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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당신은 은혜의 보좌로 나아가 있는가?

by 【고동엽】 2022. 9.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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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옥한흠 목사님의 저서 로마서 강해 1권 <내가 얻은 황홀한 구원> 286쪽에 있는 글입니다.

 

 

15. 당신은 은혜의 보좌로 나아가 있는가?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이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을 얻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

 

로마서 5장 1~11절

 

 

 

 

 약 1세기 전 인물로서 우리가 설교를 통해 자주 듣기도 한 조지 뮬러라는 기도의 영웅이 있습니다. 그분의 기록을 보면 어떻게 계산을 했는지 모르지만 일생 동안 2만 5천 번의 기도 응답을 받았다고 합니다. 이것은 그가 은혜받고 기도하기 시작한 20세 전후부터 80세가 넘기까지 매일 한 번씩 응답을 받았다는 말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그는 자기 돈 한 푼 없이 일생 동안 만 명 이상의 고아를 먹여 살렸다고 합니다.
 한 명의 고아를 성탄 때나 연말에 도와 주는 일도 우리는 이리 계산하고 저리 계산하고 하는데 어떻게 만 명이 넘는 고아들을 평생 먹여 살릴 수 있었을까요? 또한 그는 중국에 200만 권 이상의 성경과 300만 권 이상의 신앙 도서를 보냈다고 합니다. 그리고 10만 명의 주일학교 학생들을 평생 교육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를 잘 알지 못하는 불신자들은, 분명히 숨겨 놓은 막대한 재산이 있을 것이라고 수군거렸다는 것입니다.
 조지 뮬러가 81세 때 신학교 특강 강사로 초빙되어 갔는데, 그때 신학생들이 "돈 한 푼 없이 어떻게 일생 동안 그렇게 넘치도록 받아 일할 수 있었는지 그 비결을 말해 주십시오"라고 하자 그는 앉아 있던 의자에서 일어나 무릎을 꿇고 의자에 팔을 기대고 기도하는 모습을 보인 다음 "이것이 나의 비결입니다"라고 했다는 유명한 일화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똑같은 기도를 하는데도 어쩌면 그 사람은 그토록 놀라운 응답을 받으면서 살았을까요? 참 부러운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기도하면 조지 뮬러를 생각하게 되고, 그의 일대기를 읽을 때마다 "기도는 능력이 있구나. 기도는 참 놀라운 성도의 특권이구나. 기도의 응답은 정말 엄청나구나"하는 것을 웅변적으로 전해 듣게 됩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은 하나님의 자녀가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축복들이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 중에서 본문 2절에 있는 말씀을 중심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는 자의 축복에 대해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이 험하고 더럽고 악하고 마음대로 안 되는 세상에서 예수 믿는 사람이 누릴 수 있는 큰 축복과 특권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저는 서슴치 않고 기도라고 대답하고 싶습니다. 하나님 앞에 기도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 이것만큼 자랑스러운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기도를 통해서 필요한 것을 조지 뮬러처럼 얼마든지 얻어낼 수가 있으니 말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내가 할 수 없는 것을 다 할 수 있도록 해 주신다는데 그것만큼 좋은 것이 어디 있습니까? 이 시간 우리는 '기도 응답' 하면, 먼 나라 사람 이야기할 필요없이 "나를 보시오!"라고 외칠 수 있을 만큼 이 축복을 누리고 있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오늘 본문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로 말미암아'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2절).
 
 얼핏 보기에는 의미가 별로 어렵지 않은 것 같은데 실은 얼른 그 의미가 마음에 들어오지 않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말씀은 자주 읽으면서 생각을 해야 합니다. 제가 조금 풀어서 다시 한 번 말씀 드리겠습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지금 서 있는 이 은혜를 주신 하나님 아버지께 들어감을 얻었다" 여기서 '얻었다'는 동사를 '얻고 있다' 라는 현재형으로 사용해도 틀리지 않습니다. 이렇게 읽으니까 무슨 말씀인지 조금 감이 잡히는 것 같지 않습니까?
 여기서 먼저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들어감을 얻었다' 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누구한테 계속적으로 가까이 접근할 수 있는 자세 혹은 특권을 말합니다. 그리고 접근을 하되 한 번 들어갔다 나오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출입할 수 있는 행위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루 열 번 스무 번도 좋고 1년 365일은 물론이고 일평생 드나들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이 기도입니다. 물론 들어감을 얻은 은혜 안에는 마지막 날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서 구원을 얻는 것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우리가 이 험한 세상을 살면서 시시때때로 누릴 수 있는 기도의 특권을 더 앞세우고 있는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위하여 6시간 이상 무서운 고통과 씨름하시다가, 다 이루었다고 소리치시며 운명하셨습니다. 이때에 성전에 있는 큰 휘장이 둘로 찢어졌습니다. 그 휘장은 대제사장 외에는 아무도 하나님이 계시는 지성소에 접근할 수 없도록 하기 위해 쳐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그 순간 휘장이 둘로 찢어지면서 그 사이로 누구든지 하나님 앞에 들어갈 수 있는 큰 길이 열렸습니다. 기도의 길이었습니다. 기도할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기도는 '그로 말미암아' 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 앞에 언제든지 나가서 기도할 수 있는 은총을 입은 것입니다.
 1절부터 11절까지 유의해서 읽어 보세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심을 네 번이나 반복해서 말씀합니다. 8절에서는 뭐라고 합니까?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하셨다"고 합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언제든지 그에게로 나아가면 반가이 맞아 줄 수 있는 사랑의 품이 활짝 열려 있다는 의미가 됩니다. 기도가 뭡니까? 하나님의 사랑의 품을 향해 나아가는 것입니다.
 누가 그렇게 만들었습니까? 우리를 위해 피 흘려 주신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9절에는 뭐라고 합니까? 예수님이 우리를 위하여 피를 흘리심으로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 항상 진노하시는 그의 감정을 거두셨다고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는 데 방해가 되는 장애물이 말끔히 사라진 것입니다.
 10절에서는 우리가 아직 원수, 즉 하나님과 도무지 상종할 수 없는 관계에 있을 때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는 이제 원수로서가 아니라 모든 죄를 용서받은 의인으로서 하나님 앞에 언제든지 나아가서 구할 수 있게 되었다고 말씀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는 안내자요, 중보자요, 대제사장이 되시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3장 18절은 이 사실을 좀더 명료하게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그리스도께서도 한 번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벧전 3:18).
 
 이것은 우리가 구원받고 천국에 들어가는 것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 살 동안 하나님 앞에 언제든지 기도하는 자로 나갈 수 있도록 해 주셨다는 의미입니다.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할 때마다 우리의 중보자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그의 이름을 받들고 하나님께 나가게 됩니다.
 
 "그 날에는 너희가 아무것도 내게 묻지 아니하리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요 16:23).
 
 예수님의 인도를 받아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 앞에 나가서 구하면 우리 하나님은 두 가지를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성경에 보면 주신다고 약속하신 것이 수없이 많지만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모든 것을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다 가지고 계시잖아요. 안 가지고 계신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모든 것을 주십니다. 로마서 8장 32절을 보면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롬 8:32).
 
 두 번째로 또 주신다고 약속하신 것이 있습니다. 좋은 것입니다. 모든 것 주셔도 나쁜 것 주시면 곤란하지요. 좋은 것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에게는 좋은 것만 있으니까요. 그렇습니다. 나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마태복음 7장 9, 10절을 보면 예수님은 참 기막힌 비유를 가지고 우리에게 이 사실을 깨우쳐 주십니다.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면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면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마 7:9, 10).
 
 모든 것, 좋은 것, 이것이 기도하는 자가 기대하는 것입니다. 꼭 기억하세요. 어떻게 보면 하나님께서 자기 말에 자기가 책이 잡힌 것처럼 보이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적인 표현입니다. 좋은 것은 모두 다 주겠다고 약속하셨으니 하나님 편에서는 빠져나갈 수 있는 길이 없습니다. 자기의 약속을 책임져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더 신이 나서 "내놓으세요" 하며 요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그러므로 기도는 우리가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매일의 영광이요, 기쁨이요, 행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담대하게 기도할 수 있는 두 가지 이유
 
 예수를 믿음으로 의인의 신분이 되었기 때문에
 다음으로 우리가 함께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바로 2절에 나오는 '우리가 믿음으로 지금 서 있는 은혜'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예수를 믿음으로 의롭게 된 우리의 신분을 영원토록 변함없이 보장해 주시는 은혜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음으로 모든 죄를 용서받았습니다. 그러나 일시적인 용서인지 어떻게 압니까? 이 점에 대해 불안해할 필요가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한 번 용서하시면 영원히 용서받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지금 서 있는 은혜입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은 의인의 신분이 되었습니다. 이 신분은 영원히 흔들림이 없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우리는 이 은혜에 서 있습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자녀가 되었습니다. 이것 역시 영원토록 보장되는 행복입니다. 우리는 지금 이 은혜에 서 있는 것입니다. 흔들릴 수 없는 은혜입니다. 만약에 이와 같이 우리의 신분이 보장되지 않는다든지 오늘은 용서를 받았지만 내일 어떻게 될지 모른다고 하면 우리가 불안해서 어떻게 하나님 앞에 마음 놓고 나가 기도하겠습니까? 이와 같은 불안과 의심을 가을 바람에 날려가는 가랑잎처럼 쫓아버리는 것이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은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의롭다 함을 얻은 우리의 신분을 변함없이 보장하시는 이유가 어디에 있다고 생각합니까? 그의 앞에 당당하게 나와 기도할 수 있게 하는 데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기도하는 우리를 향해 즐겨 사용하시는 말이 있습니다. 그것을 두 마디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당당하게', '담대하게'. 그러므로 에베소서 3장 12절은 외워두는 것이 크게 도움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그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하나님께 당당히 나아감을 얻느니라."
 
 할렐루야!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기도의 태도가 무엇입니까? 담대하게 구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4장 16절에도 같은 의미의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 4:16).
 
 만일 우리가 은혜의 보좌 앞으로 당당하게 나가서 담대하게 기도할 수 있는 신분상의 보장을 받지 못한다면 기도가 얼마나 힘들고 떨리는 일이 되겠습니까? 황금 덩어리를 들고 와서 하라고 해도 도망갈 것입니다. 누가 거룩하고 두려우신 하나님께 나가기를 좋아하겠습니까?
 구약의 한 사건이 이 사실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다윗 왕에게는 열 명 가까운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서 제일 잘생긴 아들이 압살롬이었습니다. 그는 장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굉장히 잘생겼습니다. 가만히 보면 성경에서는 장자가 잘되는 확률보다 막내가 잘되는 확률이 더 큰 것 같습니다. 왜 그런지 이해하기 어렵지만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다윗이 낳은 아들 중에서도 장자는 아주 흐리멍텅했고 압살롬은 똑똑했습니다. 잘생긴데가 머리도 잘 돌아갔나 봅니다. 그에게 배다른 형이 있었는데 암논이었습니다. 그가 인물이 출중했던 압살롬의 누이동생을 겁탈한 일이 있었습니다. 이 사건 후 압살롬은 항상 원한을 가지고 '이 놈 어디 두고 보자' 하고 기다렸는데 마침 좋은 때가 와서 자기 신하를 시켜서 암논을 쳐 죽여버렸습니다. 그리고 겁이 나니까 이웃 나라 그술 왕에게 도망가서 3년 동안 망명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다윗 왕은 도망간 아들을 은근히 그리워하고 있었습니다. 3년쯤 지나니까 더 보고 싶어져서 간혹 자기 심정을 신하들에게 내비치곤 했습니다. 그러니까 옆에 있던 군대 장관 요압이 눈치를 재고는 사람을 보내서 압살롬을 그술에서 데리고 왔습니다. 군대 장관이 왕에게 왕자 압살롬이 지금 예루살렘에 도착했다고 아뢰었더니 그만 다윗 왕의 마음이 달라져버렸습니다. 형을 죽이고 도망간 놈이라고 생각하니 갑자기 괘씸한 생각이 울컥 치밀어 올랐던 것입니다. "자기 집에 가 있으라 그래. 나는 아직 볼 생각이 없어. 궁전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면 아버지를 뵐 줄 알았던 압살롬에게는 청천벽력과 같은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집에서 매일 처량하게 세월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내일쯤 불러 주실까?' 아무리 기다려도 소식이 없었습니다. 일주일이 지나고 한 달이 지나도 자기더러 오라고 하는 연락이 없었습니다. 반 년이 지나고 일 년이 흘렀지만 아무 기별이 없었습니다. 날마다 아버지가 계시는 왕궁을 쳐다보면서, 언제 내가 아버지 앞에 갈꼬 하며 탄식만 하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2년 가까이 기다리던 압살롬은 어떻게나 화가 나는지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부하들을 시켜 한참 익어가는 요압의 보리밭에다 불을 질러버렸습니다. 요압 장관이 달려와서 '이게 무슨 짓이오?' 하며 왕자한테 달려들었습니다. "아니, 당신이 나를 데리고 왔으면 아버지 얼굴을 뵙게 만들어야지 2년이 지나도록 소식이 없으니 내가 무슨 짓을 못하겠소?" 그랬더니 요압 장관이 들어와서 왕자의 심정을 왕에게 말씀드리고 통촉하시기를 빌었습니다. 그때야 다윗의 마음이 동정으로 바뀌어서 아들을 불러들이고 입을 맞추며 아버지와 아들이 상봉을 했습니다.
 한번 생각해 보세요. 만약에 우리 하나님이 다윗처럼 이랬다 저랬다 하는 분이시면 어떻게 될까요? 다윗처럼 감정이 덜 풀려서 마음이 왔다갔다 하면 우리가 기도할 수 있겠습니까? 어제는 기도하라고 했다가 오늘은 무릎을 꿇고 "하나님 아버지" 하니까 "이놈아, 아버지가 뭐냐?" 라고 호통을 치신다면 어떻게 그 앞에 다시 나갈 수 있겠습니까? 감사합시다. 우리 하나님은 다윗 왕처럼 마음이 왔다갔다 하는 분이 아닙니다. 한 번 믿음으로 의롭다 하고 우리를 잘봐 주시면 끝까지 잘봐 주시는 참 좋으신 아버지가 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당당하게 나가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은 군대 장관 요압처럼 무력하고 무책임한 중보자가 아닙니다. 왕자를 데리고 왔으면 아버지를 뵙도록 끝까지 책임을 져 주어야지 데려다 놓고 2년 동안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우물쭈물하는 그런 중보자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오른팔을 끌고 당당히 아버지 되신 하나님 앞으로 언제든지 데리고 들어갈 수가 있습니다. 우리의 입장은 압살롬처럼 초라하지 않습니다. '언제 불러주실까?' 하고 날마다 기다리고 있는 그런 처지가 아닙니다. 우리가 기도하고 싶다면 언제든지 들어갈 수 있습니다. 당당한 왕자의 걸음걸이로 말입니다.
 캐서린 마샬이라는 유명한 기도의 영웅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가 기도학교에 입학하려면 질문 두 가지에 답을 쓰기만 하면 된다. 첫째는 '네가 꼭 필요한 것이 있느냐?' 하는 것이다. 이 질문에 대해 '예, 있습니다'라고 답을 쓴다. 둘째는 '필요한 것을 네 힘으로 도무지 얻을 수가 없느냐? 네가 그렇게 무력하다고 느끼느냐?' 하는 질문이다. 여기에 대해 '예, 그렇게 느낍니다' 라고 쓰면 된다. 그 다음에는 그 답안지를 들고 당당하게 예수 이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가라."
 옳은 말입니다. 필요한 것이 있을 때마다, 내 힘으로 도무지 해결할 수 없다고 생각할 때마다 당당하게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있는 것이 기도입니다. 그리고 담대하게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우리의 입장입니다. "주여, 좋은 것, 모든 것 주신다고 약속하지 않으셨습니까? 내놓으십시오." 이것이 우리가 기도하는 태도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기도는 구걸 행위가 아닙니다. 기도가 "주여, 믿습니다" 라고 하면서 애걸복걸 통사정하는 것처럼 보이나요? 물론 그렇게 해야 할 경우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구하는 기도 제목이 심각할 때는 자연히 그런 태도가 생깁니다. 그러나 우리가 꼭 명심할 일은 간청하는 기도라고 해서 당당하게 나가서 담대하게 구하는 것과 다르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간청을 할 때에도 우리는 당당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이것을 원하십니다. 자식이 자기 앞에서 비굴해지는 것을 좋아하는 부모가 없듯이 하나님 아버지 역시 그런 모습을 보고 싶어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누구입니까? 예수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한 번 잘봐 주었으면 끝까지 잘봐 주는 것이 우리 아버지입니다. 한 번 사랑한다 했으면 끝까지 사랑하시는 분입니다. 기도할 때마다 모든 것을, 좋은 것을 주시는 하나님 아버지를 잊지 마세요. 무릎 꿇을 때마다 당당하게 담대하게 구하는 것을 소홀히 하지 마십시오. 우리 곁에 항상 예수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기도함으로 하나님의 일을 이루기 때문에
 우리가 당당하게 나가서 담대하게 구할 수 있는 이유가 또 하나 있습니다. 이것은 오늘 본문에는 나타나 있지 않지만 중요한 것입니다. 이렇게 질문을 하면 여러분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기도하지 않았다면 일어날 수 없는 일이 기도하면 일어날 수 있는가?" 만약 그렇다면 하나님의 뜻을 우리가 바꾼다는 이야기가 될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의 뜻을 바꾸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우리가 기도를 열심히 해도 하나님의 그 완전하신 뜻을 변개시킬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 질문에 대해 우리는 주저하지 않고 "그렇습니다"라고 해야 합니다. 기도하지 않았다면 일어날 수 없는 일이 기도하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자기의 뜻을 이 땅 위에 펴시는 방법이 다양하지만 기도를 통해서 자기의 뜻을 펴기를 특히 기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기도하는 것은 그의 뜻을 이루는 일이 됩니다. 하나님의 뜻이 있는데 내가 구함으로써 그 뜻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반대로 내가 구하지 않음으로 그 뜻이 이루어지지 않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당당하게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우리에게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고 기도할 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들이여, 기도하는 자세를 바꾸고 싶지 않습니까? 비굴한 자세에서 당당한 자세로, 애걸복걸하는 자세에서 담대하게 구하는 자세로 바꾸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구하지 아니하면 일어나야 할 일이 일어나지 않을 수 있음을 잊지 마십시오. 반면에 기도하면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 일이 일어난다는 사실을 명심하십시오. 이런 의미에서 기도는 만능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이 하실 수 있는 일이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기도함으로 하나님은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제가 시무하는 교회의 신문에 개척 10년사를 통해서 나누고 싶은 이야기들을 엮어 가는 시리즈가 실린 적이 있었습니다. 제가 그 내용을 읽으면서 많이 웃고 속으로 다시 한 번 감탄을 했습니다. 1979년 3월이면 정말로 교회가 오락가락할 때였습니다. 저녁 집회도 모였다가 못 모였다가, 새벽 기도도 했다가 못했다가, 정말 오락가락했습니다. 앞길이 막막하던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예배 시간이면 제가 자주 제 꿈을 이야기했다는 것입니다. 그 꿈이란 다름이 아니라 교회가 좀더 발전하면 제자훈련 세미나를 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기억이 통 안 나는데 들은 분들의 말이니 거짓이 아니겠지요?
 사실 개척시절부터 아름다운 평신도들을 조금만 훈련을 시키면, 교회 안에서는 참 다양한 분야에서 자기의 역할을 잘 감당할 수 있는 지도자로, 사회에 나가면 예수의 복음을 능력 있게 증거할 수 있는 소명자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이 저의 소신이요, 철학이었습니다. 할 수만 있다면 우리 교회를 통해서 평신도 훈련을 시켜 보고 열매가 좋으면 세미나를 열어서 다른 목사님들과 받은 은혜를 나누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저의 이런 꿈 얘기를 들을 때마다 2부 성가대에 앉아 계시던 이 모 집사님 같은 초창기 멤버들은 좀 삐딱하게 들었는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아무 말 없이 듣고는 있었지만 목사님 과욕이라고 생각했어요. 교회당 월세 내는 것에서나 벗어날 꿈을 꾸시지 하고 생각했어요." 충분히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었다고 봅니다. 매달 몇 십만 원씩 나가는 월세를 힘겨워하고 있었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이 집사님이 한 다음 말이 중요합니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 보면 기도했던 꿈이 이루어졌어요. 그 꿈은 옥 목사님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었다고 보여져요."
 지금 돌이켜 보면 저의 꿈은 하나님의 뜻이었고 그렇기 때문에 놀랍게 응답해 주셨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지난 몇 년 동안 이 세미나를 통해 국내외적으로 수많은 목회자들이 가슴속에 제자훈련 목회 철학의 불을 지피는 데 큰 몫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세요. 너무나 크고 광대한 하나님의 일 가운데 제자훈련의 꿈은 아주 사소한 것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주 작은 분야지만 제가 이 꿈을 가지고 기도 안 했다면, 교회가 기도하지 않았다면, 이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요'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기도하지 않는 사람을 제일 이상히 여기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아들을 보고 "무엇이든지 좋은 것은 다 줄 테니 언제든지 아쉬우면 아빠를 부르거라"고 했는데 문 밖에 어른거리지도 않고 고생만 지지리 하고 있다면 아버지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이 자기 고향 나사렛에 갔을 때에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며칠 전에 야이로라는 사람의 딸을 살리셨다는 소문이 떠들썩하게 퍼져 있고 열두 해나 혈루병으로 앓던 여자가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져서 나았다는 이야기가 전염병처럼 퍼져 있었는데 나사렛의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일을 도무지 할 수가 없었습니다. 마가복음 6장 6절을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저희의 믿지 않음을 이상히 여기셨더라."
 
 오늘도 기도 잘 안 하고 밖에서 기웃기웃 하기만 하는 교인을 보고 주님은 이상하다고 생각하실 것입니다. 대궐 안에만 들어가면 우리 하나님 아버지가 계십니다.
 
 "천지에 있는 것이 다 주의 것이로소이다"(대상 29:11).
 
 우리가 좋아하는 부(富)와 귀(貴)를 다 가지고 계시는 우리 아버지가 계십니다.
 
 "여호와께 능치 못한 일이 있겠느냐"(창 18:14).
 
 무엇이나 마음만 다 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 거기 계십니다.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빌 4:19).
 
 우리의 필요한 것을 언제든지 공급해 주시고 채워 주시는 우리 아버지가 거기 계십니다. 들어가서 구하기만 하면 무엇이든지 주시고 좋은 것 주기로 약속하신 아버지가 계십니다. 그런데 왜 잘 안 들어가는 것입니까? 기도에 게으른 분들은 자신이 정상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기도의 응답은 항상 돌이 아니고 떡이라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1년 동안 열심히 자식을 위해서 기도했고 공부하는 아이도 열심히 기도했는데 대학 시험에 낙방했습니다. 떡입니까, 돌입니까? 기도하는 사람은 주저하지 않고 말할 수 있습니다. "떡입니다" 라고 말입니다. 열심히 1년 동안 기도하면서 준비하고 시험쳤는데 떨어졌다면 그것은 떡이지 돌이 아닙니다.
 우리 하나님이 언제 돌이나 뱀을 주신다고 하신 일이 있습니까? 대학에 합격하는 것이 인생을 좌우하는 것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 끝을 놓고 보시지 한치 앞을 보시는 것 아니지 않습니까? 낙방한 아이가 한 생을 살면서 알게 될 때가 올 것입니다. "그때 낙방했던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구나. 하나님은 나에게 돌이 아니라 떡을 주셨구나."
 예수 안 믿는 남편을 위해서 날마다 기도하고 있는데 남편한테 좋지 않은 일만 자꾸 일어납니다. 그러면 남편의 일은 기도의 응답으로 주시는 하나님의 떡이라는 것을 믿으면 됩니다. 하나님이 분명히 좋은 것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우리가 열심히 기도해서 나타난 결과는 무조건 좋은 것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런 자를 하나님이 사랑하십니다.
 그러므로 담대히 들어가서 구합시다. 구하지 아니해서 일어나지 않는 것은 내 탓이요, 구하지 아니해서 뱀을 얻었거나 돌을 얻은 것은 내 탓이요, 구하지아니해서 손해 보는 것도 내 탓입니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요"(약 4:2).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롬 5:2).
 
 그렇습니다. 들어감을 얻은 기도의 특권, 우리가 지금 서 있는 이 은혜를 힘입고 당당하게 들어가 담대하게 구해서 무엇이나 좋은 것을 누릴 수 있는 이 특권을 팥죽 한 그릇에 팔아 넘기지 마시기 바랍니다.

 

출처 : 나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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