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자료 18,185편 ◑/자료 16,731편

이 시대를 구원할 자들의 모습 (살전2:1-12)

by 【고동엽】 2022. 9. 13.

이 시대를 구원할 자들의 모습  (살전2:1-12)

1형제들아 우리가 너희 가운데 들어감이 헛되지 않은 줄을 너희가 친히 아나니 2너희 아는 바와 같이 우리가 먼저 빌립보에서 고난과 능욕을 당하였으나 우리 하나님을 힘입어 많은 싸움 중에 하나님의 복음을 너희에게 말하였노라 3우리의 권면은 간사(奸詐)에서나 부정에서 난 것도 아니요 궤계에 있는 것도 아니라 4오직 하나님의 옳게 여기심을 입어 복음 전할 부탁을 받았으니 우리가 이와 같이 말함은 사람을 기쁘게 하려 함이 아니요 오직 우리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 함이라 5너희도 알거니와 우리가 아무 때에도 아첨의 말이나 탐심의 탈을 쓰지 아니한 것을 하나님이 증거 하시느니라 6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도로 능히 존중할 터이나 그러나 너희에게든지 다른 이에게든지 사람에게는 영광을 구치 아니하고 7오직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유순한 자 되어 유모가 자기 자녀를 기름과 같이 하였으니 8우리가 이같이 너희를 사모하여 하나님의 복음으로만 아니라 우리 목숨까지 너희에게 주기를 즐겨함은 너희가 우리의 사랑하는 자 됨이니라 9형제들아 우리의 수고와 애쓴 것을 너희가 기억하리니 너희 아무에게도 누를 끼치지 아니하려고 밤과 낮으로 일하면서 너희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였노라
10우리가 너희 믿는 자들을 향하여 어떻게 거룩하고 옳고 흠없이 행한 것에 대하여 너희가 증인이요 하나님도 그러하시도다 11너희도 아는 바와 같이 우리가 너희 각 사람에게 아비가 자기 자녀에게 하듯 권면하고 위로하고 경계하노니 12이는 너희를 부르사 자기 나라와 영광에 이르게 하시는 하나님께 합당히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뉴스를 통해 다 보셨겠지만 부산 경남에 오랜만에 대설이 내렸습니다. 이 시간에도 이미 확인하고 있습니다만, 교통 대란이 일어나서 많은 분들이 불편을 겪었어요. 그러나 한편으로, 49년 만에 내린 많은 눈으로 사람들이 많이 기뻐하는 것 같아요. 저희 집 앞에는 경사가 하도 심해서 차를 못타고 걸어 내려왔습니다. 미끄럼을 타고 내려 왔어요. 아이들이 미끄럼을 타고 노는데 얼마나 재미있게 노는지 몰라요. 집에 있는 큰 대야를 가지고 와서 타고, 비닐, 사과 궤짝 등을 가지고 타기도 하고, 나중엔 어른들까지 나와서 타더라고요. 그리고 밤늦게까지 창 밖에서 뭐가 번쩍번쩍해서 "겨울에 무슨 번개가 치나?" 하고 나와봤더니, 사람들이 나와서 사진 찍느라고 후레쉬 라이터를 터뜨린 것이었어요. 눈이 많이 와서 좋은 것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저도 눈이 안 오는 지방에 살다가 15년 만에 눈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창 밖에 내리는 눈을 오랫동안 물끄러미 쳐다봤어요. 눈에는 참 신기한 능력이 있는 것 같아요. 눈이 내리는 것을 가만히 보고 있자니, 많은 생각이 들었어요. 눈이 오기 전에는 사물에는 각각 제 색깔들이 있었어요. 돌, 아스팔트, 차, 초목들에 각양각색의 다른 색깔들이 있었지만, 눈은 그 모든 것을 다 덮어버리고, 몇 시간 후에는 이 세상을 온통 하얗게 만들고 있었어요.

저는 그 눈을 보면서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이와 같이 되어야 되지 않겠는가? 세상에 덮어야 할 것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수많은 고통이 있고, 신음소리가 있고, 아픔이 있습니다. 부도덕이 있습니다. 부정직이 있습니다. 고쳐져야 할 불의, 부정한 것들이 이 세상에는 너무나 많습니다. 이것을 누가 과연 덮을 수 있겠는가? 성경은 얘기합니다. 이 세상을 하얗게 변화시킬 수 있는 사람들은 구원받은 저와 여러분들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저는 그 눈을 바라보면서 기도했습니다. "주님! 제가, 또 우리 교회 성도들이, 이 땅에 사는 그리스도인들이 저런 눈이 되어 이 세상의 아픔들을 다 덮도록 해 주십시오!" 저는 창밖을 보며 꽤 오랫동안 기도했습니다.

여러분, 과연 어떻게 이 세상을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변화시킬 수 있겠습니까? 교육학자가 그것을 하겠습니까? 정치가가 하겠습니까? 시민 단체가 하겠습니까?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다가 올 세상에는 과학 문명은 더욱 더 발달할 것입니다. 얼마나 편리한 시대가 올지 모르겠어요. 이제 인간은 120살 수명에 도전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불행하게도 그것을 못 누릴지 모르지만, 오늘날 초등학생이나 이제 태어날 세대들은 120살까지 살 수 있다고 합니다. 게놈 프로젝트 덕분에!

그러나 이렇게 과학 문명이 발달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위기의 사회입니다. 모든 사회 전문가들은 우리가 사는 사회는 점점 살기 좋은 행복한 사회가 되기보다는 위기의 사회로 치닫고 있다고 입을 모으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람들이 날로 흉폭화되고 있어요. 범죄가 늘어나고 있어요. 살기는 좋아졌지만, 사람들의 마음은 점점 더 피폐해져 가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단적인 예로 오늘날 청소년 범죄가 얼마나 늘어나고 있습니까? 1970년대에는 성인과 청소년의 범죄 비율이 9:1이었어요. 그러나 2000년도에 들어서서 어떻게 되었는지 아십니까? 청소년의 범죄가 성인들의 범죄를 앞질렀어요. 1960년에서 70년도까지 학교에서 문제되었던 것들은 주로 옆 사람과 공부시간에 얘기하기, 껌 씹는 것, 복도에서 뛰는 것 정도에 불과했어요. 여러분 기억나시죠? 복도에서 뛰다가 잡혀서 손들고 서 있던 것. 이전에는 차례 지키지 않는 것, 복장 불량, 머리 안 깎는 것, 숙제 안 해오는 것, 이런 것들이 학교에서 문제였어요. 그러나 오늘날 문제가 뭔지 아십니까? 중·고등학교의 문제를 뽑는다면 첫 번째가 마약이에요. 두 번째가 술과 담배입니다. 그리고 폭행, 임신, 강간, 강도, 자살, 이런 것들이 오늘날 청소년들이 저지르는 범죄예요. 청소년의 비행이 우리 사회를 위기로 몰아 넣고 있는 이유는, 이들이 바로 우리 사회를 장차 짊어지고 갈 주인공들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여러분의 자녀 얘기를 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모든 사회 전문가들은 앞으로의 사회를 살기 좋은 사회라고 정의하기보다 점점 위기로 치달을 것이라고 예견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위기로 치닫는 이 사회, 누가 이 사회를 변화시키겠습니까? 저와 여러분이 해야 할 줄 믿습니다. 아멘! 우리가 해야 합니다. 당신이 해야 합니다. 우리가 저 눈처럼 이 사회에 얼룩진 것들을 하얗게 덮어야 합니다. 그러나 어떻게 그것이 가능하겠습니까? 오늘 저와 여러분이 이 아침에 읽은 본문은 이방의 도시요, 우상의 도시였던 데살로니가를, 바울과 그 팀들이 어떻게 변화시켰는가를 자세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죄악이 팽배했던 우상의 도시에 아름다운 교회를 세울 수 있었는가 하는 중요한 질문에 대해, 오늘의 본문은 자세하게 대답해 주고 계십니다. 여러분,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중요한 이유는, 우리 사회 역시 동일한 대답과 처방을 필요로 하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이 위기의 사회를 변화시키겠습니까? 오늘 하나님은 이 본문을 통해 데살로니가에 있는 도시뿐만 아니라, 이 부산을 변화시키기 위해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해야만 될 일 세 가지를 주문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어떻게 저 눈처럼 이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는지에 대해 하나님은 말씀합니다. 첫 번째로 올바른 동기를 가지라 말씀합니다. 두 번째는 올바른 내용을 가져야 합니다. 세 번째는 올바른 태도입니다. 이 세 가지를 가질 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저 밖에 내린 눈처럼 이 세상의 얼룩들을 하얗게 덮을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먼저 우리는 올바른 동기를 가진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1. 올바른 동기를 가지라

우리의 가슴에 항상 올바른 동기를 품고 살아야 이 세상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고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은 언제나 겉모습을 봅니다. 아마 그것이 우리가 외모를 치장하는데 열심을 내는 이유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외모가 참 중요합니다. 그래서 저는 여성들이 화장하지 않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아내는 적어도 화장을 해야 되는데, 제가 바라는 것은 남편보다 먼저 일어나서 화장을 해달라는 거예요. 저는, 제가 먼저 일어나서 아내의 화장안 한 얼굴을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내가 속았구나!" 라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화장을 해야 돼요. 외모가 중요해요.

그러나 여러분, 이 세상에 다른 사람의 겉모습으로 인해 진정으로 변화된 사람을 보았습니까? 여러분이 화장을 잘 했기 때문에, 옷을 잘 입었기 때문에, 지위가 높기 때문에, 여러분이 그랜저를 몰고 다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변화되었다고 하는 사람들을 만나 본 적이 있나요? 없습니다. 아무도 없습니다. 친구의 진급과 멋있는 성공 때문에 도전 받아 삶을 바꾼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는 늘 겉모습을 좋아하지만, 겉모습만으로는 사람을 바꿀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을 진정으로 변화시키는 것은 겉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는 마음인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 안에 올바른 동기를 가질 때 내 주위의 사람들, 내 자녀들, 내 남편, 내 아내는 비로소 변화되기 시작하는 거예요.

오늘날 여러분 주위를 돌아보십시오. 우리 주위에 겉은 화려하지만 그 마음에 동기가 불순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요. 겉으로는 웃음을 띄지만, 속으로는 우리를 욕하는 사람들! 겉으로는 우리에게 좋은 말을 내뱉지만, 속으로 저주를 품고 있는 사람들! 여러분, 이런 사람들은 이 사회를 구원할 수 없다고 하나님은 말씀합니다. 누가 사람을 진정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가? 그 마음에 동기가 순수한 사람들입니다. 올바른 동기를 가진 사람들입니다.

바울과 그 팀 디모데와 몇몇 일행들은 그 우상의 도시 데살로니가에 들어가서 그 도시를 발칵 뒤집어 놓았습니다. 하얀 눈이 세상을 덮었듯이 그 도시를 변화시켰습니다. 그런데 자신들이 그 도시를 그 짧은 기간에 어떻게 변화시켰는가를 그는 이렇게 설명해 줍니다. 우리가 올바른 동기를 가지고 그 도시에 들어갔기 때문이라고요. 3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우리의 권면은 간사(奸詐)에서나 부정에서 난 것도 아니요 궤계에 있는 것도 아니라

세 가지에 대해 아니라고 합니다. 그 마음의 동기를 설명하는데 간사도 아니요, 부정도 아니요, 궤계가 그 마음에 없었다고 얘기합니다. 이 말을 잘못 알아들을까 봐 사도 바울은 5절과 6절에서 이 세 단어를 이렇게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5절을 보십시오.

너희도 알거니와 우리가 아무 때에도 아첨의 말이나 탐심의 탈을 쓰지 아니한 것을 하나님이 증거하시느니라

"아첨의 말"을 하지 않았어요. 간사가 없었다는 거예요. 간사와 아첨의 말이 무엇입니까? 자신의 유익을 위해 상대를 유혹시키는 과장된 말, 포장된 자세를 갖지 않았다는 거예요.
여러분, 오늘날 우리 주위를 보세요. 왜 사람들이 상처받습니까? 웃음을 띄우면서, 양복을 입고, 멋있는 자세로 우리에게 다가오지만, 멋있는 자세로 남편과 아내 노릇을 하는 것 같지만, 그 마음에 간사가 있는 거예요. 자신의 유익을 위해 늘 포장된 말을 합니다. 말을 부풀립니다. 말을 바꿉니다. 사도 바울은 얘기합니다. "얘들아! 너희가 어떻게 그렇게 변화되었는지 아니? 내가 너희에게 들어갈 때 내 마음에 간사가 없었다" "너희가 이 세상을 변화시키기 원하니? 먼저 너희 마음속에 간사를 없애거라. 아첨의 말을 버리거라"

부정이란 말을 그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5절에 "탐심의 탈"을 쓰지 않았다고 합니다. 왜 사람들이 부정을 저지르죠? 욕심이 있기 때문에 부정을 저질러요. 왜 비리가 생깁니까? 돈에 대한 욕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왜 성적인 부정을 저지르죠? 성에 대한 욕심이 있기 때문이에요. 모든 것이 탐심의 탈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 궤계를 바울은 6절에서 이렇게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6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도로 능히 존중할 터이나 그러나 너희에게든지 다른 이에게든지 사람에게는 영광을 구치 아니하고 사람에게는 영광을 구치 아니하고

그는 이러한 동기를 가졌습니다. 그러면 그가 가졌던 동기를 한마디로 뭐라고 설명합니까? 4절에 나와있어요.

오직 하나님의 옳게 여기심을 입어 복음 전할 부탁을 받았으니 우리가 이와 같이 말함은 사람을 기쁘게 하려 함이 아니요 오직 우리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 함이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누가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까? 그 마음에 동기가 올바른 사람이에요. 무슨 일을 하든지, 아내 노릇을 하던지, 남편 노릇을 하던지, 부모 노릇을 하던지, 교회에 나와서 성가대 노릇을 하던지, 교사 노릇을 하던지, 무슨 봉사나 일을 하던지, 항상 누구를 만나든지 간에 그 마음의 동기가 올바른 사람들! 이러한 사람들에 의해 우리 주위의 사람은 변하고, 우리 사회는 변화될 수 있을 것이라고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동기가 올바른 사람들은 사람을 기쁘게 하려고 노력하지 않습니다. 늘 그들의 초점은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실 것인가! 코람 데오! 하나님 앞에서 사는 사람들입니다. 무슨 일을 하든, 언제 어디에 있든, 사람을 보지 않고 항상 하나님을 의식하여 사는 사람들!

사도 바울은 이 마음을 가지고 데살로니가에 들어갔고, 그 결과 이 우상의 도시, 죄악의 도시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죄악을 버리고, 하나님의 아름다운 도시로 거듭난 변화를 맞은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당신은 어떻습니까? 여러분 마음의 동기를 살펴보십시오. 지금 여러분 마음 중심에 무엇이 자리 잡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하는 마음이 있으십니까? 사람이 몰라줘도 괜찮아요. 교회에서 봉사할 때, 가정에서 일을 할 때, 사업을 할 때, 사람의 평가가 중요하지 않아요. 모든 것을 다 아시는 하나님! (코람 데오!)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거예요.

오늘날 이 사회는 점점 더 혼탁해지고 있습니다. 아니, 앞으로 위기의 사회가 우리 앞으로 다가올 것입니다. 여러분의 자녀들은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죄악에 가까이 접근하고 있습니다. 컴퓨터를 통해, 수많은 다른 것들을 통해. 어떻게 우리가 그들을 변화시키며, 그들을 하나님의 온전한 보혈로 깨끗하게 만들 수 있을까요? 먼저 우리 마음 안에 올바른 동기를 가지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두 번째 우리가 이 사회를 변화시키기 위해 필요한 것은 올바른 동기뿐만 아니라, 올바른 내용이 필요합니다.


2. 올바른 내용을 가지라

성도들을 가만히 관찰해 보면, 무엇이 중요한가를 몰라서 실패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신앙생활에 있어서 방법도 중요하지만, 신앙의 내용이 훨씬 더 중요합니다. 예를 들어서 기독교와 타종교의 차이점이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내용일까요? 방법일까요? 내용입니다.

방법에 대해서 생각해 봅시다. 우리가 무엇으로 신앙생활 합니까? 예배드립니다. 그런데 다른 종교에는 예배가 없습니까? 예배가 있어요. 우리는 기도를 통해 신앙생활을 유지해 갑니다. 그러면 다른 종교에는 기도가 없나요? 저는 기도가 없는 줄 알았어요. 제가 1월 1일에 해인사를 갔습니다. 목사가 1월 1일날 기도원은 안 가고 왜 해인사를 갔냐면 한국의 기도원을 다녀보면 너무 시끄러워요. 제가 기도 좀 하려고 해인사를 갔는데 너무너무 조용해요. 여러분, 우상은 없는 것 아닙니까? 저는 절에 가도 아무런 불편을 느끼지 않아요. 제가 며칠 묵으려고 지나가는 스님을 불렀어요. "방을 좀 빌릴 수 있습니까?" 빌릴 수 있대요. 그런데 보통 사람에게는 안 된다는 거예요. "뭐 하려고 그럽니까?" "기도하려고 그럽니다" 그랬어요. 그랬더니 "기도하는 사람에게 방을 빌려드리긴 드리는데 보통 기도하는 사람은 안되고 특별 기도하는 사람에게는 방을 빌려 드립니다" 그래서 제가 "특별 기도하려고 그럽니다" 라고 했어요. 그런데 속으로 굉장히 놀랐어요. "야! 절에도 기도가 있구나!" 단어가 똑같아요. '기도' 불교에도 40일 금식기도가 있어요. 철야기도가 있더라고요. 새벽기도 하더라고요. 다 해요. 헌금 없습니까? 단어만 다를 뿐 헌금 있습니다. 설교가 없는 줄 아십니까? 불교에서는 설법이라고 합니다. 설법을 듣다가도 사람들이 울어요. 감동 받아요.

여러분, 이러한 것들은 차이점이 아니에요. 그렇다면 도대체 기독교가 다른 종교와 구분되는 차이점은 무엇일까요? 그 모든 다른 종교를 믿고 있는 사람들, 그들이 예배하고, 기도하고, 헌금 드리고, 봉사하고 모든 것을 다 할지 몰라도, 그 안에 한 가지 없는 것이 있습니다. 여러분, 그게 뭔 줄 압니까? 복음이 없어요. 거기에는 복음이 없어요. 내가 어떻게 하면 내 노력으로 신에게 다가갈 것인가 하는 행위의 종교일 뿐, 그 안에 참 복음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 세상을 변화시키지 못하는 거예요. 왜? 복음에만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바울이 무엇이라고 간증했습니까? 그는 온갖 종교생활이란 종교생활은 다 해 본 사람이었어요. 그는 바리새인 중에 가말리엘 문하생으로서 온갖 종교생활의 의식을 철저히 지켰던 사람이요, 하루 세 번씩 기도했던 사람이요, 일주일에 3일 금식했고, 수입의 2.3조를 하나님께 드렸고, 구약의 율법을 최선을 다해 지켰어요. 그러나 그는 구원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다 그는 어느 날 십자가 위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다메섹 도상에서 만나게 된 이후, 그는 놀라운 사건을 경험하게 됩니다. 자신도 구원할 수 없었던 그에게 하나님의 능력이 힘있게 부어지자, 자신이 영원한 구원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세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는 능력의 사도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로마서 1장 16절에서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무엇이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요? 복음이요. 복음! 그래서 오늘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에 들어가서 자기가 한 일, 무엇을 통해 이 도시를 변화시켰는가를 어떻게 설명합니까? 4절을 보십시오.

오직 하나님의 옳게 여기심을 입어 복음 전할 부탁을

그리고 2절 마지막 부분에,

우리 하나님을 힘입어 많은 싸움 중에 하나님의 복음을 너희에게 말하였노라

8절. 우리가 이같이 너희를 사모하여 하나님의 복음으로만 아니라

9절. 밤과 낮으로 일하면서 너희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였노라.

여러분, 이 짧은 장 중에 '복음' '복음' '하나님의 복음'이 여러 번 등장합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정말 복음을 아십니까? 제가 요즘 목회를 하면서 당혹감을 느낍니다. 저는 때로 밤에 잠을 자지 못해요. 그 이유가 뭔지 아세요? 제가 인간적으로 속단할 수 없지만, 그러나 목사로서 제 느낌에, 교회에 나오는 오래된 그 어떤 사람들 중 제법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모르고 있다는 겁니다. 우리 교회 얘기예요. 머리로 모른다는 얘기가 아니에요. 복음을 체험하지 못한 사람들, 하나님의 복음으로 그 삶을 바꾸어 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 교회 안에 얼마나 많은 지 모릅니다. 그들은 예배드립니다. 그리고 수요예배도 나옵니다. 기도도 합니다. 헌금생활도 합니다. 봉사도 합니다. 그러나 갈보리 십자가 위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적으로 뜨겁게 만나본 적이 없는 사람들! 종교 생활은 하는지 모르지만 복음을 받아들여 본 적이 없는 사람들!

여러분, 우리의 삶에 왜 영향력이 없는지 아십니까? 왜 내가 예수 믿었는데도 내 남편과 아내가 변하지 않습니까? 왜 내가 예수 믿은 지, 복음을 받은 지 5년, 10년이 되었는데도 내 자녀들이 변화되지 않습니까? 내 직장 동료가 요지부동입니까? 그 이유는 다른 데 있지 않아요. 어쩌면 우리가 복음을 입으로만 외칠 뿐 영혼으로 받지 않았기 때문일 수도 있어요. 당신은 복음을 아십니까? 하나님의 능력을 아시나요? 우리가 어떻게 이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습니까? 내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끼칠 수 있을까요? 선행을 행해서요? 아니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우리 마음 안에 있는 복음이, 하나님의 복음이 내 주위를 밝게 하고, 이 사회를 하얗게 덮을 능력이 있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 복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 땅을 변화시키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나님은 그 방법을 이렇게 가르쳐 주십니다. 우리 신명기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신명기 4장 1절.

이스라엘아 이제 내가 너희에게 가르치는 규례와 법도를 듣고 준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살 것이요

"가르치는" 이 단어를 히브리어로 된 성경을 읽다가 놀라운 것을 발견했어요. 뭐냐 하면, '가르치다' 라는 이 단어가 여기에는 '가르치다'라고 나왔는데, 5장으로 가 보세요. 5장 1절.

모세가 온 이스라엘을 불러 그들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아 오늘 내가 너희 귀에 말하 는 규례와 법도를 듣고 그것을 배우며 지켜 행하라

4장은 '가르쳐 행하라' 5장은 '배우며'. 그런데 우리 나라 성경에는 다르게 번역된 이 히브리어 단어가, 히브리어 성경에는 똑같이 같은 단어로 기록되어 있어요. 무슨 얘기예요? 지금 하나님은 이것을 통해 놀라운 것을 말씀하는 거예요. 히브리어에는 배우는 것과 가르치는 것이 같은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여러분, 어떤 사람이 가장 잘 가르치는 사람이 될 수 있는가?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나에게 배우는 사람이라. 네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다른 사람을 변화시키기를 원하니? 그렇다면 먼저 네가 배우거라. 나에게 배우거라"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사람은 삶에 영향력이 있어요. 새 가족을 붙여 놓으면 얼마나 빨리 자라고 변화가 있는지 몰라요. 그런데 어떤 사람은 새 가족을 붙여 놓으면 맹숭맹숭, 그러다가 꼭 자기같이 만들어 놓다가, 한두 달 후면 안 보입니다. 교회는 오래 나왔는데 영향력이 없는 사람, 그 사람들을 관찰해 보면 결론은 하나예요. 영향력이 있는 사람의 특징은 잘 배워요. 설교 듣는 자세가 다르고, 성경공부 하는 자세가 다르고, 기도하는 자세도 달라요. 하나님 앞에 나와서 배워요. 나오기는 몇 십 년을 나와도 대충대충.. 하나님께 배우지 않는 사람들은 영향력이 없습니다.

여러분, 누군가를 변화시키고 싶으십니까? 이 사회를 변화시키는 주역이 되고 싶으십니까? 그렇다면 먼저 하나님 앞에 복음을 배우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여기서 말씀드리는 것은 단순한 복음을 말하는 게 아니에요. (그러나 우리에게 단순한 복음이 필요합니다). 십자가의 복음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이 십자가의 복음을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을 다 알아야 할 줄 믿습니다. 저는 성경을 한 번 읽었을 때와, 두 번 읽었을 때, 그리고 해가 가면 갈수록 그 단순했던 복음이 내 마음에, 얼마나 깊게 다가오는지요.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보다도, 플라톤의 철학보다도 이 복음의 깊이를 저는 더욱 깊이 느끼고 있습니다.

어떻게 이 사회를 변화시킵니까? 올바른 무엇을 내용을 가져야 돼요. 2001년도엔 여러분과 나를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 복음으로, 충만하게 채우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우리가 이 사회, 내 주위의 사람들을 변화시키기 위해 두 가지를 말씀드렸습니다. 먼저 우리 마음에 올바른 동기, 간사나 부정이나 궤계를 싹 없애세요. 깨끗한 동기! 누구를 만나도 그 마음의 동기가 깨끗해야 해요. 두 번째 그 안에 뭘 채워 넣어요? 하나님의 복음! 동기가 불순한데 어떻게 하나님의 복음이 들어가겠어요? 항아리에 더러운 물이 가득 차 있으면 깨끗한 정수물이 들어가겠어요? 먼저 비워야 돼요. 깨끗한 동기, 그 다음에 하나님의 복음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다른 사람을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올바른 태도를 가져야 한다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3. 올바른 태도를 가지라

사도 바울은 자신들이 데살로니가에 들어가서 그들을 대할 때 태도를, 두 가지로 설명해 주었어요. 7절 봅시다.

오직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유순한 자 되어 유모가 자기 자녀를 기름과 같이 하였으니

'유모'라는 번역이 한자말로 잘 쓰면 맞고, 우리가 잘 아는 뜻으로 이해하면 잘못된 거예요. 우리가 보통 유모라고 하면, 아이를 낳았는데 젖이 없을 때 다른 여자를 데려와서 젖을 먹입니다. 그 때 유모를 데려와서 키웠다고 말하죠. 여기서는 그런 유모의 뜻이 아니에요. 여기서는 어머니란 뜻입니다. 그런데 어머니는 어머닌데 어떤 어머니인가? 대학생 자녀를 둔 어머니가 아니라, 이제 막 태어난 갓난아이를 둔 어머니, 진짜 어머니를 얘기하는 겁니다. 어머니도 다 똑같은 어머니가 아니에요. 아이가 대학교에 가 보세요. 중·고등학교 때부터 속 썩이다가 대학교에 가면 너무 좋지요. 지난 번에 이동원 목사님이, 애들이랑 떨어져 있는데 방학이 되어서 1년 만에 오면 너무 좋대요. 오랜만에 만나니까 얼마나 좋은지, 그런데 한 달 있다가 떠나고 나면 더 좋대요. 이해가 가시죠?

그러나 아이가 어릴 때 한번 보세요. 여자가 제일 강할 때가 언제인줄 아세요? 아기를 금방 낳은 여자는 건드리지 마십시오. 죽습니다. 죽어! 그 아기를 얼마나 사랑하는지요. 오늘 사도 바울이 이 말을 한 거예요. "내가 데살로니가에 들어가서 너희에게 어떤 태도로 대했는 줄 아니? 유모가 자기 자녀를 기름과 같이, 갓난아이를 가진 어머니가 그 아기를 기름과 같은 태도로 내가 너희를 대하였다"고 고백합니다. 그것뿐만 아닙니다. 11절.

너희도 아는 바와 같이 우리가 너희 각 사람에게 아비가 자기 자녀에게 하듯 권면하 고 위로하고 경계하노니

아버지처럼 대했다는 거예요.

지난 수요일 날, 정동섭 교수님이 와서 좋은 강의를 해 주셨습니다. 그 때 그 분이 지적해 주신 것처럼, 한국 교인들의 문제점은 뭔가? 하나님을 겉으로는 믿는데, 속에 보면 공자와 부처를 믿고 있는 거예요. 저는 그걸 많이 느껴요. '아버지'하면 한국 사람에게는 별로 좋은 생각이 안 들어 있어요. 아주 특별한 아버지로 인해 아버지에 대해 따뜻하게 느낄지 모르지만, 대부분은 굉장히 엄하고, 교수님 말씀처럼 밥상이나 매일 뒤엎은 아버지로 기억되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그러나 이 당시 로마 사람에게 아버지는 어떤 역할이었느냐? 교육의 책임은 어머니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에게 있었어요. 아버지가 자녀를 교육했어요. 어떻게 교육했는가에 대해 세 가지를 얘기합니다. '권면하고' 이 말은 격려했다는 말입니다. Encouragement!
학교에서 60점 맞아와서 낙심해요. 꼴등했어요. "괜찮아 아들아, 나도 옛날에는 그랬어!" 그러면서 아들을 격려하는 거예요. 자기도 별로 못했으면서 공부 못하는 애들 보면 미워하는 아버지가 있어요. 머리를 때리면서 "이놈아, 나가 죽어라!" 그러면 안돼요. 저는 애들을 어떻게 격려 하냐 하면, 애들이 뭘 못하면 (저는 사실 잘한 게 많은데), "나도 못했어" 라고 해요. 그러면 애들이 굉장히 격려 받아요. "아버지도 그랬다는데 뭐" 하며 힘을 얻습니다.

'위로' Comfort! 위로해 주는 거죠. 그 다음, '경계하노니' 이것은 뭡니까? 영어로 Urging! 독려하는 거예요. 경계한다고 해서 몽둥이로 두들겨 패는 게 아니라, 격려하고 독려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태도를 가졌다는 거예요. 이 태도가 어떤 태도입니까? 한마디로 말하면, 중요한 핵심은 8절에 나타나 있는데 다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우리가 이같이 너희를 사모하여 하나님의 복음으로만 아니라 우리 목숨까지 너희에게 주기를 즐겨함은 너희가 우리의 사랑하는 자 됨이니라
우리 무엇까지 주기를 즐겨함은? 목숨까지. 왜요? 너희를 사랑하기 때문이라고요.

여러분, 오늘 우리의 관계에 있어서 문제점이 무엇인 줄 압니까? 왜 우리 주의의 사람들이 변화되지 않는 줄 아십니까? 요점은 하나입니다. 사랑이 없기 때문이죠. 목숨을 주는 사랑이 없기 때문이에요. 요새 부모도 자식을 그렇게 사랑하지 않아요. 목숨을 주면서까지 사랑하는 사람을 찾기 어려워요. 심리학자들의 일관된 증언은 "사람은 결코 기술로 변화되지 않는다. 오직 사랑으로만 변화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일반 심리학자들의 결론이에요. 오늘날 우리 주위에 기술은 많습니다. 그러나 사랑이 없어요.

여러분, 씨랜드 사건을 기억하십니까? 유치원생 23명이 수련회를 가서 불에 타 죽었습니다. 제가 그 기사를 읽다가 그 날 아침 내내 마음이 아팠어요. 그 가운데 18명이 한 방에서 죽었어요. 그 18명이 전부 창가에 모여 소복이 새까맣게 타 죽었어요. 무슨 얘기예요? 그 아이들이 문을 열려고 했다는 거예요. 창문으로 나가면 살 수 있다는 것을 알았어요. 그래서 너도나도 창가로 모여서 그 창문 앞에 소복이 모여 타 죽었어요. 남의 일로 생각하지 말고 여러분의 자녀가 거기 있었다고 생각해 보세요. 아이들이 자다가 연기가 나고 뜨거워 일어나 깼습니다. 방문을 열려고 했는데 교사들이 밖에서 문을 다 잠가놨어요. 열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창문으로 나가면 살겠다는 것을 알고, 발버둥치며 창문 앞에 모여 얼마나 부모를 외쳐대며 불렀겠습니까? 그러다가 그들은 모다 타 죽었습니다. 그 때 교사들은 무엇을 했나요? 새벽 1시에 모여서 소주 파티를 하고 있었다고 신문 기자는 얘기합니다. 교사 1명만이라도 그들과 같이 잤더라면, 그 방에만 있어 주었더라면, 그들은 죽지 않았을 거예요. 사랑이 없는 교육, 사람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무엇이 사람을 변화시킵니까? 우리의 태도입니다. 남편과 아내와 자녀와 내 주일 학교에 맡겨진 학생들, 내 주위의 사람들, 내게 맡겨진 하나님의 사람들을 내 목숨같이 사랑해야 한다고 사도 파울은 말합니다. 오늘날의 세상은 사랑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 선배 가운데 한 분이 지으신 찬송 가사를 여러분에게 읽어 드리겠습니다. 373장.

세상 모두 사랑 없어 냉랭함을 아느냐 곳곳마다 사랑 없어 탄식 소리뿐일세
악을 선케 만들고 모든 소망 채우는 사랑 얻기 위하여 저들 오래 참았네
사랑 없는 까닭에 사랑 없는 까닭에 사랑 위해 저희들 오래 참고 있었네

곳곳마다 번민함은 사랑 없는 연고요 측은하게 손을 펴고 사랑 받기 원하네
어떤 이는 고통과 근심 걱정 많으니 사랑 없는 까닭에 저들 실망하도다
사랑 없는 까닭에 사랑 없는 까닭에 사랑없는 까닭에 저들 실망 하도다

어떤 사람 우상 앞에 복을 빌고 있으며 어떤 사람 자연 앞에 사랑 요구하도다
(왜 우상을 섬기는지 아십니까? 사랑 때문에 그러는 거예요)
먼저 믿는 사람들 예수 사랑 가지고 나타내지 않으면 저들 실망하겠네
예수 사랑 가지고 예수 사랑 가지고 나타내지 않으면 저들 실망하겠네

기갈 중에 있는 영혼 사랑 받기 원하며 아이들도 소리 질러 사랑 받기 원하네
저희 소리 들을 때 가서 도와줍시다 만민 중에 나가서 예수 사랑 전하세
예수 사랑 전하세 예수 사랑 전하세 만민 중에 나가서 예수 사랑 전하세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나 혼자 예수님 믿고 구원받은 자로 이 세상에 부름 받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주님의 비전이 아닙니다. 내 자녀를 변화시켜야 합니다. 내 배우자를 변화시켜야 합니다. 나를 만나는 사람들마다 하나님 앞에 올바로 세워지는 변화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 땅을 눈과 같이 하얗게 덮을 의무가 있는 자들입니다. 어떻게 할 수 있겠습니까? 올바른 동기를 가집시다. 올바른 내용으로 우리의 마음을 채우십시다. 하나님의 복음으로!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나아가서 변화시킵시다.  

출처/박정근 목사 설교 중에서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