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병이어 현장에서의 예수님 (요 6:1-15)
오직 예수! 우리 주님은 기적을 행하시는 능력을 가지신 분이십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가 익히 아는 오병이어 기적의 현장을 묘사하고 있는 부분입니다. 이것은 요한복음에 나오는 일곱 가지 표적(Seven Signs) 중 네 번 째 표적에 해당하는 기사입니다.
요한복음은 공관복음서인 마태·마가·누가 복음이 사건을 서술하는 방식과는 달리, 중요한 표적 사건을 언급한 후 그와 연관된 영적 진리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오늘의 요한복음 6장은 오병이어로 장정 오천 명을 먹이신 이적 사건을 상세히 기술한 후 그와 연관된 ‘생명의 떡’ 설교를 보도하고 있습니다.
때는 A.D. 29년 4월경, 유월절 절기가 가까운 때였습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기간동안 해마다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올라가셨으나, 이 해에는 올라가지 않으셨는데, 그것은 28년 유월절에 자신에 대해 유대인들 사이에 적대적 분위기가 여전하다는 것을 고려한 때문으로 보입니다. 하나님의 때가 오기 전에는 유대인들과 전면적인 충돌을 원치 않으신 것 같습니다.
저자 요한이 오병이어의 사건을 기록하면서 그 시기가 유월절이 가까운 때임을 밝히는 것은(4절) 예수님께서 인류의 죄를 구속할 유월절 어린 양으로서 살을 찢기신 사실을 자연스럽게 연상시켜주고 있습니다.
이 오병이어 이적 사건은 예수님의 갈릴리 사역의 정점을 이루고 있습니다. 주님은 유대와 예루살렘에서는 배척을 받으셨지만, 갈릴리 지역에서는 비교적 많은 무리들의 환영과 추종을 받으셨는데, 본문에서는 예수님의 기적을 체험한 무리들이 예수님을 왕으로 옹립하려고 할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이 기적을 경험한 무리들에게 이적의 원래의 영적 의미인 ‘생명의 떡’에 관해 말씀하셨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이 실망하고 떠나게 되었는데, 그 이유는 22절 이하의 문단에서 보도하는 대로 ‘예수님이 생명의 떡이시다’는 것에 관하여 무리들이 받아들이기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6장이 우리에게 던져주는 교훈은 명백합니다. 곧 물질적 욕구를 충족시키려는 동기를 가지고 예수께 나아와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물질에의 욕구가 예수님을 따르는 동기가 된다면, 떡을 먹고 배부른 무리처럼 잠시는 만족할 수 잇습니다. 상당 기간 예수님께 호의를 가지고 따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동기가 변하지 않는다면 결국 걸려 넘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고자 하시는 가장 귀한 선물은 무엇입니까? ‘영생’입니다. 그리고 그 영생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생명의 떡이신 예수를 ‘믿음으로’ 먹고 마시기를 힘써야 합니다.
이 시간 본문을 통하여 이 예수님께서 오병이어의 현장에서 어떤 마음으로 어떻게 무리들을 복주셨는가를 살펴보겠습니다. 그때의 주님은 지금도 동일한 마음과 동일한 모습으로 주를 따르는 자들에게 풍성한 복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1. 무리를 보시고 연민의 정을 가지심
5절, “예수께서 눈을 들어 큰 무리가 자기에게로 오는 것을 보시고 빌립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로 먹게 하겠느냐 하시니”
예수님은 자신을 따라온 많은 사람들에게 긍휼한 마음을 가지셨습니다. 그들의 정신적인 황폐함과 영적인 방황의 모습을 안타까이 여기셨을 뿐 아니라, 육신적인 배고픔에도 연민의 정을 가지셨습니다.
예수님은 무리가 나아오는 것을 ‘눈을 들어’ 보셨습니다. 내용 전달만을 위해서는 굳이 ‘눈을 들어’ 라는 표현은 필요 없습니다. ‘보시고’ 라는 단어로도 충분히 의미전달이 가능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표현을 사용한 것은 예수님의 지극한 관심을 나타내 보여 주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은 ‘눈을 들어’ 큰 무리가 자기에게로 오는 것을 보셨습니다. 이 말은 마치 목자 없는 양 같은 불쌍한 무리들을(막 6:34) 측은히 여기시는 예수님의 눈망울을 연상케 합니다. 주님은 무리들에게 말할 수 없는 연민의 정을 가지셨습니다.
5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눈을 들어 큰 무리가 자기에게로 오는 것을 보시고 빌립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로 먹게 하겠느냐 하시니”
물론 빌립을 테스트하시기 위해 하신 말씀이지만, 주님이 큰 무리의 식사를 걱정하신 이유는 마태복음의 기록처럼 ‘그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 즉 ‘긍휼’ 이었습니다(마 14:14). 제자들은 사람들을 마을로 보내서 각자 이 문제를 해결하자고 제안하였지만(마 14:15), 무리의 형편을 잘 아시는 주님께서는 친히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셨습니다.
오늘도 우리 예수님은 늘 긍휼의 눈으로 우리를 바라보시며, 동일하게 역사하십니다.
우리의 삶의 모습이 주님의 눈에 흡족해서입니까? 우리의 경건이 주님의 마음을 감동시킬 수준입니까? 아닐 것입니다.
당시 무리들의 모습도 사실은 만족스런 상태는 아니었습니다. 주님은 무리의 속마음을 꿰뚫어보고 있었습니다. 무리들이 예수께로 나아온 목적, 그리고 결국은 이들이 떠나고 말 것을 환히 알고 계셨습니다. 어쩌면 이들은 정작 자신들의 마음을 몰라도 예수님은 이들의 마음을 꿰뚫고 계셨습니다. 주님은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다 알고 계셨습니다(요 2:25).
그런데도 예수님은 그들을 정죄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그들을 먹일 생각부터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예수님의 마음은 정죄하고 심판하기보다는 이해하고 용납하고 기다리는 마음입니다.
마 9:13,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성도 여러분! 그러므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이러한 주님의 관용의 마음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감격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관용의 마음을 품어 우리의 이웃을 향해 정죄하지 아니하고 사랑으로 감싸주는 것입니다. 긍휼의 영으로 무장하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오병이어의 작은 헌신을 받으심
본문에 나타난 가장 감동적인 장면은 예수님께서 한 아이가 바친 작은 헌신을 기쁘게 받으시는 모습입니다. 이 장면을 살펴봅시다.
예수님과 빌립의 대화가 한창 무르익고 있을 때 제자 안드레가 나섰습니다.
9절,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졌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삽나이까?”
예수님께서 ‘어디서’ 떡을 구할 것인가를 질문하셨을 때, 안드레는 ‘여기’ 라고 하면서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져왔습니다. 그것은 부끄럽게도 한 소년이 가져온 것이었습니다.
덧붙인 안드레의 말을 들어보십시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삽나이까?”
안드레는 오병이어가 장정만 5천명이나 되는 군중들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이 작은 도시락이 기적의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기적은 우리 주님께서 이 작은 헌신을 기쁘게 받으심으로 시작되었습니다. 문제 해결의 실마리는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주님의 손에 들려지면 놀라운 역사가 이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기적은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우리 성도들을 통하여 일어나는 것입니다.
같은 사건을 기록하고 있는 마가복음에는,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에게 떡 몇 개나 있느냐 가서 보라”(막 6:38) 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는 하늘로부터 떡이 떨어지도록 하는 능력도 있으셨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아무리 작은 것이라 하더라도 그들이 현재 가지고 있는 것을 통해 이적을 베푸시기를 원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오늘도 기적을 베푸시기 전에 우리에게 요구하십니다.
“현재 네게 있는 것이 무엇이냐? 그것을 가져오라.”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종종 이런 생각을 가지지 않습니까? ‘지금은 가진 것이 없으니 장차 벌어서 가지고 가겠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에게 내일 가지고 오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장차 성공해서 가지고 오라고 하지도 않으십니다.
현재 있는 모습 그대로, 현재 가진 그것을 가지고 꾸밈없이 있는 그대로 나오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선지자 엘리야 시대의 시돈 땅 사르밧 과부의 이야기를 알고 있습니다. 가뭄으로 극심한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하나님의 사람 엘리야는 그 과부에게 떡을 가져오라고 했습니다. 여인이 대답합니다.
왕상 17:12,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나는 떡이 없고 다만 통에 가루 한 움큼과 병에 기름 조금 뿐이라 내가 나무가지 두엇을 주워다가 나와 내 아들을 위하여 음식을 만들어 먹고 그 후에는 죽으리라”
마지막 남은 밀가루로 음식을 해서 먹고 나면 죽을 수밖에 없는 처지였습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선지자의 말에 순종하여 떡을 만들어 그에게 대접했습니다.
그 결과가 어떠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3년여 동안 통에 가루가 떨어지지 않도록, 병에 기름이 마르지 않도록 기적을 베푸셨습니다.
사르밧 과부는 현재 가지고 있는 작은 것으로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하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도 현재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하나님께 먼저 드려야 하겠습니다. 비록 작은 것이라도 주님의 손에 옮겨놓을 때 기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테레사 수녀가 고아원을 세울 때 몇 루피(Indian Rupee)의 적은 돈 밖에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비웃었습니다. 그때 그녀는 확신을 가지고 말했습니다.
“테레사와 이 적은 돈으로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만일 하나님께 테레사와 이 적은 물질만 드리면 하나님은 못하실 것이 없읍니다.”
그는 적은 돈으로 수많은 고아들을 먹이고 보살폈습니다. 결국 노벨 평화상을 받은 세계적으로 존경받는 분이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소년의 도시락을 받으신 주님은 우리의 작은 헌신이라도 기쁘게 받으십니다. 2000년전 벳새다 광야에서 행하시던 주님의 권능은 지금도 역사하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여러분의 물질, 시간, 재능, 건강 등 어떤 것이든 주님의 손에 드리십시오. 주님은 그것을 통해 엄청난 일을 이루실 것입니다.
3. 모두에게 나누어질 수 있도록 차고 넘치게 하심
주님은 작은 것으로 엄청난 기적을 베푸셨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배불리 먹고도 열 두 바구니에 찰 정도였습니다.
이제 다시 본문의 이야기로 돌아갑시다. 소년의 작은 헌신을 받으신 주님은 이적을 베푸시기 전에 먼저 사람들을 무리지어 앉도록 하셨습니다.
10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 사람들로 앉게 하라 하신대 그 곳에 잔디가 많은지라 사람들이 앉으니 수효가 오천쯤 되더라”
마가의 기록에 의하면 혹 백씩, 혹 오십씩 앉았다고 하였습니다(막 6:40). 즉 질서 정연하게 앉은 것입니다. 혼란 가운데서 이리저리 떡을 떼는 가운데 배불리 먹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이 앞 다투어 자기의 배를 불리지 않았습니다.
11절, “예수께서 떡을 가져 축사하신 후에 앉은 자들에게 나눠 주시고 고기도 그렇게 저희의 원대로 주시다.”
이처럼 엄청난 사건을 매우 단순하면서도 꾸밈없이 간략하게 기술하고 있습니다. 2만 명 가까이 되는 대 군중을 앞에 놓고, 주님은 겨우 떡 다섯 개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이 장면만을 놓고 본다면 한편의 코미디와 같은 상황입니다. 사람들을 질서 정연하게 앉힌 다음에 이 무슨 웃기는 모습입니까?
그러나 예수님의 감사에는 진지함이 있고, 진실이 담겨 있습니다. 주님은 소년의 믿음을 크게 보셨습니다. 고가의 향유만이 귀한 것이 아닙니다. 이처럼 가난한 사람이 먹는 한 끼 식사 정도라도 주님의 마음을 감동시킬 수 있고, 주님의 능력을 불러올 수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 예수께서 오병이어를 들고 축사하셨을 때 그것이 갑자기 불어나서 산더미처럼 쌓인 것은 아닙니다. 감사하신 이후에도 여전히 오병이어였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에게 나눠주시고, 제자들이 군중에게 나눠주고, 군중들이 옆 사람에게 나눠줄 때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나눠줄 때마다 불어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모여든 모든 사람들, 아마도 2만 명은 족히 되었을 엄청난 군중들이 배불리 먹게 될 정도로 흡족히 불어났습니다.
성도 여러분! 주님의 능력을 보십시오. 주님께는 능치 못함이 없습니다. 주님은 모두에게 나누어질 수 있도록 풍성히 채워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풍성하게 받아 누리지 못하는 것은 무슨 이유입니까?
그 이유는 오직 하나,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믿어야 합니다.
막 11:24,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요 15:7,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놀라운 약속입니다. 우리에게는 믿음으로 구하기만 하면 얼마든지 이루어주시고자 하시는 주님이 계십니다. 우리가 풍성한 삶을 누리지 못하는 것은 우리가 믿음으로 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풍성한 은혜는 남은 조각을 담은 열 두 바구니를 통하여 드러납니다.
12절, “저희가 배부른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남은 조각을 거두고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 하시므로, 이에 거두니 보리떡 다섯 개로 먹고 남은 조각이 열 두 바구니에 찼더라”
성도 여러분! 오병이어의 사건 속에 숨어 있는 위대한 영적 진리가 보이십니까? 무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떡과 생선을 배불리 먹이신 주님의 의도가 단순히 음식 문제로 그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주님 자신이 우리의 영혼을 먹이는 생명의 떡이 되심을 보여주는 것이 주님의 뜻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모여든 무리들에게 직접 이것을 가르치셨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깁시다.
26절,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27절,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35절,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54, 55절,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56절,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
우리 예수님은 생명의 떡이십니다. 주님께 나아가는 자, 주님을 믿고 주님을 섬기는 자는 참된 양식을 찾은 사람입니다. 오병이어의 물리적인 기적을 일으키신 주님의 능력도 대단한 것이지만,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는 ‘생명의 떡’ 되신 주님 자신은 기적 중의 기적이 되십니다.
옛날 한나라 무제는 장생불사를 위하여 승로반에 찬 이슬을 받아 마셨다고 합니다. 진나라 시황제는 늙지 않고 죽지 않는 불로초를 구하기 위하여 동방 삼신산인 금강산에 동남동녀 500명을 보냈다고 합니다.
그런데 사람을 보냈지만 구했다는 말이 없습니다. 물론 먹고 불로장생했다는 말도 없습니다. 앞으로도 금강산에서 불로초는 찾지 못할 것입니다. 세상 사람은 어리석어 불로장생 하려고는 하지만 영생하는 법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늙지 않는 풀을 얻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죽지 않는 법을 얻습니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영원한 생명을 주십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생명의 종교이며 부활의 종교입니다. 죽지 않는 법을 아는 이가 진정 행복한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병이어의 현장에서 보여주신 예수님의 모습은 우리의 주님 되시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주님은 세상에서 영적 싸움을 싸우는 주님의 백성들에게 한없는 연민의 정을 갖고 계십니다. 우리의 부족과 허물을 관용하시면서 우리를 먹이시기 위하여 애쓰시는 주님께 더욱 감사하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우리가 가진 것이 비록 작고 보잘것 없는 것이라 할지라도 우리가 믿음으로 헌신할 때에 이를 기쁘게 받으시고, 이를 통하여 엄청난 기적을 일으키시는 분이십니다.
주님은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시되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여 얼마든지 풍족하게 채워주시는 분이십니다. 갈보리 십자가에서 온 인류의 죄 값을 모두 치루시고, 이제 주께로 나오는 모든 자들을 마음껏 자유케 하시고 주 안에서 풍성한 삶을 누리게 하십니다. 우리의 믿음은 이 주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믿음이어야 합니다.
위대하신 주님! 너무나 멋진 주님! 백성들이 흥분하여 그를 왕으로 옹립하려 할 때 모든 인간적인 영광을 뒤로하고 홀로 외롭게 떠나가시던 주님!
이 주님 앞에 우리의 모든 것을 내려놓으시기 바랍니다.
이 주님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라도 내어놓을 수 있는 믿음을 키우시기 바랍니다.
이 주님의 살과 피에 동참하여 우리의 영혼을 살찌우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 주님을 위해서라면 죽기까지 따를 수 있는 용기를 가지는 성도 여러분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출처/박순오목사 설교자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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