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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무와 죽음의 정복자 예수 (계 1:17-20)

by 【고동엽】 2022. 9. 13.

 허무와 죽음의 정복자 예수  (계 1:17-20)

사람은 원래 의심하기를 잘합니다. 그래서 바른말을 해도 잘 안 믿으려고 하는 경향이 많습니다. 더구나 황당한 소리를 하면 안 믿는 것이 정상입니다. 이 세상에서 제일 황당한 말이 무엇일까요? 죽은 자가 살아났다는 이야기입니다. 그것만큼 황당한 이야기가 없습니다. 가장 믿기 어려운 말입니다. 우리는 그 사실을 제자들을 통해 성경 여기저기서 찾아 볼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기로 작정하시고 예루살렘으로 향하던 노상에서 제자들을 향해서 자주 같은 말씀을 반복하셨습니다. '인자가 예루살렘에 가면 사람들에게 넘기워 죽임을 당하고 죽은 후에 사흘 만에 살아나리라' 제자들은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를 못했습니다. '어떻게 죽은 지 사흘 만에 사람이 살아날 수 있겠는가? 무슨 말씀인가?' 이처럼 못 알아 들으니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안 믿었습니다.

예수님을 장사 지낸 지 사흘째 되던 날 새벽에, 무덤을 찾아갔던 여인들이 달려와서 예수님이 살아나셨다고 제자들에게 소리를 질러댔습니다. 그 소리를 들은 제자들은 믿지 않았습니다. 누가복음에 보면 그 소리가 너무 허탄하게 들려서, 말 같지도 않은 소리 같아서 안 믿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마 제자들이 여인들을 보면서 속으로 걱정을 많이 했을 것 같습니다. 특별히 막달라 마리아와 같은 여인을 보면 더 그랬을 것입니다. 너무 예수님을 그리워 하다가 정신이 약간 이상해졌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무엇에 씌워서 정신이 약간 이상해지니 보아서는 안 될 허깨비를 본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주님께서 열 제자가 있는 방에 나타나셨습니다. 손을 내미시고 "내가 부활했다."고 하시면서 자신을 보여주셨습니다. 그 주님을 만나고는 제자들이 더 이상 의심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 자리에는 도마라는 제자가 빠져있었습니다. 나중에 도마가 돌아와서 다른 제자들이 예수님이 살아나셨다고 말하자 안 믿었습니다. '이 형제들이 며칠 동안 방에 갇혀 있더니 정신이 좀 이상해져서 유령을 보았구나. 유령을 본거야.' 그리고는 자신의 생각을 말했습니다. "나는 예수님의 손바닥에 있는 못 자국을 내 손으로 직접 만져보고, 예수님의 옆구리에 손을 밀어 넣어서 그 창에 찔린 자국을 실제로 확인한 다음에라야 그분이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믿지, 당신들 이야기는 믿을 수가 없다. 당신은 유령을 봤어. 진짜 부활했다면 몸이 있어야 되지 않는가? 따라서 몸을 확인하기 전에는 절대로 믿을 수가 없다."

도마의 이런 마음을 주님이 아시고 나중에 찾으신 다음에 도마에게 손을 만지게 하시고 옆구리에 손을 넣어 보게 하셨습니다. 너무 감격해서 도마가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주님은 나의 하나님이십니다'라며 말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유명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요20:29) 우리가 이와 같은 제자들의 행적을 살펴보면 죽은 자가 살아난다는 것을 믿는다는 것은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하고, 더욱이 죽은 지 사흘 만에 어떤 사람이 살아났다는 것은-비록 그 사람이 예수님이라 하더라도- 인간으로는 믿기가 어려운 말씀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떤 분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예수 부활은 확실히 우주를 진동 시키는 엄청난 사건이었지만 그 일이 너무나 신비스럽게 진행되었기 때문에, 그리고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 하는 사람들의 구성이 이상했기 때문에 부활을 믿는 것을 영원히 어려운 문제로 만들어 버렸다." 저는 이 말에 수긍합니다. 예수님이 새벽에 부활하셨습니다. 무덤을 막고 있던 돌이 굴러 나가면서 예수님이 부활하셨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예수님이 부활하시는 모습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군병들도 보지 못했습니다. 너무나 신비스러운 과정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으로는 믿기가 어렵죠? 게다가 예수님이 살아나셨다는 말을 퍼뜨리는 사람들이 여자들이었습니다. 그 증인들이 여자들인 것입니다. 그 당시 여자들은 재판석에서 증인으로 부르지도 않았습니다. 그럴 가치가 없는 존재로 인식을 했습니다. 여자들의 입에서 무슨 옳고 그른 말을 분별할 수 있겠느냐며 증인으로 채택도 안 하던 시대입니다.

막달라 마리아와 같은 여자는 한동안 일곱 귀신에 들려서 횡설수설하고 동네를 쏘다니던 사람이 아닙니까? 학자들의 말을 들으면 창녀였을 지도 모른다고 하는 죄인이었습니다. 이런 사람이 예수가 살았다고 떠드니 누가 그 말을 믿겠습니까?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을 꼭 증거 하시려고 한다면 차라리 빌라도 앞에 나타나셔서 "내가 살아났느니라. 봐라." 하시면 간단할 것 같지 않습니까? 빌라도가 나가서 예수님이 산 것을 자신이 보았다고 몇 마디만 하면, 그 소문이 유대나라로 와서 로마 전국으로 좍 퍼져 어지간한 사람이라면 다 믿었을 것입니다. "아 빌라도가 보았다는데 어떻게 의심하겠는가." 이럴 것 아닙니까? 그런데 막달라 마리아나 그 외 하찮은 여자들 입에서 예수가 살았다고 했으니 믿을 사람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따라서 성경에 나와있는 증인들을 보아도 그렇고, 여러 가지 사실들을 미루어 보아도 그렇고, 믿고 싶어도 도무지 믿을 수 없게 만드는 증거들이 한 두 가지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수긍이 가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좀 극단적으로 말하면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겠다고 마음에 작정하고 성경을 보는 사람에게는 안 믿을 수 있는 이유와 근거가 얼마든지 찾아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겠다고 결심한 사람이 보면 또 믿을 수 있는 이유와 근거가 충분히 있습니다. 성경은 양극을 달립니다. 그래서 믿지 못하는 사람을 끝까지 믿지 못하게 막아버립니다.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언제든지 믿을 수 있도록 열어줍니다. 마치 예수님이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자기의 부활한 몸을 보여주시고, 예수님이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지 않은 사람은 그 누구에게도 자기 몸을 보여주시지 않으신 것처럼, 믿지 않으려고 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은 끝까지 믿지 않을 수 있는 많은 근거를 성경에서 찾아내도록 성경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는다는 것이 기적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믿고 안 믿는 것이 예수님의 부활이 시실인지 아닌지를 결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든지 안 믿든지 예수님은 부활하셨습니다. 할렐루야. 그러나 그 예수님의 부활이 나와 직접적인 관계를 갖기 위해서는 반드시 믿음이라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오빠가 죽어서 울고 있는 마르다에게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마르다야, 내가 곧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느니라.' 그 다음에 '네가 이것을 믿느냐?' 하고 믿음을 요구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나에게 직접적인 관계가 있게 되려면 꼭 믿어야 합니다. 믿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놀랍게도 오늘 우리 모두는 예수님의 부활을 믿은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주님을 찬양하는 영광스런 백성이 되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이 자리에 오셔서 우리의 찬양을 받으시면서 얼마나 흡족해 하실까요? 이렇게 우리가 예수를 믿으려는 마음을 가지고 보니 성경을 읽을 때마다 예수님의 부활을 부인할 수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지 않습니까? 아무것도 없는 가운데서도 있는 것처럼 부르시는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생각할 때마다 예수님의 부활을 의심할 수가 없습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능력이 죽은 자를 살리는 것이 무엇이 어렵겠습니까? 성경에 보면 예수님이 묻혔던 무덤이 비어있는 것을 확인한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로마 군인들로부터 시작해서 살아나신 예수님을 직접 목격한 사람이 수 백 명에 이릅니다. 한두 명이 보았다고 해도 믿어야 될 일인데 수백 명이 그 예수님을 목격했다는 것을 어떻게 안 믿을 수가 있겠습니까?

더욱이 놀라운 것은 제자들의 달라진 모습입니다. 며칠동안 방문을 걸어 잠그고 비겁하게 틀어박혀 있던 제자들이 갑자기 하루아침에 방문을 박차고 나와서 예수 살아나셨다고 외치는 사람으로 바뀐 이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아무 근거도 없이 그렇게 미친 짓을 한다면 진짜 미친 것입니다. 그러나 근거가 있으니 제자들의 태도가 표변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것을 보고 우리가 어떻게 안 믿을 수가 있습니까? 더 놀라운 증거가 있습니다. 왜 대제사장들은 침묵을 지키고 있습니까? 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자고 소리치던 폭도들은 침묵을 지키고 있습니까? 예수님의 부활이 거짓이라면 얼마든지 뒤집고 다니면서 이것이 거짓말이라는 것을 증거해서 예수께서 살았다는 자들을 핍박하고 감옥에다 집어 넣을 수 있었는데 말입니다. 진실 앞에서는 침묵 이외에는 다른 도리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은 성경의 외적 증거가 있습니다. 그것을 보면 안 믿을 수가 없습니다.

동시에 우리에게는 더 큰 증거가 있습니다. 그것은 내적 증거입니다.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께서 성경을 볼 때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을 안 믿을 수 없도록 우리의 마음의 눈을 열어 주십니다. 할렐루야. 성령이 믿게 하시는데 내가 어떻게 의심합니까? 이처럼 성령의 내적증거가 있습니다. 외적 증거, 내적 증거가 서로 일치하면서 나도 모르게 예수님이 부활하셨고 살아계시다는 것을 믿게 되는데, 누가 여러분에게서 이 믿음을 빼앗아 갈 수 있습니까? 우리 모두에게 이 놀라운 믿음이 있음을 하나님 앞에 감사합시다. 놀라운 이야기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믿을 수 없는 것을 믿을 수 있도록 해 주신 우리 주님을 우리는 찬양해야 합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살아나셨습니다. 그는 살아나셔서 생명의 주가 되셨습니다. 만왕의 왕이 되셨습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손에 쥐신 가장 존귀하신 분이 되셨습니다. 할렐루야.

계시록 1장에 보면 예수님의 제자 요한이 예수님을 만나는 장면이 나옵니다. 요한은 이미 90이 넘은 고령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던 그 장면을 본지가 60년이 넘었습니다. 부활하신 모습을 본 것도 60년이 넘었어요. 그리고 나중에 예수님이 하늘로 승천하시는 모습을 뚫어져라 바라보던 때가 벌써 6,70년이 넘었습니다. 긴 세월이 지나고 나서 그가 밧모섬에 귀향을 갔습니다. 거기서 기도하다가 환상 가운데 예수님이 그를 찾아오셨습니다. 그런데 그 예수님은 60여년 전에 보던 예수님이 아니셨습니다. 60여년 전에 예수님이 승천하실 때만 해도 뚫어져라 쳐다볼 수 있었습니다.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밧모섬에서 요한을 찾아오신 주님은 너무 거룩하시고 너무 영광스러워서 도대체 눈을 뜨고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 앞에 죽은 사람처럼 엎드러졌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가까이 오셔서 그의 몸에 손을 얹으시고 어루만지면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두려워 말라 요한아,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요 곧 산자라." 영원히 살아있는 자라는 말씀입니다. "내가 전에는 너도 알다시피 죽었지만 이제는 살아서 세세토록 살아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라.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라."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다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결국은 주님께서 이 죽음, 이 사망을 지옥에 던져놓고 다시는 열고 나오지 못하도록 문을 철저히 잠가 버리고, 그 열쇠를 손에 쥐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누가 그 손에서 열쇠를 다시 빼앗아 음부의 문을 열고 사망을 풀어 놓을 수 있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이런 권세와 영광을 가지고 계신다는 것을 요한이 보았던 것입니다. 사망과 음부의 권세를 가지신 예수님은 죄가 이 세상에 가져다 준 허무와 죽음을 정복하셨습니다.

여러분, 죄로 인해서 인생이 얼마나 허무하게 되었는지를 우리는 실존적으로 자주 느끼지 않습니까? 솔로몬이 독백한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하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 나이가 스무살만 넘어가도 대충 압니다. 실존적으로 느낍니다. 어떤 시편 저자는 이런 말까지 했습니다. '주께서 모든 인생을 어찌 그리 허무하게 창조하셨나이까.' 허무가 무엇입니까? 삶의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살아야 될 어떤 영원한 가치를 발견하지 못하는 겁니다. 그리고 인생이 너무 비참하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무상하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무의미하고 비참하고 무상한 것이 결국 인생의 허무를 결정하는 요인들입니다. 우리 이것을 우리가 본능적으로 느낍니다.
그래서 인생의 허무를 절규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명직씨라는 분이 오래 전에 찬송가를 지었는데 그 제목이 허사가입니다. 오래된 찬양입니다. 제가 초등학교 다니는 조그만 애였을 때입니다. 당시는 8.15 해방이후 나라가 너무나 시끄럽고 어려웠으며, 얼마나 비가 오지 않았는지 보릿고개에 거의 굶다시피 하면서 하루하루 겨우 입에 풀칠을 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도대체 인생을 살 맛이 없던 때였습니다. 그러니 많은 분들이 교회에 모여서 이 허사가를 잘 불렀습니다. 저도 어른들 틈에서 아무것도 모르면서 따라 불렀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얼마나 처량한지요.

세상만사 살피니 참 헛되구나 부귀공명 장수도 바람잡이요 고대광실 높은 집 문전옥답도 우리 한번 죽으면 일장의 춘몽/ 땀 흘리고 애를 써 모아 논 재물 안고 갈까 지고 갈까 헛수고로다 적신으로 왔으니 또한 그 같이 빈손 들고 갈 것이 명백잖은가

열두 절까지 있습니다. 이런 찬송을 부르면 자살하기 딱 좋습니다. 살맛이 하나도 없습니다. 사실 이것이 인생사의 본질입니다. 미우라 아야꼬라고 하는 일본의 유명한 작가를 아시죠? 그분은 인생허무와 0이라고 하는 숫자를 비교하면서 재미있는 말을 했습니다. 0이라는 숫자는 어쩐지 기분이 나쁘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0에다가 1억을 곱해도 0이 되고, 0에다가 1조를 곱해도 여전히 0이 됩니다. 우리가 너무나 소중히 다루는 우리의 생명, 우리의 명예, 우리의 행복도 0과 곱하면 전부다 0에게 다 삼킴을 당하고 남는 것이 하나도 없게 되는데, 그래서 0이라는 숫자는 기분 나쁜 숫자라는 것입니다.

인생의 허무라는 것이 참 무서운 것이라는 것을 압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부활하심으로 우리에게서 이 무서운 허무를 몰아내셨습니다. 인생허무의 주범인 죄를 우리에게서 씻어주시고 이 죄의 손아귀에서 자유케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허무가 의미로 바뀌고 무가치가 가치로 옷을 갈아입게 되었습니다. 예수 믿고 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이전 것은 다 지나갔습니다. 허무를 끌어안고 밤잠을 자지 못하고 눈물을 짓던 이전의 내 자아는 완전히 지나갔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나는 새로운 자아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그렇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닙니다.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살았습니다. 내 안에 있는 그리스도가 허무를 먹고 살지 않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 때문에 우리는 먹든지 마시든지 부활의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사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날마다 움직이는 내 몸을 가지고 영광의 주님께 드리는 거룩한 제사, 거룩한 예배가 되도록 주님이 우리를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부활하신 주님을 섬길 수 있는 영광스러운 존재가 되었는데 여기에 무슨 허무가 따라다닐 수 있습니까? 아무리 세상적으로 볼 때 실패한 사람일지 모르지만, 머리가 둔해서 경쟁에서 탈락된 볼 품 없는 존재인지는 모르지만 주님은 나를 어떻게 보신다는 말씀입니까?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거룩한 존재로 보십니다. 얼마나 가치가 있는지 모릅니다. 내가 이 세상에서 화려환 영화를 누리고 많은 사람에게 존귀와 칭찬을 받는 존재라고 할지라도,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나의 삶을 통해서 부활하신 주님을 영광스럽게 할 수 있다는 이 자체가 중요한 사실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대단한 존재입니까?
파스칼이 말한 것처럼 피조물이 모든 피조물을 다 가지고도 메울 수 없는 우리 마음속에 있는 이 공허를 부활하신 주님이 메워 주시고 만족케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허무가 우리를 더 이상 쫓아 다닐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너무나 존귀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자주 듣는 예화가 될 지 모르겠지만 유익하기 때문에 한번 더 들으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미 상원의 원목이었던 비숍 감독이 만든 아름다운 우화입니다. 팔레스틴 어느 산 위에 쭉 뻗은 세 그루의 나무가 서 있었습니다. 하늘을 향하여 가지를 흔들면서 자기의 아름다운 모습을 과시하고 있었습니다. 그 세 그루의 나무 중에 하나가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내가 언젠가 이 세상에 쓰여지는 날이 온다면 나는 예루살렘 성전의 대들보가 되어서 하나님을 경배하는 아름다운 존재가 되고 싶어.' 어느날 사람들이 웅성웅성하면서 올라오더니 도끼로 자기를 찍어 끌고 내려가서 톱으로 켜고 대패질을 한 후에 보기만 해도 소름 끼치는 십자가 형틀을 만들어버렸습니다.
또 한 나무는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내가 언젠가 세상에서 쓰임을 받는 날이 온다면 나는 예루살렘 왕궁에 있는 큰 기둥이 되어 왕의 영화를 자랑하는 몸이 되고 싶다.' 어느날 사람들이 오더니 역시 도끼로 자기를 찍었습니다. 그리고는 끌고 내려갔습니다. 그러더니 마구간 옆에서 톱으로 켜고 대패질을 한 후에 짐승에게 여물을 담아주는, 볼품 없는 조그마한 구유를 만들었습니다.

남아있는 한 나무는 생각했습니다. '나는 언젠가 쓰임을 받을 수 있는 날이 온다면 오대양을 누비고 다니는 크고 화려한 배가 되고 싶다.' 어느날 사람들이 오더니 도끼로 찍어서 갈릴리 바다로 끌고 갔습니다. 그리고는 톱으로 자르고 대패질을 해 가지고는 비린내 나는 고깃배를 만들었습니다.
세 그루의 나무 모두 신세가 너무 처량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얼마를 지났을까요. 마구간의 구유에 와보니 하나님의 아들이 이 세상에 오셔서 어린 아기가 되어 태어나는 것입니다. 자기 신세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어린 아기를 받아 누이는 침대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또 갈릴리에 있는 비린내 나는 고깃배를 어느날 보니 하나님의 아들이 바닷가에 나오셔서 말씀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아들이 자기 위로 올라오시더니 바닷가에 서 있는 수많은 사람들을 향해서 천국복음, 영광스런 기쁜 소식을 전하는 것입니다. 자기 신세가 하루아침에 그 복음을 전하시는 하나님의 아들의 강단이 된 것입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십자가의 형틀이 된 그 나무가 어떤 청년이 와서 자기 위에 눕힘을 당하고 못질을 당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가만히 보니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전인류의 죄를 짊어지고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고 부르짖으면서 피 한 방울 남기지 않고 쏟으시는 하나님의 아들이 자기 위에 있었습니다. 그 하나님의 아들이 어린양으로서 하나님께 드리는 거룩한 제사를 올려드리는 제단이 바로 자기가 된 것을 알았습니다. 자기는 그 제단으로 쓰임을 받는 것을 보았습니다. 참 아름다운 우화입니다.

여기서 배울 것이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세상을 잘 모를 때 젊은 기분에 한참 자신 만만할 때 '나는 예루살렘의 대들보가 되리라. 나는 예루살렘 왕궁의 기둥처럼 살 것이다. 나는 오대양을 누비는 화려한 배가 되리라.' 하며 아름다운 꿈들을 나름대로 다 가지고 인생을 출발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꿈을 이루는 사람은 백에 하나도 찾기가 어렵습니다. 옥 목사를 위시해서 우리 모두가 대부분 자기 꿈보다는 좀 못하게 인생을 살다가 갑니다. 이것이 현실입니다. 그래서 10년, 20년 살다가 보면은 갈릴리에 있는 비린내 나는 고깃배처럼 살 수도 있고, 아무도 알아주지 아니하는 마구간의 구유처럼 평범하게 살다가 가는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지지리 불행하고, 고통하고, 눈물 흘리고, 끔찍한 역경의 길을 걷는 십자가와 같은 인생을 살다가 갈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생각하면 견딜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허무를 극복하시고 나서는 우리 모두가 어떤 존재가 되었습니까? 말구유와 같은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을 눕히는 침대로, 비린내 나는 고깃배와 같은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 전하는 천국 복음을 전하는 강단으로, 십자가 형틀과 같은 끔찍한 존재도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거룩한 제단으로 쓰임을 받게 됩니다. 우리 모두 이와 같이 변화된 존재임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이 우리를 이렇게 영광스러운 존재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오늘 우리 주변을 돌아보면 숨이 막히지 않습니까? 오죽하면 아직도 철이 덜 든 젊은이들이 열이면 여덟이 이민을 가고 싶다고 하는 충동을 느낄 정도겠습니까? 눈 앞이 보이지를 않습니다. 도대체 이 나라가 어떻게 될 지 다들 마음이 불안합니다. 처자를 거느린 가장들은 잠을 이루지 못하고 아내들은 불안해서 안절부절 하지 못하다가 교회에 오면은 그냥 울음을 터뜨리고 기도하는 소리를 가끔 듣습니다.

이렇게 어둡고 암담한 현실이지만 우리는 부활하신 주님을 바라보면서 마음속에 명심할 것이 있습니다. 비관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절망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존재는 하나님께서 놀랍도록 존귀하게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이렇게 존귀한 존재를 하나님이 내버려 두시고 못 본 체 하시겠습니까? 사람들에게 짓밟히게 내버려두시겠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이 책임져 주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절대로 비관하지 마십시오. 허무를 가지고 한숨 쉬면서 눈물을 짓는 초라한 모습을 보이지 마세요. 부활의 주님은 우리를 영광스러운 존재로 바꾸어 놓으셨습니다. 할렐루야.

죄는 이 세상에 죽음을 가져 왔습니다. 죽음보다 이 세상에 강한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죽음이 왕 노릇 한다고 말했습니다. 폭군이라는 말입니다. 여러분은 죽음의 계곡에 서 본일이 있습니까? 삶과 죽음을 가르는 경계선에 서 본 일이 있느냐는 말입니다. 한밤중에 당신의 허파 속으로 공기를 불어 넣으며 펌프질을 하는 기계 소리를 누워서 들어 본 일이 있습니까? 사랑하는 사람이 뼈만 앙상하게 남아 나중에는 그 눈빛에 있던 생기의 빛마저 서서히 사라져가는 모습을 지켜본 일이 있습니까? 만약 그런 경험이 있다면 이 죽음의 계곡은 당신에게 낯선 곳이 아닐 것입니다.
그곳은 황량한 계곡입니다. 그 곳을 방문한 사람들은 계곡 밑을 내려다 보면서 울음을 터뜨리고 할 말을 잊어버립니다. 그 계곡 끝에 서게 되면 모든 삶이 한 눈에 들어옵니다. 중요한 것과 중요하지 못한 것이 금방 구별이 됩니다. 그 자리에서는 내가 무슨 차를 타고 왔느냐, 내가 어떤 집에서 살고 있느냐 하는 것은 아무 관심거리가 되지 않습니다. 내가 어떤 학교에서 무슨 공부를 했고, 내가 사회적으로 얼마만큼 지위를 가지고 있느냐 하는 것도 안중의 대상이 되지 못합니다. 인생의 성패, 승자와 패자, 성공자와 실패자라고 하는 어떤 구별도 그 자리에서는 하등의 의미를 갖지 못합니다. 그만큼 죽음은 막강한 힘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를 새파랗게 질리게 만들고 완전히 기를 꺾어 버립니다. 이것이 죽음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그러나 우리는 부활의 주님을 찬양합시다. 예수님이 사흘 만에 부활하시어 이 무서운 죽음을 정복하셨습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죽음이 예수님을 무덤에다 쳐 넣었습니다. 그리고는 큰 돌을 굴려 가지고 그 어구를 막았습니다. 그것으로도 안심이 안 되어 가장 세도가 당당하다는 빌라도의 어인을 가지고 봉인까지 했습니다. 그것으로도 안심이 되지 않았는지 군사들을 동원해 밤낮없이 지키게 했습니다. 그 순간을 보면 죽음이 이긴 것 같습니다. 그러나 사흘만에 그 무덤에 갇혀있던 예수그리스도가 살아나셨습니다. 죽음이 할 일이 뭐가 있겠습니까? 죽음이 손을 쓸 수 있습니까? 다시 살아나는 자 앞에 죽음이 힘을 쓸 수 있습니까? 지키는 것도 헛수고요, 인봉해 놓은 것도 쓸데없는 짓이요, 아무리 군사를 동원해도 다시 상황을 돌이킬 수가 없는 일이었습니다.

찬송가 150장에 보면 이런 사실을 잘 묘사한 곡이 나옵니다.
헛되이 지키네 예수 내 구주 헛되이 봉하네 예수 내주/ 할렐루야/원수를 다 이기고 무덤에서 살아나셨네 어두움을 이기시고 나와서 성도 함께 길이 다스리시네 사셨네 사셨네 예수 다시 사셨네/사셨네 사셨네 예수 다시 사셨네
이 예수님 앞에 죽음이 무슨 힘을 쓸 수 있습니까? 죽음은 예수님 앞에 정복되었습니다. 할렐루야.

그러므로 이 예수님을 구주로 받아들인 이상 우리에게는 진정한 죽음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더 이상 죽음이 죽음이 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놓고는 죽음을 잔다고 말을 했습니다. 그리고 또 어떤 시인들은 죽음을 일컬어 요단강을 건너가는 수영이라고 했습니다. 534장에 보면 그 가사가 나오지 않습니까? '요단 강 가에 섰는데 내 친구 건너가네.' 이것이 죽음입니다. 우리 모두 요단 강 가에 서 있습니다. 건너갈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데 우리 친구들 중에 먼저 건너가는 자가 있지 않습니까? 물을 가르면서 신나게 건너가는 친구들이 있습니다. '내 친구 건너가네 저 건너편에 빛난 곳 내 눈에 환하도다.' 수영입니다. 바울은 더 멋진 말을 했습니다. 죽음이 무엇입니까? '썩을 것을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고전15:42) 다시 사는 과정이요, 약한 것을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사는 과정이요,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사는 과정이요, 육의 몸을 심고 영의 몸으로 다시 사는 과정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하신 후로는 우리 모두에게는 진정한 의미의 죽음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 앞에는 부활하신 주님과 영원히 살 그날만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최근 모 신문에 연재하는 부산대 길원평 교수의 글을 읽으면서 공감을 하고 다시 한번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는 젊었을 때 유물론 사상에 젖어 허무 주의에 빠져있던 청년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유학을 가서 그리스도를 만났습니다. 그리고는 이제 교수가 되어서 부산대학으로 돌아왔는데 지금도 자기가 예수님 때문에 죽지않고 영생을 할 존재라는 것을 생각하면 가슴에 기쁨이 있다고 합니다. 그것은 이 세상의 어떤 기쁨하고도 비교를 할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세상의 쾌락과 기쁨은 겨드랑이를 간지럽혀 나오는 웃음이라고 한다면, 예수님과 함께 영원히 살게 될 것이라는 믿음과 소망이 주는 기쁨이야말로 가슴 속 깊은 곳에서 스며 나오는 기쁨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는 가끔 새벽에 일찍 잠이 깰 때가 있다고 합니다. 침대에 누워서 '나는 이제 영원히 사시는 주님, 그 주님과 함께 영원히 사는 그 나라에서 보낼 존재로구나' 하는 것을 생각하면 꿈인지 생시인지 잘 몰라서 자기 몸을 꼬집어 본다고 합니다. 얼마나 흥분되는지, 얼마나 황홀한지 마치 구름을 타고 다니는 것 같다는 표현을 합니다.

여러분, 우리 모두가 이런 존재가 되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 모두 대단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죽음의 도구였지만 부활하신 주님으로 인하여 생명의 보좌가 되었습니다. 이 말을 하니 이야기 하나가 생각납니다. 에티오피아의 황제였던 메넬리크 2세가 약 100년 전에 자기 나라에 흉악범들이 너무 많아서 사형을 시키는 일이 자주 있었나 봅니다. 고민을 했습니다. '목을 매달아 죽이자니 매달려 있는 꼴을 보기가 싫고, 총으로 쏴 죽이자니 피를 토하고 쓰러지는 모습이 너무 참혹하고, 이것을 그렇다고 살려 놓을 수도 없고, 어떻게 하면 좋을까? 간단하게 죽이는 방법이 없을까?' 이 때 좋은 소스가 들어왔습니다. 미국이라는 나라에 가면 단추 하나만 누르면 몇 초 사이에 의자에 앉아서 피 한 방울 안 흘리고 사람이 깨끗이 죽는 그런 멋진 기구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하를 시켜서 그게 무엇인지 알아봤더니 전기의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 참 좋은 거다.' 하고는 빨리 주문하라고 호통을 쳤습니다. 드디어 그 물건이 배달되었습니다. 그런데 단추를 눌러도 작동을 안 합니다. 왜 작동을 하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그러더랍니다. '우리나라에는 전기가 없습니다. 폐하.' 이름이 전기의자라고 하니 그저 의자 이름인 줄 알았지 전기가 필요하다는 것을 아무도 몰랐고 그래서 말을 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놓긴 했는데 무용지물이 되었습니다.

황제가 고민고민 하다가 너무나 의자가 멋있게 생긴 것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나중에는 '사람 죽이는데 쓰지 못하면 나라도 앉자.'고 하고 자기가 앉는 보좌로 만들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사람을 죽이는 의자가 왕이 앉는 보좌가 된 것입니다. 참 재미있지 않습니까? 예수님을 죽인 십자가, 그것은 사형틀이고 사형의 도구였지만 예수님이 사흘 만에 부활 하심으로 그 십자가는 우리 모두에게 생명의 보좌가 된 것 입니다. 우리는 이 생명을 우리 안에 소유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영원히 이 생명을 누리면서 주님과 함께 살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부활이 주는 메시지입니다. 이 메시지를 우리가 가슴에 담고 살아야 됩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이 가운데서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하는 분이 계십니까?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믿으면 허무가 날라 갑니다. 믿으십시오. 죽음의 불안에서 여러분이 해방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 주변을 보십시오. 아직도 예수님의 부활을 알지 못해서 허무에 끌려 다니고 죽음의 공포 아래서 떨고 있는 수많은 이웃들이 있습니다. 형제 자매들이 있습니다. 이들을 방치하지 맙시다. 예수님이 부활하셨다고 외치던 제자들이나 초라한 여인들처럼 이 복음을 그들에게 전하여 그들도 우리처럼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존귀한 존재가 되도록 합시다. 이것만이 이 나라를 살리는 길입니다. 이땅의 젊은이들에게 소망을 주는 메시지 입니다. 우리 모두 이 메시지를 전하는 부활의 증인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출처/옥한흠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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