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을 진정으로 만난 사람 (눅 19:1-10)
오직 예수!
오늘도 이렇게 만남의 광장으로 모여 오신 여러분께 축하를 드립니다. 만남은 인생의 기본 요소이면서, 동시에 가장 중요한 요소입니다.
사람은 혼자 살 수 없는 존재입니다. 사람을 가리켜 ‘사회적 동물’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사람은 누군가를 만나야 하고 누군가와 대화하며 살아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어떤 사람을 만나고 어떤 영향을 주고 받느냐 하는 것입니다. 진실한 사람을 만나야 합니다. 인생의 가치를 높일 줄 아는 사람, 사랑이 있고, 섬김을 보여줄 줄 아는 사람, 거룩과 경건의 모범을 보이는 사람 -- 나를 부요하게 할 수 있는 사람을 만나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참으로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만날 수 있는 최고, 최선의 상대인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사람들입니다.
진정한 자유를 주시는 분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사람들입니다.
사랑과 섬김을 몸소 실천하신 분이신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입니다.
오늘 본문에도 예수님을 진정으로 만나게 된 한 사람의 이야기가 꾸밈없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는 여리고 세관의 세관장 삭개오입니다. 예수님을 얼굴이라도 보기 위해 뽕나무 위에 올라갔던 인물입니다. 예수께서 그의 마음과 그의 열심을 보시고 오히려 그의 집으로 가셨고, 마침내 삭개오는 예수님을 진정으로 만나게 되었습니다.
9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주님은 삭개오의 구원을 공개적으로 천명하셨습니다. 무의미했던 삭개오의 인생에 엄청난 변화가 왔습니다. 이로써 주님을 진정으로 만난 삭개오는 세상의 방황하는 모든 인생들이 지향하는 목표가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과의 진정한 만남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살펴보기를 바랍니다.
어떤 사람이 주님의 찾아오심을 경험하게 됩니까? 예수님을 진정으로 만난 사람은 과연 어떤 사람입니까?
1. 삶에 대한 갈증이 있는 사람
삭개오는 인생의 허무함을 깨닫고, 보다 가치 있는 삶에 대한 갈증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여리고의 세관장이었습니다. 당시 여리고는 세금을 거두는 관리들이 상주하면서, 요단 강 동편 지역에서 유대 땅으로 들어오는 물품에 대해 통관세를 받는 일을 하였던 곳입니다. 삭개오는 그곳의 우두머리였습니다.
2절, “삭개오라 이름하는 자가 있으니 세리장이요 또한 부자라”
그는 ‘부자’였습니다. ‘부자’라는 표현을 의도적으로 하고 있는 것은 당시 유대인 대부분이 식민 생활로 가난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그의 재산은 아주 많았고, 이는 그가 부정직한 방법으로 부(富)를 축적하였음을 짐작케 합니다.
삭개오가 부자라는 사실은 앞선 18장에 나오는 부자청년의 이야기에서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어렵다는 예수님의 말씀에, 듣고 있던 자들이 그러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느냐고 한 질문과 연결되고 있습니다.
삭개오는 부자 청년과는 달리 예수님을 만나 전인격적인 회개를 함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삭개오의 이름이 ‘순결’(pure)이라는 것이 얼마나 아이러니칼 합니까? 그의 부모는 아들이 깨끗하고 의로운 자가 되라는 뜻으로 이런 이름을 붙였지만, 그는 오히려 순결하지 못했습니다.
당시 세리들은 ‘허가받은 도둑’으로 불리고 있었습니다. 로마제국의 힘을 등에 업고 자기들 멋대로 세금을 정하여 백성들의 재산을 착취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세리를 매국노와 창기에 버금가는 죄인으로 취급했습니다.
삭개오는 학대받고 착취당하는 자기 민족과 함께 고난받는 삶을 살기보다는 차라리 손가락질을 받더라도 사리사욕을 위해 동족의 피를 빨아먹는 세리의 길을 택했고, 세리장까지 된 것입니다.
돈만 많으면 행복해 질 줄 알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부자는 되었지만 모든 것을 잃어버린 불행한 자가 되었습니다.
자신의 양심을 잃어버렸습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리고 이웃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는 언제나 죄인으로 지목을 받았고 사람들의 기피 대상이었습니다. 그러니 그가 얼마나 외로움을 느꼈겠습니까? 때문에 그는 주님께서 자기 집에 유하겠다고 하셨을 때(5절) 그토록 기뻐한 것입니다.
불의한 재물만 좇던 삭개오는 결코 행복할 수가 없었습니다. 진정한 친구도 사귈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질 수밖에 없었고, 자기 양심이 상실된 상태로 살 수 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그는 자기 삶에 대한 허무와 갈증을 느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능력의 한계를 분명히 체험했습니다. 새로운 출발을 향한 갈증으로 가득했습니다. 새로운 가능성을 받아들일 준비가 된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삭개오는 자신의 삶의 허무와 갈증으로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을 만나야겠다고 결심합니다. 고독과 목마름을 해결하는 길은 예수님 밖에 없음을 절감합니다.
그는 이미 그리스도께서 세리와 죄인들을 사랑으로 대해 주신다는 소문을 들었을 것입니다. 또 세리인 마태를 제자로 삼았다는 소문도 들었을 것입니다. 그에게는 주님께 나아가 사죄의 은총을 받고자 하는 마음의 소원이 강하게 일고 있었습니다.
3절에서 “저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보고자 하되··· ” 라고 한 것은 삭개오가 구원받고 싶은 열망을 가지고 능동적으로 “계속해서 찾고 있었다”는 의미입니다.
여러분, 이와같은 마음의 의지와 주님께 대한 열망은 하나님이 주신 축복입니다. 아무에게나 그러한 의지와 마음이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빌 2:13에서 사도바울은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성령의 감화로 삭개오의 마음에 주님 뵙기를 열망하는 의지를 주신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떠합니까? 궁극적 행복에 대한 이러한 갈증을 느끼고 있습니까?
물질이나 세상의 권력, 명예 같은 것은 우리의 궁극적 갈증을 해결해 줄 수 없습니다. 이것들은 추구하면 할수록 우리의 영혼을 더욱 갈급하게 할 뿐입니다.
나의 인생에 대한 철저한 점검이 필요합니다. 내 영혼의 목마름을 채워 주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은 예수 그리스도, 오직 주님 한 분 뿐입니다.
고갈된 영혼을 생수로 채움받기 위해 주님께로 나아오십시오. 주님은 누구든지 자신의 삶에 대한 갈증을 가진 자들을 만나 주시는 분이십니다. 할렐루야!
2. 주님을 만나고자 하는 용기가 있는 사람
본문의 삭개오는 예수님을 만나기 위하여 놀랄만한 용기를 보여주었습니다. 주님을 진정으로 만나려면 이런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그가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넘어야 할 산이 많았습니다. 예수님 주위에는 사람들이 많았고, 그는 작은 키 때문에 예수님 얼굴조차 보지 못할 상황이었습니다. 그는 아마 키가 아주 작은 난쟁이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러자 그는 기상천외의 방법을 택했습니다.
3절, “저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 수 없어”
4절, “앞으로 달려가 보기 위하여 뽕나무에 올라가니 이는 예수께서 그리로 지나가시게 됨이러라”
세리장쯤 되는 사람이 뽕나무 위에 올라갔다는 것은 굉장히 용기 있는 결단을 의미합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보고 비웃었겠습니까?
사람들의 눈에 공개적으로 띄어서 부끄럽고, 작은 키가 더욱 드러나게 되어서 챙피하고, 죄인 주제에 예수님을 보고 싶어한다고 또 놀렸을 것입니다. 이래저래 그는 큰 용기를 내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체면 때문에 손해를 볼 때가 많습니다.
주님을 진정으로 만나기 원한다면 체면을 버려야 합니다. 때로는 자존심을 버려야 합니다. 순수하고 솔직한 마음으로 주님 앞에 나아와야 합니다. 사모하는 마음으로 주님께 나아와야 합니다. 어린아이처럼 나아와야 합니다.
마 19:14,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린 아이들을 용납하고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 천국이 이런 자의 것이니라...”
성경에 보면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은 한결같이 간절히 사모하는 용기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소경 바디매오가 어떻게 눈을 뜨게 되었습니까? 그는 눈을 뜨기 위해 간절히 부르짖었습니다.
혈루병 여인이 어떻게 병고침 받았습니까? 그녀는 병 낫기를 간절히 사모하여 용기있게 주님의 옷자락을 만졌습니다.
문둥병자들이 어떻게 고침을 받았습니까? 정결함을 받기 위해 용기를 내어 주님께 나아갔습니다. 그때 깨끗이 고침받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어린아이와 같은 믿음입니다. 체면과 자존심을 버린 용기입니다. 오직 주님을 위한 간절한 소망이 있었던 것입니다.
주님을 만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바로 용기입니다. 체면과 부끄러움을 잊어버리고 오직 주님을 향해 담대히 나아가는 용기입니다. 순수하고 간절한 마음으로 주님께 부르짖는 것입니다.
삭개오는 주님을 만나고자 하는 진정한 용기를 갖고 있었습니다. 수모가 있어도, 조롱의 소리가 들려와도, 자존심이 상할지라도 먼 발치에서라도 주님을 꼭 만나보고 싶었습니다.
여러분, 주님은 삭개오의 이 마음과 용기를 보셨습니다. 주님은 눈을 들어 고독함과 외로움과 갈증에 찌들어 있던 삭개오, 뽕나무 위에서 처절한 마음으로 주님을 바라보는 삭개오를 보셨습니다.
5절, “예수께서 그곳에 이르사 우러러 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
본절의 주어는 예수님입니다. 앞 절의 주어는 삭개오였으나 이제 주어가 바뀌고 있습니다. 원래는 삭개오가 예수님을 보기 위하여 뽕나무 위에로 올라갔으나, 본 절은 오히려 예수께서 삭개오를 보신 것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보고자 하는 자를 보시며 자신을 찾는 자를 찾으시는 분이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주님의 이같은 초청을 받아본 적이 있습니까? 주님의 은혜는 이처럼 어려운 여건에 있는 분들에게 주어지는 것을 기억합시다.
주님을 만나고자 하는 간절함과 용기를 회복하는 성도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자기 것을 포기하는 결단의 용기를 가진 사람
자기의 소유를 포기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여기에는 대단한 용기가 필요합니다.
한 유대인 상인의 죽음이 임박해지자 온 가족이 모였습니다.
"여보, 당신 내 곁에 있소?"
"예, 당신 곁에 있어요." 부인이 대답합니다.
"베니도 있나?" 장남에게 묻습니다. "예, 아버님."
"라헬도?" 딸도 찾습니다.
"예, 아버님, 저 아버님 발치에 서 있어요."
"셈, 막내도 여기 왔니?"
"예, 아빠." 막내는 울먹이며 말합니다.
그런데 갑자기 죽어가던 아버지가 벌떡 몸을 일으키면서 화난 듯 말합니다.
“그러면 도대체 가게는 누가 지키고 있단 말이냐?“
헌트에게는 사랑하는 여인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녀의 아버지는 헌트가 가난하다는 이유로 결혼을 반대했습니다. 그래도 헌트가 포기하지 않자 그를 떼어놓을 생각으로 이런 조건을 내놓았습니다.
"열흘 안에 자네가 정당한 수단으로 만 달러를 벌어오면 결혼을 허락하겠네."
그런 큰돈이 있을 리 없는 헌트는 눈앞이 캄캄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자신의 발명품을 떠올렸습니다. 큰 행사가 있을 때마다 가슴에 꽃을 꽃았는데 일자형 핀으로 꽃을 꽃으면 번번이 떨어지곤 했습니다. 곰곰이 생각하던 그는 철사를 구부린 모양의 핀을 생각해 냈습니다. 그것이 클립의 원형이었습니다.
헌트는 재빨리 꽃집으로 달려가 자신의 발명품을 만 달러에 사달라고 했습니다. 꽃집 주인은 말했습니다.
"지금 오천 달러를 받고 앞으로 판매액의 3퍼센트를 받는 게 어떻겠어? 내 말대로 한다면 분명히 큰 부자가 될 거야."
"아닙니다. 한꺼번에 만 달러를 주십시오."
그리고 생각했습니다. '오늘 중으로만 달러가 없으면 그녀와 결혼할 수 없다. 그녀가 없으면 아무리 돈이 많다고 해도 무슨 소용인가?'
그는 결국 사랑하는 여인을 선택했고 곧 그녀와 결혼할 수 있었습니다. 헌트가 발명한 핀은 전 세계로 퍼졌고 그 덕에 꽃집 주인은 큰 부자가 되었습니다.
나중에 이 사실 을 알게 된 아내가 헌트의 경솔함을 나무랐습니다. 하지만 헌트는 빙그레 웃으며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는 비록 부자는 못되었지만 그 누구보다도 행복해요. 돈 대신 사랑하는 당신을 얻었으니까요."
우리에게는 소중한 것을 볼 수 있는 눈과 그것을 위해 다른 모든 것을 포기 할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자랑해야 할 가장 소중한 면류관은 나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신 주님이십니다.
우리의 삭개오는 주님을 자신의 집에 모신 영광스러움에 감격했고, 의의 태양이신 주님 앞에서 자신의 초라한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것을 포기하는 결단을 내렸습니다.
8절,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배나 갚겠나이다”
평생 자신의 것만을 위해 살아왔던 욕심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이웃이 굶주리든 말든 개의치 않던 그였습니다. 누군가 눈물로 애원해도 세금을 한푼도 안 깎아주던 사람이었습니다. 오히려 껍질까지 벗겨 남의 것을 토색하던 삭개오였습니다. 그런데 그가 주님 앞에 서서 고백합니다. 겸손한 자세입니다.
“내 소유의 절반을 나누어주겠습니다.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4배나 갚겠습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고백입니까? 얼마나 극적인 변화입니까? 얼마나 적극적인 결단입니까?
당시 랍비들이 가르치던 가난한 자들에 관한 적당한 구제 비용은 소유나 소득의 20% 였습니다. 그러나 삭개오는 재산의 절반을 구제하는 데 쓰겠다는 파격적인 결단을 한 것입니다.
또 그는 불의하게 세금을 책정하여 사람들의 재산을 도적질한 것에 대하여는 네 배로 갚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율법에는 부당하게 남의 것을 취하였을 때는 그것의 5분의 1만을 더 보태어 배상하면 되는데도 도적질한 양을 잡거나 팔았을 경우 배상하는 율법을 적용하여 네 배로 갚겠다고 한 것입니다.
이같은 그의 태도는 스스로를 예수님과 사람들 앞에 도둑이라 고백하고 용서받기를 원하는 그의 마음을 잘 대변해주고 있습니다.
삭개오는 그동안 이웃을 갈취의 대상으로 여겼던 사람이었지만 지금은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불의한 세리장에서 의로운 주님의 제자로 변화된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무엇이 이 사람으로 하여금 사랑과 의의 사람으로 변화되게 했을까요? 그것은 바로 주님의 사랑이었습니다.
남들이 죄인 중의 죄인으로 조롱하던 자기를 주님은 사랑으로 대해 주셨습니다. 죄인의 집까지 찾아와 묵으셨습니다.
삭개오는 의의 태양이신 주님의 찬란한 빛에 비추어진 자신의 죄투성이의 모습을 발견했습니다. 도적 중의 도적이었습니다. 지금까지는 자신이 그렇게 교활하고 이기적인 사람인지 몰랐습니다.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을 받을 때마다 자신을 향한 질투쯤으로 알고 넘어가던 그였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사랑의 빛에 비추어진 자신의 모습은 추하고 추한 모습이었습니다. 주님은 이런 자기를 아무런 선입견 없이 받아주셨고, 사랑해 주신 것입니다. 이제 삭개오는 진실된 회개를 경험하게 됩니다.
여러분, 죄 없으신 주님과 죄로 물든 우리 인간과의 만남은 필연적으로 더러워진 인간의 자아 발견과 회개를 가져 옵니다. 그리고 주님 안에서 자신의 죄인됨과 불완전함을 발견하여 회개한 자는 하나님과의 수직적인 관계를 회복함은 물론, 이웃과의 수평적 관계도 회복하게 됩니다.
주님의 사랑에 감동한 삭개오는 이처럼 평생을 좇아 왔던 물질을 주님 앞에서 과감하게 포기했습니다. 그 순간 그는 이제껏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인생의 의미를 얻게 되었습니다. 참 행복을 얻게 된 것입니다. 이 사실을 예수님께서 친히 선언해 주셨습니다.
9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개념은 천국을 보장받은 자라는 뜻입니다(눅 16:22,23).
평생 물질만을 추구해 왔던 삭개오는 자신의 것을 포기하면서 주님과의 진정한 만남을 누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결 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주님을 진정으로 만나셨습니까?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하시는 주님의 선언을 들어보셨습니까?
주님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시는 일에 온 힘을 쏟고 계십니다. 주님은 잃어버린 자를 만나고 싶어 하십니다. 주님은 지금도 제2, 제3의 삭개오를 찾고 계십니다.
주님을 진정으로 만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먼저 갈증을 가지고 주님과의 만남을 간절히 소망해야 합니다.
용기를 내어 주님께로 나아가야 합니다. 이를 위해 체면이나 스타일을 구기는 일 따위에 개념치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것을 포기하는 결단을 내려야 합니다. 자기를 포기하고, 세상에 대한 집착을 포기해야 합니다.
그 순간 쏟아지는 했빛처럼 무한한 기쁨을 얻게 될 것입니다. 무한한 자유를 체험하게 될 것이고, 진정한 행복을 소유하게 될 것입니다.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세상적인 성취로는 아무 것도 얻을 수가 없습니다.
삭개오처럼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결단하십시다. 주님은 우리의 생애에 가장 큰 행복으로 함께 해 주실 것입니다.
출처/박순오목사 설교자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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