장 멀리 있는 바다 끝에 간다고 할지라도 거기서도 하나님이 계시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그곳에서 무엇을 하십니까? 본문10절에 "곧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하늘에 올라가도 하나님은 거기에 계시고 음부에 내려가도 거기도 계시고 바다 끝에 가도 거기서도 주는 계신다고 하면서 그 주님이 무엇을 하시는가? 를 말하고 있습니다.

지금 내가 당하고 있는 이 시련은 내게 필요한 것이요, 하나님의 사랑의 증거입니다. 몰라서 이 시련을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내가 당할 수 없는 시련을 주시지 않습니다. 내게 필요하기에, 그 적당한 분량만큼의 시련을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십니다. 내 약함도, 내 능력도 다 아십니다. 이것을 깨닫는, 이 지식이 곧 능력입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누군가가 이야기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으면 미꾸라지를 의지해도 의존하는 존재이다." 사람을 의지할 것인가, 물질이나 기술을 의지할 것인가, 하나님을 의지할 것인가. 바울은 힘 있게 말씀합니다. "나는 나에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행 27:25)." 하나님을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에 대한 바른 신앙은 하나님께 헌신한다

다윗은 시편 139편에서 참으로 위대한 신학적 교훈과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사변적 논리나 학습을 통해 배운 것이 아니라 그의 기구했던 지난날의 삶에서 하나님을 체험한 생생한 고백입니다. "주께서 나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며... 나의 생각을 통촉하시오며...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내가 주의 신을 떠나 어디로 가며... 내게 무슨 악한 행위가 있나 보시고 나를 영원한 길로 인도하소서..."

이와 같은 분명한 신앙과 신학 위에서 굳게 서서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세상을 겁내기 마십시오. 내가 위대하다거나 자신감에서가 아니라 전능하신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 분을 믿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순종하십시오. 하나님께 헌신하십시오. 그것이 이기는 길이요, 행복의 길이요, 믿음의 길입니다. 건강한 인생을 원하십니까? 행복한 가정을 희망하십니까? 성장하는 신앙을 바라십니까? 하나님을 의지하시고, 그 분을 믿고 헌신하십시오.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을 아시고 영원한 길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인도하실 때에 왜 사십 년을 광야에 헤매게 하셨습니까? 하나님께서 몰라서였습니까? 아닙니다. 이 역시 아시기에 사랑으로 주시는 시련이었습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능력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전지하심, 하나님의 전능하심, 하나님의 무소부재하심이 있습니다. 전지, 전능, 무소부재 등 하나님의 능력은 하나입니다. 그 절대적인 사랑은 하나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곧 능력입니다. 우리는 이 지식에 대한 깨달음만큼 그 능력을 소유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십니다'라는 말을 들을 때에 두려워 벌벌 떠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평안함을 느끼는 사람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느 쪽입니까? 세상사람 다 몰라줘도 좋습니다. 하나님만이 아신다면 나는 평안합니다. 하나님께서 아신다는 그것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합니다. 내가 나를 몰라도 좋습니다. 하나님께서 아시니까요. 여기에 참 평안이 있고, 참 능력의 사람이 되는 길이 있습니다.


여러분, 자신을 아십니까? 하나님을 아십니까? 그보다 먼저 하나님 안에 있는 나를 알아야 합니다. 그리할 때에 비로소 하나님께서 나를 아시는 것에 대한 지식만큼의 능력 있는 생을, 평안한 생을, 행복한 생을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나의 삶 가운데 나타난 하나님의 관심은 구체적으로 무엇입니까? 미래에 대한 예측이 불가능할 때 내가 취할 구체적인 태도는 무엇입니까? 불안한 마음이 있다면 근본적인 원인은 무엇입니까? 자신을 향한 시선을 놓지 않으시고, 주목하시는 주님의 은혜를 감사합시다. 이런 하나님의 사랑과 관심에 이제는 반응하며 전적으로 의지하기를 결단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흑암 중에서도 도우시는 하나님의 손길과 동행하시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오늘도 살아 계십니다. 살아 계실 뿐 아니라 나를 알고 계십니다. 나를 아시되 「나보다 나를 더 잘 알고 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모든 형편과 처지를 아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우실 것입니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도록 우리를 도우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열심이 이것을 반드시 이루실 것입니다.

출처/서정호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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